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호야.”
왕장용이 다시 올라왔을 때, 진만호는 벌써 맞은편 영감과 신나게 대화 중이었다.
진만호는 웃으며 왕장용에게 손짓했다.
“차 친구를 만났어. 왕 선생님이셔. 정산소종(正山小種: 중국 홍차의 일종) 이야기해주시던 중이었어. 아, 같은 왕씨네. 얘는 왕장용이에요. 얘도 같은 룸메이트고요.”
“아, 그 기숙사는 다들 영재군요. 왕 선생 아까 아래서 재활 치료하던데, 굉장히 잘 하고 줄도 많이 섰더군요.”
왕전문의 칭찬은 왕장용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었고, 왕장용은 신이 나서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찻잔을 잡았다.
“하구 주민 아니시죠?”
왕장용은 쭈글쭈글한 왕전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칭찬했다.
“그렇게 안 보이나?”
“네.”
왕장용은 요 며칠 계속 하구 사람을 접하고 있었다.
운화 시에서 한때 쓰레기를 배출하던 통로였던 하구에 사는 왕전문 세대 사람은 예전엔 대부분 저소득층이었고 학력도 낮아서 돈을 버는 것도 기껏해야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좌판 장사였다.
능결죽 세대가 되어서야 가정 형편이나 생활 수준이 대폭 좋아졌다.
왕전문은 재킷 차림이었지만, 부드러운 재킷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이 어쩌면 새것일지도 모르고 아무리 봐도 저렴해 보이진 않았다. 옷이 날개라고, 왕전문의 옷차림으로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까지 알 수 없다 쳐도 절대로 하구 사람은 아니었다.
왕장용이 며칠이나 하구 진료소에서 재활 치료를 했지만, 이렇게 돈 많아 보이는 영감님이나 노마님은 본 적이 없었다.
돈 많은 영감님과 노마님이 한 번에 25위안에 연연할 리도 없고, 그 정도 되면 고학력에 실력이 뛰어난 한의원 같은 곳으로 간다.
“젊은 친구가 보는 눈이 있군. 능 선생 보러 온 게 맞네.”
왕전문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바로 말을 돌렸다.
“그럼 왕 선생은? 왜 하구 진료소에서 재활을 하는 건가.”
“처음엔 능연을 도우러 왔는데 단골 환자가 생겨서 그만두기가 좀 그래졌어요.”
왕장용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병원에서 그렇게 오래 일했어도 그를 지정해서 오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
요즘 병원 입원 병동은 회전율이 높은 편이었고, 재활 치료하는 환자라고 해도 빨리 나가는 사람은 빨리 나갔다. 그리고 새로 오는 환자는 무의식적으로 주임이나 치료 팀 책임자를 원하고, 완쾌나 다른 진료과로 트랜스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나 조금 적응되어서 자기 담당은 주치의나 침대 관리 의사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하구 진료소는 달랐다. 이곳에서 재활하는 환자는 왕장용을 불러야 할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왕장용이 진만호를 불러다 자랑하고 싶은 포인트였다.
“왕 선생!”
잠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벌써 밑에서 왕장용을 찾았다.
“아이고. 가봐야겠네요.”
왕장용은 미소 지은 채 엉덩이를 치켜들고 도도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진만호는 그런 왕장용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졌다. 의문의 1패를 당한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왕전문이 따라준 차를 묵묵히 마셨다.
“사이가 참 좋은 모양이군.”
왕전문이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서로 자랑하는 친구 사이는 건강한 관계다. 십 년 동안 연락 없다가 갑자기 연락하는 친구는 일반적으로 복수를 하러 오는 것이고.
진만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랑하는 거 봐줄 수밖에요. 저는 아직 로테이션 중이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그렇게 차를 마시는 동안 왕장용은 한가해지면 위에 올라와 자랑 한 판하고, 그렇게 세 번 반복하는 동안 왕장용이 통쾌함에 몸을 부르부르 떨 때, 능연이 서쪽 건물에서 나와 알콜겔로 손을 닦으며 위로 올라왔다.
“수술 끝났어?”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찻잔을 든 왕장용이 능연을 향해 손짓했다.
“오늘 건 다 했어.”
능연은 티테이블에 앉은 다음에야 왕전문을 발견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었는데. 안 그래, 만호야?”
왕장용이 웃으면서 진만호를 툭 쳤다.
“내가 일찍 온 거지.”
진만호는 왕장용에게 호응하지 않고 보란 듯이 대답했다.
“아이고, 만호 너 사회에 물들었구나. 그래그래, 그렇게 말하는 게 맞지. 능연, 너 만호 말하는 것 좀 배워라. 너는 왜 발전이 없냐.”
“어떻게 말해야 하는데.”
“적어도 왜 늦었다 얘기하고 상황도 설명하고,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지.”
왕장용이 흥분해서 능연을 지휘했다. 그러자 능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환자 아킬레스건 수술하는데, 어시가 실수로 힘을 너무 줘서 한 번에 혈관 다섯 개를 끊어 놓았어. 그리고 모세혈관을 엄청나게······. 예후 때문에 혈관 봉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
“됐다. 그런 상황이면 사과할 필요 없네.”
왕장용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니들 서전은 시간이 너무 자유롭지 않아. 나 봐라, 재활은 시간도 정해져 있고 수입도 나쁘지 않잖냐.”
왕장용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래층 25위안 팻말을 가리키며 현장에서 자랑쇼를 펼쳤다.
어쩌면 외부 사람이 있어서 왕장용의 쇼가 오늘 유난히 수치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일러문 변신 장면인 줄 알 정도로.
왕전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짓이야!
진지한 이야기 하려는 타이밍에.
“왕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능연이 차를 마시며 왕전문에게 물었다.
“아, ICU 얘기로.”
말이 나오자 왕전문은 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협상 회의 때 자세를 취했다.
“곽 주임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는 나눴네. 운화병원과 응급센터를 도와 새로운 ICU를 만들고 싶네. 다만 그 전에 구체적인 건 능 선생하고 확인하려고. 어찌 됐든, 내가 그 큰돈을 쓰려는 건 다 능 선생 때문이니까.”
왕전문의 말투는 진지했고, 설명은 더욱 자세했다.
“어, 나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왕장용과 진만호는 서로 마주 봤고, 왕장용이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교실, 운동장, 가로수길, 식당, 옥상, 기숙사······.”
진만호의 말투 역시 똑같이 침착했다.
다른 환경, 같은 장면.
“초기 계획은 침대 8개짜리 ICU라네. 상응하는 설비와 기기를 넣을 것이고. 곽 주임 말이 병원과 진료과에서 비용을 일부분 내겠다고 하네.”
“기구 설비는 원칙적으로 입찰을 할 걸세. 현금을 기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설비와 기기를 바로 기증할 수도 있지. 능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고용 문제나 의사 배정은 전체적으로 운화병원에서 담당할 걸세. 곽 주임이 관여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 그래도 능 선생이 바라는 게 있다면······.”
몇 마디 만에 왕장용과 진만호는 눈앞에 영감은 심심해서 산책 나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능연에게 큰 선물을 하러 온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능연은 전혀 그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굴어서 답답해졌다.
다만 능연의 룸메이트 생활을 그렇게 오래 한 왕장용과 진만호 역시 능연의 천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런 큰 선물에 연연했다면, 진작에 맥라렌을 타고 리처드 밀을 찬 여자들에게 홀랑 낚여갔을 것이다.
“능연아, 새로 생기는 ICU에 빈자리 있으면 나도 기회 주라.”
이야기를 듣던 진만호가 속이 근질근질해서 그렇게 말했다.
“ICU 하려고?”
능연이 놀란 듯 휙하고 진만호를 바라봤다.
병원에서 ICU 의사는 과로로 유명했다. 물론, 수입은 평균을 훨씬 웃돌지만, 진만호는 돈이 가장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진만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ICU를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줄곧 ICU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을 뿐이었어.”
“그래.”
능연은 우선 승낙한 다음 왕전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요즘 능연의 위치로 빈번히는 아니더라도 초짜 의사 자리 하나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겠네. 그럼 병원에서 잡음이 나지 않도록 진 선생 문제는 내가 요구하는 걸로 처리하지.”
왕전문도 대번 승낙했다. 이런 끈이 있으면 앞으로 능연을 바로 찾아가는 것보다 편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