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로 온 진효왕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흐릿한 세상도 꽤 편안하다고 생각하고는 안경 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업무 지표가 적혀 있는 화이트보드도 없고, 시끄럽게 구는 제품 매니저도 없고, 빛나는 대머리도 없고, 끝없이 길게 이어진 동료의 책상도 없었다.
“어이, 느낌이 어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진효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놀렸다.
“응? 여기 올 시간 있으면 잠이나 자지, 뭐하러 왔어. 과로사하면 어쩌려고.”
“차에서 좀 잤어. 깨는 거 기다리면서도 좀 잤고. 느낌 어떤데?”
동료의 목소리가 붕 뜬 것처럼 들렸다.
“괜찮아.”
“10점 만점에 몇 점?”
“6점.”
목소리가 잠겨서 ‘정도?’라는 단어까지 내뱉지 못했다.
“음, 총체적인 직관적 느낌은 6점이라. 머리는? 맑아?”
“아마도?”
진효왕이 망설이며 대답했다.
“1에서 10.”
“8점?”
“술 취한 8점? 아니면 커피 마신 8점?”
그 질문에 잠시 멍해졌던 진효왕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물으면, 술 취한 사람들은 안 취했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안 취한 사람은 뭐라고 해야 정말로 안 취했다는 걸 증명하지?”
“그런 논리라면, 곧 깰 상태겠네. 프로그래밍으로는 표현 안 돼? 혹은 숫자 기호로? 이런 거처럼.”
동료가 하하 웃으며 프린트 두 장을 꺼내 진효왕에게 건넸다. 그러자 줄곧 곁에서 구경하듯 지켜보던 간호사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안 돼요! 이제 수술 끝난 사람한테 일을 시키다니! 죽이고 싶어요?”
“이건 일이 아니에요.”
마흔 다 되어 가는 동료는 간호사에게 혼나고는 귀까지 빨개졌다.
“나를 테스트 용품으로 삼을 셈이지?”
정신이 꽤 맑아진 편인 진효왕이 동료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한테만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친구들이 roll 했는데, 쇤네가 운이 제일 나빠서······ 100점 나왔네요.”
진효왕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끝내고 경험 정리 좀 해줘. 회복 잘 되면 이제 다음 차례는 나야. 내가 신경 안 쓸 수 있겠어?”
“니들 인성 뭐냐?”
진효왕이 입을 내밀었다.
“친구, 이성적이라고 하자. 이성적이니까 우리가 이러지. 충수염을 2년 버텼다고. 좋아졌다, 나빠졌다. 야근만 하면 아파. 이제 슬슬 수술해야지. 이러다가 암 되겠다. 그러니까, 네가 힘을 내야 해. 빨리 좋아지라고, 친구.”
“힘으로 될 거 같으면 담낭염도 진작 나았게.”
투덜거리던 진효왕은 조금 지친 느낌이 들어서 눈을 감고 입만 열었다.
“인지 테스트할 거면 그냥 말로 물어. 물어보는 대로 내가 대답할게. 무슨 숫자 기호로 테스트야. 돌았냐?”
“아아,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프로그래밍을 좀 바꿔야겠다. 분류 좀 하고 리스트 다시 짜야지. 간단 공장 모드로 할까?”
동료는 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뒤졌다.
“며칠 전엔 새 골자를 잡자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주석을 더 명확하게 써야 한다고. 주석을 더 명확하게 쓰려면······.”
“개소리하네. 그냥 분석표 만들어서 데이터 분석하면 되지. 그렇게 복잡하게 할 거 있어?”
“너는 수술이 끝났으니까 어차피 결론이 난 거잖아. 우리랑 같냐? 네가 사흘 안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는 휴가를 내지도 못할 수도 있다고.”
진효왕은 어이없다는 듯 하하 웃었지만, 마음만은 묘하게 편안했다.
어차피 수술도 했고, 나머지 일은 걱정해 봤자였다.
진효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금세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동료가 병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마주하고 미친 듯이 타이핑 하고 있었다.
진효왕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프로그래머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다. 밤낮없이 죽을 거 같이 일하는 것.
“12번 베드. 회진입니다.”
병실 밖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몇이 갑자기 들어와 높낮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창밖을 본 진효왕이 놀라서 그쪽을 바라봤다.
“새벽에 회진이요?”
“아침입니다.”
안으로 들어온 연문빈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새벽 3시잖아요. 방귀는 뀌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