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능연은 자발적으로 당직을 섰다.
어차피 집에 가도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었다. 내일 새벽에 다시 와서 수술도 해야 하니 능연은 차라리 당직실에서 자기로 했다.
응급센터가 생긴 이래 의사들의 당직실도 좋아졌다. 치료팀 책임자는 삼선 당직실을 쓸 수 있게 됐고, 침대 있는 1인실에 침구를 바꿔줄 사람도 있어서 병실과 차이가 없었다.
하루 수술을 끝낸 능연은 당직실에 가지 않고 새로운 응급센터를 보폭으로 잰 다음 정문 바로 위에 있는 공간을 찾아 개인용 접이침대를 놓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깊은 밤 사람 없는 조용한 구석, 능연이 가장 좋아하는 휴식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그를 보고 소리치는 사람도, 잡아끌며 달려드는 사람도, 종알종알 수다 떨어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거기서 침대에 편하게 누워 하루에 진행한 응급처치를 회상하면서 어디 놓친 부분이 없는지 살피기 딱 좋았다.
응급처치라는 건 완벽하게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초를 다투는 시간 압박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응급처치의 가장 큰 적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올리려고 노력하고,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을 찾고, 리스크를 줄이려고 애쓴다.
그런데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했다. 결정을 내린 의사조차 정확한지 아닌지 모르는 때가 많지만, 자세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했던 심폐소생술에 대해 능연은 자신의 기법을 제일 먼저 되짚어봤다. 그랜드마스터급 심폐소생술은 처음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혹시 체력문제 때문에 소홀함이 있던 건 아닐까?
능연은 묵묵히 회상해 봤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둘이서 번갈아 하는 방식은 어떨까? 두 사람이 번갈아 심폐소생을 하면 당연히 체력적 압박은 줄어든다. 그러면 더 장시간 수준 높은 흉부 마사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교체된 사람이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약물을 쓰지 않은 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어.”
능연은 위안하듯 숨을 내쉬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적군이 5초 후에 전장에 도착합니다.
익숙한 음성을 들으며 능연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큰 책임을 지지 않고 합리적으로 사람의 기분을 풀 수 있······.
칫!
능연은 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동댕이치고 싶은 기분으로 핸드폰을 꾹 쥐었다.
그는 심호흡하고, 다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한 게임 더!
그리고 몇 분 후······.
탁!
능연은 매섭게 허벅지를 내리치고는 고개를 들어 심호흡했다. 저도 모르게 동지전이 그리워졌다.
‘e-Sport 하는 환자가 있으면 좋겠······ 흠, 다리를 다치면 되지 않을까? 아킬레스건 보건술 같은 건 기브스하고도 게임 할 수 있으니까.’
-당직 중인 모든 의료진, 당직 중인 모든 의료진 들으세요. 바로 응급센터 처치실로 모이세요. 모든 당직 인원 들으세요······.
밤늦은 조용한 건물에 갑자기 방송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다.
능연은 멈칫했다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요즘은 병원에서 방송을 섣불리 하지 않는다. 특히 응급의학과 방송이라면 분명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능연이 처치실에 도착했을 때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4명과 주치의인 주 선생도 와있었다. 그밖에 정형외과 의사 2명, 수부외과 1명, 일반외과 1명도 구석에 서 있었다.
주 선생은 능연을 보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흉부외과와 신경외과에서 레지던트가 달려오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노하진(鎭)에 재건축 중이던 건물이 무너졌대. 시공에 참여한 인원이 50명이 넘는다더군.”
사람들의 표정이 순간 엄숙해졌다.
“여기로 얼마나 오는데요?”
응급의학과에 지금 있는 선임 의사는 정배 정도였다. 아래턱에 수염을 길러서 예술적 느낌도 있는데 야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얼굴이 조금 음흉해 보여서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정배는 진지해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여기로 보내질지, 그건 우리도 몰라. 건물이 붕괴하면서 공사 현장에 있던 가건물도 덮쳤다던데,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야.”
사람들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50명이면 대규모 공공사고인데 운이 좋은 사람도 있으니 정말로 다친 사람, 특히 중상이나 사망 사고는 아마 50명까지는 아니니라. 그러나 기숙 공간까지 사고가 미쳤다면 인원수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50명 부상 인원이라면 운화 시에서 손에 꼽히는 공공 돌발 사건으로 기록될 만했다.
“지금 파악된 부상 인원은 12명, 그중 중경상 4명, 중상 8명이다.”
주 선생은 상황 설명 외에 다른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다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장갑 끼고, 방호복도 입어.”
“방호복도 입어야 해요?”
일반외과 레지던트가 내키지 않는 듯 물었다.
“감염 검사 결과를 기다릴 시간 없어. 응급은 그런 거야. 선구명 후치료. 그럼 넌 진단의학과 리포트 나온 다음에 방호복 입을지 말지 결정하던가.”
국내 병원 자가 방호 시스템은 03년 이후에 서서히 시작됐다. 응급의학과 같은 진료과는 강제로 제일 먼저 몸에 익혔다.
의사들도 이제 더는 투덜대지 않고 알아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장갑을 꼈다. 간호사들도 옷을 갈아입고는 처치실과 응급 처치실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술실, 관찰병실도 정리했다.
그리고 응급센터 말고 다른 진료과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급센터 설립 후 가장 큰 돌발 공공 사건이다. 응급센터 평가는 이제 우리한테 달렸어.”
주 선생은 능연과 다른 응급센터 의사들을 모아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주임님은 언제 오십니까?”
정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빨라도 한 시간.”
“구급차는요?”
“15분. 다른 사람 도움 기대하지 말고.”
주 선생이 시계를 힐끔 보고 대답하자, 응급센터 레지던트들이 부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 오래된 의사들이었지만, 오늘 환자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준비하자.”
의사들이 방호복과 수술복을 갖춰 입은 걸 본 주 선생은 팔짱을 낀 채 모두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매서웠지만, 의사와 간호사 모두 긴장한 얼굴로 묵묵히 기다렸다.
“이제 3분 남았어. 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 준비해.”
주 선생은 한마디 덧붙였고, 의사들은 끽소리도 내지 않았다.
능연은 정면을 주시하며 손가락을 허공에서 살며시 움직였다.
“시스템, 오픈.”
능연은 126개라고 기록된 초급 보물상자 수를 보며 상자를 열 이유를 찾았다.
127에서 1을 빼면 126이지. 127은 소수니까, 좋다!
“이제 1분. 구급차 맞을 준비 해. 역할 분담은 다 잘 알지?”
“네.”
사람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런 때는 같은 과이고 아니고는 의미가 없었다. 응급센터 주치의는 응급처치하고, 다른 과 의사들은 명령을 듣는 것이 응급 구조의 상식이다.
“중상 환자는 응급 처치실로 보내고 경상 환자는 처치실, 눈에 띄는 상처 없는 사람은 관찰병실로 보내서 지켜본다. 그리고 바이탈 사인이 없거나 응급처치할 의미가 없는 환자는······ 나한테 보내.”
이런 부담은 주 선생도 처음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사람들을 상기시켰다. 의사들이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처치할 의미가 없는 환자는 종종 의사들의 윤리 의식을 건드린다. 특히 다친 상태가 복잡한 상황에서 누가 결정을 하고, 무슨 근거로 결정을 할지, 매우 복잡한 일이다.
대다수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 1명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중상 환자 10명 살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주 선생이 그 부담을 가져가니, 다른 진료과 의사를 비롯한 의사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능연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 스킬북 5권과 스태미너 포션 121병이 늘어져 있었다. 스킬북이 나올 확률이 참으로 낮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새로 나온 121병······ 에 원래 있던 404병을 합해 능연은 지금 스태미너 포션을 총 525병 가지고 있었다.
스태미너 포션이 많은 건 좋지만, 스킬북이 딸랑 5권인 건 불만족스러웠다.
능연은 손을 흔들어 첫 번째 스킬북을 열었다.
- B형 초음파 검사 판독 능력(전문가급) 획득
능연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초음파 종류는 B형 초음파 외에도 예전에 유행하던 A 초음파, 3D인 C 초음파, V 초음파, 도플러 초음파로 불리는 D 초음파, 심혈관에 주로 쓰는 M 초음파가 있다.
전에 얻은 MRI 판독 능력은 모두 마스터급인데 B 초음파는 겨우 전문가급······이지만, 사실 충분했다. 보통 외과 의사는 B 초음파 판독 능력조차 전문가급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능연은 전에 얻은 MRI 판독 능력은 사지에 국한되었지만, B형 초음파는 전신이라 더 많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의사가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B형 초음파를 제대로 배워서 몸에 익히기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린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다 보니 전문가급이라도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바로 쓸 수도 있고.”
능연은 곁에 있는 간이 B형 초음파 기계를 힐끔댔다. MRI나 X-ray와 비교하면 B형 초음파는 즉각적인 효과가 있다. 실시간으로 상태를 확인할 수도 있고, 장기와 조직의 움직임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영상 방식과의 차이였다. 방사능도 적고, 가격이 저렴한 것도 중요한 장점이었다.
“구급차가 도착하면 다들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 내가 작업을 분배할 거야.”
주 선생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라서 우수한 인원이 필요했다.
야간 응급센터에 이런 대형 돌발 사건이 생기면 모든 환자를 적시에 구조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주 선생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다른 의사들이 의문을 가질까 봐 다시 한번 강조했다.
“생명을 지키는 것,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선구명 후치료, 목숨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야.”
매일매일 곽종군에게 그 말을 듣는 능연을 비롯한 응급의학과 의사는 주 선생이 긴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능연은 귀로 주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두 번째 스킬북을 열었다.
-단일항목 스킬북: 비장 절제술(마스터급)
비장은 파열되기 가장 쉬운 장기이며, 전에 비장을 처리하느라맨손 지혈 기술을 쓴 적 있었다.
비장 절제술은 복잡한 것 같아도 사실 능연이 스스로 배우려고 한다면, 충분한 수술량만 보장되면 몇 달이면 배울 수 있고, 일이 년이면 전문가 수준, 즉 선임 주치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장을 절제할 환자 수에 제한이 있어서 충분한 수술량이라는 건 일반 병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마스터급 비장 절제술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이제 B형 초음파 판독 기술에 비장 절제술이 생겼으니 이따 비장 파열 환자를 우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0명 넘는 중상 환자 중에 넘어지거나 깔리고 눌린 환자가 많을 테니 비장 파열 환자가 많을 확률이 높았다.
능연은 거침없이 다음 스킬북을 열었다.
-단일항목 스킬북: 간 절제술(마스터급)
능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 파열 환자뿐만 아니라 간 파열 환자도 받을 수 있다.
-단일항목 스킬북: 고환 절제술
알 파열도.
능연의 무기 창고에 점점 아이템이 늘었다. 그리고 마지막 스킬북을 열었다.
-국부해부 경험: 복부 해부 경험 100회 획득
능연의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공부 안 하는 학생이 찍은 문제가 시험에 나온 기분이랄까. 해부 경험은 지금 의사들이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다.
복부 해부 경험 100번이란 해부용 시체가 100구 필요하단 소리였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도 어려운 수치였다.
능연은 양손을 치켜들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준비가 되었다.
“구급차 옵니다!”
간호사 하나가 안에서 딸려 나와 통지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삐뽀삐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환청이 아님을 확신한 의사들이 하나같이 자세를 다잡았다.
잠시 후, 선두에 선 구급차가 화단을 지나 운화병원 응급센터 응급출입구 앞에 섰다.
구급차 뒷문이 열리고 환자가 실려 나왔고 함께 온 구급요원이 큰 목소리로 브리핑했다.
“굴러오는 돌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의식은 있습니다.”
“처치실, 신경외과에 연락해. 정배!”
핸드라이트를 들고 환자의 동공을 확인하고 확장 증상이 없음을 확인한 주 선생이 지시 내렸다.
“제가 할게요.”
정배가 구급요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열었다.
구급차가 떠나자마자 바로 뒤따라 한 대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환자는 한 명이었는데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진 작업자로 온몸에 여러 곳 골절되어 쇼크 상태였다. 도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몰려든 구급차가 우선 구출했다고 한다.
두 번째 환자의 모습에 현장의 응급의학과 의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바깥쪽에 있던 작업자도 이렇게 중상을 입었는데 핵심 구역에 있던 환자는 얼마나 심각할지······.
주 선생은 일단 그런 생각은 말자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팔 골절, 손가락 눌림, 전신 찰과상.”
세 번째 구급차에서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인 환자가 실려 나왔다.
“처치실. 능연!”
“이리로 오세요!”
주 선생이 바라보자 능연이 바로 나서서 환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치실로 들어간 능연은 수술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우선 환자 상태를 관찰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환자의 상처 부위를 고정하고 약 처방을 내리고 간호사에게 지시도 내렸다.
“환자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상 없으면 수부외과로 트랜스하세요.”
환자 상태를 관찰하는 것은 간호사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병원에서 잘 버틸 수 있는 밑천 중 하나였다.
응급실 간호사는 다른 간호사보다 업무 강도도 높고 바이탈 사인 변화에도 더욱 예민하다. 돌발 사건은 한 번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해서 그렇지, 환자 개개인 증상은 특별히 복잡하진 않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능연은 바로 장갑을 바꿔 끼었다. 그때 주 선생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 비는 사람? 비장 파열 환자다!”
능연이 바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