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정도 그루잠을 잔 능연은 오후까지 버티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고 나니 팔 저림이 나아졌고, 머리도 더욱 맑아졌다. 지난밤 일을 돌이켜 보던 능연은 오늘이라면 더욱 냉정하게 상황을 마주했으리라 생각했다.
어젯밤에 얻은 초급 보물 상자도 있었다. 대체 새벽 몇 시에 보상을 받은 건지도 능연은 모르고 있었다. 급할 것 없다는 생각에 목욕부터 하고 냉장고를 뒤졌다. 그는 만두와 개봉한 지 한 달 안 된 삭힌 두부, 종이 포장 우유, 오래 묵힌 오리알, 시들시들한 토마토를 모두 꺼내 식탁 위에 늘어놓고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러고 나서 창가에 앉아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시스템, 상자 꺼내 봐!”
은색 초급 보물 상자가 능연 앞에 나타나 빛을 번쩍였다. ‘열어, 나를 열어, 열라고’ 하고 외치는 듯했다.
능연이 상자를 열라는 듯 턱을 치켜들자 보물 상자가 열렸다.
작은 책 한 권이 반짝거리며 눈앞에 나타났지만 능연은 태연했다. 초급 보물 상자 10개에서 연달아 스태미너 포션이 나왔으니 확률적으로 다른 게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손을 흔들자 스킬북이 열리면서 제시어가 나타났다.
- 마스터급 MRI (사지 四肢) 판독 기술 획득
능연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요즘 MRI 사진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른다. 특히 수부 스캔은 수술할 때마다 들여다봐야 했다. 하지만 입문급 기술도 없는데 마스터급 MRI 판독 기술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떻게 안담. 능연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방대한 정보가 뇌리를 채웠다.
수부 스캔 방법.
족부 스캔 방법.
MRI 시상(矢狀: sagittal) 해부도표.
관상(冠狀: coronal) 해부도표.
금속 아티팩트(Metal Artifact).
감수성 아티팩트(susceptibility artifact).
T2 강조 효과.
윤곽 강조 효과.
능연은 그동안 봐왔던 MRI 화면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 수술 때 관찰했던 상황과 일일이 비교했다. 그 순간 생각이 명확해졌다.
마스터급 MRI 판독 기술로 MRI 사진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저번에 얻은 수부 해부 기술과 더하면 더욱 크게 발휘할 수 있었다.
이 기능은 다른 신체 부위에서는 입문급이나 전문급 사이 정도인데, 사지 MRI 사진에서는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완신경층 스캔 기술을 영상을 볼 필요 없이 바로 머릿속에서 자기장 균일성과 대비도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능연은 같은 MRI 사진을 봐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MRI 해부도와 맨눈으로 관찰하는 해부도는 완전 달랐다. MRI는 서로 다른 색상과 깊이로 조직 구조를 구분한다. 이런 구분 방식은 대부분 매우 명확하지만 모든 조직 구조를 확실하게 구분하려면 어느 정도 단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단련은 MRI 사진을 수만 번 판독하면서 경험을 쌓아가야만 했다.
일반 의사는 평생을 바쳐도 마스터급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못한다.
의사도 사람이라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 한정된 시간을 몽땅 쏟아부어도 모든 방면의 기술을 만족할 만큼 얻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일반 의사는 차라리 X-ray나 CT 판독에 시간을 투자하길 선호했다.
물론, 그것도 그저 선호할 뿐이고 대부분 외과 의사는 X-ray와 CT 판독도 전문가급 수준에 이르기 어렵고 MRI는 더욱 드물었다.
그들이 사진을 들여다봐도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10시간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느니 차라리 수술 시야를 확보해서 직접 10분 동안 들여다보는 게 훨씬 유용하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의사들은 판독을 포기하고 대충 보고 문제없으면 수술을 시작한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맹장 수술이다. 맹장은 보통 유리(游離) 상태라서 맹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독할 수 있는 사진이 있으면 당연히 쉽게 맹장을 잘라낼 수 있지만, 실제 수술을 할 때 의사는 대부분 바로 배를 열어 위치를 찾는다.
맹장 수술 한 번에 맹장 찾는 데만 2, 30분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능연은 본인이 획득한 스킬에 매우 흡족했다. 어떤 스킬이라도 실습생에겐 흡족하긴 했다. 유일한 불만은 획득한 스킬 출처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구 진료소엔 MRI 기기가 없어서 둘러댈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단 그 문제는 제쳐두기로 했다. 일일이 해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초짜 의사는 여러 유형이 있었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의사, 뭐든 배우려는 의사, 착한 의사, 예쁜 의사, 못생긴 의사, 규칙을 잘 지키는 의사, 계속 사고 치는 의사. 그러나 선임 의사는 두 유형밖에 없었다. 병을 고치는 의사, 못 고치는 의사.
“아들!”
“아들아!”
능결죽과 도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대꾸한 능연은 슬리퍼를 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우선 링거를 꽂고 있는 단골 환자들에게 눈인사를 한 다음 쇼핑하고 돌아온 것 같은 부모를 바라봤다.
도평 여사가 새 옷을 산 모양인지, 가슴을 활짝 펴고 옷 자랑을 했다. 마누라 손을 잡은 능결죽은 애써 웃는 얼굴로 다른 손으로는 지갑을 누르고 있었다.
“아들, 너 밖에서 사람 구했더라? TV에도 나오더라. 네 아버지가 온 동네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보라고 했어. 다들 네 칭찬 중이야.”
“아들아, 이제 사람도 살리는구나.”
능결죽은 눈가를 쓸며 그렇게 말했다. 아들이 자랑스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갑 생각에 그런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집에 오니까 다 주무시는 거 같길래.”
“늦게 오니까 그렇지.”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는데요?”
능연은 눈썹을 찡긋했다가 그 화제는 그만두기로 했다. 능결죽은 헛기침하면서 아들의 팔을 붙잡고 정원으로 나갔다.
“네 엄마랑 일어나자마자 중대 결정을 내렸단다.”
“중대 결정이요?”
“요즘 우리 진료소도 잘되지 않니? 돈도 좀 벌었고, 너도 의사 생활이 순조롭잖니. 어제는 두 사람이나 살리고 말이다. 게다가 한 명은 경찰이라며? 나랑 네 엄마, 기뻐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어쨌든 그래서 말이다, 너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이리 와 보렴.”
능결죽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손은 능연을, 다른 한 손은 도평을 붙잡고 정원을 빠져나갔다. 세 사람은 정원을 빙 둘러 골목 뒤쪽으로 향했다.
뒷골목은 매우 좁았는데, 집집 마다 예전에 연탄을 땔 때 사용했던 저장고라든가, 안 쓰는 물건을 두는 창고 같은 구조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분가한 자식들이 가끔 돌아올 때 머무르게 하는 공간도 있고.
능가의 정원 뒤쪽도 대세에 따라 간이 건축물 두 개를 세우고 셔터를 달아 잠궈 두었다. 능결죽은 능연을 바라보고 웃으면서 셔터를 감아 올렸다.
“매일 출근할 때 불편할 거 같아서, 나랑 네 엄마가 아주 신중하게 고민한 다음에 결정을 내렸지.”
“오늘 아침에요?”
“나랑 네 엄마가 아주 신중하게 고민한 다음에 내린 결정이다.”
확인하는 듯 묻는 능연의 말에 능결죽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모아둔 모든 저금을 털어서 산 차란다!”
능연은 셔터 아래 비닐 재질 덮개로 덮인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아주 기쁘지?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첫째, 조심해서 몰아야 한다. 안전벨트는 물론이고! 좋은 운전 습관을 들이도록 해! 그리고 두 번째!”
실실 웃던 능결죽은 엄숙한 표정으로 3분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진료소 사업이 잘되는 편이지만 그래도 우린 서민이야. 그리고 이건 네 첫차니까 너무 큰 차를 기대하지 마. 내 경제 관념은 말이다, 물건은 실용적인 게 최고, 이거란다. 차는 더욱 그렇지. 차는 타는 거지, 보는 게 아니야. 이번에 말이다, 아버지가 사람한테 부탁해서 겨우 구한 거야. 중고긴 해도 새 거야. 작년에 출고된 폭스바겐 제타란다! 별로 수리도 안 했대.”
제타는 오래 타기로 유명한 차였다. 몇만 위안짜리 중고라고 해도 훌륭하게 교통수단 역할을 해내겠지. 능연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첫차인 만큼 기대도 컸다.
“됐다. 자, 공개하마!”
능결죽은 입으로 ‘따다다단’ 효과음을 내며 자동차를 덮고 있는 덮개를 두 손으로 힘껏 걷어냈다.
“자! 검은 차 멋지지? 중고차라고 해도 아주 잘 관리된 거라 타기 좋을 거야.”
“흠흠, 아버지. 이거 비틀인데요? 빨간색이고.”
“응? 착각했나? 이건 엄마 거야. 외출할 때 불편하니까.”
능결죽은 붉어진 얼굴로 잘 봐달라는 듯 아내를 바라봤다. 그러곤 시야를 가리는 덮개를 힘껏 밀어냈다.
“됐다. 네가 들어가서 직접 보렴. 자, 키.”
능결죽은 검은 제타 키를 능연에게 던져주고 빨간 키를 꺼내 도평에게 건넸다.
“운전해 볼래요? 드라이브라도 갈까요?”
“좋아요, 좋아요.”
도평이 바로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조수석에 탄 능결죽은 안전벨트를 맸다.
“처음엔 살살 해요. 새 차니까 거칠게 운전하면 안 돼요.”
“네네.”
진지한 얼굴로 핸들을 잡은 도평은 비틀을 몰고 서서히 차고에서 나왔다. 능연은 아무말 없이 제타 덮개를 열어젖혔다. 검은 중고 제타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투박하고 소박했다.
빵빵.
비틀에서 경쾌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고, 햇살을 받은 자동차가 반짝였다. 능연은 은연중에 도평과 능결죽의 웃음소리를 들은 느낌이 들었다.
능연은 운전석에 앉아서 차를 천천히 살폈다. 정비받은 제타는 보기에도 깔끔했는데 만져봐도 새것처럼 매끈했다. 좌석은 수동 조절이었고, 수동 기어에 뜨개질된 시트가 있었다. 안쪽 공간은 좁았고, 능연의 나이에 비해 장식물은 없는 편으로 오래된 스타일의 차였다. 어쨌든 움직이긴 했다.
차를 자세히 살펴본 능연은 조심스럽게 밖으로 몰고 나갔다. 그는 셔터를 내리고 돼지 앞허벅지살을 뜯고 있는 연자에게 인사한 후,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아 거리로 나갔다.
학교 다닐 때 면허를 딴 후, 가끔 여자 동창들이 차를 빌려줘서 시내에서 운전할 만한 실력은 있었다.
까맣게 빛나는 제타의 수동식 창문을 열자, 미세먼지가 낀 바람이 불었다. 번화한 도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수술실이 구비된 구급차가 있다면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수술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와 함께라도 좋고.
능연은 소 사장이 괜찮은 후보라고 생각했다. 소 사장이 운전하면 환자가 줄지어 생길 테고, 자신은 뒷좌석에서 수술로 돈을 벌어 생활하며 여행하면 되니까. 수술하다 지치면 운전으로 바꿔 고국의 산천을 주유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능연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퇴근 시간인 것을 깨달은 능연은 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 진만호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막창 먹으러 갈래?”
“차트 쓸 게 태산인데 웬 막창.”
“먹자골목에 소가 식당이라고 있어. 거기 막창이랑 바비큐가 맛있더라고. 차로 모셔 가고 밥도 살게, 어때?”
“10분만! 왕장용한텐 네가 전화해.”
진만호는 갑자기 피곤함이 싹 가신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다퉈 아래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능연이 운전석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 차 뭐냐?”
“어떤 여자 차냐?”
“아버지가 사주신 거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