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응급센터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환자가 줄어서가 아니라 울다 지친 보호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진료과들도 바삐 움직였다. 중환자는 수술실에서 각 진료과 병실로 보내졌고, 가벼운 부상자는 상처 처리를 한 다음 수액을 맞으면서 잠시 들었다.
처치실에서 관찰병실까지 향한 복도엔 보호자들이 초췌하게 잠들어 있었다.
능연은 복도에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벽에 기댄 채 따듯한 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목이 마른 것보다 손끝에 혈액이 통하도록 따듯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사흘 정도 보호자가 밀려들었다가 점점 줄어들 거야.”
등 뒤에서 블랙커피가 들어있는 컵을 든 주 선생이 나타났다.
“크림 안 넣어요?”
힐끔 컵을 쳐다본 능연이 화제를 돌렸다. 분위기가 무겁다 보니 화제도 아무래도 무겁지만, 능연은 그런 게 싫었다. 그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주 선생이 활짝 웃었다.
“내가 커피에 크림 넣는 거 어떻게 알았냐? 이야, 너도 이제 다른 사람한테 관심도 주고, 발전했구나.”
“만날 의국에서 크림 없어? 크림 없어? 크림 없어? 하시잖아요.”“내가 언제 그랬냐. 두 번밖에 안 물어. 오늘도 딱 두 번 물었는데 없다더라. 어쩌겠냐, 그냥 블랙 마셔야지.”
“당직실에 있어요.”
“없어. 꼬박 밤새웠는데 커피 안 마시고 어떻게들 버티냐. 다들 배도 고플 거고. 아참, 너 CPR 그렇게 오래 했는데, 뭐 좀 시켜 먹지 그러냐.”
“생각 없어요.”
“그것도 그래. 나도 입맛이 하나도 없다.”
주 선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까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설탕도 안 넣었으니 설탕 대신이다.”
능연이 싱긋 웃었다.
오늘 응급실은 터질 듯 붐볐고, 피 냄새, 토 냄새 그리고 약물 냄새가 넘쳤다. 그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능연은 입맛이 없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뭘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서 한숨 자라, 언제 또······.”
주 선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접수대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그것도 벨 소리가 가장 큰 전화기가. 응급실 돌아가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 주 선생은 일반적이지 않은 벨 소리에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구급차 3대로 환자 4명이 들어온답니다. 크러쉬 트라우마(압상: 押傷) 환자고 한 명은 쇼크래요.”
잠시 후, 간호사가 큰 소리로 고함쳤고, 피곤한 영혼들이 재빨리 다시 모였다.
이번엔 곽종군이 지휘를 맡았다.
“한 팀이 한 사람씩 맡아.”
이제 의사도 많아져서 의사마다 환자를 맡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팀은 대부분 팀장 위주로 돌아가고, 선임 주치의가 밑에 있어서 경력이 짧은 신임 주치의와 레지던트 들은 일반 외상 환자는 몰라도 복잡한 외상 환자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능연이 주변에 일 없는 의사를 살펴보니 곽종군을 포함해서 겨우 4팀 나올 것 같았다.
“저희 팀도 한 사람 맡겠습니다.”
“흠······. CPR 그렇게 오래 했는데 수술 괜찮겠나?”
능연이 나서자 곽종군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손가락도 이미 회복됐습니다.”
굳은 손가락도 많이 풀렸고, 외상 처리는 시스템 기능 없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거기에 시스템이 준 기초 스킬, 마스터급 단속 봉합, 그랜드마스터급 맨손 지혈 같은 걸 더하면 기본적인 외상 처리는 완전히 문제없었다. 특히 기관 절개와 심폐소생까지 생긴 후로는 약 처방만 조금 주의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능연은 지금 환자의 바이탈을 안정시키고 간단한 외상 처리하는 응급의학과 업무를 완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수술과 회복은 환자 상태가 안정된 후 각 진료과로 보내 처리하면 그만이었고.
새로 얻은 3가지 절제술도 능연의 스킬을 높여서 응급실에서 발생한 위기를 기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능연의 심폐소생을 본 곽종군은 그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
의사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상황이 뭘까? 그건 바로 테이블 데스다.
아까 같은 환자도 살려낸 능연이 다른 실수를 할까 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4번 맡아.”
곽종군이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네. 4번은 어떤 환자입니까?”
오늘의 돌발 사고 때문에 응급의학과는 공사 현장과 핫라인을 개설했다. 간호사는 재빨리 노트를 꺼내 보고 읽었다.
“4번은 3번 환자랑 같이 가건물에서 발견됐습니다. 4번······ 4번은······.”
간호사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주변에 있던 의료진이 묘하게 생각하며 다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응급의학과의 간호사는 나이가 어려도 이런저런 상황을 많이 보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능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게 아니라 지극히 특수한 상황이 생긴 것 같았다.
“유 간, 4번이 왜? 자세히 설명해야 선생님들이 준비할 거 아냐.”
“그래, 그래. 유 간, 뭔데?”
구석에 숨어있던 주 선생이 달려 나와 하는 말에 곁에 있던 의사들도 호응했다.
유 간호사는 난처한 듯 주변을 바라보며 차트를 들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읽었다.
“4번 환자 음경 절단. 음낭 외상 심각. 그리고 잘린 음경은 3번 환자 입에서 발견해서 지금은 상자에 넣어서 가지고 오고 있답니다.”
“아프겠다!”
누가 소리 지른 건지 몰라도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사고 때문이래?”
“모르겠어요.”
의사 하나가 궁금한 듯 묻자 유 간호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고 의사들은 갑자기 기운이 넘쳐 수군댔다.
일반인도 새벽 3시엔 지쳐 떨어지는데,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의사들은 더 했다. 이런 특별한 일 말고는 기운 날 일도 없었다. 보너스라면 모를까. 그러나 보너스는······.
“사고든 아니든, 끝장났구먼.”
“입에 들어갔다니. 차라리 땅에 떨어진 게 낫지.”
“단백질 변화가 일어나서 붙이지도 못할 거야.”
“음낭도 절단해야 합니다.”
환자 상처 부위를 살핀 능연의 첫 반응이었다.
능연팀 의사들은 4번 환자 외상 부위를 단체 협진-이라고 쓰고 구경이라 읽는-을 했다.
의사들은, 여원도 포함해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재수 옴 붙었네. 정확하게 정중앙이 깔렸어. 조금만 비켜났어도······.”
연문빈이 토끼 죽음에 슬퍼하는 여우의 마음으로 다리를 오므린 채 말했다. 아무리 헬스로 근육을 탄탄히 해도 안 되는 부위가 있었다.
치프 레지던트인 여원은 환자의 외상 부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좌측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여기 좀 봐봐, 여긴 뭐가 가렸나 본데?”
“3번 환자 머리야.”
좌자전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마음속은 드레이크 해협처럼 요동쳤다. 의사라고 해도, 견문이 넓은 의사라고 해도, 눈앞의 상황은 극도로 어색했다. 어쩌면 견문이 넓은 의사일수록 이런 상황에 상상력이 더 풍부해질지도 모른다.
파열된 부분을 생각하면 더욱 이가 욱신······. 좌자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상황에 이가 욱신거린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았다.
“3번 상태는요?”
“MRI 찍는 중이야. 내출혈 없으면 구강과나 성형외과로 넘어가겠지.”
여원의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것을 보니 좌자전은 전체 상황을 모두 파악한 모양이었다.
“얼굴 망가졌어요?”
“아니. 이가 많이 빠졌어. 가건물 지붕이 떨어졌는데 골절은 전혀 없는데 이빨만 빠졌어. 운이 좋은 거지.”
“우리 의사의 운이 좋다는 기준이 참 다르긴 해요.”
좌자전의 말에 연문빈이 껄껄 웃었다.
“음경 부분이랑 우측 음낭 절제하죠.”
능연은 음경 절제를 배운 적은 없지만, 아마도 상관없으리라. 수술 자체는 절단, 박리, 드레싱, 봉합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환자에게는 영향이 크겠지만, 방망이 부분은 공 부분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곽종군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능연이 복잡한 음낭 절제술을 터득한 걸 모르니까 주 선생을 능연의 조수로 붙여주었다.
“좌자전.”
“네!”
“가서 보호자 찾아서 수술동의서 사인받고 수술 준비해. 환자한테도 제대로 알리고. 복잡한 수술이라, 동의서 제대로 써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되네. 환자의 상태가 안정적인 편이야. 사고 원인이나 누가 재촉한다고 해서 할 거 빠뜨리면 안 돼.”
“네. 그런데 곽 주임님, 순서를 좀 바꾸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환자한테 먼저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슨 뜻인가?”
좌자전이 묻는 말에 곽종군이 걸음을 멈췄다.
“환자 그······ 잘린 물건이 같은 구급차로 실려 온 3번 환자 입에 있었는데, 제 생각에 부인은 아닌 거 같습니다.”
“확실해?”
곽종군은 그런 부분에서 좌자전보다 예민하지 않았다. 그러자 좌자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3번 환자 미니스커트에 스타킹 신고 있던데, 현장에서 사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흠, 유심히도 봤군. 그럼 그러세. 자네 말대로 해.”
곽종군은 이어서 능연에게 당부를 내렸다.
“자넨 일단 좀 쉬고. 동의서 사인받아 올 때까지 쉬면 몸도 좀 풀리겠지. 주 선생은 이런 수술 해 봤으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곽종군이 다른 치료팀으로 간 걸 보고 좌자전은 기운을 내면서 레드불 한 캔을 비웠다.
“능 선생, 그럼 다녀올게.”
“네, 빨리 처리하고 오세요.”
능연은 스태미너 포션을 마신 뒤라 사실 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지금 자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그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처치실과 응급 처치실을 둘러 봤다. 혼란스럽기는 해도 의사들은 충분했다.
처음엔 주치의인 주 선생 혼자 진두지휘했지만, 지금은 조금 심각한 환자 곁엔 모두 주치의가 있었다. 속속 도착한 부주임, 그리고 다른 진료과에서 지원 온 전문의도 있어서 나머지 환자를 커버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은 할 일이 없는데.”
능연은 난제에 부딪힌 것처럼 인상을 썼다.
“곽 주임님 말씀 못 들었냐. 조금 쉬라잖아.”
“좌 선생님 오시면 할 일 생겨.”
“두 사람 모두 어제 일찍 잔 거 아닙니까?”
뜨끔해서 말하는 연문빈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원의 말에 능연이 꿈 깨라는 듯 못 박았다.
“그렇지······.”
“그렇긴 하지······.”
새벽 2시에 시장 들렀다가 3시 반이면 병원에서 수술하는 남자인 연문빈은 늦게 잤다가는 하루를 날리게 되니 당연히 일찍 잤다. 2시 반에 일어나 정리하고 3시 반이면 병원에서 수술하는 여자인 여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한두 시간 일찍 일어났겠네요. 쉴 필요 없지 않아요? CPR 연습하죠.”
“뭐?”
“힘든 CPR을 왜?”
“단체 CPR 연습해요. 단독 흉부 압박 말고. 아, 흉부 압박 잘하세요? 한 번 해보세요.”
능연은 두 사람을 끌고 사무실로 들어가 의사 면허 시험 볼 때 쓰는 심폐소생 더미를 꺼내 두 사람에게 넘겨주고는 팔짱을 꼈다. 연문빈과 여원은 끽소리 없이 헥헥대며 할 수밖에 없었다.
상급 의사가 하급 의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건 흔하게 오는 기회가 아닌 만큼 두 사람도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했다. 능연은 곁에서 바라보면서, 두 사람의 흉부 압박이 합격점까지 될 때까지 지도했다.
심폐소생은 혼자 해도 되지만 둘이 하면 효과가 더 좋았다. 훈련된 수준 높은 팀이라야만 생존율을 올릴 수 있었다.
능연이 터득한 심폐소생엔 팀 지휘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고, 두 사람을 가르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