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능연은 팀을 데리고 조용히 무신 시 1 병원 복도를 걸었다.
연문빈, 여원, 좌자전과 마연린 모두 기운찬 모습이었다. 새벽 3시 회진에 익숙한 사람들이 한 시간이나 더 잤으니 당연히 상태가 좋았다.
갑자기 회색 그림자가 휴게실 구석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누구야?”
맨 뒤에 서 있던 마연린이 걸음을 멈추고 머뭇대며 물었다.
복도는 딱 새벽 4시 병원 복도처럼 고요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마연린은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을 보고는 조금 진정된 듯 말을 이었다.
“다들 사람 지나가는 거 봤지?”
“네, 사람이네요.”
능연이 확신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려 휴게실 불을 켰다. 구석에 켕기는 것 같은 배가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능연이 손짓하자, 연문빈, 여원, 좌자전, 마연린은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능연의 뒤로 섰다. 능연은 장갑을 꺼내 끼고는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온 배를 살며시 눌렀다.
“날세!”
배 주인이 위엄과 조금 사나움이 베인 말투로 대답했다.
“어르신?”
“그래, 날세. 산책 좀 하려고 나왔지.”
능연이 묻는 말에 테이블 구석에서 불룩한 배의 주인이 답답한 듯 화를 내며 말했다.
“수술실 가셔야죠.”
“먼저들 가게. 금방 가겠네.”
“어르신 모시고 나오세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능연이 고개를 돌려 연문빈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테이블 뒤에 배가 빠르게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내가 나가겠네.”
잠시 후, 어르신이 테이블 구석을 잡고 목을 꿀렁거리면서 뒤에서 돌아 나왔다.
연문빈, 여원, 좌자전, 마연린 모두 띠용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 드셨군요.”
“아닐세.”
능연의 진지한 말투에 어르신은 테이블 구석을 잡고 우아하고 투실투실한 늙은 치타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수술 전엔 금식해야 합니다.”
“알아, 안 먹었다니까!”
“입가에 초콜릿 묻었는데요.”
매서운 눈으로 능연을 노려보던 어르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콜릿 샌드일세.”
퉁퉁한 어르신은 딸이 가지고 온 이집트산 담요를 덮고 경매에 나온 황가 미라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척하는 매천귀도 아버지 앞에선 파라오 발치의 작은 고양이처럼 온순했다.
다른 사람은 더 말할 필요 없었고, 철없는 어린 손자만 연근 같은 작은 팔을 끼고 ‘이야아아’ 같은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녀서 그나마 병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수술 연기하는 것이 환자한테 좋습니다. 좀 기다렸다가 수술하는 게 예후에도 좋고요.”
좌자전은 겨드랑이 땀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엔 나서서 발언하는 걸 좋아했지만, 매가 사람 앞에서 매가 사람의 트레이드 마크인 사나운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고 있으니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매천귀는 좌자전의 말이 끝나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흔들댔다.
“수술 가이드에는 수술 전 2시간에 소량 물과 맑은 음료를 마실 수 있고 한 시간 전엔 소화하기 편한 딱딱한 음식을 조금 먹을 수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수술 시간을 연기하는 건 괜찮지만, 두 시간은 너무 오래 아닐까요?”
매천귀 곁에 서 있던 금 선생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황 교수는 어르신의 의사고, 금 선생은 매천귀의 의사라서 매천귀의 신임을 더욱 받았다. 그는 지금 매가 사람의 민망함, 특히 어르신의 민망함을 풀어 주려고 말을 꺼낸 것이라 싹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능연은 어딘가 딱딱하고 냉철하고 잘생기고 멋지고 고아하고 남다르고······.
“환자가 수술 두 시간 전에 딱딱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 그렇긴 해도 두 시간이나 미룰 것 있습니까? 한 시간만 미룹시다.”
그때 어르신이 차가운 눈으로 금 선생을 바라보자 금 선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시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허기가 심하게 져도 수술 회복에 안 좋지 않겠습니까? 한 시간이 한계입니다. 요즘 수술 가이드에서도 금식 시간을 단축하라고 건의하지 않습니까.”
“환자가 뚱뚱하니까요.”
능연의 목소리는 강경하고, 부드럽고, 진실하고, 순정하고, 우아하고, 진중하고 듣기 좋았다. 그야말로 쟁반에 옥 굴러가는 소리에 꾀꼬리 울음 같았고, 루신이 말한 ‘숲에 부는 바람, 샘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모두 글이 된다.’는 말 같았다.
어르신이 두꺼운 목을 치켜들고 평소에 사람들을 대하듯 사나운 눈빛으로 능연을 바라봤다.
“뚜, 뚱뚱······. 그렇다면, 조금만 더 미루죠.”
금 선생이 덜컥한 듯 말을 이었다. 가이드에서 말한 금식 시간 단축은 살찐 사람 대상이 아니었다. 금 선생은 뇌를 쥐어짠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음식을 조금 드신 거뿐 아닙니까. 생각해 보세요, 보름 동안 다이어트했고, 수술 전에 또 장시간 금식했으니 보통 사람들도 못 견딜걸요. 그런데 금식 시간을 연장한다니, 게다가 그렇게나 길게. 그럴 필요 있나요?”
“있습니다. 환자가 뚱뚱하니까요.”
“알았네. 자네 의견은 아주 잘 들었네!”
어르신은 침대 가장자리를 내리치면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지만, 배가 너무 커서 그대로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아버지 제가 부축할게요.”
“됐다. 굶어 죽으면 되지!”
큰딸이 다급하게 다가가 하는 말에 어르신이 사납게 고함쳤다.
“두 시간 금식한다고 굶어 죽진 않습니다.”
“어제부터 굶었다고.”
“보통은 사흘 굶어도 문제없습니다.”
“얼마나 굶어야 사람이 죽는지는 내가 자네보다 더 잘 알아!”
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앉은 어르신의 얼굴에 살이 투실투실했다.
“배고프던 시절에 우리는 댐도 짓고, 제방도 짓고 별짓을 다 했는데, 왜? 이제 먹고살 만해진 이 시대에, 내가 좀 먹고 마시면 어때서?!”
어르신의 눈에 핏발이 조금 섰고 눈빛은 동면에서 깨어난 곰처럼 사나웠다.
“능 선생이 아버지 식사를 못 하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순조롭게 수술하려고, 아버지 안전을 고려한 거죠.”
큰딸이 부친의 손을 잡고 살며시 말했고, 매천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나서서 능연 편을 들었다.
수술을 앞둔 지금 집도의를 화나게 하는 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후 숨을 몰아쉰 어르신도 성질을 부린 다음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됐네. 먹지 말라면 안 먹어야지. 물은 좀 마셔도 되겠지?”
“콜라는 좀 드실 수 있습니다. 탄산음료는 세 시간 전까지 괜찮습니다. 300ml만 드십시오.”
“거짓말하지 말게. 아까 금 선생이 두 시간 전까진 괜찮다고 했네.”
콜라는 마셔도 된다는 말에 어르신은 눈이 번쩍였지만, 입으로는 툴툴거렸다. 능연이 한숨을 내쉬면서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뻥끗하는데 어르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알겠네! 내가 뚱뚱해서 그렇지?”
어르신이 시위하는 듯 몸을 반듯이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