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화병원 회의실.
문 가까운 쪽에 몇 사람이 흩어져 앉아 웃음기 가득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10미터 넘는 길이의 테이블 한쪽엔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아서 조금 휑해 보였다.
긴 테이블 중간에 에피프레넘 화분 네 개가 덜렁 놓여 있으니 창틀에 접난과 서로 어우러져도 어쩐지 활기가 없어 보였다.
유리창 맞은편 쪽에 앉은 남자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활기가 없었다. 애써 정신 차리고 대화를 나누며 드러내는 웃음에 억지가 가득했지만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의사 몇 명의 표정은 평소와 다음 없고, 조금 냉담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서나 이런 가짜 웃음을 이해했고, 또 병원에서나 그런 냉담한 모습에 너그러웠다.
“능 선생 왔습니다.”
행정 개 한 마리가 쪼르르 들어가서 대빵들의 비위를 맞추는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다.
일반 외과 과 주임이 ‘그래’ 하고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무 원장님, 우선 능 선생 생각이 어떤지 들어보시죠.”
“알았네.”
무 원장도 자세를 가다듬고 가짜 웃음이 섞인 진짜 웃음을 드러냈다.
“능연은 학생 때부터 내가 찍어뒀었지. 그때는 사실 걱정도 됐는데, 그냥 공부벌레일 줄은 몰랐네.”
“그랬겠지요. 하하. 운화대도 교육 수준이 좋네요.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출진할 수 있는 대단한 의사를 키워내다니요. 대단합니다.”
“학교 때도 대단했지만, 지금 정도로 대단하진 않았지.”
무 원장이 그때 보인 웃음엔 의문이 조금 섞여 있었다.
“천재가 그렇지요.”
일반 외과 주임은 딱히 무슨 설명을 할 생각이 없었다. 천재가 아니면?
그때 발걸음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렸다.
단천, 능연, 좌자전, 장안민과 여원 일행이 투명한 대문 저쪽에 나타났다.
단천이 맨 앞에서 포워드처럼 조금 다급하게 걸었고 능연은 뒤에서 차분한 발걸음으로 걷는데 좌자전과 장안민이 호위하니 상당히 기세가 넘쳤다.
여원은 보일 듯 안 보일 듯 맨 뒤에 뒤처졌다.
일반 외과 주임이 미소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니 당연히 누군가 나서서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능 선생 왔나? 단 주임, 앉게.”
일반 외과 주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잔말 없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능연, 이분은 무 원장. 자네 예전 운화 대학 병원 원장일세.”
“네. 무 원장님 안녕하세요. 지금도 우리 원장님이시죠.”
능연이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회의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너무 듣기 좋은 말이었고, 수준도 높아서 평소 능연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직 좌자전만 태연했다. 운화병원은 원래 운화대학 부속 병원이고, 운화대학 병원의 원장이 운화병원 의사한테 우리 원장 소리 듣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능연이 대단히 솔직히 말했을 뿐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무 원장의 표정도 조금 좋아졌다.
“역시 우리 운대 졸업생 답군. 음, 능 선생, 오늘 내가 이렇게 온 건 다름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일세.”
볼일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 능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봤다.
단천은 부럽고 호기심도 생겨서 그쪽을 바라봤다. 주임 의사라서 보호자의 청탁을 적잖게 받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정식이고, 이렇게까지 띄워주는 청탁은 처음이었다. 그의 전공이 단일공 복강경이라 그런 기술로 수술하는 병이 큰 병인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런 청탁을 못 받아 본 것도 있고. 혹은 단일공 복강경은 의사가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만한 수술이 될 확률도 낮기도 했다. 정 걱정되면 다공 복강경 혹은 개복으로 하면 되니까.
그러나 능연이 장악한 기술은 달랐다. 특히 간 절제 수술은 국내에서 위치가 높은 수술이고, 그중 새로 발전한 수술 중 병리 검사 진행 간 절제 수술은 상태가 안 좋은 간암 환자로서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한동안 능연이 초빙받아 간 출장 수술도 1/3이 관련 수술이었다. 일부는 환자 혹은 보호자가 미리 알고 연락한 것이고, 일부는 동종 업계에서 대놓고 기술을 훔치고 싶어서 연락한 것이다.
무 원장은 딱 봐도 본인이 알고 연락한 스타일이었고, 다들 예상하던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 간암 수술을 자네가 맡아 줬으면 하네. 그러나······.”
무 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꽤 난감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수술을 안 하고 싶어 하시네. 그래서 말인데, 운화병원 학생 신분으로 아버지 수술을 해줄 수 있겠나?”
“선대 무 원장님이 간암이라고요?”
능연이 막 입학했을 때 선대 무 원장의 강의를 들은 적 있었다. 운화병원 창시자 중 한 명인 선대 원장은 충분히 전설적인 일생을 보냈고 능연이 기억하기로는 천수를 누리고 있었다.
어리지 않은 어린 무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올해 80세네. 이런 수술을 받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지. 그러나 간암으로 진단됐고, 아직은 조기라서 수술을 안 하자니 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네.”
능연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술은 할 수 있습니다만, 환자의 뜻을 따라야죠.”
“아버지에게 자네가 운대 졸업한 의사라고 말만 하면 수술을 하실 걸세.”
무 원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아버지도 자네를 안다네. 운대에서 배출한 의사는 많지만, 이렇게 젊은데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은 최근엔 그리 많지 않지.”
좌자전은 지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운대 졸업한 의사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른 인선도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젊은 사람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네. 너무 유명한 의사는 오히려 너무 큰 부담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라서.”
일반 외과 병실에서 선대 원장이 두 눈을 꼭 감고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의 신분으로 충분히 소위 고위층 병실 혹은 특수 병동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성격이 올곧은 선대 원장은 일반 병실에 입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실 결과는 비슷했다. 일반 외과에서 2인실을 배정했지만, 옆 침대 환자가 그날 퇴원한 이래 새로운 환자가 배정되지 않아서 보호자는 안쪽 보호자 침대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다만 특수 병동에 있는 회의실이 없고, 냉장고, 전자레인지 같은 가전 용품이 없을 뿐이었다.
두 번이나 말했는데도 보호자와 제자들이 줄지어 다녀가는 등 병실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편하게 쉴 수도 없어서 선대 원장의 마음도 편안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 최대한 조용히 본인의 마음을 다스렸다.
아직 간암 초기라 본인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다만 80세 고령이라 이틀 이어진 검사와 입원에 쉴 새 없이 병문안 오는 손님 때문에 노인은 벌써 심신이 피폐해졌다.
선대 원장의 나이 든 손녀까지 피곤함을 느낄 정도였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꼭 쥐고 옆에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복도에 구둣발 소리가 다시 울리자 눈을 떴다.
“또 누가 왔나 봐요.”
나이든 손녀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화 중학에서 일하는 손녀는 지금은 벌써 교육처 주임이지만, 학생 평가하는 일보다 손님 접대를 더욱 힘들어했다.
선대 원장도 살며시 눈을 떴다. 심장도 좋지 않아서 단잠에 들었는데 시끄러워서 깰 때마다 괴로워했다.
똑똑똑, 하고 병실 문이 가볍게 세 번 울린 다음 당직 간호사가 먼저 들어왔다.
“무 여사님, 작은 무 원장님과 의사분들이 오셨습니다.”
조금 모호하긴 했지만, 제대로 설명한 셈이었다.
조부의 질환에 희망을 품고 있는 무 여사가 다급하게 일어났다.
잠시 후, 무 원장이 들어와서 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병실부터 살펴본 다음에야 다시 뒤돌았다.
“아버지, 고령 간암 전문으로 하는 전문가를 데려왔습니다. 누군지 상상도 못 하실걸요.”
“누구든지 필요 없다.”
선대 원장의 말투가 매우 딱딱했다. 실효성을 따지는 성격이라 귀신도, 다음 생도 믿지 않고 모든 재산을 모두 학습에 투자하고 싶어 할 만큼 평생 청렴하게 살아왔으면서 본인의 병은 그다지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대 원장은 단호하게 아들을 바라봤다.
“설득할 것 없다. 속이는 건 더욱 안 되고. 국내 유명한 의학 전문가는 너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알고 지내는 사람도 너만큼은 된다. 그런데 네가 누굴 데리고 온다는 게냐. 데리고 올 필요도 없다. 내 몸이 이런데, 쓸데없이 스승을 죽였다는 오명을 씌울 필요가 뭐가 있느냐? 내가 그런 식으로 가면, 나중에 너희들이 다시 만날 때 껄끄럽지 않겠느냐?”
비슷한 말을 선대 원장이 전에도 한 적 있지만, 오늘처럼 심각하게 한 적은 없었다. 어린 무 원장의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할아버지, 지금은 그런 생각은 그만 하세요.”
무 여사도 거의 마흔 가까운 사람인데, 마찬가지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선대 원장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늙으면 쇠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생각이라도 맑아야지.”
“아버지.”
어린 무 원장은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 싶지 않아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데리고 온 전문가는 다릅니다. 아버지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러고는 그가 헛기침하자 좌자전이 먼저 들어오고 바로 능연이 들어왔다.
선대 원장과 나이든 손녀의 눈이 동시에 밝아졌다.
“오, 능연이군.”
선대 원장이 한눈에 능연의 이름을 불렀다. 운화대학 병원 일선에서 진작에 물러났다고 해도 집안이 여전히 학교에 몸담고 있었고, 해마다 각종 활동에 출석해서 강연을 하기도 해서, 운화대학 출신 유명 인물은 아직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능연처럼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은 흡족하고 또 흡족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흡족하다고 해도 오늘의 전문가가 능연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능연은 지금 운화병원 간 절제 제일 전문가입니다.”
어린 무 원장이 껄껄 웃으며 아버지에게 능연을 소개했다. 그러나 선대 원장의 첫 반응은 바로 미간을 좁히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띄우누. 이렇게 젊은 놈이 무슨 일등은 다툴 수 있다고.”
“아니요, 아니요. 다투는 게 아닙니다.”
방법이 생길 것 같자, 무 원장은 내심 뿌듯해하며 능연 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요즘 예전과 달라서 병원 일을 전보다 신경 쓰지 않으신다네.”
능연의 명성은 의료계에서 핫했지만, 선대 원장같이 이선에서도 벗어난 나이든 간부에게는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진 어린 무 원장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허둥지둥 다가가 침대 등받이를 올렸다.
“아버지, 제가 헛소리하는 게 아닙니다. 능 선생의 간 절제 기술은 국내 선두 수준입니다. 지금 창서성 안에서 간 절제 전문가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능 선생입니다.”
“젊으니까 그런 거지.”
선대 원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여기서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능 선생, 요즘 비도 한 번에 만 위안이지?”
출장 수술은 여전히 암암리에 행하는 행위였다. 초짜 의사들은 어차피 출장 수술 자격이 없어서 거침없이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만, 고급 의사들은 이것저것 거리낄 것이 많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인정하든 아니든, 출장 수술은 정말로 일어나는 현실이었고, 출장 수술 가격은 더욱 현실적이었다.
한 번에 3천 위안짜리 의사와 5천 위안짜리 의사는 급이 달랐고, 6천과 만은 더욱 차이가 났다.
선대 원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건 맞지만, 이런 일은 여전히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에 만 위안 출장 수술은 창서성 같은 곳에서는 거의 최고가였고, 거기서 2, 3천 높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만 5천에서 2만짜리는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선대 원장은 힘겹게 능연을 바라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능연, 졸업한 지 고작 2, 3년 아닌가? 밖에서 수술하는 게 쉽지만은 않지?”
“수술 환경은 대부분 운화보다 못하지만, 대다수 의사의 수술 협조 능력은 그래도 평균은 됩니다.”
능연은 선대 원장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평가를 담담하게 내렸고, 능연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닌 선대 원장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텉렸다.
“흠,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군. 음, 그래. 그럼 한 번 봐보게나.”
어린 무 원장의 계획대로 운화 대학을 졸업한 젊은 의사 능연이 나타나자 선대 원장에겐 치료를 계속할 수많은 이유와 맹목적으로 치료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생겼다.
“그럼 우선 신체 진찰을 하겠습니다.”
능연도 긴말 없이 바로 나섰다.
선대 원장은 갈등하며 그의 솜씨를 보다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잘한다. 우리 때는 지금처럼 기계가 많지 않으니 다 신체 진찰을 했지.”
“말씀하지 마십시오.”
능연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선대 원장을 바라봤다. 말이 잘린 선대 원장은 잠시 멈칫하다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것도 안 됩니다.”
능연은 선대 원장의 배를 누르며 다시 명령했다.
선대 원장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