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왕문강이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가장 먼저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와 함께 온 간부들과 의사들은······ 감히 그보다 먼저 들어가지 못했다.
다리 들어 올리던 연습을 하던 왕 주임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동작을 계속하면서 습관적으로 훈계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허둥지둥 난리냐.”
병실 안엔 햇살이 밝게 비췄고, 바닥은 반짝반짝, 식물들은 푸르게, 모든 것이 단정했다. 재활 의사의 하얀 가운도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고, 능연은 별빛처럼 빛나는 외모와 고결한 품성으로 군자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생전 일 한 번 안 해 본 보배 덩어리 손녀 왕원원이 낑낑대며 자몽을 벗기고 있었다.
엄숙한 아버지는, 변함없이 엄숙했다.
상상한 모습과 너무 다른 눈앞의 모습에 네모난 왕문강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
“놀라서 그렇죠. 아버지도 참.”
왕문강은 마음을 다잡고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놀랄 게 뭐 있다고. 수술도 다 끝났는데, 놀라서 뭐해?”
왕 주임은 말은 그렇게 해도 안색이 훨씬 좋아진 모습으로 몸을 흔들면서 끙 소리를 냈다.
“제가 할게요.”
왕문강이 재빨리 앞으로 나가 아버지를 부축했다. 재활 의사는 난감한 듯, 멀리 가지는 못하고 조금 옆으로 떨어져서 기다렸다. 왕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부축을 받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일은 어떠냐?”
“잘 됩니다. 국내 회사들 도와서 협상 중입니다.”
“음, 너무 이익만 따지지 말고, 예의도 잘 갖춰야지. 의리도 지키고.”
다리를 주무르면서 아들이 하는 말에 왕 주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내 얼굴이 문제냐?”
왕 주임은 소리를 높이다가 ‘아이쿠’ 하며 얼굴을 구겼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습니다.”
곁에 있던 능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쓸 병상이 없긴 해도 쓸데없이 병실에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곽 주임의 지시도 있고 듣는 척은 해야 했다. 세상일이 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능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문강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능연을 힐끔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이 의사가, 환자가 지금 이렇게······.”
“아빠! 자몽!”
왕원원이 크게 고함치며 자몽을 왕문강 앞에 내밀었다.
“할아버지도 드세요.”
“음, 우리 원원이 착하기도 하지.”
손녀가 까준 과일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라 왕 주임의 입이 헤 벌어졌다. 왕문강도 순간 딸을 바라보느라 의사에게 말할 타이밍이 어색해져 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딸이 내민 자몽을 받아들고 하나 뜯어 입에 넣었더니 침이 고일 정도로 시고 떫은데 마음만은 달달했다.
억지로 자몽을 삼킨 왕문강은 딸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다시 능연에게 고개를 돌려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아버지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순조로웠습니다.”
“구체적으로는요?”
“반월판을 보존한다는 전제하에 성형을 진행했습니다. 앞, 뒤 그리고 반월판 자체의 외형도 다 좋았습니다. 두께는 기본적으로 정상이었고 테두리도 안정적이었습니다.”
능연이 이번엔 구체적으로 대답했지만, 왕문강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높은 분의 엄숙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조금 천천히······.”
“아빠! 자몽!”
왕원원이 재빨리 입안으로 자몽을 밀어 넣었다. 왕문강의 입안에 침이 미칠 듯이 고였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셔서였다.
“안······.”
차마 안 먹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17살 먹은 딸이 처음으로 까준 자몽인데, 항상 외국을 오가는 아빠가 이때 어떻게 못 먹겠다고 한단 말인가.
왕문강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억만장자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갑자기 약속 시간이 바뀌었고 교통비가 아까워서 그냥 그 자리에서 밤새 기다렸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점심도 저녁도 못 먹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만났을 때, 그때도 입안에 신맛이 올라왔었다.
그때 느꼈던 신맛이 바로 오늘 딸이 까준 자몽을 먹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왕문강은 자몽을 받아들고는 딸의 머리통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
“아빠! 머리카락 다 흐트러졌잖아.”
세 시간이나 한 머리가 흐트러지자 왕원원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자몽이 참 맛있구나.”
왕문강은 나머지 자몽을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었다. 왕 주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반만 남은 반월판으로 생각해도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왕 주임은 망설임 없이 자기 몫 자몽까지 아들에게 건넸다.
“그럼 이것도 다 먹으려무나.”
왕문강은 아버지와 딸의 눈빛을 보며 잠시 당황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능연은 노트북을 들고 왕 주임의 병실을 찾았다.
곽 주임과 병원 고위층이 그가 왕 주임의 재활 상황을 감시하도록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곽 주임, 뇌 주임, 주 부원장, 원장이 모두 그렇게 말했다. 병원, 수술실, 병상을 굴리는 막강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자, 능연은 그들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응급의학과도 요즘 앞으로 있을 참관에 대비하여 병상 수를 줄이고 있어서 할 수술도 없었다. 그는 차라리 왕 주임의 병실에서 왕 주임 재활 지도하면서 논문을 쓰기로 했다.
왕 주임은 한숨 자고 일어나서 재활 의사 지시에 따라 무릎 운동을 하고 있었고, 능연은 그 곁 책상에 노트북을 펼치고 묵묵히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능연은 임상 논문을 쓰기에도 장점이 있었다. 임상 논문의 핵심은 바로 임상 케이스였고, 거기에 연구 분석을 더 하면 쓸 만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대다수 의사는 케이스 수집하고 결과를 낼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댔지만, 능연은 거의 그런 문제가 없었다. 일단 운화병원이 뒤에 있었고, 수많은 케이스가 기다렸다. 그것만 해도 대다수 의사보다 유리했다. 그리고 탁월한 외과 기술로 나머지 99% 의사를 앞지를 수 있었다.
전에는 오로지 수술 생각밖에 없었지만, 병상 문제가 생기니 살짝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왕원원은 책상 앞에 앉은 능연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살며시 능연의 등 뒤로 가보니 모니터 위로 커다란 글씨가 보였다.
<슬관절경 반월판 성형수술 중 수술 도구>
두 번 제목을 읽어 보고 난 다음에야 능연이 뭘 쓰려는지 알게 된 왕원원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능 선생님, 머리도 좋고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뒤에서 봐도 어깨까지 잘생겼어. 대단해.
“후아······.”
무릎 운동을 하느라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개를 든 왕 주임은 손녀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지만,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원원, 학교 가야지! 여긴 또 왜 왔누! 노인네가 작은 병에 걸렸을 뿐이니까, 매일 올 것 없다!”
“오고 싶은 걸 어떡해요! 할아버지 혼자 계시게 할 순 없잖아요. 마음이 안 편하다고요!”
왕원원은 손에 든 자몽을 내려놓고 생긋 웃었다. 마음이 따듯해진 왕 주임은 운동 한 세트를 마친 김에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온 거, 할아버지랑 같이 밥이나 먹자꾸나. 잠깐 기다리렴.”
왕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몽을 들고 한쪽으로 가서 능 선생을 바라보며 조용히 껍질을 벗겼다.
잠시 후, 왕문강이 병실에 들어왔을 때, 왕원원이 마침 자몽 껍질을 다 벗기고 접시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