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학명은 팔채향의 마을 간부처럼 입에 담배를 물고 양다리를 벌리고 상반신을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초점 없는 두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며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망연자실을 감추며 담배를 피웠다.
그의 맞은편에 창평구에서 파견 온 계약 의사 이강학이 서 있었다. 스물 몇인 그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담배 피우는 동작도 어딘가 어색했다.
구 병원은 나이 들어서 보내기 좋은 곳이지만, 정식 계약이 되지 않으면 나이 들 때까지 버티기가 지극히 어렵다.
팔채향 분원에 파견된 후, 이강학은 영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는 줄담배를 피우면서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형, 운화병원 사람들 온대? 계속 이러면 나 정말 때려치울지도 몰라”
“때려치우고 말고 할 거나 있고?”
처음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긴장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투덜거림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서 긴말도 하기 싫었다.
딱히 말려달란 이야기도 아니었던 이강학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니, 너무하잖아. 운화 시 의사들 하나도 오는 사람이 없어.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인데. 안 그래? 다들 엉덩이 꿈쩍도 안 하네?”
“다리가 무너져서 차가 못 들어와.”
항학명도 짜증이 났다. 어제보다 물이 점점 불어나서 결국 팔채향과 외부 교통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럼 운화병원 지원도 텄네?”
“낸들 아냐.”
항학명은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다.
항학명은 정말로 능연 같은 동창을 존경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겸손하고 진지하고.
항학명이 팔채향에서 일하는 2년 동안, 대타 의사로 온 장안민이 얼마나 능연을 찬양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에 팔채향에 산사태가 벌어진 것은 팔채향 분원으로서는 전에 없는 큰 도전이었다. 항학명은 아무도 못 믿어도 능연은 믿었다.
큰 병원 뒷배도 없고, 대단한 선배도 없는 항학명에게 능연이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항학명은 초초 불안해하는 이강학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냐. 여기 남은 환자는 원래 그렇게 심각한 환자가 아니니까, 잘 유지만 하면 돼.”
“유지요? 그게 가능하면 어제 심근경색 할배도 안 죽었겠지.”
그의 손에서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라서, 이강학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형, 생각 잘해야 한다. 굽힐 수 있는 데는 다 부탁해야 해.”
“넌 있고?”
순간 이강학도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학력과 조건이 항학명보다 더 안 좋았다. 항학명은 운화대학 동창과 선배라도 있지만, 한의대 졸업한 이강학은 인간관계가 더 비좁고 더 멀었다.
“같은 처지끼리 누가 낫네 마네 싸우지는 말고.”
이강학의 말에 항학명이 입을 삐죽이면서 뭐라고 반박하려다가 갑자기 어딘가를 바라봤다. 이강학도 따라 그쪽을 바라보다가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검은 점을 발견했다.
“헬기?”
이강학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헬리콥터는 TV에서나 봤지, 현장에서 보는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운화병원에서 실습한 항학명 같은 의사는 그래도 운화병원 옥상에 서 있는 헬리콥터라도 본 적 있지만, 이강학이 실습한 3급 병원에선 그런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헬리콥터가 어느새 가까워졌고, 황금색 헬리콥터의 모습을 본 항학명이 흥분했다.
“운리 거다! 능 선생일 거야.”
“정말?”
이강학은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로서는 의사가 헬리콥터를 타고 온다는 사실이 여전히 리얼감이 하나도 없었다.
팔채향 분원 앞 공터에 헬리콥터 바람에 날린 잡초가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항학명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냉큼 달려나가 몰려든 사람을 밖으로 몰아내며 교통 지휘를 했다.
“사진 찍지 마세요. 다들 아이 잘 붙잡고, 동물들은 멀리 끌고 가요. 괜히 말이 놀라서 날뛰다가 헬기에 부닥쳐도 보상금 같은 건 없습니다!”
헬리콥터를 어떻게 마중해야 하는지 몰라서 항학명도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내린다!”
“뭐?”
“누가 내린다고!”
앞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이강학의 말에 소음 때문에 잘 듣지 못하고 항학명은 되물었고, 이강학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뭐라고?”
“존나 잘생겼네!”
이강학이 더 크게 고함치는 소리에 항학명도 이제야 똑똑히 듣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헬리콥터 문이 열리더니 흔한 하얀 가운을 입은 능연이 초특급 존재감을 내뿜으며 공터에 나타났다.
파란 하늘, 흰 구름, 금색 헬리콥터를 배경으로 삼은 능연은 순식간에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눈도 껌뻑이지 못했다.
항학명은 학교에서 처음으로 능연을 만났을 때 장면을 저절로 떠올렸고 ‘시선 강탈’이라는 말이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했다.
“가자.”
항학명은 다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서둘러 달려나갔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부터 벌써 공손하게 ‘능 선생’하고 불렀다.
능연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항학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앞에 다리가 부러졌던데, 아직 중상 환자 있어? 있으면 헬기 돌려보내는 김에 병원으로 보내면 돼.”
“흠, 팔채향 사람들은 헬기 비용을 낼 형편이 안 될 텐데.”
항학명이 조금 머뭇거리면서 헬리콥터를 바라봤다.
“무료야. 헬기 비용은 우리 진료과에서 부담해.”
능연이 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제약 회사라고 해도 헬리콥터 한 번 띄우는 데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운리에서 무료로 해주겠다고 해도 좌자전은 괜히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럼 내가 팔채향을 대신해서 능 선생에게 감사할게.”
항학명의 말에 약상자를 들고 뒤에서 따르던 좌자전이 입을 삐죽였다.
“그럼 우리는?”
“선생님들도요!”
항학명이 모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팔채향에서 2년 있는 동안 사교 스킬이 가장 많이 증가했다.
병원 대문으로 들어서자 짙은 피 냄새와 소음이 바로 들렸다.
외래 접수용 로비까지 병상과 환자 보호자로 가득해서 듣기만 해도 초조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팔채향 분원이 어떤 상태인지 바로 깨달았다.
능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 첫 번째. 여 선생님 원감 예방책 세웁니다. 둘, 연 선생님, 환자 구분하시고요. 셋, 수술실이랑 병상 정리하세요.”
하얀 가운 입은 의사 무리가 숙연히 서서 대답하는 모습에 한창 떠들던 환자와 환자 보호자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두혜인은 눈을 뜨자마자 아빠 침대가 밖으로 밀려가는 걸 보고는 미처 정신이 들기도 전에 울음부터 터트렸다.
“아빠!”
“아이고, 얘야.”
침대 곁에 있던 엄마가 깜짝 놀라서 딸의 입을 다급하게 막았다.
“아빠 괜찮아. 검사하러 가는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두혜인은 병실 사람들이 모두 웃으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모습에 그제야 멍하니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가던 아빠도 목소리를 듣고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난 괜찮단다.”
그리고는 그는 기운 없이 다시 누웠고, 두혜인은 조금 불안한 듯 아빠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겨우 여덟 살이라 ‘검사’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고, 아빠가 보이지 않자 바로 입을 삐죽였다.
“괜찮아, 괜찮아. 검사하러 간 거야. 금방 오실 거야.”
엄마가 아이를 끌어안고 흔들며 위로했지만, 아이는 믿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옆집 아저씨 검사하러 갔다고 했잖아. 알고 보니까 물에 휩쓸려 간 거잖아.”
“너 진짜!”
아이의 입바른 소리에 엄마는 순간 흥분해서 아이를 때릴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애잖아요. 뭘 알고 하는 말도 아니고.”
“됐어요, 됐어.”
“애가 뭘 안다고.”
병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여자를 말렸다. 사실 엄마도 시늉만 할 뿐이었다.
병실엔 모두 재난으로 들어온 사람이었고, 어느 집 식구가 산사태에 휩쓸렸을지 모를 일인데, 본인 가족은 모두 살아서 병원으로 왔다. 아이가 하는 헛소리에 누군가 원망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그럼 아빠 언제 오는데?”
위기를 넘긴 두혜인은 바로 목을 길게 내빼며 물었다.
“금방 오셔.”
“금방이 언젠데.”
“한 시간 반 정도?”
이번엔 대답이 밖에서 들렸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두혜인이 바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청 예쁜 언니야.”
“그러네.”
아이의 말에 엄마도 자세를 가다듬고 무심결에 머리를 손질했다.
수트 차림의 전칠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꼬마야, 아빠는 어디 아픈 데 없는지 검사하러 가신 거야. 검사 끝나면 바로 돌아오실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밖에서 기다릴까?”
전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운리 제약 회사 책임자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여러분이 묵으실 수 있도록 외부에 집을 빌렸습니다. 무료로 제공되는 공간이고 선착순이니까 어서 신청하세요.”
“무료요? 관리비도 안 내도 되고요?”“병원에 있으면 안 되나요?”
“언제까지 살 수 있나요? 집이 다 무너졌어요.”
팔채향 병원은 원래 넓은 6인실인데 지금은 병실마다 12명 넘게 묵고 있었고, 보호자까지 다하면 방마다 족히 서른 명은 넘었다. 냄새도 나고, 답답하고, 요양은커녕 감염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환자 침대 추가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병원에 보호자를 이렇게 많이 두자니 원감 위험이 너무나 컸다.
다음 헬리콥터를 타고 온 전칠은 여원 혼자 동동대는 걸 보고 보호자를 분산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지금 병원에 있는 보호자는 평소의 보호자와 달리 수재민이었다. 거칠게 쫓아내지 않고 예의 바르게 쫓아낸다고 해도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다.
보호자 중에도 다친 사람이 있었고, 다치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돌아갈 곳이 없어서 환자 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칠로서는 그들이 묵을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가족 전부를 옮기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었다.
“이 근처에 건물 세 채 빌렸습니다. 집도 다 무료고, 쓰레기 비용뿐만 아니라 수도, 전기 모두 무료입니다. 보호자는 한 분만 남아주세요. 낮에도 규정 시간에만 면회할 수 있습니다. 환자한테도 좋고 보호자분 부담도 덜할 거예요. 2주 동안 무료로 있을 수 있고요, 집이 무너져서 도저히 돌아갈 상황이 아니면 최대 3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습니다.”
전칠은 사람들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하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도 모든 분을 다 감당할 수는 없고, 빌릴 수 있는 집도 한계가 있어서 선착순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청에서 떨어진 분들은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 잠시 상황을 지켜보려던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럼 저요!”
두혜인의 엄마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모녀가 간호하려니 처음부터 어디서 자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집이 재난 피해를 직격타로 입은 건 아니었다. 남편도 몸이 전부터 안 좋았는데 질질 끌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가, 이번에 입원한 것도 비를 맞아서 열이 나고 몸에 허해져서였다.
수도, 전기 문제는 해결되길 기다려야 하지만, 물에 잠긴 집은 나중에 꼼꼼히 청소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팔채향 주변 모텔은 모두 가득 찼고 병원 병상이 오히려 더 쌀 정도였다.
물론, 시내 모텔에 빈방이 있어도 거기 묵을 능력은 없었다.
“저도요. 어디서 등록하면 됩니까?”
문 쪽에 앉은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전칠이 웃는 얼굴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거기서 밥도 할 수 있나요?”
“대부분은요. 가전제품, 가구도 최대한 넣어 두었습니다. 그래도 전부 챙기진 못했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신청하는 게 좋겠죠. 뒤로 가면 주방 없는 방도 있을 거고, 그럼 공동 주방을 써야 할 거예요.”
전칠은 최대한 설명했고, 방에 있던 사람들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다급하게 방에서 나가 줄을 섰다.
정부에서 나눠주는 보급품도 있어서 병원에 묵는 건 그것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병실 환경이 안 좋다고 해도 그것도 비교 대상이 어디냐에 따라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 학교에 머무는 수재민과 비교하면 병원은 적어도 화장실도 많고, 뜨거운 물로 목욕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일반 주택 건물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야 당연히 병실보다 훨씬 나았다.
상황을 본 전칠은 생긋 웃고는 아이를 향해 인사한 다음 다른 병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