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 느낌 어때?”
연문빈은 새벽 6시에 병실로 와 침대를 두드리며 정의로운 학생을 깨웠다.
“괜찮아요. 오늘은 많이 아프지도 않네요.”
눈을 뜬 이수명은 팀에서 가장 거친 연문빈임을 보고는 냉큼 대답했다. 연문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든 패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가스는 어제 배출했고. 맞아?”
“네.”
“음. 나중에 찍은 CT 확인했어?”
“그냥 찍기만 했는데요.”
이수명은 멈칫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환자면 찍고 나서 확인하는 게 좋아. 찍는다고 다가 아니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명 감독인 줄 알겠네.”
연문빈은 벌써 깨어 있는 두 여학생을 보며 모쏠답게 속으로 초조해했다.
“사진은 찍긴 했는데 보지는 못했어요.”
“음, 그럼 무슨 문제 있는지 직접 봐.”
연문빈은 그렇게 말하며 패드를 이수명에게 내밀었다. 조금 전에 침대가 일으켜진 바람에 살짝 몸을 세우고 있던 이수명은 다시 멍해졌다.
“제가 보라고요?”
“3학년인데 아직 영상학 시작 안 했어?”
연문빈이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그러면 안 되지. 운대 학생은 어딜 가든 운화병원 얼굴인데. 능 선생 좀 봐봐. 실습생 시절에 수술을 했다니까. 지금은 벌써 간 수술을 천 건도 넘게 했고.”
“조금밖에 안 배웠어요. 이제 막 해부랑 병리 배우는데······.”
이수명은 야옹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영상은 건너뛰면 안 돼. 일류 의사는 먼저 영상 자료 보고 리포트를 본다고. 이류는 리포트 보고 영상 보고. 삼류는 리포트만 보지. 나중에 서전될 생각이면 영상 봐야해. 자, 이거 네 복부 CT야.”
연문빈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보이는 대로 말해봐.”
이수명은 난처하고 억울한 듯 속으로 미친 듯이 고함쳤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3학년인데 4급도 아직 패스 못했다고. 4급 단어 외우느라 해부동까지 간 거 보면 몰라? 다쳤다고 이렇게 괴롭혀도 돼?
이수명은 뭔가 번뜩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연 선생님. 제가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머리가 맑지 않아요.”
“보이는 것만 말해.”
연문빈은 머리통을 쓰다듬는 장비처럼 웃었다.
이수명은 할 수 없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간이요.”
연문빈이 주먹을 쥐었다.
“간 옆은 담?”
이수명이 바짝 긴장해서 하는 말에 연문빈은 컵라면만 한 주먹을 허공에서 휘둘렀다.
“췌장.”
“아아, 이제 알겠어요. 담은 이거네요.”
“십이지장.”
이수명의 손가락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담?”
“대장!”
연문빈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동시에 이 녀석이 실력으로 4급을 통과하지 못한 건 명확한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여기가 간 절제한 부분이네. 담관은 여기. 그리고 상처 위치가 조금만 깊었어도 췌장 건드렸겠네요.”
도움 받은 여학생이 왼손을 뻗어 패드의 CT 화면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연문빈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능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회복하지 못했을 거야. 상황도 급박하고 다친 위치가 좋지 않았어. 여기 좀 봐봐. 일반 의사는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담관 봉합 안 해. 당연히 담낭도 지키지 못했을 거고.”
“절제했다고 해도 이해할 상황이네요.”
도움 받은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수명의 여자친구가 꼬투리를 잡은 듯 달려들었다.
“그걸 네가 이해한다고 해도 난 멀쩡한 학생이 어쩌다 외부 남자랑 실랑이하는 상황이 온 건지 모르겠네. 게다가 스물 후반 늙은 남자한테.”
“결국, 그런 식으로 말하는구나. 그런데 너한테 해명할 말은 아닌 거 같네. 수명이 치료 끝나고 경찰 쪽 결론도 나면 그때 수명이한테 설명할게.”
“그거 왜 네가!”
“저기······.”
연문빈이 못 들어주겠다는 듯 패드를 가지고 갔다.
“셋 다 운대 의학원생 맞지?”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원생은 학교 다닐 때부터 철학 계열과는 달리 상하 계급이 명확했다.
연문빈은 가슴을 활짝 펴고 일부러 엄숙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 같은 의학원생끼리 뭘 그리 다퉈대. 병실 안 기록이나 주의해. 너, 시계 끼고 CT 볼 줄 아는 학생, 차트 쓸 줄 알지? 못 써도 괜찮아. 저기 가서 실습생 도와줘. 거의 운대생이니까 다 선배들이야. 실습 좀 일찍 나왔다고 생각해.”
“아.”
고급 시계를 찬 학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 너는 이따 너스 스테이션 가서 약 받아와. 할 일 없으면 간호사 언니 올 때 주사 놓는 것도 좀 배워두고. 나중에 의사가 될지 아닐지 모른다는 소리 말고. 익혀두면 나쁠 거 없잖아. 안 그래?”
이쯤 했으면 됐다 싶은 연문빈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요?”
침대에 누운 이수명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넌 공부나 열심히 해.”
연문빈은 입을 삐죽이며 병실에서 나갔다. 그 모습은 거만한 병사같이 당당했다.
30분 후, 연문빈이 다시 돌아왔다. 삼인실 병실이라 다른 두 환자도 회진해야 하는 걸 깜빡했었다.
이수명은 하루하루 나아졌고, 일주일이 되자마자 두 여학생의 부축을 받고 향만원이 있는 분수대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퇴원할 때까지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며칠 동안 연문빈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멀리서 이수명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이 많아졌다.
“연 선생.”
임기가 털이 더러워진 하얀 고양이처럼 구석에서 튀어왔다. 그는 경계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 모레쯤이면 건너갈 거 같아.”
“GS요? 이렇게 빨리?”
연문빈이 당황한 듯 묻자 임기가 과장된 표정으로 몸을 흔들었다.
“너무 빨라?”
연문빈은 그제야 뭔가 의식한 듯 다급하게 껄껄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체감상 그렇다는 거죠.”
임기는 그제야 억지로 웃어 보이고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연 선생, 내가 운화병원에 온 이래 연 선생이 참 잘 돌봐 줬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제가요? 그런 적 있나요?”
연문빈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당연하지. 처음에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얼렁뚱땅 수술에 들어가서도 웃긴 얘기나 하고 지치고 허기져서 수술 구역으로 돌아갔을 때 님이 족발도 주고 그랬잖아.”
연문빈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족발을 한두 사람에게만 준 것도 아니고, 그때 왜 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임기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긴 했다.
임기는 연문빈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그쪽으로 가게 되면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일을 할지 모르지만, 그게 뭐든 내 마음은 능 선생하고 우리 응급센터한테 일편단심이야. 그러니까 나는 조나라 진영에 있는 한나라 사람인 거지.”
임기는 연문빈보다 나이도 많고, 성 성숙도만 따지면 연문빈만 한 아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퉁퉁하고 하얀 얼굴로 진심 어린 말을 하니 식어있던 연문빈의 가슴이 따듯해졌다.
연문빈은 임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케이! 집 일은 저한테 맡기고요. 안심하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