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229화 (210/877)

수술 사흘째, 왕 주임은 그날도 온종일 무릎 운동을 했다.

“이제 지팡이 짚고 내려오는 연습 해도 되겠습니다.”

나흘째 이른 아침, 신체 검진을 마친 능연이 말하자 왕 주임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제 막 수술을 마쳤는데? 괜찮겠나?”

“네. 별문제 없습니다. 수술 끝내고 벌써 나흘인걸요.”

“운화병원 젊은 환자들은 수술 사흘째에 내려왔더라고요. 노인성 환자는 하루 더 미룬 거니 괜찮을 겁니다.”

염 선생도 거들자 왕 주임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봤다. 개인 주치의들은 보통 보수적인데, 운화에 온 다음 염 선생이 극진파로 변할 줄은 몰랐다. 염 선생은 그런 왕 주임의 눈빛에도 태연했다.

그는 왕 주임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 주요 업무고, 왕 주임이 운화에 머무는 동안 그 역시 운화에서 왕 주임 회복을 살피며 능연의 수술을 보고 능연이 수술한 환자들의 회복을 봐 왔다.

그리고 병원에서 의사의 시선으로 살핀 능연의 환자들은 다른 의사 환자와 차이가 엄청났다. 일반인도 그런 차이를 느낄 수는 있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뿐이었다.

하지만 염 선생은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런 제길!

왕 주임에게 운화로 가자고 건의했을 때, 염 선생은 이미 운화병원과 능연을 자세히 조사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표면적인 조사뿐이었고, 요 며칠 동안 24시간 내내 병원에 붙어서 환자, 의사, 간호사와 접촉하면서 말하자면 ‘침투식’ 체험을 했으니 느끼는 바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운화병원에 오기 전, 염 선생의 능연에 대한 인정이 80점이었다면, 지금은 98점이었다.

20년 동안 한 분야에 있던 염 선생은 대담한, 그러나 입에 올릴 수 없는 판단을 내렸다.

능연은 어쩌면 국내 유수의, 우수한 슬관절경 전문가 중 하나라고.

‘중 하나’라고 붙이긴 했지만, 염 선생이 아는 바로는 능연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의사는 정말 능연 하나뿐이었다.

염 선생은 다소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왕 주임 생각은 단순했다. 그는 재활 의사의 도움을 받아 휘청휘청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고, 바닥을 밟는 순간 떨리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왕 주임은 살며시 한발 앞으로 디뎠고 염 선생과 왕원원 모두 눈도 떼지 않고 지켜봤다. 왕 주임 본인도 묘하게 긴장을 했다. 인류에게 작은 한 걸음일지 모르나, 왕 주임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아프지 않아!”

왕 주임이 목소리까지 떨며 고함쳤다. 그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이어 또 한 발짝, 그리고 계속해서 걸음을 내디뎠다.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다는 건 그에게는 매우 대단한 일이었다. 왕 주임이 계속 수술을 거부하던 건 수술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몸 걱정도 있었다.

인생 칠십, 고희(古稀)라고 부르는 나이대가 되면, 몸 여기저기 잔병이 생기기 마련이고, 고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잔병도 있지만, 대다수가 해결되지 않고 못 고치는 잔병이었다.

노인이라면 모두 아프지 않기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리라.

같은 반월판 손상이라도 젊은 운동선수조차 완치되기 힘든데, 노인이 재활을 마치고 완치되길 어떻게 바란단 말인가.

몇 걸음 더 내디딘 왕 주임은 참으려고 해도 입이 함박만 하게 벌어졌다. 염 선생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능연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능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왕 주임이 준 ‘진심 어린 감사’ 보물상자를 거뒀다. 그로서는 눈앞의 장면은 그저 기본에 불과했다.

그랜드마스터급 슬관절 반월판 성형술은 환자의 슬관절 증상을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으로 완화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왕 주임의 반월판 손상은 간단해서 의학적으로는 거론할 수준도 아니었다.

왕 주임은 재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재활을 한 세트 끝내고 땀을 닦으며 앉고는 능연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능 선생, 정말 감사하네.”

왕 주임의 어린 손녀 왕원원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능 선생님, 고마워요.”

“제 일인걸요.”

능연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역시나, 이런 장면이 어색했다.

의사를 앞에 두고 직접 감사를 전하는 환자는 많지 않고, 능연은 일부러 환자와 보호자 앞에 나설 기회를 줄이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왕 주임은 그런 능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투도 누그러뜨렸다.

“능 선생, 자네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데, 아무런 생각도 없나?”

“어떤 생각이요?”

능연은 생각이라는 단어가 너무 광범위하다고 여겼다.

“내 말은,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냐는 걸세.”

능연과 며칠 지내면서 어느 정도 그에게 익숙해진 왕 주임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논문 써서 발표하고, 그다음엔······. 어떻게든 병상을 만들어 보려고요.”

“그게 다인가?”

왕 주임이 어이없이 웃자 고개를 끄덕인 능연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렸다.

“아버지, 좀 어떠세요?”

왕문강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몇 발짝 걷는 연습 했는데, 아주 좋구나. 별문제 없단다.”

“내려와서 걸으셨다고요?”

왕문강이 매우 놀라서 묻는 말에 왕 주임이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긴 했지만, 문제없었단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걷는 걸 제가 못 봤네요.”

“나도 네가 처음 걸을 때 못 봤으니 비겼구나.”

멍해 있던 왕문강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왕 주임이 그를 흘깃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고 왕원원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능연은 부자가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재빨리 피해서 응접실로 돌아가 문헌을 살폈다.

왕 주임은 잠시 쉬다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두 번째 재활을 시작했다. 흥분하며 그 장면을 지켜보던 왕문강이 머리를 툭툭 치며 말을 꺼냈다.

“기억력 좀 보게. 염 선생, 오늘 친구가 의사 하나를 소개하더군요. 존 홉킨스 대학을 졸업한 의사랍니다. 그 친구도 젊은 의사인데, 위가우라던가? 혹시 아십니까?”

“압니다. 위가우는 상해 의료계에 젊은 세대 대표 중 하나죠. 지금 에든버러 대학에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심장 수술을 하다가 체강경에 관심이 생겨서 복강경, 관절경에 관한 논문도 여러 편 썼습니다. 장르를 넘어도 크게 넘은 감이 있죠.”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친구죠. 내 친구가 그러는데 위가우가 영국에서 막 돌아왔답니다. 그 친구한테 아버지 진료받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염 선생하고 대화하면서 왕문강의 시선은 아버지를 향해 있었고 왕 주임은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진료받고 싶으면 너나 받으렴. 왜? 내가 다리 부러뜨려주련?”

운화병원은 왕 주임이 머무는 병실이 있는 병동에 CMP 기계를 설치했다.

CMP는 지속 피동 운동 기구이며 재활실이 있는 대부분 병원엔 설치되어 있다. 물론, 대다수 의료기기처럼, 작은 병원은 설치해도 손해 보고 큰 병원은 아무리 많이 설치해도 모자랐다.

운화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재활과에서 몇 번이고 요청해도 새로운 CMP 기계는 들어오지 않아 재활 환자들을 엄격하게 줄 세우고 사용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저히 안 될 때는 기계 없이 재활 연습을 할 수밖에 없고.

처음부터 재활과 부주임급이 직접 왕 주임의 재활 연습을 도왔지만, 왕 주임 혹은 왕 주임 가족이 언짢아할까 걱정된 병원 측은 다급하게 제약 회사에 연락하여 아예 특별 병동에 새 CMP를 설치했다.

물론, CMP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해주는 것만은 못했다. 그래서 왕 주임은 고작 이틀 쓰다가 말았고, 무릎 뻗는 훈련에서 사두근 근력 훈련까지 해나가며 앉는 연습도 했다. 그리고 저혈압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매일 두 타임씩 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했다.

왕문강은 아버지가 좋아지는 모습을 눈으로 지켜보며 기분이 좋아져서는 처음엔 운화병원 사람 모두 밉상으로 생각했다가 점점 마음에 들어 했다.

왕 주임이 침대에서 내려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왕문강은 해삼을 한가득 가지고 와 모든 의료진에게 돌렸다. 능연도 작은 상자를 받았는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동시에 잣을 내밀었다. 무심결에 잣을 받아든 왕문강은 돌아서서 멍해졌다가 머뭇거리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어리둥절한 왕문강의 모습에 능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논문을 쓰러 책상으로 돌아갔다.

원래 뭐든 기록해두는 좋은 습관이 있는 데다가 차트도 완벽했고, 슬관절경 수술을 백 여건 해오면서 실험 데이터도 충분히 갖춰져서 이제 방향을 잘 잡아서 쓰기만 하면 됐다.

해마다 혹은 2년에 한 번씩 수준 높은 임상 논문을 쓰는 주임과 부주임 의사도 그 정도 분량의 케이스를 수집했다. 그 정도 의사쯤 되면 중소형 수술에 투자할 시간도 없었다.

능연은 수술을 아주 많이 하는 젊은 의사라서 또 다른 이점이 있는 셈이었다.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바로 자신만의 세상으로 몰입했다. 왕문강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 한 번, 염 선생 한 번 바라봤다.

“아무래도 모르겠네요.”

“다 너처럼 만날 친구들이나 부르는 줄 아느냐? 능 선생은 진짜 의사야. 너희같이 이리저리 빙빙 돌리는 법을 모른다고. 저렇게 순수하니까 젊은 나이에 실력자가 된 거지. 아니면 불가능해.”

왕 주임이 콧방귀를 뀌며 아들부터 훈계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자 의문의 1패를 당한 왕문강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전······ 잣 말씀드린 건데요. 아니 근데 언제는 배움이란 세상사를 파악하는 거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순수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그래서, 네가 세상 이치를 다 파악했다는 게냐?”

왕 주임이 되묻자 왕문강은 멈칫하더니 한참 만에 겨우 대답했다.

“제 생각엔, 그렇다고 했다가는 아버지가 분명히 다 파악했다고 하는 놈은 파악하지 못한 놈이다, 이런 말씀 하실 거 같습니다.”

왕 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왕 주임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자, 왕문강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어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윗사람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 민망해진 염 선생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퍼뜩 생각 난 듯 능연을 바라봤다.

“능 선생, 왕 주임님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는데, MRI 한 번 찍어서 보는 게 어떻겠나?”

“좋습니다.”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 선생은 한숨 돌렸다.

“능 선생 MRI 판독능력이 유명합니다. 전에 보니까 영상의학과 의사도 물으러 오더라고요. 사진 한 장 찍어 보면 무릎 상황을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능 선생, 그렇지?”

“네, 지금 상황으로는 상태가 매우 좋습니다만, 걱정되면 찍어도 됩니다.”

외출하기 전에도 두 번이나 체크하는 사람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MRI 부작용은 없습니까? 방사능이라든지.”

“방사능은 없습니다. 흠, 부작용은 좀 비싼 거랄까요.”

왕문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부작용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네가 감당하는 게냐? 의료 보험이 감당하는 게지.”

왕 주임이 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그도 반대하지 않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17살 손녀가 다급하게 휠체어를 밀고 다가가 할아버지 무릎에 고양이가 그려진 귀여운 담요도 덮어주었다.

“할아버지, 제가 휠체어 밀어 드릴게요.”

“너 또 할애비 핑계로 수업 빼먹었구나!”

“아니에요.”

왕원원은 슬쩍 아버지 눈치를 봤고, 왕문강은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흘깃 본 왕 주임이 껄껄 웃으며 손녀를 봤다.

“네 애비는 신경 쓰지 마라. 병원에 오는 것도 배움이지. 세상사를 파악하는 것도 다 학문이라고 하지 않니. 요즘 젊은이들은 꼭 학교에서 책을 읽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할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왕원원은 신이 나서 휠체어를 밀었다. 뒤에 있던 왕문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가만 보니, 저만 뭘 하든 다 틀리고, 순수하지도 않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네가 다 파악했다는 게냐?”

“아까 물으셨잖아요.”

“그래서 대답했느냐?”

왕문강은 철학적 사고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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