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채경은 이 주임을 따라 성큼성큼 팔채향 분원 구역으로 들어갔다.
“음. 이렇게 하지. 후원에 이 창고, 공공 위생 창고로 쓰기 딱 좋군.”
이 주임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공 위생은 초짜 의사에게 일할 원동력도 없고 일하는 보람도 없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상급 의사에게는 의미 있는 작업이어서 이 주임처럼 노련한 나이든 임상의는 공공 위생 이야기가 나오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했다.
채경은 본인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는 채 답답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 2층 구석 방, 안이 좀 어둡긴 해도 크기는 적당해. 소파니 뭐니, 다 밖으로 빼고 정리하면 쓸만할 걸세. 사무도 보면서 창고로도 쓰고. 팔채향 분원에서도 그 방은 우리한테 내줄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잘 꾸며 놓으면 그게 우리 첫 성과가 되는 거지.”
이 주임은 하하 웃으면서 뾰족하기로 유명한 자기네 골칫거리를 바라봤다.
병원이란 환경에서 가장 쓸모 있는 일꾼은 언제나 진취심 있는 젊은 사람이고, 그다음이 진취심 있는 중년이다. 과로사할 때까지 부려먹어도 상대는 끝까지 버틴다.
상대적으로 진취심을 잃은 의사는 정말로 부리기 힘들다.
채경의 직속 상사가 아닌 이 주임은 상대적으로 다정하게 그를 대했고, 지금으로서 유일한 부하인 그를 아끼는 마음까지 들어서 싱긋 웃었다.
“정 안 되면 병원 밖에 저렴한 상가를 차차선으로 두면 되지. 그런데 그런 곳은 좀 골치 아파서 말이지.”
“밖에 상가로 나가면 사람들이 우릴 가짜 의사로 볼걸요.”
채경이 결국 입을 열어 생각을 말하자 이 주임이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공공 위생은 원래 모든 게 만족스러울 순 없는 거야. 게다가 그건 최후의 선택이라니까. 팔채향 의사가 정 공간을 안 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해야지.”
“제 경험으로는 최후의 선택이 있는 선택지는 항상 그 최후의 선택을 골라야 하더라고요.”
채경의 입방정은 살상력이 충분했다.
가슴 가득 포부를 품고 뭔가를 만들어 낼 생각이던 이 주임은 하마터면 그 공격에 쓰러질 뻔했다. 화가 나서 욕을 퍼부으려고 하는 참에 고개를 돌려 마흔 넘은 선임 주치의의 얼굴을 보고는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다를 걸세. 공공 위생 일이 그래도 황채에 가서 농촌 의사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저는 원래 선택 문제에 약해서요.”
채경은 어느새 담담해졌다. 이 주임은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어 물끄러미 채경을 바라봤다.
다만, 이 작자가 어째서 마흔 넘어서까지 겨우 선임 주치의 자리에 있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이 주임은 원래 채경을 보내 팔채향 분원 사람에게 뭐라도 얻어낸 다음에 본인이 나설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자기 생각이 부족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채경을 그런 일로 보냈다가는 망쳐놓기에 십상이었다.
“됐네. 날 따라오게.”
이 주임은 심부름꾼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팔채향 병원 사무실로 찾아갔다.
도시의 큰 병원과 달리 팔채향 병원 원장은 별 권위도 없고 사무실은 더더욱 간소해서 큰 의국 안에 작게 세팅되어 있었다.
안쪽에 좁은 공간을 힐끔 본 채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자기 사무실도 제대로 없는 원장한테 창고랑 사무실을 내놓으라고 해봐야 소용 있을까요?”
“김 새는 소리 하지 말고.”
이 주임은 자기가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벌써 이 자식한테 익숙해진 건가?
“성립 GS 이병복입니다만, 원장님 계십니까?”
이 주임은 문을 두드리고는 의국 안으로 들어갔다.
“왕 원장님 출타 중이신데, 무슨 일이신가요?”
쭈글쭈글한 얼굴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고 이 주임과 채경을 바라봤다.
“응? 좌, 좌 선생? 여기서 뭐하십니까?”
깜짝 놀란 채경이 고함치자 이 주임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이?”
“운화병원 좌 선생입니다. 능 선생 치료팀이요.”
채경은 어찌 됐든 사회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좌자전을 소개했다.
“팔채향 병원에 사무가 복잡해서 제가 좀 도와주고 있습니다.”
좌자전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시골 위생병원 스타일에 익숙한 좌자전은 의국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굴었고, 오히려 팔채향 분원 원장이 허구한 날 코빼기를 보이지 않는 내과의처럼 굴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이 주임은 좌우를 둘러보다가 원래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라 그냥 할 얘기를 하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팔채향 분원에도 좋은 일이지요. 장소만 빌려줄 뿐, 병원 자체에서 돈이 나갈 일도 없고, 약품부터 의사, 모두 우리 성립에서 책임집니다. 며칠 뒤에 길이 뚫리면 소독약도 팔채향에서 쓸 필요가 없지요.”
이 주임은 좌자전 말고 의국에 있는 다른 두 의사도 들을 수 있게 의국 중간에 서서 이야기했다. 운화병원에서 방해한다면 운화병원이 앞서가기 전에 지체하지 않고 병원 밖에 상가를 빌려 일단 일을 시작해 버려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전화해서 능 선생한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좌자전은 이 주임의 표정을 못 본 것처럼 빙그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요.”
“논평 구 병원 팔채향 분원 일도 운화병원에 보고한단 말입니까?”
채경이 껄껄 웃으며 비웃었지만, 방 안에 사람은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좌자전은 바로 전화를 걸어 재빨리 상황을 설명하고는 몇 마디 대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 주임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안 되면······.”
“능 선생이 동의했습니다. 창고 쓰시랍니다. 사무실도요. 하지만 지금 인원이 부족해서 밖에서 온 사람 둘밖에 못 보내드리는데 괜찮겠습니까?”
좌자전은 빠르고 다급하지만 또렷한 말투로 설명했다.
잠시 멈칫했던 이 주임이 바로 웃어 보였다.
“능 선생 참 대범하군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주임은 바로 열쇠를 받아 신이 나서 돌아갔다.
바로 뒤를 따르는 채경은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고 속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너무 순조로운데. 이러다가 팔채향 분원이 산사태에 휩쓸리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