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연은 거만한 스킬북을 한참 동안 거두지 않고 빤히 바라봤다.
의사인 능연은 이미 여러 번 장을 가르고, 처리했었고, 좋아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면서 싫어하는 것도 많았지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치질 수술이 재미있지는 않았다. 일단 어려운 기술도 아니었다. 시스템이 주는 스킬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간 절제 같은 어려운 스킬은 초급 보물 상자에서는 전문가급이 나오고, 쉬운 스킬은 초급 보물 상자에서도 바로 그랜드마스터급이 나온다.
치질 수술, 특히 전통적인 치질 수술은 더욱 쉬운 기술이었다.
물론, 어떤 기술이라도 장인 정신으로 매우 정교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능연이 보기에 의미가 달랐다.
우선, 치질 수술 자체는 치질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 그 점만으로 치질 수술의 의미가 크게 꺾인다.
능연은 고개를 흔들면서 ‘맨손으로 적과 상대한다’는 심정으로 거만한 스킬북을 거두어서 그 스킬을 받아들였다.
배워서 해될 기술은 없겠지. 능연은 그런 마음으로 그 스킬을 대했다.
“능 선생. 날두 씨 깼어.”
마연린이 슬그머니 달려오는 모습에 힐끔 그를 본 능연이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아까 그 뚱뚱한······ 발가락 세 개 절단 환자. 이제 깼어.”
“이렇게 빨리요?”
마연린은 조금 켕기는 듯 말했고, 능연은 미간을 좁혔다.
“마취할 때 마취제가 좀 적었나 봐. 그······ 환자 덩치가 크고, 사적으로 마취약을 썼을 수도 있고, 수술 시간이 길기도 했고······.”
“수술 중 각성 있었대요?”
“물어봤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냥 좀 빨리 깬 거야.”
점점 더 뜨끔해진 마연린은 냉큼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국내 마취 교재 투약량을 참고한 거라. 남미 사람은 조금 더 썼어야 했나 봐.”
능연은 계속 질책할 생각은 없이 마연린을 힐끔 봤다. 마취 저항 같은 건 마취의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다. 환자의 저항 정도를 알 수 없고, 그런 쪽으로 참고할 확실한 데이터도 없어서 경험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마연린과 그는 모두 마취 쪽 경험이 없었다.
마취 저항을 피하려고 투여량을 올린다고 꼭 더 좋은 건 아니다. 환자 저항 정도가 낮거나 내성이 떨어지는 경우엔 네 시간짜리 수술하다가 환자가 수술대에서 죽을 수도 있다.
능연은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일단 환자 한 번 보죠. 정상 상태면 기록만 남기고요. 그리고 다음 수술부터는 우리가 마취하면 안 되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
“위성 전화 쓸 수 있잖아요. 브라질 마취 전문의를 불러다 전화로 소통하죠.”
“브라질 의사가 그런 책임을 지려고 할까.”
마연린이 못 미더운 듯 물었다.
“그럼 수술량을 줄이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수술하지 말아요.”
“폭풍우가 언제 그칠 줄 알고. 그동안 한 수술도 다 꼭 필요한 수술이었어.”
마연린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괜찮아졌지. 쿠파 마을에서 보내온 소독약도 있고. 그전 환자들은 작은 상처라도 처치하지 않고 그냥 뒀으면 다 곪을 지경이었잖아. 상태가 심각한 환자는 또 어떻고. 항생제도 아껴서 썼는걸.”
능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외과 의사란 언제나 이해득실을 따져야 했다.
같은 상황의 환자라도 홍수가 처음 시작됐을 때와 지금은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달라졌다.
사실 마연린도 그 사실을 알지만, 몇 마디 투덜거리지 않고는 못 견뎌서 그런 것이다.
회복실로 온 마연린은 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엄숙해졌다.
날두는 커다란 눈동자에 힘이 하나도 없이 능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서히 초점을 모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사세요?”
“아닙니다. 환자분 수술이 막 끝났습니다.”
능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닌데······. 나 지금 붕 뜬 느낌인데······.”
날두는 딱 봐도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마취의가 있다면 이런 환자는 좀 더 관찰했을 것이다.
“붕 뜬 느낌 말고 또 어떤 느낌이 드나요.”
능연이 계속 질문하자 날두가 머리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날고 싶어요. 저 어디로 날아온 거죠?”
“여기는 마취 회복실입니다. 조금 전에 수술하셨어요. 기억나십니까?”
“치질 수술요?”
“아닙니다.”
능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모르겠네요.”
마연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 중 각성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도, 지금 상황으로 보면 대다수 위험은 넘긴 것 같았다.
능연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간단한 신체 진찰을 하고 문제없음을 확인했다.
“혹시 환자 치질 있는지 검사 한번 해보세요.”
“남자 십중팔구는 치질이겠지. 브라질은 덥기도 덥잖아.”
문을 나가기 전에 능연이 하는 말에 마연린이 입을 삐죽였다.
“검사할 때 벌써 발견했어. 휠체어를 며칠이나 타고 있었고, 그 전엔 홍수에 한참 빠져있었으니 치질이 터졌대도 이상할 거 없지.”
“그래도 다시 보세요.”
능연은 다시 당부하고 계속 회진을 진행했다.
마연린은 딱히 하기 싫을 것도 없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습 기간을 더하면 이제 3년 차 의사고 내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30분 후.
“이런 젠장!”
능연을 찾아낸 마연린이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오래 살다 보니 별걸 다 봐. 별걸 다 본다고······.”
능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오리알만 해! 오리알만 한 거 본 적 있어?”
마연린이 손으로 크기를 표시하며 오리알에 낀 사람처럼 감탄했다.
“남미는 정말 뭐든 풍부하구나. 치질도 우리보다 크다니!”
“환자는 어때요?”
“마취는 깼고, 이제 아파서 난리야. 아파 죽을 거 같대.”
마연린은 안 됐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몸에 찰과상 천지고 발가락이 세 개나 잘린 데다가 이제 오리알만 한 치질 때문에 옆으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어. 발가락 때문에 엎드리지도 못하고, 치질 때문에 바로 눕지도 못해서. 아으······.”
마연린은 웃고 싶은 표정이었는데,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능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그럼 치질 수술하고 싶은지 물어보세요. 하겠다면 제가 해버리게요.”
“잉? 님 치질 수술도 하심? 왜 내가 몰랐지?”
얼굴을 바라보며 툭 묻는 마연린의 모습에 능연은 흥미 없는 듯 그를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어시 하세요. 그 김에 배우고.”
“좌 선생님한테 꼭 필요하겠는데? 내가 배워서, 헤헤헤······.”
마연린의 눈알이 또르르 굴러갔다.
이른 아침, 해가 뜨자마자 국정 자선 병원 마당에 환호성이 들렸다. 누군가 큰 소리로 포르투갈어와 영어로 뭐라고 소리쳤고, 그 사이에 웃음소리와 꺄악꺄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능연은 눈을 비비면서 휴게실에서 나와 창밖 날씨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가 멎었다.
“남쪽에는 아직 비 온대요. 그래도 잠시 공백기는 있을 거예요.”
복도에 앉아 있던 쿠파 마을에서 온 화교 아가씨가 능연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냉큼 일어나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을 걸었다.
“아, 네. 헬기 온대요?”
“비가 한두 시간은 멎어야 헬기가 뜰 수 있대요. 아무리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한다나 봐요. 능 선생님, 아침 드실 거예요? 식당에서 먹어도 되고, 제가 가지고 와도 돼요.”
재빨리 대답한 여자가 이어서 묻는 말에 능연이 배를 문질렀다. 다른 사람들처럼 밤에 바로 휴식을 취한 것이 아니어서 확실히 배가 고프긴 했다. 능연은 저녁에 수술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태미너 포션 한 병을 써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했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능연이 마취 겉핥기를 하기 충분했다. 그 점만으로 그는 다른 외과 의사 90%는 넘어섰다.
그런 습관 때문에 능연은 일찍 아침을 먹었고, 또 많이 먹었다.
“테라스에서 먹을게요.”
며칠 동안 태양을 못 봤으니, 햇살이 매우 반가웠다.
“알겠어요.”
상대는 더 묻지 않고 무전기에 몇 마디 지시를 내렸고, 잠시 후 누군가 달려와 테라스를 꾸미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전칠이 도착했을 때, 테라스의 작은 테이블 위엔 벌써 작은 접시 8개와 수프 두 그릇이 놓여있었다.
능연과 전칠은 마주 보고 앉아서 기분 좋게 햇볕을 즐겼다.
“역시, 해가 있는 시간이 좋네요.”
맞춤 드레스를 입고 파란 모자를 쓴 전칠은 우아하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능연은 여전히 조잡한 수술복 차림으로 자연스럽게 빵에 잼을 발랐다. 쿠파 마을의 도로가 열렸지만 겨우 트럭이 지날 정도라서 병원에 음식이 그렇게 풍부하지는 않았다.
여덟 가지 반찬이 나온 아침만 해도 나올 만한 종류는 모두 나온 셈이었다.
“내일 아침에 헬기 뜰 수 있으면 먼저 돌아가요.”
능연은 잼을 바른 빵을 전칠에게 건네며 말했다.
“서둘러 수술해야 할 중상 환자가 세 명 있지만, 그래도 몇 명은 더 탈 수 있을 겁니다.”
전칠은 빵을 건네받고 생긋 웃었다.
“그렇게 급하게 돌아갈 거 없어요. 병원은 안전하고, 물건도 충분하잖아요. 오히려 헬기가 비 그친 새 왕복해야 하니 덜 안전해요.”
나름 합리적인 이유여서 능연도 더는 전칠을 설득하지 않았다.
현재 국정 자선 병원엔 환자가 100명 정도 있었다. 중상 환자도 있고 경상 환자도 있지만 다들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칠이 말한 대로 헬리콥터로 왕복하는 것이 꼭 안전하지만도 않고.
폭우 공백기에 비행기를 운행하는 건 여전히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많이 위험한 건 아니라도 어쨌든 크고 작은 위험은 따랐다. 그러니 급하게 떠나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며칠 더 머무르면서 폭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때가 되면 육로가 아무리 불편해도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편하고 안전할 것이다.
국정 자선 병원은 애초에 폭우와 홍수를 고려해서 설계되어서 산사태 위험도 없었다. 병원에 남으면 그냥 생활이 좀 불편할 뿐이었다.
능연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병원에 있어요. 위성 전화로 연락하고.”
“응응.”
전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잼 바른 빵을 한입 물고는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능연은 계속해서 자기 몫의 빵에 잼을 발랐다. 흡사 간 절제 후 바이오겔을 바르는 모습이었고, 그 와중에 균일하게 발렸는지 검사까지 하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유일한 아쉬움은 바로 쨈이 맛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