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견실.
올해 마흔둘인 좌자전은 생김새가 다르고 품종이 다양한 화분을 바라보며 행복한 탄식을 내뱉었다.
“왜? 우리 접견실이 싫은가?”
곽종군은 뒷문으로 들어오다가 마침 좌자전의 탄식을 들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편안해서요.”
황급히 몸을 일으킨 좌자전은 자세를 가다듬고 곽종군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 그래도 우리 접견실이 마을 위생 병원 수술실보다 정갈하다고 생각하던 중인걸요. 다 같은 꽃인데 시골 꽃은 참, 우리 병원 꽃처럼 단정하지도 않고요.”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일세.”
곽종군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맞은 편에 있는 중년 의사를 찬찬히 살폈다.
마르고, 키가 크고, 사각 얼굴에, 겸손한 표정. 보기에 영리해 보였다. 똘똘한 아이처럼.
하얀 가운 안에 입은 스웨터 소매 끝이 조금 닳았고, 한 올 흐트러지지 않게 왁스를 잔뜩 발라 넘긴 머리가 아니면 나이보다 어리게 보일 수도 있었다.
40대는 의사가 가장 활약할 나이였다. 특히 외과의는 마흔부터 쉰까지가 성과를 내고 확립할 황금기였다. 큰 병원에서 사람을 스카웃하기 딱 좋은 나이기도 하고.
그러나 마을 위생 병원 출신인 좌자전은 일반적인 의미의 외과의와는 달랐다.
“마을 위생 병원에서 운화 병원이라. 참으로 큰 한걸음이구만.”
곽종군이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의 이력서를 내려다봤다.
“마을 위생 병원에 있을 때 응급 환자를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위급했던 케이스는?”
“심근경색, 뇌경색이었습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좌자전이 이번엔 거침없이 대답했다.
“몇이나 치료했는데?”
“네 케이스밖에 없었습니다.”
턱을 치켜들고 묻는 곽종군의 말에 좌자전의 목소리가 다시 기어들어 갔다.
“그래서?”
“뇌경색 환자 하나는 현 병원으로 트랜스 되어서 한 달이나 버텼습니다. 결국 죽었지만요.”
“허, 터프하구만.”
좌자전은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춰 말했다. 곽종군은 잠시 멍해졌다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좌자전은 말을 이을 엄두를 못 내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슬쩍 웃었다.
곽종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운화 병원의 취업 규정은 상당히 빡빡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빡빡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해마다 당해 졸업생 정원, 스카우트를 대비한 유동 정원을 제외하고 가장 돈 되고 치열한 부분이 바로 비정식 채용 정원이었다.
비정식 채용은 조건이 가장 낮은 만큼 급여 조건도 낮지만, 창서성 의사들은 너나없이 몰려들었다.
비교적 유망한 진료과, 정형외과, 안과는 신입도 박사부터 모집하고 명문 대학 아래는 면접 기회도 없었다. 산부인과, 일반 외과는 조건이 조금 낮아서 좋은 대학 석사도 들어올 수 있지만, 명문 대학 아래는 박사라도 받지 않았다. 소아과, 응학 같은 학과의 기준이 제일 낮았다.
그렇다고 한없이 낮은 것도 아니라서, 아무리 낮춰도 마을 위생 병원에 다니던 전문대생 출신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곽종군은 한숨을 내쉬면서 좌자전을 바라봤다. 좌자전은 바로 착실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이 필요한 건 맞다만, 자네 이력이 참······. 이건 뭐.”
곽종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능연을 위해 사람 하나 구해 마연린의 빈자리를 메꿀 셈이었다. 그러나 좌자전의 배경이 마지노선에서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능연은 됐다 치고, 다른 팀에 보내려고 했지만 진지하게 거절당했다.
몇몇 주임과 부주임들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런 일에 늘 무관심한 도 주임마저 거절했다.
돌려보내야 하나?
돌려보내는 건 쉬워도, 구하기는 또 어려웠다. 그렇다고 받아 주자니······.
곽종군은 좌자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결정적 순간이란 걸 깨달은 좌자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곽 주임님, 제가 참 빨리 배웁니다. 그리고 열심히 합니다. 정말로 열심히 합니다. 무슨 일이든 저한테 맡겨주기만 하면 제대로 해냅니다. 그리고 추가 근무도 할 수 있습니다. 올해 이혼했거든요. 아이는 마누라가 데리고 갔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편하다면 밤 근무를 풀로 서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부분에 마음이 동한 건지 몰라도 곽종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온 거 어쩌겠나. 일단 잘해 보게.”
“예!”
좌자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앞으로 능연 선생 밑에서 일하게 될 걸세. 능연 선생은, 흠, 상황이 조금 특수하네. 어쨌든 지시대로 움직이고 의사로서 할 일만 잘하면 되네. 말은 적게, 일은 많이. 애도 아니고, 여기까지 하겠네.”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받아 준 것이라 당부를 길게 할 생각도 없었다. 곽종군은 그를 의국으로 데리고 가 의사들에게 소개했다.
그렇게 좌자전이 능연 밑으로 들어갔다. 곽종군은 세심하게 능연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긴 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
좌자전도 다시 걱정이 들었다. 대형 병원 최대 권력자는 과 주임이라도 진료과 직속 상사도 작은 권력자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급 의사가 좀 너그러우면 밑에 의사가 수월하고, 상급 의사가 각박하게 굴면 밑에 의사는 죽을 둥 살 둥 버텨야 한다. 아니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능연은 아무 말 없이 좌자전을 보다가 추가 근무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가능합니다.”
“그럼 일단 분위기 좀 보시고, 내일 새벽 3시에 수술실로 오세요. 마 선생님, 그럼 이제 정상 근무하시면 됩니다. 7시 퇴근.”
“흠흠, 능 선생. 정상 근무는 6시 퇴근이야.”
“아, 그럼 6시.”
능연은 매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연린과 대화하는 능연을 보면서 좌자전은 이 젊은 의사가 참 못 미덥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의사가 퇴근 시간도 몰라? 혹시, 간판 따러 온 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들떴다.
못 미더우면 좋지!
실력으로는 마을 위생 병원 출신인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화 병원 의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윗사람 설득하는 데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주 7일, 매일 오후부터 새벽 1시, 2시까지 상사와 술을 마시고, 집에 데려다주고 적당한 곳에서 한숨 자다가 아침 6시쯤에 아침을 사 들고 가서 아이 학교 보내고, 쓰레기 버리고, 점심 준비하고 같이 점심 먹으면서 반주해주면서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갔을 때 마누라와 상사가 한 침대에 있는 걸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벌써 승진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어도, 상사 모시는 능력만은 아직 여전했다.
그런 능력을 발휘하면 운화 병원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곽 주임도 그런 이유로 나를 받아 준 건가.
간판 따러 온 의사 능연의 시중들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좌자전의 허리가 더욱 굽었다.
마연린은 사색이 되어 온몸이 불편했다. 훈련의라서 이제 곧 로테이션할 때가 되었다. 이제 여자 친구가 있긴 하지만······ 능연 밑에 이렇게 빨리 신입이 들어올 줄은 몰랐던 터라 마연린은 큰 위협을 느꼈다.
“나 다른 과로 가도 도와주러 올 수 있어.”
“네.”
“아킬레스건 보건술도 계속 배울 수 있어.”
“네.”
“아, 맞아. 오늘 집에서 생선포 보냈더라.”
마연린은 이야기하면서 허둥지둥 책상 위의 봉투를 꺼내다가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바닥에 쏟고 말았다.
의국의 하얀 바닥에 노르끼리한 생선포, 하얀 어란, 금색 듀렉스, 흰색 지스본, 흰색 오카모토003, 보라색 듀렉스 돌기, 그리고 영어가 적힌 상자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제, 젠장!”
당황한 마연린은 얼른 주우려고 했지만,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와줄게.”
좌자전이 재빨리 외투를 벗어 상자를 가리고는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젊은 친구가 재고떨이 광고에 속아서 대량 구매했구만.”
“허허, 한 달이면 다 쓸걸요.”
“하······ 한 달?”
좌자전은 제 눈이 어떻게 됐나 걱정하면서 상자를 줍는 틈에 슬쩍 영어 상자를 힐끔 봤다. 중간에 떡하니 영어로 ‘Large-size-condoms’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연린이 겸연쩍은 듯 웃으니, 좌자전도 놀란 표정을 지우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운화 병원은 과연 와호장룡이군. 그냥 아무나 골라도 마을 위생 병원 부원장급 능력을 갖추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