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106화 (93/877)

능연은 그 후로 며칠 동안 수술을 하지 않았다.

현미경 수술은 하고 나면 확실히 진이 빠져 스태미너 포션을 마셔도 체력과 정신 소모가 보충될 뿐, 집중력 같은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하여 일단 쉬기 시작하니 능연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연문빈과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뛸 듯이 기뻐했고, 차트 채우기 같은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작업들을 최대한 처리하고 추가 근무도 했다. 그럼에도 논문을 쓸 시간이 남았다.

능연도 본인의 논문 <탕 법 봉합 요점— 탕 수술 368 사례 탐구>를 <중화 수부외과 잡지>에 보냈다. 양해양 교수에게도 관심을 부탁해 놨으니 이른 시일 안에 소식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경추 추나 요점— 이근정골 추나 450 사례 탐구>는 핵심인 <마사지와 재활 의학 잡지>에 보냈다. 영향력을 따지면 중화 브랜드 수부외과에 크게 밀려서 앞으로 인용될지 말지는 모를 일이라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밖에 소가복의 논문도 여원의 도움 아래 발표됐다. 제1 저자는 소가복과 능연, 제2 저자는 여원이었다.

업무 중심을 살짝 다른 쪽으로 돌린 능연은 아예 응급 의학과 처치실과 응급실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는 주 선생과 응급처치를 몇 번 하면서 대부분 성공했고 불가피하게 실패하기도 했다. 능연의 응급처치는 시스템 스킬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기본적인 응급처치 스킬은 어렵지 않아서, 기도 삽입 같은 건 두어 번만 해보면 익숙해지는 것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응급실에서 쓰는 기술은 수술실처럼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명 과정 중, 의사의 스킬이 정확하고 정밀하다는 건 대부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일반적인 작은 외상은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능연은 지금 수술을 조작한 경험이 매우 많아서 외과 응급상황에 대해 식은 죽 먹기까지라고는 할 수 없어도 과실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가끔 맡게 되는 내과 증상도 약 먹고 주사 맞고 돌아가라거나, 혹은 사람을 불러오는 등······ 나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수월한 분위기에서 능연은 새로운 로테이션 온 실습생을 맞이했다.

그날 아침, 실습생 12명이 응급 의학과 로비에 도착했고 다정하지 않은 간호사님의 배정을 따라 근무를 시작했다.

로테이션을 돌 필요가 없는 능연이 출근했을 때, 새로운 실습생은 벌써 화장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왕장용이 그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제 막 실습을 시작한 학생들과 달리 진료과 두 곳을 로테이션한 왕장용은 벌써 병원에서 생존하는 길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상태였다. 최하층민인 생산 계급인 왕장용은 죽어라 일하는 중요성을 점점 깨우쳤다.

물론, 아는 건 아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왕장용은 달리 내세울 만한 특별한 재주가 없었고, 대부분 실습생처럼 의대 4년을 다녔을 뿐이라 그가 아는 건 의국의 젊은 의사들도 다 알고, 선배 의사는 당연히 더 자세히 알았다. 높으신 분들은 어쩌면 그가 배운 교과서 편찬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왕장용은 노력하고 분투하는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통속적인 방법, 청소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진단검사의학과에 있을 때는 그런 이치를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유난히 부지런한 두 동기가 일찍 출근하여 늦게 들어가면서 의사들의 호감을 사 많은 것을 배워가는 걸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두 번째 로테이션 과였던 신경내과에서는 동기 4명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들어갔다. 병실 화장실은 주로 간병인들이 청소했고, 의국 바닥 같은 곳은 전문 청소 요원이 있었다. 실습생들이 건드릴 수 있는 곳은 주로 의사들의 휴게실, 책상 위, 자료실과 회의실 등이었다.

자리는 얼마 없고, 할 일도 적은데 하려는 사람은 많으니 당연히 경쟁이 심했다.

왕장용은 신경내과에 있는 동안 청소 기회를 많이 얻으려고 매일 최대한 일찍 일어났다. 그러나 적은 일을 많은 인원이 나누니 첫 번째 실습 때 같은 행운을 다시 얻는 사람은 없었다.

응급 의학과에 온 왕장용은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번 로테이션에는 모두 6명이 청소 쟁탈전에 참여했지만, 응급 의학과는 면적이 크고 규모도 커서 기회가 아직 있다고 생각했다.

“실습생이냐?”

의사 하나가 열심히 일하는 왕장용을 좋게 보고 물었다. 왕장용은 그런 말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습생이란 인력시장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의사나 간호사가 바로 작업반장인 셈이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근육을 드러내 능력을 증명해서 작업반장의 부름을 받아야 했다.

그 둘의 다른 점은 병원의 작업반장은 단기 알바생을 착취하고도 돈을 안 준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밥 한 끼랄까.

“네, 실습생입니다.”

왕장용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와서 나 좀 도와줘.”

장정을 고른 의사는 바로 돌아서 갈 길을 갔고 왕장용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가운 제대로 입고, 나랑 회진한 다음 다른 것도 하면 돼.”

잠시 말을 멈춘 의사가 말을 이었다.

“난 연문빈이라고 한다. 연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네, 연 선생님.”

일대일로 대화하는 왕장용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덜 적극적이었고 연문빈은 아무 말 없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30명 가까이 회진하는 데 30분 정도 걸렸다. 대부분 환자 상태에 익숙한 연문빈은 그저 한두 마디씩 물었고, 중요한 환자나 신체 진찰 같은 우대를 받았다.

병실을 꽉 채운 환자는 대부분 입원한 지 1, 2주일 되어서 안정된 상태였다. 다른 진료과였다면 슬슬 환자를 내보낼 법했지만 단지 이식은 겨우 위험에서 벗어난 단계라 완치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왕장용은 꽤 들뜬 모습이었다. 실습생이 회진을 따라갈 수 있는 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실제로 환자를 보는 것이니 수업을 들으면서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떡밥을 물고 좋아하는 실습생을 본 연문빈도 즐겁게 웃었다.

“가자, 회진은 여기까지. 이제 나랑 가서 뭐 좀 씻자.”

그는 왕장용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놓인 족발을 가리켰다.

“일단 이거 씻고, 털 뽑아. 그리고 닭발도 있어. 씻은 다음에 발톱도 잘라야 해.”

“족발은 어디에 씁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식자재를 본 왕장용은 의아한 듯 물었다.

“족발을 어디에 쓰겠냐?”

연문빈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실험 재료?”

왕장용이 시험하듯 묻자 연문빈은 눈을 번쩍이며 모호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장용이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닭발은 또 어디에 쓰는 겁니까?”

“좀 있으면 알게 된다. 맞다. 족발은 현미경으로 털 뽑아도 돼.”

연문빈은 순진한 아이 속이는 게 좀 찔려서 얼버무리고는 험난한 퀘스트를 내려주고 그 자리를 떠났다.

3시간 뒤에 돌아온 연문빈은 가장 중요한 족발이 깨끗하게 씻겨 있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연신 왕장용을 칭찬했다. 머리가 핑핑 돌던 왕장용은 계속해서 닭발을 들고 일일이 발톱을 잘라내면서 물었다.

“연 선생님. 혹시 능연 아시나요? 걔도 우리 학교 실습생인데.”

“네가 걜 알아?”

연문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알다마다요! 학교에서 같은 기숙사 쓰는데요.”

왕장용은 손톱깎이를 들고 피로감을 느끼며 대답했고 연문빈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

“저기, 거기까지만 해. 됐어, 됐어.”

우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한 연문빈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제가, 너무 느린가요?”

왕장용은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연문빈을 바라봤다. 그 긴장감이 느껴지자 연문빈은 더욱 굳었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사실 너한테 다 자르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환자 하나 때문에 시간이 너무 걸렸네. 괜찮아, 나머진 내가 하면 돼.”

“아닙니다. 연 선생님. 제가 할게요, 제가.”

왕장용은 어쩐지 이상했지만, 열심히 일을 뺏으려 들었다. 실습생 생활 몇 달 동안 왕장용은 그 도리를 어느 정도 깨우쳤다. 실습생이 병원에서 완전히 먹고 놀 수는 없지만 나름 편하게 지낼 수는 있었다.

욕심 없는 학생이 관리가 엄격한 병원에 들어가면 의대에서 수업받는 수준으로 편안하게 일한다. 의료 분야에 종사할 생각이 없거나 연구 공무원 시험 볼 생각밖에 없는 학생은 실습 병원을 선택할 때 얼마나 농땡이를 부릴 수 있는지부터 고려한다. 이갑 비전문 병원 같은 경우 평일엔 주치의도 환자 몇 명 받지 못하니 실습생은 일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병원이 농땡이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실습생은 병원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의사는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대단한 의사일수록 그의 시간은 금이었다. 그러니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처럼 실습생을 지도하려는 의사는 없었다. 실습생이 수시로 얼쩡거리면서 일을 많이 해야 참새 눈물만큼 시간을 내서 몇 마디 가르쳐준다.

새로운 의료 제도가 시행되기 전, 실습생은 바로 그렇게 열심히 노동하며 영리함이 충만한 아부 실력으로 스승이 눈곱만큼 드러낸 지식을 주워 먹었다.

왕장용은 그 이치를 깨우친 후 근면한 노동과 아부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는 운화 시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운화 병원에 들어올 수 없을지 몰라도 여기서 열심히 배워 두면 적어도 다른 병원에서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실습생이 주치의 밑에서 조수 노릇하는 건 그다지 희망이 없었다. 게다가 주치의도 실습생 조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레지던트와 훈련의가 있으니 말이다. 실습생이 말이나 붙일 기회가 있을까 싶은 부주임이나 주임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실습생의 노동과 영리함이 넘치는 아부로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고작 레지던트가 가진 작은 것들이었다. 물론 모든 레지던트가 선생이 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습생을 꽁으로 부려먹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왕장용은 자신의 얄팍한 경험으로는 그마저도 별로 만나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연문빈은 그래도 왕장용 손의 가위를 뺏어 들고 닭 발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장용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발을 구르며 숨을 내쉬고는 옆에서 가위를 찾아내 계속 일을 했다.

연문빈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속으로 앞으로 실습생을 부려먹을 때 적어도 이름과 소속은 묻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상급 의사가 실습생이라고 예상이나 할까. 연문빈은 왕장용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닭 발톱 그만 잘라.”

“그럼요?”

“그냥 쓰면 돼. 음······. 잘라 놓은 건 둥근 발톱 좋아하는 사람 주면 되고, 나머지는 신경 안 쓰는 사람 주면 돼.”

연문빈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발톱 정리하는 것도 아부할 생각에 시작했는데 능 선생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계속해 온 것이었다. 다른 의사들 줄 건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르죠.”

왕장용은 연문빈이 미안해서 그러는 줄 여겼다. 그는 이런 레지던트가 제일 좋았다. 이런 레지던트는 실습생이 열심히 하면 미안해서 나중에 뭐라도 가르쳐주려고 애썼으니까.

왕장용은 닭발을 뺏어 더 세심하게 발톱을 다듬었다. 연문빈도 할 수 없이 다투듯 닭발을 잡고 또각또각 발톱을 자르면서 둥글게 발톱을 정리한 닭발을 분류했다.

“됐다, 다 했다.”

연문빈이 땀을 훔치자 왕장용은 냉큼 수건을 건넸다. 이렇게 눈치 빠른 녀석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연문빈은 떨리는 입가를 진정시켰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닭발 통을 들어 올리자 곁에 있던 왕장용은 고분고분 족발 통을 들어 올렸다.

“따라와.”

연문빈은 한숨을 쉬며 왕장용과 함께 물건을 기숙사동으로 옮겼다.

“응급 의학과에서 제일 배우고 싶은 게 뭐냐?”

연문빈이 묻자 왕장용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드디어 실습의 엑기스를 손에 넣었어.’

“아직 수술을 못 해봤습니다. 수술해보고 싶습니다.”

왕장용은 매우 명확하게 대답했다. 처음으로 로테이션한 과가 진단검사과였고 두 번째가 신경내과로 모두 수술이 없는 진료과였다. 젊은 의사들은 당연히 수술을 제일 해보고 싶어 한다.

“그럼 데브리망부터 하자. 이따 처치실에 같이 가서 경상 환자 있으면 한번 해봐.”

“네네!”

잠시 고민하던 연문빈이 하는 말에 왕장용은 귀를 의심하며 냉큼 대답했다.

‘이렇게 쉽게? 응급실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연문빈을 따라 응급 의학과로 돌아갔을 때도 왕장용은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연문빈은 당직 주치의를 찾아 설명하고는 독립된 칸막이를 받았다. 그 뒤 간호사에게 데브리망 손님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왕장용을 잡아 앉힌 연문빈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응급 의학과는 급을 나눠서 환자를 처치해. 응급처지실은 1급 위급 환자랑 2급 위중 환자. 처치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3, 4급 단순 환자야. 3, 4급이 뭔지 알아?”

“3급은 일반 응급, 4급은······.”

“비응급. 보통은 일반 진료로 가라고 권하지.”

“아, 그러니까 4급 환자를 만나면 일반 진료 접수하라고 권해야 하는 거군요.”

“다른 사람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할지도 모르지.”

연문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왕장용의 눈을 바라봤다.

“우리끼리 이야긴데, 의사와 환자 관계가 무섭잖니? 그러니까 그냥 한마디 해보고 환자들이 싫다고 하면 기다리게 그냥 둬. 순서대로 기다리게 한 다음, 순서가 되면 괜히 일 만들지 말고 진찰하면 돼.”

“알겠습니다.”

왕장용은 연문빈의 눈빛에 조금 당황하면서 대답한 다음 그가 자기한테 지나치게 잘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친절엔 다 켕기는 이유가 있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두 사람이 있는 칸막이 안의 공간은 식당 커플석과 비슷했다. 다만 중간에 테이블이 조금 더 작아서 뭔가 하기에 좀 더 여유로웠다.

왕장용의 얼굴이 더욱 시퍼레졌다.

“장용아, 이렇게 불러도 되지?”

연문빈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물었다. 왕장용의 얼굴은 시퍼레지다 못해 핏기를 잃어갔다.

‘저기, 선생님. 저는 노머······.’

바로 그때, 환자 한 명이 실려 들어왔다. 어디서 다친 건지 몰라도 팔뚝에 피가 철철 흘렀다. 끝내주는 장면에 왕장용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수처 마치고 해야 하나?’

왕장용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먼저 해볼게. 일단 보고 있어.”

연문빈은 첫 번째 환자를 바로 왕장용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먼저 하는 걸 보이고서 한두 코 찔러 보게 해야 했으니까. 연문빈은 혼자 시트를 깔고, 소독하고, 데브리망을 한 다음 분리된 근육 조직을 바늘로 한데 모았다.

유심히 보던 왕장용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학교에서 봤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왕장용의 동공이 점점 확대됐다.

“카데바는 포르말린에 얼마나 오래 담겨 있었냐? 이건 신선하잖아.”

환자는 반박해야 할지 말지 몰라서 얼굴을 찡그렸다.

왕장용의 목울대가 아주 빠르게 꿀렁거렸다. 그런 동작에 너무나 익숙한 연문빈은 날쌔게 그의 어깨를 잡아채서 곧장 뒤로 물러나게 했다.

우웩.

왕장용은 거리낌 없이 게워냈다.

아침.

점심.

어제 점심.

연문빈과 환자 모두 멍해졌다. 왕장용은 잠시 멈춰서 고개를 들었다가 드러나 있는 환자의 근육 조직을 보더니 저절로 ‘우웩’ 소리를 냈다.

이런 시가 있다.

허공에서 물줄기가 천 갈래로 떨어지고,

우레와도 같이 쉴 새 없이 강으로 들어가는구나.

예부터 지금까지 흰 비단처럼,

푸르른 산을 반으로 가르는구나.

왕장용은 드디어 오매불망하던 청소 기회를 붙잡았다. 그것도 독점으로.

아무리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실습생이라도 해도 다른 실습생의 구토물을 수습하면서까지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구토물이 흔한 병원엔 그것을 처리할 만한 기구가 완벽했고, 소독 걸레 같은 고급 장비가 왕장용을 도와 단독 칸막이를 깔끔하게 청소했다.

“피공포증 있냐? 피공포증 있으면 서전은 못 해.”

연문빈은 기회를 잡아 왕장용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학교에서 얼마나 많이 봤는데요.”

‘서전이 될 수 없다니. 외과처럼 멋진 과가 어디 있다고.’

왕장용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기분은 어때?”

“그냥 좀 메슥거려서 그래요. 피는 자주 봅니다. 병원에 막 왔을 때도 진단검사과에서 채혈도 한걸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왕장용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대 다닐 때 해부 수업도 즐겁게 들었고, 신선한 인류의 조직이 보기에 그렇게······ 거북할지 몰랐다.

“우연히 그랬을 수도 있어. 어제 제대로 못 잤다던가. 푹 쉬고, 내일 다시 해보자.”

연문빈은 계속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네’ 하고 대답한 왕장용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능연 오늘 출근했어요? 걔 여기서 수술 시작했죠?”

“응, 시작했지.”

연문빈은 너무 간단하게 설명한 것 같아서 ‘아주 많이’라고 덧붙였다.

“저 그거 봤어요. 신문에 난 거. 능연, 걔 지금 주임님 밑에서 수술해요?”

흥분해서 묻는 왕장용의 말에 연문빈은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로비엔 의료진 말고 환자와 보호자들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왕장용이 능연을 거론하다 보면 실습생 같은 단어가 불가피하게 나올 수 있었다. 실습생이 수술을 한다고 알려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왕장용도 곧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데브리망 하는 걸 본 그는 매우 흡족하다고 할 순 없어도 조금 기쁘긴 했다. 그리고 아직 두려움도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처치실 한쪽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능연이 수술 구역에서 나오는 것이 보일 때까지 잡일을 했다.

“너 이 새끼,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더니. 전화도 안 받고.”

왕장용은 후다닥 달려가 사람들이 의아하게 보는 가운데 능연과 어깨를 툭 부딪쳤다.

“수술 좀 하느라고.”

능연은 마연린을 데리고 탕 수술 두 건을 하면서 손을 풀었다. 그러자 왕장용은 순간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수술을 하는구나? 진료과 두 개 로테이션 돌면서 수술은커녕 수술실도 운이 좋아야 들어가는 나 좀 불쌍하게 생각해 줄래?”

왕장용은 데브리망 하다가 겪은 일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힐끔 보고는 말을 삼켰다.

“안 그래도 언제 너희들이 응급 의학과 오나 그 생각했다. 맞다, 진만호도 요즘 집으로 들어갔어?”

“걔네 엄마가 병원 앞에 집 사줬잖아. 당연히 이사 갔지. 운화에 집 살 능력이 되면 수술하고 말고는 상관없을 텐데.”

왕장용은 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수술할래?”

“나야 하고 싶지.”

능연이 싱긋 웃으면서 하는 말에 왕장용이 입을 삐죽였다.

“마 선생님, 오늘 탕 수술 환자 더 있죠? 하나 보내 달라고 하세요.”

능연은 그날 모두 두 건 탕 수술을 배정했고 다른 환자들은 수부외과로 보냈다. 하나 보내 달라는 말은 전화를 걸어 보란 뜻이었다. 운화 병원 수부외과엔 환자가 차고 넘쳐서 쟁탈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가서 물어볼게.”

마연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마 선생님’이 자신임을 깨닫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뭐 좀 먹을래? 아님 바로 수술실로?”

“지금 들어갈 수 있으면 당연히 들어가야지.”

고개를 돌려 묻는 능연의 말에 왕장용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곤 물티슈를 꺼내 입가를 꼼꼼히 닦았다.

능연은 마연린이 돌아오자 왕장용을 데리고 수술실로 돌아갔다.

수술실을 지키던 간호사는 왕장용의 사이즈를 묻고는 안에 들어가서 알아서 갈아입으라고 수술복과 옷을 건넸다. 능연보다 한 치수 작은 옷을 건네받은 왕장용은 흥분해서 고함을 쳤다.

응급 의학과에 올 때만 해도 소원이라고는 고작 데브리망 한 번 직접하고 내과 케이스 두어 개 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응급처치니, 사람 살리는 일이니 그런 건 차례가 오려면 멀었다는 걸 의대생을 거쳐 병원 생활 두 달 해보고 바로 깨달았다.

응급실에서는 전형적인 심폐소생도 일반 초짜 의사는 지시에 따라야 움직일 수 있었다. 하여 실습생과 훈련의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건 한층 더 높은 도전이었다.

일반적으로 3, 40명 되는 학생 중에 실습이 끝날 때까지 수술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는 사람은 몇 안 됐다. 왕장용은 탐욕스럽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방을 살폈다.

수술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지만 대부분 수술 참관이었고 그게 아니면 잡일을 하러 왔을 뿐이었다. 의사 신분으로 수술실에 들어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훅 잡아.”

능연은 신속하게 역할을 분배했다.

훅을 잡으라는 말은 스킨, 근육 조직을 끌어당겨서 수술 시야를 최대한 많이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란 소리였다. 훅 잡는 데는 힘이 좀 필요한 것 말고 다른 기술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멍청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심지어 탕 봉합 과정 중에 수부 피부를 잡는 것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훅만 잡아도 수술대에 서는 건 마찬가지라서 왕장용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흥분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시 위치로 다가갔다.

“집도의 말에는 대답을 해야지, 고개만 끄덕이면 다냐? 집도의가 어딜 보라고. 너? 아니면 수술 부위?”

조용히 왕장용을 지켜보던 마연린이 한마디 했다.

“아, 예.”

정신이 조금 돌아온 왕장용은 얼른 대답하면서 능연을 향해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집도의 방해하지 말고.”

“예!”

“마취 다 됐으면 시작합니다.”

모니터 기기를 힐끔 본 능연은 수치가 정상인 것을 확인한 다음 마취를 책임지는 소가복에게 한마디 던졌다.

“문제없이 잘됐어.”

소가복이 한쪽 다리를 의자에 걸쳐놓고 흔들거리면서 대답했다.

능연은 단호하게 메스를 그었다. 왕장용은 다급히 스킨훅을 건네받아서 잠시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잡다가 재빨리 정확한 방법으로 다시 잡았다.

마연린은 왕장용이 정확한 위치를 잡고 근육, 스킨 같은 조직을 당겨 그 아래 근건을 정확하게 드러내게 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새하얀 근건이 왕장용 앞에 드러나자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마연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왕장용을 휙 밀어냈다.

우웩!

왕장용은 죽을 것처럼 토를 해댔다.

“사람 불러서 치우고 우린 계속합시다.”

능연은 힐끔 보고는 계속 제 할 일을 했다.

“미쳤어요? 피 공포증 있는 거 본인이 몰라요? 일부러 욕먹으러 온 거예요?”

잠시 넋이 나갔던 순회 간호사가 바로 폭발했다. 수술실 안의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욕 안 먹는 의사는 잘생긴 의사뿐이었다. 빽 있고 돈 많은 의사 2세, 관료 2세도 수술실에서 사고 치면 두 마디 먹을 욕, 한마디 덜 먹을 뿐, 욕은 먹는다.

“저 피 공포증 없어요······.”

왕장용은 최대한 고개를 치켜들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무슨 공포증인지 몰라도 쓰레기통 껴안고 썩 나가요! 어서요! 동작 굼뜬 거 봐라! 토 덜 했어요?!”

순회 간호사는 왕장용을 몰고 나간 다음 청소할 사람을 불렀다.

“거참 이상하네. 정말 피 공포증 없어요?”

능연과 마연린은 계속 수술했다. 스크럽 간호사 왕가가 관심 있는 듯 물었다.

“피 공포증 있으면 기절했겠죠. 그냥 단순 메스꺼움 같은데요?”

마연린의 논리성에 왕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의사들은 피 자주 보다 보면 기절 안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요.”

마연린은 대충 대답했다. 주임들이 레지던트나 훈련의가 병원에 남든 떠나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병원 제도 아래 초짜 의사들은 실습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나 쓰레기통을 들고 입구에서 머리털이 삐쭉 설 때까지 속을 비운 왕장용은 해부용 시체를 공략했던 것처럼 수술실을 공략하겠다고 묵묵히 다짐했다.

사흘 후, 쓰레기통을 품에 안은 왕장용은 응급 의학과 처치실에서 영원히 방출되었다.

처치실에서 쫓겨난 왕장용은 당연히 응급처치실 근처에도 못 갔다.

그래서 능연은 왕장용을 데리고 매일 병실을 돌았다. 전보다 하도 들락거려서 ‘완고한’ 환자 두 명에게 ‘진심 어린 감사’까지 받을 정도였다.

“앞으로 회진밖에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무슨 재미로 병원 생활을 하냐.”

왕장용은 어이도 없고 걱정도 됐다.

“무슨 재미를 바라는데?”

능연의 질문에 왕장용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자신을 원망했다.

“아니, 까진 상처 같은 건 어릴 때부터 본 건데, 근육이랑 근건만 보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정확히는 산 사람 근육이랑 근건이지. 움직여서 그런가?”

그 말에 왕장용은 어떤 장면을 떠올렸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연신 머리를 흔들었다.

“말하지 마. 토할 거 같아.”

“아니면 전문적으로 봉합만 해서 나중에 성형외과 같은 데서 에스테틱 봉합하는 건?”

능연은 자신의 마스터급 병렬 봉합술로 그를 한동안 연습시키면 제법 괜찮은 성과를 이루리라 생각했다. 의대를 막 졸업한 실습생이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스킬은 봉합이니까. 능연도 그렇게 성장해 왔고.

“연습했었지. 스킨 수처할 기회도 이제 없다.”

왕장용은 입술을 깨물면서 민망한 듯 말했다. 처치실에서 연습하면서 간호사들의 화를 불렀는데, 병원에서 초짜 의사가 간호사들에게 밉보이면 앞날이 상당히 고달픈 법이었다.

“추나는? 추나 배울 생각 있어?”

“싫어.”

능연이 잠시 생각하다가 묻는 말에 왕장용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방법이 없네.”

능연이 터득한 수술 방법은 갖가지 스킬에 기초에서 얻은 것이라 탕 법 순서를 가르친다고 해도 순조롭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장용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근육, 근건을 못 보는 서전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정 안 되면 내과로 전과하지 뭐.”

“내과도 괜찮지.”

“응급 의학과 로테이션 기회가 아깝네. 넌 여기서 신나게 잘 지내는 거 같은데.”

왕장용은 이야기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처치실에서 토하는 연습을 하거나 능연을 따라 병실을 돌았고 능연이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능연이 능 선생 소리를 듣는 것만 해도 깊이 감탄하고 있었다.

“응급이라고 다들 핏덩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 처치실에 못 들어가니까······ 아! 이러자, 여원 선생님이라고 있어. 내가 소개해줄게.”

“뭐 하는데?”

능연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하는 말에 왕장용은 다시 희망이 솟아올랐다.

“항목으로 따지면 응급 외과인데, 특기를 따지면 아무래도 논문? 다른 것도 있겠지. 한동안 따라 다니다 보면 뭐든 배우지 않을까?”

“뭐든 배우면 좋지. 아무것도 못 배우는 것보다.”

왕장용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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