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790화 (769/877)

엽사공의 기억력은 정말로 좋았다. 같이 병실 몇 개를 돈 임기는 엽사공 때문에 정말로 놀랐다.

전에는 정말 몰랐다. 물론, 수련의 시절에는 침대 담당 의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야 겨우 운화병원 정식 의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다시 침대 담당 레지던트부터 시작한 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 임기도 별생각은 없었다. 현 병원에 있을 때, 환자 하나가 오면 검사만 2, 3일 하는 것도 별거 아니었다. 어차피 빈 침대, 환자가 누워라도 있는 게 나았다.

그런데 운화병원 일반 외과는 입원부터 퇴원까지 사흘 걸리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일찍 나와 케이스를 외우고 설명해야 했다. 임기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엽사공처럼 한 번에 5분 동안 설명하고 어느 질문에나 즉시 대답하는 건 듣도보도 못했다.

운화병원 의사들도 모두 놀란 모습이었다.

케이스라는 건 간단하게 외우는 건 어렵지 않다. 수액량과 배뇨량을 외우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혈기 분석을 소수점 두 자리까지 외우는 건 심상치 않았다.

“기억력이 참 대단해.”

상지걸은 관을 미리 준비해둔 늙은이처럼 보면 볼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정직원 자리를 연줄 잡고 들어온 보통 수준 의사한테 내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서프라이즈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엽사공은 거만하지도 비굴하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전에 현 병원에 있을 때 수술 기회도 많지 않고 할 일이 없어서 종일 케이스 팠거든요. 인제 보니 케이스 외우는 기술은 제대로 남긴 것 같습니다.”

“이게 보통 기술이 아니라고. 나중에 엽 선생이 우리 팀 젊은 의사들한테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좀 이야기해줘.”

상지걸이 껄껄 웃었다.

임기는 ‘사공이’에서 ‘엽 선생’이 된 걸 보며 내심 속상해졌다. 다 같은 배신자인데 왜 엽사공은 엽 선생인데 나는 아직 임기야.

그러나 곧 스스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초조해하지 말자. 자리 잡고 나면, 능 선생도 뒤에 있고 진정한 배신자 생활을 시작하면 둘 다 똑같아질 거야.

지금은 아직 배신할 때가 아니었다. 임기와 엽사공 모두 이제 막 침대를 담당하게 되었고 밑에 부하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아직 일반 외과에 관해서 아는 것도 없었다. 간담췌외과에서 10년 구른 장안민하고는 달랐다. 시작부터 운화병원에서 출발한 의사라서 배척도 받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현지 의사와 간호사들을 끌어들여 간담췌외과에서 입지를 만들었다.

임기와 엽사공에게도 그런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적어도 둘 다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상지걸과 위청이 그들을 내보내 응급센터하고 대결하려고 할 때가 되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준비된 상태여야만 한다. 임기는 미간을 좁히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우세를 어느 정도 느낀 상태였다. 같은 직위인 일반 외과 동료보다 자신의 기술과 경험이 더 풍부했고 주머니도 더 두둑했다. 이런 우세를 잘만 쓰면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관리할 침대를 몇 개 더 벌어오는 것, 심지어 고정 침대 한두 개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느라 좌우 심방에 주름이 다 질 지경인 그때, 엽사공과 문답을 몇 번 더 주고받은 상지걸이 껄껄 웃음소리를 냈다.

상지걸은 엽사공을 매우 마음에 드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싱글벙글 입을 열었다.

“엽 선생, 정말 놀라워. 삼사 개월 기다릴 것도 없이 내일부터 바로 엽 선생 침대 8개 추가하지. 그리고 2개는 엽 선생 고정 침대로 하자고. 앞으로 직접 집도하는 환자는 그 침대로 보내라고. 어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임님.”

엽사공은 몹시 의외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 침대 2개를 집도 수술용으로 준다고? 운화병원 같은 병원에서 그런 권한을 레지던트에게 준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었다.

“감사는 무슨. 마땅한 걸세. 우리 팀에 누구라도 엽 선생처럼 케이스를 외우는 사람은 언제든 날 찾아와서 침대 달라고 하라고.”

상지걸이 대범하게 공수표를 남발했다. 모든 초짜 의사가 엽사공처럼 할 수 있다면 온 팀의 능률이 얼마나 오를지 모른다.

임기는 충격받은 모습으로 엽사공 한 번, 상지걸 한 번 바라봤다.

이렇게 침대가 생긴다고? 너무 쉬운 거 아냐?

이렇게 되면 엽사공이 다른 레지던트보다 한발 앞선 셈이다. 그가 집도하게 되면 조수들과도 관계를 맺게 될 것이고 아랫사람을 구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임기는 생각하면 할수록 부자연스러워져서 저도 모르게 자기 팀 위청 주임을 흘깃 봤다.

위청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엔 상지걸은 욕심 없는 부주임 유형이었다. 자신은 욕심 있는 부주임이니 당연히 자기 수술이 먼저였다. 자기가 쓸 침대도 없는데 레지던트에게 단독으로 내줄 리가 없었다.

위청 팀에서는 주치의조차 자기 명의의 침대가 없다.

위청을 잠시 지켜보던 임기도 생각을 정리했다.

두 치료팀은 스타일이 달랐다. 어쩌면 본인 팀이 기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능 팀에 있을 때보다야 적겠지만, 적진에서 일하기로 한 이상 일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

임기는 앞으로 기회를 잡게 되면 일단 처방 권한을 손에 넣고, 처방을 내리기 시작하면 제약회사 직원 몇 명 꼬셔서 소식을 모아 사람을 구성해야겠다고 암암리에 생각했다.

운화병원에서 전자 처방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처방 권한은 약 처방 내린 후의 공제금 그리고 제약회사와의 관계도 포함된 것이라 어떤 진료과 주임들은 아예 그 권리를 쥐고 놓지 않는다. 그 아래 주치의와 레지던트가 약 처방을 내려야 할 때는 상급 의사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상급 의사의 비밀번호를 사용해야 한다.

후자를 얻으면 약 처방을 내릴 순 있어도 전자 처방 사인란은 모두 상급 의사의 이름이고 그렇게 내려온 돈은 당연히 상급 의사에게 들어가서 아래 의사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

임기는 일반 외과에서 돈 벌 생각은 없지만, 전자 처방 권한이 지닌 권력을 생각하면 꼭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OK. 이제 다음 병실.”

엽사공이 마지막 환자에게 오더를 내리는 걸 확인한 상지걸은 온몸으로 흡족한 느낌을 표출했다.

엽사공은 그가 위청 손에서 빼앗아 온 의사였다. 뺏어 오느라 힘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었고 자기의 사람 보는 눈이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맞다. 엽 선생, 아직 처방 권한 없지?”

병실 문을 나서면서 상지걸이 뒤통수를 툭툭 쳤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추가해두라고 할게.”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엽사공의 표정에 상지걸은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

“네.”

엽사공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임기는 눈으로 쌍욕을 날렸다.

늦은 밤, 능 씨 새벽.

에피프레넘과 접난은 아직 잠든 시각, 하얀 거위 향만원도 아직 잠들었고 당직 의사와 간호사도 아직 잠든 그 시각에 임기는 병실 안에서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는 같은 발, 같은 다리를 내밀며 어그적 걷고 있었다. 사람 없는 복도라 걷고 싶은 대로 걸으면 그만이었다.

똑똑.

“안녕하세요. 회진입니다.”

임기는 하얀 가운 매무새를 정리하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잠에서 깬 일반 외과 환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느 쪽이 고장 난 건지 몰라서 임기 한 번, 핸드폰 한 번 바라봤다.

“환자가 많아서 좀 일찍 회진하겠습니다. 그러면 수술도 빨리할 수 있거든요.”

능 팀에 있을 때부터 연문빈 등과 야간 회진을 해와서 지금도 이런 말이 술술 나왔다.

환자는 당연히 언짢아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게 되면 누구나 사람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의사 앞에서 정상적인 환자는 어찌 됐든 참아낸다.

“방귀 뀌셨어요? 음, 소변량이 좀 줄었네요. 약 처방해드릴게요.”

간단한 신체 검진과 기본 항목 체크만 끝내고 환자 하나 검사를 끝냈다. 응급센터에서 연문빈 등을 따라 회진할 때와 비교하면 일반 외과 환자의 수량과 상태는 정말이지 너무 수월했다.

간 절제 환자의 예후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 특히 간을 많이 잘라서 ICU에 들어가야 하는 환자는 더욱 상황이 복잡해서 의사와 간호가 특히 더 마음을 써야 한다.

능연 밑에서 그런 회진 생활을 했던 임기는 일반 외과에서 너무 편안함을 느꼈다. 심지어 환자하고 몇 마디 더 이야기 나눌 정신도 있었다. 서른 몇으로 보이는 멀쩡한 의사가 서글서글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환자와 보호자들은 일찍 일어나긴 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임기는 웃는 얼굴로 병실 하나, 또 하나 회진을 돌았다.

임기는 이미 생각 정리를 마쳤다. 지금은 침대나 약 처방 권한 문제를 쟁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엽사공하고도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다가 엽사공이 준비를 충분히 마친 후에 같이 일을 하다가 자신의 실력이 뒤처질까 걱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응급센터로 돌아간다고 해도 장래는 어두울 것이다. 게다가 정직원 자리를 얻긴 했어도 승진 등등 문제는 앞으로도 일반 외과를 통해서 해야 했다. 어떻게든 다시 응급센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나날이 점점 험난해질 것이다.

파국이 오기 전에 목숨을 거는 수밖에 없다!

자기 사람들이 생기고 수술을 할 수 있게 되면 병원에서 그대로 굶어 죽을 일은 없다. 하원정 님도 그 역경 속에서 아직 잘 버티고 있지 않은가.

출신이 평범하고 재능도 평범하고 기술도 평범한 수련의로서 임기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운화병원에서 배운 가장 직접적인 방법, 바로 새벽 회진뿐이었다.

새벽 4시부터 회진하면 6시에 수술을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상급 의사가 그 시간에 회진을 더 하겠다고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임기는 그게 자기가 엽사공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능 팀에 아직 있다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진에 들어와 명의상 일반 외과 일원이 된 이상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회진.

회진.

회진······.

위청이 진료과로 출근했을 때, 임기는 자기가 관리하는 열 몇 개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였다. 물론 케이스를 엽사공처럼 완벽하게 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외웠다.

위청은 당연히 조금 놀라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임기를 바라봤다.

“잘했군.”

“감사합니다. 주임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임기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고분고분 대답했고 위청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임 선생 본받으라고.”

임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드디어 ‘임 선생’이 된 거야?

임기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위청이 계속 말했다.

“임기가 기술이 좀 떨어지고 경험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고 또 우리 진료과 상황을 잘 모른다고 해도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이런 정신! 이건 좋아. 요즘 996이니 뭐니 하잖아. 우리 병원이 일반 대중보다 떨어지면 안 되지.”

그 김에 설교를 늘어놓은 위청은 후련하게 말해놓고 싱글벙글 수술실로 향했다.

임기는 남겨두고.

임기는 미소를 유지한 채 위청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흠. 이번 노력은 무의미한 것 같군.”

주치의 나광은 위청 팀에서 가장 임기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방향도 비슷했고, 퉁퉁한 체형마저 비슷해서 같은 생태계의 경쟁자가 되었다.

임기는 공격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나긋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손해 보는 건 없잖아.”

“아침에 두어 시간 더 자는 게 얼마나 좋은데.”

임기의 눈빛이 순간 멍해졌다. 자연스럽게 눈 떠진 게 언제더라. 능연을 만나고부터일까요? 이건 주인을 잘못 만난 걸까요? 아닐까요?

너무 일찍 일어난 후유증으로 아이큐까지 떨어졌나?

나광은 자기가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며 싱긋 웃고는 기분 좋게 수술실로 향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나광은 회진을 마치고 수술 준비까지 끝낸 임기를 다시 마주쳤다.

이건 심각한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 동료가 생기면 어쩌라고! 정상적으로 일하는 동료는 꾀부리는 나를 게으르고 멍청하게 보이게 하고, 노력하는 동료는 열심히 일하는 나를 게으르고 멍청하게 보이게 한다고!

나광은 임기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했다고 생각하고는 임기를 빤히 바라봤다.

“어, 나광. 두어 시간 푹 잤어?”

임기가 하는 말에 나광은 얼굴을 흐렸다가 웃어 보였다.

“임 선생······.”

“아우, 졸려.”

나광과 다투고 싶은 생각이 없는 임기가 스스로 한 발짝 양보했다.

“자자, 가서 손님 맞이하라고. 난 잠깐 졸고 올게. 이따 수술도 해야지.”

“맞이······.”

나광은 임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아졌다.

임기는 그후로 며칠 동안 마이웨이로 행동했다.

아침마다 혼자 ‘능씨 회진’을 하고 다른 사람이 출근하면 당직실로 가서 한숨 자고, 그런 다음 주임이 참석하는 단체 활동을 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주임이 없는 날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생활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에는 진료과와 화목하게 지낸다는 일념으로 일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그런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화목은 글렀어.

적진에서 자리 잡으면서 미움받지 않은 길은 없지.

어차피 나중엔 다 적이 될 것, 이왕 그렇다면 진료과와 화목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아니, 차라리 화목하지 않은 게 나아.

임기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수술하는 시간엔 최대한 배울 수 있는 건 배우려고 들었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열심히 복습했다. 장안민 부주임의 말대로 적진에서 노력한 모든 것은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파란 없이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임기는 하루하루 견디며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가 일 년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 4시 30분, 다시 일반 외과 복도에 나타난 임기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했다. 드디어 그의 생활에 가벼운 파란이 일었다.

백열등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보였다.

임기는 눈을 둥글고 작게 뜨면서 흥분했다. 그의 뇌리에 이미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젊은 여자 의사면 제일 좋고 실습생도 나쁘지 않지. 그런 의사가 기대하는 말투로 이렇게 말하면······.

“임 선생님, 같이 회진해도 될까요?”

혹은 일부러 담담함을 위장한 말투로 “임 선생님, 우연이네요.”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지.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임기는 얼굴을 문지르면서 너무 일찍 일어난 얼굴 부분의 잔여 단백질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에 타구(唾具)를 손에 든 대머리 노인이 흔들흔들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의사 선생이구만. 깜짝이야.”

노인은 임기를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 보고는 배를 잡고 병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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