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연은 수술복을 입은 채 휴게실로 들어와 잡히는 대로 하얀 가운을 집어 들어 걸쳤다.
하얀 가운은 꽉 껴서 능연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능 선생! 옷 잘못 입었어!”
“옷 줄이셨어요?”
여원이 식량을 뺏긴 다람쥐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런 여원을 슬쩍 바라본 능연은 가운을 벗으며 물었다.
“누, 누가 옷을 줄여!”
여원은 힘껏 고개를 흔들며 부인하다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자료 다 찾아 놨어.”
“보여주세요.”
돌아오자마자 보름 내내 수술해서 운화 병원 침대를 거의 채웠고, 이번엔 다른 데 가서 수술할 곳도 없자, 능연은 전에 쌓아둔 케이스를 정리해서 논문을 써야겠다 싶었다.
논문 쓰는 데 가장 번잡한 일이 바로 참고 자료를 찾는 일이었다. 전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어떤 결론과 어떤 실패 케이스가 있었는지, 그런 걸 찾는 게 논문 쓰는 것보다 더 손이 많이 갔다.
여원은 수술 실력은 평범했지만, 논문 관련된 일은 식은 죽 먹기로 처리했다. 두꺼운 프린트물을 받아든 능연은 흡족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좌자전은 부러운 듯 여원을 한 번 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능 선생. 내가 말했던 친구.”
“아, 예. X-ray랑 MRI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능연이 고개를 돌려 손태녕을 향해 물었다.
“X-ray는 가지고 왔습니다. MRI는, 찍을 데가 없어서. 작은 마을이라 그럴 여건이 없네요.”
좌자전과 나이가 비슷한 손태녕은 원래 능연을 만나면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나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능연은 X-ray를 펼쳐 들고 힐끔 보더니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을 위생 병원에서 찍은 겁니까?”
“그렇죠, 우리 병원 설비랍니다.”
손태녕은 조금 자랑스러운 듯 웃었다.
“흠, 환자 데리고 와서 다시 찍도록 하죠.”
대강 X-ray를 훑어본 능연이 그렇게 말하자 손태녕은 순간 언짢아졌다.
“아니, 우리 아들이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기 불편합니다.”
“그럼 제가 가서 수술하라는 말씀인가요?”
능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출장 수술이 싫은 건 아니었다. 출장 수술비가 나올 뿐만 아니라 병상 문제도 해결되니까. 그 말에 오히려 손태녕이 쫄았다.
“아뇨, 아뇨. 아이 데리고 오겠습니다.”
출장 수술보다야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게 훨씬 싸게 먹히니까.
“네. 그럼 와서 다시 찍죠. 이건 잘 안 보여서요.”
능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직접 온 건······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러 온 거죠.”
능연이 고칠 자신이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능연은 손태녕이 무슨 생각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고, 다시 X-ray를 펼쳐 들었다.
“최소 절개술이면 될 것 같습니다. 80% 회복률 봅니다. 운화 병원에서 하실 겁니까?”
약간 망설이는 말투였다. 능연에게 최소 절개술은 별로 할 의미가 없었다. 전문가급이나 그랜드마스터급 의사보다 조금 나을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주력 수술 방식도 아니었다. 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유일한 장점은 최소 절개술 환자는 퇴원이 빠르다는 점뿐이었다.
손태녕은 그런 능연의 망설이는 태도를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이 때문에 안 그래도 걱정하던 손태녕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일단 아들을 데리고 와 보도록 하죠.”
“그러세요. 최소 절개술은 어느 병원이라도 잘할 겁니다.”
능연은 퀘스트를 완성한 사람처럼 사회 기대에 부응하는 미소를 짓고는 좌자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능 선생은 수술이 꽉 차 있어. 침대도 부족하고. 결정 빨리해서 아들 보내도록 해.”
“그래, 알았어.”
손태령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좌자전은 어쩔 수 없이 웃어 보이며 능연과 다른 의사에게 인사하고 그를 끌고 구석으로 갔다.
딩동.
딩동, 딩동.
족발 세 개를 사서 병원을 소개 하는데 좌자전의 핸드폰이 울렸고 위챗 그룹 ‘능 팀’에서 계속 메시지가 왔다.
열어보니 동영상이었고 밑에 연문빈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울보 레이먼드, 구단 종합 테스트 통과. 남아공 프로 럭비팀 라이온즈 정식 입단!
좌자전이 동영상을 열자 푸른 구장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동영상을 열자, 이번에도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세 번째 동영상, 질주.
또 질주.
“예전에 수술했던 환자구나.”
좌자전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능 선생 첫 외국 환자예요.”
“별명이 울보야?”
“네, 엄청 울어요.”
몸에 맞는 가운을 입고 나타난 여원은 소장하고 있던 동영상을 올렸다. 레이먼드가 침대에 엎드려서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에 연문빈이 박장대소하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연문빈이 환자 얼굴을 움짤로 만들었어요.”
여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문빈이 펑펑 눈물 흘리는 움짤을 올렸다.
“환자 얼굴로 이래 돼? 초상권인데.”
“당연히 안 되죠!”
“그런데······.”
“노동법은 8시간 업무 규정이죠.”
좌자전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여원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42.8세 좌자전은 147.8cm 여원과 그 문제는 토론하지 않기로 결정 내리고 현명하게 화제를 바꿨다.
“이거 외국 뉴스지? 국내에서도 보도된다면 대박일 텐데.”
“외국 환자한테 소문나도 좋죠. 자비로 진료비 지급한 외국 선수 둘도 다 VIP 가격으로 받은걸요.”
좌자전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여원에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제 술자리도 없으니, 팀 내 인간관계를 잘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25년 전 처음 병원에 들어왔던 때처럼 눈치 빠르게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위생 병원 상사들보다 나이 어린 능연 팀의 초짜 의사들이 훨씬 다루기 쉬웠다. 위챗 단체 메시지방이 아직 어색한 좌자전은 여원과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는 고개를 돌려 옛 동료 손태녕을 바라봤다.
“능 선생 외국 환자 수술도 꽤 성공한 거 봐.”
“아, 뭐 외국 환자 수술하는 의사가 어디 한 둘인가.”
좌자전은 잠시 멈칫했다가,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좀 더 알아보고 나중에 이야기할게.”
손태녕은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병원에서 20년 넘게 일한 사람이니, 그도 의사들이 환자 끌어모으는 수단을 잘 알고 있었다. 손태녕은 자기 아들이 호객꾼이 되는 건 싫었다.
좌자전은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러 손태녕을 배웅했다.
험악한 얼굴의 기사가 낡은 제타를 끌고 와 탈 건지 말 건지 물었다. 어쩐지 블랙 택시 같은 모습이었다.
“롤스로이스가 아니네.”
좌자전은 역시나 나는 당첨 운이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손태녕을 차에 태웠다.
낡은 제타가 사라진 후, 좌자전이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더니 왕해양이 중간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큰 소리로 통화 중이었다.
“아이고, 지금 우리 능연이 아주 바쁘다네. 수술 하나로는 부족해. 응, 이야기할 가치도 없어. 응. 그래, 수술 몇 건 더 모아서 네다섯 건은 되어야 능 선생이 가지. 그래, 없으면 다음 기회에 보자고. 응? 세 건? 흠, 세 건이라. 그것도 괜찮은데, 진구성은 필요 없어. 우리 능 선생은 요즘 진구성 별로 안 좋아해. 그래, 환자하고 보호자한테 잘 설명해. 능 선생 주력 주술은 축-능 아킬레스건 보건술인데, 이건 새로 생긴 아킬레스건 보건술에 해당하는 거라. 그래그래, 출장비는 다 얘기됐지. 양놈 몇 명 수술했다고 갑자기 국내 환자한테 고가를 요구하고 그런 사람 아니야. 응, 그럼. 어? 아, 그래 양놈이 아니고 외국 친구······. 최소 세 건, 네 건이면 더 좋고. 그래 그럼 그렇게 결정한 걸세. OK, OK.”
10분 넘게 통화한 왕해양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귀를 문지르며 웃었다.
“이야, 유명해지는 게 이런 거로구만. 국내에 하루에 할 아킬레스건 수술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족발 좀 드세요.”
연문빈이 냉큼 운화 병원 명물을 건넸다. 좌자전은 저도 모르게 연문빈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연린만큼 실력 있는 거 같지 않은데, 눈치는 제법 빠르구만.
왕해양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족발을 한입 베어 물고 물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능 선생, 내가 알아봤는데, 지금 쓸 만한 데 두 군데 있다네. 하나는 제성시 병원, 여긴 3건. 익원현 병원, 여긴 우리가 했던 데고 거기도 조금 가깝지. 서너 건 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네.”
왕해양은 능연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할 뜻이 없어 보이자 말을 이었다.
“출장비는 같아. 집도는 한 건에 6천. 익원현은 어시한테 출장비로 3천 주고, 제성시는 건당 1천 2백 준다고 하네.”
“그럼 제성시가 겨우 600 더 많은 거네요? 여긴 비행기 타고 가야 하죠?”
연문빈이 콧방귀를 뀌며 묻자 왕해양은 껄껄 웃었다.
“이게 표준가라네. 익원현은 다음에 출장 수술을 요청해도 건에 3천일 거고, 제성시는 수술을 다섯 건까지 모으면 6천이 되는 거잖아.”
이야기를 듣던 여원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에게는 둘 다 많은 걸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어디로 갈까?”
“제성이요.”
바로 대답하는 능연의 모습에 왕해양은 내심 조수들이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게 더 멀리 갈 결심을 하는 능연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익원현 환자들은 운화 병원에 와서 수술받을 생각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능연은 수술을 더 많이 할 생각이었다.
출장 수술비는 모두 환자가 내야 하고 거기에 교통비 등도 포함되니, 경제적 여유가 없는 환자들은 직접 오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건이 되는 사람은 고생할 필요 없이 침대에 누워서 다른 출장 의사를 찾을 것이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왕해양은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쉽지, 한번 물어보겠네.”
“오늘 밤은 쉬는 게 좋겠네요.”
시계를 한번 본 능연이 모두에게 저녁 수술은 없으니 가서 쉬라고 했다.
“여 선생님, 가실래요?”
“좋아, 좋아.”
아킬레스건 수술에 익숙해진 여원은 이제 능연의 수술 방법과 습관에도 익숙해져서 퍼스트 어시로도 충분했다. 좌자전이 머뭇거리면서 같이 가도 괜찮은지 물었다.
“어시는 아니더라도, 따라가서 배우고 싶어서.”
능연이 왕해양을 바라보자 왕해양은 전화해서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능연은 바로 퇴근하지 않고 가운을 입고 병실 구역을 한 바퀴 돌았다. 수술 빈도를 줄이고 있지만, 병실에 가득한 환자 중에 또 누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울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다행히 요즘 시험 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규칙을 지킬 생각이 없는 환자라고 해도 적어도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다수 환자의 반역은 거기까지였다.
“능 선생님!”
“능 선생님, 안녕하세요!”
“능 선생님, 잘생겼다.”
능연이 병실 구역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사 소리가 퍼졌다. 환자 150명이 머무는 병실 구역엔 적어도 200명이 넘는 보호자가 있었고, 대부분 여자였다.
능연은 병실 구역을 가로지르면서 회복이 매우 잘된 환자의 ‘진심 어린 감사’를 10개 거둬들였다. 현재 그의 실력으로 일반인 아킬레스건 수술을 하니 당연히 효과도 좋고 회복도 빨라서 일반 주임 의사와 비교해도 명확한 차이가 났다.
일반인은 거기까지는 모른다고 해도 환자와 의료진은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실력이 올랐다.
한 바퀴 돌고 나니 누적된 초급 보물 상자 수가 55개에 달했다.
능연은 시계 앞에 서서 묵묵히 2분을 기다렸다가 분침이 55를 가리키자 재빨리 시스템에게 상자를 열라고 명령했다.
수많은 녹색 스태미너 포션 사이로 은색 서적이 빛났다.
능연은 스킬북을 먼저 펼쳤다.
- 단일 항목 스킬북: 파생기능 획득. 충수염 절개술(마스터급)
능연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주 선생에게 전화했다.
“우리 병원에 충수염 환자 있나요?”
“그럴 리가. 우리가 마을 병원도 아니고. 급성 아니고는 없지.”
그 말에 실망한 능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곧바로 차를 몰아서 집으로 향했다.
막 고친 제타는 이제 잘만 굴리면 한동안 별 탈 없을 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