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클리닝 진행하게 동의서에 서명 좀 해주세요. 보호자는요?”
마연린이 동의서를 들고 와서 두산에게 내밀며 물었다.
“병실에 있죠.”
두산은 자리에 누운 채 조금 힘겨운 듯 대답했다.
“그럼 환자분이 서명하세요. 이따 보호자께 말씀드리죠. 어차피 작은 수술입니다.”
주변에 줄 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연린이 대답했다.
“수술 꼭 해야 합니까? 그냥 머리 좀 아프고 기운이 없는 건데요. 어제 비도 맞았고······.”
두산은 돼지 몇 마리 길러서 팔아 적은 돈을 버는 성실한 팔채향 농민이라 의료 보험도 없고 병원의 기술을 그다지 믿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술 두 글자를 들으니 머리가 텅 빌 수밖에.
두산의 표정을 본 마연린은 그의 생각을 바로 읽었다.
능 팀에서 경력은 짧아도 마연린의 의사 생활은 실습 기간을 포함해서 6년은 넘었고, 의대 시절을 포함하면 10년이 넘었다. 병원에서는 여전히 가장 낮은 레지던트지만 다른 업계였다면 충분히 중견 위치에 있을 만한 경력이었다.
환자 경험이 없는 두산은 함부로 서명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동의서를 들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연린이 설명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환자분 장을 깨끗이 하려는 겁니다. 장 상황을 살펴보고요.”
두산은 잠시 설명을 들어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연린의 친절한 태도와 인내심 있는 모습에 드디어 동의서에 서명했다.
동의서를 받은 마연린은 곁에 서 있는 아직 어수룩한 새 실습생 제윤조에게 내밀었다.
“받아. 동의서는 다 파일로 정리해야 한다.”
“네.”
동의서를 받아든 제윤조는 무의식중에 힐끔 보다가 갑자기 푸학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환자 앞에서 웃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연린이 얼굴을 찌푸리자 잘못을 깨달은 제윤조도 다급하게 웃음을 거두면서 동의서의 긴급 연락처 부분을 살며시 가리켰다.
마연린이 시선을 돌려보니 ‘상대와의 관계’라고 적힌 오른쪽 칸에 두산이 진지하게 적어 놓은 ‘꽤 좋음’이란 글자가 보였다.
흐응.
마연린이 재빨리 웃음을 삼킨 덕에 코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10년 경험 있는 의사쯤 되어야 웃음을 자연스럽게 삼켜서 웃는 거 같지 않게 웃을 수 있다.
“다시 서명받아.”
마연린은 웃음이 터질까 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얼굴을 보고도 웃지 않으려면 15년 경력이 필요했다.
제윤조는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끄덕이고는 동의서를 다시 가지러 가는 척 나가서 신나게 웃고는 아예 환자 보호자를 찾아 두 사람의 서명을 모두 받았다.
폴리에틸렌 옥사이드 전해질 복용.
배변.
대변 검사.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첫 임무를 마친 여원이 마침 검사실을 지나다가 마연린이 환자 결장경 할 준비하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바라봤다.
능연도 비슷하게 검사실로 들어섰다.
“아직입니까?”
“곧이야! 곧 시작해.”
능연이 묻는 말에 마연린이 뜨끔한 듯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고, 그제야 여원을 발견한 능연이 물었다.
“원감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문제가 많아. 그래도 운리에서 도와준 덕분에 사람이 줄었어. 그래도 세분화는 좀 해야 할 거 같아.”
여원이 대답하는 말에 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감은 원래 구체적이고 세세한 작업이고 조사 후에야 발언권이 있는 표준적인 작업에 속했다. 능연이 직접 케어할 시간이 없으니 여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운화병원에서 능 팀은 원감 경험이 많은 편이니 마을 병원 원감 정도는 여원의 경험과 지식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능연이 직접 관여하고 참여해도 더 완벽하게 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게다가 팔채향 분원의 원감을 완벽하게 해내고 말고는 기술 문제가 아니었다.
세분화 작업도 운리 제약이 아니라면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만에 이 정도까지 해낸 것만 해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고 능연은 생각했다.
“여 선생님도 같이 하세요.”
능연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지시했다.
국제 기준으로 1인 결장경이 흔하지만, 설비나 기술 모두 떨어지는 팔채향은 여전히 전통적인 2인 결장경을 사용했다.
능연은 어차피 결장경을 좋아하지도 않고, 여원이 곁에 있으니 아예 그에게 넘겼다.
여원이야 당연히 바로 싱긋 웃으면서 메인 위치에 서서 마연린에게 명령을 내렸다.
“근육 주사 6542.”
1.414m에서 폭발하는 소리 같은 목소리와 기세였다.
“근육 주사 6542.”
마연린이 명령을 따라 반복했다. 메인 위치가 아니라고 해도 억울할 것도 없었다. 여원이 선배라 원래 상급 의사가 맞았다.
이어서 라카니소다민(racanisodamine)이 주입되었다.
그리고 여원은 1% 카인 코튼볼을 파이프에 쑤셔 넣고 2, 3분 기다리다가 어깨춤을 추며 손을 꼼지락댔다.
환자는 이미 모든 미련을 버린 모습으로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결장경 환자, 특히 남자는 기본적으로 마치 결장경 수술 트레이닝 반에서 단체 훈련을 받기라도 한 듯 표정이 모두 같았다.
힐끔 환자의 거친 얼굴을 본 여원은 그의 표정이 정상임을 확인하고 항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능연도 모니터를 바라봤다.
장시간 빈혈과 허약, 무기력이란 증상으로 쉽게 소화기관 출혈을 연상할 수 있었다.
환자의 복부가 딱딱하지도 않고, 압통이나 반발통도 없고 근육 긴장도 없어서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는 능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 환자는 능연으로서는 꽤 신선한 케이스였다.
“잠시만요. 뭐가 있는 거 같아요.”
모니터를 스친 누런 그림자에 능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여원이 허둥지둥 각도를 조정했다. 그도 결장경을 많이 한 것은 아니고 팔채향에서 쓰는 기구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정상인 거 같은데?”
여원은 장 내 구조를 살피며 말했다. 관장한 장 안은 매우 깨끗했다. 기본적으로 실핏줄이 가득한 살색 터널이라 여러 가지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일반인에게도 그렇게까지 비주얼 쇼크는 아니었다.
상행 결장 중반까지 살핀 여원은 출혈 등 문제가 없음을 확신했다. 장 내 해부구조라면 여원도 제법 자신 있었다.
그러나 능연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2인 결장경에서 집도의는 상하좌우를, 어시스트는 들어가고 나가는 방향을 맡았다.
환자의 가벼운 신음과 함께 마연린이 내시경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이상한 건 없어.”
여원은 최대한 내시경을 안정적으로 잡으려고 했지만 미칠 듯이 흔들렸다.
“내가 할게요.”
곁에서 대기하던 능연이 바로 여원의 자리를 대신했다. 왼손으로 아래 나사를 잡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돌리니 시야가 순간 넓어졌다.
“안으로.”
능연이 명령하자 마연린이 냉큼 시행했고, 여원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여원과 비교하면 능연이 조작하는 모니터 화면은 안정적이고 또렷했다. 시야도 의사들이 익숙한 각도가 되어 보기에도 편했다.
마연린은 곁에서 배우면서 내시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모니터에 다시 누런 그림자가 나타났다.
“똥 아닌데······.”
여원은 한눈에 알아봤고 능연도 답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빠르게 밀어 보세요.”
마연린이 속도를 살짝 올리자 능연은 각도와 빛의 방향을 다시 조절했고 모니터의 누런 그림자가 좀 더 또렷해졌다.
노랗고 납작한 대상(帶狀) 회충이었다.
스스로 몸을 교차하고 있는 회충은 밖에서 볼 수 있는 벌레보다 넓고 납작했다.
보이는 부분만 해도 길이가 4, 50cm가 넘었고 몸체가 장과 완전히 찰싹 달라붙어서 흐르듯 장을 따라 이동했다.
장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그 유유한 모습이 터널에서 보드를 즐기는 소년을 연상시켰다.
“기생충인가 봐! 세상에······.”
여원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책에서나 기생충을 본 적 있던 능연이 살짝 기억을 떠올리다가 동의했다.
“그러네요.”
여 선생님, 내시경은 잘 못 잡아도 기생충은 잘 알아보는군요.
“실험실에 대변 검사할 때 기생충 알 검사해서 유형 확인해 달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응. 근데 여기 실험실에 기계 한 대밖에 없던데? 요즘 기생충 같은 거 흔하지도 않고.”
“우리 병원에 기생충 케이스도 3년 전이 마지막이었을 걸.”
기억력 좋은 여원이 기억을 되짚으며 하는 말에 마연린이 혀를 끌끌 찼다.
“대단한 놈을 만났네요. 우리.”
그때 이미 걱정하는 표정으로 변한 환자는 움직이지도 못해서 겨우 고개만 치켜들고 물었다.
“뭘 보신 건가요?”
“기생충이요. 잡아내고 약 먹으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시고요.”
능연은 환자가 수술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를 다독였다.
할 일 없던 여원도 앞으로 다가가가, 침대에 누운 환자가 딱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물었다.
“평소에 생돼지나 날음식 드세요?”
“아니요.”
“돼지, 소, 양을 접촉하거나 아니면 돼지, 소, 양 배설물을 접촉한 적 있나요?”
여원이 기생충 표준을 따라 생활 이력을 질문하자 환자는 아랫배에 느껴지는 견딜 수 없이 묵직한 복통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집에 돼지 기르는데 돼지 똥 안 만져 봤겠어요? 농촌 생활은 당신네들이랑 다르다고요.”
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돼지 똥으로 채소도 기르고요?”
“가끔요.”
“그럼 그렇게 전염됐을 수도 있겠네요.”
여원은 몇 마디 더 물으면서 기록을 남겼다. 여행을 가지도 않고, 출국한 적도 없고 심지어 타지도 잘 나가지 않는 환자의 생활 이력은 기본적으로 단순했다. 집에서 돼지를 기르고 돼지 배설물로 채소까지 기른다면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포셉.”
계속 기생충을 뒤쫓던 능연은 회맹부(ileocecal region)까지 간 기생충이 회맹판에 오르려고 꿈틀거리는 틈에 재빨리 도구를 요구했다.
그 목소리에 여원이 냉큼 고개를 돌려서 이물질 제거 포셉으로 금빛 납작한 기생충 몸통을 재빨리 집었다.
장 안에서 쉴 새 없이 배회하던 기생충은 신속하게 몸을 움츠렸다. 합금 포셉을 부수기라도 할 것 같은 그 모습은 터널에서 청춘과 꿈을 찾던 보드 소년이 경찰차를 부수려고 시도하는 모습 같았다.
“바로 끌어낼 수 있겠어. 엄청 큰데?”
여원의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다.
모니터를 차지한 누렇고 납작한 벌레를 보며 마연린은 저도 몰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 크기도 크다. 대체 뭘 먹고 저렇게 자란 거야.”
“어쨌든 똥은 아냐.”
마연린을 힐끔 본 여원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세히 보면 꽤 귀여워.”
“어, 어디가 귀, 귀여워요?”
마연린의 목소리까지 흔들렸다.
“일단 색부터 귀엽잖아. 자연에도 이렇게 색이 선명한 동물은 많지 않다고. 도시에서 기르는 골든 리트리버도 얘하고 비교하면 평범할걸?”
여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몸 좀 봐. 부드럽고 탄력도 좋은 거 같아.”
마연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여원을 바라봤다.
오늘 여 선생은 작은 몸에서 강렬한 호기심으로 인한 파워까지 내뿜었다.
능연은 침착하고 느긋하게 기생충을 환자 몸에서 끌어냈다.
인체에서 나온 기생충은 외부 공기에 적응하기 어려운지, 힘겹게 몸을 웅크렸다.
모니터 밖에서 직접 보는 기생충은, 집을 벗은 달팽이가 1m 넘게 늘어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진지하게 잠시 바라보던 여원이 드디어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쩌죠?”
마연린은 더욱 온몸이 근질근질 괴로웠다.
“성충을 끌어냈으니 이제 알 처리해야지.”
여원이 매우 익숙한 듯 대답하고는 고개를 들어 능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도 내가 잘하는데, 내가 할까?”
능연은 당연히 안 될 게 뭐 있냐는 듯 바로 결장경을 마치고, 모든 미련을 버린 환자를 여원에게 다시 넘겼다.
여원은 신이 나서 조무사 한 명을 불러서 끌고 갔다.
“여보, 수술 잘 되고 있어요? 몸은 어때요? 견딜 만해요? 괜찮은 거죠?”
문밖에서 환자 보호자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