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퀘스트: 논문 한 편 완성하시오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능연은 눈앞에 뜬 새 퀘스트를 보고 바로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중급 보물 상자에서 그랜드마스터급 맨손 지혈 기술을 얻었다.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는데, 간포막 출혈을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앞으로 간담췌외과에서 작게 이름을 날릴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스태미너 포션만 나오는 초급 상자와 비교하면 중급 상자의 효과는 지속적이며 통쾌했다. 심지어 논문은 원래 써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의사는 고민에 고민하고 몇 달이라는 시간을 들여 사막에서 바늘 찾는 기분으로 병례를 찾아 수술한 다음 논문 한 편을 겨우겨우 짜낸다. 능연은 병례를 찾는 과정을 덜었을 뿐만 아니라 중급 상자까지 얻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물론 논문 쓰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운화 대학병원 본과 교육 과정에서도 본과생은 논문 쓰는 법을 그다지 배우지 못했다. 1, 2학년 학생은 기초과학, 화학, 수학 같은 걸 전공했고 기껏해야 의학사, 인체해부학, 면역학 같은 과목을 추가했다. 3학년은 병리학을 배우면서 시체를 좀 더 배우고, 4학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진정한 임상의학을 접했고 고시 준비나 실습 준비를 하면서 5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능연처럼 바쁜 실습생 생활을 시작하면 그 후로는 전혀 시간을 빼지 못했다.
논문을 쓰려면 자료 조사할 시간을 빼서 케이스를 찾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 배울 준비도 해야 했다. 의사가 되려면 평생 공부하는 것도 당연하고, 논문도 쓸 생각이었고 심지어 기대까지 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엉겁결에 대답을 한 능연은 그길로 주 선생을 찾아갔다. 곽 주임이 지도교수처럼 굴어서 그렇지, 이론적으로 그의 지도교수는 엄연히 주 선생이었다. 그리고 업무로 바쁜 곽 주임이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지도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 기초적인 과외까지 해주는 건 불가능했다. 오히려 사람 좋은 주 선생이 말도 따듯하게 하니 지도교수로 더 좋았다.
“곽 주임님이 쓰라고 했다고? 게다가 네 이름으로?”
능연의 말에 주 선생은 혼란에 빠졌다.
“시야 미확보 상태에서 맨손 국부 압박 지혈 간 봉합, 이런 방향으로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어요.”
“참 운도 좋구나.”
주 선생은 능연의 말을 자세히 듣지도 않고 계속 감탄만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감탄성 찬사를 듣고 커온 능연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이 길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주 선생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병원 응급 의학과 주임이 어떤 의미인 줄 아니?”
주 선생이 혀를 끌끌 차며 하는 말에 능연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운화는 성(省)급 병원이지. 그러니까 말이다, 우리 시 응급 의학과 주임은 말이다, 보통 창서성 의학회 응급 의학분회 상무이사를 맡는단다. 중화의학회 응급분회 위원이기도 하고. 무슨 뜻인지 알겠냐?”
주 선생이 능연을 바라보자 그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막 의대를 졸업한 학생이 그런 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렇게 설명하면 되려나. 곽 주임님은 우리 운화 시 응급학과 대장이야. 성내 응급 의학과에서도 유명인이고. 그런 분이 논문을 쓰라고 했다? 그럼 그 논문은 다 된 거라고 봐야 해.”
친절하게 설명하던 주 선생은 능연이 싱긋 웃자 따라 미소 지으면서 이제 알겠냐고 물었다. 능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곽 주임님이 대장이라는 거잖아요.”
응급실의 웃음소리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능연은 서둘러 처치실로 돌아가 곽 주임을 따라 혼란스러운 세상으로 들어갔다. 응급 의학과 과주임인 곽종군은 보통 응급실 진료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오늘도 능연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만 아니었다면 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습생과 레지던트들은 목숨을 걸고 직접 도구를 잡을 기회를 노린다. 초짜들이 직접 나설 기회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주치의는 환자를 초짜들에게 넘길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선배들은 끝나지 않을 만큼 일이 가득하고 초짜들은 환자를 한번 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외과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첫 경험이었다.
첫 봉합은 사람 피부의 강인함과 조직 구조를 깨닫게 해준다. 바나나나 돼지껍질을 아무리 꿰매도 얻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첫 수술, 첫 절제술, 첫 현장 진단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외과 의사가 가장 얻기 힘든 것도 첫 경험이었다.
봉합은 어찌어찌 기회가 온다 해도 집도는 어려웠다. 맹장 정도는 운 좋게 접하는 실습생도 있다. 막 레지던트가 된 의사가 훈련 기간에 흔하게 접하는 것도 맹장이었다. 더 나아가서, 환자의 간장이나 신장을 건드려 보기라도 하려면 4, 5년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아니면, 능연처럼 아예 팔을 쑥 집어넣든가.
성공하면 SCI 논문을 얻는 것이고, 만약 실패하면 의사 인생이 끝이 났다. 그걸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소송당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인명제천이라고, 교통사고 환자가 출혈 과다로 쇼크가 와서 위급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마침 그랜드마스터급 맨손 지혈법을 터득하지 않았다면, 그도 그런 식으로 팔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바로 그런 뜻밖의 사건으로 지금 능연은 모든 응급 의학과 의사가 중점 마크하는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갑자기 나설까 봐 경계했다.
시야 미확보, 맨손 어쩌고, 듣기에도 얼마나 엄청나 보이는가. 실제로도 그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다시는 능연에게 시도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초진 책임제도(처음에 진단 내린 의사가 책임지는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능연이 실패하면 의사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니 규칙대로 움직이는 의사들은 능연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능연은 아무런 자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개의치도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사회적 요소 때문에 의대에 진학한 다른 학생과는 달리, 능연은 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심이 지대했다. 자아를 형성하던 시기에 그는 이미 진료실에서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립했다. 인간과 질병에 관해서도 호기심과 의문이 넘쳤다. 인간관계는 오히려 그에게 서툴기도 하고 관심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처치실과 응급실 의사들의 걱정을 당연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월권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이제 그가 나설 만한 환자도 없었다.
그랜드마스터급 맨손 지혈 자체는 그다지 완벽하지 않아서 사용할 곳이 별로 없었다. 특히 응급실에서는 더 좋은 대체품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잘난 능연은 허리를 굽히면 굽혔지, 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오후가 되자, 응급실은 잠시 한산해졌다. 곽 주임은 시간 맞춰 퇴근했고, 능연은 퇴근 전에 일부러 가서 교통사고 환자를 살폈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환자는 아직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환자 곁에는 원래 있던 가족 말고도 스무 살 남짓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선생님, 코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키가 크고 마른 젊은이는 능연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능연은 자신의 의사 가운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살린 건 아니죠. 곽 주임님이 집도하셨어요.”
병원에서는 집도의가 누군지 아주 엄격해서 함부로 허풍 떨 일이 아니었다.
“에이, 겸손하시기는. 동영상 봤어요. 선생님이 올라가서 지혈했으니까 그렇지, 피를 엄청나게 흘리던데요?”
“동영상이요?”
능연의 표정을 본 젊은이는 그가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핸드폰을 꺼내 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이거예요.”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이라 조금 흔들렸지만, 포커스는 능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꽃미남 백의천사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몇 초 뒤 영상에서 손 씻기를 마친 능연이 두 손을 앞으로 구부린 채 조용히 응급 의학과 로비를 지나 의사 가운을 입은 의사들을 뚫고 나오더니, 곽 주임과 조낙의 사이를 파고들어서 손을 그대로 병상 위 환자의 복부에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 주인이 소리를 질렀고, 익숙한 목소리에 능연은 볼륨을 높였다.
-간포막하 출혈입니다······.
-주임님, 피가 멎었습니다.
-능연! 스트레처 카 위로 올라가.
능연을 찍고 있었지만, 영상에는 응급실 안의 소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의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고, 의사들의 동작이 보이다가 마지막엔 능연이 스트레처 카 위로 올라가 팔로 지탱하면서 함께 수술실로 들어가는 장면까지.
바로 그때, 핸드폰 영상에서 사람 심장 소리 같은 ‘둥둥둥둥’ 소리가 울렸고 이어서 격앙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빠빠빠빠빰, 빰빰빠! 빠빠빠밤, 빠빠빠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젊은 사람 몇이 능연을 에워싸고 앞다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영상을 어디서 본 겁니까?”
“환자 모임 카페, 커뮤니티 등등에서요. 웨이보에도 있고요. 능 선생님이 잘생긴 데다가 솜씨도 좋으시니, 다들 공유하고 난리가 났죠. 인터넷 스타가 안 되면 이상한 거죠. 어디 우리처럼······.”
“그러게요, 여러분이 인터넷 스타 같진 않네요.”
키 크고 마른 청년이 익숙하지 않은 아부 말투로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해진 능연은 서둘러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 그러자 과연, 대화가 시원스럽게 끝났다.
“흠, 그죠 우리가 생긴 게 좀······미안한 얼굴이죠. 아, 깜빡했네요. 우린 운전(雲巓) 클럽이에요.”
키 큰 청년이 힘을 주어 헛기침하더니 겸연쩍은 듯 말했다. 그래도 능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실망하여 덧붙였다.
“운전 클럽은 운화 시에서 설립한 e-스포츠 클럽입니다. 코치님이 예전에 체육 위원회 공무원이었거든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클럽을 만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맞아요, 코치님이 많이 헌신하셨죠.”
“매일매일 정부 사람들이랑 술도 마시고. 그렇게 술 마시다가 죽을까 봐 걱정했다니까요.”
“야! 헛소리하지 마. 우리 팀은 올해 <왕자 영광>이라는 게임을 합니다. 전 동지전입니다. 능 선생님도 혹시 게임하세요?”
게임을 한다는 말에 청년들이 뭔가 달라 보였다.
“학교 다닐 때 잠시 <왕자 농약> 했었어요.”
“오! 잘됐네요. 우리 친구 추가해요. 나중에 순위 올려드릴게요. 왕은 몰라도 다이아몬드까진 올려드릴 수 있을걸요?”
“저 지금 시간 되는데요.”
동지전은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껄껄 웃었고, 능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핸드폰을 바로 꺼내 들었다. 곧 퇴근이라 잠시 시간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체면 안 차리는 사람도 처음인지, 동지전은 잠시 멍해졌다가 재빨리 능연의 아이디를 친구로 추가했다.
“아, 깜빡했네요. 선생님 무슨 레벨이세요?”
“브론즈 3이요.”
동지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매일 12시간 이상 트레이닝하는 프로 e-스포츠 선수인 만큼 동지전은 순식간에 아마추어 플레이어를 끝장낼 자신이 있었다. ‘브론즈 3’은 전체 레벨에서 가장 낮은 존재로, 팀킬에 신기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선생님 게임 많이 안 하나 보네요.”
“그렇겠지.”
“조금만 해도 브론즈 3보다는 올라가니까.”
“그래도 다해서 백 시간은 넘게 했을걸요? 그런데 만날 져요.”
“괜찮아요. 우리가 순위 올려드릴게요. 이길 수 있어요.”
동지전은 입술을 깨물면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의사 위챗 땄잖아.
요즘 같은 세상엔 의사에게 돈 봉투를 찔러준대도 위챗 추가하기가 어려웠다.
“언제 퇴근하세요? 한 판 할까요?”
그들의 코치가 출혈 과다로 입원했으니 한동안은 입원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동지전은 의사에게 ‘돈 봉투’를 확실히 찔러주기로 결정 내렸다.
“아직······ 2분 남았네요. 휴게실 가서 접속할게요. 의사는 병실에서 게임하면 안 되거든요.”
“네, 그럼 이따 접속하세요.”
능연을 배웅한 동지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진지하게 사람들을 둘러봤다.
“어떻게든 합심해서 능 선생님 레벨업 시키자. 코치님이 주신 퀘스트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코치님을 위하여!”
“코치님을 위하여!”
“아자!”
그들은 침대 위에 누렇게 뜬 채 누워 있는 코치를 보면서 주먹을 굳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