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로 돌아온 능연은 수술을 해달라는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두 환자를 각각 수술실로 보냈다. 해본 적 없는 복강 수술이라 참석하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온종일 일하느라 피곤한 데다가 한참이나 양팔을 지탱했던 터라 팔을 거의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지금 상태로는 스태미너 포션을 마셔도 소용없고, 훅맨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수술 구역에서 샤워를 마친 능연은 피로 더럽혀진 옷을 다시 입기 싫어서 깨끗하게 빨았다. 그는 옷 대신 수술복을 입고선 허리춤을 잔뜩 조였다. 보통 수술복은 여러 의사가 소독해서 돌려 입기 때문에 헐렁헐렁했다.
하얀 가운을 걸친 능연은 세탁한 옷을 비닐에 담고서 집으로 돌아 갈 준비를 했다.
룸메이트인 진만호와 왕장용는 요즘 퇴근이 늦었는데,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 잤기 때문에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비슷한 샤워 과정을 거친 것인지, 주 선생과 능연은 푸른 수술복을 입고 흰 가운을 걸친 동일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응급실에서 서로 마주 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 하루 쉴게요.”
능연은 유 간호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당연히 일반적인 플로우가 아니었다. 의사들은 듀티에 따라 움직이고, 휴일로 배정된 날이라도 초짜 의사들은 병원에 들러 환자를 살피거나 했다. 반나절이라도 쉴 수 있으면 다행이고, 운이 나쁘면 다시 수술실로 잡혀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능연은 원래 실습생이라 듀티 배정받을 일도 없는 데다가 맡은 수술이 따로 있고, 환자 검사도 연문빈이 하고 있어서 어쩌면 주치의보다 더 편하게 의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하기 까다로운 간호사들도 능연에게는 한없이 친절해서 수술실을 쓴대도, 쓰지 않는대도 마음대로 하게 해줬다.
능연의 말에 유 간호사는 끽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노트를 꺼내 적었다.
“적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참, 내일로 정해진 수술 없죠?”
“네, 없어요. 안 잡을게요.”
“잠시만요! 고민 좀 해보고요.”
능연이 갑자기 망설이기 시작했다.
정상적이라면 환자는 새벽에 병원에 도착할 것이고, 능연이 거절하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질 것이다. 새벽에 수술을 하자니, 내일까지 팔이 풀릴까 걱정이었다. 현미경 아래서 하는 정밀 작업인데 손이 불편하면 실수하기 쉬웠다.
‘오후로 배정할까?’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새벽에 도착한 환자를 오후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그랬다. 환자는 기다리다가 다른 병원으로 갈 가능성이 크고, 그럼 환자를 허탕치게 한 꼴이 된다.
“야, 쉴 땐 좀 쉬어라.”
보다 못한 주 선생이 능연을 잡아끌면서 유 간호사를 바라봤다.
“얘 내일 수술 취소해 버리세요. 조금 전에 밥 먹으러 갔다가 배 찔린 환자를 만나서 맨손 지혈로 한 시간 버티다가 온 거예요. 내일 수술하면 팔 나가요.”
“어머나, 능 선생님. 그럼 내일은 쉬세요.”
“다른 선생님들은 한 달에 스무 번도 많다고 하시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더 하시려고요.”
“그러니까요, 선생님 좀 쉬세요.”
“너무 노력하신다니까.”
주 선생의 말에 다른 간호사들이 앞다퉈 한마디씩 보탰다. 확실히 피곤하긴 하다는 생각에 능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와 정신, 모두 지친 상태였다.
“그럼 내일은 그냥 쉴게요.”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능 선생님. 푹 쉬세요.”
“모레 봬요.”
능연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간호사들은 승리를 쟁취한 듯 기뻐했다.
너스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유 간호사가 다시 듀티 표를 꺼내 들었다.
“능 선생님, 모레 당직이긴 한데, 최대한 쉴 수 있게 해드려. 아, 모레 누가 당직이지?”
“저요, 저요! 잠 잘 오게 하는 아로마 오일 준비할게요.”
수술실에서 일부러 나와 능연을 배웅한 소몽설이 손을 들었다.
“그럼 됐네. 그리고 당직 선생님들 커피도 잊지 마.”
“수간호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블 에스프레소!”
“사실 세 배 농축도 괜찮아. 에이, 에스프레소고 뭐고 그냥 인스턴트 커피 네 봉지 넣어서 드려. 새벽 3, 4시쯤 되면 아예 잠도 안 올걸?”
설명하던 유 간호사는 곁에서 떠드는 실습 간호사를 쳐다보면서 나중에 시험에 나오는 거니까 기억해두라고 덧붙였다. 실습 간호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선 선생님들 커피는 진하게 타드려. 괜히 잠들었다가 깨워도 못 일어난다. 선생님들이 잠을 못 자는 건 알 바 아니니까.”
은밀하게 말하는 유 간호사 말에 간호사들이 킥킥 웃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대낮처럼 환한 응급실을 벗어나자 밖은 냉혹할 정도로 캄캄했다.
주 선생은 팔짱을 끼고 흰 가운을 여몄다.
“우리 둘 다 모레 당직이던데, 운 좋으면 한숨 잘 수 있을 거고 운 나쁘면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어. 도저히 안 되겠으면 하루 더 쉬어. 원래 실습생은 당직 안 서도 되니까.”
“괜찮아요. 당직 서는 건 힘들지 않습니다.”
“젊어서 좋겠다. 어, 왔다. 먼저 간다.”
주 선생은 도로변으로 내려가 불을 밝히며 다가오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빠진 벤츠 S가 주 선생 앞에 멈춰 섰다.
“엥? G 아니네요?”
주 선생은 조수석에 앉은 나이든 부인을 향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바로 아까 그들을 태우고 병원에 온 벤츠 G 차주였다.
“세차 보냈죠. 주 선생님, 능 선생님 이제 집에 가는 건가요?”
노부인이 차에서 내려 다정하게 물었다. 수줍음 많은 아가씨도 운전석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려고요.”
“지금 차 잘 안 잡힐 텐데, 태워 드릴까?”
“불렀습니다.”
“취소하면 되지. 왜요?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서 세차비 내놓으라고 고문이라도 할까 봐?”
노부인이 능연을 흘깃 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체면 차리지 말고. 자자, 조수석으로 타요. 젊은 사람들끼리 나란히 앉아야 할 말도 많고. 안 그래?”
노부인은 조수석 문을 열고 능연을 밀어 넣었고 주 선생은 뒷좌석에 타야 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주 선생님, 방향이 달라서 먼저 갈게요.”
“아, 예. 아 참. 세차비 얼마인지 나중에 알려주시면 바로 드릴게요. 어쨌든 저도 주치의라······.”
“아, 우리 란란이가 능 선생 위챗 추가했으니까, 둘이 알아서 하면 돼요.”
손을 흔든 노부인은 뒷좌석에 올라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검은 벤츠가 서서히 주 선생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별 생각 없이 호출한 차를 기다리느라 길가에 서 있던 주 선생 뇌리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아니, 우리 집이 어딘 줄 알고 방향이 다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