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16화 (16/877)

조용한 오전의 응급실에 불쌍한 레지던트 몇이 교대 중이었다. 주치의인 주 선생은 마음만 먹으면 응급실 한구석에 자리 잡고, 처치실에 있는 것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능연은 초짜 특유의 흥분감에 넘쳐서,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음에도 처치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기기를 익히고 환자 상태를 살폈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응급실 안의 광경을 지켜보는 실습생들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들은 콜 받을 기회가 아직 없는데 말이다.

“너무 불공평하잖아. 모든 기회를 저 녀석한테 주는 건 아니지 않아?”

“능연이 수처를 잘한다고 해도 우리도 수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응급실에서 뭐 얼마나 대단하게 잘 꿰매야 한다고 말이야.”

“지난번 맨손 지혈 건으로 곽 주임님 눈에 쏙 든 거야.”

“맨손 지혈이라는 거 안전도가 너무 낮은 비정규 방법인데, 고작 한 번 성공한 것도 운이 좋아서 그런 거 아냐?”

실습생 몇이 툴툴거리며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응급실 안에서 일할 기회는 없어도 그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운화 병원 응급 의학과는 수술실이 네 개나 있는 전형적인 대형 응급실이었으며 안에서 진행되는 일도 다양했다. 흔한 맹장염 환자, 골절 환자, 관절 탈구 환자는 기본적으로 다른 과로 트랜스 할 필요도 없이 응급 의학과에서 자체 해결했다.

그렇다 보니 응급실 일은 쉽지 않고 의사들의 수준도 평균보다 높았다. 능연이 운화 병원 응급실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봉합 실력을 알린 데다가 맨손 지혈 능력까지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발꿈치를 치켜들어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분명했다.

9시 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구급차 세 대가 연달아 운화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응급실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근경색 하나, 교통사고 하나, 그리고 벽을 넘다가 다리가 부러진 환자도 있네. 휴우, 오늘 바쁘겠어.”

바쁜 와중에도 주 선생은 여유를 보이며 능연을 데리고 한 바퀴 돌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능연은 바쁘게 움직이는 레지던트들과 물컵을 들고 물을 홀짝이는 주 선생을 번갈아 봤다.

“이제 뭐 하면 됩니까?”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요?”

“심근경색 환자는 살아나면 심장외과로 보내면 되고, 혹시 못 살리면 영안실로 보내야겠지. 교통사고는 수술실에 들어갔고, 다리 부러진 환자는 상황을 보고 심각하지 않으면 우리 과에서 치료하고 심각하면 정형외과에 보내야 하니까.”

주 선생은 레지던트들과 달리 일에 목마른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응급 의학과는 환자와 치료비가 있어야 운영할 수 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환자를 응급 의학과에 남겨두고 치료하면서 진료 항목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능연도 슬슬 병원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리 부러진 환자는 정형외과 환자군에 속하는 거 아닙니까?”

“정형외과에서 의견이 있으면 주임님한테 이야기하겠지. 우린 수술량만 챙기면 돼. 우리 병원은 정형외과도 아주 바쁘거든. 이런 응급 환자는, 많이 심각한 경우가 아니면 그쪽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아. 치료비가 얼마 안 되는 건 둘째 치고 수술실도 모자라니까. 우리 과에서 처리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쓸걸.”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정형외과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환자를 우리가 뺏는다는 건가요?”

“합리적 분배라고 하자. 뺏고 안 뺏고가 아니라고. 수술방이 남아도는 다른 병원 정형외과에서나 뺏고 말고 하는 거지.”

어쩐지 체면이 안 선다는 생각에 주 선생이 해명하듯 대답했다. 능연은 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 선택할 때 어떻게든 큰 병원으로 가도록 해. 큰 병원엔 환자가 끊이지 않고 의사들이 환자에 집중할 수 있지만 작은 병원에서 초짜가 실력을 끌어올리기는 힘들어.”

“네, 큰 병원으로 갈 것.”

능연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집이 바로 소형 병원이다 보니 심각한 환자라고 해봐야 바로 그 칼국수 집 양 사장 같은 케이스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임시로 지혈한 다음엔 역시나 다른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큰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케이스를 말이다.

“곽 주임님 말씀은 다 피와 살이 되는 내용이니까, 시간 날 때마다 자주 따라 다녀.”

능력이 조금 떨어지긴 해도 삼대째 의사 집안 출신인 주 선생이 그동안 터득한 이치를 공유했다. 능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게 생긴 주 선생도 멋져 보일 때가 있네.

“곽 주임님, 제 논문 나왔습니다.”

능연은 낮에 응급실에서 어시스턴트를 하고 쉬는 시간에 자료를 찾아 논문을 쓰면서도 겨우 이틀 만에 논문을 만들어냈다. 상당히 빠른 속도에 곽종군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간에 쫓기지 말고 천천히 써도 된다고 충고했다.

“술술 써지더라고요.”

“논문을 쉽게 생각하면 안 돼. 아무리 작은 논문이라고 해도 진지하게 써야지.”

능연의 짧고 서툰 변명에 곽종군은 한마디 더 하고는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논문 제목을 훑고, 목차를 살핀 다음 케이스는 대강 넘겼다.

그러나 끝까지 읽은 곽종군은 저도 모르게 뒤에서 앞으로 다시 훑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전에 썼던 요약보다 훨씬 완벽해졌어.”

안목이 높은 곽종군이 단일 케이스 논문에 대해 ‘재미있다’라고 평가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의국 안에서 차트나 리포트를 채우던 의사들도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운화 병원 응급 의학과는 대규모 사무실 인테리어를 채택해서, 과주임, 주임 의사를 포함한 모든 의사의 집무 공간도 그 안에 있었다. 하여 의국 전체가 거의 교실 두 개만큼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하지만 기업 사무 공간과 달리 응급 의학과는 집무 공간이 필요한 의사가 별로 없었고, 몇 개 안 되는 책상은 모두 창가에 위치했다.

복도와 붙은 쪽에는 문서 서랍, 파일 서랍이나 티테이블이 있었다. 광활한 의국 중앙에는 커다란 대형 회의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었다. 병원의 모든 과는 주에 서너 번 회의를 열거나 케이스 토론, 혹은 사망 환자에 대한 반성회를 열거나, 선배들의 잔소리 타임이 펼쳐졌다.

뻥 뚫린 의국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권력 중심인 곽종군은 항상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런 곽종군의 평가가 떨어지자마자 부주임 하나가 껄껄 웃으면서 다가왔다.

“곽 주임님, 좋은 논문 발견하셨습니까?”

“머리가 좋은 친구라네. 두 선생, 자네 우리 과 논문 능력자 아닌가, 한 번 보겠나?”

곽종군은 벌써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이나 훑어본 프린트를 두 선생에게 건넸다.

논문 능력자라고 해도 쓴 논문이 많을 뿐이지, 논문을 잘 쓰는 건 아니었다. 잘 쓴다면 부주임에 머무르지도 않았으리라. 환자들은 수술 잘하는 의사를 바라지만, 의학계에서는 논문을 잘 쓰는 의사를 바랐다.

두 선생은 ‘논문 능력자’라는 별명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는 겸손하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능연의 논문을 받아들었다. 곽종군의 평가도 있고 하니, 당연히 진지하게 논문을 읽어 내려갔다.

1,000자 남짓한 논문에 요약도 포함되어 있고 데이터도 나열되어 있었다. 몇 분 안 걸려서 다 읽은 두 선생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는 저도 모르게 능연을 바라봤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참이나 능연의 선이 분명한 얼굴을 응시했다.

“어떤가?”

“맨손 지혈 쪽에 꽤 느낀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문장이 조금 조악하고 영어 요약도 학술 간행물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게 있네요.”

집에 소장한 보물을 과시하는 듯 뿌듯해 보이는 곽종군의 질문에 두 선생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논문 능력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논문의 문장과 집필 능력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연구하고 연습해 오면서, 말하자면, 경험이 쌓여 술술 써 내려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의사가 수술을 백 번 해서 케이스를 네댓 개 골라내 논문 하나를 쓰는 동안, 그는 수술 네댓 번만 해도 논문을 쓸 만한 포인트를 찾아냈다.

다른 의사가 논문 하나를 쓰려면 초안을 잡고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골치 아픈 과정을 겪는 동안, 그는 살짝만 수정하여 바로 발표하곤 했다. 두 선생은 힘들게 영어 공부까지 해서 영어 논문도 여러 편 순조롭게 발표한 급이 다른 능력자였다.

그러나 의학 논문이 대접받으려면 문장력이 아니라 내용이 더 중요했다. 두 선생은 지금 2개월 정도면 중문 핵심 정기 간행물을 써낼 수 있고 좀 더 애쓰면 SCI 표준 영어 논문도 한 편 쓸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의학 논문은 결국, 실력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력이 떨어지니 난도 높은 수술을 하기 힘들고 개척할 만한 혁신적 의학 소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반 논문 두어 편 끄적이기는 쉬워도 제대로 된 논문 쓰기는 쉽지 않았다.

능연의 논문은 두 선생의 것과 딱 반대 유형이었다. 그의 문장은 딱히 칭찬할 만한 것도 없을 만큼 평범했고, 선택한 단어도 좋게 말하면 단순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악했다. 하지만 핵심적인 기술 내용은 두 선생은 흉내 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능연의 실력이 높은 만큼 써낸 내용도 당연히 비범했다. 능연은 지금 단속 수직 매트리스 봉합은 전문가급에 불과하지만, 단속 봉합, 탕 봉합은 마스터급이고, 맨손 지혈은 그랜드마스터급이었다. 그중 맨손 지혈은 운화 병원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사람이고, 창서성으로 범위를 넓혀도 손에 꼽힐 것이다.

그런 기술 레벨로 논문을 쓰니 쓸 수 있는 것도 당연히 많았다. 수술할 때 조금 깊이 들어가냐 덜 들어가느냐로 환자의 예후가 달라지는 만큼, 의학이란 원래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학문이었으니까.

거맨손 지혈법을 논문으로 쓰자니 대서특필할 만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고작 1,000자 남짓한 논문인 만큼, 논문 쓰는 방법에 조금 더 익숙했다면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됐을 것이다.

“문장은 좀 다듬어야지. 영어 요약도 다시 써야 하고. 아무튼, 어디에 발표할 생각인가?”

“논문 발표한 적이 없어서요.”

곽종군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능연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위급 환자 응급 의학>을 한 번 고려해 보게. 출판비가 좀 세더라고. 5, 6천 위안 정도 하는 것 같았네. 신청할 때 우리 병원 이름 넣고 의국에 비용 청구하게.”

“네.”

“잘 써보게. 모르는 거 있으면 황 선생한테 물어보고.”

황 선생이란 곽종군이 데리고 있는 대학원생이었다. 운화 병원에 주임급 의사는 대부분 운화대학 교수직에 있고, 곽종군처럼 파워가 센 의사는 석사 지도교수 직책을 걸고 있었다. 황 선생은 그의 밑에서 삼 년 있었고 실제로 환자를 접할 기회는 레지던트보다 없었지만, 논문 같은 건 본과 졸업생인 레지던트보다 훨씬 앞섰다.

“두 선생, 며칠 전에 있었던 공장 폭발 사고, 원외 합동 진단한다고 하지 않았나? 제진해도 잊지 말고 부르라고 행정과에 통지하게.”

“제진해요?”

능연이 나간 후, 곽종군이 웃는 얼굴로 하는 말에 두 선생은 의아한 듯 되뇌다가 퍼뜩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국에 있던 의사들도 고개를 숙인 채 좋은 구경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요즘 인터넷을 안 하는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능연이 환자 배에 손을 집어넣고 맨손 지혈한 동영상을 그 바닥에서 안 본 사람이 없었다. 무무제이, 의무제일(武無第二, 醫無第一: 무술하는 사람은 스스로 고수임을 주장하고, 의사들은 감히 자기가 최고라고 나서지 않는다는 뜻)이라지만, 어디든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사적으로 그 동영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중에 가장 심하게 욕한 사람이 성립 병원 제진해였다.

곽종군은 단순히 능연을 향한 비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집도의는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그러나 곽종군은 인터넷을 하긴 해도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가 사람을 비난할 땐, 각종 회의 자리를 노리곤 했다.

침을 뱉어도 얼굴을 마주 보고 뱉어야지, 핸드폰이나 컴퓨터 모니터 뒤에서 욕해 봐야 재미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성립 병원은 운화 병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형 종합 삼갑 병원이었다.

병원이란 사이펀 효과가 있는 법이라 사람들은 모두 가장 좋은 병원으로 가길 원했다. 이는 높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이 관리하는 수준 높은 병원인 삼갑 병원은 재정 지원을 최대치로 받았다.

그런 분위기라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병원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강자는 점점 강해지고 약자는 점점 약해져 좋은 병원일수록 최첨단 설비를 얻고 우수한 의사가 많이 남게 되었다.

운화 병원 응급 의학과 과주임 곽종군, 그리고 성립 병원 응급 의학과 주임 의사 제진해, 모두 창서성 의학계의 능력자였다. 특히 두 사람 모두 화상에 강해서 더 많이 ‘교류’하는 사이였다.

정규 원외 합동 진단은 절차가 복잡해서 공장 폭발 같은 특수한 공공 사건이나 높으신 분들 건강검진 정도는 되어야 비교적 쉽게 성사되는 편이다.

이번 기회를 많이 신경 쓰는 제진해는 오전 회진을 마친 후 수술을 한 건만 진행하고 바로 옷을 갈아입고 운화 병원으로 달려갔다. 마흔 살에 주임 의사가 된 그는 젊은 유망주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든 의사가 항상 흰 가운을 입는 반면, 제진해는 신경 써서 젊어 보이게 치장했고 병원을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셔츠와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이었다. 거기다 운동을 소홀히 하는 동안 살이 점점 올라서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볼록해지는 배도 문제였다. 과주임처럼 흰 가운을 입으면 배를 살짝 가릴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흰 가운은 너무 나이 들어 보여 자신의 젊고 유망함을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요즘 제진해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물론 과주임이었다. 병원은 정부 기관과 달라서 승진 폭이 매우 좁았다. 그렇기에 과주임이 부원장으로 승진하거나 전출 혹은 스카우트 되지 않는 이상 은퇴할 때까지 과주임 자리에 눌러앉았다.

어떤 과주임은 심지어 부원장이 되어서도 과주임 자리를 놓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젊고 유능한 의사라면 그 자리에 앉아서 20년도 넘게 아래 사람들 숨통을 조일 수도 있었다.

제진해는 과주임이 은퇴할 때까지 기다리다 못해, 독립해서 대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화상 센터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녹록하지 않은 일이라 주름이 늘어나는 바람에 곽종군과 나란히 섰을 때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라는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언제 케이스 토론 한 번 하려던 참인데 운화 병원에서 연락 주셨네요. 우리 병원 케이스도 가지고 왔으니 이따 같이 좀 보실까요?”

제진해는 성립 병원으로 분배된 환자 케이스 이야기를 꺼냈다. 공장 폭발 사건은 상처 입은 공장 직원과 손실 입은 공장에는 큰 비극이지만 제진해에게는 모처럼의 기회였다. 화상 방면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화상 센터 설립이 좀 더 쉬워지리라.

“합동 진단 끝나고 시간 있으면 그래도 되고요.”

곽종군은 전혀 인사치레할 생각이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말로는 같이 좀 보자고 해도 제 실력을 과시할 생각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곽종군은 곁눈으로 그를 흘깃 보면서 속으로 이따 남아 있을 기분이 드나 두고 보자 싶었다.

“들어갑시다. 시간이 됐네요.”

쓸데없는 이야기 나눌 기분이 아닌 곽종군은 그저 인사만 하고 바로 회의실로 돌아갔다. 초짜 의사들은 중간에 커다란 회의 테이블을 비우고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곽종군은 정중앙 자리를 골라 어깨를 으쓱거리며 앉았다. 다른 주임 의사 두 명과 부주임 의사 네 명이 양쪽에 자리하자, 전문가 7명의 기세가 순간 의국 전체에 퍼졌다.

“육군 병원 유 주임님은 아직이십니까?”

제진해 역시 개의치 않으며 아무 자리 하나를 골라 앉고는 병례를 자기 앞에 놓으라고 같이 온 레지던트에게 눈짓했다.

“병원에 일이 좀 생기셨답니다. 지금 오시는 중입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죠. 이번 공장 폭발 사건이 참 심각하긴 하네요, 우리 세 병원이 이렇게 다 모이다니요.”

연락책인 두 의사의 설명에 제진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곽종군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다른 의사들도 뭐라고 대꾸하기 뭐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제진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옷깃을 끌어당겨 우아하지 못하게 볼록 나온 배를 가리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운화나 성립이나 원래부터 원외 합동 진단을 좋아하지 않아서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현이나 시 급의 삼갑 병원에서 발의한 합동 진단은 오히려 병원 레벨 차이가 나서 도움을 구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지금은 현이나 시급 삼갑 병원도 정규 루트를 통해 원외 합동 진단을 열기보다 사적으로 외부에서 도움을 받길 선호했다. 어차피 쓰는 돈, 절차라도 간단하면 좋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미안하게 됐습니다. 늦었습니다, 늦었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의국의 팽팽한 분위기를 깼다. 각진 얼굴의 나이든 의사가 가슴팍에 오래된 스타일 청진기를 장식품처럼 걸고 안으로 들어오자, 곽종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유 주임님, 환자는 잘 처리하셨습니까?”

“사망 선고했네.”

유 주임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능연이 고개를 돌려 그런 유 주임을 한 번 쳐다봤다.

병원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요즘 사람은 집에서 평온하고 조용하게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어찌 됐든 병원이란 관문을 통과해야 삶을 완전히 포기하곤 했다. 그러나 유 주임처럼 대수롭지 않고 가볍게 묘사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둥글게 둘러앉은 의사 중에 주치의의 표정이 가장 평온했고, 젊은 레지던트는 표정이 다 달랐다. 유 주임의 말에 익숙한 듯 구는 건 선임 레지던트들이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건 훈련의 생활을 마친 레지던트였다. 그리고 아예 회의 테이블의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의사들도 있었다.

“다 모였으니 시작합시다.”

곽종군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병례 파일을 열었다. 합동 진단은 다년간 경험을 거치면서 절차가 개선되었다. 특히 원외 합동 진단은 대학 군사훈련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중요도도 대학 군사훈련과 비슷해서 귀찮기 짝이 없었다. 쓸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쓸모없는 것 같기도 한 이런 과정이 잘 돌아가는지 체크하는 걸 윗사람들은 좋아했다.

두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프로젝터를 켜고 PPT를 읽기 시작했다. 곽종군은 의자를 빙 돌려 실눈을 뜨고 자는 듯 마는 듯,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듣고 있었다. 제진해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자신이 넘치는 모습으로 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었고, 유 주임은 프로젝터를 보는 건지 마는 건지 멍한 모습으로 제 구역 밖의 일은 관심 없는 듯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위급 환자 두 명의 화상 면적이 넓은데, 기본적으로는 잘 컨트롤 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곽종군은 아랫사람에게 들으라는 듯 지시 내리는 말투였고, 그런 태도로 이날의 원외 합동 진단의 기조를 굳힐 수 있었다. 제진해는 중증 환자가 없다는 사실에 실력을 발휘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여 실망했다.

“화상 면적 80%인 환자라면 안심해선 안 되지요. 시시각각 살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의사 하나를 배정하시길 건의 드립니다.”

“두 선생을 배정했습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요. 화상 환자는 합병증이 시시각각 발생할 수 있습니다. 80% 화상 면적이라면 심장 기능 부전, 신장 기능 부전, 쇼크, 독혈증(toxemia: 혈액 전염병의 하나) 등등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젊은 주치의를 하나 붙이고, 가능한 한 사람을 바꾸지 말고 환자 두 명 모두 살릴 수 있을지, 한 달 정도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유 주임은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공장 폭발은 도시 전체에서 주목하는 이슈인 만큼 전면적으로 신중하게 고려해야 했고 지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잠시 멍했던 곽종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처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는 곽종군과 제진해 모두 응급 전문가이며 화상 방면에 공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은 화상 외과에서 오래도록 버텨온 유 주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죽는 사람을 많이 보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지. 오늘 환자도 폐색전증을 너무 늦게 발견해서 그랬다네. 당시에 이런저런 고려 말고 헤파린을 투여할 걸 그랬어. 아, 됐네, 됐어. 이건 사망 환자 케이스 토론 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곽 주임, 별다른 일 없으면 난 이만 돌아가겠네.”

“모처럼 오셨는데, 케이스 하나 더 보시고 가시죠.”

곽종군이 헛기침하자 두 선생이 리모콘을 들고 동영상을 불러냈다.

바로 능연이 환자 배에 손을 꽂은 그 동영상이었다.

“이건······ 맨손 지혈?”

유 주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품에서 돋보기를 꺼내 꼈다. 육군 병원에서 평생 근무해 온 그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진 않았어도 수많은 훈련에 참여했으며 군내 의료 시스템 회의에도 참석했다. 군대 의료 시스템에서 외상처치와 지혈은 모두 핵심 중의 핵심 명제였다.

수술 중에는 고주파 전기 응고법, 마이크로파, 레이저 등을 이용하거나 각종 약물 혹은 여러 지혈 핀셋과 레지던트를 동원해 지혈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붕대를 조여 압박 지혈하고 국부에 약물을 뿌리는 것이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맨손 지혈 같은 기술은 특수한 사람만 터득하는 심도 있는 고급 스킬이었다.

유 주임은 평생 대부분 시간을 화상 연구하는 데 바치느라 맨손 지혈 같은 기술을 익히지 못했으나 그것에 관한 관심은 지대했다.

-간포막하 출혈입니다.

-지혈됐어요!

-능연, 스트레처 카 위로 올라가!

프로젝터에서 펼쳐진 장면을 지켜보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유 주임은 피가 들끓는 느낌이었다. 의사가 의사를 제일 잘 안다고,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당시의 모든 광경이 상상됐다.

유 주임을 비롯한 의사들은 동영상을 보면서 소리를 듣는 동안 뇌리에 그 전투 같은 긴장감이 재현되었다. 출혈성 쇼크 환자는 표준적인 1급 위급 환자였다. 거기다 응급실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피가 자신의 손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는 그 무력감을 잘 알았다.

동영상에서 스트레처 카 위로 올라간 능연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밀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 주임은 멀어져가는 앵글을 바라보며 다급해져 고함쳤다.

“아이고! 왜 따라 들어가지 않은 거지? 따라가야지! 뭘 어떻게 찍은 거야.”

“병실에 있던 환자가 핸드폰으로 찍은 거라서요.”

“멀쩡한 소재를 버렸구만! 촬영했어야지! 요즘 사람은 다 무슨 셀카니 뭐니, 잘 찍는 거 아닌가?”

유 주임은 너스 스테이션에서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대던 어린 간호사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다시 찍으면 되잖습니까. 능연, 자네 논문을 선생님들께 좀 보여드리게. 맨손 지혈이 무슨 이상한 기술도 아니고, 앞으로 잘 발전시켜볼 생각입니다.”

곽종군은 차를 홀짝이면서 잠시 후에 고함칠 준비를 하며 목을 축였다. 능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 둔 복사본을 그 자리에 있는 의사들에게 한 부씩 돌렸다.

어쨌든 그 바닥에서 한 번 돌았던 동영상이고 그날 자신이 쓴 논평을 곽종군이 봤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제진해는 동영상을 볼 때까지만 해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곽종군은 유 주임과 마찬가지로 SNS에 능숙한 세대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능연을 보자마자 경계심이 들었다.

저렇게 눈에 띄는 능연을 알아보지 못하기도 힘들 터였다. 사실 그날 제진해가 웨이보에 글을 올린 것도 ‘인터넷 스타 의사’라는 말에 자극받아서였다.

젊고 유능한 주임 의사인 자신은 인터넷 스타가 되지 못했는데, 경솔한 의사 하나가 무슨 자격으로 인터넷 스타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얼굴로?

제진해는 엄숙한 표정으로 능연을 대했고, 그가 논문을 건네줄 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능연이 곁을 떠난 후에야 조였던 배를 드러내며 숨을 힘껏 내뱉었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실수를 찾아내려고 고개를 숙인 채 논문을 들여다봤다.

사실 논문은 대부분 그럴싸한 문장으로 잘 꾸며 놓은 것이라 실제 의미는 별로 없었다. 데이터 조작이나 샘플 표본 대상을 지정해서 고른 것을 제외하더라도 방향성부터 문제가 있거나, 논리적 오류가 있는 논문도 많았다. 즉 거의 모든 논문에서 트집거리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논문 발표 전에 이런저런 수정이 불가피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다.

논문을 받아든 제진해는 곧바로 뭔가 반격할 수 있는 거리를 찾아내자는 생각부터 했다. 그는 평소에 밑에 있는 대학원생의 논문이나 정기 간행물 발간사에서 보낸 비평 논문도 몇 분 만에 읽어냈다. 그것이 의학 연구자의 기본 소양이니까.

곽종군은 사람들이 읽을 시간을 좀 주다가 제진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 선생, 시야 미확보 상태에서 맨손 지혈이 가능한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면서요? 이 논문으로 답이 됐나요?”

곽종군은 주임 의사지만 과주임은 아닌 제진해를 제 주임이라고 불러 주지도 않았다.

“곽 주임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진해는 미처 다 못 읽은 내용을 재빨리 읽으면서 차가워진 얼굴로 되물었다.

“인터넷에 쓴 글 말입니다.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곽종군은 대형 스크린에 제진해가 썼던 논평을 불러냈고 그중 한 문장은 마크까지 되어 있었다.

“이 동영상이 조작이 아니라면 내가 본 중에 가장 경솔한 사건일 것이다. 수술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맨손 지혈을 한다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지 아닌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실습생 대신 나서주시는 겁니까?”

“오늘 원외 합동 진단 아닙니까. 합동 진단이란 원래 서로 배우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내가 제 선생 궁금증을 좀 풀어주려고요.”

이제 곽종군은 그나마 하던 체면치레도 하지 않았다.

의사를 직장인으로 본다면 그들의 작업 환경은 다른 직장과 큰 차이가 있다. 제일 두드러진 차이는 의사는 공무원처럼 화기애애하지 않다는 것과 기업 직원처럼 사무적이지도 않다는 것에 있었다. 의사의 일상은 인내와 폭발 사이를 배회하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아도 참고. 밤샘 근무해도 참고. 선배에게 혼나도 참고. 환자가 욕을 해도 참고. 그렇게 참고, 참고, 참다가 폭발한다.

선배 의사가 후배를 욕하고, 다른 과 의사끼리 서로 욕하는 건 병원에서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다른 경쟁자를 용납 못 하는 주임 의사도 병원마다 몇 명 있었다. 더 나아가, 같은 도시 병원끼리 욕하고, 같은 성 병원끼리 욕하고, 전국 의사끼리 욕하고, 더 대단한 의사는 국제회의에서 글로벌하게 영어와 중국어로 서로 욕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행동은 쪽팔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의사의 실력과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력 없는 의사는 그런 상황에 멍청하게 웃고만 있을 테니.

곽종군, 제진해 같은 주임 의사급은 대학교수 정도 되는 높은 직책이었다. 학교 교수는 우아하게 고상 떨 수 있겠지만, 의사는 그러는 대신 여전히 누군가를 욕해야 했다.

왜? 의사 손엔 사람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초짜 의사가 실수한다? 당연히 욕먹어야 했다. 초짜 의사가 차트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그것도 욕먹어야 했다.

경력이 상당한 주임과 부주임 의사들도 서로 물고 뜯는다. 오늘은 네가 너무 깊이 칼을 대서 예후가 힘들어졌네, 환자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네 싸우다가, 내일은 너무 살짝 칼을 대서 임파선이 깨끗이 정리되지 않았네, 환자의 암 재발율이 높아졌네 싸우다가, 모레는 또 다 같이 둘러앉아 병원의 과잉 진료를 욕하기도 한다.

병원 내 합동 진단 때마다 주임들이 물고 뜯는 걸 보며 초짜 의사들은 가십거리를 얻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해소했다. 그러나 원외 합동 진단 때는 난장판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서로 은원 있는 의학박사들이 동네에서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많았으므로.

곽종군은 운화 병원의 능력 있는 주임인 만큼 평생 물고 뜯은 주임 의사가 그의 손에서 죽은 환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제진해가 변명할 기회를 아예 주지도 않고 면전에 대고 호통쳤다.

“내 평생 제일 경멸하는 게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사람 모함하는 사람입니다. 행정 직책으로 사람 누르는 사람이 제일 짜증 나고요. 왜요? 능연은 실습생이고 제 선생은 주임 의사라서요? 그럼 트집 잡아도 됩니까? 맨손 지혈을 알아요? 능력도 없으면서 말만 많다는 게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라고!”

신이 나서 고함치는 그의 입에서 침이 뿜어졌다. 그 침이 멀리 날아가 제진해가 앉은 테이블에 떨어지는 걸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임 의사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진해는 이제 막 과주임 그림자를 밟는 상태라 곽종군만큼 경험도 없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래서 욕을 먹어 화가 나지만 동시에 다급하기도 했다.

“곽 주임님, 주임님이야말로 무턱대고 위치로 사람 누르는 거 아닙니까?”

“쳇. 거기 논문에 적힌 글자 안 보입니까? 힘으로 누른다고요? 내가 몇 살만 젊었어도 정말 힘으로 누르는 게 뭔지 보여줄 텐데 말이죠!”

“사람을 때리면 쓰나.”

유 주임이 곁에서 한마디 거들고는 조용히 논문을 읽어 내려갔다.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우리 과의 일을 지적하니 오늘은 제대로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제진해 선생, 당신이 운화 병원 사람이라면 몰라도 성립 병원 응급 의학과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병원 일로 의료사고 운운합니까? 의료사고가 뭔지 봤어요? 의료사고가 어떤 건지 개념은 있냐고요!”

곽종군 입에서 튄 침이 테이블에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제진해는 조금 뜨끔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보고 별생각 없이 사용한 ‘의료사고’라는 단어는 확실히 의사들의 신경을 건드릴 만했다.

사실 이미 논평도 썼으니 엎질러진 물이고, 곽종군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두려울 것이 없지만, 그저 눈앞의 상황이 껄끄러웠다. 제진해를 비롯해 기습 공격당한 의사들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능연의 논문을 묵묵히 읽었다.

어찌 됐든 과주임 자리를 노릴 만한 의사이다 보니, 제진해도 논문을 쓸 만큼 썼고 읽은 논문은 훨씬 더 많았다. 일반 레지던트, 주치의의 논문은 아무렇게 집어도 트집거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능연의 논문은 달랐다.

그랜드마스터급 맨손 지혈법을 터득한 후 실제 조작하고 경험한 케이스를 기초로 쓴 논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논문은 능연이 처음으로 쓴 논문다운 논문이라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단일 케이스에 집중하면서 맨손 지혈법의 응용을 설명했기 때문에 기초가 탄탄했고 관점이 명확하다는 뜻도 되었다.

<시야 미확보 상태에서 맨손 국부 압박 지혈 간 봉합> 논문은 1,000자 남짓한 데다가 곽종군이 몇 번이고 살폈으므로 눈에 띄는 실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관련 문헌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가 있다면 반박할 만한 거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문을 건네받은 지 몇 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에 무슨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곽종군은 제진해가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주절주절, 신이 나서 거침없이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그는 운화 병원에서 유명한 독설가로 그가 망친 국제회의도 여러 번이니 원외 합동 진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제진해는 능연의 작성자 소개까지 다 읽고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맨손 지혈은 할 수 있다 칩시다. 그런데 실습생이 진행하다니요. 의료사고라고 표현한 것도 가벼운 거 아닙니까? 이건 인명에 관련된 일이라고요.”

“그런 말은 누가 못 합니까? 실습생이면 맨손 지혈하면 안 됩니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겁니까? 환자가 병상 위에서 죽으면? 그건 능력 있는 의사고요?”

“저도 동영상 봤지 않습니까. 개복해서 찬찬히 살펴도 늦지 않았어요.”

“동영상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합니까? 케이스 한 열 개 준비해드릴 테니, 원격 진료하시렵니까?”

곽종군은 콧방귀를 끼며 그렇게 물었다. 신체검사는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항목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환자를 직접 접촉하는 것은 진단을 내리는 중요한 과정이고 다시 말하면 원격 진료에서 빈번하게 실수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니 제진해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탄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문제가 없었다고 당신들 처치가 정확했다고 할 수 없어요. 실습생이 뭣도 모르고 날뛰면 선배가 막았어야죠.”

“그런 소리를 하는 것만 봐도 실습생보다 못하네요.”

“어디 나랑 실습생을 비교합니까.”

“암요, 비교가 안 되지요.”

제진해가 입을 삐쭉이자 곽종군은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면서 대답했다.

“비교하지 마시라고요.”

“제 선생은 실습생보다 못합니다.”

“비교할 상대가 아니라고요.”

제진해도 똑같이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렸고, 곽종군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그도 똑같이 몸을 숙였다.

“이 봐요, 제 선생!”

“보긴 뭘 봅니까?!”

다른 의사들은 두 사람의 몸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곧 입술이라도 닿을 것 같은 모습에 바짝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논문 작성자 이야기나 좀 들어봅시다.”

결국 보다 못한 유 주임이 하는 말에 곽종군은 냉큼 능연을 불렀다. 그는 제진해를 힐끔 쳐다보고는 도발하는 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제진해도 입술을 핥고는 똑같이 허리를 세우면서 배를 쏙 집어넣었다.

“논문 잘 봤네. 능연이라고 했지? 몇 가지 질문 좀 하겠네.”

제진해는 능연이 논문 내용이나 조작 방법을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시간 낭비도 낭비고, 설명을 다시 듣는다고 해도 아까 찾아내지 못한 구멍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능연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정의의 사도로 보였다.

제진해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면서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맨손 지혈하기로 결정 내렸을 때, 성공할 확률이 몇 프로나 된다고 생각했나?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고려했나?”

“실패하면 환자 사망, 혹은 수술 중 또는 수술 후 출혈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간 쇠약, 복수, 담즙루 혹은 소화기관 출혈이나 파열도요.”

능연은 앞의 질문을 그대로 건너뛰고 대답했다. 능연이 변명할 줄 알았던 제진해는 깜짝 놀랐다. 능연은 한참 동안 발생 가능성 있는 합병증을 읊어대기만 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경솔하게 맨손 지혈을 진행했단 말인가?”

“네.”

“네? 네라고?”

제진해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됐지만, 능연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심각한 건 알았지만, 저는 맨손 지혈을 하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능연은 제진해의 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제진해는 눈앞에 있는 능연의 사고회로에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나? 자신이 의료사고를 일으켰음을 인정하는 꼴이야!”

“의료사고는 없었습니다.”

제진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해도 능연은 그의 모습에 주눅 들지 않았다. 순간 제진해는 문득 깨달았다. 의료소송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류의 등대’ 미국에서도 의료사고를 인정받으려면 결과가 필요했다. 그러나 능연의 맨손 지혈은 깔끔하게 진행되었으며 결과도 좋았다. 오히려 홍보용으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니, 사고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말 한 번 잘했구만. 분명 사고는 없었지!”

곽종군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고 제진해는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생각을 바로 바꿔서 걱정되는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환자는 접어두고, 자네 이야기를 해보세. 젊은 나이에 능력도 있고 앞날이 창창한데, 이런 맨손 지혈 한 번으로 자신의 의사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했습니다.”

“그런데도 했단 말인가? 누가 시키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제진해는 불씨를 퍼트릴 생각이었다. 능연은 그런 제진해를 의아한 듯 힐끔 쳐다봤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환자에게 맨손 지혈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의료 판단이고요.”

제진해는 상상도 못 한 대답을 듣고 멍해졌다. 오히려 유 주임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좋구만. 요즘 젊은이들은 참 자기 생각이 뚜렷해. 음, 의료 절차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기초적인 판단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를 할까, 그것이지. 그게 우리 기본 아닌가? 의료 절차 규정에 부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치료를 포기한다면,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아니겠나?”

“환자가 당시에 과다 출혈로 쇼크가 와서 일반적인 지혈 처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맨손 지혈을 하는 것이 가장 의료 규정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유 주임이 제 편을 드는 게 분명한데도 능연은 그의 말을 반박했다.

“다 응급 의학과 사람 아닙니까? 뻔히 아는 말을 돌리지 말고 이야기하죠. 그 당시에 개복 검사를 했다면, 운이 좋아야 출혈 포인트를 바로 찾았을 겁니다. 그런데 운이 나빴다면 환자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요. 그러니 규칙만 따지는 건 오히려 인명을 경시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어떻게 치료할 것이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지요.”

곽종군은 비웃듯 말했다. 그러자 제진해는 그를 비롯한 실내 모든 사람이 저를 공격하는 것 같은 모습에 화를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의료 절차를 무시하다간 의사 생활도 오래 하지 못합니다. 그거야말로 주객전도 아닙니까? 의료사고 한 번이면 의사 생활이 끝장난다고요!”

제진해는 능연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노련한 곽 주임보다 젊은 능연이 더 좋은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능연은 제진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선배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능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사는 세포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제 기능을 발휘해야죠. 하지만 단순히 오래 생존하기 위해서 원래 기능을 잃은 세포는 암세포에 불과합니다.”

능연은 아주 덤덤한 말투로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지만, 듣는 사람마다 느낌이 달랐다. 나이가 많은 주임과 부주임 의사는 능연의 말을 듣고 침묵에 빠졌다. 젊은 의사는 한마디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눈빛으로 눈을 부릅떴고, 서로 귓속말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만 먹어가면서 오뚝이처럼 버티는 것들은 다 좋은 놈들이 아니지. 제 선생, 승진이 목표라면 차라리 일찍 행정 쪽으로 방향을 돌리시죠.”

곽 주임은 그렇게 결론을 지으며 제진해를 노려봤다. 제진해도 행정으로 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잘난 의사인 만큼, 행정으로 가도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이번 논란의 중점이 아니었다. 곽종군의 위에서 내리찍는 것 같은 발언과 유 주임의 은근한 배척에 제진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요.”

말싸움하기 싫어진 제진해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은 저격당하기 싫어졌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음에 원외 합동 진단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든 성립 병원에 유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거긴 자신을 편들어줄 후배 의사가 있으니 말이다.

“간다는 데 말릴 건 없고, 제 선생, 하나만 기억합시다.”

“뭡니까?”

이미 욕할 만큼 욕을 해서 속 시원해진 곽종군이 말하자 거의 문 앞까지 다가간 제진해가 고개를 돌렸다.

“웨이보인지 어딘지에 올린 그 논평, 깨끗하게 지웁시다. 내일 이 시간쯤 보고서를 낼 생각입니다.”

곽종군이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자 제진해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말없이 곽종군을 응시하다가 휙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어떤 보고서를 말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제진해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원외 합동 진단은 토론이라기보다 싸움에 가까웠고, 회의 기록이 위로 올라가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었다.

지금 성립 병원 응급 의학과 주임이라면 제진해도 곽종군이 뭐라고 쓰든지 말든지 신경 쓸 것이 없었다. 혹은 욕심 없는 나이 많은 주임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화상 센터를 설립하길 꿈꾸는 제진해는 욕심 없음과 거리가 멀었다.

“두 선생, 제 선생 배웅하고 오게.”

곽종군은 흡족한 듯 얼굴 가득 미소 지었고 다른 의사들도 웃음이 전염된 듯 따라 웃었다. 유 주임은 능연을 보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원외 합동 진단을 마친 곽종군이 개선장군처럼 유 주임을 모시고 식사하러 나가자, 다른 의사들도 뿔뿔이 훑어졌다. 요즘 과 회식은 금지되어 있어서 규정을 일부러 어길 사람도 없었다. 주 선생은 슬쩍 능연을 끌어당겨 재빨리 의국을 벗어났다.

“괜히 안에 있다가 말실수할까 봐.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을 거야.”

복도를 빠져나간 후에 주 선생이 사람 좋은 말투로 능연에게 설명하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벌써 말실수하긴 했지만’ 하고 덧붙였다.

“제가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능연을 힐끔 본 주 선생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의료 과정 얘기는 최대한 안 하는 게 좋아. 적어도 우리가 할 말은 아니야. 환자 얘기 같은 건, 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괜찮아도 쓸데없이 공론화하지 마. 다들 예민하거든.”

“아······.”

“왜인지 안 물어?”

초짜 교육을 여러 번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들 이것저것 묻는데 능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주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묻고 싶지 않습니다.”

통쾌하게 대답하는 능연에 오히려 주 선생이 당황했다. 해줄 말이 한가득 있었는데, 인제 어쩌지?

“저녁에 나랑 당직 서자.”

“네.”

이번에도 능연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주 선생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직은 힘든 일이기도 하고 병원에서 의료 분쟁 다음가는 골칫거리기도 했다. 길게는 24시간 지속하는 일도 있고 재수 없으면 36시간 이어지기도 했다. 나태 파괴기, 헬스 스팀 해머, 이혼 스팀 엔진이라고까지 불리면서 의사들이 회피하는 게 바로 당직근무였다.

그러나 실습생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동물이고, 특히나 능연은 표정에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주 선생은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밤에 당직 서보면 알게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