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199화 (180/877)

부원 호텔.

능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B2 주차장으로 내려가 CCTV가 없는 구석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보물 상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트랜스포머가 나올 거 같아!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정말로 나온다면 범블비가 좋겠지?

범블비라면 끌고 나가서 주차비 내면 되니까 문제없지만, 옵티머스 프라임이면 어쩌나 싶었다. 피버빌트 트럭은 면허 문제도 있고.

능연은 일단 B 면허부터 따고 상자를 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는 당분간 수술이 없고, 병원에서 침대를 줄이고 의료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매일 열 몇 명이 넘게 퇴원을 시키고 있었다. 능연도 거침없이 수술할 상황이 아니었다.

즉, 생각할 시간이 남아돈다는 이야기였다.

“오픈해.”

능연은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정말 트랜스포머가 나온다면, 면허가 없더라도 교통사고는 안 나겠지.

정 안 되면 옵티머스를 주차장에 잠시 세워두지 뭐.

아님, 랠리 경주나 트럭 속도전, 아니 그런 동영상 찾아서 보여주든가.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는 트럭 사고 영상 보여줘서 겁주는 것도 괜찮은데.

스킬북 하나가 번쩍이며 능연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또 스킬북이냐?”

능연이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시스템은 감감무소식.

능연은 한숨을 내쉬고 허공에서 빛나는 책을 톡톡 쳤다.

- 단일 항목 스킬북: 파생 기능 획득. X-ray 판독법(그랜드마스터급)

능연은 만족스러움과 불만족스러움 사이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얻은 MRI는 마스터급이었는데 X-ray는 그랜드마스터급이었다. 범위도 사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중급 보물 상자에서 얻은 스킬은 전면적으로 업그레이드 능력이었다.

그러나!

능연은 주차장에 세워진 마이바흐, 롤스로이스, 벤틀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 나머지 32개 초급 상자도 여시겠습니까?

다정도 하지.

“됐어. 내일 가서 상자 좀 더 모은 다음에 생각해 볼게.”

능연은 이제 플로우를 훤히 꿰고 있었다. 수술을 할 수 없지만, ‘진심 어린 감사’를 모을 최적의 기회였다. 물론 수술을 아주 잘했다는 전제하에. 환자들은 결과나 과정이 기대보다 훨씬 좋을 때 ‘진심 어린 감사’를 내놓곤 한다. 아킬레스건 보건술 같은 수술은 한 달 넘게 깁스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깁스를 풀고 걸어보게 하면 진심 어린 감사를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진심 어린 감사’를 내놓은 환자, 보호자와 접촉하는 게 좋았다. 그게 아니면 환자, 보호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수술실과 달리 너무 복잡한 곳이었다.

‘진심 어린 감사’를 내놓은 환자와 보호자는 그래도 단순한 편이라, 엄청나게 기뻐하거나 신이 난 상태라 파악하기 쉬웠다. 그리고 그 기분에 물들기도 하고.

능연은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돌아가 우유를 데운 다음에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 차갑게 식은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눠준 아이패드를 꺼내 케이스를 불러내 읽기 시작했다. 병원의 전자 차트 시스템은 의사만 볼 수 있지만,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특히 능연의 ID는 주임급 권한이라 전체 병원의 케이스를 읽을 수 있었다.

정형외과에서 X-ray는 꼭 필요한 검사였다. 능연은 그중 X-ray 하나를 골라 회의실 대형 스크린으로 보냈고 바로 골절 부분을 찾아냈다. 다른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능연은 느긋하게 사진을 꺼내면서 한 장씩 판독해 내려갔다.

X-ray는 다른 영상 자료와 마찬가지로 배우긴 쉬워도 정통하기 어려운 범주에 속했다. 정형외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골절을 X-ray로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X-ray만으로 식별할 확률은 겨우 8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판독하는 과정에 쏟아지는 수많은 디테일을 다 파악하려면 눈이 핑핑 돌아간다. 병변의 위치가 끝인지, 중앙인지, 안인지 밖인지. 병변 테두리가 명확한지, 모호한지, 매끄러운지 아닌지. 병변 밀도가 높은지 낮은지, 균일한지 아닌지, 석회화했는지 아닌지······.

MRI와 비교하면 X-ray는 단순하지만, X-ray 판독 능력만 따지자면 그 안에도 무수한 디테일과 경험이 있다.

능연은 데워둔 우유가 식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딩동.

문을 열자 여원을 따라온 기천록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능 선생, 지내는 곳 좀 보러왔어. 병원에서 좋은 데를 못 내줘서······.”

안으로 들어오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기천록의 말문이 막혔다. 거의 100평짜리 앰배서더 룸이 눈앞에 펼쳐졌다.

화장실이 딸린 작은 회의실, 화장실이 딸린 침실, 화장실이 딸린 응접실, 화장실이 딸린 서재 겸 사무공간, 그리고 주방.

기천록은 눈앞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 바꿨어? 부자네.”

“아니요. 호텔에서 업그레이드 해줬어요.”

“왜? 뭐라면서?”

“업그레이드하는 데 말이 필요한가요?”

능연이 눈을 껌뻑이며 기천록을 바라봤다.

“아니, 그게, 너 되게 오래 묵지 않았어? 매일 이 방? 호텔에서 자선사업이라도 한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

능연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기천록은 용건이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기억나도 꺼낼 수 없는 말이긴 했다. 원래 쓸 만한 원룸이라도 하나 마련해 주고 잘 보여볼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할 말도 없어졌다.

“저기, 능연이 조금 맹한 거 아냐? 저러다가 팔려가서도 제 몸값 대신 세주겠어. 아니, 이거 너무 수상하잖아. 옛말에도 공짜 선물은 없다고 했어.”

곁에 아무도 없겠다, 기천록은 여원에게 속닥속닥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여원도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기 주임님,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길 입 벌리고 기다리는 이야기, 아시죠?”

“응?”

“저도 전에 주임님처럼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제 깨달았어요. 우리는 홍시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굶어 죽은 사람을 매일매일 보는 거예요. 그런데 능연한테는 홍시가 알아서 뚝뚝 떨어져요. 보세요, 그러니까 우리랑 사고방식이 같을 수 있겠어요?”

기천록은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 느낌이에요. 쟤가 좀 이상한 것도 당연해요.”

띠리리리.

방정맞은 능연의 핸드폰 소리가 얼마 울리기도 전에 능연이 전화를 받았고, 두 사람은 바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능연은 네네, 몇 번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곽 주임님이 고속철도 표 끊어 두셨대요. 기 주임님, 저희 모레 돌아가요.”

“이, 이렇게? 우리 새 병실 이제 막 꾸렸는데?”

“괜찮아요. 나중에 다시 오면 되죠. 비워둘 일은 없을 거예요.”

기천록이 당황해서 묻는 말에도 능연은 태연하기만 했다. 룰루랄라 신나 보였고 헤어짐의 아쉬움보다 운화 병원에 대한 그리움이 커 보였다.

고속철도, 일등실.

“이번에 여기저기 경유를 많이 해서, 특실 끊어 달라기가 좀 그렇더라고. 몇 시간이면 도착하니까 좀 참게.”

곽종군은 부담을 내려놓은 편안한 표정으로 능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능연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짐을 제자리에 놓고 곽종군 옆에 앉았고, 여원은 통로 사이 좌석에 앉아서 편안한 표정으로 다람쥐처럼 웃었다.

“옆에 덩치 큰 아저씨만 아니면 좋겠네.”

“거기 소건 씨 자릴세. 소 사장.”

“네? 소 사장님도 오셨어요? 왜 못 봤지?”

“대게 사러 왔다더군.”

깜짝 놀라 묻는 여원의 말에 곽종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병원이 아니고요?”

이번엔 더 놀랐다.

“소 사장이 다른 병원에 갈 리가 있나. 우리 병원만큼 상태를 잘 아는 곳이 없지. 다른 병원 가 봐야 머리 아프다면 머리 봐주고, 다리 아프다면 다리 봐주기밖에 더해?”

“아······.”

곽종군이 진지하게 말하자 여원은 혼란스러운 듯 말꼬리를 늘렸다.

우리는 아니고요?

잠시 후, 소 사장이 허허 웃으며 객실로 들어와 곽종군과 인사하고는 기뻐하며 능연과 악수했다.

“곽 주임님이 드디어 능 선생 끌고 왔구만.”

시진(視診)으로 소 사장을 구석구석 살핀 능연은 고질병 말고는 건강한 걸 확인하고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회진 돌면서 ‘진심 어린 감사’ 보물 상자를 수집하느라 대화할 기운도 없었다.

능연의 성격을 잘 아는 소 사장도 별말 없이 허허 웃기만 했다.

“이제 됐지 뭐. 나중에 대게 먹으러 와. 획기적인 방법 구상 중이야. 재미있을걸?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말이지.”

“무슨 체험이요?”

“직접 대게를 잡는 거야. 우리 종업원이 그 자리에서 로프로 다시 매주고.”

소 사장이 리얼하게 설명하자 여원은 눈을 깜빡이다가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합마수산은 킹크랩이던데요? 대게로 무슨 홍보가 되나요?”

“에이, 내가 거기랑 싸울 수 있나. 난 신장도 하나 적은데? 오줌도 거기 사장보다 빨리 못 싸.”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징그러워.”

148cm 여원이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세상에, 누가 누구한테 징그럽다는 거야. 네 취미를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이런 말을 다 듣다니, 아, 심장이야. 헉,”

운화 병원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는 소 사장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연기했다. 소 사장이 편한 여원도 주먹을 불끈 쥐며 달려들었다.

“한 번만 더 말해 봐요! 나중에 사장님 변비 되면 내가 꺼내 버릴 테니까!”

“난 변비 없······ 됐다. 우리 화제 바꾸자, 응?”

소 사장이 소스라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곽종군도 몰래 한숨 돌렸다. 일반 외과 출신인 군의관이었지만, 수술복을 입지 않았을 때 그런 화제에 대해 인내력이 지극히 낮았다.

- 적군 도착 5초 전!

능연이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켜자 열차가 살짝 흔들리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곽종군은 그 모습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젊은 사람이 게임 하는 걸 보면 젊음이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젊을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저렇게 승부욕을 발동한단 말인가. 이기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젊을 때나 그렇지, 자기 나이쯤 되면 안정만을 바란다.

“여 선생.”

곽종군은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옆에서 과자를 먹고 키 클 준비를 하던 여원을 불렀다.

“능 선생 논문 어떻게 되어가나? 미루지만 말고 어서어서 끝내게.”

“아······. 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여원은 바로 과자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꺼냈다.

고속철도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고, 창밖의 경치는 쉴 새 없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갑자기 객실에 안내 방송이 울리기 전까지는.

- 승객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우리 열차에 응급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탑승객 중에 의사가 있으시면 서둘러 7번 객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소 사장은 온몸이 굳었다가 후욱 하고 숨을 뱉었고, 능연, 여원, 곽종군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곽종군은 특히 흥분해서 심장이 쿵쿵 뛰었고 다리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바로 튀어 올랐다.

“자자, 어서 가세. 우리를 찾고 있네.”

곽종군은 능연과 여원을 끌고 가면서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 사람 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밖에서 사람을 구하는 게 정말 대단한 거라고. 자네들 운이 좋구만. 나는 4, 5년 만에 이런 응급 상황을 처음 겪네. 그 마지막 응급 상황도 설사 환자였어.”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구하셨어요?”

“설사인데 구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여원이 궁금한 듯 묻는 말에 곽종군은 맥 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 등 뒤 특실 객실 자동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정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피곤해 보이는 눈빛의 남자는 트레이닝복 바지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고 있던 외투를 익숙하게 걸쳐 입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다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가 부담을 벗은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의사구만.”

잠시 그를 보던 곽종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소 사장이 뒤에서 ‘내과네.’ 하고 대꾸했다.

“뭐, 대단해 보이지는 않구만.”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데 중간쯤에서 두 사람이 일어났다.

젊은 사람 하나, 나이 든 사람 하나. 나이 든 사람은 곽종군, 젊은 사람은 여원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마찬가지로 피로해 보였는데 이제 곧 생길 가치 있는 일로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외과야.”

곽종군이 힐끔 두 사람의 손을 보고는 확신했다. 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능연은 강퇴 당하지 않으려고 게임을 계속하면서 느릿느릿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만요, 지나가겠습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서류 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순간 곽종군은 매우 다급해졌다.

“안 되겠어. 서두르세. 상해에서 출발한 열차라 회의나 출장 수술 온 의사가 너무 많아.”

곽종군은 적이라도 마주한 듯 양손을 앞으로 밀면서 아까까지 느긋하던 이미지는 팔아 치운 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또 다른 의사 하나가 앞 객실인 이등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곽종군을 힐끔 보고는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뛴다!

빠르게 뛴다!

앞에 입석 승객이 나타나자 남자는 펄쩍 뛰어올라 난간을 뛰어넘는 자세로 승객들을 뛰어넘고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지방 병원 의사들이란. 체대에서 졸업한 법의관인가 보군.”

곽종군은 투덜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 의사이신 승객 있으시면 7번 객실로 와 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있습니다.

의사가 아닌 승객들은 존경, 격려, 찬양하는 뜨거운 눈빛으로 자기들 앞을 지나는 의사들을 눈으로 배웅했다.

어떤 의사는 안절부절못하며 하얀 가운까지 꺼내 입었다.

병원에서 사람을 구하는 성취감이 –10에서 10이라면, 열차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람을 구하는 건 12년 의사 생활에 해당하는 성취감이었다.

곽종군, 능연과 여원이 7호 객실에 도착했을 때, 환자 주변엔 벌써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반쯤 비어 있던 객실이 비좁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일단 다른 승객 자리를 비울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열차장이 혹시나 해서 묻자 의사들은 다들 고개를 저었다.

장난해? 승객을 모두 치우고 의사들만 남겨 두라고? 그럼 참관실이나 지도 수술이랑 뭐가 달라?

“이럽시다. 일단 임상 경험이 있는 의사부터 나섭시다. 다들 소속을 이야기해보자고요. 저는 서금 병원 신장과 주임 의사 굴성자입니다.”

“화산 병원 신경내과 주임 의사 노괘등입니다.”

“오, 뵌 적 있습니다.”

“네, LA였죠. 그때 같이 환자 하나 진료했죠.”

“반갑습니다.”

“저는 절아 병원 신생아과 부주임 상애달입니다.”

두 정상급 병원 주임이 인사를 나눈 후 누군가 아쉽다는 듯 소속을 밝혔다.

“남경 곡루 병원 간담췌외과 부주임 갈홍찬입니다.”

“화서 병원 산부인과 주임 단락초입니다.”

“저는 운화 병원 응급 의학과 주임 곽종군입니다.”

그때 더 기다리기 싫어진 곽종군은 헛기침 몇 번 하고 인사를 했다. 몇 달 뒤면 응급센터가 설립될 것이고 그때였다면 더 멋지게 소속을 밝혔을 텐데, 하며 곽종군이 아쉬워했다.

현장에 있던 의사들도 긴장했다. 응급 의학과라면 딱이지 않은가. 그리고 초짜 의사들은 소속을 밝힐 시간을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곽종군은 양손을 휘두르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환자 앞에 섰다. 먼저 온 의사가 이미 기초 검사를 진행하여 곽종군에게 작은 목소리로 내용을 전달했다.

“심박이 빠릅니다. 96. 뇌경색 흔적은 없고 호흡이 약합니다.”

“종양이나 외상으로 인한 후두경색인지도 모르겠군요. 보호자 계십니까?”

신경내과 주임 노괘등이 물었다.

“다친 적은 없어요. 종양은······ 모르겠어요.”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대답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일단 기관지 절개해서 호흡부터 처리합니다.”

응급 의학과 일을 오래 한 곽종군은 다른 전문의와 일 처리 방식이 확연히 달랐다. 그가 두세 마디 만에 결단을 내리자, 잠시 침묵했던 사람들이 동의하기 시작했다.

“메스 있나요?”

한창때이고, 먼저 와서 유리한 위치를 잡은 신생아과 부주임 상애달이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숙여 환자의 목 부위를 만졌다.

“이미 응급 키트와 메스를 구해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술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얇은 파이프가 있으면 좋고요. 환자가 지금 숨을 못 쉬니, 후두를 절개해서 기관을 드러내고 삽관으로 호흡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위험성도 별로 없는 간단한 수술입니다. 문제는 지금 도구가 없다는 건데······.”

애상달이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사이 승무원이 작은 칼과 응급 키트를 가지고 왔다. 응급 키트라기보다 검사 상자 혹은 약상자 같았다. 혈압계, 청진기 같은 기구는 갖췄고 두통이나 발열을 치료하는 약품과 주사기, 거즈, 솜, 소독약 같은 것도 다 있는데 하필이면 삽관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펜 좀 주세요. 그걸로 임시 삽관하고······.”

애상달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많은 손이 펜을 내밀었다. 환자 가족들은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이따 병원에서 하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바로 호흡 정지가 올 수도 있어요.”

애상달이 고개를 흔들면서 비교적 굵은 펜을 골라 소독 준비를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거기까지 지켜본 능연이 한 손엔 가방, 다른 한 손엔 여원을 들고 거침없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능연은 무릎을 꿇고 키트를 꺼내 열었다.

은색 알루미늄 합금 상자에 모스키토 포셉(직), 모스키도 포셉(구부러짐), 140 유구 포셉, 140 무구 포셉, 160 무구 포셉, 세침, 니들홀더 등 수많은 도구와 가장 필요한 7호 캐뉼러 (cannula), 8호 캐뉼러, 9호 캐뉼러, 10호 캐뉼러 등이 가득했다.

메스 손잡이에 메스가 끼워지지 않은 것 빼고는 풀 세트 장비가 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곽종군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능연은 상자의 두 번째 칸에서 마스크 두 개를 꺼내서 하나는 여원에게 건네고 하나는 본인이 썼다. 그리고 장갑도.

“좀 비켜 주세요. 이리게이션.”

능연은 고개를 돌리고 여원을 불렀고, 명령을 들은 여원은 조건반사처럼 목 주변을 닦기 시작했다. 능연의 수술에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시트.”

능연은 수술실 플로우를 따라 진행했다. 능연이 구멍 뚫린 작은 수건까지 꺼내는 걸 본 의사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공간을 넓혔다.

“정중간 유지.”

“메스.”

“모스키토 포셉.”

“훅.”

의사들과 그보다 중요한 핸드폰을 든 관중들에게 둘러싸인 능연은 묵묵히 그랜드마스터급 기관지 절개술을 펼쳤고, 그를 지켜보는 의사들의 가슴은 점점 벅차올랐다.

능연은 정상 플로우를 따라 환자의 기관 절개술을 진행했다. 만년필로 구멍을 내는 것보다 정규적인 기관지 절개술이 훨씬 예후가 좋고, 리스크도 적다.

정규적인 기관지 절개술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풀 세트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능연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풀 세트 절개 기구를 가지고 다니는 인간이라니······. 대체 뭐야, 얘.

길바닥에 절개할 환자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일반 승객들은 신나 하며 지켜봤다. 수술 참관할 일이 없는 일반인들은 숨을 못 쉬던 환자가 서서히 살아나는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이건 SNS 감이야.

의사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SNS 감이었다.

이걸로 여행 간 걸 자랑하면서,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돈으로 산 명품을 은근슬쩍 배경으로 넣기까지 한다면 더욱 SNS에 올릴 가치가 생긴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이 가능해지자 능연은 기구를 치웠다. 객실 분위기가 다시 좋아졌다.

“운화 병원 의사인가요?”

절아 병원 신생아과 애상달이 곽종군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저런 휴대용 키트는 어디서 샀답니까?”

곽종군이 싱글벙글 대답하는 말에 애상달은 진지하게 물었다. 다른 의사보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신생아과 의사인 애상달은 자기 신념을 확고히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곽종군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빵긋 웃었다.

“독일 제품이오. 테스트해 보라고 주길래.”

“브랜드는요? 쓸 만해 보이네요.”

힐끔 애상달을 본 곽종군이 빙긋 웃으면서 연락처를 주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위챗을 추가했고, 곽종군이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의 명함을 애상달에게 건넸다.

초짜 의사에게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을 어떻게 굴리느냐는 하나의 숙제였다. 그러나 부주임급 이상 의사에게 제약 회사 영업 사원은 손안의 떡이었다.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는 끙끙대지만, 경력 프로그래머가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저런 걸 가지고 다니라고 지시하는 건 아니겠죠?”

원하는 걸 얻은 애상달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당연하죠.”

“그러니까, 본인이 원해서 들고 다니는 거네요?”

“젊은 사람이니까요.”

곽종군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애상달도 슬쩍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긴 척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환자도 당신들이 들고 다닌 건 아니죠? 하하하, 농담입니다.”

곽종군은 그런 애상달을 보면서 신생아과에 오래 있어서 성인과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의심했다.

몸이 허약한 소 사장은 그 근처까지 와서 상황을 보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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