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31화 (860/877)

능연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느긋하게 택시를 잡아 시간에 맞춰 윈덤 호텔에 도착했다.

“능 선생님 오셨어요? 아침에 수술도 하고 오셨다면서요?”

입구 쪽에서 기다리던 사역하가 열정적으로 그를 반겼다.

“네, 세 건 하고 왔어요.”

수술 이야기에 능연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차가움이 조금 가셨다. 사역하는 속으로 엄청 잘생겼다고 생각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홍보 책자를 건넸다.

“소개 책자예요. 포럼은 오후에 정식으로 시작하니까 그 전에 미리 흥미 있는 화제를 골라 두시면 돼요. 메인 홀 옆에 작은 홀도 빌려 놨으니까 거기서 좀 쉬시면서 에너지 보충하세요.”

“오후에 시작한다고요?”

대수롭지 않게 홍보 책자를 넘기던 능연이 물었다. 유치원 때부터 사진이 여기저기 돌았었다. 인제 와서 한두 장 더 뿌려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오전엔 서로 인사하고 친해지는 시간으로 준비했거든요. 혼자 계셔도 되고 다른 의사들이랑 이야기 나누셔도 돼요. 대화 잘 통하는 분들이랑 어울리다가 포럼 시작하면 적합한 방향으로 가시면 되고요.”

능연 같은 수술형 외과 의사에 아주 익숙한 사역하가 그렇게 설명했다.

“포럼이 서로 인사하고 친해지는 시간 아닌가요?”

능연이 초짜였음을 그제야 떠올린 사역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포럼은 공적인 공간이고요. 여러분의 대화 내용은 모두 기록된답니다. 관점이 서로 달라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도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고요. 어쨌든, 사전에 서로 교류하면서 비슷한 성향끼리 만나서 토론도 하고······.”

“곽 주임님은 오셨나요?”

능연의 머릿속에 불대포 쏘기를 좋아하는 곽종군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의 물음에 사역하는 얼굴을 살짝 굳혔다. 당초 이 포럼을 시작한 것도 모두 곽종군 등 ‘대화’ 나누길 좋아하는 의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때는 젊을 때였고 곽종군 등이 좋아하는 ‘대화’가 그토록 자극적일 줄 몰랐었다. 지금이라면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많은 학술회의에서 거절당해서 제약 회사 영업 사원에게 회의를 조직하도록 시켰을까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너무 생각이 많았다면, 지금의 지위와 벌이도 없었겠지. 사역하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곽 주임님은 오후에 오신댔어요. 강연하시러 오는 VIP니까 준비할 게 좀 더 많겠죠. 능 선생님 이쪽으로 오셔서 일단 뭐 좀 드세요.”

그는 능연을 데리고 메인 홀 옆에 있는 작은 홀로 들어갔다. 홀 안에 깨끗한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 음식이 정성스럽게 놓여 있었다.

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긴 테이블에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음식을 먹고 마시기만 하는 사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능연도 재빨리 분위기에 적응해 긴 테이블을 따라 접시에 먹을 것을 담았다. 그가 음식을 주시하는 동안,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누가 먼저 나설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사역하의 예쁘장한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 소개팅, 아니, 포럼엔 여의사들이 제법 많이 왔다. 그래서 더 많은 남자 의사들이 왔고, 그렇게 인원수가 늘어 대장들도 왔다.

사역하는 산부인과 백 주임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포스터 몇 장 바꾸고 홍보 책자 몇 페이지 끼워 넣은 것으로 바로 이런 효과가 나다니. 어쩌면 모두의 집단 지성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소개팅이라는 콘셉트는 회사에서 거액의 홍보비를 들인 것보다 훨씬 좋은 홍보 효과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로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젊은 의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보편적으로 조건이 좋지만, 시간이 없어서 상대를 이해할 시간이 적었다. 의료계 쪽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대부분 환자뿐이어서 평균 결혼 연령이 점점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의사의 소개팅, 아니, 포럼은 다른 효과를 불러왔다. 포럼에 참여하는 의사는 좀 더 우수한 사람으로 대부분 의료계에서 유명한 능력자였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주목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의사와 의사, 혹은 의사 집안끼리 통하는 것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서로 상대가 얼마나 우수한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소 지은 채 즐거워하는 의사들의 모습에 사역하도 성취감을 느꼈고 능연을 보니 흡족함이 배가 되었다.

“능 선생?”

이모뻘인 여자 의사 하나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로 했다. 그는 능연 곁으로 다가가 유심히 얼굴을 살피더니 미소 지었다.

“성 아동 병원 응급 의학과 주임 모환추예요. 맨손 지혈 동영상 봤어요. 어디서 배운 기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능연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자료인 맨손 지혈은 대화를 트기 좋은 소재였고, 그는 역시나 홀랑 넘어갔다.

“집안 진료소에서 배웠습니다.”

“진료소를 해요? 운영은 잘 되나요?”

“그럭저럭이요.”

“아버지가 하시는 건가요?”

“네.”

“그럼 아버지도 의사?”

“아닙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가족은 몇 명?”

1분 후, 탐색을 마친 모환추가 사람 사이에 있는 딸을 향해 손짓했다.

“능 선생, 우리 딸하고 동갑이네. 우리 딸 소윤이가 올해 막 의대를 졸업해서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경험 좀 이야기해줘요. 아직 일을 할지, 아니면 학교를 계속 다닐지도 모른답니다. 젊은 사람끼리 이야기 좀 나눠봐요.”

긴 머리에 정성 들여 화장한 모환추의 딸은 미녀라고 불릴 만했다. 낭창낭창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에 자신감이 부족한 다른 여자들은 기가 죽었다.

모환추는 고개를 치켜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도 아동 병원의 원로였고, 남편은 건설국 처장급 간부인 데다가 딸은 미모의 재원이라 잘난 사위 하나가 부족한 것 빼고 완벽한 인생이라 할 만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예쁘고 착한 쌍둥이를 낳으면 손자는 의사하지 말고 정계로 진출하든 금융계로 나가면 되고 손녀는 뭘 하든 상관없으니, 의사 사위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능 선생님도 오셨네요?”

여린 목소리가 들리자, 홀 안의 분위기가 묘하게 긴장되었다. 딱 달라붙은 옷을 입고 핫팬츠에 목이 긴 스니커즈를 신은 여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도 하지 않고 바로 능연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 병원에서 오셨지?”

“저는 금노루 헬스 서비스 컴퍼니 노금령이라고 합니다.”

얼굴색이 흐려진 모환추가 묻자 노금령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앞을 바라봤다.

“어르신, 능연 씨랑 잘 아세요?”

어르신이라는 단어에 모환추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노금령을 노려봤다.

“구급차 회사도 포럼에 참가한 건가?”

“이번 포럼 협력사거든요.”

노금령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수산 도매 시장에서 자주 만나는 게 중년 여자인데, 기세가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능연은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조용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벌꿀 케이크를 집어 들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저녁 8시쯤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에 병원에 도착해서 연달아 세 건의 수술을 하고 겨우 아침을 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능 선생님 단 거 좋아하세요?”

몸집이 작은 아가씨 하나가 그 틈을 타 그에게 다가갔다.

“배가 고파서 단 거부터 좀 먹으려고요.”

능연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럼 이 돼지고기 좀 드셔보세요. 살짝 단데 씹을수록 다른 맛이 나요.”

여자의 목소리는 생김새처럼 부드럽고 약했다. 능연은 매너 좋게 받아들여 입에 밀어 넣고 힘껏 씹었다.

’참 남자답게 먹네.‘

여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능 선생님도 이따 강연하시나요? 최근에 무인 구역 봉합을 여러 건 하셨다면서요?”

늘씬한 여자 하나가 다른 쪽에서 끼어들었다. 몸집이 작은 여자가 고개를 들어 노려봤다. 그러다 그녀가 입은 옷이 구찌 티셔츠, 디올 미니스커트임을 알아보고는 저도 머리카락을 튕겨 목에 건 보석 목걸이를 자랑했다.

“오늘은 주임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하러 온 겁니다.”

원래 주변 분위기에 무관심한 능연은 질문대로 올곧게 대답했다.

“능 선생님, 운화 병원 응급 의학과 의사시죠? 곽 주임님 몇 번 뵀었어요. 무섭지 않으세요?”

늘씬한 여자가 미소를 드러내자 7점에서 8.28로 미녀 지수가 올랐다.

“근엄하신 편이죠.”

“능 선생님도 근엄하신데요?”

늘씬한 여자가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나중에 우리 주임님한테, 이번 투표는 꼭 운화 병원에 하라고 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우리 제2 시립 병원에는 투표권이 세 장이나 있어요.”

매너 있는 능연의 모습에 몸집이 작은 여자가 질세라 입을 열었다.

“능 선생님, 이것 좀 먹어봐요.”

어느새 다가온 노금령이 오징어를 한 접시 담아와 능연에게 밀어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긴 머리 미녀가 질 수 없다는 듯 따르고 있었다.

“그러죠.”

배고팠던 능연은 잔뜩 집어서 입으로 밀어 넣었고, 노금령은 득의양양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까지 능연에게 먹인 음식량 1위였다.

“능 선생님, 장어 초밥 좀 드세요.”

“티라미수 맛있더라고요.”

“고기 채소 말이 드세요.”

“멜론.”

“명란젓.”

“아! 하세요.”

“다코야키.”

“자네 이거 반칙이야.”

2층 VIP룸에서 유리창을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은 폭풍의 눈 같은 소연 회장의 모습에 곽종군을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곽종군은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회의를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자 햇볕이 조금 강렬해져 호텔 주변의 꽃과 풀이 꼭 수술 전에 깎은 머리카락처럼 구불거렸다.

봄볕에 호텔 밖에서 거닐던 젊은 남녀는 누군가는 기뻐하며, 누군가는 아쉬운 듯 컨벤션 홀로 돌아갔고, 등록을 깜빡했던 의사들은 그때 서둘러서 이름을 쓰고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 있는 명찰을 받았다.

포럼은 쉬는 시간이 따로 없어서, 점심 식사가 끝나면 바로 강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다급한 걸음의 황무사는 반대 방향인 레스토랑 밖으로 뛰어나갔다.

“인원수 초과예요. 어떡하죠? 호텔에서 돈을 더 내래요.”

황무사는 사역하의 웃음 속에 감춰진 경고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를 만나자마자 우다다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사역하의 곁에 서 있던 잘생긴 축에 끼는 남자가 잘생긴 황무사를 경계하는 듯 누구냐고 물었다.

“회사 동료예요. 오늘 나랑 같이 서포트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사역하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황무사를 소개하고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황무사는 그렇게 화내는 사역하를 처음 봤다. 평소에도 무섭긴 하지만, 보통 입술을 깨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싸움닭 같은 모습이었는데, 화려한 깃털로 둘러싸이긴 했어도 정말 사람 눈알을 쪼아댈 기세였다. 그 기에 눌린 황무사는 조용히 사역하를 치켜세우듯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 매니저님 부하직원 황무사라고 합니다. 항상 밑에서 따르면서 동쪽으로 가라면 동쪽으로 가야지 서쪽으로 갔다가는 큰일 나는······.”

사역하의 얼굴이 더 흉악해졌다. 그 순간 싸움닭이 투견으로 변했다.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투견 말이다. 그러자 황무사는 입술을 깨물며 더욱 심하게 아부를 떨어 상사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했다.

“저는 사 매니저님이 키워 주셨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사 매니저님 덕이죠. 사 매니저님 아니었으면 지금의 황무사는 없었을 겁니다.”

잘생긴 축에 끼는 남자는 T자형 몸매인 한국형 꽃미남 황무사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사 매니저님, 바쁘신 거 같으니 먼저 가볼게요.”

“아, 아니에요. 저기······.”

돌아가려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 사역하는 그저 손을 뻗어 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휙 고개를 돌려 잘 보이려는 듯 웃고 있는 황무사를 죽일 듯 노려봤다.

‘야, 잘생기고 머리 좋은 남자 찾는 게 쉬운 줄 알아? 얼마나 힘들게 찾은 줄 아느냐고. 내가 얼마나 오래 솔로로 살았는지, 곧 집 대출금도 다 갚는다고, 알아?’

“얼마나 초과 됐는데?”

어차피 화를 내도 소용없기에 사역하는 애써 표정을 풀며 물었다. 황무사는 제가 아부를 잘못 떨었음을 깨달았다. 전에도 그런 적이 많아서 익숙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에 확인할 때까지 벌써 40명이나 초과 됐어요. 호텔은 돈 더 내라는 식이에요.”

“알겠다고 하면 될 거 아냐.”

사역하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체 지출 비용을 생각하면 식대 40인분 초과된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계속 늘고 있으니까 문제라고요.”

황무사는 억울한 듯 눈을 껌뻑였다. 그는 권한도 없었다. 호텔에서도 당장 매니저의 사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면서 이야기해.”

“네.”

사역하는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호르몬이 사라지고 워커홀릭 기질이 솟구쳤다.

“사람들이 계속 오고 있다고? 등록한 사람 말고?”

“아까는 등록도 하지 않고 바로 작은 홀로 가는 바람에 제가 막지도 못했거든요.”

“당연히 막았어야지! 그럴 거면 등록을 왜 하니?”

멍하니 있는 황무사의 모습에 사역하는 혀를 찼다. 아마 능연을 몰랐다면 얼굴 잘생긴 세상 남자는 모두 머리가 텅 빈 멍청이라고 여길 뻔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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