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운 주 선생은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 들어온 게 없는지 확인했다.
평소엔 이 시간에 전화가 가장 많이 왔다.
야간 약 처방을 묻는 전화, 야간 수술을 확인하는 전화, 야간 듀티표를 확인하는 전화 등등등, 보통 이 시간에 확인한다.
오후쯤 받은 환자를 모두 처리하고 상태가 안정되는 날이 밤새 잘 잘 수 있는 날이었다.
물론, 주 선생의 당직날은 자주 그런 날이 된다.
그러나 주 선생은 밤새 잘 자는 게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직할 때 잘 자고 싶은 의사는 더 많은 노력과 지혜 그리고 운을 투자해야 한다.
당직설 때마다 주 선생은 환자의 기록철을 대충 넘겨보고 환자들의 상태에 맞춰 사전 준비를 한다. 약도 사전에 처방하고, 상황이 안 좋아 보일 때는 트랜스가 가능하면 트랜스 보냈다. 그 밖에 제사도 무척 꼼꼼하게 챙겼다. 특히 의국과 너스 스테이션에 있는 과일을 꼼꼼히 챙기면서 혹시라도 잘못된 품종을 먹는 초짜 의사와 간호사는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 문제는 수간호사와 당직 간호사 모두 주 선생 편에 서 있었다.
사실, 많은 간호사들이 주 선생의 당직 규율과 풍속을 존중하고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한참 전화를 노려보던 주 선생은 그래도 전화가 울리지 않자 드디어 못 견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개인 핸드폰을 꺼내 병원용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병원용 핸드폰이 보란 듯이 울렸다.
“문제는 없는데, 왜 이러지.”
주 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두 대를 원래 위치에 놓고 다시 누워서 잠을 청했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잠이 안 와!”
주 선생은 다시 한숨을 내쉬면서 또 얼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능연이 와있는데, 수술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왜 이렇게 뭔가 찝찝하지. 나 피해 망상인가?
그는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의사는 평소에 핸드폰이 울리는 걸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핸드폰이 계속 울리지 않는 것도 무서웠다.
주 선생은 옷을 입은 채 침대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가 3분 후에 다시 화들짝 일어나서 핸드폰을 힐끔 보고는 결심한 듯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닛 안은 거의 빈 상태인데 맨 밑에만 노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뒤를 돌아 새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를 본 주 선생은 결국 의자 앞에 앉아 노란 상자를 꺼냈다.
청국장 황어!
운화병원 응급센터 비밀 무기였다.
이건 정말 지극히 드문 경우에만 주치의들이 먹는다.
주 선생은 렉 걸린 듯한 핸드폰을 다시 한번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청국장 황어 깡통을 열었다.
그때, 침대에 널브러진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주 선생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도 대지 않은 절임 생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단단히 좁혔다.
불길해!
주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 선생님.”
전화 너머에서 레지던트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일러 폭발 사곱니다. 환자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주 선생의 표정은 말도 못 할 정도로 복잡해졌다.
조금만 통조림을 일찍 열 걸 그랬다는 후회, 그리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 같은 마음, 그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가장 많았다.
전화를 받은 3초 후, 주 선생은 바로 긴장했다.
“얼마나 큰 보일런데?”
“예? 크기요?”
레지던트가 멍해져서 물었다.
주 선생은 침착하게 옷매무새를 고치고 생선을 한 입 먹고는 핸드폰을 고쳐쥐었다.
“600조 와트 이상 보일러 폭발이면 굉장히 중대한 사고라서 우리 병원 하나로는 감당 못 해. 그러니까 얼마나 크냐고. 총 부상자 몇 명? 환자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대?”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환자는? 몇 명이나 오고 있냐고.”
“음, 구급차 4대로 8명이요.”
“중상 환자는?”
주 선생은 평소에 일단 호통치고 보던 식이 아니라 상대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물었다.
“6명 넘는 것 같습니다. 수술실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상대 레지던트도 드디어 진정이 된 듯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바로 갈게.”
거기까지 들은 주 선생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곽 주임님한테 전화할게. 너는 각 진료과 협진 소환해.”
“어느 진료과요?”
전화 너머 레지던트가 또다시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주 선생은 화를 참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신경외과, 정형외과, 흉외. 협진 콜 할 때마다 노트해놓고 생각 정리되면 순서대로 할 일 해!”
“아, 네.”
전화를 끊은 주 선생이 곽종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동시에 응급센터에 남아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였다.
능연은 망설임 없이 의사들 맨 앞에 섰다.
삼선 의사가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능연이 당연히 현장을 지휘했다.
“구급차 5분 뒤 도착한답니다.”
접수 간호사가 재빨리 다가와 보고했다.
현장 의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5분은 긴 시간 같아도 구급차가 몇 대나 도착할 때는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중상 인원은요?”
능연이 물었다.
“6명. 4명은 경상. 구급차 두 대 더 오고 있답니다. 현장에도 아직 부상자가 있고요.”
접수 간호사의 대답에 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진료과 선생님들은요?”
“당직 선생님들한테 통보했어.”
“최대한 많이 오라고 하세요.”
능연이 노련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때, 다급하게 달려오던 주 선생이 핸드폰을 쥔 채 의아한 듯 능연을 바라봤다.
주 선생이 아는 능연은 ‘다 내가 할 거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대한 많이 부르라고?
다른 진료과 의사는 응급센터 초짜 의사들처럼 고분고분 그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주 선생은 갑자기 심장이 벌렁댔다.
들을까?
위만은 작은 가방을 들고 미친 듯이 뛰다가 응급센터라는 글씨가 보이자 그제야 멈춰섰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시간을 보고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화병원은 응급센터 설립 후 긴급 구조에 대한 조건이 더 까다로워져서, 전에 있던 10분 한계선은 바뀌지 않았지만, 8분 임계선을 하나 추가했다.
실제로 각 진료과 의사들로서는 2분만 짧아져도 부담이 굉장히 커진다. 전화를 받으면 바로 응급센터로 달려가야 하고 중간에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미친 듯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위만은 비뇨기과 오늘 당직 주치의로, 요로결석 환자 보호자에게 상황 설명하고 나니 시간이 촉박해진 데다가 엘리베이터 타이밍을 맞추기 힘드니 아예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내가 오늘 당직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아까부터 마음 아파하며 기다리던 마연린이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안 늦었지?”
일 할 때는 매우 진지한 위만은 마연린을 보고도 공적인 태도로 물었다.
“응.”
마연린은 바로 대답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공업단지 보일러 폭발 사고야. 지금 중상 환자 6명 바로 올 거야. 뒤에 더 있을 거고.”
“능 선생이 오늘 당직이라 다행이네.”
위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맨 앞에 서 있는 능연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비뇨기과에선 자기만 온 거야? 삼선엔 연락했지?”
마연린이 다정하게 물었다.
“당연하지. 우리 주임님도 오실 거야.”
위만은 눈을 찡긋하며 마연린을 바라봤다.
“쪼랩 레지던트가 주치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내가 쪼랩일 리가, 알면서.”
마연린 역시 불끈해졌다. 마연린이 불타오르는 걸 본 위만이 곁으로 바짝 다가가서 나직이 속삭였다.
“이번 주에 수업이 적어서 하루 땡땡이 치고 집에 있어도 돼. 자기도 하루 휴가 내.”
한때 이 뜨거운 여인에게 지배당했던 공포감을 잠시 잊은 마연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능 선생한테 휴가 내는 게 쉽지가 않아.”
“능 선생이 말이 없어서 그렇지 속정은 깊잖아. 하루 휴가 내고 나랑 같이 있는다고 해.”
위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오늘 이렇게 큰 사고가 일어났으니 자기랑 나랑 다 엄청 구를 텐데, 나중에 휴가 내는 건 당연하잖아.”
“알았어. 좌 선생님하고 조절해볼게.”
마연린은 기대 조금, 긴장 조금, 그리고 조금 다행이기도 하다고 느꼈다. 일단 하룻밤을 새우고 나면 약을 먹으란 소리를 들어도 그렇게 쪽팔린 일이 아니리라.
위만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피었다.
하룻밤을 새웠으니까, 약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곤란해하지 않겠지.
약 먹은 뒤의 마연린을 생각한 위만은 온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위 선생님.”
비뇨기과 레지던트 하나가 역시 헐레벌떡 달려왔다. 환자한테 붙잡힌 바람에 이선인 주치의를 먼저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레지던트는 사정이 있었긴 해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옷 갈아입고 준비해. 오늘 엄청 힘들 거야.”
하급 의사 앞에선 위만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레지던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연린을 바라봤다.
“중상 환자가 여러 명이라고요?”
“네.”
마연린은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시작합니다. 상황이 어떤지 아직 잘 몰라요. 준비 단단히 해두셔야 할 겁니다. 능 선생이 지금 여러 진료과 의사를 모두 소환했어요.”
위만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음경 파열, 요도 파열, 신장 외상 모두 불가피할 거야. 바로 진료과에 통보해서 기구랑 소모품 준비하고. 보일러 폭발이니 음경 환자가 많을 거야.”
“예······.”
레지던트는 다리를 조이고 전화하러 갔다.
마연린 역시 양 다리를 조이면서 120%로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