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9화 (9/877)

환자는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왔다.

한 시간 동안 능연은 7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그 사이에 주 선생의 지도대로 몇백 위안 어치 약 처방도 내렸다.

퀘스트 진행도가 (10/10)로 채워지자, 하얀 상자가 뇌리에서 튀어나와 서서히 열리더니 저번처럼 실험용 튜브와 비슷한 물건이 빛무리를 이고 떠올랐다.

- 스태미너 포션: 정신력과 체력 회복.

“주 선생님,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능연은 포션을 일단 제쳐두려 했지만,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까 봐 결국 나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는 봉합 기구를 제자리에 두고 사무실에 돌아가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저번과 똑같은 초록색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병의 디자인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워 한번 보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두 번 연속으로 스태미너 포션을 얻었으니, 아무래도 이건 흔하게 받을 수 있는 아이템인가 보군. 혹시 초보자 특별 혜택 기간이라서 획득하는 아이템이 좋은 건가.

능연은 새로 획득한 스태미너 포션을 찬합 세 번째 층에 넣고 다시 처치실로 돌아갔다. 마침 새로 온 환자의 데브리망을 마친 주 선생은 능연이 돌아온 걸 보고 싱글벙글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질구레한 건 내가 해놨으니까 봉합은 네가 해. 우리 응급실 실습생 중에 봉합 능력자예요. 저보다 훨씬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즐기세요.”

주 선생은 잊지 않고 환자를 안심시켰다. 환자는 국부 마취를 해서 아픔은 느끼지 못했지만, 기다란 주삿바늘을 보자 눈이 축 처져서 어떻게 즐길 수 있냐고 투덜대더니 젊어 보이는 능연의 모습에 불만인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젊은이 잘 꿰맬 수 있어?”

“병렬 봉합, 그리고 수직 매트리스 봉합 다 가능합니다.”

능연은 환자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 마스터급 병렬 봉합 기술 그리고 전문가급 불연속 수직 매트리스 봉합 기술을 터득했다. 마스터급 기술이니 매우 수준 높은 병렬 봉합 기술일 것이며, 수직 매트리스 봉합 기술도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전문가급이라도 해도 병원에 있는 대다수 의사보다 나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전문용어를 잘 모르는 중년 남자는 눈을 껌뻑이며 같은 봉합인데 뭐가 다르냐고 물었다.

능연은 자신의 상태를 묻는 환자의 질문은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편이라, 잠시 진지하게 고민한 후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다.

“예를 들어 환자분 머리를 누가 찔렀을 때는 병렬 봉합하고요, 알을 찔렀을 땐 수직 매트리스 봉합을 합니다.”

“알?”

중년 남자는 바로 다리 사이를 오므리며 위안을 찾으려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주 선생을 바라봤다.

“자주 응급실에 오셨으니 잘 아시잖아요. 별별 사고가 다 있는 법이죠.”

주 선생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의뭉스럽게 웃었다.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응급실에 왔겠어요? 어쨌든, 빨리 꿰맵시다.”

환자는 뜨끔한 듯 어서 상처를 꿰매 달라고 했다. 능연도 소중한 퀘스트 진도를 위해 재빨리 상처를 꿰맸다. 게임하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보통의 게임은 플레이어의 레벨업 속도와 게임 형평성 어쩌고 하며 퀘스트 획득이나 퀘스트 보상을 제어하곤 한다.

그러니 괜히 기회를 놓치고 아쉬워하지 말고, 서둘러 퀘스트도 진행하고 이벤트도 참여해야 한다. 이 시스템도 그런 제한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기회는 버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환자를 열 명 치료할 때마다 상자를 열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었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보상을 많이 획득해야 했다.

시스템을 제어할 수도 없지만, 능연 역시 제 노력으로 퀘스트를 끝내고 싶었다. 응급실이라고 해도 매일 바쁜 것은 아닌 만큼, 오늘은 그야말로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절호의 기회였다.

운화 시의 규모가 큰 만큼 매일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고로 응급실에 오지만, 오늘 같은 공장 폭발 같은 일은 드물었다. 평소엔 많이 하고 싶어도 그럴 환자가 없었다.

매일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처치실 밖에 앉아 있는 레지던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제일 바쁜 시간에만 겨우 핀셋을 들 뿐이지, 높은 권력인 메스를 잡을 자격은 없었다. 그러나 대규모 환자가 생기면 운화 병원뿐 아니라 운화 시내에 있는 삼갑 병원은 모두 바빠졌다.

운화 병원 같은 병원도 구급차를 다섯 대만 받아도 응급실이 꽉 차니, 규모가 더 작은 다른 병원은 중환자 두 명만 있어도 꽉 들어찼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빠도 큰 병원에는 새로운 환자가 계속 들어오니까, 무리인 걸 알면서도 실습생들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능연은 환자를 스무 명 치료하고 순조롭게 두 번째 초급 보물 상자와 세 번째 초록색 스태미너 포션을 손에 넣었다.

환자를 병상으로 보낸 다음, 능연은 쉬는 동안에도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속도를 더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임과 부주임 의사가 모두 중환자를 돌보러 가는 바람에 엄청나게 몰린 환자들과 실습생들만 남은 응급실은 교통체증이 온 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는 해결해야만 했다.

이제 곧 주임과 부주임 의사들 그리고 수많은 주치의, 레지던가 속속 돌아올 시간이라, 중환자가 더 많이 몰려들지만 않는다면 몇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다만, 위급 상태에 있거나 트랜스 된 환자는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주 선생님, 절 도와줄 사람 좀 불러도 되나요.”

능연은 머리를 굴리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뭘 도와?”

주 선생이 물을 홀짝거리면서 물었다.

그 나이대 의사들은 일본 의학 드라마를 보고 큰 세대라,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일종의 상징으로 여겼다. 다만, 배우보다 못 생겨서 이도 저도 아니었지만.

능연은 왕 간호사가 그에게 건넨 별 모양 레몬 슬라이스를 넣은 생수가 담긴 머그잔을 받아 들고는 우선 한 입 머금었다가 꿀꺽꿀꺽 삼키면서 그제야 한숨 돌렸다.

“분담해서 해보려고요. 한 사람은 데브리망을 하고, 한 사람은 붕대 감고, 저는 봉합하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게 제일 빠릅니다. 아까처럼 말입니다.”

아까 주 선생이 절제술을 끝낸 환자를 봉합하고 약 바르고 하는 데 몇 분밖에 안 걸렸으니, 붕대 감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응급실 환자가 모자랄 정도로 빨라질 것이다.

진짜 환자가 모자라면 어쩌지.

“너 지금 나더러 데브리망을 하라는 거냐?”

그런데 주 선생은 살짝 어두운 낯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온종일 겨우 네 사람을 꿰맨 일반 레지던트들이 놀라서 고개를 들고 능연을 바라봤다.

“실습생 나부랭이가 주치의한테 제안을 하다니······.”

“직접 해주시게요? 그것도 괜찮긴 한데.”

능연은 의외라는 듯 턱을 문질렀고, 주 선생은 그제야 깨달은 듯 그 뜻이 아니었냐고 되물었다.

“저는 실습생 몇 불러서 같이하려고 했죠.”

능연은 어떻게든 일을 적게 하려고 게으름을 피우는 주 선생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절제술이나 붕대 감는 일은 모두 사소한 몸 쓰는 일이라 노동 인력이 필요한데 주 선생은 병원에서 부르주아 축에 드는 인물이었다.

“다른 학생들 기회를 주려고 그러는구만. 남학생? 아니면 여학생?”

멍해졌던 주 선생은 그제야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주 선생의 말에 왕 간호사가 바짝 긴장해서 능연을 바라봤다.

“제 룸메이트 부르겠습니다.”

누구든 상관없다고 대답하려던 능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게 덧붙였다.

“오늘 환자가 많긴 하네요. 밖에서 콜 대기하는 것도 다 실습생뿐이고요.”

“그래도 상관없지. 다만 사전에 해당 과 치프 선생한테 설명 해주고.”

남자라는 말에 왕 간호사는 일단 안심하고 능연 편을 들었고, 좋은 사람 병이 도진 주 선생도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응급실이 바쁠 때는 종종 다른 과 의사와 실습생을 부르기도 하니 누구에게 기회를 주든 상관없었다.

실습생이 콜 한 번 받기 얼마나 힘든지, 며칠 동안 생생하게 느끼고 있던 진만호와 왕장용은 소식을 듣고 뛸 듯이 좋아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의국에서 매일 차나 나르고 환자 병력을 기록하면서 환자 구경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 지냈는데, 기회가 주어지자 마치 창문도 없는 비즈니스호텔 방에서 일류 호텔 스위트룸으로 업그레이드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선생님한테 선물 드렸냐? 얼마 들었어? 내가 낼게.”

한쪽으로 능연을 끌고 간 다음 목소리를 낮춰 그렇게 말하는 진만호의 목엔 여전히 시뻘건 3M 청진기가 걸려 있었다. 청진기를 쓸 일도 없는데 그러고 다니는 바람에 요즘 과실에서 ‘시뻘건 청진기 걔’로 불렸다. 진만호는 레지던트들 눈에 들기 위해 놀림 받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도 안 썼고, 선물도 안 드렸어.”

“안 드렸다고?”

“그런 게 소용 있냐?”

“난 드리려고 했지. 근데 괜히 긁어 부스럼일까 봐.”

진만호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주머니 안의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절제술 할래, 아니면 붕대 감을래. 알아서 골라.”

“난 붕대! 절제술, 우웩.”

“맨날 검시실에서 시체 보면서 절제술이 뭐가 우웩이야.”

재빨리 먼저 고르는 왕장용의 말에 진만호는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태클을 걸었다. 그러자 왕장용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다큐멘터리 말투로 다시 말을 꺼냈다.

“징그러운 걸 자주 보니까 볼수록 더 많이 상상하는 거지. 그러니까 더 징그럽고. OK?”

“야······.”

“너도 해보면 알 거야. 생각해 봐. 네가 검시실 막내야. 의사들이 하기 싫은 건 다 누구한테 주겠냐?”

왕장용의 말투는 현자처럼 나긋나긋했다.

“그건 상상이 아니지.”

“환자 왔어요.”

진만호가 진저리치는 듯 시뻘건 청진기를 붙잡고 하는 말에 왕 간호사가 환자가 왔다고 알렸다. 그녀 뒤에 새집을 털다가 나무에서 떨어진 환자가 있었는데, 피는 많이 흘리지 않았고 상처에 소나무 가시, 진흙을 묻힌 채 어색한 듯 웃고 있었다.

주 선생은 환자를 진지하게 살펴본 다음 머리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실습생이 아무리 바보라도 서른 번쯤 꿰매면 베테랑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멍청한 실습생은 한두 번도 기회를 잡기 어렵다.

진만호는 능연 덕에 전전긍긍하며 절제술을 하고는 행복감에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돌에 머리가 깨진 사람, 나뭇가지에 어깨를 찔린 사람, 철 막대기에 다리가 찢어진 사람······. 응급실에 있어 본 의사는 일반인들은 사람들의 상처가 얼마나 다양하고 별꼴이 다 있는지 상상도 못 하리라 생각한다.

진만호와 왕장용은 점점 숙달되었고, 처음부터 능숙한 능연까지, 봉합 라인도 그렇게 순조롭게 움직였다.

두 시간 만에 능연의 퀘스트 진도는 (20/20)에서 (30/30)까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계속하자!”

스태미너 포션을 하나 더 손에 넣은 능연은 다른 사람이 중환자를 돌보는 틈을 타 손쉬운 환자들을 다 해치울 생각으로 계속 분발했다.

“능 선생님, 이제 봉합 환자가 없어요.”

왕가가 다시 처치실로 돌아왔을 때는 뒤에 아무도 없었다. 능연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진만호가 실망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다고요?”

“나머지는 다 내과 환자예요. 아니면 까다로운 환자거나.”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장난감을 삼킨 아이인데 황 선생님이 벌써 30분 정도 보고 있어요. 가보실래요?”

왕가가 간호사의 위엄을 부리며 눈에 힘을 주자 진만호가 목을 움츠렸다.

“장난감 삼킨 정도로 까다로운 환자 축에 낍니까?”

“아이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고모, 고모부, 삼촌, 숙모까지 다 왔어요. 얼마나 힘든지 아시겠어요?”

왕장용도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왕가는 무시하듯 툴툴댔다.

운화 병원엔 응급 병동이 있어서 대기실도 따로 있었다. 하지만 응급실에만 겨우 환자와 가족을 격리하는 처치실을 따로 만들 정도라서 대기실에 들어가지 못한 환자 가족은 몰리기 마련이었다.

응급 의학과에서 한참 머무르는 동안 환자 가족의 위력을 느낀 진만호와 왕장용는 고개를 숙인 채 끽소리도 못 냈다.

“그럼 잠시 쉬어야겠네.”

“퇴근 안 하세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쉰 능연이 자리에서 팔다리를 움직이자 왕가가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흘깃 보고 놀란 듯 물었다.

“두어 명 더 보고 가려고요.”

지금까지 38명을 처치했으니 이제 두 명만 더 보면 40명이 되고 상자 하나를 더 열 수 있었다. 진만호와 왕장용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해도 할 일 없는데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낫지.”

그들이 오늘 처치한 환자만 열댓 명으로 병원의 경상 환자를 거의 일망타진한 셈이었다. 그런 기회는 능연에게도 드문 기회였으니 진만호와 왕장용은 더욱 기뻐했다. 특히 마지막 몇 번은 능연이 그들에게도 몇 바늘 꿰매게 해줬는데, 바늘로 사람을 찌르는 그 쾌감은 참기 힘들었다.

“가서 뭐 좀 먹고 와.”

“주 선생님, 같이 가시죠. 오늘 야근 아니신가요?”

진만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 선생에게 다가갔다. 그는 좀 있는 집 자식이라는 걸 항상 이용하려 들었다.

“식당 가서 먹으면 돼. 주임 선생님들도 아직 퇴근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퇴근하냐. 너희들끼리 가.”

주 선생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운화에 있는 큰 병원 응급 의학과는 안 그래도 과부하 상태인데, 큰 공장 사고가 일어나 근 백 명 정도의 중경상 환자가 생겼다. 보통 그런 환자들은 모두 설비가 완전한 삼갑 병원으로 보내진다.

큰 병원 응급 의사들도 모두 그런 사고를 기회로 여기기 때문에 헛되이 다른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다른 과 의사들 도움을 받아 자기 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하려 한다. 영향력이 큰 사고를 통해 뛰어난 인물이나 우수한 집단이 배출되기 마련이라 다들 그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

물론, 늘 제일 크게 부담을 느끼는 것은 일선 당직의와 일선과 이선 사이에 있는 주치의들이었다. 오늘도 능연이 돕지 않았다면 주 선생은 진작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생긴 것도 정신없이 생긴 전형적인 전투력 5짜리 동료 레지던트만 봐도 온종일 겨우 열 명만 봉합했을 뿐이다.

휴게실로 이용하는 작은 방에 돌아갔더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술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바쁘게 일하고 있고 못 얻은 사람은 진작 돌아갔을 시간이었다. 각자 자판기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다시 휴게실로 돌아온 왕장용과 진만호 눈에 능연이 예쁜 칠기 찬합을 열고 있는 게 보였다.

나전 칠기는 칠기 중에서도 명품이었다. 겉에 자개를 둘러 가공해낸 것이라 매우 아름다운 데다가 칠기 고유의 반짝거림과 정갈한 느낌 외에도 예술적 느낌도 강했다. 능연이 가족의 체면을 세워주는 걸 장려하기 위해 이번에도 도 여사가 요리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마라우육, 오화남육, 백절계육 그리고 막창과 두부 간장 조림, 불그스름한 연어에 네 가지 제철 채소, 과일 그리고 쌀밥에 네 가지 소스까지······. 왕장용과 진만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능연이 느릿느릿 꺼내 늘어놓은 찬합이 테이블 반을 차지했다. 간장, 식초, 후추, 마라유, 고추냉이가 조개 모양 작은 접시에 가득 담긴 채 찬합 안에 장식처럼 놓여 있었다.

“능 형님······.”

“염치 좀 있어라.”

손에 빵을 들고 능연의 왼쪽에 달라붙는 왕장용의 모습에 진만호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손에 든 빵과 우유를 테이블에 놓고 오른쪽으로 가서 앉았다.

“능느님, 이렇게 다 같이 놓고 나눠 먹죠.”

그렇게 세 사람은 도평 여사의 호화 도시락을 나눠 먹으면서 빵과 우유도 먹어가며 배를 채웠다.

식사 후 능연은 두 사람을 데리고 다시 처치실로 돌아갔으나, 새로운 환자가 없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핸드폰이 울리자 능연은 환자를 찾는 걸 잠시 멈췄다.

“여보세요.”

“능연 씨, 저예요. 노금령.”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주변 소리와 함께 노금령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금령의 목소리에 능연은 유니콘 문신을 새긴 불량배와 그의 너덜거리던 살을 떠올렸고, 뒤이어 이제 환자 두 명만 채우면 40개가 되는 퀘스트를 떠올렸다.

“오빠가 또 다쳤나요?”

“아니요. 오빠는 괜찮아요.”

“그럼 오빠가 누굴 다치게 했나요?”

“아니요.”

노금령은 살짝 어이가 없는 듯 대답했고, 능연은 목소리를 높여 그럼 당신이 다쳤냐고 물었다. 노금령은 사나운 여자이고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았다. 단지 충동적으로 전화한 것이라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능연이 그런 소리를 하자 후회가 치밀었다.

그 순간, 뇌리에 갑자기 무한한 영감과 능연의 멋진 뒷모습이 떠오르자, 노금령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려요. 다친 사람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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