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능연은 눈 뜨자마자 정원 바닥을 쓰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빼고 보니 역시나 승복을 입은 동한생이 열심히 바닥을 쓸고 있었다.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뿌리려고 깨끗한 물도 곁에 한 동이 준비해두었다.
동한생은 자기 키만 한 빗자루를 들고 느긋하게 비질을 했다. 능연의 집에 묵을 때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절에서 하는 것처럼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난간이나 문턱 같은 곳을 쓸고 닦았다.
세수를 마친 능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한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골목에 있는 가게로 가 요우타오와 또우장(중국인이 아침 식사로 자주 먹는 음식. 요우타오는 밀가루를 얇게 튀긴 것. 또우장은 두유의 일종)을 사왔다.
아침을 먹자고 동한생을 불러 왔을 땐 다시 여느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순한 모습이었다. 동한생은 도평이 만든 채식보다 기름진 요우타오와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또우장을 훨씬 좋아했다.
“천천히 먹어. 모자라면 아저씨 또우장 더 먹어도 돼.”
도평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한창 맛있게 먹던 능결죽이 멈칫했다.
“왜 당신 게 아니라 내걸 먹으래요?”
“그럼 당신이 모자라면 내걸 먹어요.”
능결죽은 금세 흡족한 듯 미소 지었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동한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부님이 그러시는데 제가 불교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 월급을 받을 수 있대요. 그러면 제가 또우장 사드릴게요.”
“아이고, 그래, 그래.”
활짝 웃으면서 기뻐하던 도평이 갑자기 능연을 흘겨봤다.
“넌 대학도 졸업했는데 왜 우리한테 또우장 안 사니?”
능연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평을 똑바로 바라봤다.
“엄마, 엄마가 들고 있는 그 그릇, 내가 사 온 거거든?”
“아, 아이고 참. 아들 첫 월급으로 사 온 첫 선물인데, 사진을 안 찍었네!”
잠시 멈칫한 표정을 짓던 도평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펄쩍 뛰어올랐다.
능연은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나오면서 동자승에게 약을 챙겨주고는 가는 길에 버스에 태웠다. 동한생은 익숙한 듯 빈자리를 찾아 앉고는 능연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바로 <지음(知音)>이라는 책을 꺼내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뻥긋대며 읽기 시작했다.
능연은 건너편에 서서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 천천히 걸어서 운화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은 의사들이 가장 느긋한 시간이었다. 회진 전이라 병원 업무에서 오는 각종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집에서 나와 집안의 잡다한 일을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능연은 아직 완전히 병원 생활에 파묻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길을 걸으며 햇볕 쬐는 걸 즐겼다.
운화 병원이라는 강철로 된 네 글자가 보일 때쯤, 능연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병원으로 들어간 능연은 옷을 갈아입고 바로 휴게실로 향했다. 실습생은 일단 휴게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하나씩 콜을 받고 나간다.
“능 선생님.”
왕가 간호사가 능연을 불렀다. 뛰어온 건지 코끝이 살짝 붉었고 땀방울도 맺혀 있었다. 능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바라봤다.
“수간호사님이 보내셨어요. 오늘부터 제가 선생님이 탕 봉합 수술할 때 따라 들어갈 거예요.”
“아, 네. 수술실에서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아이고 부탁은요. 저도 열심히 배울게요!”
잠시 멈칫했다가 미소 짓는 능연의 모습에 왕가가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었다.
새로운 수술 방식은 의사에게도 도전이지만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팀의 궁합이 잘 맞으려면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도 수술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타이밍 맞춰 적당한 기구를 건넬 수 있으며 의사의 주의력이 한 곳에 집중됐을 때 허점도 채울 수 있었으니.
대부분 의사는 선임 레지던트, 심지어 주치의가 되기 전까지 스크럽 간호사에게 혼나고, 수술실 간호사에게 설교 듣고, 순회 간호사에게 재촉받는 경험을 한다. 특히 초짜 의사들은 맹장 수술 같은 간단한 수술을 연습용으로 하는데 간호사들은 백 번 정도 한 수술이라, 초짜들이 맹장을 찾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도 한소리 안 할 간호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탕 봉합 같은 큰 수술은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간호사들이 능숙해지지 않는 데다가 능숙해질 만큼 수술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큰 수술 때는 대부분 병원이 수술 전 회의에도 간호사를 불러서 수술 절차를 이해시킨다. 개중에는 집도의를 살피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간호사도 있었다.
지금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왕가처럼 말이다.
“능 선생님, 구체적으로 어떤 도구가 필요하세요? 그리고 인원은요? 다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리포트 쓸게요.”
“그다지 특별할 건 없어요. 탕 법은 사실 특수한 도구를 쓸 필요는 없거든요. 손가락 굴근건 봉합이랑 같아요. 우리 병원에서 자주 쓰는 방법만 해도 두어가지 있을걸요? 사용했던 방법도 거의 열 가지 정도 되고요. 탕도 그 안에 다 있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능연이 그렇게 대답했다.
수술 빈도와 성공률이 나뉘어서 그렇지, 운화 병원의 정형외과, 일반 외과 그리고 응급 의학과에서 모두 수부 근건 봉합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 특히 운화 병원 같은 대형 종합병원의 경우, 어떤 수술법을 채택할지는 대부분 과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과의 이름난 의사들이 결정했다.
대단한 의사들은 항상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관심사를 추구한다. 각종 직무 평가와 연도별 자격 인증 때, 의사들에게 새로운 수술 방법을 요구하기도 하고.
응급 의학과는 운화 병원의 거대 진료과이니 곽종군이 수부외과 환자를 뺏으려 한대도 수부외과 이외의 다른 과는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거 아니라도 괜찮아요. 뭐든 말씀하시면 되는데. 지금 안 하면 나중에는 얘기하기 힘들어요.”
왕가는 능연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일부러 다시 설명했다.
“우선 환자가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하죠.”
“환자는 오늘에라도 생길 수 있어요. 먼저 고민해 두시는 게······.”
“곽 주임님이 환자를 찾으셨나요?”
능연이 왕가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의사가 새로운 수술 방법을 쓸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환자의 수요였다. 환자를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의학 연구가 복잡한 경지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협화(協和)의 거물급 의학박사 오가평도 그의 성과 중 하나인 새로운 질병, 부신 과다 형성(Amh; Adrenal medulla hyperplasia)을 증명하기 위해 예순이란 나이에 16년이란 시간을 들여 병례를 17개 수집했다. 일 년에 하나, 이런 수동적인 기다림에 의사는 천문학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왕가는 능연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 당황했다.
“손가락 굴근건을 다친 환자는 널렸어요. 우리 병원에도 며칠에 한 번씩 들어와요. 급하면 응급센터에 전화만 해도 굴근건 환자를 보내줄걸요? 곽 주임님한테 부탁해서 구나 현 병원에 전화해도 되고요. 운이 좋으면 오늘 당장에라도 한 건 정도는 있을 거예요.”
그러자 이번엔 능연이 당황했다.
“어시는요? 누가 어시 하는데요.”
“곽 주임님이요. 선생님은 집도 자격이 없으니까, 곽 주임님이 집도하신 거로 기록될 거에요. 선생님은 어시고요. 그런데 실제 수술은 선생님이 하시겠죠.”
왕가는 말을 하면서 난처한 듯 입술을 핥았다.
“곽 주임님이 나중에 말씀하실 거예요. 제가 미리 말씀드린 건 모른 척하세요.”
능연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나 곽 주임이 그를 소환해서 집도와 어시스턴트 문제를 거론했다.
“편의를 위해서 조수 두 명도 있으면 합니다.”
능연은 안 될 것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주임이 어시스턴트를 한다는 건 못 미더웠다.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번 수술실에 틀어박혀 조수를 하겠나. 사실상 다른 과의 과주임도 대부분 집도의로 이름만 걸어놓고 실습생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곽종군도 분명 처음에만 몇 번 신경을 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대형 사슬이 아니라 대형 응급실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그럴 셈이었네. 음, 연문빈으로 하세. 이제 교육 과정이 막 끝났으니, 잘 배워두라고 해.”
사실은 탕 봉합법을 더 빨리 배울 수 있도록 주치의를 배정하고 싶었지만, 능연이 실습생이라 그럴 순 없었다. 레지던트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저 훅맨이 필요할 뿐이라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연문빈은 킹카 축에 드는 의사 중 하나였다. 몸매도 괜찮고 신발을 신은 키가 180cm는 됐다. 운동을 오래했는데 복근은 없어도 가슴 근육은 모스키토 포셉으로도 동맥을 짚을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거기다 어깨 근육은 주사용 바늘을 구부러뜨릴 정도로 단단했다.
피부가 조금 거칠고 털이 많고, 얼굴이 살짝 비대칭에 콧대가 높지 않고, 두 눈 넓이가 조금 부족하고 이마가 조금 넓은 것을 제외하고는 살짝 오다리에, 발 냄새가 나고, 목이 짧고, 입술이 두껍고, 턱이 좁고, 성격이 무르고, 월급이 적고, 차도 집도 없다는 단점 몇 개밖에 없었다.
어쨌든 응급 의학과 기준으로 보자면 35세 이하, 장애 판정이 아닌, 장점이 하나라도 있는 의사는 과 킹카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응급 의학과 사람들은 다들 그를 챙겼고, 주치의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 연문빈을 콜하곤 했다.
연문빈도 항상 열정적이라 수술실에서 두세 시간 동안 훅맨 역할을 했다.
외과 수술에서 시야를 확보하려면 메스로 피부를 가르고 전용 플레이트 훅으로 근육을 한쪽 또는 양쪽으로 벌려야만 했다. 훅맨이 하는 일은 말하자면 아주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근육은 활성화된 것이라 가운데로 수축하기 마련인데 훅 레지던트 혹은 훅 실습생은 오랜 시간 수술실 생활을 하며 건장한 근육을 단련해낸다.
연문빈의 헬스 효과는 수술실에서 인정받을 뿐 아니라 응급실 혹은 처치실에 그가 나타날 때도 의사나 간호사들이 자주 그를 콜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의국에서 곤죽이 되는 건 젊은 과 킹카의 운명이었다. 연문빈은 진료과들을 돌며 곤죽이 되는 고된 훈련 기간이 끝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드디어 정상적인 과 킹카처럼 의국에 뿌리를 내리고 선임 레지던트, 주치의, 부주임 그리고 주임 밑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연문빈은 포비돈을 비롯한 84가지 냄새를 세세히 구분하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창문 밖 햇볕이 얼굴을 솜털 하나하나까지 똑똑히 보일 정도로 비췄다.
“연문빈.”
곽 주임이 저쪽에서 손을 까딱이자 연문빈은 산타클로스에게 달려가는 루돌프처럼 신이 나서 다가갔다.
“주임님.”
“오늘부터 능연을 따라다니면서 탕 봉합법 배우게.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
곽종군은 연문빈이 뭐라 반응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사라졌다. 연문빈이 정신 차렸을 때, 직속 상관 두 부주임이 어느새 함박웃음을 지은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문빈아 축하해. 탕 봉합법은 우리 응급 의학과에서 기대하는 큰 수술인데 말이야. 창서성 전체로 봐도 대단한 기술이라고. 앞으로 이것만 터득해도 장래가 밝아. 이번에 곽 주임님 눈에 든 건 도전이기도 하고 운이기도 해. 열심히 해서 꼭 좋은 경험을 쌓길 바란다!”
연문빈은 망연자실해서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주임님이 저더러 실습생 조수를 하라고 하신 겁니까?”
“집도의는 곽 주임님이셔. 능연이 퍼스트 어시고, 네가 세컨드.”
두 부주임이 연문빈의 오류를 고쳐주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요!”
“뭐가 이상해. 요즘 세상에 학력은 아무것도 아니야. 왜? 쟤는 실습생이고 너는 레지던트라서 네가 퍼스트하고 재는 세컨드 하란 법이라도 있어?”
“아니, 퍼스트, 세컨 문제가 아니고요······.”
“그럼 됐어.”
어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연문빈이 말을 이었지만 두 주임은 바로 말을 자르고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부담 가질 거 없어. 어차피 넌 지금 젊고 딱 기술을 배울 때잖아. 이렇게 생각해 봐, 탕 봉합법을 배워두면 주치의 승진이 문제겠냐? 다른 의사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기회라고.”
“그럼 다른 사람 하라고 해요.”
“흠흠. 곽 주임님이 너라고 정했는데 내가 어쩌냐. 일단 그렇게 하자.”
두 주임은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졌다. 연문빈은 어쩌면 좋을지 물을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거기다 그가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역병 취급하며 피하기 바빴다. 그렇다고 주치의를 찾아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연 선생! 찾고 있었잖아.”
왕가가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가 연문빈을 덥석 붙잡았다.
“의국에도 없고 수술실에도 없고! 어디 갔었냐?”
“나, 나도 몰라. 곽 주임님 어디 계신지 알아?”
“환자 구하러 가셨는데.”
“환자?”
“응. 남태현에 엄지 굴근건 파열된 환자가 있대. 원래 절단하려고 했다던데, 주임님이 그 소식을 듣고 연락하셨다나 봐. 우리 응급실에서 탕 봉합 수술해 보라고. 지금 설득 중이야. 능 선생님 지금 옛 창고 방에 있는데 나더러 연 선생 찾아오라더라. 연습하래.”
“잠시만, 잠시만. 말이 왜 이렇게 빨라. 곽 주임님이 뭘 설득한다고?”
정신없는 연문빈의 모습에 왕가는 입을 삐쭉이면서 속으로 ‘햇병아리’라고 생각했다.
“환자가 절단 수술을 택한 건 돈 때문이었대. 절단 수술은 현지 삼을 병원에선 3천 위안 정도인데 탕 봉합법으로 하면 6천 위안 정도니까. 그래서 곽 주임님이 50% 깎아준다고 하신 거지.”
“돈 아끼려고 절단한다고?”
이제 막 실습 생활을 마친 초짜 레지던트인 연문빈은 매우 놀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곽 주임님이 할인도 해준다는데 왜 바로 안 오고? 또 뭘 더 설득하는데?”
“병원비가 수술비만 드는 게 아니잖아.”
간호사 생활을 오래한 왕가는 연문빈보다 환자를 더 많이 봐왔다.
“환자가 남태현에서 운화까지 오는 데 만 천 위안 정도 들지? 타지역 진료비도 조금 더 들 거고. 그리고 절단하고 나면 바로 일해도 되지만, 근건 봉합하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지? 의료 보험도 없고 일정 직업도 없으니까 지출은 늘고 수입은 줄잖아. 그러니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은 거지.”
연문빈은 묻고 싶은 게 가득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빨리! 능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왕가가 다시 재촉하자 연문빈은 순순히 그 뒤를 따라 옛 창고 방으로 향했다. 옛 창고 병실은 입원 병동이 물품을 쌓아두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옮기기 불편한 무거운 짐들이 쌓여 있었다. 연문빈이 응급 의학과에 온 몇 년 동안 그곳에 가본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연문빈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르륵 늘어선 족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옛 창고 방에 새하얀 족발이 등불 아래 놓여 있으니, 그 아래 앉은 능연이 괴이한 의식을 진행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능 선생님, 저희 왔어요.”
왕가의 높은 목소리에 마음 가득했던 괴이한 느낌이 날아갔다.
“이 족발은 뭐야? 원래 있던 거야?”
“제가 산 겁니다. 여 선생님. 이걸로 굴근건 봉합 연습하려고요. 일단 한 세트 해볼까요?”
아무런 경험 없는 어시스턴트를 쓰다간 아무래도 자신이 곤란해지리라 생각한 능연은 미리 연문빈을 연습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문빈은 아무래도 망설여졌다.
“MTP Joint(발가락뼈 사이 관절) 심근건 절단해놨습니다. 기본적으로 손가락 관절 2구역 굴근건 파열 손상이랑 비슷해요. 내가 우선 한 세트 꿰매 볼게요. 잘 보세요.”
능연은 메스를 들고 눈앞에 놓인 족발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는 상대의 뜻을 물을 생각이 없는 듯 앞에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메스를 내려놓고 니들 홀더를 집어 올렸다.
“곽 주임님이 그 환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어떡할 거야?”
연문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능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환자 찾기 시작했으니 언젠간 오겠죠. 우린 기다리면 됩니다.”
이야기하는 사이 그의 손에 들린 바늘은 어느새 돼지 발굽 뒤쪽 굴근건을 꿰뚫고 지나갔다.
한 땀, 한 땀. 능연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놀렸지만, 연문빈이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살짝 수술 방향을 조절했다.
연문빈은 남몰래 군침을 삼켰다. 근건 봉합은 세밀한 작업이고 돼지 뒷다리 하나로도 충분히 오래 연습할 수 있다.
능연은 두 사람이 탕 봉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마스터급 탕 봉합법도 대단했지만, 그랜드마스터급과 비교하면 상당히 차이 났다. 가장 큰 차이는 성공률과 수술 후 회복 상태였다.
물론, 전형적인 굴근건 파열은 마스터급이나 그랜드마스터급이나 큰 차이가 없다. 그저 정해진 과정을 따라 진행하면 실패할 확률도 낮고, 실패한다고 해도 상대적이라 회복 정도가 너무 나쁘지만 않으면 대부분 의사가 진행한 성공 케이스보다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반드시 전형적인 케이스만 만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절대다수의 실패 케이스는 비전형적일 때 발생했다.
비전형 케이스는 의사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기도 하다. 임상의학의 발전이란 비전형 환자, 비전형 해부 구조, 비전형 신체 상황과 비전형 외상을 서서히 전형 케이스로 귀속시키는 과정이다.
현재 가장 쉬운 복강 수술로 인식되는 충수염, 일반적으로 맹장염이라고 부르는 수술도 과거 수백 년 동안 기록을 살펴보면 사망자 수가 당시 시인보다 훨씬 많았다. 현대 의학으로 맹장염을 정복한 것도 한 발짝 한 발짝 경험을 쌓아 온 결과였다.
예를 들어 콜린스(colins)는 95년까지 맹장 자료를 5만 건 수집해서 맹장의 위치를 총결(總結)했다. 그는 95.48% 인간의 맹장은 복부 오른쪽 아래, 나머지 0.58%가 복부 오른쪽 위에 있다고 규정하면서 의사들에게 맹장 수술할 때 무턱대고 온 배를 헤집지 말고 우선 오른쪽 아래를 찾고 안 보이면 위, 그래도 안 보이면 왼쪽 아래를 찾으라고 교육했다.
지금 의사들은 맹장 위치는 모두 8가지 상황이 있고, 발육 이상 6가지, 기형 4가지, 이상 위치 조직도 4가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과거에 비전형에 속했던 케이스를 모두 전형 케이스로 귀납했다.
절개 방식도 팔 아래부터 길게 내던 방식에서 손가락만 한 길이로 내는 데까지 발전했고, 복강경을 사용하면서 구멍 세 개만으로 수술을 진행하기까지 이르렀다.
탕 봉합법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에 처음으로 시작된 이래, 전형적인 굴근건 파열부터 시작해서 점차 확장되어왔다. 능연은 그랜드마스터급 탕 봉합법으로 대부분 2구역 굴근건 파열에 대응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마스터급도 비슷하지만, 간당간당하게 걸린 비전형 케이스인 경우 성공률과 회복력이 다소 떨어졌다.
그러나 의사는 자기가 어떤 케이스 환자를 만날지 보장할 수 없다. 곽 주임이 수부외과의 환자를 뺏으려고 마음먹은 이상, 앞으로 굴근건 파열 환자가 잔뜩 몰릴 것이고, 인원이 쌓이다 보면 비전형 케이스도 반드시 나타나리라. 단지, 얼마나 비전형일지 그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중급 보물 상자에서 나온 ‘1급 스킬북’에서 그랜드마스터급 기술을 얻은 것 외에 다른 선택 범위는 기초 기술에 불과했다.
마스터급 탕 봉합법은 단일 항목 스킬북에서 나온 것이고 수술 방법의 하나였다. 앞으로 그랜드마스터급 탕 법 혹은 다른 근건 봉합법을 얻을 수 있는 유사한 스킬북이 나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사실, 시스템이 그에게 새로운 스킬북을 준대도 스킬 창고를 확장할 뿐, 이미 가진 마스터급 탕 봉합술을 그랜드마스터급으로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가성비가 너무 떨어졌기에 총 맞지 않은 이상 그런 선택을 할 능연도 아니었다.
조금만 냉정하게 분석해도 답은 나왔다. 지금 실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실력을 통하는 것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수술 방법으로 백 번 넘게 하다 보면 아무리 서툰 의사도 평균 이상으로 실력이 올라간다. 같은 방법으로 천 번 수술을 진행한 의사가 있다면 분명히 그 분야의 능력자이리라.
능연은 순서를 차근차근 지키고 자기가 자른 족발의 굴근건을 봉합하면서 가끔 한마디씩 설명을 곁들였다.
“근건을 꿰뚫은 다음 바로 맞은 편에서 바늘을 집어넣습니다. 세로로 근건을 다시 꿰뚫고 돌아오는 거죠.”
“가까운 쪽에서 매듭을 묶고요.”
“두 번째 링은 손바닥 중앙에서 첫 번째 링 매듭이랑 고정하고 세로로 근건을 꿰뚫고 지나갑니다.”
“먼 쪽 매듭도 이제 묶으면 됩니다. 손바닥 중앙에서 묶는 게 좋아요.”
능연은 마이크로 글래스를 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시야 중앙을 응시했다. 연문빈은 능연이 자기 들으라고 설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도 모르는 새 양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탕 봉합법을 깨닫기엔 아직 멀었고, 능연이 설명했다 해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술 방법은 다 한 발짝씩 터득하는 것이다. 봉합 과정이 무술 비급도 아니고, 아무 때 어디서든 구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수술을 했든 아니면 보조를 했든, 현장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 중의 극소수였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연문빈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탕 봉합법을 배운다면, 어떤 모습일까?
응급 의학과에서 정말로 수부외과 수술을 시작하려면, 능연 한 사람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다. 능연이 선발대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고, 곽종군은 그 뒤에 설 사람들을 어떻게든 채우려 할 것이다.
다른 병원에서 스카우트 하거나, 수부외과 의사를 조달하거나, 응급 의학과 내부 실습생 과정에서 배출하거나, 모두 가능성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을 채택하든지, 연문빈 같은 레지던트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있었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능연이 기꺼이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의사들처럼 친절하게 말과 행동으로 자세히 알려주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능연의 실력 자체가 뛰어나서 연문빈의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실습생 밑에서 어시 하는 껄끄러움도 이제 많이 사그라졌다. 초짜 의사는 뻔뻔해져야 했다. 배울 수 있는 건 배우는 게 최고다.
“능 선생님. 곽 주임님 곧 돌아오신대요. 4시간 정도?”
“아, 그럼 퇴근 시간이네. 흠······.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겠는데요?”
전화를 받고 온 왕가가 하는 말에 능연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 족발 삶을 줄 알아.”
순간, 능연과 왕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실습생 할 때 자주 삶아 먹었어.”
“실은 꼭 뽑고 삶으세요.”
쑥스러운 듯 말을 꺼내는 연문빈의 모습에 능연은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연문빈마저 살살 녹아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따 환자랑 환자 가족이 우리가 족발을 뜯는 걸 보고 도망가면 어쩌죠?”
“다친 사람이 뛰어봤자 벼룩이죠. 잡아 오면 돼요.”
족발에 실을 뽑는 걸 도우면서 왕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 뒤에서 능연이 유유히 대답했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강렬하고 다급해 보였다. 하얀 벽, 하얀 천장의 옛 창고 방에 족발이 흔들리면서 희한한 그림자 효과를 불러왔다.
연문빈은 현미경을 끼고 핀셋으로 족발의 잔털을 하나하나 뽑았다. 능연이 건의한 학습 방법이었는데 그도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에 마이크로 글래스를 사용한 적이 없는 데다가, 실제로 쓰고 조작한 건 더더욱 없으므로 족발의 털을 뽑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연습이 되었다.
운화 병원에서 실습생에게 마이크로 글래스를 쓰고 연습할 기회를 주는 건 수부외과밖에 없었다. 봉합 실력이 보통은 되는 연문빈은 실습생 시절에 써볼 기회 없던 마이크로 글래스를 쓰고도 일사불란하게 잔털을 뽑아냈다.
털을 다 뽑은 연문빈은 기숙사동 주방으로 족발을 가지고 가서 삶기 시작했다. 솔로가 많은 병원 기숙사엔 도서관뿐만 아니라 주방과 세탁실도 있었다. 그래서 쉴 시간도 별로 없고 월급도 낮은 의사들이 어찌어찌 생활할 수 있었다.
“전에 쓰고 남은 조미료가 있었어. 간장, 양파, 생강, 후추, 고춧가루······. 두 시간만 끓이면 될 거야. 인당 하나씩 들고 뜯자고.”
연문빈이 숨을 몰아쉬며 돌아와 공치사하듯 늘어놓았다.
“얘기 들으니까 좀 하나 보네?”
왕가가 배가 고픈지 배를 슬쩍 문질렀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네.”
능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근건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맛이 괜찮을걸? 능연이 족발을 잘 골랐어. 다 뒷다리더라고. 살도 두툼하고 콜라겐, 단백질 덩어리. 간이 스며들라고 내가 칼집도 냈지.”
“능 선생님, 족발도 고를 줄 아는구나. 나는 할머니랑 시장 가도 할머니가 매번 고르시는데.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뒷다리라야 굴근건 봉합 연습할 수 있거든요.”
능연은 잠시 고개를 들고 목운동하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상상도 못 했던 대답에 왕가와 연문빈 모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연문빈은 이내 착실하게 마이크로 글래스를 쓰고 그의 손놀림을 관찰했다.
능연은 차근차근 탕 봉합법 과정을 반복하며 보여줬는데,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적어도 뭘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어떤 과정은 왜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부분 조작 방법은 알게 되었고 적어도 어디서 피부를 당겨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실 좀 당겨주세요.”
다시 반복하는 과정에서 능연이 명령을 내렸다. 연문빈은 잠시 멍해졌다가 기뻐서 펄쩍 뛰면서 거의 두 손으로 받치듯이 실을 끌어당겼다.
족발 하나, 족발 둘.
수술 전 소독이나 수술 후 유합 상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능연은 중요한 스텝 몇 부분만 진행하면서 새하얀 족발을 재빠르게 소비했다.
띠띠띠.
연문빈의 핸드폰에서 맑은 알람이 들렸다.
“저기······. 족발 다 됐나 본데?”
“빨리 가서 가져와! 배불리 먹어야 수술하지.”
연문빈이 하는 말에 확 허기가 오른 왕가는 그를 재촉했다.
“능 선생. 그럼 먼저 가서 족발 가져온다?”
“이것도 가지고 가세요.”
연문빈의 시선이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미는 막 봉합한 족발에 향했다.
“족발은 식어도 맛있잖아.”
왕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연문빈은 낑낑대며 족발을 껴안고 잰걸음으로 기숙사동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