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은 팔채향 분원 정원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늘은 해안선처럼 푸르고, 구름은 갈매기처럼 하얗고, 병원으로 들어오는 할배들의 얼굴로 활짝 피어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어찌나 순조로운지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순조로웠던 게 언제더라. 맞다, 대입 고시. 채경은 모의고사보다 50점 낮은 점수로 순조롭게 인생 첫 큰 시험을 통과한 성과를 얻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입학 통지서를 받은 때를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의대에 가지 않았다면 이런 비참한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이렇게 발이 묶여서 빠져나갈 수 없는 직업이 또 있을까.
“표정이 왜 그래. 순조롭게 잘 되고 있잖아.”
이 주임이 싱글벙글 다가갔다.
공공 위생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좀 됐는데, 팔채향에서 이런 기회를 잡을 줄은 몰랐다.
이제 임상과 공공 위생은 별개의 노선인 시대였다. 임상과 공공 위생을 결합한 능력자는 이제 이 시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주임 역시 대단한 명의가 될 생각은 없었고, 공공 위생이든, 예방 의학이든 혹은 질병 컨트롤이든 뭐든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단순한 임상보다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쉬웠다.
“너무 순조롭잖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채경은 전과 같이 울상이었다.
“뭐가?”
“천재지변이요!”
채경이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 주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만 있다면 진작에 채경을 내다 버렸을 것이다. 길조 하나를 위해서라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이 막혀 있으니, 성립에서도 길조 하나를 위해서 헬리콥터를 띄울 수는 없었다. 이 주임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성립은 운화병원처럼 돈이 넘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 주임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리고 보니 운화병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넘쳤지?
“사무실은 정리됐나?”
이 주임은 구체적 업무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운리에서 고용해준 아주머니들이 소파 같은 건 다 빼냈습니다. 지금 청소하고 있을 거예요.”
“사무 가구는?”
“팔채향에서 일부 빌려줬고, 운리에서 일부 보내왔습니다. 충분해요.”
채경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아니, 잘······.”
채경을 칭찬하려던 이 주임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제 결혼도 몹시 순조로웠거든요.”
채경이 진중한 경고의 의미를 띤 말투로 이 주임을 돌아봤다.
“선도 순조로웠고요, 혼수, 예단, 예물 모두 순조로웠습니다. 결혼식 날은 날씨도 좋았고요. 구름 한 점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였죠. 아이 낳을 때는 또 얼마나 순조로웠게요. 그리고 아이는 또 알아서 우성 DNA를 타고 났······.”
“흠흠. 채 선생. 일 이야기하세. 소독은? 언제 준비되나?”
이 주임이 못 들어주겠다는 듯 헛기침하며 말을 잘랐다.
“도착했습니다. 창고에 있어요. 운화병원 응급센터 좌자전이 직접 가져다 놨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이라고?”
이 주임은 믿을 수 없어 했다.
“좌자전 말로는 능연이 우리 일을 지지한다는군요.”
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앵무새가 말을 배우듯 좌자전의 말투를 흉내냈고, 얼굴에 주름까지 있으니 더욱 비슷했다.
이 주임은 웃지 않고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죠? 이상하죠? 거봐요. 사실 가끔 운 나쁜 일도 일어나고 해야지, 사람이 모든 일이 순조롭길 바랄 수는······.”
“우린 우리 일 하면 그만이지. 능연이 지지하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네.”
채경은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내 희색을 드러냈지만, 이 주임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목표와 포부를 가지고 팔채향에 왔다. 그는 심지어 적대 받을 각오도, 발목 잡힐 준비도 하고 왔는데 눈에 보이는 지지까지 받으니 이 주임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채경은 실망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멀리 바라봤다.
이 주임 역시 그를 상대하지 않고 창고로 가서 직접 소모품을 체크했다. 소독약에서 컴퓨터, 각종 태그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성립이 홍보에 쓸 만한 규모로 완벽하진 않았지만, 팔채향 현재 상황으로는 이것보다 더 바랄 수도 없었다.
“좋아, 좋아, 좋아.”
이 주임은 기분이 격앙되어서, 창고를 지키는 제약 회사 직원도 부드럽게 대했다.
“아, 깜빡했군. 어느 제약 회사 직원이신지?”
“운리입니다. 저는 운리제약 맥순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제법 똑똑해진 맥순은 이 주임의 말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채경 때문에 짜증이 가득했던 이 주임은 맑고 경쾌한 목소리에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운리제약, 이번에 팔채향에서 큰일 하는 것 같더구만. 여기저기 도움이 되고 있더라고. 무슨 생각인 건가?”
“저희 사훈이 ‘서비스 중심’입니다. 능 선생이 출정 나왔으니 저희도 당연히 따라야죠.”
“그렇군. 보니까 물자도 충분한 것 같은데, 연락해서 물품 준비 두둑이 해두지 그러나. 나중에 길 뚫리면 한 번에 보낼 수 있게 말이지. 뭐, 운화병원하고만 거래하겠다면야 내 말 못 들은 셈 치고.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안심하세요.”
맥순은 눈을 반짝이며 이 주임 위챗을 추가하고는 그를 배웅하고 돌아서서 회사 단톡방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팔채향 원조 왔다가 큰 건 하나 물었지용!
-얼마나 큰 건인데?
-능 선생님이 가져다준 거겠지?
-부럽네요. 능 선생님이 알아서 준 거잖아요.
맥순은 한참 웃다가 신이 나서 가방 사진을 세 장 올리면서 메시지도 보냈다.
-뭐로 살까요?
단톡방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능 선생님 진짜 개 잘생에 존멋이야.
-엉엉엉, 나도 가방
-그래서, 맥! 어디 비즈니스인데? 뭔데?
맥순은 보란 듯이 ‘성립’이라고 입력하고 계속 메시지를 썼다.
-구체적인 건 아직. 다들 비밀 지켜. 아이고, 그만 가야겠다. 능 선생님 식사 준비해야지.
단톡방에 당연히 글이 쏟아졌다.
맥순은 핸드폰을 거두고 희희낙락 준비하러 갔다.
오늘 저녁은 소고기 감자볶음인데, 토종 감자에 토종 쇠고기, 냄비도 여기서 샀고 요리사도 여기 출신으로 골랐다.
식당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팔채향 식당에서 내놓는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요리가 나오리라.
그룹 주방장이 동영상으로 현장 지도해 주면, 오늘 저녁은 전칠 아가씨의 기본적인 입맛은 맛출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순아, 오늘 저녁은 운리에서 준비한다고.?”
좌자전이 싱글벙글 주방에 나타났다.
“네네. 메인은 소고기 감자볶음이고요. 소고기 피망볶음, 꽁바오지띵(튀긴 닭고기와 땅콩·고추 등을 넣고 매콤하게 만든 요리)도 있어요.”
“요리를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는 없고, 사람 더 추가되어도 되는지 물어보러 왔어.”
“몇 사람이요?”
“두어 명? 성립 이 주임, 선임 주치의 하나, 그리고 하 주임이라고 올지 안 올지 모르겠네. 공공 위생 일하느라 고생이라고, 능 선생이 잘 챙겨 주고 싶은가 봐.”
“능 선생님 부탁이라면 당연히 문제없죠.”
맥순이 단호하게 OK 사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