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락추는 점심을 먹고 다시 엄마를 불러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봤다. 모처럼 만에 여유롭게 나란히 앉은 모녀는 금방 또 드라마에 빠져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 얘. 선생님이 진정해야 한다고 했잖아.”
“아냐, 기분 좋으면 된댔어. 나 지금 기분 좋아.”
엄마는 훌쩍거리면서 티슈를 뽑아 코를 팽 풀었고, 제낙추는 손을 내밀어 티슈를 받아서 쿡쿡 눈물을 찍어냈다.
“자, 흥! 해.”
엄마가 코 아래 티슈를 대주자 시원하게 코를 푼 제낙추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은하 불쌍해. 너무한다 진짜.”
“그러니까, 네 남자 친구가 이상한 놈이라 그래.”
“몇 번이나 봤다고 그래?”
“내 말이. 코빼기를 보여줘야 말이지.”
“엄마랑 말 안 해! 나 드라마 볼 거야.”
계속 눈물을 훔치던 제낙추가 갑자기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 손이 차가워.”
“손 집어넣어.”
코를 풀고는 눈물을 훔치던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 다친 손.”
“뭐? 많이 차가워?”
엄마는 깜짝 놀라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선생님 좀 불러줘. 중지랑 무명지에 느낌이 없다고.”
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벌써 ‘선생님, 선생님’ 고함치며 병실을 뛰쳐나갔다.
응급 의학과 병실의 피드백은 언제나 최고로 빨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간호사가 먼저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뭐가 어떤데요?”
“내 딸이······ 내 딸이······.”
“중지랑 무명지에 느낌이 없어요. 만져 보니까 조금 차가워요.”
당황한 엄마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고, 제낙추는 변함없이 침착했다. 적어도 드라마 볼 때보다는.
간호사는 힐끔 보고는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고, 침대 머리맡 호출 벨을 눌렀다.
“67번 환자 혈관 이상입니다.”
간호사들과 당직 의사가 바로 뛰어왔다.
“퍼퓨전(perfusion: 관류) 준비해요. 그리고 능연 팀에 연락하고.”
“벌써 갔어요.”
당직 환자가 표준 지시를 내리자 간호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주사기와 캐뉼러, 관류 액 병 등을 준비했다.
“조금만 참아요. 함부로 움직이면 절대로 안 됩니다. 손가락 못 쓰게 될 수 있어요.”
응급실에서 1, 2년만 지내도 이런 돌발 사고에 익숙해진다.
제낙추는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줄어든 모습을 상상하고는 움직일 엄두를 못 내고 이를 악물었다.
“참을 수 있어요.”
바늘 뒤쪽은 링거 호스, 관류 병을 통과해서 연결되었고, 바늘 끝은 링거 호스, 인류 병을 통과해서 연결된 주삿바늘이 비스듬히 손가락을 찔렀다. 레지던트가 고개를 숙여 상황을 지켜보다가 질문했다.
“아까 무슨 상황이었죠? 손가락 끝이 갑자기 차가워졌나요?”
“저도 모르겠어요. 특별한 거 먹고 마시지도 않았는데요.”
“담배 피우셨나요?”
“아니요.”
“담배 냄새는요?”
“아니요.”
“손을 누르거나 약을 먹은 것도 없고요?”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드라마만 봤어요.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고요. 이것 보세요!”
엄숙하게 묻는 레지던트의 말에 바짝 긴장해서 대답하던 제낙추가 쓰레기통을 내밀었다. 티슈로 꽉 찬 쓰레기통을 보는 레지던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번에 집에 갔을 때 여자 친구가 게으르게 소파에 누워 소파 구석에 티슈를 쌓아놓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기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담담한 레지던트의 말에 제낙추는 목을 쑥 움츠렸다.
“기분 평온했는데요.”
“이렇게 펑펑 울어 놓고요!”
“아니, 그건 드라마 보면서 운 거지, 진짜로 운 게 아니잖아요. 여자를 모르시네.”
레지던트가 웃음을 터트리며 ‘아, 예······.’ 하고 속으로 대답했다.
“선생님, 이제 어쩌나요?”
“주치의가 와봐야 압니다.”
긴장해서 묻는 어머니의 말에 레지던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레지던트는 그냥 응급 의사였고, 정상적인 응급처치를 했을 뿐, 그다음 처치를 할 자신은 없었다.
2, 3분 만에 연문빈이 조림 간장 튄 국물을 옷에 묻힌 채 튀어 내려왔다.
“무슨 일이야?”
근무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달려왔다. 의사란 환자에게 휴식 시간을 양보하는 존재였으니까.
“손가락 온도가 표준 이하야. 헤파린 썼는데, 퍼퓨전 효과가 그렇게 좋진 않아.”
레지던트가 낮은 목소리로 아는 대로 설명했다.
“피 뽑아요.”
연문빈의 단지 이식 경험은 일반 정형외과가 평생 만나볼 양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바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식한 손가락 절개구 쪽에서 피를 뽑습니다. 디지털 플럼프(digital pulp: 손가락 속질. 손톱 반대 지문 있는 부분)는 헤파린 나트륨에 담그고 네일 베드(nail bed: 손톱 밑 부분)에서도 빼야 합니다. 네 손가락 모두요.”
연문빈은 지시를 내리면서 장갑을 끼고 직접 시작했고, 당직 레지던트도 식지를 잡고 따라 했다. 손가락 끝부분은 초보도 할 수 있지만, 손톱 밑 부분은 기술이 조금 필요했다. 소독된 손톱을 메스로 60도 들어 올려 파고들어야 한다.
처음엔 몰라서 무서울 것도 없던 제낙추는 연문빈이 한 손가락을 처리하자 눈물이 찔끔 났다.
“아니, 이게 무슨 고문도 아니고. 왜 이러는 거예요!”
“마취하고 하면 안 되나요? 애가 이렇게 아파하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보호자분 나가주세요, 응급처치에 방해됩니다.”
제 살이 깎이는 듯 애달파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 어머니의 모습에 연문빈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응급처치라니······.”
“혈전 생기면 위험해져요.”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를 간호사가 살짝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맞은편에서 능연이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모습에 그를 알아본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능 선생님! 제 딸 좀, 어서요.”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하게 몸을 비틀어서 오른쪽 앞으로 걸음을 바꿔서 환자 어머니가 달려드는 걸 피했다.
“무슨 일입니까?!”
성공적으로 환자 어머니를 방문 밖에 남겨 두고 안으로 들어간 능연이 큰 소리로 물었다.
“혈관 이상이야. 중지랑 무명지, 이러다 못 쓰게 되겠어.”
“유로키나제(Urokinase: 혈전 용해제) 썼습니까?”
“아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던 연문빈은 능연의 질문에 멍해졌다.
“유로키나제 10만U, 정맥 주사.”
재빨리 지시 내린 능연은 환자를 힐끔 보고는 누가 먼저 왔는지 물었다.
“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싱글 레지던트가 대답했다.
“연 선생님, 나가서 보호자에게 알리고 탐사 수술 준비하세요. 수술 전 동의서도 받고요.”
이어서 능연은 환자를 바라봤다.
“손가락 4개가 잘린 거라 원래 위험한 수술이었습니다. 혈관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일단 검사 수술을 준비할 겁니다. 필요하면 혈관을 절개하고 다시 문합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그냥 한국 드라마 본 거뿐인데요.”
우르르 쏟아지는 능연의 말에 제낙추는 정신이 다 어질거렸다.
사흘 만에 수술실로 다시 불려온 왕해양은 수술실 문을 밝고 들어오면서 마스크를 꼈다.
“이번엔 몇 개짜리야?”
수부외과 주임이고, 항상 타지를 돌면서 출장 수술가 1만 위안을 받는 실력자 왕해양은 수술실에 내키는 대로 편안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진료과 수술실은 오히려 더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금 전에 불려온 마취의 소가복은 의자 두 개를 밟고 빙글빙글 돌고 있다가, 왕해양의 질문에 4개라고 대답했다.
“곽 주임 대단하구만. 사흘 만에 또? 진짜 칼부림이라도 낸 건 아니겠지?”
“부분 마취 환자입니다, 왕 주임님.”
혀를 끌끌 차는 왕해양의 모습에 소가복이 눈썹을 치켜뜨며 익숙한 장면이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왕해양이 입을 내밀며 빠르게 말을 돌렸다.
“보통 전신마취하는 거 아니야? 4지 절단을 부분 마취라니. 20시간 동안 환자 피 말릴 셈이야?”
왕해양은 일단 환자에게 사과하려고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멈칫했다. 제낙추는 얼굴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헤헤 웃었다.
“안녕하세요, 왕 주임님. 또 만났네요.”
“잉? 설마, 손가락 또 잘렸습니까?”
깜짝 놀라 환자의 손가락을 살펴보고는 같은 환자임을 걸 확인한 왕해양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한국 드라마를 좀 봤는데······.”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마취약에 취한 제낙추는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혈관 이상입니다. 설명해 드리라는 말을 제가 빼먹었나 봅니다.”
“하하, 미안. 내가 흘려들었네.”
능연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하는 말에 왕해양이 껄껄 웃으며 제 탓으로 돌렸다.
“헤파린, 유로키나제는 이미 썼습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습니다. 열어보시죠.”
간단하게 설명한 능연이 덧붙이는 말에 왕해양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선 손가락을 살려 볼 기회조차 없고 절개밖에 없었다. 제낙추가 애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기요, 제가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고요. 수술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정말 20시간이나 걸려요?”
“해 봐야 압니다. 허허허.”
“20시간은 진짜 지겨워 죽을 거 같아요.”
제낙추가 불쌍한 얼굴로 왕해양을 바라봤다.
“모니터로 드라마 같은 거 틀어 주시면 안 돼요?”
“참 간도 크시네요.”
나이 들어 반응이 느려진 왕해양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곁에 있던 연문빈이 대단하다는 듯 내뱉었다.
“잔잔한 거 보면 되잖아요. 드라마 말고 다른 거 볼게요.”
“동물의 왕국도 안 됩니다.”
왕해양은 대화에 들어가는 동시에 메스도 찔러 넣었다.
“귀여운 사슴이 늑대한테 잡아 먹히는 걸 보고 혈압이 확 올라가면 어쩌려고요. 이 수술은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가장 문제인 수술입니다.”
“왕 주임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동물의 왕국 틀어놓고 환자 혈압이 오르면 제가 진 거로 하겠습니다.”
마취의 소가복이 흠흠 헛기침하며 끼어들자, 차가운 수술대에 누운 제낙추는 은근히 수술실 대화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푸웁 웃었다.
“그럼 둘 다 지는 거잖아요.”
“저는 지더라도 환자분은 안 지죠. 혈압이 올라도 처리 방법이 있으니까요.”
“몰라요, 지금 환자로 도박하신 거죠? 드라마 틀어 주면 없던 일로 해드릴게요.”
“하아, 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노래 불러 봐요.”
제낙추는 수술실에 있다고 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새로운 요청을 했다. 한참 말문이 막혀 있던 소가복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 노래 못해요.”
“그럼 옛날이야기라도 해봐요.”
능연과 왕해양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제낙추의 손가락에 메스를 댔다.
그리고 한 시간이 되기 전에 수술이 종료됐다.
“수술 예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엔 한국 드라마 보지 마세요. 감정 동요하기 쉬운 드라마, 영화, 다 안 됩니다.”
스트레처 카를 따라 나간 능연은 제낙추 보호자에게 엄중히 당부했다.
“만화는요?”
누구보다 빠르게 묻는 제낙추의 말에 능연은 한참 말을 잃었다.
“우선 환자분이랑 병실로 돌아가 계세요. 이따 제가 간호사 보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가족 두 분이 대표로 들으시면 됩니다.”
환자 보호자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능연은 무슨 생각이 난 듯 뒤돌아 왕해양을 바라봤다.
“혹시 환자랑 보호자들 시험 봐도 됩니까?”
“시험?”
“네, 주의사항 같은 거요. 통과해야 한다고 알리는 거죠.”
“못 하면?”
“못 하면요? 흠, 간호사가 특별히 주시해야겠죠? 퇴원도 늦어진다고 알리고. 뭐, 재활 같은 거죠. 환자가 정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적어도 무슨 일이 생길지 알게는 되겠죠.”
“흠, 협화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들은 것도 같고······. 하지만 응급 의학과 일은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어.”
“그럼 곽 주임님 찾아가 보겠습니다.”
능연은 망설임도 없이 바로 돌아서 사라졌다. 그런 그를 부르려고 뒤에서 손을 흔들던 왕해양은 됐다 싶어졌다. 의사가 대주임님을 찾아가서 의견을 내면, 특히 이런 전체 진료과를 흔들 만한 의견일 때는, 욕먹을 확률보다 무시당할 확률이 높지만, 뭐, 능연이니까.
왕해양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 갈 길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