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능연을 따라 ICU 회진을 돌고 온 연문빈은 제복 차림 엔지니어들이 너스 스테이션에서 이리저리 측량하는 걸 발견했다.
“뭐 하는 거예요?”
궁금한 듯 보던 연문빈이 너스 스테이션에 기대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큰 병실 만든다고요.”
오늘 너스 스테이션에 남은 간호사는 이제 막 취직한 어린 간호사여서, 폭신폭신한 목소리로 대답도 부드러웠다.
연문빈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목소리 좋아!
진짜 좋다!
연문빈은 오랜만에 아킬레스건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간호사의 얼굴을 다시 보니 새하얀 얼굴이었고 오른뺨에 미인점도 있었다. 미인점이 대체 어디 있는 점인지는 몰라도, 관심도 없고, 어쨌든 미인 얼굴에 있는 점은 미인점이 틀림 없다.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연문빈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너스 스테이션에 있던 선임 간호사가 그 말을 듣고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연 선생님, 그 대사 전에도 들은 거 같네요.”
“아니 대사는 무슨, 그냥 인사말이 다 그런 거지. 인사말은 원래 수술실 시트 같아서 좀 비뚤게 깔든 제대로 깔든 다 같아요.”
말발이 약한 편인 연문빈도 평범한 선임 간호사와의 대화는 능수능란하게 넘길 수 있었다.
작은 방에서 약을 점검하던 선임 간호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 간, 연문빈 선생 조심해. 남자는 말이야, 돈 생기면 나빠져.”
“아아. 연 선생님 금수저구나.”
“아니, 자수성가요. 어때요? 금수저처럼 생겼어요?”
연문빈이 뿌듯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머, 자수성가라기엔 젊으셔서요.”
마 간호사는 꽉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생긋 웃었다.
“내가 잘못했네요. 너무 젊고 돈도 많고.”
마 간호사의 목소리에 연문빈이 둥둥 떠올랐다.
족발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초반에는 숨길 필요가 없었고, 지금은 역시 숨길 필요가 없었다.
능연 사람인 그는 곽 주임이 아니면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사적으로도 누군가 자기를 괴롭힐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능 팀에서 탕법을 두 번째로 잘하는 의사였고, 딱히 엄청난 돈과 권세를 노리지 않으면 그 스킬만으로도 평범한 의사 생활을 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연문빈 지금 경력으로는 다른 삼갑병원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지역 정상급 병원은 어려울지라도 일반적인 삼갑병원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 간호사는 그윽하게 연문빈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제가 맞춰 볼게요. 병원에서 파는 연 씨 족발, 그게 선생님 사업이겠네요?”
병원 진료과는 아무리 커도 백몇 명이고, 대부분 간호사 위주였다. 운화병원 응급센터 규모는 이미 초대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5개 치료팀에 불과했다. 의사 서른 명 중에 밖에서 떠도는 훈련의도 포함되어 있으니, 새로 온 간호사는 딱히 수소문을 하지 않아도 병원 내 의사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문빈은 목을 가다듬으며 그제야 겸손을 떨었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맞아서 그렇게 됐죠. 내 손맛을 사람들이 좋아해 준 게 제일 크죠, 뭐.”
“영업 신고하는 거 잊지 마세요.”
“했죠. 진작에 했죠. 위생 허가도 있어요. 이거 정식 사업이라고요.”
“정식 직업이 있어도 그래도 돼요?”
“엄마 명의로 했죠.”
“아하, 괜찮네요.”
마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입원 신청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연문빈은 순간 조금 멍해졌다.
이렇게 대화종료? 내가 말실수했나? 호감도가 올라간 거야, 내려간 거야?
다시 대화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연문빈의 능력 밖이었다. 아까 지적당했듯이 그 진부한 대화 시작 대사도 몇 번이고 연습한 후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낸 것인데. 게다가 너무 자주 써서 정말로 진부했다.
“그럼 이만 수술 갑니다.”
잠시 더 머뭇거리던 연문빈은 더 뭘 어째야 할지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인사하고 고개 숙인 채 수술실로 향했다.
어차피 목소리 좋은 간호사는 도망가지 않고 거기 있을 거고, 게다가 수술실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연문빈은 점점 더 걸음을 서둘렀고, 푸른 바닥이 깔린 탈의실이 보이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수술실이 좋았다. 리모델링된 색도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고 좋고, 온도도 땀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고, 메스로 구멍을 내고 바닥에 피가 흥건해도 심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인간관계는 더욱 훌륭했다.
“연 선생 왔냐?”
회진을 마친 장안민도 수술실로 왔다.
부주임 의사가 된 후로 관리하는 침대가 눈에 띄게 늘었지만, 수술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능연이 권한을 내줌에 따라, 하급 의사의 스킬도 올라가서 장안민이나 연문빈 모두 집도할 기회가 많이 늘었다.
오늘 수술도 장안민이 집도하고 연문빈이 퍼스트 어시를 맡았다.
연문빈이 일찍 온 걸 본 장안민은 기분이 좋아져서 껄껄 웃었다.
“연 선생, 오늘 담낭염 환자,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셔. 수술 끝나고 소개해 줄게. 알아두면 나중에 아이 입학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제가 애 낳을 때쯤엔 은퇴하셨겠네요.”
기분이 안 좋은 연문빈은 말도 날카로웠다.
“선생님이 퇴직하셔도 후임은 있을 거 아냐. 어쨌든 합병증으로 돌아가시는 것만 아니면 우리 도리는 다 한 거니까.”
장안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담낭염으로 사람 안 죽어요.”
“퉤퉤퉤. 야, 실력 안 좋으면 무슨 병이든 합병증으로 사람 죽일 수 있거든!”
“당장은 아니고요?”
짐짓 그렇게 말하는 장안민의 모습이 웃겨서 연문빈은 기분이 조금 풀렸다.
“실력이 너무 떨어져도 오히려 사람도 못 죽이지. 됐다. 헛소리 그만하자. 소독이나 하고 시작합시다.”
“네.”
우울한 듯 대답하는 연문빈의 말에 장안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안 좋냐?”
“기분 안 좋을 자격도 없네요. 연애 문제는 정말 어려워요.”
“무슨 일 있구만?”
어쨌든 경험자인 장안민은 유심히 연문빈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춘기냐? 장 선생 과외 들을래?”
“방법은 있고요?”
연문빈이 무시하듯 장안민을 바라봤다.
“제가 알기론 선생님의 연애 문제나 나나 거기서 거긴 걸로 아는데요.”
“흥. 그래? 난 거기다가 결혼할 때 너보다 가난하고 앞날이 캄캄하고 몸매도 너보다 별로였지.”
장안민은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난 결혼했지.”
연문빈은 멈칫하다가 잠시 후 고분고분 물었다.
“무슨 방법입니까?”
장안민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뱉으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파블로프 공략법이라고 들어봤냐?”
“파블로프요?”
장안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한 시간에 종을 울리고 개한테 먹이를 주는 거야. 그럼 개는 조건 반사가 생겨서 앞에 음식이 없어도 종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게 되지.”
“그건 알지만, 여자랑 무슨 상관인데요. 여자가 침 흘리는 건 보고 싶지 않은데요.”
장안민이 껄껄 웃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야. 내 말 믿어.”
- 마 간, 족발에 이름 써서 냉장고에 넣어뒀어요.
연문빈이 위챗에 느릿느릿 글을 입력했다.
마 간호사의 위챗을 얻으려고 연문빈은 막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수치로 환산하자면, 간호사팀 선임 간호사들에게 족발 스무 개 정도 바친 정도?
물론,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는 연문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소문이 안 좋을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면 진료과에 족발을 독점 납품해도 문제없는데 그까짓 돈이 문제일까.
딩동, 연문빈의 핸드폰이 울렸고 열어보니 마 간호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디에 두셨어요? 무슨 모양 도시락이에요? 이름 써진 건 없는데요.
연문빈은 손에 쥐고 있던 악력공을 놓고는 힘겹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족발 위에 새겼지, 도시락이 아니라. 잘 찾아봐요. 냉장고에 족발 도시락은 하나뿐일 거예요.
마 간호사의 위챗은 한참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연문빈은 뿌듯한 듯 웃었다.
놀랐지? 감동했지? 미친 듯이 좋지?
익은 족발에 글자를 새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 연문빈은 결국 방법을 생각해냈지.
연문빈은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 마 간호사의 호감도가 높아지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족발 위에 궁서체로 새겨진 이름을 보면 호감이 폭발하겠지!
“연! 심장 외상 환자 왔어.”
간호사 왕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알렸다.
연문빈은 능연이 자주 부리는 만병통치약 같은 조수라 무슨 수술에든 어시를 섰다. 이제 심장외과로 발전하려는 능연은 그쪽으로 익숙한 어시가 없으니 당연히 연문빈을 지목했다.
왕가 역시 능 팀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개척 인원이었다.
“응. 지난번 외상이랑 비슷한 거야?”
“그럴걸? 오늘은 수술 참관하는 사람도 있어. 조심해서 해.”
“어느 급인데?”
연문빈은 그다지 개의치 않고 물었다.
1번 수술실에 참관실이 생긴 이래, 능연 수술을 보러 오는 의사와 고위층이 끊기지 않아서, 능 팀 의사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능연은 수술할 때 흔한 외과의처럼 나불나불대지 않아서 평소에 수술할 때부터 신중하게 대화하는 데 익숙해서 조금만 조심하면 대부분 참관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왕가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당부한 것뿐이었다.
“곽 주임님은 오실 거고, 어쩌면 주 부원장님? 다른 분은 모르겠다. 외국 의사도 이미 떠났고, 능 선생님이 심장 수술을 독립해서 하겠다니까 윗분들이 궁금해하는 거겠지?”
“아, 그럼 됐네. 능 선생이 하는 수술인데 걱정할 게 뭐 있어. 외국 의사 있을 때도 수술은 능 선생이 했는데. 저기······ 왕가야. 그 파블로프 공략법 말이야, 하는 게 낫겠냐? 안 하는 게 낫겠냐?”
같은 치료 팀 의사와 간호사는 한 감옥에 갇힌 신세나 마찬가지로 하루에 예닐곱 시간, 심지어 열 시간도 같이 있으니 정말로 못 할 얘기가 없었다.
그래서 같은 팀끼리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공유했다.
연문빈의 파블로프 공략법도 그 바닥에선 비밀이 아니었다.
왕가는 한 번도 그의 계획에 입을 댄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놀란 듯이 물었다.
“아직 안 했어?”
“아직이지. 며칠이나 됐다고. 파블로프도 보름은 걸렸겠다.”
연문빈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 보름이나 하려고? 누가 일주일 넘게 족발을 먹는다고. 안 질리냐?”
“아······. 이런 허점이 있었네.”
연문빈이 고민하는 큰 회사 CEO처럼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자 왕가는 어이없어졌다.
“존재 자체가 허점이지. 이 계획도 구멍이고!”
“에이,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아이고, 됐다, 환자 오겠다. 가 봐야지.”
연문빈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아래층으로 내려가 묵묵히 의자에 앉아 구급차로 오는 심장 외상 환자를 기다렸다.
운화 같은 도시에 일 년에 심장 외상 환자가 한 열 건 정도 발생하는 건 정상 범위 안이었다. 환자가 살아서 병원에 도착하기만 하면 대부분 살아남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예전에는 어려웠던 심장 외상이 지금은 심장외과 초짜 의사가 연습할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연문빈, 환자 기다리나?
강 주임이 슬그머니 연문빈 곁에 나타났다.
“강 주임님? 여긴 어쩐 일로.”
연문빈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응급센터 일원인 연문빈은 콜럼버스가 인디언을 경계하듯 강 주임을 경계했다.
“지나가다가 와봤지. 심장 외상 환자를 건졌다고?”
강 주임이 싱긋 웃으며 상황을 떠보는 모습에 연문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뭐가 어때서. 내가 뺏어 갈까 봐?”
강 주임이 껄껄 웃었다.
“뺏으시려고요?”
연문빈이 나지막이 묻자 강 주임은 순간 화가 나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뺏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묻는 거냐?
“왔어요.”
간호사가 상기시키는 말과 함께 구급차 사이렌이 들렸다.
강 주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러운 듯 연문빈을 바라봤다.
운화병원 심장외과는 전에는 가끔 심장 외상 환자를 받았다. 응급센터에서 심장 수술은 못 하니 심장 외상 환자를 바라거나 기다리지는 않았다.
강 주임이 직접 응급으로 들어오는 구급차를 기다린 것도 정말 오래전 일이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환자를 맞이한 연문빈은 바로 날 듯이 수술실로 달려갔다.
당연히 일분일초가 아까울 때였다.
머뭇거리던 강 주임 역시 수술실로 따라갔고, 참관실 문 앞에 도착하니 이미 방이 반쯤 차 있었다.
“아이고, 강 주임 왔구만. 어서 들어와, 어서.”
강 주임을 본 곽종군은 과할 정도로 반기면서 말을 이었다.
“주 원장님, 보세요. 우리 강 주임이 이렇게 차세대 의사들의 성장에도 관심이 많답니다. 강 주임, 자자 소개하지. 의사들이야, 자네가 다 알고. 이분은 왕전문 씨라네. 여기는 왕전명 씨.”
강 주임은 곽 주임에게 붙들려서 고양이 손에 놀아나는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곽 주임이 이렇게 열정적인 걸 보니, 언제든 구원 투수로 투입하려고 하는 게 분명했고, 그 생각에 강 주임은 정말로 언짢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