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195화 (176/877)

오후, 합동 진단실에서 능연은 MRI 사진을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환경이 좋은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는 뷰박스도 운화 병원보다 훨씬 커서, 능연은 필름을 한꺼번에 주르륵 늘어놓고 신나게 보고 있었다. 다른 의사들은 느긋하게 기다리며 서로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물론 전에는 호락호락한 의사들이 아니었다. 인류 중에 가장 자부심 넘치는 생물로서, 의사는 누군가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사진을 판독하든 뭘 하든 말이다.

그러나 외과는 기술을 최우선으로 두는 곳이기도 했다. 다들 능연을 내버려 두고 먼저 토론을 진행할 수도 있지만, 능연의 의견이 점점 더 우선시되는 지금 능연 없이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들 능연이 발언한 다음 이야기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자부심은 가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자부심을 부리는 건 아니니까.

수술실에서 막 나온 능연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보다 묵묵히 사진을 검토하고는 세 장을 골라냈다.

“이 두 환자, 비골(髀骨: 종아리뼈) 골절 있네요. 증상이 심각하고요. 이건 제외하죠. 이런 관절염은 슬관절(膝關節: 무릎 관절) 성형술로 하기엔 적당치 않네요. 나머지는 문제없습니다.”

현장에 있던 의사들이 슬며시 숨을 돌렸다. 환자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능연을 지명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병원 이름값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가 대량으로 몰려오면, 어느 의사라도 부담스럽게 여겼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 서른여 명의 의사 중에 적어도 스무 명은 매일 추가 근무까지 해서 수술할 정도로 수술에 미치진 않았다. 담당의가 결정되고 나면, 나머지 방안 토론은 쉬워진다.

능연은 방안 A 환자와 일반 아킬레스건 보건술 환자를 구분하고 나머지 관절경 수술 환자를 엮어서 분류 작업을 마쳤다. 방안 A, 아킬레스건 보건술 그리고 관절경 반월판 형성술은 방향성이 정해진 수술 환자라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능연아, 오늘 새벽에 나온 거 아니냐? 일단 가서 쉬지 그래?”

기천록이 걱정되는 듯 묻자 그를 힐끔 본 능연이 ‘3.14159 26535 89793 23846 264······.’를 외치며 직선으로 걸어 보였다.

“그래라, 나는 밤에 수술 보러 올게.”

원주율을 외우며 일직선으로 걷는 외과 의사라면 정신도 체력도 멀쩡하겠지. 남의 수술을 말릴 이유도 없고.

게다가 연속으로 30시간 넘게 수술을 하면 힘들기는 하지만, 이는 외과 의사의 기본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그러면 보통은 못 견디겠지만, 가끔 한 번씩 하는 건 캠핑이라고 여기면 된다.

능연은 항상 나서서 추가 근무하는 타입이고, 스태미너 포션도 준비해뒀다. 그리고 ‘진심 어린 감사’와 ‘동료의 칭찬’으로 얻은 미개봉 보물 상자도 22개나 있어서, 갑부가 된 기분이었다.

“관절경 수술은 더 해도 될 것 같은데, 환자가 너무 없네요.”

관절경 기술을 막 배웠고, 그랜드마스터급 관절경 반월판 성형술을 터득했는데 그의 실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천록도 그와 함께 수술에 들어가 어시한 후에야 환자 몇 명 배정해 주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일단 아킬레스건 하고, 시간 나면 그때 하자.”

그 자리에서 확답을 내리기 어려워서, 기천록은 그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떤 수술에 능한 외과 의사에게 해당 수술을 계속하도록 하는 건 병원과 환자에게 가장 좋은 유리한 일이고, 의사 본인에게도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의사는 관절경만 평생 하는 일도 있다. 노련한 의사는 한 평생이 짧아서 그렇지.

그러나 능연은 수술 종류는 상관없었다.

“아킬레스건도 별로 없습니다. 오늘은 좀 길게 할 생각인데, 중간에 비는 타임이 없으면 좋겠네요.”

기천록뿐만 아니라 다른 의사들도 골치가 지끈거렸다. 너무 정치적이고, 너무 정확한 요구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의사가 수술을 욕심낸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문제집 다 풀래? 다음 문제도 아직 준비 못 했는데?!’ 하고 학생에게 따지는 선생이 없듯이 말이다.

“아킬레스건 파열 더 찾아볼게.”

주임 의사인 기천록은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비로 문제집을 산 선생님처럼 마음이 참으로 복잡하긴 했다.

합동 진단실에 있는 의사들은 구체적인 병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마무리될 때쯤 기천록이 물었다.

“능연, 곽종군 그 양반 오셨었다며?”

“네, 회의 참석하러 오셨다더라고요.”

“곽 주임님하고 또 길이 어긋났네. 회의 참석 말고 다른 일은 말씀 없으셨고?”

“음, 없습니다. 다음 주에 운화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거 말고는요.”

기 주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능연이 대답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기천록의 안색이 확 변했다.

“내가 그 노인네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능연아, 곽종군 그 양반 말 듣지 마라. 생각해 봐, 여기는 상해야. 운화하고 비교가 되겠어?”

능연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운화 병원에 성립, 육군병원까지 더해도 상해의 삼갑 병원 하나를 못 이긴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보다는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는 삼갑 병원 분원이나 탑 진료과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이때다 싶은 기천록이 다급히 능연을 설득했다.

“능연아, 내가 계속 말했잖냐. 상해에 남는 게 답이라니까. 긴말할 필요도 없어, 상해에서 십 년 정도 지나면 너 전국구 된다. 운화 병원에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능연, 계산기 잘 두드려라. 알았어?”

기천록은 다른 의사가 있는 말든 개의치 않았다.

“너를 위해서 잘 생각해 보라는 거야. 너 같은 젊은 의사가 본인을 위하는 길이야말로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다음 주면 센터 침대도 다 찰 거고, 시간이 딱 맞거든요.”

180개 병상 중에 이제 30개 못 미치게 남았고, 1인실은 4개밖에 없어서 마지막으로 가동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병상을 추가할 생각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환자를 그만 받아야 할 수준이기도 했고.

물론 중국 병원은 허가된 병상 수로 환자를 받지는 않는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엔 적어도 130개의 여유 병상이 있고, 서서히 퇴원 준비를 하는 환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정상 속도로 따지면······.

그런데 능연은 정상 속도가 아니었다.

기천록은 능연의 계획에 넋이 나가버렸고, 다른 의사들은 능연의 직설과 느긋함에 넋이 나갔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 의사들은 엉덩이를 걷어차여 병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기분이었다. 기천록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머리를 굴리며 병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럼, 침대만 더 주면, 더 있다 갈래?”

능연의 이름값이 점점 올라가는 지금,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하루라도 더 붙잡아 두는 게 이득이었다. 소중한 여유 병상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겠냐는 말이다.

능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천록을 바라봤다.

“환자가 없는데, 침대만 더 있으면 뭐합니까.”

“당연히 구해 주지! 날 뭐로 보고. 환자 구해 줄게! 난 침대 문제가 더 크다고 봐서 그렇지. 네가 다 채울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침대도 구해다 줄게!”

회의실에 있는 의사들은 모두 자부심 넘치고 거만하던 머리통을 숙였다. 같은 외과 의사로서 이런 대화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흠, 침대와 환자가 있으면 조금 더 있어도 될 듯합니다.”

능연도 솔깃하기는 했다. 운화 병원에도 지금 병상이 비었다고는 하지만, 응급 의학과 병상 총 수량이 많지 않아서 일반 아킬레스건 수술 같은 경우 며칠이면 꽉 차버릴 것이다.

기천록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여유 공간이 많은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는 나머지 반이 폐쇄 상태였기에, 그곳을 개방만 하면 병상은 문제가 아니었다.

“좋아, 네가 남아만 준다면 침대 모자랄 일은 없게 해줄게.”

기천록이 당당하게 깃발을 꽂았다.

딩.

능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시스템이 새로운 퀘스트를 내렸다.

- 퀘스트: 두각을 드러낼 것

- 퀘스트 내용: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의 병상을 충분히 이용할 것! 다 채워 버려!

-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네, 알겠습니다. 침대가 있는 한, 남아 있을게요.”

능연은 기천록이 자기를 남기기 위해 애를 쓰리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런 쪽으로 촉이 잘 돌아가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한발 물러나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퀘스트가 나온 이상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중급 보물 상자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는 센터 병상을 다 채울 생각이었다.

기천록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능연 같은 의사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그도 옛날에 그랬으니까. 동기와 실력 차이가 두드러지는 동시에 무한한 에너지와 체력이 넘쳐서 영원히 수술할 수 있을 것 같고 항상 환자가 모자라고, 병상이 모자라고, 기계와 설비가 모자라고······.

그러나 기천록은 그런 외과 의사도 사람이라 모든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걸 더욱 잘 알았다.

체력이나 에너지 말고도 의사로서의 한계도 있다. 12~13시간 수술을 매일매일 이어가다 보면 곧 한계가 온다.

거기까지 생각한 기천록은 갑자기 멍해졌다. 생각해 보니 능연이 지금 매일 매일 그만큼 수술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그럼 수술이랑 병상 조율하러 간다.”

기천록은 일단 생각을 멈추고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반월판 성형술이랑 아킬레스건 보건술 환자 위주로 찾아 주세요!”

“단지는?”

능연이 특별히 상기시켜주는 말에 기천록이 농담하듯 툭 던졌다. 관절경 수술은 30분이면 되고, 일반 아킬레스건 수술도 비슷한데 단지는 한 손가락에 두세 시간 걸린다. 능연이 아무리 빨리한다고 해도 한두 시간은 걸리니, 두 사람의 작은 내기에서 단지 환자는 능연에게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긴 했다.

“두 손가락 이상만요.”

그러나 능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허 참. 아주 알뜰하시군요.”

어이없어진 기천록도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전국에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손꼽히는 상해의 환자 수는 충분했다.

능연은 별말 없이 회의실을 나와 수술 구역으로 향했다. 그는 스태미너 포션 몇 병을 꺼내 유심히 살펴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밤, 능연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았다.

스태미너 포션 한 병으로 수면 문제를 해결하고 새벽까지 수술한 다음, 어플로 아침을 시킨 다음 겨우 짬을 내 숨을 돌렸다.

“능연!”

곽종군이 수술 구역에 지키고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곽 주임님? 왜 여기 계세요? 회의는요?”

“음, 잠깐 빠져도 상관없다네.”

며칠 동안 상해에 머무르면서 회의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호텔에 묵고 그쪽에서 제공한 차를 타고 다니니 회의 첫날은 빠지기 미안했지만, 이튿날은 억지로 가자니 자기한테 미안했다.

곽종군은 능연을 끌고 구석으로 가서 자리 잡고 앉았다.

“좋은 거 하나 보여주지. 음······. 이번 회의 총국에서 준 건데, 나는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 자네 주려고.”

그러면서 멋진 케이스를 하나 꺼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은색 스테인리스 기구와 기도 삽관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이건······.”

“기도 절개 키트 풀세트! 주사기랑 소독 키트까지 다 독일제라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지. 흠흠. 아무튼, 좋은 기구라네. 나는 쓸 일이 별로 없느니 자네가 쓰게.”

곽종군의 얼굴에 ‘딱 필요한 거지? 어떠냐?’ 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능연은 감사해하며 궁금한 걸 물었다.

“골반강 해부학과 산부인과 도전 학회에서 선물한 건가요?”

“어······. 그렇지. 참 준비성이 대단한 사람들이지? 유비무환! 이건 휴대용이니 늘 들고 다니다가 나중에 필요하면 어디서든지 쓰게나.”

능연의 표정을 살핀 곽종군은 내심 뿌듯해했다. 그는 능연의 유비무환을 좋아하는 성격을 잘 알고 제약 회사가 추천한 여러 선물 리스트 중에 이 키트를 선택했다. 곽종군은 역시 자기가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이 키트는 능연의 응급 구조에 대한 흥미를 자극할 것이고, 병원 밖에서 한 번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성취감이 폭발해 응급 의학과에 대한 흥미가 다시 충족될 것으로 생각했다.

현명한 사고방식만 있다면 선물도 이렇게 똑똑하게 할 수 있다.

곽종군은 자꾸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에 달린 뿌듯함을 애써 끌어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