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는 연달아 며칠 동안 다른 병원을 돌아다녔다. 게이오 대학병원의 유명세는 대단했고,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세계정상급 병원으로 여겼다. 하시모토 지로는 게이오 대학병원의 정형외과 이인자로서 싱가폴,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 베트남에서 온 환자들을 치료했었다.
창서성의 돈 있고 권력 있는 환자들은 당연히 하시모토가 국내에 온 김에 그에게 진료받으려고 했다. 하시모토도 부담 없이 그들에게 처방전을 써줬고, 고관절 치환술을 직접 한 건 해서 찬사를 받았다.
번화는 퍼스트 어시스턴트 신분으로 하시모토를 수행하며 얼굴을 알렸고 고위층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알차게 사흘을 보낸 후, 번화는 기분 좋게 운화 병원으로 돌아왔다.
능연의 탕 봉합 쪽 재능과 기술이 자신보다 더 좋음을 결국 그도 인정했다. 그러나 의사는 단순히 실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서, 여러 방면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는 것도 중요했다. 게다가 탕 봉합법 하나로는 기껏해야 한 분야에서 대단한 의사가 될 뿐이었다.
정든 자기 자리에 앉은 번화는 그리웠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수부외과는 운화 병원의 주요 진료과목이라 응급 의학과처럼 모든 의사가 넓은 의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지 않았다. 모든 주임은 사무실이 따로 있었으며, 부주임은 독립된 공간은 없어도 사람 반만 한 식물로 가려진 넓은 공간이 따로 있어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주임 곁에 같은 팀 하급 의사가 있어서 관리하기도 편했고, 그들은 자신을 가끔 부추겨 세워주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주임들도 할 일 없을 때는 일부러 의국에 찾아가 그런 분위기를 즐기기도 했다.
일본에서 오래 있으면서 하시모토의 발 냄새에 지쳐 있었기에 정신적 보양이 필요한 때였다.
번화가 온몸을 의자에 편하게 기대고 앉아서 다리를 밀어 화분 밖 구역으로 의자를 굴려 나오니 다른 의사들이 즉시 촉각을 곤두세웠다.
“역시 내 나라가 최고다. 뭐 볼 때마다 일어로 어떻게 말하지? 생각 안 해도 되고, 보는 사람마다 인사도 안 해도 되고.”
번화는 목을 의자에 기댄 채 천장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 사람들은 다 가식적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의사들이 환자한테 허리 굽혀 인사도 해야 하고 말이다. 어차피 수술실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말이지.”
곁에 있던 주치의가 맞장구를 치자 번화는 입을 쭉 벌리면서 나오는 대로 투덜거렸다.
“일본 사람들은 수술실에서 장난쳐요?”
“수술실에 모니터 있는 곳도 있고, 돈 있고 권력 있는 특수한 환자는 가족들이 수술 과정을 지켜보기도 해.”
“그럼 모니터 없는 수술실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네요?”
옆에 있던 부주임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역시 내 나라가 좋아.”
흡족한 듯 웃는 번화의 모습에 대화에 낄 자격이 안 되는 초짜 의사들도 웃음소리를 내며 호응했다.
“이번에 나갔다 오면 응급 의학과에서 내 환자를 또 얼마나 뺏어 가려는지.”
“이제 돌아오시면 그럴 엄두도 못 내겠죠.”
기지개를 켜며 자조하듯 하는 번화의 말에 다른 레지던트가 헤헤 웃으면서 아부했다.
“음. 걔 요 며칠 동안 수술 몇 건 했대? 그 능연인가 하는 애 말이야.”
잘못 말했다가 괜한 일을 당할까 봐 이번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번화가 아예 사람을 콕 찍어서 물었다.
“소철, 네가 대답해 봐.”
“그게, 24건인가 그렇습니다.”
소철이라고 불린 의사는 번화가 처음부터 키운 주치의라,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번화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하루에 굴근건 수술 6건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단일 손가락 봉합이라고 해도 하루 6건을 하면 지쳐 쓰러질 텐데, 연속 나흘이라니. 다른 건 둘째 치고 온종일 마이크로 글래스를 쓰고 있는 것만 해도 눈알이 핑핑 돌고 귀와 머리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번화는 능연의 수술 동영상으로 번화는 하루에 4, 5건 연달아서 하는 모습을 확인했었다. 거기에 한 건을 더 한다 해도 능연은 아무렇지 않겠지.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번화의 상식으로는 집도의가 굴근건 봉합을 3건만 해도 부지런한 것이고, 4건은 무리, 5건은 극한이라고 생각했다. 집도의 본인이 그렇게 수술을 배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집도의가 한다고 해도 병원에서 말릴 것이 뻔했다. 적어도 마흔은 되어야 집도의가 될 수 있었고, 그 나이엔 그냥 열 몇 시간 서 있는 것만 해도 고역이니까.
순간, 번화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능연이 올해 스물둘이라고?”
기억을 되짚으며 묻는 번화의 말에 이번에도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소철이 축 처진 눈으로 대답했다.
“네.”
눈이 처질 만도 했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대답하는 건데, 번화의 벼락이 떨어질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니.
번화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40대는 자기 몸에 이런저런 생각이 가장 많을 나이였다.
20년 전엔 그도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서서 수술을 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체력은 있고 실력은 없어서 그렇게 오래 서 있어도 고작 실이나 당겨주고, 석션하고, 가끔 매듭이나 묶고 마무리 봉합을 하는 게 다였다. 그럼에도 롱샤 몇 근이라도 먹은 듯 기뻐서 날뛰었었다.
위로로 넘겨주는 매듭 묶기, 포상으로 내리는 마무리 봉합이 번화 의사 인생 처음 5년을 차지했다.
“가자, 능연이 수술하는 것 좀 봐야겠어.”
“주임님, 갑자기요?”
벌떡 일어난 번화가 흰 가운을 챙겨입자 소철이 멈칫했다가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병실에 가는 것도 아니고 수술실에 가는 건데 뭐.”
번화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의사들은 툭하면 수술실을 전전했는데, 특히 성격이 외향적인 의사는 심심하면 나들이라도 하는 듯이 수술실마다 왔다 갔다 했다.
삼갑 병원은 보통 수술 층이 따로 있었는데 관리하기 쉽도록 수술방은 모두 한 층에 몰아 두었다. 큰 병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으며 수술량이 많은 진료과는 한 층을 모두 점령하기도 했다.
큰 병원이든 작은 병원이든 수술실을 전전하는 의사는 빈번했고, 의사가 심심해서든, 아니면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든, 다른 과의 상황을 알고 싶어서든, 병원에서 그런 행위를 막기는 힘들었다.
응급 의학과 수술실에 도착한 번화는 손을 씻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실에서는 다급하게 곽종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능연은 수술실에서 한창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번화의 방문이 은연중에 그를 재촉했다.
운화라는 지도 위에 나타날 수 있는 굴근건 파열 환자는 한정되어 있다. 지금 능연이 독식한다고 해서 평생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먹어 치울 수 있을 때 먹어 치워서 보물 상자를 열자. 이게 능연의 기본 사고회로였다.
게다가 하면 할수록 능숙해져서, 요즘 하루에 6건 수술을 하는 시간이 전에 5건 하던 때와 비슷해졌다. 능연은 아예 온종일 수술실에 틀어막혀 살았고, 밤에만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수술실 밖에서 잠시 지켜보던 번화가 문을 밟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능연은 고개를 들었다가 까딱 인사를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번화도 딱히 인사할 마음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지켜봤다.
“가위.”
“혈관 핀셋.”
“거즈.”
능연은 도구가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수술에 집중했으므로, 그의 수술방은 웃고 떠드는 여느 수술방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이미 적응한 연문빈 등 동료들도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능연은 그런 환경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사실 능연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선호를 따지자면,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조용히 말없이 질서정연하게 할 일을 하는 환경을 좋아했다.
수술실을 좋아하는 의사도, 싫어하는 의사도 있고, 그냥 일하는 장소로 여기는 의사도 있었지만, 능연에게 수술실은 그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운동장은 떠들기 금지, 뜀박질 금지, 땀 금지, 침 금지······였다.
능연이 말이 없고, 번화도 말이 없자 어시스턴트들은 거대한 압박을 느껴 숨쉬기도 조심스러웠다.
능연의 수술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던 번화는 현장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동영상으로 볼 때와 다름없이 다음에 능연이 뭘 할지, 무슨 도구를 쓸지까지 뻔하게 짐작 갔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번화는 능연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수술이란 ‘하면 할수록 는다’의 표본이었다. 수술 방법은 무술 전수와 달라서, 이런 정보화 시대에 누구든 접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지만, 볼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능연은 지금까지 거의 100건의 탕 봉합 수술을 했다. 그런 수량과 퀄리티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등한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번화는 능연의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병원을 떠나 연수를 간 그 시간 동안 그가 어떻게 수술을 늘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는 계속 수량을 늘려 가겠지.
하루 수술 6건, 한 달이면 100건, 120건, 심지어 더 많이 할지도 모른다. 번화가 게이오대학에서 선진 기술과 의학사상을 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 한 달에 수술 6건은 어려우리라.
치익.
번화는 문을 밟고 수술실을 떠났다.
“엥? 가는 거야?”
잠시 멍하니 있던 소철이 고개를 돌려 능연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 후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철아.”
“네, 주임님.”
수술실 밖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번화가 후배 소철을 불렀다.
“너희들도 최대한 수술을 쟁취해야 한다. 아직 며칠 더 있을 거니까, 그동안 나도 애 써볼게. 특히 너한테 신경 많이 써주마.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거야.”
생각이 많은 번화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좀 더 일찍 후배들을 키웠다면 이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수술 방법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능연 같은 의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소철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 동안 병원에서 잘게요.”
“며칠이 아니라, 그냥 24시간 병원에서 대기해.”
“예? 24시간이요?”
“왜? 못하겠냐? 치프 레지던트 때도 24시간 병원에서 대기했잖아.”
“그, 그게······. 저는 이제 치프가 아니잖습니까. 번 주임님. 그때는 솔로였고, 지금은 마누라에 애도 있습니다. 24시간 병원에 있다가는 다시 솔로로 돌아가게 된다고요. 돌싱이요, 돌싱.”
냉랭한 번화의 눈빛에 소철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럼 하루에 몇 시간 집에 들러서 와이프 기분 풀어주고 나와.”
“주임님······.”
“또 뭐?!”
“애 공부도 봐줘야 하고요, 밥하고 빨래 청소······그런 것도······.”
“그만 좀 해! 일본 의사들은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알아?”
“네네네! 그런데, 그게, 제 마누라도 일을 해서요······.”
“휴우.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말대로 해. 일단 집에 가서 물어봐. 앞날이 창창한 의사 남편이 좋은지,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주치의로 평생 남는 남편이 좋은지. 여자들이 더 똑똑하니까 잘 알걸?”
“알겠습니다. 주임님, 이제 집에 가세요? 제 차 바로 저기 있어요. 모셔다드릴게요.”
존경하는 선배 의사의 지도하에 자신감에 차서 건물을 빠져나온 소철은 번화가 택시를 잡으려고 하자 열정적으로 물었다.
“아니, 집에 안 가. 힐튼 호텔로 갈 거야.”
“하시모토 선생님한테 가시게요?”
“아니, 오늘 호텔에서 잘 거야.”
“오랜만에 귀국하셨는데, 집에 안 가시고요?”
“너 왜 말투가 내 마누라 같냐? 웬 잔소리야! 난 휴가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라고!”
버럭 고함치던 번화는 다시 표정 관리하면서 껄껄 웃었다.
“소철아, 남자는 말이다, 일을 하려면 굳건한 의지가 있어야 해. 불굴의 정신! 마누라 말을 다 들으면 안 돼! 쫓겨나면 어때?! 힐튼 호텔이 날 기다리는데!”
“아, 네. 아, 그런데 주임님, 제 월급으로는 힐튼에 못 묵어요.”
“멀리 봐야지.”
번화가 소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전엔 모텔에서 자고 그랬어. 나중에는 매형한테 신세 지기도 했다니까? 괜찮아, 다 지나간다. 부주임 되면 몇 년 안 가서 네가 묵고 싶은 데 묵을 수 있어. 힐튼이면 힐튼, 쉐라톤이면 쉐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