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그레이트 닥터-798화 (777/877)

처치실.

능연은 바로 환자를 찾지 않고 느긋하게 로비를 맴돌았다.

지금 응급센터는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연쇄 추돌 사고로 환자가 몰리긴 했지만 대부분 가벼운 증상이었다. 연문빈이 신체 검진한 회사원처럼 일반적인 충수염 정도였다. 일반 외과로 트랜스 된 다음에도 당장 수술할지 말지도 모르고, 기껏해야 침대 하나 차지하는 정도였다.

지금 속속 병원으로 실려 와 큰 소리로 고함치는 환자도 경증 중의 경증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8시간 안에 봉합해도 문제가 업을 정도라 아직 순서가 되지 않은 환자는 정말로 몇 시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현장에 의사와 간호사 모두 바빴고, 설사 구석을 지키는 레지와 실습생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내줄 데브리망 실과 침상이 없었다.

능연은 알코올겔을 짜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응급 효율을 높이라는 시스템 제시가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처치실의 의사와 간호사는 매우 노력했다. 특히 능연이 순시하는 동안은 다른 진료과에서 콜 받고 온 의사들도 규칙을 지키며 정신을 집중해서 베스트 컨디션을 내보이고 있었다.

내과, 외과, 간호과의 실력이 모두 수준을 넘었고, 병원 ‘응급과’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 처치실은 매우 우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응급센터’ 기준으로 보면 쏘쏘였다.

센터로 승급한 이상 지구 범위에서 가장 막중한 책임도 져야 하고 어떨 때는 센터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할 때도 있다. 병원은 매우 현실적인 곳이고 잘하는 곳은 비뇨기과 의사도 존중받지만, 못 하는 곳은 심장외과도 조마조마하게 버틴다. 시 범위 혹은 전국 범위로 봐도 그렇다.

다른 병원 뒤치다꺼리 할 수 있는 곳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다시 만날 것이고, 다른 병원이 뒤치다꺼리해 줘야 하는 곳은 당연히 고분고분하게 군다.

경비든 설비든, 인원이든 정직원이든, 현실적인 요인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고분고분 굴어야할 병원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나중에 환자 트랜스 할 때 그 빚을 두 배로 갚아야 하고, 고개를 치켜들 만한 병원이 아닌데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사망 토론할 일이 생기면 죽고 싶을 정도로 쪼인다.

운화병원 응급센터는 스스로 찾아오는 환자 혹은 구급차를 불러 실려 온 환자만 상대하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지역 병원에서 트랜스하는 환자도 있다.

오늘 상황만 봐도 연쇄 추돌 사고 환자는 처음에 각 병원에 흩어져 있었지만, 모든 환자가 타당하게 배정됐다는 뜻은 아니다.

초진 후 처치할 수 없는 병증을 발견하거나 초진 후 치료해야 하는 증상 또 혹은 처치를 잘못한 병증, 모두 운화병원으로 보내진다. 전에는 성립과 육군병원이 분담했지만, 운화병원 응급센터로 승급한 후 환자와 보호자가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 한 가장 먼저 운화병원 응급센터로 트랜스된다.

병원으로서는 달콤한 부담이고,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은 의사와 병원 간부는 이런 습성이 정착되길 바란다. 또 처지 못해서 다른 병원으로 보내지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한다.

능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환자와 보호자는 다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누구나 불안정해진다. 공항의 여행객들도 성격이 거칠어지는데 통증과 고통으로 괴로운 환자와 그 보호자는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처치실이 아직 돌아가고 있어서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도 아직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능연이 보기에 머지않아 멈춤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자원은 충분하고 병상도 당분간 다급하지 않은데 문제는 의료진이었다.

능연의 시선이 구석을 훑었다. 누가 불러주길 기다리던 선임 레지와 훈련의가 기대 가득 찬 표정으로 능연을 바라봤다. 능연이 다시 그들을 훑어봤다.

이 초짜 의사들은 예전의 능연처럼 기회를 잡으러 응급실에 온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너무 엉망이라 대부분 봉합도 손에 익지 않아서 상급 의사가 감독하고 지도해야 해서 바로 써먹을 전력이 아니었다.

평소엔 몰라도 오늘처럼 고효율이 필요한 때는 적당한 인력이 아니었다.

능연은 침상, 그리고 칸막이 옆에 있는 중청년 의사를 바라봤다.

“연수의도 다 어시하는 겁니까?”

능연이 임기를 손짓해서 불렀다. 능연과 이야기할 기회를 아까부터 노리던 임기가 바로 달려갔다.

“다들 잘해. 아마 도움 될걸.”

“연수의까지 어시로 쓸 것 없어요. 실습생 몇 불러다 쓰고 모자라면 저쪽에 기다리는 레지와 실습생으로 채우세요. 연수의들은 지금 할 일 있는 사람 말고 다 모이라고 하세요.”

능연이 명령하자 임기가 얼굴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로 불러올게.”

연수의는 다른 병원 다른 진료과에 있으면서 각각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연수의를 모집할 정도가 되는 병원은 현지에서 좋은 편인 삼갑 병원이라 같은 수준 본원 병원 의사의 지위가 보통 더 높다. 본원 병원 의사들도 연수의를 어시로 쓰는 걸 좋아하고.

물론 연수의가 남의 병원에서 조수나 하려고 고생고생 온 것은 아니다. 연수의 시절엔 본인의 사교, 기술 방면 등 스킬이 달렸다.

실력이 막강하고 운이 좋으면 며칠 만에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환자를 처치할 기회와 자격을 잡는다. 재수 없고 실력이 떨어지면 두어 달 만에야 겨우 섞이기 시작하고 이제 막 익숙해지나 싶은데 연수 기간이 끝나는 일도 있다.

운화병원에서 지금 대규모로 트레이닝 캠프를 열어 연수의를 잔뜩 모집했지만, 기회까지 균등하게 보장하지 못해서 대부분 연수의는 참관하고 배우는 게 다였다.

능연이 어시하고 있는 연수의를 모은다는 건 당연히 뭔가 바꿔주려고 하는 것이고, 같은 연수의인 임기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이미 정직원이 된 배신자 신분임도 깜빡했다.

연수의 스무 명이 빠르게 모였다. 응급센터 정직원 의사 수와 비교할 만한 인원이었다. 같은 수의 연수의가 쉬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병원은 다 그런 식으로, 정직원 수가 아무리 늘어도 업무량을 따라잡지 못하고 대부분 자리를 연수의, 훈련의와 실습생이 채웠다.

“지금 대기실에 환자가 넘쳐요. 감염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 치료 시스템에도 영향을 줄 것 같으니 최대한 서둘러 경상 환자를 처치해야 합니다.”

사람을 모은 능연은 한마디로 간단하게 앞으로 할 업무 내용을 설명했다. 뒤이어 사람들을 바라보며 의사를 골랐다.

“두 팀으로 나눌 겁니다. 지금 부르는 사람이 1팀이에요. 거기, 거기, 거기.”

연수의들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지금 불린 사람들은 왼쪽으로, 안 불린 사람은 오른쪽.”

능연은 어릴 때 놀이할 때처럼 명령을 내렸고 연수의들은 머뭇대며 그 말을 따랐다.

“이어서 팀끼리 알아서 조를 짭니다. 1팀 의사가 집도, 2팀 의사가 어시. 1팀이 모두 집도하고 2팀이 모두 어시합니다. 아시겠죠?”

두 팀 의사 모두 성인이고 다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중 2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의사는 더욱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다.

“왜 우리 2팀은 다 조수인데요.”

“1팀 의사들 실력이 더 나으니까요.”

능연은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고 질문을 던진 의사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판단한 겁니까?”

“그동안 여러분이 보인 기술을 근거로요.”

“장난하나. 내 나이가 곧 마흔입니다. 그런데 내 기술이 여기 어린놈들보다 못하다고요?”

2팀 중년 의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흠흠, 능 선생은 그런 뜻이 아니라…….”

임기가 흠흠 대며 분위기를 중재하려 했다.

“그런 뜻입니다.”

능연이 임기의 말을 자르며 중년 의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쪽 기술은 매우 조잡합니다. 봉합할 때도 조심성이 없고요. 해부도 딱 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수술 방식은 오래됐고. 내 판단으로는 2팀 중에서도 5, 6위입니다.”

능연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해도 연수의가 수술실과 응급실에서 어떻게 일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2팀 중년 의사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의사들은 모두 실력에 연연해하지만, 막상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른 의사의 실력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능연의 성격과 신분 때문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능연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자, 둘씩 조 짜고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걸 목표로…….”

능연은 설명하면서 사람들을 이끌고 대기실로 향했다. 중증부터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고 이번엔 경증부터 해결했다.

“유 선생님, 전에 안과 셨죠? 이 환자, 선생님이 봉합하세요.”

“아, 예.”

두부 손상 환자에게 재빨리 다가가 잠시 검사한 능연이 하는 말에 평소에 별 존재감 없는 서른 남짓한 유 선생은 의아한 듯 덧붙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파일 봤습니다. 눈가에 상처가 있으니까 주의해서 봉합하세요.”

능연은 대답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여자 의사를 불렀다.

“산부인과 경험 있죠? 이 환자 검사해요.”

“실밥 푸는 건 왕 선생님이 하시고요.”

“골절, 이 선생님. 심하게 다쳤으면 트랜스하고요.”

능연은 휙 돌면서 12명 모두에게 임무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시스템 제시를 봤더니 퀘스트 완성도가 이미 (21/20)이 되어 있고, 중급 보물 상자가 반짝이며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능연이 주목한 건 상자가 아니었다. 아까 완성도가 11/20이고 지금 12명에게 임무를 배정했는데 완성도는 21/20이다. 그렇다면 두 명에게 분배한 임무가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판단이 선 능연은 다시 뒤돌아 주변을 살폈다.

지금 이 순간 대기실은 명백히 진정되었다.

반 바퀴 돈 능연은 곧 환자 두 명을 골랐다.

평범한 외상 환자를 조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히 외상 봉합 같은 환자는 간단한 검사 후에 임무를 배정한 것이라 기본적으로 큰 편차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이 복통 환자와 골절 환자에게 내린 방안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진은 찍었나요?”

능연이 골절 환자 앞에 서서 살며시 물었다.

“아, 수법 복위로 하려고요.”

해당 환자 담당 연수의는 대략 서른 남짓했고 이미 본인의 진료 수단이 있었다. 운화병원 의사 밑에서 어시할 때는 운화병원 플로를 따랐지만, 지금 혼자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기 방법으로 돌아간 것이다.

능연은 그에 관해 왈가왈부하진 않았다. 진단 혹은 임상 의학 자체가 경험 과학이라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가이드를 따르는 의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대부분 의사의 능력 문제다.

이 의사가 수법 복위를 선택한 걸 보면 골과 재능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능연도 그에게 골절 환자를 맡긴 것이고. 그러나 처리 방안에 구멍이 있는 건 분명했다.

능연도 그 구멍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했다. 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고, 골절 위치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그는 따지지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사진부터 찍어보죠.”

그의 판단 근거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환자에게 자세한 신체 검진을 해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사진을 찍으면 확실해지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체 검진을 하고 다시 사진을 찍어봐야 검사 과정이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연수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설명이란 상급 의사에게 하는 거지 하급 의사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연수의 이 선생은 역시나 매우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항할 자격도 없고, 오히려 내심 불안해하며 자기 반성을 했다.

능 선생이 준 임무인데 제대로 할걸. 다 오늘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진 찍는 데 오래 걸릴까 걱정해서 그랬지. 다른 사람은 다 끝냈는데 내가 제일 느리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하아, 요즘 사람들은 다 사진 찍는데 괜히 수법 복위한다고 했네. 능 선생은 젊은 의사라서 이런 구식 치료 방법을 싫어할 텐데. 제길 내가 다니는 병원이 너무 후져서 그렇지. 나도 운화 대학 나와서 운화병원 같은 병원에 들어갔다면 지금 생각도 달라졌을 텐데.

복통 환자 곁으로 간 능연은 기본적인 검사가 끝난 걸 발견했다. 혈액 검사, 간, 신장 기능, 전해질 등등 결과도 다 나왔다. 연수의가 처방한 약을 검사했더니 환자를 바이러스성 설사로 보고 진단한 듯했다. 능연이 보기에도 틀림없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외과 기술과 비교하면 능연의 내과 기술은 독단적 판단을 내린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다시 검사 결과를 넘겨본 능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판단 내렸다.

“소화기 내과로 트랜스 하세요.”

“응? 소화기 내과로요?”

연수의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홀로 치료할 기회를 얻어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그 이 선생과 마찬가지로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걱정했다.

“상황이 복잡한 거 같은데 우리가 처리할 시간이 없으니 소화기 내과로 보내는 게 좋아요.”

이것 역시 시스템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다.

이 복통 환자와 비교하면 다른 외과 증상은 명확해서, 소거법으로 소거하고 나면 복통 환자의 진단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외과 의사와 내과 의사의 가장 큰 차이는 외과 의사는 언제나 자부심이 넘치고 자만한다는 것이다. 수술대에서 간 수술할 때 어떻게 간을 잘 자르냐 고민하며 노력한다. 그런데 내과 의사는 언제나 자신을 의심한다. 응급이든 비응급이든 환자의 상황이 비교적 복잡하면 의사들이 내린 판단은 정확할 수도, 부정확할 수도, 틀릴 수도, 정확한 쪽으로 가고 있을 수도, 아니면 틀린 쪽으로 가고 있을 수도…….

어찌 됐든 내과는 갈등하는 쪽에 가깝고 영원히 그 균형을 잡으며 영원히 의문을 품는다.

능연은 지금 그럴 시간이 없으니 당연히 소화기 내과로 넘기는 게 가장 타당했다. 어찌 됐든 지금 눈앞의 연수의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 알았어요.”

연수의 역시 더 길게 묻지는 못하고 머뭇머뭇 전화 걸러 갔다.

능연이 콜 하니 소화기 내과에서도 매우 빠르게 선임 레지를 보냈고 간단하게 진단하고는 데리고 갔다. 다른 의사였다면 침대 하나 아끼자고 응급센터에서 처리했을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 나이 든 환자도 선생님이 처치하세요. 열이 38도입니다. 차트 상세히 살피시고요. 혈액, 소변 검사, 흉부 X-ray, 초음파 찍고…….”

능연은 환자 하나를 더 그 의사에게 맡기며 조금 더 상세히 설명했다.

오늘 임무를 내린 연수의는 모두 트레이닝 캠프 의사였고 기본적인 능력은 다 있었다. 그러나 능력의 상·하한치는 잘 몰랐다. 지금 눈앞의 이 의사는 명백히 좀 떨어져 보였다.

상대도 제대로 하지 못해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능연도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옆에 환자 처치가 끝난 걸 보고 다가가 검사하고는 계속해서 연수의들에게 임무를 내려 주었다.

시스템 퀘스트 진도도 21/20에서 22/20, 23/20, 쉴 새 없이 올라갔고 한 시간도 안 되어서 32/20까지 올랐다.

대기실엔 사람이 명백히 줄어들었고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도 진정된 모습이었다.

능연은 그제야 옆에 쌓인 중급 보물 상자를 살필 겨를이 생겼지만 상자를 열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시스템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는데 상자를 열면 퀘스트가 끝날까 걱정이었다.

요즘은 중급 보물 상자 얻기가 쉽지 않은데, 퀘스트 진도가 32/20까지 올라간 걸 본 능연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환자 수가 많은 좋은 기회였다. 연쇄 추돌 사고 환자만 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환자도 있었다. 게다가 운화병원 응급센터의 특수한 지위 덕에 응급센터에서 환자를 빨리 처리할수록 환자가 더 많이 몰려들었다. 어찌 됐든 ‘센터’가 된 응급센터 응급실엔 절대로 환자가 모자랄 일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능연은 자연스럽게 스태미너 포션을 하나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하아, 고생들 했네! 드디어 살렸어.”

허리를 편 곽종군의 얼굴에 흥분한 표정이 가득했다.

“오늘은 안 깨고 잘 잘 수 있겠구먼.”

콜 받고 온 골과 주임도 발 다리를 뻗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서 돌아가야지. 애인이 기다리는 거 아닌가?”

“내가 애인이 어디 있나. 골과라고 다 방탕한 건 아니야. 우리도 일편단심일 때도 있다고.”

“무슨 말인지 알았네.”

“어쨌든 우리 마누라가 끓인 소면이 더 맛있어. 햄이랑 고기랑 완자 좀 넣고 소고기 다져서 파 좀 넣어서 먹고 나면 얼마나 시원하다고.”

“나까지 군침이 다 도네. 나중에 제수 씨 면 한 번 먹게 해주게.”

곽종군이 농담하며 껄껄 웃어댔다. 뒤에서 어린 간호사들의 웃음이 들리니 두 노인의 기분이 더 좋아졌다.

오늘 수술은 어느 모로 봐도 뿌듯하고 기뻤다. 가장 심한 환자를 그들이 처치했고, 중간에 한 번 실패하는 줄 알았지만 결국 견뎌냈다. 이렇게 극한과 자기 자신을 돌파하는 느낌은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것이라 더 기분이 좋은 법이었다.

“왕 선생, 먼저 돌아가게. 나는 가서 좀 더 둘러봐야겠네.”

곽종군은 친절하게 골과 주임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콜 받고 오는 건 쉬워도 나이 들어 이렇게 같이 고생해주는 건 쉽지 않으니까.

수술실 들어가는 의사가 실패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하다고 해도, 어찌 됐든 다른 사람 허벅지 만질 시간에 환자 허벅지 수술해준 것이고, 그 희생을 환자나 보호자는 몰라준다고 해도 곽종군은 알아줘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주임이 나서서 수술을 같이 해줬으니 말이다. 이런 급 의사는 콜 받고 와 주는 것만 해도 드문 일인데 수술 내내 함께 고생해주는 건 더 드물었다.

그 생각에 곽종군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엘리베이터 안에 탄 골과 주임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중에 내가 밥 한 번 사겠네.”

왕 선생은 손을 흔들다가 하마터면 열림 버튼을 누를 뻔했다. 곽종군은 히죽 웃으며 돌아서서는 다시 허리를 한 번 펴고는 엘리베이터 옆 창가로 다가갔다. 창 너머 화단을 바라보며 길게 하품하고는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딱히 화단을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잠시 쉴 곳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수사자는 함부로 허약한 표정을 드러낼 수 없듯이, 진료과 주임은 설사 하룻밤을 새웠대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아무리 힘들고 집에 가서 자고 싶어도 미소를 유지해야 했고, 힘들어서 속눈썹 들어 올릴 힘도 없어도 스파에 가서 아가씨의 도움을 받을 때까지 버텨야만 푹 잠들 수 있었다.

곽종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이러다 서서 잠들겠다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얼굴을 비비고 돌아섰다.

“다들 어쩌고 있는지 돌아가 보세.”

곁에 있던 조낙의가 서둘러 대답했다.

“어제 연쇄 추돌 사고 환자는 거의 다 처치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화상이나 경증 환자들입니다.”

“능연은? 돌아갔나? 왜 아무런 소식이 없어.”

곽종군은 하품을 참지 못하고 크게 하고는 자동판매기로 가서 레드불을 사서 마셨다.

“타우린 그만 드시고 돌아가서 쉬세요, 주임님.”

조낙의가 마음 아픈 듯 말했다.

“오늘은 특수 상황 아닌가. 음, 가서 한 번 보고 바로 돌아가겠네. 그래도 보고 가야 안심이지.”

“이제 다 안정됐습니다. 적어도 두어 시간 주무시고 가서 보셔도 될 텐데요.”

“괜찮네. 능연은 돌아갔냐고 물었네만.”

“아까 톡 방 보니까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낙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제부터 계속 뺑뺑이 돈 거 아니었나? 몇 시간이나 안 자고 있는 거야!”

곽종군은 걸음을 서두르며 물었다. 조낙의는 능연을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능연의 뒷말할 자격은 없어서 나지막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봐야 스물 몇 시간, 서른 시간이겠죠.”

곽종군은 아직 머리가 엉망이 된 건 아니라서 바로 손가락을 펼쳐 꼽았다.

“적어도 서른 몇 시간이네. 요즘 젊은것들은 몸 아낄 줄을 모른다니까.”

그는 투덜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대낮의 대기실은 여전히 환자가 꽉 차 있었다. 곽종군은 힐끔 바라보고는 바로 시선을 돌려 처치실로 들어갔다.

복도 양측에 작은 칸막이들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도 안에 사람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곽종군은 얼굴을 찌푸리고 손짓해서 저쪽에서 입으로 바빠하는 주 선생을 불렀다.

“왜 아직도 사람이 이리 많아. TA 환자들은 거의 처리했다며.”

주 선생은 흠흠대며 조낙의를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능 선생 뜻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곽종군의 느슨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능 선생이 병원으로 들어오는 경상 환자를 모두 받았습니다.”

주 선생은 뜸 들였다가 설명 아닌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연수의들 트레이닝 하려는 게 아닐까요?”

운화병원 같은 응급센터는 경상 환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경상 환자라고 중상 환자보다 보호자가 적으란 법도 없고, 침상을 차지하는 시간은 중상 환자보다 짧아도 머리가 긁힌 환자에게 침상을 하루 내주느니 머리가 깨진 환자에게 일주일 내주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의사-환자 관계로 봐도 중상 환자를 더 반겼다. 적어도 보호자들의 기대도 더 낮고, 경상 환자처럼 봉합사 가격 하나로 떠들어 댈 일도 없고.

곽종군도 매우 의외였다.

“능연이 하룻밤 여길 지키면서 봉합이나 했다고?”

“다는 아니고요. 연수의들 지휘도 했습니다.”

주 선생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수의를 몇십 팀으로 나눠서 둘씩 조를 짜줬습니다. 꽤 효율적이었어요.”

그 말에 드디어 건수를 잡은 조낙의가 말꼬리를 잡았다.

“진료과 조직 형식도 함부로 건들다니. 이런 월권, 너무 이른 거 아니야.”

주 선생은 무시하는 듯 입을 삐죽였다.

“능 선생 벌써 서른 몇 시간 눈도 못 붙였는데 이런 거로 태클이라니, 너무 하는 거 아니냐.”

곽종군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서른 몇 시간 눈도 안 붙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중간에 몇 시간 재웠어야지.”

뺑뺑이 도는 의사는 많고, 추가 근무로 서른 몇 시간 집에 못 돌아가는 의사도 전국에 흔하고 외국이라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내 한숨도 안 자고 심지어 잠시 졸지도 않는다는 건 인체 극한을 시험하는 셈으로 몸에도 좋지 않고 의료 사고도 생길 수 있다.

주 선생이 대답하기도 전에 곽종군은 안으로 들어가며 능연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주 선생이 서둘러 따라잡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능 선생 상태 아주 좋습니다.”

“좋기는 개뿔. 의사들은 다 그런 척하는 거 몰라? 어머니가 자장면 싫다고 하는 거랑 같은 거라고.”

안 그래도 피곤해 죽을 것 같아서, 곽종군은 더 심하게 몰입했다. 진정한 수사자는 농땡이에게 피로한 모습을 들키지 않는 법이니까.

성큼성큼 들어가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사로잡는 뒷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능연을 부르려던 곽종군은 매우 집중한 그의 모습을 느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능연이 환자 귀를 봉합하고 있었다.

귀?

곽종군은 멈칫하고 다시 유심히 보다가 눈을 비비고 다가갔다. 환자 귀 옆에 그려진 얇은 선이 보였다. 솜털처럼 얇은 봉합사는 응급센터 같은 거친 곳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재료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능연은 그림 그리듯 수월하게 환자 귀를 꿰매고 있었다.

절대로 서른 몇 시간 잠을 못 잔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곽종군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주 선생을 바라봤다.

이 새끼, 지가 자다가 능연이 쉰 거 모르는 거 아니야?

“능연.”

곽종군이 목소리를 깔고 능연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라도 능연이 몽유병이나 그런 게 아닐까 두려워서였다. 물론 몽유병으로 나와서 사람 귀를 봉합한다는 게 황당하지만, 능연이라 모를 일이었다.

능연이 가볍게 ‘네’하고 대답하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심장이 철렁해서 실을 붙잡은 손까지 떨렸다. 이 목소리, 이 음색, 이 톤, 이 허스키함, 이 얼굴……. 정말이지 너무…….

그녀는 머쓱한 듯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곁에 있는 환자 여자친구도 비슷한 얼굴인 걸 보고 안도했다.

“이 봉합 끝나면 가서 쉬게.”

곽종군이 다시 나직이 말했다. 처치실이 아니고, 환자 보호자도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능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졸립니다. 괜찮아요.”

“안 졸릴 리가. 자네 이거…… 너무 과해.”

곽종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서른 시간 넘게 잠을 안 잤다’고 말할 순 없었다. 혹시 민감한 환자라서 돌아서서 고발이라도 하면 의교과에서 잔소리할 테니까.

능연은 곽종군의 말을 받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더 지켜보세요.”

능연은 한 손으로 타이 하면서 아까보다 두 배 빨라진 속도로 환자 귀를 세심하게 봉합했다. 그것도 피하 봉합으로. 귀의 피부가 얼마나 얇은지 생각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30년 넘게 꼬집힌 귀, 거기에 몇 년이나 아내에게 잡힌 귀라고 해도 쥐의 귀보다 두꺼울 리 없고, 평범한 의사는 감히 피하 봉합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능연의 스킬이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얇은 위치를 봉합하려면 매우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능연의 상태는 피크가 아니라고 해도 평균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능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싱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곽종군을 향해 ‘말씀하시죠’ 미소를 발사했다. 곽종군은 한숨 한 번 쉬고 피식 웃어 보였다.

“중간에 몰래 쉬었나?”

곽종군은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괜찮다면 괜찮겠지. 의사는 몰래 쉴 줄도 알아야지. 나 때는 몰래 침대를 만들어서 차고에 숨겨놓고……. 흠흠, 이건 됐고. 어찌 됐든 우리 의사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쉬어 줘야 해. 환자 한 사람 구한 다음에도 구할 사람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되네. 잘린 손가락을 이어야 하고 피 흘리는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고. 의사는 한숨 남겨둘 줄도 알아야 해. 자기를 위해서 또 환자를 위해서.”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는 곽종군의 말에도 능연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조용히 듣기만 했다. 뒤에 있던 의사들은 감정 기복이 생기다가도 능연의 그런 모습에 따라 평온해졌다.

“됐네. 난 더는 못 버티겠어. 좀 자고 오겠네. 여긴 자네가 좀 더 맡아주게.”

곽종군이 능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젊은이는 큰 부담이라도 질 줄 알아야지. 안 그래?”

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연은 원래 응급센터에서 곽종군 다음으로 지휘권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세 치료팀 팀장은 기껏해야 자기에게 쌓인 일이나 잘하면 되지 나와서 진료과를 관리하라고 해도 감당하지 못할뿐더러 서로 견제나 한다. 그 아래 있는 의사들도 능팀 의사들과 달리 전력으로 팀장을 서포트하지도 못하고.

굳이 말하자면, 운화병원 응급센터 다른 치료팀 팀장은 의술과 권력 제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나이와 경력을 빼면 전체적으로 능연에게 뒤처졌다.

운화병원 같은 지역 정상급 병원은 전국급 기술도 없고 전국 병원급 권력도 없다. 그런 병원에서 진료과 하나를 전면적으로 컨트롤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곽종군이 없을 땐 능연이 매우 쉽게 진료과 전체를 통합하고 심지어 다른 세 팀장에게 일을 시킬 수 있지만, 다른 팀장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곽종군 역시 그런 능연의 모습을 매우 흡족히 여겼다. 그는 천재와 천부적인 재능을 믿는 사람이다. 비록 다른 세 진료팀 의사도 일반 기준으로 보면 천재라고 해도 좋지만, 국가급, 세계급으로 보면 이런 속된 천재와 능연 같은 천재 중의 천재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곽종군은 안심하고 휴게실로 돌아가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었다. 이런 때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건 안전하지 못했다. 집에 가면 더 위험하고. 그러니 차라리 병원에서 자는 게 낫다.

능연은 그 김에 주 선생과 조낙의를 불렀다.

“잘됐네요. 기다리는 환자 둘 있는데.”

능연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부리고는 돌아서서 바로 맥주병에 맞아 얼굴 깨진 환자를 잡고 한 땀 한 땀 봉합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엔 이미 중급 보물 상자가 세 개 쌓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흡족했다.

아차 하다가 붙들려서 새 일거리가 생긴 주 선생은 느릿느릿 환자와 보호자가 만족할 세심한 태도로 검사하는 한편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능연에게 일을 받을 줄이야.”

“내가 능연 이 새끼 양심 없다고 했지?”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생긴 조낙의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주 선생이 그를 흘겨봤다.

“혼나고 싶냐? 능연이 양심 없는 새끼면, 능연에게 일 맡긴 곽 주임님은 뭐가 돼.”

주 선생이 하고 싶은 말을 읽었지만, 인정하기 싫은 조낙의가 계속 툴툴 댔다.

“곽 주임님 은퇴하려면 아직 10년은 걸릴 텐데, 벌써 후계자에게 잘 보이려는 거냐? 너무 이르다고.”

“이르긴 뭐가 일러. 너도 알 텐데?”

주 선생이 히죽 웃었다.

병원 진료과의 계승 과정은 언제나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진료과 주임이 지목한 후계자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보통 후계자를 지목하면 진료과 주임도 4~5년 후엔 은퇴하고. 4~5년이면 진료과 주임 후계자가 자리에 오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직 멀었어.”

대 숙청이라고 해도 좋을 과정을 떠올린 조낙의는 저도 모르게 겁이 덜컥 들어서 다시 반복했다.

“아까 주임님 말씀 못 들었냐? 게다가 우리는 이제 응학이 아니라 응급센터라고.”

주 선생이 웃으며 하는 말에 조낙의는 멈칫했다. 응급센터은 응학보다 행정 등급이 훨씬 높다. 즉, 진료과 누구도 올라갈 기회가 있다는 말이었다.

“능연이 그 자리에 오를까?”

조낙의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반대할 거리 있어?”

주 선생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낙의는 저쪽에 있는 능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능연이 서른 시간 넘게 일했다는 걸 곽종군은 믿지 않았지만, 현장에 있는 의사는 똑똑히 봤다. 다른 건 몰라도 능연 밑의 연수의와 레지는 모두 한 바퀴 바뀌었다. 이런 태도만 봐도 응급센터에서 이길 사람이 드물었다.

조낙의도 아무리 속으로 못마땅해도 반대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짝짝짝.

여원 키 높이만 한 의자를 밟고 올라간 수간호사가 손뼉을 짝짝 치고는 싱글벙글 입을 열었다.

“오늘 다들 바쁘셨죠. 교대해서 밥 먹읍시다. 왼쪽부터 갈게요. 순서대로 작은 식당으로 가세요.”

그 말에 환자와 보호자가 술렁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더러 밥 먹지 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못 한다.

주 선생은 서둘러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는 수간호사 곁으로 다가갔다.

“저녁 같은 거로 직접 나서시다니. 저녁 메뉴는 뭡니까?”

“역시 주 선생님은 똘똘하셔. 운리 전칠 아가씨가 햄버거랑 피자 보냈어요.”

“특별한 거 있어요?”

“호주산 소고기 패티.”

그 말에 주 선생이 공수하며 인사했다.

“소생, 먼저 가보겠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맥순의 표정이 어딘가 망연해 보였다.

제약회사 영업일을 하다 하다 의사의 침대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자기는 왜 하다 하다 의사 주방에 들어온 걸까 싶었다. 게다가 이 많은 의사 배를 불려주면서.

비록 불 앞에서 패티를 굽는 건 프로 요리사, 빵 바르고 수프 끓이는 것도 모두 프로 요리사고 그녀는 그저 웃는 얼굴로 접시를 내가는 것뿐이지만, 이 장면은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 했던 시절이 너무나 떠올랐다.

“호주산 소고기?”

주 선생이 냄새를 미리 다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맥순이 풉 하고 프로패셔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주산 소고기 맞긴 한데 그러실 정도는 아니잖아요. 한 근에 2~300위안 하는 소고기, 선생님한텐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요?”

“2~300위안 고기 아무렇게나 사고, 한 근에 2,000위안 하는 마오타이도 함부로 사고, 한 달에 8,000위안 학원도 그냥 보냈다간 파산하게요? 난 15위안짜리 돼지고기 먹고 1,000위안짜리 학원 보내고 7,000위안짜리 마누라 화장품 사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주변에서 공감하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병원 식당 있어서 망정이지, 말라비틀어질 뻔했지.”

“난 살쪘어요. 집에 가서 만날 컵라면 먹어서 그런 거 같아.”

“그래도 내 마누라는 괜찮은 거 같아. 만 위안하는 학원에 애들 보내지도 않고 만 위안짜리 화장품도 안 사니까.”

안으로 들어온 조낙의가 침착하고 허세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주 선생은 낄낄 웃으며 햄버거를 들고 햄버거 위치와 입 위치를 조정하면서 대답했다.

“그 집 애가 만 위안하는 학원엔 안 다닐지 몰라도, 와이프는 7천 위안짜리 싸구려 화장품 안 쓰겠지. 안 그래?”

“어이쿠, 그래. 우리 과에서 네가 제일 똘똘하다.”

조낙의가 쿡쿡 찌르며 하는 말에 주 선생은 히죽 웃고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간 고기로 만든 패티가 아니라 숯불로 구운 소고기를 다져서 빵에 넣고 깨 소스와 땅콩 소스를 바르고 신선한 토마토, 살짝 구운 파인애플을 넣은 햄버거라 즙도 살아있고 향도 풍부한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조낙의는 와이프 이야기가 나오자 행복해하며 자랑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내 와이프는 친구가 클렌징 오일도 5천 위안짜리 쓴다더라고. 미쳤냐고 했지. 그 집은 그럴 능력이 되는 거고 우린 아니라고.”

“와이프가 가만히 있어?”

“와이프가 이러더라고, 그 집 남편은 접대하느라 밤새 집에 없는데 나도 밤새 들어오지 않지 않냐고. 그렇게 따지면 두 집 상황은 비슷하다고. 남편 기다리느라 얼굴이 초췌해지니까 비싼 화장품 쓰는 게 당연하대.”

“일리 있네. 환경은 다르지만 돈 모자라는 것도 다 같을 거고. 뭐 어쨌든 여기서 만드는 햄버거니까 뭐 추가해도 되겠지. 피클 추가하고 싶은데요!”

흥미진진하게 조낙의 이야기를 듣던 맥순은 맥이 빠졌지만, 그래도 요리사에게 피클을 받아서 다시 돌아와서는 부러운 듯 조낙의를 바라봤다.

“조 선생님, 참 좋은 남편이네요.”

주 선생은 아삭아삭 피클을 씹어 먹고는 서너 개를 햄버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조 선생이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하는 애처가지. 줄 수 있는 건 다 준다니까.”

“와, 정말 좋은 남자네요.”

“그러니까요. 맥순 씨보다 덜 벌어서 다 가져다 바쳐도 총액이 얼마 되진 않겠지만.”

주 선생은 햄버거를 들고 원숭이 놀리는 사내아이처럼 조낙의를 놀렸다. 조낙의는 주 선생의 말이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흥흥댔다.

“쯧쯧, 분위기 없는 놈.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마음이죠? 그죠?”

맥순은 양손으로 햄버거를 들고 아름다운 꿈에 빠졌다. 지금 그녀는 운리 매니저급 직원이고 자기 명의의 작은 집, 작은 차, 작은 개도 샀으니 슬슬 연애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요리사들이 정신이 번뜩 난 듯 가슴을 쫙 폈다.

숯불 쪽 요리사들이 소란스러워진 모습에 맥순은 고기 굽는 양이 늘었음을 깨닫고 대단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능연이 커튼을 들어 올리며 자체 발광하고 있었다. 아우디 차주가 상향등을 켠 것 같은 밝은 빛이었다. 그러나 그 빛 너머 보이는 능연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고 피부는 마치…….

맥순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계속 보면 안 돼. 집 대출금도 남았는데.

“전 파인애플 바짝 익혀 주세요.”

숯불 요리사 쪽으로 간 능연이 요리사들의 움직임을 보며 주문하자 두 요리사가 바로 바빠졌다.

“고기는 어떻게 구울까요?”

숯불 앞 요리사가 미소 서비스 스킬을 발휘했다. 사실 원래 꿈은 중경식 레스토랑 사장이었다. 그러니까 고객을 욕하면서 돈도 버는 그런. 그러나 나중에 운리에서 너무 큰 돈을 주어서 꿈도 그렇게 깨졌다.

그 생각에 요리사의 움직임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졌다.

“레어로요. 즙이 풍부해야 해요.”

“능 선생 취향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요.”

능연이 대답하자 전칠이 덧붙였다.

기다림에 지쳐 휴식 모드로 들어갔었던 전칠이 어느새 정신 차리고 활발해진 걸 본 맥순은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능연은 전칠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비집도 준비했어요. 사실 이모가 저한테 주신 건데, 능 선생부터 먹어요.”

전칠이 손짓하자 누군가 제비집을 들고 왔다.

“제비집이요?”

능연이 멈칫했다. 그때 맥순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능 선생님, 너무 오래 밤새우신 거 아니에요? 사람이 어떻게 사흘 동안 잠을 안 자요. 아가씨도 한마디 좀 하세요.”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전칠이 생긋 웃고는 능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한 듯 대답했다.

“일 때문에 몸 버리면 어쩌게요. 밤새우는 건 좋지 않아요.”

“우리 집에선 몇천만 위안짜리 사업 하나 때문에 밤새우는 친척도 있는데? 능연 씨는 사람을 구하는 일로 밤새우는 거잖아.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밤새우는 거니까, 영웅이라고 생각해.”

맥순은 제 입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이 잘 보일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하다니. 쓸데없는 짓도 했다.

능연은 전칠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잘 익어가는 패티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전칠은 살며시 옆으로 8.5cm 이동해서 능연과 더 가까워지고는 좋아서 심장이 다 빨리 뛰는 걸 느꼈다.

요리사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육즙이 가장 풍부한 시간을 캐치하는 건 요리사의 큰 시련이다. 게다가 사장을 포함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이고.

요리사가 진지하게 불꽃을 불태울 때, 능연은 기분 좋게 중급 보물 상자를 열었다.

붉은 스킬북이 거만하게 날아 나왔다.

- 종합 스킬북: 소묘(마스터급)

- 구조 소묘, 명암 소묘, 디자인 소묘 등을 포함한 종합 스킬. 정물화, 동물, 풍경, 인체를 그릴 수 있고 인체 기관과 수술 방식도 그릴 수 있다.

능연이 전에 받았던 종합 스킬북은 마스터급 위 절제술이었다. 각종 위 절제법, 예를 들어 전위 절제, 반 절제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마스터급이고 일반 외과에서 상대적으로 간단한 수술이지만 실용성이 매우 커서 능연의 창고를 대대적으로 풍성하게 해주었다.

반면에 마스터급 소묘 기술은 의외였다. 그림은 사실 외과 의사의 무기고 중에 괜찮은 장비이긴 하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림은 외과 의사의 기본기, 정밀한 수술의 기초라고도 한다. 큰 수술할 때 수술 중요 부위 해부 구조를 그려 수술 사고회로를 기록하면 팀 내 다른 의사에게 설명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그 점으로 보면 소묘나 회화 스킬은 큰 전쟁 전에 병사에게 지급되는 권총이라고 할 수 있다. 필요 없다고 하기엔 좀 그런 거. 특히 역사에도 나오는 어느 전투에서 권총이 지대한 작용을 발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매우 쓸모 있다고 하기는 또 어렵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짐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총체적으로, 학교 다닐 때 그림을 배웠다면 외과의가 된 후에 분명 그 스킬을 써먹는다. 게다가 꽤 잘. 의사가 직업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취미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각종 운동, 그 다음이 노래방에서 윗분 기분 돋우기 좋은 음주가무 기술.

다빈치 같은 대단한 사람은 정상급 서전과 정상급 화가의 합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의 서전도 책을 낸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해부 쪽은 더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 능연도 기분이 좋아졌다. 수술마다 그림을 그려 설명하는 건 오버지만, 복잡한 수술 전에 몇 분 정도 할애해서 그림 그려 설명하면 수술 내내 어시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수월할 것이다. 장작 패기 전에 칼을 잘 갈아 둔다고 일에 지장 주는 건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책도 쓸 수 있고.

“능 선생님, 햄버거 나왔습니다.”

요리사가 공들여 만든 특제 햄버거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면접 때처럼 은근히 긴장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능연은 사회 기대에 부합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바닥만 한 햄버거를 쇼좌빙(돌돌 말아 먹는 중국식 토스트)처럼 들고는 곁에 있는 전칠에게 물었다.

“끝나고 바쁜 일 있어요?”

“난 의사와 달리 기껏해야 회사 한두 개 사고 분석하는 일뿐이에요.”

“잘됐네요. 그림 좀 그리고 싶은데 손 모델 해줄래요?”

능연이 예의 바르게 물었다. 새로 얻은 스킬은 써봐야 맛이니까.

전칠은 놀랍기도 기쁘기도 해서 눈을 2.512배(빛의 겉보기 등급에서 1등급 별은 2등급 별보다 2.512배 더 밝다.-편집자 주) 밝게 떴다. 능연이 이렇게 로맨틱한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전칠은 순간 조금 부끄러워졌다.

“왜 내 손인데요?”

능연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신 손이 가장 아름다우니까.”

전칠은 눈앞에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능연은 크게 햄버거를 베어 물고 꼭꼭 씹었다. 입 안이 온통 소고기 향기, 그리고 육즙으로 가득해졌다.

소고기를 잘게 간 패티로 만든 햄버거와 비교하면 구워서 다진 햄버거가 얼마나 육즙이 풍부한지 모른다. 식감도 훨씬 좋고. 그리고 스테이크보다 연해서 애써 고기를 씹을 필요도 없고 깨와 땅콩 소스가 어우러지고 토마토와 파인애플의 달콤새콤한 풍미도 더해졌다.

능연은 단숨에 햄버거를 홀랑 먹어 치우고는 손을 닦고 전칠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그림 그릴까요?”

“응응, 좋아요. 우린 먼저 시작해요. 다른 필요한 건 사람 시켜서 가지고 올게요.”

능연이 종이, 물감, 붓 같은 도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 가지고 올 생각이었다. 능연은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스킬이 어떤지 확인하면서 손에 익혀볼 생각이었으니까. 의학 스킬이 많아진 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서랍에서 A4용지를 꺼낸 능연은 연필도 두 자루 꺼내 슬슬 깎고는 의자에 앉아서 맞은편을 가리켰다. 전칠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사람들이 쳐다봐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바라보든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가슴이 콩콩 뛸 뿐이었다.

“편하게 있으면 돼요.”

능연은 한마디 하고는 연필을 들었다. 전칠은 순간 손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몰라 갈등했다.

능연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서서히 연필을 움직였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순간 종이 위에서 폭발했다.

평범한 A4용지, 평범한 연필이 능연의 손놀림 아래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전칠은 능연의 진지한 표정, 진지한 동작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지와 대뇌가 모두 정지하는 것 같았다.

“됐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능연이 연필을 내려놓고 종이를 전칠에게 내밀었다.

“우와!”

전칠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능연의 소묘는 정확도가 매우 높고 공간 관계가 특히 명확했다. 하지만 전칠의 눈엔 능연이 자기 손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렸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그림, 내가 가져도 돼요?”

전칠은 기쁨과 기대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요.”

능연은 싱긋 웃으며 연필을 주머니에 꽂았다.

“액자에 잘 넣어서 간직할게요.”

전칠은 환하게 웃으며 종이를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본 맥순은 카메라로 찍었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승진, 연봉 인상했을지도 모르는데.

“전 사장님, 도구 가지고 왔습니다.”

운리 직원 둘이 상자 다섯 개를 지고 헐떡이며 방 안에 나타났다. 맥순은 눈으로 질문하며 전칠을 바라봤다.

“두고 가면 돼요.”

전칠은 그림을 바라보며 마음이 둥둥 떠서 맥순이 생각한 것처럼 더 바라는 게 없었다. 맥순은 두 직원을 지휘해 상자들을 구석에 가져다 두고 나지막이 물었다.

“빠진 건 없지?”

두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중 한 명이 대답했다.

“최대한 다 갖췄어요. 아무래도 이쪽은 잘 몰라서요. 저도 친구한테 물어본 거거든요.”

“최대한 다 갖춰 놔. 모자란 건 나중에 채워두고.”

맥순은 추궁하진 않았지만, 목소리는 엄격했다.

“의사들이 그림 그릴 때 필요한 거예요?”

맥순이 눈을 부릅뜨는 듯 마는 듯, 눈빛으로 두 사람을 쫓아냈다.

“내가 고기 좀 구워 올게요.”

사람을 시켜 자신이 휴대하는 주얼리 박스에 A4 그림을 넣은 전칠은 직접 요리하려고 그릴 앞에 섰다.

전칠이 자기 상사의 상사의 상사의…… 상사라는 걸 잘 아는 요리사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불 앞은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28시간 트레이닝 받았어요.”

전칠은 긴 집게를 집어 고기를 불 위에 올리고 노련하게 뒤집었다.

28시간 동안 수학을 배우면 수확이 0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요리 배우기엔 충분하다. 요즘 젊은 사람이 요리를 28시간 배우는 일도 드물고 집밥을 잘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나 전칠은 고급 요리사가 직접 지도한 것이라서, 솜씨가 특별하진 않아도 간단하게 뒤집고, 불 조절하고, 고기 익히는 정도야 뭐.

맥순은 아까운 듯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 샤넬이…….”

전칠이 힐끔 내려다봤더니, 샤넬 원피스가 큰불에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내 이미지는 어때?”

다시 종이에 뭔가 끄적이는 능연을 힐끔 본 전칠이 가슴을 내밀며 우아해 보이려 이미지를 관리했다.

“이미지는 괜찮은데, 불이 너무 가까워요. 옷 타면 어떡해요.”

“20분만 버티면 돼.”

“20분…….”

맥순은 마음이 더 아파왔다.

“이 옷 주문 제작이죠? 가서 옷 갈아입고 오시면 어때요? 그동안 제가 보고 있을게요.”

“괜찮아, 괜찮아. 20분 후엔 가야 해. 비행기 팀에 알려요.”

“어딜 가시는데요?”

“핀란드. 참석해야 할 집안 행사가 있어. 소식을 막 받았지 뭐야. 오자마자 간다니, 능 선생이 화내지 않아야 할 텐데.”

“능 선생님이 어디 화를 내는 사람인가요.”

전칠이 할 수 없다는 듯 하는 말에 맥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그래. 능 선생 장점 중 하나지. 집안 행사라서 어쩔 수 없어. 아니면 전신 그려 달라고 했을 텐데.”

전칠은 점점 노련한 동작으로 고기를 뒤집다가 빵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능 선생, 내가 만든 햄버거 맛 좀 봐요.”

전칠은 요리 방법이나 소스를 바꾸지 않고 단순히 요리사의 방법대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28시간 요리 트레이닝을 받았을 뿐이라 요리사의 메뉴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전칠이 내민 햄버거를 양손으로 받아든 능연은 우선 잠시 관찰하다가 아무 말 없이 듬뿍 깨물었다.

“맛있어요.”

능연은 삼킨 다음 평가를 내렸고, 전칠은 기쁜 듯이 웃으며 곁에 앉아 능연이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능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자라서, 밥 먹을 때 누군가 지켜보는 건 능연에겐 디폴트였다.

능연은 맛을 만끽하며 햄버거를 먹어 치우고 물도 마신 다음 흡족한 듯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전칠이 살짝 몸을 트는데 능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긴급 수술이래요.”

능연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안한 듯 전칠을 바라봤다.

“환자를 많이 보내 달라고 해서, 요 며칠 환자가 많네요.”

“괜찮아요, 괜찮아. 나도 지금 핀란드에 가야 해요.”

부담이 사라진 전칠은 능연을 바라보며 저절로 웃음 지었다.

삐뽀삐뽀, 구급차 소리가 아침부터 밤까지 울렸다.

운화병원 같은 병원은 항상 의료 자원이 부족했다. 일 년 중 대부분 시간에 응급센터 병실 침대가 부족했고. 침대를 얻지 못한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가거나 줄 서서 기다리거나 혹은 연줄을 끌어다 구하거나…….

바로 병원으로 들어오고, 바로 수술을 배정받는다는 건 정말로 심각하고 진정한 긴급 환자라는 의미였다.

수술실로 들어간 능연은 연달아 수술했다.

예전 선배들과 비교하면 지금 병원 서전들의 수술량은 크게 늘었다. 특히 80년대 후반 의사면서 부주임 의사가 될 정도면 기본적으로 수술량을 초과해서 많이 했다는 뜻이다. 해마다 5, 6백 건, 심지어 7, 8백 건도 희한한 일이 아니다.

의사 집단에서 신문에 날 정도의 수술량은 천 건은 넘어야 한다. 안과는 제외, 항문외과도 제외다.

능연의 수술량은 여전히 전설급이었다. 특히 오전엔 응급 처치하고 저녁엔 수술, 이렇게 사흘이 흐르니 다들 턱이 빠져라 놀랐다.

“능 선생, 이 수술 끝나면 돌아가서 쉬자.”

어시하는 걸로 이미 지친 좌자전은 겨우 세 시간 자고 일어나 일어나자마자 능연을 설득하러 왔다. 얼마 전에 스태미너 포션을 마신 능연은 지금 정신이 가장 맑을 때였고 눈빛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아직은 안 쉬어도 돼요. 다들 힘들면, 미리 이야기했듯이 바꿔가며 쉬면 됩니다.”

트레이닝 캠프에서 온 연수의들이 잔뜩 있어서, 능 팀은 지금 정말로 조수가 부족하지 않고 기껏해야 효율이 조금 떨어질 뿐이었다. 그건 노련한 조수들의 상태가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문빈은 둘째 날부터 멍해지기 시작했다.

좌자전도 지금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태로 걱정스러운 듯 능연을 바라봤다.

“능 선생, 지금 쉬어야 할 사람은 너세요.”

“전 기운이 펄펄 넘쳐요.”

“아니, 좀 쉬라고! 한 시간이라도, 응?”

좌자전은 눈알을 굴리며 방법을 모색했다.

“능 선생, 아님 이러자. 한 시간만 자고 오면 잔소리 안 할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내가 다 막아줄게.”

해봐서 알지만, 죽을 것 같이 지친 상태에서 차라리 안 자면 모를까, 한 번 잠들면 바로 일어나지 못한다. 능연이 한 번 눈을 붙이면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버티지 못하리라 믿었다.

능연이 눈썹을 꿈틀하며 바라보자, 좌자전이 뜨끔한 듯 웃어 보였다. BOSS와 흥정하려다가 BOSS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건 이미 예상했다. 그러나 BOSS가 수술실에서 과로사하면 그땐 언짢고 안 언짢은 문제가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능연도 한 시간 쉬는 건 괜찮을 듯했다. 수술팀 다른 의사들 시간 조절할 여유도 주고 또 자기도 근육을 좀 풀어줄 수 있으니.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자전은 순간 한시름 놓았다.

“능 선생, 그럼 기다릴게. 이 수술 끝나면 바로다.”

“예.”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수술에 집중했다. 좌자전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지켜봤다. 아이, 기뻐라. 기쁘다. 기쁘네…….

“일어나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흔들어 깨우자 눈을 번쩍 뜬 좌자전이 비틀, 임기의 품에 안겼다. 퉁퉁한 임기의 품에 안겨 있으니 유난히 편안했다.

“나 잠들었어? 기대고 잠든겨?”

좌자전이 얼굴을 문지르며 임기를 바라봤다.

“혹시 코 골았어?”

“네, 잠들었어요. 코는 안 골았고요.”

임기가 핸드폰을 만지며 대답했다. 좌자전이 서서 자는 스킬이 있을 줄 몰랐다.

“능 선생은? 쉬러 갔어?”

“휴게실에 갔어요.”

“음.”

좌자전은 매무새를 가다듬고 성큼성큼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고 대부분 능 팀 의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능연은 별도의 휴게실이 있었다. 다른 휴게실과 같은 크기에 1인실. 그런데 문은 역시 열려 있었다.

좌자전은 눈을 감고 있는 능연을 바라보며 역시 잘생겼다고 감탄했다.

사흘 꼬박 잠을 안 잔 사람은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잠자는 시늉만 하려다가도 2초 만에 죽은 것처럼 잠드는 법이다. 좌자전은 흡족한 듯 웃고는 빈 침대가 있는 일선 휴게실로 들어가서 몇 초 만에 쿨쿨 잠들었다.

“능 선생님! 능 선생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좌자전이 멍하니 눈을 떴다. 몇 초 후, 호통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화들짝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일반 외과 수간호사인 호 간호사였다.

“능 선생 72시간 동안 한숨도 못 잤어요. 이제 막 잠 들었는데 급한 일 아니면…….”

“남편이 차 사고 났어요.”

호 간호사가 멍하니 뇌까리듯 하는 말에 좌자전이 멈칫했다.

“간 다쳤어요?”

“출혈이 심해요.”

거의 쉰 가까운 수간호사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능 선생 지친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알겠습니다. 세수하고 바로 갈게요.”

능연이 휴게실에서 걸어 나왔다. 스태미너 포션도 마신 데다가 살포시 눈을 붙여서 정신이 맑을 때였다.

호 간호사는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좌자전을 붙들고는 능연을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호 간호사님, 구급차 구역 가서 기다릴까요, 아니면 수술 구역에서 기다릴까요.”

좌자전이 나지막이 물었다. 묻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 휴게실에서 계속 기다릴 수도 없어서였다.

호 간호사는 좌자전을 붙들고 겨우 서서 티슈로 눈물을 찍어냈다.

“구급차 구역으로 가요.”

“알았어요. 그럼 갑시다.”

좌자전은 긴말 없이 호 간호사를 데리고 휴게실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밤이지만 응급 센터 건물 복도와 계단엔 여전히 환자와 보호자로 넘쳤고, 조금 구석진 곳에도 누워있거나 앉아 있었다. 아예 이불을 깔고 바람을 피해 자는 사람도 있었다.

좌자전은 구급차 구역으로 내려온 후에야 생각 많은 듯 입을 열었다.

“서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다들 이야기하는데, 사실 서민 고통은 응급실을 보면 알죠. 병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줄 서서 수술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능 선생은 며칠 전 사고 때문에 최대한 수술을 많이 하려고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아요. 사흘 내내 계속 환자 돌봤으니까.”

호 간호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일로 그녀도 생각이 많았다.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는 청탁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부주임 혹은 주임급 의사는 매일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친척, 친구가 전화를 건다.

어떤 때는 겨우 일면식 있는 밥 친구지만, 부탁은 대부분 생사존망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의사는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도와준다.

사실 호 간호사는 응급센터와 그렇게 밀접한 사이라고 할 순 없었다. 주로 일반 외과 일만으로 충분히 바쁜 데다가, 호 간호사는 간호과 일로도 정신없으니까. 그러나 가족에게 일이 생기니 역시 가장 먼저 능연을 떠올렸다.

일반 외과 간호사 생활을 30년 했고, 각종 질병, 수술 중 상황을 지극히 많이 봐왔다. 일반 외과 의사들의 실력이 어떤지는 의사 본인보다 더 훤하고.

그래서 간이 상한 대출혈 케이스는 능연이 가장 훌륭한 의사라는 걸 호 간호사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냥 좋은 의사, 혹은 2~30% 정도 생존 확률이 높은 의사가 아니라, 다른 의사보다 생존 확률이 몇 배는 높은 의사라는 걸.

바로 그래서 전화 받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바로 일반 외과에서 응급센터까지 달려온 것이다.

오는 길에 능연이 거절하면 어쩌나, 능연이 수술 중이면 어쩌나, 응급센터에 없으면 어쩌나, 온갖 잡생각을 다했다. 응급센터에서 일하는 건 아니라도 능연의 성격이 남다르고 사귀기 좋은 성격이 아닌 건 잘았다. 그런 능연이 먼저 나와서 바로 승낙할 줄은 정말 몰랐다.

구급차 구역 앞에 선 능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호 간호사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고생 많다고 이야기하자니 너무 가깝게 구는 것 같고, 인사치레라도 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자 호 간호사는 재빨리 받아서 긴장한 얼굴로 몇 마디 대답하고는 좌자전을 바라봤다.

“도착했대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좌자전은 상황을 알리러 앞으로 갔다. 접수 쪽 간호사도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스트레처 카에 실려 안으로 들어왔다.

지나치게 많이 흘린 피를 본 호 간호사는 가슴이 철렁해서 뭐라고 잘 들리지 않은 말을 웅얼댔다.

“수술실로 보내고, 뇌 외과, 골과, 콜 해줘요.”

슬쩍 살펴본 능연은 바로 정확한 오더를 내렸다.

“뇌 외과?”

“혹시나 몰라서 콜 하는 걸 겁니다.”

호 간호사가 놀라서 하는 말에 좌자전은 설득하듯 말했다. 호 간호사는 속고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도 모르게 능연의 걸음을 따라 수술 구역으로 향했다.

“능 선생한테 맡기세요.”

좌자전이 말리자, 호 간호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따라가고는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 외과라면 당연히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응급센터인 만큼 상대의 생각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좌자전이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밀치고 들어가서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문밖에 서 있는 동안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이미 가장 훌륭한 의사를 찾았잖아.”

호 간호사의 갈등하던 표정도 담담해졌다. 호 간호사의 감정이 안정된 걸 본 좌자전도 안도했다.

“그래도 걱정되면 사람 불러서 들여보냈다가 중간에 보고 받으세요. 직접 들어가지 말고요.”

“응, 그럴게요.”

호 간호사도 좌자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매우 냉정하게 모르는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고, 모르는 사람의 가슴을 열어 수술하지만, 지인 혹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냉정할 수 없다.

백전 경험의 노련한 의사도 익숙한 동료의 시신을 해부할 때면 정신없이 토한다. 능수능란한 간호사도 자기 아버지 주사 놓을 때 몇 번이나 놓고.

호 간호사도 자기가 나중에 어떤 모습일지 모를 리 없어서, 좌자전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몇 분 뒤, 일반 외과 간호사가 무탈하게 응급센터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능연이 수술하는 모습을 탐욕스럽게 10초 정도 바라보다가 수술을 지켜보는 의사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되어 가요?”

“지혈됐어요. 능 선생이 이제 간 절제 시작할 거고요.”

일반 외과 간호사는 매우 기뻐했다. 출혈이 잡혔다면 안심하고 보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간호사가 대로할 일이 생기면 큰일이니까.

“그럼 문제없겠죠?”

간호사가 목소리를 낮춰 묻는 말에 응급센터 레지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꽤 귀엽다는 생각에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이런 수술은 우리 응급센터에서 자주 해요. 100%라고는 말하지 못해도 능 선생이 나서면 뭐.”

“능 선생님은 진짜 대단하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간호사는 문득 떠오르는 듯 화들짝 핸드폰을 꺼냈다.

“어서 수간호사님한테 보고해야지.”

전화 저쪽엔 일반 외과 의사들도 몰려들었다.

“상황 괜찮은가 봐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호 간호사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능 선생 사흘 못 잤다던데, 침대에서 능 선생을 불러내신 거예요?”

곁에 있던 의사가 웃는 듯 마는 듯 은근 돌려 까는 것처럼 묻자, 호 간호사가 멈칫했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음, 맞아요.”

“능연을 너무 좋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호 간호사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여전히 냉담하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간 절제 시작해요. 능 선생님 말에 따르면 많이 자르지 않을 거래요.”

“순조롭게 하고 있어요. 혈류 차단 시간도 15분 넘지 않았어요.”

“능 선생님이 직접 봉합해요.”

수술실의 소식이 전해질수록 호 간호사의 마음도 갈수록 진정됐다. 일반 외과 의사들도 틈틈이 와서 예의 바르게 상황을 묻고 갔다. 특히 직급이 높은 의사는 다정하게 위로만 할 뿐, 호 간호사가 의사를 골라 수술한 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고 나서 다친 건 호 간호사 남편이고, 호 간호사 본인이 환자를 일반 외과에 보내지 않겠다면, 일반 외과에서도 가끔 간 절제 수술을 하는 게 아니라면, 원래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

사실 지금도 일반 외과 의사들이 할 말은 없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물으면,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 본인도 가족을 능연에게 맡길 테니까.

그나마 이야기할 만한 건 능연의 초장시간 업무 시간뿐이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사적으로 할 말이었다.

수술이 끝날 때쯤, 호 간호사의 친척, 친구가 속속 도착했다. 은퇴한 큰언니를 본 호 간호사는 간호사 복장을 한 상태로 긴장이 풀려서 큰언니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괜찮아, 괜찮아. 제때 병원에 왔잖니.”

큰언니는 호 간호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살며시 그녀를 위로했다.

“무서워, 언니.”

호 간호사는 눈물을 훔치며 머쓱한 듯 바로 서서 나지막이 덧붙였다.

“뒤늦게 무서운 거 있지.”

그녀는 수술실을 돌아봤다. 수술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걱정되는 게 너무 많은데 차마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괜찮아. 무섭기는. 병원에 왔잖니. 그럼 됐지. 수술하는 능 선생이라는 분, 대단한 의사라며.”

큰언니가 호 간호사를 위로하며 다른 의사들이 거리낄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일반 외과 의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편해지는 일도 많은 법이다.

호 간호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양쪽 모두에게 해명하듯 말했다.

“아깐 너무 당황해서, 능 선생님이 안 계시거나 혹시 거절할까 봐…….”

그녀는 능연이 사흘 내내 한숨도 자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다가 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큰언니도 덩달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인간은 이런 생사 고비에서 감정이 약해진다.

일반 외과 의사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더욱더 부러워했다. 바로 이렇게 사람을 구하고 살리려고 의사가 된 것이다.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것도 일종의 성과지만 환자와 보호자가 믿고 의지하는 느낌은 또 다른 성과였다.

“괜찮아. 그렇게 대단한 의사니까 분명 아무 일 없을 거야.”

큰언니는 호 간호사의 손을 잡고 토닥이면서 위로했다. 다른 친척들도 몰려들어서 나지막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묻거나 위로했다.

전화 몇 통을 더 받은 호 간호사의 마음도 다시 차분해졌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소식은 족족 좋은 소식이었고, 가까운 사람이라 유난히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그렇지 진작 침착해질 소식이었다.

“나오셨네요.”

앞에 있던 간호사가 냉큼 보고하는 소리와 함께 수술실 복도에 크고 멋진 모습이 나타났다.

“순조로웠어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능연이 간단하지만 힘차게 하는 말에 호 간호사의 눈이 또 그렁그렁해졌다. 그녀는 힘껏 눈물을 닦고는 저도 모르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능 선생님. 나는……. 아유, 이렇게 직접 나와서 알려주시고.”

“별거 아니에요. 전 이제 다시 가서 좀 자려고요. 좌 선생님이 잘 돌봐 주실 거예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사실 좌자전이 건의해서 능연이 나와서 설명한 것이다.

이번엔 호 간호사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친척, 친구들도 능연이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어서 저마다 입을 열었다.

“어서 가서 쉬세요, 정말로 너무 감사해요.”

“능 선생님, 많이 힘드시죠. 의사란 참 자비롭네요.”

“능 선생님, 어서 가서 쉬세요.”

“능 선생님, 너무 감사해요.”

능연은 대충 대꾸하고 휴게실로 돌아갔다. 피곤하진 않은데 수술실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의사며, 간호사며 다들 점점 걱정해서 고집부릴 것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용모가 평범해서 사람들이 이름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레지도 비슷한 시간에 휴게실로 들어왔다.

“저기…… 선생님, 쉬시려고요?”

왕가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휴게실에 왔겠죠?”

“혹시 코 골아요?”

“그런 걸 왜 물어요?”

“혹시 코 골면 1번 휴게실로 가세요. 다른 사람한테 영향 줄까 봐요.”

“언제부터 휴게실에서 그런 거까지 관리했죠?”

“다 좋은 일이잖아요.”

왕가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혹시 코 심하게 굴면 약이라도 먹든가, 차라리 집에 가서 쉬세요. 다른 선생님들이 불만 터트리지 않게요.”

레지는 점점 멍해졌지만, 아직도 진단학을 배우고 있는 머리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니 타당한 것도 같았다.

“사실…….”

왕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아시잖아요. 의견을 낸 선생님들도 있거든요.”

“무슨 의견?”

“아니지, 누군지 물어야죠.”

“그게 누군데요?”

“그건 말 못 해요. 어찌 됐든 나이 많은 의사예요.”

왕가의 얼굴에 좌자전 선생님 있잖아요, 라고 쓰인 듯했다. 은근한 협박이 통했는지, 레지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듣자 하니 일리 있는 거 같네요.”

“그럼 됐어요. 몸조심하고 어서 쉬세요. 이따 환자 생기면 또 일어나야 하잖아요.”

왕가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그 레지를 능연의 휴게실과 제일 먼 1번 휴게실로 들여보냈다.

용모 평범 무명 씨는 경쾌한 걸음으로 휴게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싫지만, 비밀에 참여한 것 같은 흥분감이 언짢음을 눌렀다. 운화병원에 있는 동안 이렇게 비밀스럽게 말을 건 간호사는 없었다.

그렇게 능연은 매우 잘, 매우 편안하게 잠들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쯤, 자동으로 눈을 뜬 능연은 23초 정도 침대에서 버티다가 내려와서 세수했다.

“능 선생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잘 주무셨어요?”

당직 간호사가 능연을 보고 매우 놀라며 물었다.

“일어났어요. 잘 잤고요.”

능연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하얀 가운을 벗고 자기 겉옷으로 갈아입었다.

“좀 나갔다 올게요. 일 생기면 전화 줘요.”

“네. 그럼 수술은 배정 안 하시고요?”

“일단은요.”

“그런데…… 어디 가세요?”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 혹시 불편하시면…….”

“맛집 거리에 가서 뭐 좀 먹으려고요.”

능연이 배를 문질렀다. 며칠 내내 수술하느라 햄버거 같은 것만 먹어서 먹을 게 당겼다. 간호사는 눈이 번쩍였다. 맛집에 쇼핑, 거기에 능 선생이 있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데이트만 하면 되는데…….

요리조리 둘러보던 간호사는 서둘러 휴가 신청서를 꺼내 채우기 시작했다.

운화 시 맛집 거리는 몇 번 조정 끝에 지금은 많이 정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맛집 거리 특유의 어깨 부딪침과 위생 문제는 거의 고질적인 전통이 되었다. 능연은 이곳의 떠들썩함과 사람 냄새가 좋은 거지, 이곳의 비좁음과 대장균이 좋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능연은 보통 안쪽으로 가지 않고 골목 어귀의 맛집에 자리를 잡곤 했다.

소가 식당이야말로 능연의 조건에 부합하는 가게였다. 소가 식당에 있으면 하구 진료소에 있는 것처럼 내부는 조용하고 안전하면서 밖은 떠들썩한 느낌이 있었다.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복강경 수술 같달까.

오늘 퇴근 시간은 집에 가기에도 애매해서, 능연은 제타를 세우고 꽤 편안한 느낌으로 새벽 다섯 시의 맛집 거리를 바라봤다.

사장과 점원, 그리고 손님에겐 새벽 다섯 시 맛집 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아침이 아니라 야식에 가까울 수도 있다.

“능 선생님 오셨어요. 뭐 드실래요?”

한눈에 능연을 알아본 점원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생선 죽하고 반찬, 또 소고기도 좀 주세요.”

능연은 대충 주문하고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밤샘 족도 거의 돌아갔을 시간이라 식당엔 두 테이블밖에 없었다. 점원도 둘이서 느릿느릿 일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된 종업원이 죽과 음식을 들고 왔다.

“사장님은 물건 떼러 가셨어요. 새 메뉴 드셔 보실래요? 소고기 찜인데 죽이랑 잘 어울려요.”

능연의 시선이 생선 죽을 따라 이동했다.

“사장님이 만든 메뉴인가요?”

“당연히 아니죠. 제가 만든 메뉴에요.”

오래된 점원이 가슴을 활짝 폈다.

“사장님은 요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음식은 만날 하던 것만 해요. 우리 젊은 사람과 달리 새 걸 잘 안 만들더라고요.”

능연은 고개를 들어 젊은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직원의 팔자주름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예, 한 번 먹어 볼게요.”

“그죠? 역시 새로운 게 좋죠? 사장님한테 만날 이야기하거든요. 요즘 식당은 쉴 새 없이 새 메뉴를 개발해야 한다고. 만날 같은 것만 나오면 단골손님들이 질리죠.”

새벽에 점원은 조금 말이 많았다. 어쩌면 졸려서 말이 많아지는지도 모르겠고.

소고기 찜을 한 입 맛본 능연은 묘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어때요?”

기대 가득한 직원의 물음에 능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12점이요.”

“120%란 말씀이세요?”

“백 점 만점에요.”

능연은 살며시 소고기 찜을 밀어냈다.

“볶음이나 구이로 바꿔주세요.”

“하지만, 하지만 이건 새 메뉴인데요. 사장님 안 계실 땐 제가 대신 일 처리 해요.”

직원은 허리를 굽혀 접시를 들어 올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예. 구이는 소 사장님 맛이랑 비슷할 거라고 믿어요.”

“뭘 하든 사장님보다 못하진 않을 텐데.”

직원은 강인하게 허리를 세우고 투덜거리며 다시 고기를 구우러 갔다.

“분명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 낮에 먹으면 이러지 않을걸요. 요즘 다들 너무 세게 먹어요. 말로는 담담한 거, 담담한 거 하면서도 마라에 익숙해졌어.”

그는 투덜거리면서 꼬치를 집어 불에 올렸다.

“아악!”

점원이 소 사장과 비슷한 톤으로 고함쳤다. 능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닝 캠프 연수의들에게 매일 시범 수술해주는 동안, 잘 따라오는 연수의들에게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소 사장의 직원도 소고기 찜 개발에는 실패했지만, 막무가내로 개발하는 게 아니라 매우 기초가 탄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됐든, 사장의 고기 굽는 기술을 배우면서 목소리까지 비슷해지려면 큰 공을 들였어야 할 테니까.

음식을 내주는 점원의 늘어뜨린 오른손이 능연의 추측을 입증했다. 팔자주름 직원이 왼손에 뜨끈뜨끈한 꼬치를 들고 오른손에 하얀 구급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상자 손잡이엔 미처 굳지 않은 신선한 핏방울이 그의 느긋한 발걸음처럼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소 사장이 공들여 고른 소가 식당 구급상자엔 두 가지 특성이 있었다. 하나는 손잡이가 매우 부드러워서 설사 손바닥을 다쳐도 아프지 않게 잡을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손잡이에 홈이 있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지 않은 이상 피가 바닥에 흘러 식당 위생이 문제 될 게 없다는 점.

물론 구급상자의 무게와 안에 담긴 물건도 매우 까다롭게 골랐고, 외부 케이스 청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익숙하게 구급상자 드는 기술을 캐치한 직원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접시를 들고 다친 손으로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고인 피는 잘 치우는 건 물론이었고.

“능 선생님, 죄송하지만 좀 꿰매주실 수 있나요? 꼬치에 손을 찔렸어요. 오염된 꼬치는 다 버렸으니까 안심하시고요.”

직원이 웃으며 하는 말에 능연은 의외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선 알코올겔을 꺼내 손을 닦고 직원의 오른손을 살폈다.

소가 식당에서 오래 일한 만큼, 오래된 직원의 손바닥엔 여기저기 찔린 흉터가 있었다. 대부분 작은 점으로 남았지만 찢어진 부분도 있었다. 아마도 찔린 데 또 찔려서 생긴 특수 상처일 것이다.

오늘 찔린 곳은 겨우 두 곳이고 면봉만 한 두께라 심각한 건 아니었다. 직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씁씁 대면서 한 손으로 구급상자를 열어 일회용 바늘과 소독약 등을 꺼냈다.

“사장님이 안 계시니 팍팍 써도 돼요.”

“네.”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한 능연은 데브리망부터 하고 두 바늘 꿰매고 다시 물었다.

“파상풍 주사는 맞았죠?”

“파상풍, 광견병. 해마다 정기적으로 맞습니다.”

“그럼 됐어요.”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거즈를 고정해주고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자리를 바꿔서 구이를 만끽했다. 살짝 식은 고기는 오히려 풍부한 향이 났고 유심히 느껴보면 소고기 식감과 매콤한 향이 어우러졌다. 능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소 사장님 풍이네요.”

“그야 당연하죠. 명검도 사람 손을 거쳐야 보배가 되는 법이니까요.”

물건 정리를 마친 직원이 피식 웃어 보였다.

능연은 꼬치 두 개를 호로록 먹고 생선 죽도 먹으면서 즐겁게 식사했다. 창밖의 거리에는 몇 없는 사람이 비틀비틀, 떠들썩하면서도 평온한 장면을 연출했다.

직원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정한 듯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능 선생님, 무릎이 안 좋은 것도 선생님 찾아가도 되죠?”

“네. 하지만 무릎 수술은 범위가 넓어요. 일반적으로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기도 어렵고요. 저는 주로 반월판과 인대 수술합니다.”

의사가 된 후로, 밥을 먹든 운동을 하든, 환자나 환자 보호자 혹은 환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뭐 만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수술을 마다할 사람도 아니고.

“바로 반월판이에요.”

직원이 냉큼 대답했다.

“여기 오는 손님인데요, 축구를 좋아하거든요. 그러다가 반월판이 나갔대요. 여기 자주 와서 우리 사장님이 다치면 병원 가는 거 알거든요. 며칠 전에 다리 절면서 밥 먹으러 와서는 묻더라고요. 그런데 그날 사장님이 안 계셔서.”

“그럼 병원 와서 검사받아 보라고 하세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능연은 문득 아직 열지 않은 중급 보물 상자 세 개를 떠올렸다. 이번 응급 퀘스트로 모두 네 개 얻었고 하나를 열어 소묘 스킬을 얻은 후로 아직 열지 않았다. 그는 보물 상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전 출근 안 하고 금요일에 진료 봐요.”

직원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고집스럽게 능연의 돈을 받지 않고 차까지 배웅했다.

“왔어요?”

“왔습니다. 언제 왔어요?”

“한 30분쯤? 이게 곧 열겠네요.”

황무사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계단에 올려서 일본 만화 캐릭터 포즈를 취하며 허세 가득하게 말을 이었다.

“하구 진료소는 보통 7시 반에 열죠. 그래도 가끔 10분, 20분 일찍 열 때도 있으니까 일찍 와서 나쁠 건 없어요.”

같이 기다리던 사람이 기운 없이 황무사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다들 제약회사 직원이라, 남는 기운이 있으면 의사에게 아부해야지 같은 처지끼리 아부해 봐야 아무런 소용 없었다.

그래도 황무사는 뿌듯해했다. 그는 막강한 제약회사 영업 사원도 아니고 능연을 완전히 붙들지도 못 해서 점점 세력이 커지는 능연 곁에 다른 제약회사 사람이 나타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처음엔 막아 보려고 애쓰던 황무사도 차츰 즐기기로 했다. 창서 제약회사의 규모가 작진 않지만, 그래도 독점할 정도는 아니고 본인은 능연처럼 큰 고객을 독식할 능력도 없었다. 여자라면 그래도 후배처럼 도전해 볼 만도 하겠지만…….

물론 하루에 몇 번 문안드리고 잠자면서도 돈 버는 거로는 황무사도 업계에서 부러움 사는 인물이었고, 그런 생활이 길어질수록 황무사도 차츰 즐기게 됐다. 큰 뜻은 모델을 포기했을 때 이미 사라졌고, 운이 좋아서 능연 같은 큰 고객을 만나지 못했다면 진작 타락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뭐……. 황무사는 맥주가 키워낸 아랫배를 두드리며 무시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힐끔 봤다.

문이 열리자, 제약회사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가 화장실 청소할 사람은 하고, 화분에 물 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황무사는 큰 어항 앞으로 가서 물고기 먹이 주는 일을 얻어냈다. 그가 구해오는 먹이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반질반질하게 길러내서 능결죽이 매우 좋아했다.

움직임을 들은 능연도 문을 열고 나왔다. 능연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황무사는 바로 고개를 들고 가장 먼저 인사했다.

“능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일어났어요.”

능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진료소라서 항상 사람들이 오갔다. 어릴 땐 이웃들이 자주 음식을 보내거나 능연을 초대해서 음식을 먹였다.

“제가 죽 떠올게요.”

황무사가 더없이 싹싹하게 구는 모습에 능연은 감사 인사하고는 덧붙였다.

“이젤이랑 붓 좀 차고에서 정원으로 옮겨 주세요.”

“이젤이요? 그림 연습하시려고요?”

“비슷해요.”

황무사가 깜짝 놀라 묻는 말에 능연은 별다른 설명할 생각 없이 대답했다.

어제 나머지 상자 세 개를 모두 열었는데, 역시나 ‘가상인간’이 나와서 가상인간 사용 시간이 8시간 늘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에선 새 스킬 ‘스케치(그랜드마스터급)’가 나왔다. 스케치란 선, 곡선, 면, 명암 스케치를 모두 포함한 기술이었다. 이런 기술을 얻은 능연은 바로 오늘 계획을 바꿨다. 덕분에 왕자 영광엔 영광스러운 선수 한 명이 줄었다.

능연의 지시를 받은 황무사와 다른 제약회사 직원 하나가 차고로 달려가 밀차로 상자들을 모두 꺼내왔다.

“능 선생님, 이쪽에 두면 되나요?”

황무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보고했다.

“고마워요.”

능연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향해서 파라솔을 펼쳤다. 그리고는 MABEF(세계 대표 이젤 브랜드. 이탈리아 회사로 4대를 거친 전통을 자랑. 보스니아산 월넛나무만 사용한다고 함.)라고 적힌 상자에서 커다란 이젤을 꺼내 세웠다.

“스케치하시려고요? 저도 학교 다닐 때 그림 배웠어요. 심부름해드릴 수 있어요.”

제약회사 직원 하나가 다가가 웃으며 하는 말에 능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배경 준비해 드릴까요? 정원 풍경 그리실 거면 주방 앞에 잡동사니를 치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자리 잡고 앉은 능연은 종이를 펼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스케치 말고 그냥 그리는 거예요.”

“그럼 제가 모델 할까요?”

그 님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물었다. 능연은 담담하게 상대를 바라봤다.

“해부 구조 그릴 거예요.”

능연은 어느새 연필을 쥐고 종이에 슥슥 그려 내려갔다. 그리고 곧 앞이 짧고 뒤가 굵은 간 그림이 종이에 나타났다.

제약회사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이게 뭐야.

능연이 종이 방향을 돌리더니 디테일을 작업하고 계속 슥슥 그리나 싶더니 간 뒷부분에 혈관이 나타났다. 황무사는 의학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혈관이 맞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뭐 그리시는 거예요?”

“한가해서 그동안 수술한 것 중에 기억에 남은 간의 혈관 변이를 그리는 겁니다.”

황무사가 모르겠다는 듯 묻는 말에 능연은 대답하고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렸다. 기억 쪽엔 자신 있었다.

물론, 한눈에 열 줄씩 보면서 바로 외워버리는 천재와 비교하면 기억력의 한계가 있고, 기껏해야 어느 러브레터를 어느 여학생이 준 건지, 어떤 선물이 이미 답례한 건지 기억하는 정도…….

그 정도도 못 했으면 순조롭게 학교생활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똑같거나 비슷한 여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 간 혈관 변이가 훨씬 기억하기 쉬웠다.

능연의 수술은 모두 고화질 영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사진은 소묘와 스케치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논문에 쓸 때도 피투성이 사진보다 그림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능연은 그런 면이 소묘 스킬의 최대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제약회사 직원들은 잠시 웅성대다가 서서히 평온을 찾았다. 능연과 능가 시중을 자주 드는 제약회사 직원들은 이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냥 자신을 설득했다. 게다가 능연은 지금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그림을 그릴 뿐이니까. 게다가 매우 빠르고 특이하게 그린다는 것 정도?

단숨에 한 시간 넘게 그림을 그린 능연은 그제야 잠시 쉬면서 물을 마시고는 핸드폰을 꺼내 여원에게 전화했다.

“간 혈관 변이 그림 몇 장 그렸으니까 수술 영상하고 대조하고 정리해 주세요.”

“혈관 변이 그림? 그리기 어려웠겠네.”

드넓은 창고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여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별로요.”

능연이 세어보니 서른 몇 장이었고 그다지 많은 작업량은 아니었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

“그럼 더 많이 그려. 케이스가 많이 모이면 바로 책 낼 수 있어.”

“알겠어요.”

쉬운 일이라서, 능연은 바로 승낙했다.

의사가 책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단한 의사에겐 매우 흔한 일이다.

중국에서 책을 낼 때 주로 세 가지를 중시한다. 내용, 비용, 판매량.

내용이야 뭐, 책엔 당연히 무언가 써야 했고 누군가에게 태클 걸리지 않으려면 남이 쓰지 않은 내용을 써야 했다. 설사 다른 사람이 쓴 적 없는 쓰레기라고 해도.

출판 비용과 판매량은 사실 하나로 봐야 한다. 수많은 책, 특히 전문 서적의 판매량은 실로 걱정스러워서, 출판하려는 사람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책을 내주는 출판사가 없다.

중국은 ISBN 비용에는 특색이 있다. 4, 5만 위안이라는 가격이 많이 비싼 건 아니지만, 평범한 의사에겐 문턱이 높았다. 게다가 인쇄 경비는 누가 지불할지 역시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물론 대단한 의사에겐 아무런 문제가 아니지만.

책을 낸다는 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걸 들은 황무사는 이미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능연이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황무사가 가장 먼저 나섰다.

“능 선생님, 미안해요. 어쩌다가 들었는데, 저기…… 책 내실 거면 우리 회사에서 내시죠.”

“책도 내요?”

능연은 황무사가 전화 내용을 들은 걸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디폴트니까.

황무사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모델 같은 긴 다리를 흔들어댔다.

“개 잘 아는 출판사가 있어요. 내용부터 표지, 모두 선생님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냥 생각일 뿐이지 당장 실천할 생각은 없었다. 능연을 위해 뭐든 너무 하고 싶은 황무사는 조금 실망했다.

창서 제약 기준으로 능연이 가져다주는 이윤은 그가 새벽 세 시부터 하구 진료소에 와서 바늘을 바꿔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능연이 더한 요구를 한 적이 없어서 황무사는 매우 난감했다.

창서 제약과 다른 제약회사가 능연을 위해 하는 일이 같아서는 앞으로도 이런 영업 매출을 유지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책 한 권 내줄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안전하고 의미도 있고 창서 제약 능력과 수준에도 맞고.

다시 물러나서 능연이 그림 그리는 걸 지켜보던 황무사는 머릿속에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능연은 최근에 했던, 기억에 또렷하게 남은 간 혈관 변이 그림을 60장 넘게 그리면서 두어 시간을 훌쩍 보냈다. 능연은 그랜드마스터급 스케치 스킬이 그렇게 빠른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림은 그가 좋아하는 취미는 아니었다. 도화지는 수술할 때만큼 손맛이 없고, 연필도 B 어쩌고 해도 각종 수술 기계보다 재미없었다.

완성품을 집에 걸고 천천히 감상할 순 있지만, 능연 눈엔 해부 시체만큼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능연은 연필을 내려놓고 그린 그림을 치우고는 가장 앞에 있는 황무사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미안하지만, 이것들 다시 차고에 가져다 놓으세요.”

“예썰!”

안 그래도 근질근질하던 황무사는 못 참겠다는 듯 튀어 나갔다. 일어나 허리를 펴던 능연에게 순간 이목이 쏠렸다.

“멋있다.”

새로 온 제약회사 여직원은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능연을 바라봤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부셨다. 여직원은 곧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서면서 왼발 앞으로, 오른발 뒤로, 투자자 면접에 통과하기 부족함이 없는 가슴을 내밀며 웃어 보였다.

“능 선생님, 그림에 필이 있어서 그런데 한 장 주시면 안 돼요?”

그녀의 경험으로 능연처럼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선물을 받았을 테니, 선물을 주는 것보다 차라리 선물을 달라고 조르거나 심지어 돈을 빌리는 게 더 기억에 남을 게 분명했다.

능연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좀.”

“응? 많이 그리셨잖아요. 한 장 정도는 주셔도 될 텐데요.”

새로 온 제약회사 여직원은 살짝 애교를 부리고는 주변을 훑어봤다. 경험이 풍부한 제약회사 직원들은 테디 곰 보는 표정으로 새로 온 여직원을 바라봤다. 흠칫한 여직원이 미처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능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다른 그림이에요. 간 좌동맥에서 위 좌동맥으로 가는 것도 있고, 간 좌동맥 자체에 동맥이 있는 것도 있고. 이걸 주면 다시 그려야 해요.”

능연은 잠시 상대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다시 그리기 싫어요.”

그림이 수술도 아니고,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막 일어나 정리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 차를 내릴 준비하던 도평 여사도 고개를 내밀고는 조금 싫다는 듯 물었다.

“어느 제약회사 직원?”

도평을 본 직원은 바로 가슴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북의 기술 제약회사 영업 사원이에요. 저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래요. 진료소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라 상관없는 사람까지 있을 곳이 없어요. 앞으로 오기 전에 전화 한 통 하고.”

도평은 한마디 남기고는 우아한 미소를 남기고 차 내리러 갔다.

신입 제약회사 직원은 조금 멍한 듯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경쟁자인 다른 제약회사 직원들은 따듯한 눈빛으로 신입 제약회사 직원 혹은 그녀의 가슴을 바라봤다.

“영업 길이 막혔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정상이니까.”

옹졸하게 생기진 않은 중년 제약회사 직원이 껄껄 웃으며 다가가 절친 아저씨처럼 위로했다.

“나도 처음엔 비슷한 문제를 겪었거든.”

“우린 다르죠.”

신입 직원이 숨을 훅 내쉬고는 그의 말을 잘랐다.

“뭐가 달라?”

“못생긴 사람이 겪는 문제가 같을 리가 있어요?”

신입 직원은 속 시원해진 듯 다시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펼치고는 진료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진지한 눈으로 하구 진료소 문패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젠간 온 집안이 시집와 달라고 팔인교(八人轎)로 날 모시러 올 날이 올 거야.”

“그 가마, 능연의 손자가 들어야 하나? 그런 날이 올 때면 능 선생은 가마 들 기운이 없을 텐데.”

발아래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인 직원은 바로 운화병원에서 상징성 있는 의사, 여원을 알아봤다.

직원은 뭐라고 더 말도 못 하고 입을 가린 채 줄행랑쳤다. 어차피 다들 성형해서 얼굴도 비슷했고, 가슴 모양도 비슷하게 키워서 나중에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여원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는, 바닥에 떨어진 이름표를 주머니에 넣고 진료소로 들어갔다.

“여 선생님.”

“여 주치의.”

다들 병원 출입하는 제약회사 직원이라 두드러지는 점이 있는 여원을 바로 알아봤다. 웃으면서 인사한 여원은 곧 파라솔 아래 있는 능연을 발견했다.

“능 선생. 출판사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봤어. 그래서 그림 좀 보려고 왔지.”

여원은 그렇게 말해놓고 덧붙였다.

“사진 좀 찍어서 보내달래. 그림이 전문적일 건 없고, 특색이 있으면 좋겠대. 수량이 많으면 좋고…….”

능연이 스케치 더미를 여원에게 내밀었다.

“다…… 스케치야?”

몇 장 넘겨 본 여원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스케치에 예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혈관과 해부 관계를 매우 똑똑히 나타냈고, 진지함과 피땀이 바로 느껴졌다. 한 장, 또 한 장 넘기던 여원의 호두만 한 손이 덜덜 떨렸다.

휴가 기간에 자신은 열심히 소장품을 넓혀가는 동안 능 선생이 이렇게 많은 간 해부도를 그렸을 줄은 몰랐다.

“능 선생, 참 고생한다.”

여원은 목소리가 다 떨렸다.

“걱정하지 마. 출판사 쪽엔 잘 설명할게.”

왕자 영광 화면에 손을 올리고 있던 능연은 사회 기대에 부응하는 예의를 보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살짝 망설였다.

“이걸 다 능 선생님이 그리셨어요?”

출판사 편집장 오장시는 스케치를 바라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맞아요.”

“정말 다재다능하시네요.”

오장시는 마음속에서 우러나 칭찬했다.

운화대학 출판사 편집장이나 되는 오장시는 굳이 병원까지 와서 원고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능연의 유명세를 알고 또 능연의 사진도 보아서, 나중에 병이 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능연을 만나보고 안면을 틀 겸 운화병원 응급센터으로 왔다.

의사 연락처 하나 얻자고 온 건데 한 박스 가득한 스케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원은 더 탄복했다.

“능 선생은 요즘 하루에 열 몇 시간 일하고 하루에 수술도 6건이나 해요. 거기에 회진도 하지, 운화대학 학생도 가르치지, 학회도 참여하지. 이 그림은 다 시간 내서 그린 거예요. 전에 집에서도 그림 여러 장 봤는데 나머지는 병원에서 그리는 거겠지?”

여원도 마찬가지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능연을 바라봤다. 병원에서 그림 그리는 걸 못 본 것 같았다.

능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집이랑 병원에서 그리죠.”

어제 쉬는 시간에 집에서 몇십 장 그렸고 오늘 병원 와서 쉬는 동안 또 7, 80장 그렸으니 다 합하면 꽤 많았다. 능연도 매우 만족했다. 병원에 있을 때 수술과 응급 환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 다른 의사라면 수면 부족에 허덕일 때 능연은 몇십 분 혹은 몇 시간을 할애해 기록을 남기는 건 힘든 일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와 같은 나이대 젊은 의사들은 지금 하루에 몇 시간 차트 쓰느라 고생하니까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힘든 일이고.

여원은 확신하고 다시 오장시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능 선생은 지극히 드문 휴식 시간을 이용해서 이 스케치를 그린 거예요. 피땀을 흘리며 그린 거죠. 능 선생이 수천 건 수술을 하며 얻은 것들이라 이것 자체가 심혈 작이에요.”

“정말 대단하군요.”

오장시도 진심 7, 80%로 호응하며 감탄했다.

능연처럼 잘생긴 사람이 의사 생활하면서 이름까지 알릴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니 대단해 보였다.

특히 이 그림들의 진지한 선과 넘치는 열정을 보는 순간, 오장시는 심지어 좀 찔렸다. 능연의 사진으로 표지를 만들면 몇천 권은 팔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 너무 천박한 거 아니니.

이때, 여원이 참지 못하고 능연에게 당부했다.

“능 선생, 너무 고생하지 마. 널 기다리는 환자가 아주 많다고.”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능연이 환하게 웃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의사 생활하는 것도, 수술 많이 하는 것도 모두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그래,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여원은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능연처럼 남보다 시간이 많은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꼭 있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대학원 친구들을 떠올렸다. 다 같이 바쁘고, 다 같은 의사인데도 누구는 둘째가 벌써 세 살인데 누구는 아직 솔로였다.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오장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더 재미있어져서 이것저것 궁리했다.

“이런 것도 다 홍보에 써도 되겠어요. 이 그림도. 좀 대중적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네요. 그러니까 타겟을 대중으로 잡는 거죠.”

책을 내는 건 정상급 의사라면 당연히 겪는 일이고, 능연도 꽤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단지 동의하는 거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별로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여원과 편집장이 상의하도록 남겨둔 능연은 어슬렁어슬렁 응급센터 1층 처치실로 돌아갔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던 초짜 의사들은 순간 큰 적을 만난 듯 긴장했다.

“주임님 오셨냐?”

초짜 의사의 얼굴만 보고 바로 깨달은 주 선생이 물었다.

“능 선생이요.”

“아, 쳇쳇.”

주 선생은 뒤돌아 힐끔 보고는 능연에게 아는 척했다.

“손 좀 푸실래?”

주 선생은 선물이라도 주듯 물었다.

“어깨 다친 환자예요?”

힐끔 보니 상처가 꽤 큰 걸 보고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결국 손을 내저었다.

“그냥 한 번 와 본 거예요. 이따 회진 가야 해요.”

주 선생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회진은 중요하니까.”

초짜 의사들은 안도하고는 냉큼 봉합부터 했다. 주 선생도 미소를 지었다.

“응, 잘하네. 이 정도면 잘 꿰매는 거지.”

주 선생은 기지개를 켜고는 능연을 따라갔다.

“여원이 이리저리 바쁘던데, 책 낼 준비하는 거야?”

“아직 몰라요. 간 혈관 변이 쪽으로 책 낼 수도 있고요.”

능연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주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했다.

“여원은 잘 모를 수도 있어. 좌 선생님도 이런 건 안 해 봤을 거고. 내 생각엔 책 내려면 곽 주임님한테 한번 말씀드려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아, 네. 그럼 지금 바로 갈게요.”

능연이 바로 대답하자, 주 선생이 진지한 얼굴로 능연을 바라봤다.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아니요. 왜 기분이 나빠요?”

능연 역시 진지하게 물었다.

주 선생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왜 기분이 나빠. 곽 주임님은 진료과 주임이고 진료과 권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고작 능연이 왜.

주 선생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능연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언짢을까 걱정한 것이었다. 다른 의사들은 그럴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능연이니까.

주 선생은 싱긋 웃으며 능연을 바라봤다.

“뭐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가끔 네 성격을 모를 때가 있으니까.”

능연은 별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거지,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나도 가자.”

능연의 얼굴을 살피던 주 선생은 역시 자기가 가서 중간에 있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이란, 일개 병원 진료과의 권력일지라도 상당히 민감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금 지친 듯 의자에 앉아서 얼굴을 찌푸린 채 서류를 보던 곽종군은 능연과 주 선생을 보고는 얼굴의 주름을 펴며 반겼다.

“둘이 어쩐 일이냐.”

“몸은 괜찮으시죠? 주임님도 며칠 밤샘했으니 힘드실까 봐 한번 와 봤습니다.”

주 선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멀쩡해.”

곽종군이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주 선생 말이 반은 진짜고 반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모습에, 특히 능연의 무뚝뚝한 작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 때는 말이야, 밤 좀 새우는 게 뭐라고. 야간 행군할 때 들것 들어야 하면 들것 들고, 비상 처치할 일 생기면 끝내고 다시 맨 앞으로 달려가고…….”

곽종군은 이야기하다가 쿨럭거리면서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능연도 미간을 찌푸리면서 바로 사무실에 있는 작은 박스에서 청진기를 꺼내 들고 왔다.

“주임님, 소리 좀 들어보겠습니다.”

“괜찮아.”

곽종군은 조금 엄격해진 목소리로 바로 거절했다.

“환자는 밖에 얼마든지 있어. 난 얼마 전에 건강 검진도 했고.”

주 선생은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진료과 내 다른 의사, 심지어 다른 진료과 의사도 이런 표정의 곽종군 앞에서는 절절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능연은 단호했다.

“왼쪽으로 누우세요.”

“난 멀쩡해. 괜찮다고.”

말로 저항하던 곽종군은 결국 능연에게 이끌려 침대 위에 누웠다. 주 선생은 갈등하는 눈으로 곽종군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능연 곁으로 다가가 청진하는 그를 바라봤다.

주 선생 머릿속에 곽종군은 언제나 수사자처럼 용맹하고 수사자처럼 건장하고 수사자처럼 사나운 존재였다. 그런 곽종군에게 신체 검진을 할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설사 지금도 능연이 손을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어때?”

능연이 진지하게 청진하는 걸 지켜보던 주 선생은 그가 청진기를 내려놓자 곽종군보다 먼저 물었다. 능연도 환자를 대할 때처럼 바로 결과를 말하지 않고 청음 결과부터 말했다.

“심장 소리 S1이 약해요, P-R 구간은 정상인데 경미한 열림음이 들려요.”

“이첨판(二尖瓣: 심실과 왼심방 사이의 판막. 판막이 두 개의 첨판으로 되어 있고 혈액이 심실에서 심방으로 거꾸로 가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한다.) 개폐 부전?”

주 선생이 곽종군과 능연을 번갈아 봤다. 심장 쪽 의사는 아니지만, 청진 정도는 알았다. 이첨판은 심장의 판막으로 심장 밸브 같은 존재다. 한 방향 문 구조로, 일하지 않을 때는 단단히 출입구를 닫아 신선하지 않은 혈액이 섞여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이첨판 개폐 부전이란 그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말하자면 누수된 밸브가 일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혹은 여닫이가 고장 난 대문이 전체 방에 위협을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단순히 가벼운 이첨판 개폐 부전이 일으키는 문제는 제한적이고 이런 병을 가지고 수십 년 사는 환자도 있다.

“청진 결과로 보면 수술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초음파 찍어서 확인해야 합니다. 전면적인 검사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곽종군이 기운 없이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상태가 좋다고. 콜록콜록.”

기침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기침이 나왔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며칠 밤새웠더니 힘들어서.”

“건강 검진하는 게 좋아요.”

“내가 준비할게.”

곽종군은 제 할 말만 했고 능연은 곽종군을 붙들고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주 선생도 곽종군을 건너뛰고 바로 대답했고.

“너희 둘…….”

곽종군은 툴툴거리다가 결국 묵인했고 주 선생은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리던 곽종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건강 검진 하라고 온 건 아닐 테고.”

침대에서 내려온 곽종군의 목소리에 수사자의 존엄이 가득했다. 주 선생은 정색하고 서둘러 대답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능 선생이…….”

“책 낼 준비하려고 간 변이 혈관도를 좀 그렸습니다.”

능연이 군더더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주 선생이 밑밥을 깔아 놓은 덕에 곽종군의 기분도 좋아져서 능연이 설명을 해주니 더 기뻐했다.

“책 좋지. 나중에 직책 평가할 때 파격 대우를 받는 자격도 되고. 비용은 진료과에서 내면 되네.”

병원 재정 체계에서 진료과는 모세혈관급 존재지만, 일정한 자주권이 있어서 몇만 위안짜리 책 비용 혹은 논문 구매 비용 정도는 정상에 속했다. 거기에 비하면 치료팀의 재정권은 더 약해서 돈 쓸 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것이 많으니 곽종군이 여러모로 고려해서 진료과 비용을 쓰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능연이 모를 것을 잘 아는 주 선생이 냉큼 대답하고는 또 덧붙였다.

“주임님, 그럼 올해 우리 능 선생 주치의로 승진하는 겁니까?”

“음, 논문만 있어도 자격이 되는데 책 내면 더 좋지. 참, 출판사는 어디하고 이야기 중인가? 출판사는 잘 찾아야 해. 올해 안에 나와야지.”

곽종군이 따로 당부했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어서 가 봐.”

곽종군은 손을 휘저으며 차트 보러 컴퓨터 앞으로 돌아갔다. 능연은 주 선생을 따라 밖으로 가다가 문 앞에서 다시 당부했다.

“주임님, 미루지 말고 검사 꼭 하세요.”

“알았어. 걱정하지 마라.”

곽종군은 더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 선생은 문을 나와 한참 걸은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이야, 이거 은근 긴장된다.”

“응? 왜요?”

“곽 주임님이 아픈 거잖아. 언제나 곰처럼 건장했다고. 그래도 심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생각해 봐, 곽 주임님 성격으로 침대에 고분고분 있겠냐? 어렵지, 암. 수술할 때 깨어나서 호통칠지도 몰라. 게다가 곽 주임님이 수술하면 우리 응급센터 관리는 어떡해. 골치 아픈 일투성이일 거다.”

“그건 걱정하셔야 해요.”

능연이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는 주 선생의 말을 잘랐다.

“그렇지.”

주 선생은 대답부터 하고는 멈칫했다.

“뭐라고? 그건 걱정하셔야 해요, 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주임님 판막 상태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에요. 구체적인 상황은 검사 결과를 봐야 알아요.”

주 선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깐 왜 그런 말 안 했는데.”

“검사 더 해 봐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사전에 환자에게 알려서 환자 걱정을 늘릴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주 선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임님 성격에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검사 안 받을 수도 있다고.”

능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선생님이 잊지 않고 독촉하면 되죠. 이첨판이라 크게 급하진 않아요.”

“그건 그래……. 아니지, 왜 내가?”

주 선생이 펄쩍 뛰었다. 무슨 일이야. 왜 내가? 그러나 능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첨판은 외과적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이첨판 성형술, 또 하나는 이첨판 치환술. 능연이 이미 획득한 슬관절 기술과 비슷하고 반월판 성형술이든 반월판 치환술이든 기술 자체는 어느 것이 낫다 할 것이 없고 적응증에 따라 어려움이 있다.

능연은 가능하면 직접 참여해서 곽 주임 수술을 하거나 집도의 어시 하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은 상당히 많은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서 영상 자료를 판독하거나 가상 인간으로 바로 시도하거나, 어느 면에서도 수술 성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으니까.

능연은 심장 수술에서 가능한 한 성공률을 높이는 건 매우 필요하다고 여겼다. 다른 부분 수술은 혹시 실수해도 예후가 좋지 않고 합병증이 생기는 정도지만, 심장 수술은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능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스템을 바라봤다.

시스템은 존경할 만한 해부 시체처럼 침착했다.

시스템은 침착하고 냉정하면서 또 직관적으로 능연에게 대답했다.

- 퀘스트 1: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내용: 완벽한 수술은 평생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외과 의사의 바람. 완벽한 수술 세 번 완성할 것.

- 퀘스트 진도:(0/3)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 퀘스트 2: 티끌 모아 태산

- 퀘스트 내용: 스킬을 획득할 확률이 있음. 보물 상자를 여러 개 모아라.

- 퀘스트 진도: (0/3) 중급 보물 상자; (0/300) 초급 보물 상자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동시에 퀘스트 두 개가 나온 바람에 능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퀘스트 2의 설명, ‘스킬을 획득할 확률이 있음’에 기대감이 크게 줄었다.

“차라리 그냥 스킬을 주지.”

능연이 인터페이스를 보며 하는 말에 시스템은 침묵했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곁에 있던 주 선생이 묻자 능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렇지? 난 또 뭐 할 일 있는 줄 알았네.”

주 선생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특히 능연이 매우 명확하게 일을 배정해 놓은 것이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일을 떠넘기는 특기는 주 선생의 특허였다. 그런데 이제 능연이 일 떠넘기는 습관이 들고 일 떠넘기는 경험이 쌓이면…….

주 선생은 참고 있던 소변을 시원하게 본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능연은 담담하게 주 선생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계속 곽종군 일을 생각했다.

판막 문제,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첨판 문제는 이첨판 성형술 혹은 이첨판 치환술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만약 스킬을 둘 중 하나만 얻게 되면 정말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첨판 치환술은 그나마 괜찮아도 곽 주임의 지금 상태로는 어쩌면 성형술을 쓰는 게 예후에 더 좋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첨판 성형술을 배워서 심장을 연 다음에 성형술을 쓸 수 없거나, 수술을 마친 경우 다시 치환술로 바꿔야 하면 어쩐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이첨판 기술만 터득했다가 흉강을 열어 다른 문제도 발견했는데 가지고 있는 스킬이 아니라면 생사 결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각 병원 규칙에 경력이 짧은 의사는 항상 경력 많은 의사가 지켜보게 되어 있다. 그건 수술을 도와야 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리스크를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담낭염 수술에서 담관이나 간을 건드려야 할 가능성이 있듯이, 아직 몇 가지 수술 방식밖에 터득하지 못한 연차 어린 의사가 복잡한 상황에 닥치게 되면 처리할 수 있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닌지, 혹은 제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리스크가 된다.

능연도 이런 점이 신중한 거고.

병원 각 진료과 서열에서 일반 외과는 지극히 안전하고 성숙한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대부분 신인 서전은 일반 외과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간 절제 수술 기술을 익히게 되면 일반 외과 왕관의 구슬을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비뇨, 항문 같은 문제를 만나도 더럽고, 냄새가 날 뿐, 인명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심장은 다르다. 인체 모든 장기 중에 부드러운 대뇌 밑으로 심장이 가장 까다롭고 전기 생리학까지 더하면 수학과 비교할 만큼 복잡해진다. 그래서 심장 수술, 특히 큰 수술을 할 때 심장과 관련된 기본 수술 방식들을 터득하는 건 정말로 필요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능연은 시스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주 선생님, 같이 회진 가실래요?”

능연은 일단 오늘 업무를 착실히 해결하고 초급 보물 상자 퀘스트를 완성하기로 했다. 곁에 주 선생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그를 불렀고.

능연의 경험으로 같이 회진 가자고 하면 대부분 의사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주 선생은 보통 의사가 아니었다.

“하하하. 아니. 응급실에 일이 아주 많아.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능연은 의심하는 눈빛으로 주 선생을 바라봤다.

“제가 보기엔…….”

“그럼 난 이만!”

주 선생은 능연이 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자르고는 코너를 돌아 쪼르륵 달아났다.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몇십 미터 달아난 주 선생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안 좋아. 후계자님은 사납진 않지만 후각이 너무 예민해. 에너지도 넘치고. 쉽지 않아, 쉽지 않아.”

주 선생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능연이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눈빛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곽 주임님. 오래오래 사세요. 백 세까지 무병장수하세요. 혹시라도 일찍 가시면 저는 은퇴까지 못 버팁니다.”

주 선생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주 선생의 속도는 정말 응급실에 딱이네.

능연은 주 선생이 사라질 때까지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머리로 생각하는 건 능연의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복도를 지난 능연은 에피프렘넘 밑에서 이야기 나누는 눈에 익은 연수의 둘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지목하며 물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아, 능 선생. 저기……. 우리 막 수술 끝나서.”

능연을 본 두 연수의는 저도 모르게 뜨끔해졌다. 병원은 언제나 바쁜 곳이라, 쉬고 있던 중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능연은 그런 걸 대놓고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나랑 회진 가요.”

능연은 그리고는 바로 앞장섰다. 두 연수의는 서로를 힐끔 보고는 오히려 흥분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능력자 밑에서 배우려고 운화병원에 온 거니까.

“거기 둘!”

능연은 구석에 있는 남녀 의사 둘을 또 찾아낸 다음 물었다.

“지금 뭐 해요?”

두 의사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역시나 여자 의사가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조금 아쉬운 듯 에라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능 선생님, 둘이 막 수술 마치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좀 흥분한 거지 다른 건 아니고…….”

“지금 할 일 없으면 나랑 회진 가죠.”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걸어 나갔고 두 의사는 어리둥절하다가, 피식거리고 있는 두 연수의 뒤로 냉큼 줄을 섰다.

“왜 웃는 거예요!”

여의사가 사납게 묻자, 나이 든 연수의들도 괜히 누구 눈 밖에 날 생각은 없어서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얼버무렸다.

체면을 살린 여의사는 다시 머리를 묶어 올리고 능연을 향해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능 선생님, 선생님이랑 회진 가면 저희는 뭐 해야 해요?”

“회진할 때, 침대 담당 선생님이 계시면 잡다한 일은 침대 담당 선생님이 하면 되고 안 계시면 그 일 하면 됩니다.”

능연 수하의 의사들은 업무량이 점점 많아져서, 이런 돌발성 회진에 부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연문빈을 비롯한 초기 팀원의 수술량도 증가해서 갑자기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능연은 이미 이런 식으로 임시로 조를 짜는 회진에 익숙해졌다. 연수의, 혹은 다른 진료과 훈련의를 쓴다고 딱히 불편할 것도 없고.

물론 대부분 높은 의사들은 다 이런 식이다.

201 병실.

왕성하게 생장한 접난은 미친 듯이 번식해서 벽을 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자라났다.

만큐 네트워크 설립자 이만규는 초점 잃은 두 눈으로 10개월짜리 아이처럼 진지하게 접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엔 일본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실력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하드웨어 조건이 비교할 수 없잖아. 국내에서 수술하려면 북경으로 가든가……. 여보, 이야기 중이잖아. 무슨 생각 해?”

여인은 화를 억누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마누라의 익숙한 따지는 말투가 나오자, 이만규는 정신 차린 듯 눈에 초점이 생겼는데 그저 좌우를 둘러보고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일본 의사들이 능연 의사보다 잘한다고는 못하겠다고 하는 거 못 들었어?”

“당신도 대외적으로는 만큐 네트워크가 다른 데보다 낫다고는 말하지 못하잖아. 하지만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하드웨어가 더 좋고, 자금이 더 많고, 엔지니어들도 기술이 더 좋고, 우리가 최강 아니야? 일본 병원도 그렇겠지. 하드웨어가 운화병원보다 뛰어나고, 자금, 의사, 기술, 어느 면으로도 우월해. 게다가 무슨 능 선생 하나로?”

아내는 남편이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설득하려고 애썼다. 이만규는 싱긋 웃으며 눈빛을 잠시 빛내다가 다시 흐려진 눈빛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그 일본 의사는 그런 뜻이 아니었지. 간 절제 방면은 능 선생이 정말 대단하다고 확실히 말했다고. 솔직히 생각해 봐, 다른 중국 사람 이름은 이야기하지도 않고 바로 중국 의사 이름을 이야기했어. 그게 무슨 뜻이겠냐고.”

“그야 당신들이 먼저 능연이라고 거론했잖아.”

아내가 불만스러운 듯 병상 맞은편에 있는 젊은이를 슬쩍 보자, 상대는 바로 잘 보이려는 듯 웃었다.

“제 치질 수술을 능 선생님이 하셨거든요. 그날 바로 침대에서 내려왔어요. 다음 날 밤엔 바로 야근했고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야근해도 그냥 피만 조금 나고 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실력 있는 의사예요. IT 쪽 큰 회사에서도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 능 선생님한테 수술받았거든요. 지금 능 선생한테 수술받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치질 수술 잘한다고 간 절제를 잘하는 건 아니잖아!”

아내가 화를 내며 남편을 노려봤다.

“우리가 전처럼 구질구질한 월급 받을 때라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이젠 돈도 벌었는데 굳이 운화로 돌아와서 수술하려고 하다니. 그럼 대체 돈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외국 나가서 수술하는 건 병을 고치려고 가는 거지, 외국에 나가는 거 자체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 않아. 능 선생한테 수술받으려는 이유도 바로 병을 고치려고 그러는 거고. 여기저기 다 추천하는 의사인데, 한 번 시도해보는 게 뭐가 어때서.”

이만규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어떻게 치료할지, 자기 건강을 어떻게 유지할지는 쉽게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아내는 화가 나서 눈물이 다 흘렀고 티슈로 눈가를 찍고 손부채를 부친 다음 벽에 자란 접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사 국내 기술도 괜찮다고 쳐. 그래도 외국 의료진의 진지함은 달라! 특히 일본 의사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증상을 설명하는지, 못 봤어? 만약 내가 수술받는 거라면 난 그런…… 그래요, 장인 정신 있는 의사를 바랄 거야, 안 그래?”

침대에 누워있는 이만규는 마누라 달랠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

“그건 당신 수술할 때나 그렇게 하고.”

아내는 멈칫하다가 순간 화가 나서 눈물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공들여 지켜온 눈화장이 바로 번져 버렸다. 병상을 지키던 직원들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큰 소리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능 선생, 201은 2인실인데 지금은 이만규 환자 혼자 쓰고 있어.”

능 치료팀 중에 유일하게 남아 병실 구역을 관리하는 마연린은 이만규 담당 의사는 아니지만, 이 환자가 사람을 보내 신경 써주고 있는 걸 알고 있어서 특별히 은근하게 강조했다. 물론 다른 연수의들 들으라고 한 소리지만.

다행히 병원에서 굴러온 연수의들도 바로 알아듣고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나서서 차트를 살피고, CT, MRI 사진들을 들어 올려 일일이 뷰라이트에 꽂았다. 다 못 꽂는 건 인간 행거가 되어 능연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주르륵 들어 올렸다.

“이만규 씨, 52세. 상해 제일 병원에서 우리 병원으로 트랜스. 외과 수술로 간내 담관 결석을 제거하길 원하고 계셔.”

능연은 일관적인 태도로 사진을 확인하며 마연린의 보고를 들었다. 마연린이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를 파악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MRI로 보면, 전에 찍은 사진이랑 결석 범위가 크게 변하진 않았네요.”

능연은 어제 환자를 받으면서 이만규가 전에 찍은 사진을 이미 확인했지만, 새로 찍은 MRI는 지금에야 확인했다. 아무래도 운화병원 같은 병원은 검사 쪽 인력은 거의 모자라다시피 해서, 응급 상황이 아니라면 MRI를 다음날 바로 받는 것만 해도 이미 특별 대우를 받는 셈이었다.

이만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향해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수술할 수 있다는 거죠?”

“네. 수술 조건은 됩니다.”

능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 수술은 매우 어렵죠? 리스크랑 성공률은 어떻습니까? 미안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직업병인데 확률을 알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다 보니, 이만규는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 능연은 다시 그의 사진을 힐끔 보면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간 절제는 총체적으로 위험이 큰 수술이죠. 하지만 환자분은 젊은 편이고 담관 상황도 괜찮은 편이라, 자신 있는 편입니다. 수술 방식만 따지자면, 최종 방안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음, 화이트보드 좀.”

능연이 손을 휘두르자, 연수의 하나가 재빨리 화이트보드를 짊어지고 환자와 보호자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연린도 노련하게 검은 마카의 뚜껑을 열고 능연에게 건넸다.

능연의 손에 쥐어진 검은 마카가 슥슥 움직이더니 화이트보드에 간 그림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만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내가 먼저 넋이 나갔다.

“수술할 때, 이 위치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환자분 간을 여기, 이 부분을 잘라낼 겁니다.”

능연은 전문용어 없이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했다. 낯선 의학 용어보다 그림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능연은 슥슥 다른 간을 그렸고, 단숨에 몇 개나 더 간을 그리면서 수술 과정을 확실하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만규가 일본 사립 병원에서 진단받을 때보다 훨씬 프로패셔널한 태도였다. 그는 이미 속으로 만족하면서 슬쩍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휙 앞으로 달려가 손을 바로 능연의 가슴…… 앞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뻗었다.

“그림 정말 잘 그리시네요. 이 간의 형태, 일반적인 간 형태랑 다르네요. 이런 건 뭐라고 해요?”

아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화이트보드를 감상했다. 이만규는 의아한 듯 아내를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설명했다.

“와이프가 전에 조금 이름난 화가였거든요. 지금도 갤러리 운영하고 있고.”

“이건 간 우엽이 혀 모양으로 돌출된 케이스로 전형적이지는 않습니다.”

“정말 못 생기고 희한하네요. 왜 이런 모양의 간을 그릴 생각을 한 거죠?”

능연이 손짓하며 설명하는 말에 아내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환자의 간이 바로 이렇게 생겼으니까요.”

능연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수술 끝나면 언제 퇴원할 수 있습니까?”

“상황이 괜찮으면 보통 사흘이면 ICU에서 나와서 특수 병실에서 이삼일 있다가 안정되면 일반 병실로 갑니다. 보통 한 열흘 정도면 퇴원하고요.”

이만규의 질문에 능연은 환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의외도 아니라서 관례대로 대답했다.

“열흘이라……. 더 빨리는 안 될까요? 회사 일이 바빠서.”

이만규는 그렇게 말해놓고 바로 덧붙였다.

“선생님, 우리 만큐 네트워크 제품 한 번 써보세요. 우리 카메라는 보정 기술이 매우 탁월한 새 어플입니다. 아무튼, 2.0 버전을 곧 출시하는데 이게 우리 회사 생명줄이라 서둘러야 하거든요.”

능연은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열흘 만에 퇴원한다고 해도 바로 일은 못 합니다. 고강도 업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유사한 환자를 너무 많이 만났던 능연은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인체엔 일정한 대상 기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증상일 땐 버틸 수 있겠지만, 환자분 지금 상황으로는 간 절제 후 업무 복귀는 타이트하게 잡아도 두 달은 걸립니다. 게다가 두 달 후에도 고강도 업무는 안 됩니다. 야근은 더 안 되고요.”

이만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어플 실패하면 회사가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두 달이라니……. 그럼 보존 치료는 안 될까요?”

마찬가지로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아프신가요?”

“네.”

“그럼 빨리 수술해야죠.”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이만규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 사나흘 쉬는 건 몰라도 그렇게 오래 쉬는 건…….”

그가 아내를 바라보자, 아내는 뜻을 깨달은 듯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만큐 카메라 인터페이스를 열어 생긋 웃으며 능연을 향해 내밀었다.

“능 선생님, 같이 사진 찍어요. 제 남편이 만든 이 어플, 보정 능력이 끝내줘요. 게다가 투샷에 제일 적합하답니다. 선생님도 한 번 해보세요.”

한때 조금 유명했던 화가는 능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치켜들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그렇게 연달아 6장 찍고는 흡족한 듯 팔을 내려놓고는 심호흡한 다음 갤러리를 열었다.

“어머!”

“왜 그래.”

소프라노 목소리에 이만규도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이상해.”

아내가 이만규에게 핸드폰을 내밀자, 연수의들도 궁금한 듯 목을 빼고 바라봤다. 분홍색 핸드폰 액정에 이만규의 아내는 뽀송뽀송하게 보정됐는데 능연의 얼굴은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이, 이게…….”

이만규는 손까지 덜덜 떨었다.

“어플에 문제 생긴 거야?”

아내가 묻는 말에 이만규는 진지하게 고개를 흔들고는 능연을 바라보며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관이랑 얼굴형이 너무 완벽해서 조금만 수정해도 심하게 변해 버린 케이스야. 우리 어플은 이런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거지.”

“그, 그럼 어떡해.”

아내까지 초조해져서 하는 말에 이만규는 잠시 생각하다가 능연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은 특수 케이스야. 엔지니어들한테 말해 볼게.”

이만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더 빡빡하겠네.”

능연은 자기한테 데이트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던 여자들이 지을 법한 실망한 표정이 이만규의 얼굴에 나타나는 걸 명확히 봤다. 능연의 기억 속에 이런 반응은 비교적 강렬한 표현이었다.

“신체 검진 한 번 해볼게요.”

능연은 바로 팔을 내밀어 이만규를 눕히고는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손을 거뒀다.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을 거 같네요.”

짧은 시간 만에 능연은 방법을 생각해 낸 듯 잠시 고민하며 말을 이었다.

“수술 후 재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회복 시간을 줄일 수 있어요. 물론, 장시간, 고강도 야근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안 되지만요.”

이만규는 눈을 빛내면서 능연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눈빛을 흐렸다. 기대가 컸던 카메라 어플에 다른 보정 어플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버그가 생겼다. 그럼 이미 출시된 라이벌 보정 어플을 상대로 두각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술 회복 시간을 조금 줄일 수 있다고 쳐도 지금 발견된 문제는 며칠 만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푹 쉬면서 수술 준비하세요.”

설명을 마친 능연은 상세히 설명할 연수의를 남겨두고 다른 병실로 향했다.

“이 환자 별점 남겨 놓아요. 음, 다섯 개.”

문을 나온 능연은 곁에 있는 연수의에게 나직이 말했다. 능연의 별점은 환자의 각 방면 상태를 종합해서 수술 예후 기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나이, 기초 질환도 평가 기준이고 질병 자체의 정도 문제도 평가 기준이다. 그것 외에 사진도 참고해서 환자의 병소 위치 등등을 판단해서 평가를 내린다. 아무래도 손대기 좋고 2차 상해가 생길 확률도 적은 위치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의학적 판단이지만, 능연의 개인적 필요로 하는 것이라 환자 옆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연수의는 아무 말 없이 따르는데 마연린은 학구열에 넘친 듯 물었다.

“능 선생, 이런 상황이 별 다섯 개 받을 만해?”

“환자 상황이 괜찮아요. 평소에 운동도 하는 거 같고. 요즘 했던 간 담관 결석 환자 중엔 최고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열심히 재활할 동기도 의지도 있어서 협조도 잘할 거예요.”

능연이 알기 쉽고 확실하게 설명해주자 마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른 녀석들이 터득하지 못한 지식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디에 써먹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회진을 마친 능연은 작은 수술 두 건 하고 일과를 마무리했다. 털털 주차장으로 갔더니 깨끗하게 세차한 제타 옆에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세차된 롤스로이스가 서 있었다.

다가가 문을 열자 전칠이 생글생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일 다 끝났어요?”

“일 다 끝났어요?”

이구동성으로 물은 두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로 마주 봤다.

롤스로이스 안은 조금 따듯했다. 특히 문을 닫고 난 후엔 더 그렇게 느껴져서 능연은 얇은 점퍼 지퍼를 열었다. 그 작은 움직임을 포착한 전칠은 능연을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핀란드에서 온 거라 조금 추워서 히터 좀 틀었어요. 좀 줄일까요?”

“2도만요.”

능연은 체면 차리지 않고 대답한 다음 시트에 기대고 부드러운 가죽을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출장은 잘 다녀왔어요?”

“좀 추워서 그렇지, 괜찮은 편이었어요. 핀란드 사람은 조금 차갑더라고요. 고고하게 굴기도 하고. 우리가 이번에 간 회사 문제인진 몰라도, 돈 버는 것보다 우리가 가져간 술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전칠은 상황 설명하면서 조금 투덜거렸다. 급하게 다녀오느라 조금 답답했는데, 밤낮없이 그리워하던 능 선생이 바로 곁에 있으니 마음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즐거워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능연의 팔짱을 꼈고 롤스로이스 뒷좌석이 더 넓어졌다. 전칠은 갑자기 롤스로이스를 타고 나온 걸 후회했다. 몇십만 위안짜리 꼬꼬마 차였다면 지금 둘이 딱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차체가 살며시 흔들리더니 차가 움직이자, 능연은 제타를 힐끔 바라봤다. 홀로 남겨진 녀석은 일할 기회를 빼앗긴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대로 있었다.

“차 집에 보내놓을까요?”

“아니에요. 그러면 엄마가 전화하실 거예요.”

능연은 전화 받는 거, 설명하는 걸 싫어하는데 엄마는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전칠은 생긋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도평 여사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는 이미 상당한 스킬이 생겼다. 심지어 능연이 어디 있다고만 말해놓으면 아예 묻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능연이 병원에서 사흘 내내 수술해도 걱정하지 않으시는데, 나 ‘대전칠’과 함께 나가는 건데 걱정하실 일이 뭐가 있다고, 랄까.

“그럼 우선 뭐 좀 먹고 놀러 가요.”

전칠이 배를 문지르는 걸 본 능연이 바로 물었다.

“벌써 배고파요? 점심 안 먹었어요?”

“왜 그런진 몰라도 비행기에선 입맛이 별로 없더라고요.”

전칠이 능연의 팔짱을 끼고 살짝 어리광을 부렸다.

“고공이라 기압도 높고, 비행기 소음에 건조한 환경, 모두 입맛에 영향을 주긴 하죠.”

“어쩐지, 집에서 쓰는 전세기를 타고 가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내 건 너무 작아서 소음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다음에 살 땐 신경 써야겠어요.”

능연은 뭐든 교훈을 얻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롤스로이스는 강을 따라 유유히 움직였다.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졌지만, 전칠과 능연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차 안 온도 적당하고, 운전은 안정적이고, 능연은 저도 모르게 끔뻑끔뻑 잠들었다. 전칠은 멈칫하다가 곧 핸드폰을 꺼내 망설이지도 않고 프라이빗 버튼을 눌러 기사 뒤에 있는 창문을 검은색으로 조절했다.

강가 골목으로 진입해 주차장에 들어갔을 때 전칠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가씨, 앞에 천 아가씨의 차가 있습니다.”

“넷째 고모?”

전칠이 커튼을 살짝 내려보니 과연 차 몇 대가 보였다.

“원래 계획대로 할까요?”

“물론이죠.”

전칠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능연을 바라봤다. 언제 깼는지, 능연은 벌써 눈을 뜨고 있었다.

별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전칠은 묘하게 수줍어졌다.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잠들었네요.”

능연은 싱긋 웃으며 해명하듯 이야기했다. 병원에서 포션을 쓸 땐 규칙을 따졌다. 이미 4,000병 정도 모았지만, 그래도 멀리 생각하면 아직은 마음 놓을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포션은 여전히 계획적으로 사용했다.

오늘은 원래 퇴근하고 집에 가서 쉴 생각이었으니, 포션 효과가 떨어진 것도 당연했다.

그 말에 전칠은 더욱 감탄했다.

“안 피곤한 게 이상한 거죠. 연달아 이삼일 못 잔 건 둘째치고 오늘처럼 아침부터 고강도로 일하면 나는 정말 못 버틸 거예요. 보통 다 못 버티지 않을까요?”

“내가 종일 일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능연이 의아한 듯 묻자, 전칠은 잠시 멈칫하다가 바로 대답했다.

“당신은 매일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인 걸 아니까요. 그러니까 병원에 간 이상 종일 일했겠죠?”

“아, 일리 있네요.”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전칠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아, 우리 지금 북성 부두 쪽에 와 있어요. 마침 넷째 고모도 있네요. 이따 마주칠 수도 있어요.”

“아.”

“우리 고모가 집안일에 관심이 많거든요. 어릴 때 고모랑 친했고요. 그래서 만나게 되면 이것저것 물을지도 몰라요.”

전칠은 조심스럽게 능연에게 미리 알렸다. 자기 고모의 가십 속성에 대해서는 전칠도 조금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오늘 우연히 만난 것도 사실은 고모의 계략이 아닐까도 싶었다.

능연은 이번에도 ‘아’ 하고 대답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교 활동에 관해 신경 쓰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

전칠은 오히려 안심하고는 기사가 차를 세운 다음 우아하게 차에서 내렸다.

“어머나, 전칠, 정말 너였구나. 안 그래도 곧 돌아올 때 됐다 싶었다. 요즘 운화에서 사는구나? 툭하면 운화에 오고. 마침 여행 올 일 있어서 그렇지 또 못 보고 갈 뻔했네.”

온몸에 샤넬을 감은 넷째 고모는 고양이 집 옆에 매복하던 허스키처럼 슉 하고 레스토랑 입구에서 달려 나왔다. 전칠은 어이도 없고 우습기도 했다.

“고모, 지금 저 뒷조사 하는 거예요?”

“얘는, 마침 여행 온 거라고 했잖니.”

넷째 고모 곁에 있던 곱게 치장한 중년 여성들도 모두 목을 빼고 그쪽을 바라봤다. 전칠은 당당하게 서서 물었다.

“이 계절에 운화에 여행이요?”

“그래 이 계절에 와 본 적 없으니까 온 거지. 남들이 비수기라고 하는 말을 다 믿을 수 있니? 그보다 너, 넌 또 왜 운화에…….”

대충 얼버무리던 고모는 차에서 내리는 능연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문 옆으로 쑥 튀어나오던 머리가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하나가 또 굳고.

전칠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머릿속으로 메두사와 히드라를 떠올렸다.

전가천은 어릴 때부터 조카인 전칠을 매우 예뻐했고, 전칠의 결혼, 연애사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자유연애 열풍이 인 후, 전씨 가문 사람들의 결혼, 연애는 꽤 복잡해졌다.

남자는 그래도 괜찮지만, 여자들은 고려할 게 많았다. 전가천이 생각하기엔, 이것이 소위 재산과 권력의 저주인가 싶었다.

특히 전칠이 걱정이었다. 전씨 가문의 적녀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쪽 가문도 좋은 데다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온 집안의 금지옥엽이었다.

최근엔 비교할 수 없을 경영 재능까지 선보였다. 공들여 키운 엘리트와 비교할 순 없을지 몰라도 전씨 가문 내부에서는 이미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전칠이 그렇게 뛰어날수록 넷째 고모인 전가천은 전칠의 결혼이나 연애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우리 전칠한테 어울리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가문으로 따져도 전씨 가문에 어울릴 만한 곳은 국내, 국외를 다 따져도 별로 없었고 거기에 나이도 따지고 성격까지 좋고 생김새, 거기에 능력도 따지면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사람이 없겠다 싶었다. 설사 몇 명 기준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집안에서도 눈독 들이고 있을 것이고.

그러나 능연을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전에 너무 생각이 많고 천박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 연애가 장사도 아니고, 보기에 좋으면 됐지. 그게 가장 중요해.

“저 능 선생, 대단한 의사 아니니? 네 삼촌 슬관절 수술한 의사지? 이야기 들었을 땐 믿지도 않았다, 얘.”

전가천이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가 아니었지만, 도저히 언어로 조합할 수 없었다.

전칠은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요. 매우 대단한 의사죠. 아마 업계 최고?”

“그래, 최고겠다. 그러니까 네 작은 삼촌이 무릎을 내놓았지. 업계 최고 의사도 참 힘들겠다.”

“고모, 됐어요. 소개할게요.”

전칠은 생긋 웃으며 전가천의 팔을 잡아끌고는 능연을 불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능연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고 엿보던 여자들은 표정이 다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녀들은 무심결에 능연의 시선을 피해놓고 또 몰래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이제 우린 밥 먹으러 갈 거예요.”

전칠은 여자들이 마음껏 보기도 전에, 웃는 얼굴로 현장 관람을 중단하고는 용감하게 능연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그렇게 문 두 개를 지나, 전가천과 절친들이 문에 달라붙어도 구경할 수 없게 된 후에야 전칠은 살짝 손에 힘을 풀고 고개를 들어 능연을 올려다봤다.

두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능연은 여전히 전칠의 손을 잡고 있었고, 표정도 여전히 평온하게 잘생겼다…….

전칠은 저도 모르게 생긋 웃으며 고개를 능연 쪽으로 기댔다.

전가천 일행은 옆방에서 오늘의 주제가 뭐였는지 진작 잊어버리고 능연에 관해 웅성웅성 떠들어댔다.

“연예인보다 예쁘게 생기지 않았어?”

“그건 예쁜 게 아니지, 멋지다고 해야지.”

“아니, 사실 나도 배우 한 명 만난 적 있거든? 이 정도로 잘생겼었어. 그런데 키가 좀 작았다.”

“맞아. 능 선생 몸매는 모델이라고 해도 되겠더라.”

“아니, 그건 아니야. 모델이라고 해도 된다는 건 비슷하긴 해도 모델만 못하다는 거잖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인정할 수 없어.”

여자들은 각자 제 할 말만 했고 방 안은 순간 훠궈를 끓이는 것처럼 후끈해졌다. 그렇게 5분 동안 시끌벅적하다가, 전가천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힘껏 테이블을 내리쳤다.

“다들 생각하고 말해. 지금 내 조카사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옆에 있던 절친이 멈칫하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위도 아니고 조카사위인데 신경 써야 해?”

“몰라. 어쨌든 우리 전씨 가문 사람이야. 건드리지 마!”

전차천은 기세로 절친들을 압도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무슨 우리가 네 조카사위를 꼬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리니.”

맞은편에 앉은 절친은 진지한 얼굴로 가슴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이것 봐봐, 작년에 한 건데 꽤 완벽하지 않니?”

“한번 해보든가.”

“하라면 못할까 봐? 나도 돈은 좀 되는데?”

전가천이 냉랭하게 하는 말에 웃으며 대답한 절친은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고 술 한잔 따라서 우아한 척 입에 머금었다.

“그래도 얼굴만 좀 보는 건 괜찮지? 그건 괜찮지 않아?”

다른 성형 절친이 떠보듯 물었다.

“보는 것도 못 하게 하는 게 어디 있어.”

“못 보게 할 방법이 또 어디 있다고.”

솔직히 말해서, 전가천의 절친들이 우르르 몰려간다면 전가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물론 정말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혹시 이 조카사위가 믿을 만한 놈이 아니라면 빨리 발견하고 빨리 처리하는 게 나았다.

사람들은 룸에서 나와 위풍당당하게 다른 룸으로 향했다. 누구는 서두르느라 신발도 신지 않았고, 종종거리며 가느라 시계와 팔찌가 부딪치며 갖가지 소리를 냈다.

이곳은 원래 지극히 조용한 레스토랑이고, 예약만 받아 운영하는 형식으로 타임마다 서너 테이블만 받아서 이렇게 ‘떠들썩’한 장면은 정말이지 보기 드물었다.

웨이터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재빨리 윗분께 보고하러 사라졌다. 마치 지금 막 상에 올린 생선과 소라가 살아난 데다가 각자 권법을 선보이면서 서로 싸우며 교배하다가 태어날 때부터 권법을 할 줄 아는 작은 소라를 낳은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한 모습으로.

“전칠!”

친구들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한 전가천은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몇 초 후, 방문을 연 능연이 복도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보였다. 절친 무리가 전진해도 능연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여자 무리가 만든 혼란은 흔한 일이었다.

반면에 절친 무리의 구성원들은 능연의 모습에 더이상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저기…… 이쪽 음식 입에 맞아요?”

“전 운화 사람입니다.”

자칭 돈이 좀 있다고 한 절친은 시시한 질문을 하고는 풀이 죽었고 능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운화 사람이라고 해도 입맛에 안 맞는 운화 음식은 있을 거 아니에요.”

별로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뻣뻣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됐고. 능 선생, 지금 운화병원에서 일해요? 일은 어때요? 사실 내가 창서성에 잘 아는 병원 쪽 간부들이 몇 있는데…….”

“일 잘하고 있습니다.”

능연은 대답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어머, 겸손하지 않네. 그럼 돈은요? 돈 잘 벌어요? 얼마나 버는지 말해봐요.”

흥분해서 말하는 그녀의 목이 점점 시뻘게졌다. 문을 닫으려던 능연은 상대가 힘이 풀려 쓰러지는 걸 보고 동작을 멈췄다.

“어머 기절한 거야?”

“정말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파 언니, 파 언니!”

능연이 룸에서 채 나오기도 전에 절친 무리는 고래고래 고함치고 있었다. 전가천은 더욱 긴장해서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자기 절친이 일부러 그러는 거든 아니든, 능연이 손 쓰는 건 싫었다. 나중에 괜히 고맙니 마니 하면서 정말로 무슨 문제를 일으킨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능연이 룸에서 나와서 태연한 얼굴로 일단 눈으로 검사했다.

“구급차 불렀어.”

전가천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얘, 얘! 인중 꼬집어 볼까?”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절친 하나가 사람 목을 뚫을 것 같은 길고 구부러진 손톱을 내밀었다.

“내가 할게. 난 오늘 은색 매니큐어 발랐거든. 소독되잖아.”

다른 절친이 그것보단 짧고 날카로운, 메스처럼 은빛으로 번쩍이는 손톱을 내밀었다. 멀리서 바라보던 능연이 흠흠 헛기침했다.

“옷깃 단추부터 풀어주세요.”

능연이 치 떨리도록 잘생긴 게 아니라면 절친들은 ‘양아치!’라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래도 은색 매니큐어 여자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기절했는데 단추는 왜 풀어요.”

“숨쉬기 편하라고요.”

“아, 일리 있네”

“그럼 어서 하자.”

여자들은 다 같이 나서서 몇 초 만에 기절한 절친의 옷을 풀어 쇄골을 드러내놓았다.

“안 그래도 이 브랜드 찢고 싶었어. 스트레스 풀리거든.”

“듣고 보니 그러네. 저번에 누구 셋째 애인 잡으러 갈 때 따라갔을 때도 그렇게 찢었어. 그거 찢고 나서는 영양제 같은 거 먹을 필요도 없이 조금 움직이고는 바로 잠들었어.”

“조금 움직인 게 아니라 남편 호로록 한 거 아니고?”

“발냄새 나는 남편 호로록하고 잠이 오겠니?”

“맥박 짚어 보고, 숨소리 들어보세요. 가슴이나 허리 너무 조이지 않았는지 체크하고요.”

능연이 말했다. 여자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속도로 이야기가 새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절친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흥분한 얼굴로 옷을 찢었다.

“정말로 코르셋 입었네.”

“깔깔깔, 그럴 줄 알았어. 허리가 그렇게 가늘더라니. 일자 치마 입어서 그러느니, 다이어트 식단 해서 그렇다느니 그러더니. 잠시만, 잠시만, 풀지 마, 사진부터 찍자.”

“인중 꼬집어, 인중. 영상 돌리고 있잖아.”

“물 좀 뿌릴게.”

절친들은 다들 힘을 모아 쓰러진 파 언니를 구조해냈다. 서서히 눈을 뜬 파 언니는 곁눈에 능연이 들어오자마자 신속하게 다시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2초 후, 다시 눈을 뜬 파 언니는 ‘으응’대며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기절했었어?”

“능 선생 진단으로는 허리를 너무 조여서 그렇대.”

전가천이 별로 좋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우리 생각엔 가짜 가슴이 압박한 데다가 가짜 코라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은 건 아닐까도 싶고.”

“허리를 조여?”

고개를 획 숙인 파 언니는 지방 흡입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허리 부분의 두툼한 살이 드러나 있는 걸 발견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누가 이렇게 해놓은 거야. 당장 원래대로 돌려놓아.”

“예, 마마.”

절친들은 다시 힘을 합쳐 주물주물 파 언니의 옷을 입혔다.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파 언니는 능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능 선생, 나 지방 흡입하고 오면 다시 허리 보여드릴게요.”

“지방 흡입은 위험하니까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능연이 예의 바르게 하는 말에 파 언니의 눈이 하트가 되었다.

“능 선생,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지금 건강 상태로 봐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난번 성형외과 의사한테 가지 마세요. 문제 생길 수 있어요.”

“나 성형 안 했어요. 자연미인이야.”

파 언니가 쭈뼛쭈뼛하는 말에 능연은 알코올겔을 꺼내 손을 닦고는 연필과 종이를 꺼내 얼굴 윤곽을 슥삭슥삭 그리면서 대답했다.

“지난번 의사가 여기, 광대 처리할 때 너무 제멋대로 했어요. 그러니까 지방 흡입 고려 중이면 더 신중한 의사 찾으세요.”

파 언니는 익숙하고도 낯선 제 얼굴과 코를 바라보며, 성년이 된 허스키가 어릴 때 사진을 본 것처럼 멍해졌다.

파 언니의 절친들이 능연의 그림을 보며 동시에 멍멍댔다.

“괜찮으면 우리는 식사 계속할게요.”

능연은 사회 기대에 부합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룸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는 전칠의 지시에 따라 망설임도 없이 문을 닫았다.

절친 무리 여인들은 앉거나 선 채 복도에 있다가 잠시 후에 ‘하하하’, ‘헤헤헤’, ‘낄낄낄’, ‘와아아’ 웃음을 터트렸다.

파 언니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대며 전가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네 전칠 참 부럽다, 얘. 능 선생 진짜 멋져. 앙앙앙.”

“됐어. 다들 나이 먹고 적당히 좀 하자고.”

전가천은 코웃음 치며 속으로는 흡족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조건은 말할 것 없이, 지금 보고 겪은 것만 해도 능연이라는 이 조카사위가 마음에 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전씨 가문에 돈은 넘치고, 특히 전칠은 앞으로 돈은 필요 없다. 전통적인 부잣집에서 좋아하는 재벌 2세, 권력자 2세보다 능연이 훨씬 느낌이 더 좋았다.

특히 전칠의 미소는 전가천의 눈에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딸 데리고 운화병원에 갈걸.”

다른 절친이 후회하듯 투덜거렸다.

“전엔 개인병원만 갔었지. 에이, 돈 많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니까.”

“네 딸, 이제 겨우 15살 아니니? 차라리 내 아들이 나이는 더 맞겠다.”

“아들……. 네 아들이 능 선생을 만나면 더 기운 빠지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희 데리고 오지 않았을 거야. 다들 신경 좀 꺼. 게다가 내가 미리 언질 안 줬다는 소리는 하지 마. 내 동생이 능 선생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몰라. 혹시라도 우리 전칠이랑 능 선생 관계를 너희들이 망치면, 우리 브라질 목장 되게 넓다?”

“아유, 겁주지 마. 게다가 혹시 병 나서 능 선생한테 치료받으면서 눈호강 좀 하는 게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잖아.”

전가천이 어이없다는 듯이 하는 말에 파 언니가 바로 정리하고는 또 우아한 척 물었다.

“그래서 능 선생 진료과는 뭐야?”

“응학. 혹시 건물에서 떨어지면 만나게 돼.”

전가천도 감출 생각은 없다는 듯이, 다만 언짢은 듯 대꾸했다.

“응급실이야 간단하지. 그럼 환자 소개하는 건 괜찮지?”

파 언니는 기대 가득한 모습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에 남편 다치게 하면 운화병원으로 보내서 능 선생님한테 치료받으라고 할게.”

“그거 괜찮네.”

“파 언니한테 배워야겠다.”

“그럼 우리 정원사도 그렇게 해야겠다!”

“이만규 씨, 이만규 씨 보호자 계신가요?”

간호사가 고개를 숙인 채 노트를 확인하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고함쳤다.

“네, 여기요.”

“이제 곧 수술이에요. 어제 푹 쉬셨죠…….”

고개를 든 간호사는 눈 앞에 펼쳐진 모자이크를 유심히 바라봤다. 체크 남방을 입은 사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 것 같아진 간호사는 기가 차서 웃었다.

“다들 똑같은 옷 입고, 괴롭지 않아요?”

“흠흠, 죄송합니다. 임 간호사가 30시간 연속 근무하고 병실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해선 안 될 말을 했네요. 그러니까 임 간호사 말은…….”

뒤에 서 있던 나이가 좀 많은 간호사가 임 간호사를 끌어당기며 설명하고는 더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깔맞춤이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요? 깔맞춤인가요?”

“그럴 리가요.”

“그런 껄끄러운 짓을 왜.”

“사실 30시간 근무는 별거 아니지. 나는 최장 60시간도 했었어. 힘들어서 옷을 어떻게 벗는지도 모르겠더라고.”

“깔맞춤은 뭐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던 사내들은 곧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니까. 내건 스코틀랜드 무늬야.”

“난 비쉬. 오늘 비쉬는 나만 입었을걸?”

“테이블보 무늬겠지. 다들 싫어하니까 너만 입었지,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커튼 무늬가 비쉬를 비웃다니. 너도 대단하다.”

두 간호사는 머리가 다 멍해졌다. 체크무늬도 다 이름이 있었어? 발가락마다 이름이 다른 거랑 뭐가 달라?

그 순간, 두 간호사는 처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가서 서전들의 수다를 들었을 때 느꼈던 식견이 넓어진 느낌과 수치심을 똑같이 느꼈다.

침대맡의 소개는 지금도 멈추지 않았고, 이만규 가까이 있던 중년 남자도 뿌듯한 듯 아랫배를 내밀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건 깅엄이야. 가장 전통적인 체크무늬지. 어때 보여요?”

그 물음에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 떨렸다.

“다 같은 무늬 아니에요?”

“다르죠. 보세요, 두 가지 다른 색 선이 가로 세로로 교차했어요. 이럼 체크무늬만 생기는 게 아니라 색이 달라지죠. 하얀색이랑 검은색이 섞이면 진한 검은색 느낌이고 이건 검은색 두 개가 섞인 거예요. 연한 검은 부분은 검은색이랑 하얀색이 교차한 거고, 하얀 부분은 하얀색이랑 하얀색이 교차한 거고. 그러니까 제가 입은 이런 전통 체크는 사실 체크라기보다는 줄무늬 셔츠죠. 그러니까 체크 셔츠에 세 가지 색이 있으면 복잡한 기술 필요 없고 가로, 세로 줄무늬를 교차하면 돼요. 신기하지 않아요? 디자인을 기술에 이용해서 제품 목표를 실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에요. 요즘 제품 매니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간호사는 무수한 의문이 생겼다. 예를 들면, 검은색과 연한 검은색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줄무늬 셔츠라는 표현이 체크무늬보다 나을 건 또 뭐가 있는지. 신기하긴 뭐가 신기한 건지.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서로 구별하는 게 더 신기하거든!

그러나 임 간호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연애를 해봤고, 남자에게 기회를 줘야 할 때가 있고 입 뻥끗할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잘 아니까.

“주사 놓을게요.”

임 간호사는 침대에 누운 이만규를 바라봤다. 막 이야기에 참여하려던 이만규는 간호사가 흥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바늘로 찌르겠다고 하자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만규는 한참 고민하다가 간호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사고방식으로 이야기에 돌입했다.

“버버리 잘 알죠? 버버리 클래식 체크가 바로 체크무늬잖아요. 그게 바로 스코틀랜드 무늬예요.”

“아, 오른쪽에 놓을까요, 아니면 왼쪽?”

“오른손이요, 오른손.”

테이블보를 입고 문병 온 남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중요한 왼손에 주사를 놓으면 안 되죠.”

남자들은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순간 누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지, 난 와이프 있는데.”

“그럼 왼손이야 진짜 와이프야? 왼손이랑 와이프 중에 누가 더 쓸 만하냐고.”

“아…….”

임 간호사는 처음에 주임급 수술에 참여했을 때처럼 ‘생각’이라는 걸 버리고 이만규의 팔뚝에 말없이 바늘을 찔렀다.

“감사합니다. 저기, 수액 다 맞으면 수술실에 들어가나요? 얼마나 걸릴까요?”

“두 시간 정도요?”

이만규가 묻는 말에 간호사가 수액 속도를 조절하면서 대답했다.

“오래 걸리네요.”

간호사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대답했다.

“여자는 보통 남자보다 오래 걸려요. 많이.”

아직도 치도리 체크와 윌리엄 왕자 체크 중 어느 것이 더 못생겼는지 비교하던 남자들은 순간 침묵에 잠겼다.

매일 인체를 가지고 노는 어린 아가씨는 역시 달라!

이만규는 침묵한 가운데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

체크무늬 사내들은 이만규의 아내를 둘러싼 채, 이만규가 스트레처 카에 누워 수술실 복도에 집어 삼켜지는 걸 보며 원래 고요했던 감정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테이블보 무늬를 입은 사내는 저절로 감성적으로 되어 흔들리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 결과와 상관없이 영원히 기억할게요.”

“음. 설사 최악의 결과가 나온대도 형수님 잘 돌볼게요.”

깅엄 무늬 중년 사내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회사가 있는 한 우리는 있을 거야. 형수님 것도.”

“맞습니다. 만큐 카메라만 성공하면, 회사도 살아남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장님이 안 계셔도 사모님 지킬 수 있죠. 우리도 신경 쓸게요.”

“지금까지 모든 게 순조롭고 새 버전 수정만 좀 하면 돼. 테스트 팀이 조금만 힘내 주면 아무런 문제 없어. 음, 그때 사모님 전용 보정 효과 만들어 드리면 되겠네. 아주 좋아하실 만한 거로.”

“새 프로그램은 문제없고, 지금은 버그만 좀 잡으면 돼. 길어도 몇 달 고생만 하면 되니까, 사장님이 안 계셔도 우리가 해낼 수 있어. 기껏해야 날짜가 좀 미뤄질 뿐이니까 사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침착하던 편이었던 이만규의 아내는 점점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어졌다.

이것들이 대체 뭐라는 거야. 남편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뭐야.

이미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는 이만규의 아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보. 상장할 때까진 버텨야 해요.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매우 간절한 표정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러자 체크무늬 셔츠 하나가 부러운 듯 바라봤다.

“사장님, 팔자 참 부럽네.”

“예쁜 와이프 얻었잖아요.”

“사장님한테도 잘해주겠지. 내 마누라가 저렇게 이뻤으면 내 신장도 못 버텼을 거야.”

“사장님은 간 문제인데.”

“되게 심했나 보네. 역시, 사장 클래스.”

“저 보정 카메라 어플 만드는 사람이에요.”

이만규가 누워있는 스트레처 카는 수술실 복도에서 잠시 멈췄다. 수술실 비우길 기다리는 동안 이만규는 아내에게 배운 대로 순회 간호사와 가깝게 지내려고 말을 걸었다.

“어떤 어플이요?”

“만큐 카메라요. 저는 이만규라고 합니다.”

이만규가 프린트된 팔찌를 내밀어 보였다.

“보정 카메라를 써본 적이 없어서요. 특별한 점은 뭐가 있어요?”

“만큐는 여러 사람을 동시에 보정 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특징이죠. 큐 하는 순간에 만인이 화사하게 활짝 펴는 거죠. 밭에서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해바라기가 밭에서 자라요?”

순회 간호사가 매우 놀라 묻는 말에 이만규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어이, 어이. 지금 포인트가 그게 아니잖아.

반쯤 벗은 꼴로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는 신세가 아니라면 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을 것이다.

“맞아요. 해바라기는 밭에서 자라요.”

이만규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수많은 해바라기가 모여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쓰기 딱 좋은 어플이죠. 사실 요즘 단체 샷 많이 찍잖아요. 친구들 모임, 커플 사진, 아니면 노래방, 회식 등등. 누구 한 사람 보정하느라 다른 사람은 얼굴이 찌그러지는 건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예쁘게 찍히는 어플도 있지만, 그래도 보정이 완벽하진 않아요.”

“하지만 꽃집에 있는 해바라기는 장미랑 비슷하던데. 그래서 그 밭이라는 게 꽃밭이랑 비슷한 밭인 거죠?”

순회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이만규는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이따 수술에 간호사 선생님도 들어가세요?”

“네. 우리 간호사도 팀으로 움직이거든요.”

“수술하기 싫다고 지금 이야기해도 안 늦었나요?”

20분 후.

이만규는 깨끗하게 청소된 수술실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온 순회 간호사는 다시 그의 팔찌로 각종 정보를 확인한 다음 마취의에게 환자를 넘겼다.

그렇게 준비 작업을 또 15분 정도 진행하는 동안, 이만규는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불안한 듯 몸을 비틀었다. 생각은 점점 많아지고 유서 생각을 세 번 정도 했을 때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언제 오세요? 능 선생님이 수술하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지금 손 씻고 있으니까 곧 올 거예요.”

마연린이 속으로 뻔히 다른 의사가 있는 자리에서 의사가 언제 오는지 묻는다고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이만규는 평소엔 눈치가 없지 않은데, 수술실이란 환경에 있다 보니 다른 사람 마음까지 배려할 수 없었다. 그는 발끝을 오므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배 열고 간 잘라내는 거잖아. 초조할 거 없어.”

“마취하면 바로 느낌 없을 거고, 한숨 자고 일어나시면 수술 끝났을 거예요.”

둥근 의자에 몸을 올려놓은 마취의 소가복이 노트에 별 다섯 개를 바라보며 환자를 위로했다. 능연이 수술에 요구가 까다로운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도 하고 해서, 요즘엔 사적으로 환자에 별점을 주어서 의료진이 주의할 수 있도록 했다.

오래 이어갈 방식은 아니라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별점 높은 받은 환자를 망치지 않도록 의료진들이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만규는 소가복의 선의를 느끼기는커녕 위로의 말에도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오히려 잠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바로 ‘아미타불’을 외치고는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눈을 떠 보니, 흐릿한 그림자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평소에 안경을 쓰는데 수술받으러 온 거라 당연히 안경을 쓰지 않아서 모두 흐릿해 보였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는 대형 후광을 보자, 이만규의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절로 안정되었다.

“능 선생님?”

“네, 접니다.”

혹시나 하고 묻는 이만규의 말에 대답한 능연은 소가복을 바라봤다.

“준비 OK.”

“신분 확인도 끝났습니다.”

소가복이 대답하고 순회 간호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이만규는 저도 모르게 참수형 일정을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입을 열려는데 소가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거꾸로 열 셉니다.”

“뭘 세…….”

이만규가 입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뚝 그쳤다.

능연은 수술 베드를 한 바퀴 돌며 뷰라이트에 걸린 MRI 사진을 확인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연린과 소가복은 함께 나서서 환자 체위를 조절하고 소독하기 시작했다.

“이 수술, 최대한 디테일 하게 합니다.”

아직 ‘완벽한 수술’ 퀘스트가 남은 능연은 특별히 상기시키고는 순회 간호사를 바라봤다.

“이 수술 시간 좀 넉넉하게 잡아요.”

“두 시간 잡을까요?”

“세 시간 반이요.”

능연은 거기까지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넉넉하게 잡았다. 능연이 세 시간 반이라고 말하자 수술실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보통 의사들은 비슷한 간 절제를 할 때 세 시간, 네 시간이 정상이고 예닐곱 시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능연은 이미 보통 의사의 범주를 초월해서 지금 표준 수술 시간은 한 시간 반 안팎이었다. 그것도 보통은 안쪽이고. 단순한 증상일 경우엔 4, 50분 만에 메인 과정은 끝내는 일도 정상 범주였다.

그런데 지금 세 시간 반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수술 전 과정이겠지만, 어찌 됐든 능연이 디테일 하게 하자고 한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라는 뜻도 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어서, 군소리 없이 능연의 말대로 따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능연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니까.

능연은 묵묵히 환자의 배를 열고 마지막으로 환자의 복강 상태를 떠올려 본 다음 조금씩 박리했다.

능연 입장에서 외과 의사의 표준으로 수술을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환자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의사가 그렇게 하려고 추구해서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를 어려운 문제 푸는 사고회로와 스킬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처럼. 물론 마지막에 시험지를 낼 때, 채점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는 건 마지막 답안일 뿐, 그 과정을 아는 건 문제 푸는 사람밖에 없다는 것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주 원장.”

배가 빵빵하게 나온 무홍랑은 그다지 몸에 맞지 않는 하얀 가운을 입고 손을 휘저으며 그래도 진정성 넘치는 표정으로 주 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너무 급하게 부탁해서 그렇지, 며칠 일찍 이야기했으면 수술을 응급센터 1번 수술실로 잡았을 텐데. 거긴 참관실도 있어서 더 편한데.”

“괜찮아. 난 수술실이 더 좋더라고. 각도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아니면 영상 보는 게 낫지.”

수술실 섹드립러로 오래 산 무홍랑은 수술실 복도에서도 저도 모르게 섹드립을 던졌다. 주 원장은 여자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무홍랑은 부하도 아닌 동창이라 섹드립을 하든가 말든가였다.

“능 선생은 수술실에서도 고집 있는 편이야. 게다가 자기 습관도 있고. 쫓겨날 짓은 하지 마. 쫓겨나도 나는 몰라.”

“알아. 운화병원 핫 스타잖아.”

“우리 능연 빼가려고 온 건 아니지?”

“아까부터 그게 묻고 싶었던 거지?”

“당당한 무 교수가 수술 하나 보려고 왔겠어?”

“내가 빼가고 싶다고 빼갈 수는 있고?”

무홍랑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주 원장이랑 다르잖아. 진료과 주임 자리도 7, 8년 더 있어야 하는데 나중에 이 자리 준다고 꼬셔도 눈도 깜빡하지 않을걸.”

“정말 생각은 했나 보네?”

주 원장도 따라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생각만 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럼 진짜 목적은?”

“심부름이랄까?”

“응? 대 무 주임이 심부름? 그게 무슨 말이야.”

주 원장은 순간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무홍랑은 아예 걸음을 멈춰 서서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 수술받는 환자 회사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어. 그런데 그 회사 가치는 사실 설립자한테 달렸거든. 그러니까 설립자의 건강 상태, 수술 진행 상황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알고 싶어 하는 거지.”

주 원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미국 법 같으면 환자의 건강 상태는 매우 개인적이고 기밀이다. 물론 중국은 그런 법이나 규제가 없고, 다만 조금 껄끄러울 뿐이다.

“수술이 얼마나 걸린다고. 그것도 못 기다려서?”

주 원장은 이야기를 잊으려고 그냥 웃어 버렸다.

“억 단위 장사잖아. 장사꾼은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지. 어찌 됐든 그렇게 부탁하길래 한 번 와 본 거지. 안심해, 내가 입 꽉 채우고 필요한 것만 말할게.”

“돈이라는 게 참…….”

주 원장도 잠시 중얼거리고는 곧 말을 돌렸다.

“저 앞이 수술실이야. 난 들어가서 인사하고는 바로 회의하러 가야 해.”

“그래, 그래. 끽소리도 안 하고 조용히 볼게.”

무홍랑이 호탕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모습에 주 원장은 피식 웃었다. 이 옛 친구도 한때 명실상부한 스타였다. 해부실에서 처음으로 밤을 새운 남학생이 바로 그였고. 나중에 짝을 지어 해부했던 친구들과 비교하면 무홍랑은 간이 크긴 컸다.

주 원장은 수술실을 밟고 들어가 우선 손짓부터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 원장님!”

“주 원장님?”

수술실에 있던 의료진이 서둘러 인사했다. 병원에서 부원장의 지위는 높은 편인 데다가 수술 현장에 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직급이었다.

주 원장은 인재를 아끼는 인자한 미소와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능연, 수술 순조로운가? 어디까지 진행됐지?”

인재를 아끼는 인자함과 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 원장은 능 선생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을 바로 불렀다. 게다가 능연의 수술이 순조롭지 않다면 어쩌면 이대로 무홍랑을 데리고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간 원 인대 박리 중입니다. 수술은 순조롭고요.”

능연은 대답부터 하고 고개를 들어 주 원장 쪽을 바라봤다. 뒤따라 들어오던 무홍랑은 능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머릿속으로 무수한 전설을 떠올렸다.

“소개 좀 하지. 화남 대학 무홍랑 교수. 화남 병원 간담췌 주임이기도 하고. 마침 우리 병원에 왔는데 자네 수술을 보고 싶다고 해서.”

간단히 무홍랑 소개를 한 주 원장은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회의 하러 가야 해. 알아서 수술 보고 가. 괜찮지, 무 교수?”

“그럼, 그럼. 가서 일 봐. 난 여기서 입 닫고 보기만 할게.”

무홍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가 머리를 내밀고 보는가 싶더니 바로 목소리를 깔고 고함쳤다.

“오우, 시발!”

주 원장은 저도 모르게 무홍랑을 바라봤다. 그냥 식사 자리라면 교수가 ‘시발’ 정도 입에 올리는 건 당연하지만, 수술실에서 이 조무래기들 앞에서는…….

“오우 시발, 오우 시발, 오우 시발, 오우 시발!”

주 원장이 반응하기도 전에 무홍랑은 다시 시발을 연발했고, 주 원장은 힘껏 헛기침했다.

“무 교수…….”

입 닫고 있을 거라며.

무홍랑은 가성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우 시발, 오우 시발. 주 원장도 와서 댁네 능연이 수술하는 것 좀 봐봐.”

그 말에 주 원장은 조금 긴장하면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 원장 역시 입이 동그래져서는 ‘오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무혈 수술? 쩐다! 쩔어!”

무홍랑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긴 세월 동안 간담췌에 있었고, 그만큼 간 수술을 많이 봤고 직접 한 간 수술도 천 건 가까웠다. 그런데 그 수많은 수술 중에 유혈이 낭자 하지 않은 수술은 없었다.

간은 인체에서 혈액 순환이 일등으로 풍부한 기관이고 손만 미끄러져도 2분에 5,000cc는 가볍게 피를 흘려 버릴 수 있다. 그런 부위를 수술하면서 무혈 수술이라니, 무홍랑은 꿈도 꾼 적이 없었다.

서전 입장에서 무혈 수술이야 당연히 짜릿하지만, 그것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중고차 수리 기사가 기름때 하나 없이 차를 고치는 게 쉬운가?

무홍랑도 유사한 무혈 수술 영상은 봤었지만, 대부분 실험성 수술인 데다가 외국 능력자들이 한 수술이다. 능능능력자들도 영상을 찍거나 임상 실험할 때나 무혈 수술을 시도하는 것만 봐도 그 난도가…….

오늘 수술 참관하러 오기로 한 소식은 절대로 사전에 누출될 일이 없다는 걸 무홍랑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이 능연 능 선생은 오늘 수술 참관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몰랐다. 다시 말하면…… 능연이 진행하는 평범한 수술이라는 말이었다.

그 생각에 무홍랑은 다시 한번 ‘오우, 시발, 쩐다.’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옛 친구의 표정을 바라보던 주 원장은 갑자기 세 번째로 오로라를 보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같이 갔던 관광객도 다들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처럼 굴었었다.

수술실 분위기는 열정적이면서도 조용했다.

몇 번이나 감탄해도 능연의 호응을 얻지 못한 무홍랑은 드디어 입을 꾹 다물고 눈빛으로만 놀라움과 의아함을 표현했다. 밀림에서 얼룩말을 찍으려고 하루 꼬박 잠복하다가 갑자기 사자 무리가 얼룩말, 그리고 본인까지 포위하는 걸 본 사진사처럼.

처음에 ‘오우, 시발’을 외친 무홍랑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기 드문 장면을 찍으면서 사자 무리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길 바랐다. 정말로 귀한 수술이었다. 능연이 왜 이런 수술을 하는지, 왜 이런 수술이 가능한지는 몰라도 끝까지 보고 싶었다.

무홍랑은 속으로는 능연이 이런 수술을 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모두의 표정이, 지금 장면으로 보면, 이런 수술을 자주 보는 것 같을지라도.

능연이 혈관을 집고 있는 틈을 타, 무홍랑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운화병원 응급센터 수술실은 평범하고 또 평범했다.

솔직히 현재 국내 삼갑병원 수술실은 다 비슷비슷해서, 북경 모 병원에서 온 전문가가 어느 성의 구석진 수술실에 간다고 해도 10분이면 현장 분위기에 익숙해진다.

물론 급이 다른 병원, 진료과일수록 수술실도 급이 다르다. 지금 능연이 있는 수술실은 층류도 없고 면적만 크다. 의약품을 놓아둔 수납장만 봐도 90년대 말 제품이었다.

수술대, 무영등 모두 평범한 국산이고 무홍랑 병원의 일반 수술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수술실도 평소에 사용하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전체 병원 시스템으로 보면 괜찮은 편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하드웨어적 조건으로 무홍랑은 오늘 수술이 특별할 것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수술이라면 운화병원에서 새로 만든 참관실 있는 수술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참관실이 없더라도 적어도 층류 시스템이 있는 수술실을 선택했겠지.

사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무홍랑이 이런 중요한 수술, 이런 특별한 수술을 한다면 하드웨어, 참관 인원, 촬영 등등 얼마나 따져댔을지. 과거 10~20년 동안 수도 없이 상상하고 실천했던 일인데.

외과 의사는 설사 술에 취해도, 다른 사람 셋째 애인 품에 안겨 있을 때도, 몰랑몰랑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도, 입으로는 수술에 대한 환상을 늘어놓는다. 끝내주는 수술실에서 끝내주는 관중을 세워두고 끝내주는 사람에게 끝내주는 장비로 끝내주는 수술을 하는 것처럼!

수술 중인 능연을 바라보는 무홍랑은 눈에 햇볕을 쬐는 것처럼 시렸다.

“포셉.”

“초음파 메스.”

능연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다. 그의 수술은 늘, 기본적으로 구경하는 사람이 있고 혹은 운리 생방송을 하거나 또 혹은 참관실이 있는 1번 수술실에서 진행하거나 혹은 연수의 등 다른 의사가 참관했다. 게다가 능연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참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할 뿐인 성격이었다.

수술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간 원 인대 박리에서 간 절제까지 진행되는 동안 곁에서 얌전히 보던 무홍랑도 점점 까치발을 들게 되었다.

주 원장 역시 말없이 곁에서 지켜봤다. 무홍랑이 ‘오우, 시발’을 외치는 순간 오늘 수술을 보기로 결정 내렸다. 회의는 사실 수술 내내 같이 있으며 시중들기 싫어서 둘러댄 변명이라 긴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간 절제합니다. 알부민 준비.”

“간도 무혈 수술로?”

능연이 하는 말에 무홍랑은 더 기대하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 무혈 수술로 합니까?”

간 절제 전에 잠시 멈춰야 해서 무홍랑을 바라볼 시간이 난 능연은 상대가 나이도 많고 눈빛도 예리한 걸 봐서 한마디 되물었다.

자기 병원이었다면, 혹은 다른 젊은 의사가 그랬다면, 무홍랑은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능연이 수술 내내 무혈 상태를 유지한 걸 생각하면, 신 같은 의사 능연 앞에서 무홍랑은 저절로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조금 겸손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무혈 수술로 했잖나.”

그러자 능연은 되짚어 보는 표정을 짓더니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무혈 수술 상태였던 거 같네요.”

“그렇지. 지금까지 출혈량이 막 50cc 넘었으니까.”

마취의 소가복이 앞다퉈 대답했다. 소가복 역시 넋이 나간 상태였다. 물론 능연은 전에도 비슷하게 쩌는 수술을 했지만, (구) 학구파 소가복은 두 번째 쩌는 수술, 혹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쩌는 수술을 볼 때도 늘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하늘 높은지, 땅이 너른지도 모르고 달을 보면 춥고 해를 보면 따듯하다고 여기며 인생을 헛살았구나.

무홍랑은 다시 놀라서 또 한 번 “오우, 시발!”을 외쳤다.

“50cc는 한 입도 안 되겠다.”

“저희는 자체 수혈합니다.”

마취의가 묵묵히 무홍랑을 힐끔 보고는 은근히 무시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럼 50cc도 안 된다는 거네?”

무홍랑은 바로 알아듣고 더 감탄했다.

“간 절제 하면서 수혈 안 하는 걸 보긴 했지만······. 어쨌든 능 선생, 그러니까 님은 오늘 수술이 무혈 수술인 것도 몰랐다는 거네?”

“가끔 이런저런 요인으로 무혈 수술 상태를 해내긴 하지만요.”

능연은 매우 평온하게 대답했다. 무혈 수술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외과 수술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수술할 때 편하기도 하고 예후도 훨씬 좋아진다.

하지만 능연의 말대로 지금 기술 수준으로 무혈 수술은 단순히 하려고 애쓴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수술 방식, 환자의 생리 구조, 질환과 기초 질환 등등 다방면과 연관 있었다.

무홍랑도 당연히 그 이치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기 때문에 이렇게 놀라는 것이다.

다른 의사가 무혈 수술 비슷하게라도 하려면, 다시 말하면 무혈 수술을 할 가능성이 보이기라도 하려면, 일 년, 이 년 공들여서 환자를 선별하면서 또 비슷한 케이스를 미친 듯이 수술해대야 가능한 얘기였다.

아무 무혈 수술 영상이나 꺼내 들고 아무 임상 의학 전시회에 내놓아도 온갖 주목을 다 받을 것이고, 명성과 이익 모두 거둘 수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능연이 정말로 ‘무혈 수술은 가끔 할 수밖에 없다.’며 담담한 걸 보고 무홍랑은 더는 담담할 수 없었다.

쩌는 일을 밥 먹는 것처럼 해낸다니, 대체 이게 어떤 멘탈일까. 무홍랑은 설명할 길도 없었고, 설명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는 수술대 위의 환자 이만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 놓은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만규’ 담당 의사가 미친 듯이 쩔어. 수술 중인데 매우 순조롭고.

“알부민.”

능연의 오더가 들리자, 무홍랑은 멈칫하고는 서둘러 돌아섰다. 알부민은 상처 유합을 촉진하려고 간 절단면에 바르는 것이다. 그 말은 즉······.

유심히 살펴봤더니, 역시나, 역시나의 역시나, 수술대 위 이만규의 간은 조금 잘렸고 게다가 이미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올라가 있었다.

“이게······.”

무홍랑은 목소리가 다 떨렸다.

간 절제를 보러 와서 한참 봤는데 결국 가장 중요한 간을 절제하는 과정을 못 본 사람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다른 사람 셋째 애인을 공들여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거금을 들여 스위트룸을 예약해서 샴페인까지 터트렸는데 힘껏 홀짝이고는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 수술을 해야 하는 기분이랄까.

“너무 빠르잖아.”

고개를 내밀었더니, 능연은 이미 매듭을 지었고 복강 안은 판타지 세계처럼 아름다웠다.

띠리링, 무홍랑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안합니다, 미안.”

무홍랑은 연신 사과하고는 핸드폰을 꺼낸 후에야 멍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주 원장이 웃는 듯 마는 듯 보고 있는 걸 보고 할 말이 없어졌다.

따지고 보면 무홍랑은 언제나 기세등등하고 거만한 데다가 자신감에 넘치고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다. 젊어서 철없을 때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곽종군처럼 흉악하지 않아서 그렇지 같은 업계 사람 앞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는 편이었다.

다른 외과 의사 앞에서도 예의 바르다고 할 수 없고 ‘미안하다’는 말은 상대를 존중하고 또 정말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나 했다.

무홍랑은 핸드폰을 든 채 해명하듯 주 원장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사람이 나이 들면 좀 둥글둥글해져야지.”

“아까까지만 해도 둥글둥글하지 않더니. 전화나 받아.”

주 원장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무홍랑도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수술대 쪽을 힐끔 보고는 아쉬운 듯 수술실 문을 밟고 나갔다.

자기 병원 수술실이라면 그 자리에서 받았을 것이다. 다른 평범한 의사 수술실에서도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무혈 수술 시야에서 간 절제 수술 중인 수술실에서는 바로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 할 순 없었다. 설사 무홍랑과 능연이 종속 관계이든 아니든, 상대가 권력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수술실 에어타이트 도어가 굳게 닫히고, 무홍랑은 핸드폰을 들고 복도로 나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술실에 있었어.”

“음, 아까 메시지 보고 상의했고, 지금 다 회의실에 모여 있어. 무 선생, 수술 끝났습니까?”

전화 너머에서 예의 바르고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홍랑은 그에 맞춰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능연 선생의 수술은 매우 빠르다던데요. 간 절제 수술도 평균 90분이 넘지 않고요. 그런데 지금 90분 지났습니다. 수술에 문제 있는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럼 업데이트할 내용 있습니까?”

“간 손상 부위는 이미 절제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 과정은 끝난 거죠. 이제는 뒤처리만 남았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공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무홍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돌발 문제만 없으면 성공할 겁니다.”

“확률로 말하면 몇 프로입니까? 내 말은, 이만규 씨가 일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걸리냐는 겁니다. 정상 상태로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걸리고 그럴 확률은 몇 퍼센트일까요?”

수술 과정보다는 수술 예후에 더 관심을 보이는 질문이 수화기 너머에서 연달아 들렸다. 그들의 질문의 의미를 잘 아는 무홍랑 역시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확률은 몇 퍼센트인지는 제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 경험과 상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만규 씨는 보름 안에 조금씩 업무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달 혹은 두 달 후엔 상대적으로 정상적 업무를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대담한 추측이군요. 무홍랑 선생님, 그 말씀으로 우리가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아시겠지만,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문가 의견을 달라길래 드린 겁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면 됩니다.”

무홍랑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그게······ 시간이 돈이라잖습니까. 선생님을 못 믿는 건 당연히 아니고요. 당연히 아니죠.”

상대는 두 번 반복하고는 말을 멈췄다.

“더 할 말씀 없으면 이만 끊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무홍랑은 가볍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고는 같잖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사업가들하고 일하면서 딱히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돈을 너무나 많이 줘서 그렇지, 당당한 주임 의사가 허리를 굽힐 일이 아니었다.

무홍랑은 바로 수술실로 돌아가지 않고 수술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안을 바라봤다. 수술실 에어타이트 도어에 있는 유리문은 보통 사람 얼굴 둘, 대두라면 1과 1/3 정도의 크기로, 밖에서 바라보면 수술대 위의 장면이 딱 보였다.

무홍랑 병원도 이런 비슷한 둥근 유리가 달렸고, 가끔 밖에서 초짜 의사들의 수술을 지켜볼 때가 있었다. 오늘은 매우 다른 기분으로 보고 있지만.

“무 주임, 왜 그래?”

무홍랑이 수술실 밖에 서 있는 걸 본 주 원장이 바로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천하엔 대대로 인재가 나온다잖아.”

무홍랑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전에 자기네 병원 간담췌가 대단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몰랐어.”

“빼갈 생각하지 마. 빼가지도 못하니까.”

주 원장은 미심쩍은 듯 무홍랑을 바라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빼가긴 뭘 빼가. 환자 소개하는 건 괜찮지? 내가 능 선생이랑 같이하는 건 괜찮은 거 아냐.”

“기술이라도 빼가겠다? 그것도 줄 서야 한다.”

“아니 사실 어린 환자가 있어서 그래.”

무홍랑이 흠흠대며 말을 이었다.

“나도 며칠 전에 받은 환자인데, 14살. 건강 검진하다가 발견한 초기 간암이야. 내 친구 아들이라 바로 우리 병원으로 왔는데 나도 생각 중이거든.”

“병세가 복잡해? 14살이고 초기면 심각한 건 아닐 거 아냐.”

주 원장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집안 사정이 좀 특별해.”

무홍랑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 꼬맹이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 모두 간암. 위에 오빠도 있는데 25살에 간암 발견. 다 내가 수술했지.”

주 원장은 멍하니 무홍랑을 바라봤다.

“할아버지가 제일 오래 살았어. 7년.”

무홍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작은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 했지.”

“능연은 지금 자기 수술은 자기가 결정해. 그래서 환자를 받을지 말지 내가 이야기하는 건 소용 없어.”

주 원장은 옛 친구의 부탁을 받고도 IQ가 멀쩡했고 정신도 맑았다.

모든 병원엔 소위 탑급 인물이 있는 법이다. 설사 별로 유명하지 않은 구(區)급 병원에도 가끔 어느 나이 든 전문가가 특별히 신체 검진에 능통하다 운운하는 일이 있다.

운화병원 같은 정상급 삼급 병원은 아무리 관리층이 잘한다 해도 근본을 따지면 기술이 뛰어나고 유명한 의사가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무홍랑에게 아무리 훌륭한 설비, 기계를 들이밀어도 소용없다. 어느 개인병원에서 더 좋은 기계를 살 능력이 있고 가격을 더 싸게 들일 수 있어도 고급 삼갑병원에서 내미는 건 결국 의사였다.

주 원장 같은 관리 계급도 관용이니 우대니 이런 건 몰라도, 병원 탑급 의사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매우 신중해진다.

이런 태도는 딱히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 탑급 의사 일로 몇 번 시끄러워져서 테이블 몇 번 두드리면서 어머니 안부 묻는 소리 몇 번 듣고 나면 할 수 없이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습관이었다.

그래서 설사 능연이 주 원장 라인이라고 해도 능연 대신 환자를 결정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홍랑은 바로 알아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주임 후보가 된 건가.”

“우리 능연을 탐내는 사람이 님이 처음이 아니거든요.”

“그건 그래. 실력만 봐도. 하아, 그래, 나중에 능 선생한테 잘 물어볼게.”

“흠흠.”

그때, 그리 멀지 않은 코너에 흑회색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아, 곽 주임. 언제 왔나?”

주 원장은 묘하게 뜨끔해서 재빨리 아는 척했다. 능연을 그 자리에서 팔아 버리건 아니지만, 곽종군 없는 곳에서 능연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무홍랑 역시 곽종군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주 원장이 그런 태도를 보이자 같이 인사했다.

“이분이 응급센터 곽 주임?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안 그래도 저녁에 같이 식사하면서 인사나 하자고 모시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났군요.”

식사 이야기는 지금 대충 둘러댄 것이었다. 능연의 실력에 감명받아서 그렇지, 원래는 수술 끝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업가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수술에 지장 줄 정도는 아니니까.

곽종군은 흥흥 대며 입을 열었다.

“예, 곽종군입니다. 식사는 됐고요, 아까 능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요.”

“음, 능 선생과 함께 수술 한 건 하려고요. 청소년 초기 간암이니 특별한 케이스인 셈이죠.”

“청소년 초기 간암이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죠.”

무홍랑이 껄껄 웃으며 하는 말에 곽종군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말은 그렇지만, 조금 전에 주 원장한테도 이야기했듯이······.”

무홍랑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곽종군은 조용히 서서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위아래로 무홍랑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실력이 거기까지인 거겠지요.”

곽종군으로서는 아무렇지 않게 뿜을 수 있는 상대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고, 갑자기 만난 데다가 조금 언짢은 상황이라 이 정도일 뿐이었다. 정말로 화가 났을 때 ‘사이 좋게 식사나’ 소리를 들었다면 즉시 상대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뿜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홍랑은 창서성 사람도 아니고, 곽종군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곽종군이 누굴 두들겨 패는 것을 본 적도 없어서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다 같은 의사끼리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주 원장도 재빨리 끼어들었다.

“곽 주임, 우리는 의사지 신이 아니잖아. 환자는 병세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

“그렇다면서 우리 능연은 왜요?”

곽종군이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수술 횟수를 늘리고 싶으면 알아서 늘리시라고요. 우리 능연을 불러서 하라는 건 좀 심하지. 능연의 기술은 정말로 목숨 살리는 데 쓰일 만한 것이라, 흔하게 볼 수 있는 멍청이들이랑 다를 겁니다.”

“누, 누가 수술 횟수를 늘리려고 이런단 말이야!”

곽종군처럼 억지를 부리는 사람을 처음 본 무홍랑은 씩씩대며 주 원장을 바라봤다. 마침 곽종군도 따지는 눈빛으로 주 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 교수는 내 옛 친구, 수술 횟수 늘리는 그런 의사가 아니에요.”

주 원장은 조금 껄끄러운 듯 무홍랑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건 원래 알고 있었고, 그저 언짢을 뿐이었던 곽종군의 표정은 별로 큰 변화가 없었다.

“곽 주임,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설명을 마친 주 원장은 다시 무 교수를 위해 물었다.

“환자는 운화병원에서 수술합니다.”

곽종군은 스님 체면은 몰라도 부처님 체면은 생각해 줘야 한다는 듯, 결국 주 원장까지 들이받지는 않았다. 주 원장은 웃어 보이고는 무홍랑을 바라봤다.

“그럽시다.”

무홍랑 역시 언짢았지만, 결국은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자기가 오는 것보다 능연을 모셔가는 게 편했다. 곽종군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능연을 모셔갔겠지만, 곽종군이 이런 성격이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그의 목표는 청소년 간암 수술을 제대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무홍랑 본인도 실력이 괜찮은 간담췌 전문가고 심지어 꽤 재능 있었다. 하지만 그쯤 되는 의사는 재능에도 급이 있는 걸 안다.

무홍랑의 기술은 이미 더 끌어 올리기 어려운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수술을 더 잘하려면 능연 같은 의사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곽종군의 말도 그러려니 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럼 일단 나갑시다.”

두 사람이 협의한 걸 본 주 원장은 서둘러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고, 곽종군과 무홍랑 모두 안 될 것이 뭐냐는 듯 따랐다.

수술실 복도의 문을 곽종군과 무홍랑이 확 밀고 나가자,

“선생님!”

“선생님?”

보호자들은 대형 모니터에 뜬 수술 현황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모두 벌떡 일어났다. 개중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 보호자는 의사가 소식을 주길 기다리는 것뿐만 아니라, 변경된 수술 계획 혹은 비용 증가 같은 국면도 감당해야 했다.

주 원장은 바로 그쪽으로 나온 걸 조금 후회했다. 의료진 통로로 나갈 수 있는데 아까 너무 다급해서 이쪽으로 나오고 말았다.

“능 선생님 수술은 아직인가요?”

체크 셔츠 무리를 이끈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직입니다.”

곽종군이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혹시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곽종군은 무홍랑을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일단 진정하세요.”

곽종군이 우선 보호자를 진정시키고 입을 떼려고 하는데 머리 위 모니터에서 ‘딩동’ 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수술 끝났다!”

저 멀리 있던 체크 셔츠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능 선생님 나오려나?”

여자는 늙고 다크서클이 진한 곽종군을 상대할 겨를 없이 까치발을 들고 수술실 복도를 내다봤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능연은 수술실 복도를 걸으면서 마스크를 벗어 의료 폐기물 통에 던져 넣고, 은근히 붉은 자국이 남은 얼굴로 문 입구 쪽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만규 아내를 비롯한 모두의 눈에, 눈앞에 땀을 흘리고 있는 능연이 천사처럼 빛나고, 태양처럼 눈 부시고, 커다란 보석처럼 눈에 띄고, 수사자처럼 용맹해 보이고······.

“수술이 매우 성공이라고요? 그럼 괜찮은 건가요?”

체크 셔츠 무리에 둘러사인 여자는 저도 모르게 되풀이하며 물었다.

“재활이 중요합니다. 수술 성공은 최대한 일찍 침대에서 내려오고 최대한 회복하게 해주는 거죠. 그 밖에 수술 후 음식과 생활은 여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수술 자체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긴 시간 단련을 거친 능연은 이제 보호자들과 병세 이야기하는 스킬이 생겼다. 게다가 그의 말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고, 있는 대로 이야기하는 성격이라 환자들이 잘 알고 있는 의사 이미지에 부합했다.

“수술 성공했으면 됐어요. 선생님 말씀 잘 들을게요.”

이만규 아내는 바로 대답하고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뭐 물을 거 있으면······.”

“언제 복귀할 수 있습니까?”

왼쪽 체크 셔츠가 엄숙하게 묻고는 짐짓 헛기침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럴 때 이런 질문이 적당하지 않은 건 압니다. 하지만 회사가 올 스톱 될 상황이라 상황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직원들한테 설명도 하고······.”

“수술 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근해도 되나요?”

능연이 차분하게 대답하는 말에 다른 사람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휙 고개를 돌려 눈에 고리가 달린 것처럼 상대를 노려봤다. 상대는 잠시 당황하다가 웅얼댔다.

“이번만 잘 되면 상장할 수 있어요. 몇 년이나 노력해 왔고 이제 한 발짝 남았는데······.”

상장이라는 말에 아내의 머릿속에 핑크 다이아몬드, 백금, 에메랄드, 비취, 파텍 필립 시계, 작은 동물, 초콜릿 복근남······ 이 떠올랐다.

“어서 물어봐요. 어차피 저 사람 깨어나도 언제부터 야근할 수 있는지부터 물을 텐데.”

이만규 아내는 입에 고인 액체를 삼키고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테이블보 체크 사내가 능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능 선생님,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사장님 지금 상황이, 우리 회사 사람 모두 속수무책이거든요.”

“수술 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능연은 말투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같은 질문엔 당연히 같은 대답을 하지, 상대가 여러 번 묻는다고 대답을 바꿀 능연이 아니었다.

한 번 러브레터를 보냈다가 거절당한 여학생은 바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러브레터를 여러 번 보내고 여러 번 고백한다고 해서 다른 대답을 얻는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능연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쉬러 갔다.

무홍랑은 재빨리 뒤를 따르기 전에 꽤 예쁘장한 이만규의 아내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는 타지에서 온 의사입니다. 마침 능 선생이 남편분 수술하는 걸 참관했는데 멋진 수술이었습니다. 끝내주는 그런 수술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참, 운이 좋았던 겁니다.”

무홍랑은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능연을 따라갔다.

이만규 가족과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고, 테이블보 체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바람잡이는 아니겠지?”

“수술하라고 바람 잡아봐야 뭐해.”

“나중에 내가 능 선생한테 다시 물어볼게요.”

이만규 아내는 백 안에 회색 뇌물 봉투를 만지작거리면서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바라는 대로 다 해주면 뭐든 대답하겠죠. 그럼 괜히 쓸데없이 기다릴 일도 없고.”

“사모님, 고생하십니다.”

“역시, 사모님.”

“제 와이프도 사모님처럼 현명하면 좋겠네요.”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했다.

무홍랑이 능연을 따라잡았을 때, 능연은 이미 작은 식당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퀘스트 1: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내용: 완벽한 수술은 평생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외과 의사의 바람. 완벽한 수술 세 번 완성할 것.

- 퀘스트 진도:(1/3)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능연은 퀘스트 제시어를 보면서 아까 했던 수술 과정을 묵묵히 되짚었다. 그랜드마스터급 간 절제 스킬이 있어도 완벽한 수술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혹은 다방면으로 준비하고 운도 따라야 한달까.

조금 전 수술도 마찬가지로, 수술 전에 사진을 잔뜩 찍고 그걸 판독할 능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술 과정을 충분히 장악해야 하고, 어시의 협력도 주의해야 했다.

그냥 일반 수술이라면, 혹시 믿지 못할 어시를 만나도 자기가 해결하면 그만인데, 모든 것을 따져야 하는 수술은 집도의의 부담이 커질수록 성공률도 낮아진다.

그것 말고 작은 확률로 일어나는 의외의 사고도 적을수록 좋다. 아무런 사고 없는 수술이 당연히 가장 좋지만, 큰 수술일수록 작은 확률로 일어나는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 수술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혈압 변화, 혈관 파열 등등은 수술 전에 예상하기 어렵다.

상급 외과란 수술 중 사고에도 욕설을 내뱉지 않고 재빨리 처리하는 사람이다.

“능 선생, 내 소개 좀 하겠네.”

무홍랑은 능연 맞은편에 앉아서 매우 진지한 태도로 자기소개를 했다. 서전들은 성격이 다 거기서 거기고, 특히 그 거만함은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도 맡을 수 있다고 표현할 만하다. 무홍랑은 정말이지 능연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허리를 낮출 사람도 아니었다.

물론, 주 원장과 곽종군의 태도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무홍랑은 자신과 수술 예정인 소년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능 선생, 어때, 같이 할 수 있겠어? 자네가 집도도 하고 환자도 운화병원으로 데리고 올게.”

“왜 운화병원으로 데리고 옵니까?”

능연이 논리에 부합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홍랑의 고개가 곽종군 쪽으로 저절로 돌아갔다. 님네 주임님이 그러라는데요.

무홍랑을 곤경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는 곽종군은 양쪽의 의견 차이가 발생한 걸 보고 껄껄 웃으며 해명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걸세. 자네 매일 밤새워 가며 수술하는데 먼 길에 힘들까 봐. 운화에서 가려면 세 시간은 날아가야 하잖아.”

능연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세 시간이라도 괜찮습니다. 모레라면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

“우리 진료과에 남은 병실을 그때쯤이면 채울 테니까요.”

곽종군은 다른 설명 없이도 바로 능연의 말뜻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데시벨을 떨어뜨렸다.

“참참, 그 생각을 못 했군. 병상이 없군.”

“아끼면서 썼습니다.”

능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무신 시 병원도 여유롭지 않더라고요.”

곽종군은 다시 멍해졌다가 머리를 툭툭 쳤다.

“그래, 그래. 맞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럼 가서 하는 거로.”

곽종군은 무홍랑을 바라봤고, 무홍랑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맞는지, 알기도 귀찮았다.

부대항(港).

아름다운 항만에서 수많은 갈매기가 관광객의 음식을 강탈하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석제 건물에 가득한 이끼와 덩굴이 오래된 역사를 드러냈다.

부대항 제일 병원은 바로 이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자락에 있었다. 항만을 내려다보는 조금 가파른 위치라 건물 높이엔 제한이 있지만, 풍경만은 내로라할 만했다.

무홍랑은 우선 차를 관망대까지 끌고 간 다음 차에서 내려 견갑을 살살 풀어준 후에, 차에서 내린 능연 일행을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 부대항엔 6대 경관이 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이죠. 망해 언덕이라고 합니다.”

“언덕이요? 언덕 같아 보이진 않네요.”

폴짝폴짝 관망대 앞쪽으로 달려간 여원이 기둥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홍랑은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부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6대 경관이죠. 역사죠, 역사. 나중에 포대(砲臺)로 선정되는 바람에 평평해져서 그래요. 더 나중엔 포대가 사라지고 지금은 공원이 되었죠. 전에는 시도 있었어요······. 능 선생, 어때요?”

오늘의 주요 요리, 아니 귀빈은 물론 능연이니까. 게다가 무홍랑은 능연이 데리고 온 부하 의사까지 신경 쓸 군번도 아니고.

사실 유일한 문제는 인원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네 명이나 오다니. 운화병원이 매우 바쁜 병원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지, 여행 겸해서 인원을 늘린 거라고 오해할 뻔했다. 그러나 능연의 모습은 명백히 관광 같은 건 관심 없어 보였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시간이 너무 일러서 그래요. 점심쯤 되면 많아질 겁니다. 너무 이른 비행기로 왔어요. 조금만 더 빨랐으면 야간 비행 시간대가 될 뻔했으니.”

능연의 말에 무홍랑은 이때다 싶어서 투덜거렸다. 능연은 뜻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어쩐지 능 선생은 사람 많은 곳을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무홍랑은 억울하다는 듯 한마디 보탰다.

부대항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 도시고 망해 언덕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아도 제일 병원과 가까워서 병원에서 초대하는 타지 손님에게 공개하는 관광 포인트였다. 능연이 별로 감흥 없는 듯하자, 무홍랑은 조금 실망스러워졌다.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긴 해요.”

“그러면서 뭘 사람 적다고 타박합니까.”

능연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무홍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명백한 논리적 충돌이라니. 더 타박하고 싶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능연은 좀 부담스러운 타입이기도 하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실력은 또 이렇고 좋고, 또 부탁하는 처지고······.

“산 위에 있는 공원이라 특이하네요.”

“어디가 특이하다는 건지?”

능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는 말에 무홍랑이 입을 삐죽였다.

“외진 곳에서 사람도 별로 없으면 고백하는 무리를 마주치기 쉬워서요.”

능연은 수술보다 더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무홍랑은 멍해졌다.

“고백하는······ 무리?”

무홍랑은 ‘고백’과 ‘무리’ 중 어느 곳에 힘을 주어야 할지 몰랐다.

“어떤 행동을 더 빈번하게 촉진하는 환경이 있거든요. 음, 이만 돌아가죠.”

무홍랑은 능연의 목소리에서 걱정스러운 기운을 분명히 읽어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어쩌면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는 내내 능연이 자연스럽게 받은 무료 업그레이드, 열정적인 기내 서비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한 행인의 도움과 부러움을 떠올린 무홍랑은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실패한 기분이 더 강해졌다.

“경치는 매우 좋네요.”

세 시간 동안 이코노미석에서 시달린 늙은 허리를 편 좌자전이 무홍랑을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능 선생은 주 관심사가 수술, 환자, 그리고 의료 환경이고 다른 건 그냥 괜찮으면 OK입니다. 먹고 자고 하는 건 깨끗하기만 하면 까다롭지 않으니 그렇게 걱정할 것 없고요.”

한숨을 한 번 내쉰 무홍랑은 나이가 ‘비슷한’ 좌자전을 바라보며 마음을 조금 달랜 다음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로하듯 대답했다.

“특이한 사람은 원래 특이한 법이죠. 하지만 음식에 까다롭지 않다니, 우리 부대항 맛집이 아깝네요.”

“까다롭지 않다는 건, 혹시 그쪽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가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음식이나 숙소 정도는 우리도 공급할 수 있습니다.”

무홍랑은 놀랐다가 곧 조금 언짢아져서 대답했다.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환자 쪽에 더 집중하시길 바란 겁니다.”

좌자전이 말투를 부드럽게 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엔 능 선생이 출장 수술 나온 게 아니라서 조금 복잡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출장 수술이면 보통 1, 2만 전후에 왕복 비즈니스석 5성급 호텔 포함이거든요.”

잠시 그 말을 곱씹은 무홍랑은 곧 상대가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마디 되돌려주려던 무홍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곧 좌자전의 말에 숨은 뜻은, 정말로 출장 수술이었다면 그들이 더 나은 조건을 제공했어야 한다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무홍랑은 조금 껄끄러워졌다. 그제야 자기가 능연이 젊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했음을 깨달았다. 1, 2만 수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의사를 친분으로 수술에 부른 이상 적어도 비즈니스석은 제공했어야 했다.

“괜찮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환자와 보호자도 출장 수술할 생각은 없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수술부터 잘하고 볼 일입니다.”

좌자전도 무홍랑을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출장 수술 비용은 원래 보호자가 내는 것이다. 작은 지방, 특히 의료 보험을 써야 하는 환자에게는 출장 수술이 수지에 맞고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대항 자체가 환경이 괜찮은 도시고, 제일 병원 역시 구급 병원에선 손꼽히는 병원이었다. 환자와 병원 모두 출장 수술을 요청할 생각이 없는데 출장 수술비 운운해 봐야 입맛만 쓸 뿐이었다.

그 돈을 무홍랑 사비로 내라고 할 수도 없고, 설사 낸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능연 대신 앞으로 할 수술을 위해 포석을 깐 것뿐이었다.

능팀이 익숙한 쪽으로 생각하면, 이 수술이 끝난 후 다음 수술을 이어서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해한 부분, 오해한 부분도 있는 무홍랑은 머쓱하게 웃었다.

“가서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상대가 다시 거론하자, 좌자전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희 비용은 따로 계산합니다. 또 하나, 능 선생은 요즘 출장 수술 가면 기본이 수술 다섯 건입니다. 10건도 흔하고요.”

“그렇게나 많이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문이 막힐 이야기였다. 그러나 곧 무홍랑의 머릿속에 능연의 수술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런 의사가 신임받게 되면 수술은 얼마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진작 이야기했다면 수술 몇 건 더 준비했을 텐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나중에 다시.”

좌자전은 싱긋 웃었다. 능연이 첫 수술을 끝내면 당연히 수술은 따라올 테니까. 근래 다른 도시를 오가며 출장 수술할 때마다 언제나 발생하는 규칙이었다.

부대항 제일 병원 입원 병동은 3, 40년 전에 쓰던 오래된 건물이었다. 몇 번 리모델링하긴 했지만, 여전히 으스스한 느낌이 났다.

여원은 매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고, 특히 모퉁이를 돌 땐 특별히 더 조심했다. 아까 몇 번 모퉁이를 돌면서 사람들을 몇 번 마주쳤는데, 의사나 환자는 몰라도 사무실에서 달려 나온 나이 든 부인이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 그리고 건장한 발의 콜라보로 하마터면 여원을 깔아뭉갤 뻔했다.

여원의 얼굴이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물론 본과 졸업 후엔 적당한 일을 찾지 못했지만, ‘하지만’(하지만에 집중할 것) 그렇게 된 건 툭하면 밟혀 죽을 수 있는 사고가 일어날 만한, 지금 눈앞에 있는 병원처럼 오래된 병원에 들어오고 싶지 않은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여 선생님, 드디어 만났네요.”

드디어 여원을 만난 간호사는 달려오느라 숨찬 가슴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능 선생님이 선생님 찾아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시길래 어찌나 애가 타던지.”

“나도 드디어 사람을 만났네요.”

여원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뭐 좀 쓰려고 밝은 곳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길을 잃었지 뭐예요.”

“구건물은 원래 좀 구불구불하죠. 그래도 지하로 안 가셔서 다행이네요. 거긴 전에 쓰던 해부 교실이 아직 있거든요. 처음에 갔을 땐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어요.”

간호사는 숨을 헐떡이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도시 전설은 나한텐 안 통해요.”

“도시 전설 아니에요.”

간호사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목걸이를 바라보고는 뒤로 물러나며 여원을 바라봤다.

“예전 해부 교실은 안 쓸 때 창문을 열어 놓거든요. 바람 불면 벽에 걸려 있는 뼈가 서로 부딪쳐요.”

“헐, 그게 뭐예요.”

여원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 간호사는 그리운 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예전엔 의사랑 간호사가 썸 타는 사람이 있을 때 지하실에 하루만 갔다 오면 아예 헤어지거나 사귀거나 했대요. 편하겠죠?”

여원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부대항 사람들 방식 참 특이하다는 것 말고 할 말도 없었다.

“참, 능 선생님 기다리고 계셔요. 어서 가요. 벌써 30분 되어 가네. 능 선생님 일엔 지장 없는지 모르겠네요.”

간호사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능연을 볼 시간이 줄어들어 언짢아졌다는, 익숙한 원망의 목소리였다. 여원은 이런 어린 간호사에겐 언제나 너그러운 편이라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 가도 돼요.”

“네? 왜요?”

“수술 기록하라고 불렀을 거예요. 아까 메시지도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흘렀으니 수술도 거의 끝나갈 거고, 지금 가 봐야 소용없어요.”

“간암 수술인데 30분에 끝난다고요?”

“중요한 부분은 다 끝냈을 거예요. 지금 돌아가 봐야, 공짜로 일해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원이 입을 삐죽였다. 그녀도 추구하는 게 있었다. 간 인대 분리 같은 작업이라면 해도 상관없지만, 폐복 같은 잡다한 작업만 남았다면 관심 없었다.

외과 기술은 하급 기술을 반복한다고 느는 게 아니니까.

간호사는 당연히 여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우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여원을 바라봤다.

“그럼 여 선생님이 여기에 온 의미가 없는 게 아니에요?”

능연 일행이 돈도 받지 않고 출장 수술 온 사실은 부대항 의료진에겐 비밀이 아니었다. 다만 능연이 데리고 온 인원이 너무 많은 게 유일한 의문이었다.

여원 같은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순조롭게 수술을 끝마칠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얼굴이 좀 못생긴 의사였다면, 병원에선 아마 ‘공을 세우는 데 연연’, ‘겉치레 좋아하는’ 등등으로 능연을 표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원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보면 알아요.”

간호사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빨리 수술실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수업하면서 어서 끝나고 피시방 가고 싶은 학생처럼 말이다. 아니면 몰래 핸드폰을 할 장소라도 상관없었다.

구불구불한 복도가 겹겹이 이어졌다. 여원은 간호사를 따라 묵묵히 수술 구역으로 돌아와 옷 갈아입고 뭐하면서 또 20분을 보냈다. 여원은 다급할 것도 없이 느릿느릿 수술실로 향했고, 결국 문밖에서 가로막혔다.

“인원 다 찼어요. 더 들어가면 기준 초과로 혼나요.”

간호사 두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복도에서 초짜 의사들을 막고 있었다. 여원을 찾으러 나왔던 간호사는 아연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이 녀석들, 대체 어디서 다들 튀어나온 거야.”

“정상입니다.”

여원은 생긋 웃었다. 출장 수술 개척하러 온 것도 아니고, 비슷한 상황이 창서성의 여러 병원에서 벌어졌으니까.

의사라는 생물은 고급 수술 하나 직접 보는 게 영상, 논문 열 개 보고 읽어서 얻는 것보다 훨씬 크게 영향받는다.

오늘 능연의 수술 기술은 또 한 번 인정받은 것이 분명했다. 거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무혈 수술을 본 부대항 제일 병원 의사들은 고고하기로 유명한 의사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SNS에 올리고 단톡방에 영상을 공유했다.

여원은 까치발을 들지 않고도 다들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은 찍어도 되는데 내용은 자기가 책임집시다.”

여원은 한마디하고는 굳이 사람들을 밀고 수술실로 들어갈 생각 없이, 자기를 데리고 온 간호사를 바라봤다.

“수술 생중계 볼 수 있는 곳 있을까요?”

“네, 있어요.”

간호사는 붐비는 수술실을 실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바라보며 삼보일배가 아닌 일보삼회(回) 하며 고개를 돌리면서 여원을 휴게실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구린 발 냄새가 났다. 여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발 안 씻는 외과 의사는 전에 흔하게 봤는데 능연 밑에 있게 된 후로 지극히 드문 케이스가 되었다.

“여기예요.”

간호사는 여원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 들으라고 말을 꺼냈다.

“능연 치료팀 여원입니다. 안에 못 들어가서요.”

여원은 침착하게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앞에 달린 모니터 화면에 간 인대가 보였다. 현수교처럼 새하얀 것이 딱 봐도 능연이 자주 하는 수법이었다.

여원은 묘하게 편안하다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능 선생 밑에 있는 의사라고요?”

앞에 앉은 의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 네.”

“수술 하나 연결해 줄 수 있어요? 내 말은 능 선생이요. 간 내 담관 결석 앓는 친척이 있어서요. 괜찮으면 오신 김에 부탁드리려고요.”

앞에 앉은 의사는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무 주임님한테 이야기하시는 게 좋겠어요. 우린 아무래도 무 주임님 부탁받고 온 사람이라, 바로 받아들이기가 그래요. 게다가 이 병원에서 할지 등등 상의할 것도 있고. 능 선생은 예후를 매우 중시하거든요. 예후 문제가 잘 처리되지 않으면 간 절제 같은 수술은 잘 안 하려고 해요.”

여원은 거의 고민도 하지 않고 술술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 속도에 부대항 의사들은 의아해졌다. 여원의 말의 요점은 기본적으로 환자를 받겠다는 뜻이었다.

“능 선생하고 상의할 필요 없어요?”

앞에 앉은 의사도 그렇게 물었다. 출장 수술은 자신의 병원에서 진행하는 수술보다 실수를 용납하는 폭이 좁아서 보통은 집도의가 결정한다. 타지 병원에서 자기가 별로 익숙하지 않은 기기, 설비를 사용하며 수술하다가 실패랄 것도 없고 조금만 깔끔하지 않아도 이름값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보통 그렇게 해서요.”

여원이 담담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다들 잠시 조용해졌다가 곱씹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자주 있어요?”

앞줄 의사가 궁금한 듯 물었다.

“비슷해요. 새 병원 개척하는 건 다 이렇죠, 뭐.”

여원이 토토로처럼 귀엽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게 뭔데요?”

“어디든 환자는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아까 그쪽이 말씀하신 간 내 담관 결석 환자, 혹은 슬관절 반월판 손상 등등, 수술할지 말지 바로 결정하리란 법 없는 환자들 말이에요. 뭐, 의사의 실력에 예민한 환자들? 그런 환자들은 실력이 매우 뛰어난 의사를 만나면 오히려 보통 환자들보다 더 빨리 수술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환자들이 바로 당신들 팀하고 접촉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앞줄 의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여원도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 점점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런 환자들을 다 다른 의사들이 알아서 데리고 온다는 거군요.”

“의사, 간호사, 다른 의료진도요. 아무래도 이런 일 하는 우리가 환자를 가장 많이 만나잖아요.”

누군가 묻는 말에 여원이 대답했다.

“하긴 그렇지.”

“자기 친척, 친구가 무슨 병에 걸리면 아무래도 우리 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알게 되지.”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웃음을 터트렸다.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는 듯이.

여원은 느긋하게 혀를 끌끌 차며 모니터를 보라고 시늉했다.

“능 선생 같은 기술은 정말 타이밍 못 맞추면 끝이니까요. 다음에 부대항에 언제 올지도 모르고.”

모니터 안 능연은 이미 간 절제를 끝내고 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간 절제 수술을 잘 아는 의사는 접어두고, 모르는 의료진들도 능연의 손과 그 노련한 동작에 다 혀를 내둘렀다. 수술을 망치는 의사는 갖가지 방법으로 망치지만, 수술을 잘하는 의사는 딱 보면 안다.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 주임 무홍랑을 어시로 부린 능연은 손쉽게 간 절제 한 건을 끝냈다. 게다가 청소년 초기 간암이라 능연은 얇은 절개법을 써서 환자의 간을 대부분 남겨 주었다. 그렇게 예후 수준도 한 단계 넘게 올렸고.

능연과 한 시간 좀 넘게 수술한 무홍랑은 수술실을 나갈 때 승화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간담췌 외과는 부대항 제일 인민 병원에서 큰 진료과지만, 기술 수준으로 따지면 무홍랑 본인이 간 쪽에 그렇게 공을 들이지 않고 재능도 그냥 보통인 상황이었다.

물론 그건 전국에서 손꼽히는 마스터급 수준과 비교해서 평가한 것이다. 어찌 됐든, 무홍랑과 능연의 기술 차이는 두드러졌다. 능연과 함께 수술을 마친 무홍랑은 더욱 그걸 깨달았고.

“대체 어떻게 연습하면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무홍랑은 장갑을 벗고는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제 2년만 조용히 버티면 은퇴할 것이고, 그게 최고니까.

곁에 있던 간호사도 냉큼 무홍랑의 말에 말을 보탰다.

“무 주임님, 정말 알고 싶으면 능 선생님 오신 김에 강의 좀 해달라고 하세요.”

“수업‘만’ 하면 되는 거 맞아요?”

“주임님······.”

무홍랑이 인자한 얼굴로 슬쩍 드립을 하려 하자, 간호사가 돈 안 드는 콧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능연에게 돌렸다.

“능 선생님, 강의하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요.”

“그럼 다른 거 ‘하고’ 싶은 건 없으세요?”

다년간 외과 의사의 드립을 들어온 간호사도 드립력이 만만치 않았다. 마연린은 눈썹을 까딱이며 이런 간호사가 운화병원에 있었다면 기껏해야 퇴근 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능 선생은 수술할 때 이야기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수술 끝났잖아요.”

마연린이 냉큼 끼어들어 하는 말에 간호사도 양보 없이 치고 들어왔다.

“그죠, 수술은 끝났죠. 무 주임님, 다른 수술 없으면 우린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리 수술 준비했어야 했는데.”

마연린이 하는 말에 무홍랑은 후회하는 얼굴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늦었지, 뭐. 다음에 다시 연락합시다. 응, 자주 하자고.”

“예, 수술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마연린이 웃어 보였다. 이런 유사 출장 수술을 처음 할 때 한 건 혹은 두 건 하며 포문을 트기도 한다.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정식으로 출장 수술을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정상이었다.

“무 주임님, 그럼 나중에 전화 주세요.”

마연린은 긴말 없이 능연과 함께 환자 상태를 다시 한 번 체크하고 수술실에서 나갔다. 무홍랑은 문이 닫힌 후에야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능연의 아우라가 너무 강했다. 특히 능연의 수술을 모두 지켜보고 나니 무홍랑도 긴박감이 상승했다.

“환자는 회복실로 보내고, 자네가 지켜. 문제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무홍랑은 마취의에게 오더 내렸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취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회복실에서 환자 지키면서 핸드폰 만지작거리는 것도 사실 나쁘지 않았다. 무홍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능연 일행이 나갔을 시간에 맞춰 느긋하게 수술실에서 나갔다.

“무 주임님!”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의사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

무 주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렇게 수술실 앞까지 쫓아와서 하는 이야기는 보통 복잡한 내용일 텐데.

쭈그리고 앉아서 그를 기다리던 의사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 주임님, 운화에서 온 능 선생 수술, 저도 줄 서겠습니다.”

“무슨 줄?”

“날짜 받으려고요. 아시다시피 제 둘째 숙모 시동생이 간암이거든요. 원래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려고 했는데 제가 능 선생 추천했어요.”

“잠시만, 자네가 능연을 추천했다고? 왜?”

무홍랑은 아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자기 병원 의사도 아닌 능연을 왜 추천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능 선생은 전국에서 손꼽힐 기술이잖아요. 마침 우리 부대항에 왔는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안 그렇습니까?”

“떡 본 김에 제사라니 그게 무슨······.”

멍해 있던 무홍랑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봤었던, 또 자기 밑에 있었었던 다른 의사들의 간 절제 수술을 떠올려 보고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두드렸다.

“그렇지, 그렇지. 전국에서 손꼽힐 수준이지. 적어도 5등 안엔 반드시 들어. 3등까지는······.”

무홍랑은 더는 말하지 않고 더 엄숙해진 얼굴로 계속했다.

“뭐, 귀한 기회인 건 됐고. 이렇게 급할 것 있나?”

“안 급하게 생겼어요? 전국에서 손꼽힐 의사라고요. 수술 일정이 얼마나 빡빡하겠어요. 그런 의사가 우리 부대항에 왔다고요. 그러니까 주인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둘째 숙모는 집도 잘 살아서 출장 수술비니, 뭐니, 달라는 대로 다 줄 겁니다.”

“이 자식이.”

무홍랑은 눈앞의 주치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물어봐 줄게.”

무홍랑은 적합한 환자가 있으면 능연 수술 한 번 더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 주임님!”

탈의실에 막 도착해서 수술복을 벗어 던진 무홍랑은 누가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떤 눈치 없는 자식이 윗분 옷 갈아입는 걸 훔쳐보냐며 꿍얼거렸다.

벗어던진 손을 배꼽까지 끌어 올리고 고개를 돌린 무홍랑은 어리둥절했다.

“곽 주임님, 시찰 오셨습니까? 아이고, 내 꼴 좀 보라지. 잠시만요, 속옷 좀 갈아입고요.”

곽 주임은 의료설비과 주임이었다. 병원에서 특수한 진료과로, 막대한 자금과 권력이 연관된 곳이라 보통 원장의 직계나, 원장의 오른팔, 혹은 원장의 보배 덩어리······ 가 맡는 직책이었다.

어찌 됐든 함부로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없는 진료과 주임이었다. 게다가 의료설비과는 임상 진료과보다 훨씬 중책을 맡곤 했다.

“아이고, 제가 너무 급하게 왔군요.”

곽 주임은 매우 예의 바르게 굴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재빨리 돌아서서 무홍랑에게 옷 갈아입을 시간을 주었다.

“포경 참 잘 됐구만요. 누가 한 겁니까?”

무홍랑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의대 다닐 때 지도 교수가 실험용으로 했습니다.”

“아이고, 그럼 운이 좋았군요. 5년 정도는 우선권을 받으셨겠어요?”

무홍랑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범하게 바지를 갈아입고 돌아서서 웃어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거시기 칭찬도 받았으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물었다. 곽 주임은 더 예의를 갖추며 호탕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번에 운화병원에서 데리고 온 능연이라는 의사가 대단하다면서요.”

“젊고 기술도 좋고, 대단하다고 할 수 있죠.”

곽 주임이 왜 묻는 건지 모르니 일단 상대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무 주임님이 데리고 온 사람이니 직접 묻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지난번에 왔던 왕경총 교수랑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왕경총 교수는 북경에서 유명한 일반외과 교수로, 부대항 제일 병원에서 자주 초청하는 출장 교수였다. 혹은 부대항 제일 병원에서 초청해 올 수 있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서전이자 무홍랑의 연줄이라고 해야 할지도.

어느 병원이든, 뫄뫄 출장 의사를 초청해 올 수 있는지, 자주 할 수 있는지 등등은 단순히 기술 쪽만 고려하는 건 아니었다. 출장 의사의 실력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성격, 품격 등등도 매우 중요했다. 시간과 개인 의지 등은 더욱 중요하고.

동문의 정이 있어서 자주 왕경총 교수를 불렀던 무홍랑은 곽 주임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 잠시 생각하다가 상대적으로 까놓고 대답했다.

“이 능 선생은 아무래도 젊으니 학술 쪽 운운은 접어두고, 단순히 임상 수술 면에서 간 절제 수술은 확실히 잘합니다.”

밑밥을 깔긴 했지만, 결국 능연이 낫다는 소리였다. 실력엔 거짓이 없고, 특히 능연이 하는 간 절제를 직접 본 후로는 왕경총은 저 뒤로 밀려났다. 특히 분명 수술 실력을 묻는 듯한 곽 주임의 의도를 파악했으니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수술이 어떤지 묻는다는 건 분명 수술받을 생각이라는 뜻이니까.

역시나 곽 주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부탁 좀 합시다. 능 선생한테 수술받을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떤 환자인데요?”

무홍랑이 그럼 그렇지 싶어 묻자, 곽 주임이 짐짓 쓴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제 처가 고향 쪽에 오지랖이 넓어서요. 전에 고향 어르신 한 분이 우리 병원에 진료받으러 왔잖습니까. 젊을 때 하도 못 먹고 살아서, 나이가 들고 보니 간 내 담관 결석이 심각해졌습니다. 전에 무 주임한테 진료받긴 했는데, 수술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라서 최대한 미루다 보니······.”

무홍랑은 담담했다. 모든 환자를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곽 주임이 소개한 환자라면 분명 기억이 날 텐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따질 생각은 없었다. 상대에겐 상대의 사정이 있고, 자신의 수준은 부대항에서 최고는 아니니, 내부인인 곽 주임이 자신을 찾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그냥 조금 마음이 상할 뿐이지만.

“그래서 그 어르신 수술을 능연한테 받고 싶다는 거지요?”

“음. 출장 수술 어떻게 한답니까?”

곽 주임은 그렇게 묻고는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대신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 병원에서 그 돈 내는 건 안 될 일이니까요.”

무홍랑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이번엔 출장 수술로 온 게 아니라서요.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무홍랑이 깔끔하게 처리해줄 것으로 믿는 곽 주임도 긴말하지 않았다.

곽 주임을 배웅한 후 다시 옷을 정리한 무홍랑은 생각에 잠겼다. 아까 주치의까지, 지금 능연 대신 수술을 두 건이나 받았다. 능연이 싫다고 해도 능연 탓은 아니지만, 무홍랑 본인은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긴다.

갑자기 수술 두 건이 늘어난 걸 능연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간호사가 간호사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무 주임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수간호사는 생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위아래로 무홍랑의 상태를 살폈다.

“능 선생 수술?”

“어머, 엿들으셨어요?”

무홍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 말에 수간호사는 옆에 선 간호사를 쿡쿡 찔렀다.

“무 주임님, 저희 삼촌이 안 그래도 수술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능 선생님이 오셨으니 능 선생님께 수술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한 번 물어보지.”

무홍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착잡했다. 간 절제 방면으로 자기가 그다지 명망이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다들 능연, 능연 하니 조금 껄끄러웠다. 물론 그런 껄끄러움은 분명 본인만 느끼는 것이겠지만.

수간호사는 무홍랑이 너무 빨리 대답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무 주임님, 제대로 물어봐 주셔야 해요. 우리 유 간호사 삼촌도 전에 우리 일하셨거든요. 오래전에 은퇴하셨는데 요즘 중병도 생겨서 쉽지 않아요.”

“알겠어요. 능 선생더러 남아 달라고 하면 됩니다.”

수술 세 건 정도면 능연에게 남아서 출장 수술을 해달라고 해도 되겠지.

“팀 전체가 남아 있으면 제일 좋고요.”

수간호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 집도의 하나보다 팀이 남는 게 당연히 수술 결과가 좋으니까. 무홍랑 역시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참 공교롭네. 마침 능 선생님이 팀 인원을 많이 데리고 왔잖아요. 퍼스트, 세컨, 서드 다 있는 셈이니까.”

“마침이 아닐 겁니다.”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출장 수술하는 거죠.”

무홍랑은 이래도 능 팀이 어떻게 출장 수술을 개척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감탄만 나왔다.

“실력으로 개척하는 의사는 적잖게 봐왔지만, 이런 식은 또 처음이네.”

“초음파 메스.”

“주의해서 석션 해요.”

부대항 제일 병원 수술실 복도에 능연의 목소리가 난해한 아리아처럼 오래된 벽돌 사이를 맴돌았다.

무홍랑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 모퉁이에서 저 모퉁이를 오갔다. 모퉁이마다 적어도 한 명의 간호사 혹은 초짜 의사 혹은 환자 혹은 보호자가 벽에 기댄 채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하는 것 같아도 사실 액정이 시커멀 가능성이 컸다.

“수술실 방음 설비, 정말 좀 해야겠네.”

무홍랑은 강렬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수술실 안으로 들어와 한숨을 내쉬었다. 블로킹 당한 선수가 아무도 자기를 주시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며 치어리더 앞을 지나갈 때처럼.

수술실을 지키던 수간호사거 대충 ‘응응’대며 호응하자, 무홍랑이 눈을 흘겼다.

“대충 호응하는 거라도 좀 진지하게 할 순 없고?”

“신첩은 예술은 팔아도 몸은 팔지 않사옵니다.”

수간호사의 대답에 수술실에 있던 어린 간호사들이 n번째 존경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말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라 저런 말을 한다는 게 어려우니까. 특히 일터에서 저런 말을 하는 여인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무홍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어린 간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 몸을 사겠다는 말 같은 걸 해서 상대가 수줍어하며 난처해하는 표정을 봤겠지만, 상대가 수간호사다 보니 정말로 승낙할까 봐도 두려웠고, 거절하며 수줍은 표정을 지을까 봐도 두려웠다.

“수술은 순조롭고요?”

무홍랑이 화제를 돌리자, 불구경하려던 간호사와 의사들이 실망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수간호사는 뿌듯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수술이야 당연히 순조롭죠. 능 선생 수술에 트집 잡을 게 뭐가 있겠어요.”

“수술과도 덩달아 고생한 덕분이죠. 다들 고생 많아요.”

무홍랑은 주임의 유세를 부리며 기분도 좋아졌다.

“주임님이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이죠.”

수간호사가 살며시 웃으며 하는 말에 무홍랑은 조금 놀랐다. 다들 고생 많다고 하면 수간호사가 그 김에 힘들다고 호소하며 보너스, 야근비 어쩌고 꺼내는 게 당연한 플로였다. 그런데 하필 수간호사가 규칙대로 패를 내지 않다니.

무홍랑은 수간호사의 이상한 태도에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능연은 벌써 수술을 8건 했다. 밤낮없이 일하면서 ‘당신보다 재능 있는 의사가 당신보다 더 노력 중’이라고 증명하는 것 외에도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 외과 전체에 활력을 불러온 것 같았다.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진료과에서는 큰 수술에 도전 의식을 갖곤 한다. 진료과의 고급 의사들은 더 어려운 수술을 시도하고 더 큰 도전성이 있는 큰 수술을 만들어 낸다. 도전성이 있는 수술엔 대부분 수술 인원을 평소보다 초과해서 배치하기도 하고.

부대항 제일 병원만 해도, 능연의 수술 8건 때문에 적어도 수술과 간호사 둘, 거기에 간담췌 간호사 둘은 추가했을 것이다. 평소 수술량을 생각하면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홍랑이 이렇게 했다면, 아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면, 자기 과 수간호사든 수술과 수간호사든 절대로 호락호락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무홍랑은 능연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자기 얼굴을 문지르면서 얼굴을 구겼다.

“요즘 사람들이란, 참.”

“참 뭐요?”

수간호사는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 나오면 그대로 뽀뽀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무홍랑을 힐끔 봤다. 무홍랑은 부르르 떨었다.

“내 말은 공짜로 일해주면 안 된다는 거죠. 아무리 상대가 잘생겨도. 그렇죠?”

“누가 공짜로 일을 해요. 우리 병원은 수술량으로 인센티브 나오잖아요. 그래서 다들 신난 거고. 왜요? 다들 능 선생 얼굴이 잘생겼다고 좋아하는 거 같아요?”

간호사가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무홍랑은 멍해졌다가 드디어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자기 진료과 간호사든 수술과 간호사든 당월 수술량, 특히 큰 수술량이 이번 능 팀의 수술로 대폭 오른 것이다. 이 일로 다른 진료과와 거리가 벌어진다면, 실적이 아무래도 훌쩍 오를 것이고, 거기에 수술 자체 인센티브가 있으니 정말로 꽤 큰 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출장 수술을 좋아하는 것이다. 출장 수술비는 별도로 나가는 데다가 수술 자체는 보통 순조롭게 끝나니 병원 실적 면으로 봐도 구단에서 용병을 구하는 것처럼 단기간에 효과가 두드러지는 좋은 수단이었다.

주임 생활을 오래 해온 무홍랑은 이번 수술에 참여한 진료과 직원들의 수입이 얼마나 늘지, 특히 간호사들의 상금이 얼마나 늘지 묵묵히 계산해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무 주임님, 능 선생님처럼 이렇게 젊고 유능한 선생님 있으면 자주 모셔 오세요.”

수간호사가 농담 반 진담 반인 듯이 하는 말에 껄끄럽던 감정이 완화되던 무홍랑은 또 새로운 껄끄러움이 생겼다.

“출장 수술이 매번 있는 것도 아니고.”

무홍랑이 꿍얼거렸다. 그는 그제야 왜 능연 치료팀이 자주 출장 수술을 가는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안정적으로 능연을 출장 수술로 불러오려면 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도.

수간호사도 그런 걸 모를 리 없어서 수술대 쪽을 힐끔 보고는 콧소리를 냈다.

“계속 능 선생님을 모셔 오라는 말은 아니에요. 가끔 불러서 사기 진작하고 좋잖아요. 월말마다면 좋겠네요. 특히 3, 6, 9 그리고 12월에 능 선생님 모시고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참, 얼마 전에 수간호사 밑 간호사 친척이 능 선생한테 수술받지 않았어요? 결과 어때요?”

무홍랑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매우 성공적이었죠.”

수간호사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칭찬하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탁 주임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탁문호? 탁문호가 왜?”

무홍랑은 일반 2 외과 주임의 이름은 원래 그냥 불렀다. 특히 사형 사제들끼리 난리를 부리고 2 외과, 3 외과, 간담췌 외과로 분리된 후엔 겉으로 보이는 화합도 사라졌다.

“간담췌에서만 출장 수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이 새끼가.”

“무 주임님, 탁 주임님을 없앨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무홍랑은 수간호사의 유혹을 점점 거절할 수가 없었다.

“탁 주임님보다 먼저 주변 환자를 모으는 거죠. 아시잖아요. 단기간에 구할 수 있는 환자 수량은 정해져 있다고요. 다른 조건은 다 비슷하니까, 환자가 있는 사람이 마지막에 웃는다니까요.”

“그놈도 환자 구하면 그만 아닌가?”

“그러니까 주변 사람부터 손 써야죠.”

“주변 사람?”

“제 밑에 간호사가 그 간호사 하나겠어요? 그리고 그 간호사도 삼촌이 하나만 있진 않을 거 아니에요.”

수간호사가 자연스럽게 하는 말에 무홍랑이 하하 웃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그는 굳이 말로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탁 주임이라······. 그래, 주변 사람부터 하라면 주변 사람부터 하지, 뭐. 다른 제안은?”

“저한테 명단이 있어요.”

수간호사가 조용히 노트를 건넸다.

“수간호사님, 이 환자 23번 베드에 배정해 줘요.”

부주임 왕병복이 사무실로 쪼르르 들어와 리스트를 수간호사에게 건네자, 수간호사가 능숙하게 받아들었다.

“또 어디서 구해 온 거예요.”

“대단한 환자라고. 군인이야. 이건 잘하면 우르르 온다니까요.”

의사가 직접 간호사를 찾아와 침상을 배정받는 건 십중팔구 환자 쟁탈 모드다. 비교적 열세인 병원 혹은 진료과 경쟁이 치열한 병원 의사에겐 흔한 일이지만,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에서는 한동안 없던 문제였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제일 병원은 보통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서 침상을 구했다.

능 팀이 창출해낸 이익이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 의사들의 생존 환경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왕병복 같은 부주임은 자기가 이끄는 치료팀이 전체 병원의 실적상, 또 진료과 내 실적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면 능연의 도움 없이는 아예 불가능했다.

간담췌 외과가 작은 리그전이라면 능연은 정상급 리그전에서 빌려온 용병이나 마찬가지로, 능연을 얻는 팀이 결정적 우세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건 무홍랑이 머리 깨져라 하룻밤 고민한 후에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며 내놓은 음모였다. 효과도 역시 두드러졌고, 수간호사의 노트 외에도 진료과 의사들이 알아서 환자를 데리고 오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의도하든 아니든 자원은 쌓이기 마련이지만, 의사의 추천만으로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환자를 모으는 건 불가능했다. 능연의 명성이 불가피하게 거대한 작용을 불러온 것이다.

왕병복이 구해온 환자도 그랬다. 이 군인인 노인 환자는 원래 그의 환자가 아니었고, 심지어 보호자도 건너 건너 연줄을 통해 능연에게 수술받고 싶다고 온 것이었다.

간 내 담관 결석 같은 병은 원래 서서히 발전하는 질병이고, 진료받고 수술하러 온 환자들은 보통 여러 번 망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이런 쪽으로 뛰어난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가 더 잘 알기 마련이다.

왕병복 역시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무홍랑 아래서 일하면서, 좋지도 나쁘지도,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천재도 바보도 아닌 상태로 매일매일 해나가며 착착 부주임이 되었지만, 슬슬 천장에 닿은 시기였다.

대부분 의사는 부주임에서 끝나는 걸 가장 못 견디기 마련이다. 보통 의사는 조금 더 노력해서 더 올라가 보려고 시도해 보곤 한다. 신입 회사원들이 화이트칼라에서 벗어나 골드칼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몇 달 시간을 들여 영어나 일어를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홍랑의 규칙에 따라, 수술을 구해오는 사람은 능연과 수술을 했고 그래서 왕병복도 배우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 중이었다.

단숨에 간 절제 환자를 다섯이나 구해온 왕병복이 진료과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내고 있었다.

간호사는 빤히 보였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왕병복의 환자에게 침상을 배정해 주었다.

“수술 시간 확실히 하세요. 그래야 간호사 배정하니까.”

“간 절제하면 ICU로 보내야 하니까 시간은 많아요.”

“ICU에 이틀만 있으면 되는 환자를 오늘 받았거든요.”

수간호가 담담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은근히 왕병복에게 코치했다. 원래 미소 짓고 있던 왕병복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신문 타이틀에서나 보던 소식이 아니라 실제로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실감했다.

“능 선생이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해?”

“왜 능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왕병복이 중얼거리는 말에 수간호사가 놀리듯 물었다.

“아이고, 뭐 그런 말씀을. 무 주임님은 간 절제가 메인이 아니잖아요.”

간호사가 그저 피식 웃었다.

“이게 바로 항간에 전해지는 ‘능 선생의 최강 예후’라는 거겠죠.”

왕병복이 동의를 구하는 듯 감탄했다.

“48시간 ICU, 72시간 특수 병동, 거기에 72시간 일반 병실이면 퇴원. 환자를 계속 찾아오면 능 선생이 처음 수술한 환자가 퇴원할 때까지 끌 수 있겠어요.”

간호사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없어, 이제 없어.”

왕병복이 짐짓 고개를 저어 보였다.

“수술 시간은요?”

“내일로 하지, 뭐.”

“능 선생 내일 벌써 6건 있어요. 추가하려면 능 선생 사인 받아와야 해요.”

“그럼 모레.”

간호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왕병복이 냉큼 일정을 바꿨다.

“마찬가지예요.”

간호사가 조금 딱딱한 말투로 말하고는 덧붙였다.

“능 선생 이번 주엔 이틀밖에 안 오니까, 늦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서두르세요.”

왕병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서둘러 주임 사무실로 향했다.

“무 주임님.”

살며시 노크한 다음 왕병복은 활짝 웃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빙복이냐?”

무홍랑이 언제나처럼 그를 불렀다.

“주임님 아직 바쁘세요? 방해한 거 아니고요?”

왕병복은 계속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간 경화가 좀 심각한 환자가 하나 있는데요. 몸 상태는 괜찮은 편이에요. 능 선생한테 수술받고 싶다고 하는데 자리 하나 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주말에 할 수 있을까 해서요.”

무홍랑은 얼어붙은 드레이크 해협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부하들로부터 지나친 존경을 받는 걸 즐기긴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본인이 아닌 이유로 기분이 미묘했기 때문이다.

“주임님, 이 환자는 우리 군인 구역에서 오래된 환자예요. 전에 저한테 와서 여러번 진료받았었고요. 북경, 상해 다 가봤는데 결정 내리지 않고 다시 우리한테 왔습니다. 수술 자체도 가치가 있고 홍보하기도 좋을 거 같아서······.”

“능연한테만 받겠다는 거지? 그렇지?”

무홍랑은 뻔히 알면서 한마디 물었다. ‘주임님이 해주시면 너무 좋죠.’ 같은 말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그러나 왕병복은 거기까지 아부쟁이는 아니었다.

“능 선생한테 받고 싶답니다. 헤헤헤.”

왕병복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따라 웃었다. 무홍랑은 힐끔 그를 보고는 손을 휘저었다.

“능연은 자기가 평가도 한다니까, 환자 상황을 정리해서 일단 보내 봐.”

“평가요? 단순히 병리적 평가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병리적 평가. 출장 수술비는 만 위안. 어시들은 3천. 거기에 왕복 비즈니스 비용 정도 추가. 환자한테 말 잘하고, 뭐라고 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강하게 나가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능연의 수술 수량을 생각해 본 왕병복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병리적 평가라면 이 환자도 문제없을 겁니다. 정말 수술할 때가 됐거든요.”

“그건 상대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리고 병리적 평가라고 해도 인정 없이 하는 건 아니야. 잘만 맞으면 진료과에서 일부 비용을 내도 좋고.”

무홍랑 역시 환자와 관계를 잘 맺고 싶었다. 왕병복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평가는 누가 하나요?”

“여원. 본 적 있지? 엄청나게 작은 여자.”

왕병복은 여원의 이름과 사람을 매칭해 보고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더 서둘러 줄 수 있도록 방법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새벽, 비가 내리는 부대항은 몽롱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새로 자란 녹색 식물이 나뭇잎을 떨며 조금 전에 겪은 충격을 표출했다. 부드러운 잎일수록 빗물에 약하고 무력한 법이었다.

비는 때때로 거세게, 때때로 약하게 내렸다. 약할 때는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사람 마음을 간질였고, 거셀 때는 모든 나뭇잎을 짓밟지 못해 아쉬운 듯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신록의 새싹은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가련한 것이 다음 순간 바로 빗물에 조각날 것 같았다.

“비 맞은 에피프렘넘은 참 아름답네.”

테라스 구석에 선 한미가 중얼거리며 몰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에피프렘넘 접사를 찍었다.

“뭐 하는 거야?”

커다란 그림자가 매서운 눈으로 한미를 노려봤다.

“그게······ 에피프렘넘 좀 찍으려던 거였어요.”

한미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바라봤다.

“회의할 때 얼마나 강조했어. 손님 맞이할 땐 핸드폰 쓰면 안 된다고. 특히 사진은 안 돼. 그런데도 핸드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찍어? 안 된다는 건 다 하네?”

“저, 저는 아르바이트인데요.”

“아르바이트면 뭐? 아르바이트면 규칙 안 지켜도 된대?”

의교과 간사 왕빈이 사납게 고함쳤다. 이번 환영 이벤트 기강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제일 힘들고 보람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주변의 외과 의사만 봐도 그랬다. 병원에서 의사, 특히 외과 의사는 기강이 가장 무너진 사람들이었다. 의무 활동이면 몰라도 이런 환영 이벤트는 이상한 짓 하는 사람 없이 끝나는 법이 없고, 규칙을 잘 지키면서 과정을 끝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미가 딱 걸렸지만, 설사 그녀가 규칙을 잘 지켰대도 어떻게든 불러다 혼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겨우 청소 담당인 아르바이트인 걸 어쩌라고. 게다가 이 자리에서 가장 젊고 괴롭히기도 좋아 보이고.

한미는 역시나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흥, ‘회의’ 때 그렇게 강조했는데. 특정 의사, 간호사, 아르바이트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모두 다 들으라고 한 말이야. 우리 지금 현실이, 간담췌는 운화병원과 협조할 필요가 있어. 특히 능 선생한테 지도받는 거, 우리 진료과의 단기적 중요한 업무일뿐만 아니라 우리 병원 전체에서 매우 중시하는 포인트야······.”

“저는 ‘회의’에 참석 안 했어요.”

한미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왕빈의 즉흥 연설을 잘랐다.

“뭐라고?”

“저는 회의하지 않았다고요. 저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서 몰랐어요.”

한미가 고개를 들며 다시 반복했다.

주변 의사들이 풉 비웃는 소리가 들리자, 왕빈은 불안한 듯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채소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오겹살에 둘러싸인 채소.

그때, 핸드폰 진동음이 왕빈을 구제했다. 그는 재빨리 꺼내 들어보고는 바로 집어넣었다.

“여러분, 능 선생 차가 벌써 도착했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능 선생은 우리 간담췌 외과에 진료하러 온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부대항 사람의 기품을 드러내야 합니다. 반드시 능 선생이 손님 대접을 받는 느낌이 있는 동시에 돌아온 느낌도 들게 해야 합니다. 우선 첫 번째, 핸드폰을 꺼내지 마세요! 사진 찍는 건 더 안 됩니다!”

그가 상기하는 말에, 의사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렸다.

한미는 묵묵히 돌아섰다. 오늘은 영안실도 가야 해서 쓸데없는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딩.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능연이 가장 먼저 걸어 나왔다. 막 돌아서던 한미의 곁눈에 놀라운 얼굴이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능 선생.”

“능 선생님!!”

와글와글.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 외과 복도엔 야생 동물 시장처럼 각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소란스러워졌다.

“아름······ 답다.”

무의식중에 마대 손잡이를 꾹 쥔 한미의 손가락 끝이 새하얘졌다. 눈앞에 보이는 화면을 뭐라고 형용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찌 됐든 그녀가 아는 미의 기준을 초월했다. 처음으로 깔끔한 층류 수술실에 들어가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누워 순결한 수술을 체험하는 것처럼.

“다 준비됐나요?”

능연은 모두의 고함에 대답하지 않고, 그렇다고 거만하게 지나치지도 않고 그냥 무수한 보통 사람 혹은 보통 동창을 대하는 것처럼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 기대에 부응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비됐습니다.”

간담췌 부주임 왕병복이 서둘러 다가갔다. 대장 무홍랑은 그래도 체면이 필요했다. 곧 은퇴할 때가 되기도 했고, 아랫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꾸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한 번 나와서 얼굴 내밀며 멀리서 온 능연 선생에게 인사치레라도 했을 텐데, 아랫사람들이 너무 흥분해서 일을 벌인 바람에 자기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건 너무 체면에 안 맞는 일 같아서 아예 왕병복을 비롯한 부주임들을 내보냈다.

물론 상금은 더 벌수록 좋으니까, 마중하지 않겠다고 대놓고 말은 하지 못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곧 은퇴할 때가 되기도 했고.

“능 선생, 왕 주임님이 바로 23번 맹비강의 담당 의사셔.”

저쪽 아래에서 들리는 여원의 목소리에 왕병복은 따듯하게 몸을 지지는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졌다.

왕병복은 역시 이 세상은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여원 선생과 함께 단숨에 항문외과 환자 재고를 털어 버린 것이 조금 유쾌하지 않았지만, 여원이라는 능 씨 심복의 모습만 봐도 행복해졌다.

앞으로 빚을 갚으려면 여원 선생과 함께 하루 이틀 더 그 짓을 해야겠지만, 왕병복은 개의치 않았다. 어른의 세상은 쉬운 게 아니니까.

능연은 역시나 여원의 소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왕병복을 바라봤다.

“오늘 맹비강 씨 수술부터 하죠.”

“응? 아, 그래요.”

왕병복은 왜인지 물으려다가 참았다. 맹비강은 퇴역 군인이고 양어깨, 한쪽 다리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 외에도 엉덩이에 총을 맞았었고 전립선엔 만성 염증이, 위턱 안면부엔 다발성 손상,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간 경화와 간 내 담관 결석 말고는 별로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보통 이런 환자는 외과 의사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힘만 들고 보람 없는 유형이었다.

그러나 능연이 관심을 주니 왕병복은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능연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왕병복은 저도 모르게 여원을 힐끔 보며 고마운 마음에 앞으로 서너 시간 정도 치주 농양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환자 보러 가죠.”

능연도 모든 의사와 인사를 나누진 않았다. 너무 시간 낭비니까.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의교과 간부 왕빈이 이때다 싶어 존재감을 발휘했다. 테라스 구석에 있던 한미는 능연이 사라진 후에야 마대 손잡이에서 힘을 풀고 손을 털었다. 새하얘졌던 손가락이 서서히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능 선생님 수술실에 갔구나.”

한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평소에 수술실에 갈 일이 없으니 능연을 못 만난다는 뜻이었다. 곁에 있던 얼빠 간호사가 두성으로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능 선생님은 매일 수술실에 열 몇 시간 넘게 있어요. 정말 너무 열심이시죠.”

“그럼 수술실에 들어가면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능 선생님을 보는 거네요?”

“그렇죠.”

“그럼 수술실엔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죠?”

한미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간호사는 눈앞에 이 청소 아르바이트가 정말로 단순하게 ‘수술실에 들어가는 방법’을 묻는 게 아님을 당연히 잘 알았다. 병원 아르바이트생은 설사 수술실에 들어가더라도 수술실 안 소독이나 정리 작업이라 수술하는 의사를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예를 들면 능연 같은.

간호사는 저절로 뿌듯해져서 입을 열었다.

“의사면허 따거나 간호사 자격증 따면 되죠.”

“어떤 게 더 좋아요?”

“당연히 의사면허죠.”

“알겠어요.”

“뭘 알아요?”

한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간호사는 혼란스러워졌다.

부대항 제일 병원 수술실.

환자 맹비강은 아직 수술대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운화병원에서 온 간호사 왕가는 이미 수술실에서 기기와 설비를 체크했다.

능연과 함께 삼 년 넘게 수술해 온 왕가는 이미 능연의 스타일에 익숙해졌고 능연의 수술 습관을 꿰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부대항 제일 병원 간호사 셋을 지휘했다.

“지혈 포셉은 두어 개 더 준비하면 돼요. 하지만 봉합사 종류가 너무 적어요. 능 선생님은 전기 응고보다 봉합을 더 좋아해요.”

“우리가 쓸 기기 일부는 리스니까, 모든 기기는 여러 번 검사하고 세척해야 해요. 리스 업체를 다 믿으면 안 되거든요. 전에 핏자국이 남은 것도 본 적 있어요.”

“여기에 테이핑 좀 해주세요. 붉은색으로. 수술 참관하는 의사는 다 그 테이핑 선 뒤에 있도록 해주시고요. 앞에는 카메라 놓아야 하니까 사람이 서 있으면 안 돼요. 마킹 해놓으세요.”

수술실에 도착한 왕병복은 이곳이 내가 아는 수술실인가 싶을 정도였다. 초고화질 캠코더가 모두 세 대나 각 구석에서 수술대를 비추고 있었고, 마트에서 이벤트 할 때 테이프로 막아 두는 것처럼 바깥 위치부터 겹겹이 수술대를 두르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공간인 수술실 구석구석엔 뷰라이트가 놓여 있고 각종 사진이 꽂혀 있었다.

능연과 몇 번 수술을 해봤어도 이런 광경은 철저히 예상 밖이었다.

“지금 이게······.”

왕병복은 혹시나 말실수할까 봐 떠보듯이 물었다.

“능 선생님이 이번 수술 기록해놓길 바라셔서, 준비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해졌어요.”

“조금 더구나.”

왕병복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수술실 전체를 리모델링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라 조금 더 복잡해졌다는 말로는 눈앞의 장면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왕가도 더 설명할 생각 없다는 듯 웃기만 했다.

“이 수술을 기록해놓는다는 뜻이, 캠코더 세 대로 풀로 찍는다는 건가요?”

“네. 그렇죠.”

“혹시······ 실수가 생기면?”

“실수가 생기면 나중에 어디서 생겼는지 확인하기 더 좋죠.”

여원의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 들리자 왕병복은 깜짝 놀랐다.

“여 선생도 있었구나.”

“아까 저 캠코더, 유령이 밀었겠어요?”

벌써 한 열 시간 왕병복과 같이 수술했던 여원은 말을 편하게 했고, 왕병복은 하하하 웃고는 아까 캠코더 제대로 안 봐서 다행이지, 잘못 했으면 수술대에 먼저 올라갈 뻔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여원은 왕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왕병복에게 말했다.

“능 선생은 이 수술에 자신 있어 하니까, 카메라 걱정할 것 없이 평소처럼 수술하시면 돼요.”

능연 치료팀 내부 소통 근거라서 환자가 ‘별 다섯 개’ 환자로 평가됐다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사실 능 팀 내부 사람도 능연의 평가 시스템이 어떤지 잘 모른다. 다만 별 다섯 개와 별 네 개 환자가 수술 효과가 더 좋고 회복이 빠른 건 확실했다.

왕병복은 여원의 말 몇 마디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쓴웃음 지었다.

“보통 출장 수술은 주목받을까 봐 무서워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닐까?”

“캠코더는 수술 과정 찍어서 나중에 다시 복습하고 재연구, 학습하려는 거예요. 테이핑은 참관하는 의사가 너무 많을까 봐 해둔 거고. 게다가 우리가 협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원이 다시 위로하는 말에 왕병복은 드디어 지금 상태를 받아들였다. 왕병복도 어쩔 수 없었다. 녹화되는 수술은 원래 고급 의사의 고급 행위라, 왕병복은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준비도 안 됐는데,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집도의는 어찌 됐든 능연이고 그런 능연이 데리고 온 팀은 인원수도 충분해서 간호사까지 데리고 왔는데 강렬하게 거부했다가 바뀌는 사람은 다름 아닌 본인일 테니까.

“어서 준비하세요, 선생님. 능 선생 곧 올 거예요. 참, 서류는 다 준비됐죠?”

여원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응, 됐지. 원래 말이 잘 통하는 가족이야.”

환자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니 당연히 말이 잘 통했다. 게다가 간 절제 쪽에서 능연의 유명세는 이미 명의 타이틀이 있어서 환자와 보호자도 수술에 대한 믿음이 훨씬 강해서 웬만해선 사인 받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고도 한참 흐른 후, 간호사가 스트레처 카로 환자를 밀고 들어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무슨 수술하는 건지 아시죠?”

왕가는 본 병원 간호사와 함께 환자 정보를 대조했다. 이 부분은 문제없으면 다행이지만, 혹시 문제가 생겼다간 난리가 난다.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양계초(梁啓超: 중국 근대 정치가, 문학가. 개혁 운동가)는 협화에서 왼쪽 신장을 수술해야 하는데 실수로 오른쪽 신장을 잘랐다. 원인을 따져보면 첫째 집도의가 대조하지 않았고, 둘째, 수술 간호사가 위치를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손목에 이름표 있잖아.”

환자는 허약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서는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다. 왕가는 멍해졌다가 웃으면서 손목을 체크하고 계속 물었다.

“맹비강 씨 맞으세요?”

환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사 평가가 잘 안 나와서 수술실을 이렇게 끔찍한 꼴로 해놓은 거지? 이름을 그렇게 묻는 법이 어디 있어? 귀찮아서 그냥 그렇다고 해버리면 어쩌려고.”

“참 재미있으시네요.”

“그래, 내가 맹비강이다.”

“알았어요. 저는 왕가예요. 수액 좀 살필게요. 무슨 수술하는 건지는 아세요?”

“간 수술. 능연이 수술하는 거 맞지?”

환자는 목을 치켜들고는 물었다.

“네, 우리 능 선생님이 하시는 거 맞아요.”

왕가는 조금 뿌듯한 듯 대답했다.

“음, 꼭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 능 선생이 해야 해. 아니면······.”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날 죽여.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왕가는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자 맹비강이 껄껄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참······ 재미있으시네요.”

왕가는 그제야 안도했다.

“음,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죽어서라도 용서하지 않아.”

맹비강은 수액을 바라보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내가 설에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들도 제대로 설 보낼 생각하지 말라고 친구놈들한테도 다 이야기해 놨어.”

왕가와 여원의 얼굴이 다 흐려졌다. 여원은 핸드폰을 꺼내 미친 듯이 좌자전에게 전화하면서 입을 열었다.

“환자분, 수술은 원래 리스크가 있어요. 수술 전에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도 다 사인하셨고.”

“전쟁에도 리스크가 있지. 전쟁터에서 연대장과 대장이 위험하니까 안 되면 돌아오라고 하는 거 봤어? 1군이 다 죽으면 2군이 나서고, 1연대가 다 죽으면 2연대가 계속 나가고! 그러는 거야!”

그는 목을 빳빳이 세우고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납게 고함쳤다.

“내 간만 깨끗하게 처리하면 돼! 다른 건 상관없어! 듣기도 싫어! 알았나!”

“아, 알겠습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여원과 왕가는 쭈뼛쭈뼛 대답했다. 맹비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왕가를 바라봤다.

“내 귀가 어떻게 되었나. 왜 ‘두 사람’ 목소리가 들려?”

수술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다들 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가지고 온 노점상 슬리퍼를 신은 의사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치켜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얼굴이 졸임 달걀처럼 쪼글쪼글한 좌자전도 들어왔다.

“우리 운화병원 간담췌 외과 장안민 주임입니다.”

들어서자마자 소개하는 좌자전의 말에 왕병복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둘러 자세를 가다듬었다.

“장 주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이로 봐서 장안민 주임은 부주임 의사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능 팀 나이대를 고려하면 갑자기 튀어나온 이 주임도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직책도 능연보다 더 높고.

능연의 상황이 특수해서 그렇다는 걸 잘 알지만, 왕병복은 그래도 장안민을 향해 지나칠 정도로 예의 갖춰 대했다. 다 같은 부주임이지만, 그래도 대장이 다르면 다르니까.

장안민도 당연히 그 대우를 느끼고는, 기분이 좋아져서 목을 치켜들었다.

“왕 주임님, 감사합니다. 그럼 준비할까요.”

“그러지요.”

왕병복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장안민을 따라 사전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능 팀 소가복과 본 병원 마취의 하나도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능연은 왜 아직인가. 능연이 안 오면 난 수술 안 받을 거야.”

맹비강은 조용한 유형의 환자가 아니기에, 장안민이 주임이든 아니든 아랑곳하지 않고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자 바로 난리를 부렸다.

“금방 올 겁니다. 우리가 준비 다 하면 바로 옵니다, 와요.”

장안민이 바로 그를 진정시켰다.

“왜 바로 오지 않고.”

“이번 수술이 매우 중요하니까요. 능 선생은 집중해야죠. 자질구레한 일은 우리한테 시키고 정식으로 메스댈 때쯤 올 겁니다.”

좌자전이 학교 앞 좌판에서 간식 파는 아저씨처럼 자상하게 설명하자 맹비강은 반신반의했다.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일찍 와야지.”

“의사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엔 한계가 있습니다. 능 선생이 정신력을 아꼈다가 수술에 쓰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환자분께 이런저런 설명 하면서 그 김에 태극권을 하는 게 나을까요?”

좌자전의 말투가 점점 엄숙해졌다.

“의사가 의사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야 환자분께도 더 좋습니다.”

좌자전의 말에 맹비강은 말문이 막혔다. 환자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받은 좌자전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능 선생은 기운이 넘치기로 유명합니다. 보통 연속으로 수술 여러 건 합니다. 하지만 연달아 수술한다고 해서 집중력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의사가 몇 시간 동안 정신 집중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집중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아요. 그러니까 환자분 수술을 최대한 잘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장안민 주임이 먼저 와서 준비하는 거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일은 원래 실습생이 하는 겁니다. 장안민 주임을 부른 건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라고요.”

맹비강은 입술을 달싹일 뿐, 한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혹은 속으로 내심 기분 좋았다고 해야 할지도.

그런 맹비강의 표정에 좌자전은 속으로 웃으면서 쐐기를 박았다.

“수술실은 보통 집도의 하나에 한 명에서 세 명 정도 조수가 들어옵니다. 어시는 보통 연차가 낮은 젊은 의사들이고요. 그런데 지금은 말입니다, 능 선생은 둘째치고 왕병복 선생과 장안민 선생 모두 부주임입니다. 평소에는 집도하는 의사인데 오늘 조수로 들어왔어요. 그래도 불만이시면 푹 자고 일어나세요. 그럼 수술 끝나있을 테니.”

맹비강은 기쁘기도 하고 언짢기도 했다.

“그게 말처럼 그리 쉽나.”

좌자전이 손을 휘두르자, 두 마취의가 같이 나서서 바로 맹비강을 재워 버렸다.

“이제 됐네. 다들 계속하세요. 제가 능 선생 불러올게요.”

“천천히 해도 괜찮습니다.”

왕병복이 냉큼 대답하는 말에 좌자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나가지 않고 목을 풀고는 왕병복을 바라봤다.

“왕 주임님, 굳이 말씀드리자면, 오늘 이 수술, 능 선생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맞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사실 능연이 왜 이렇게 이 환자를 중시하는지 궁금했다. 환자를 아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그런 걸 묻기 그래서 잠시 지체하는 사이 좌자전이 어느새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곧 능연도 손을 치켜들고 들어왔다.

“능 선생, 환자부터 마취했어.”

장안민이 매우 공손하게 한마디 했다. 왕병복은 능연에게 인사한 다음 장안민을 힐끔 바라봤다. 장안민은 태연자약하게 소가복을 바라봤다.

“우린 준비 됐어요.”

소가복 역시 느긋한 표정이었다.

임상 의학이란 대부분 반복하면서 느는 것들이다. 일이 년 전이라면 소가복은 간 절제 같은 큰 수술 전에 당연히 조마조마하고 심지어 전전긍긍하겠지만, 지금은 부대항 제일 병원 마취의를 은근히 무시할 정도로 안심했다.

능연은 각종 사진을 다시 보면서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을 복습했다. 조금 강박증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진정한 작용을 발휘하기 전까진 그다지 쓸모없어 보이지만, 자동차 운전하기 전에 예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미 능연의 방식에 매우 익숙한 소가복은 기기 수치를 체크하고는 곁에 있는 마취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렇게 심각할 거 없어요. 능 선생이 오늘은 좀 느리게 하고 싶은가 봐. 그럼 세 시간은 걸려요.”

“느리게요?”

“응, 능 선생은 자기 리듬이 있거든.”

소가복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다시 웃어 보였다.

“요즘 더 바빠졌죠?”

“당연하죠. 임상도 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니까. 에휴. 그래도 북경 병원보단 낫죠. 선배 하나가 지난달에 그쪽으로 갔는데 얼마 전에 휴가 내고 선배 장례식 다녀왔다니까요.”

“상해도 마찬가지예요. 아는 선배도 작년에 잔다고 집에 갔다가 그대로 갔어요.”

“과로?”

“교통사고요. 졸음운전이지, 뭐. 나이트 끝나고 차가 안 잡히는데 운전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병원 선배도 그렇게 갔네요.”

소가복은 멈칫하고는 감탄했다.

“역시 바쁘네요. 하지만 마취의가 다 그렇지 뭐. 나 아는 누나는 바빠서 신혼여행도 못 가고, 저번에 전화 와서는······.”

“제 스승님은 45살에 돌아가셨어요.”

곁에 있던 마취의가 한마디로 소가복의 이야기를 잘랐다.

소가복은 입을 삐죽이며 졌다고 인정했다.

왕병복은 자기네 마취의가 마취학 방면 경쟁에게 이긴 걸 기뻐했다.

운화병원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수술 전체를 다 도맡아 하고도 남았다. 이럴 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말고 이곳이 자기 병원 수술실이 맞다고 확신할 길이 없었다. 특히 카메라가 왔다 갔다 할 때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나 잘하고 있니?

잘못하면 주임님이 뭐라고 생각할까? 원장님은 또 뭐라고 생각할까?

또 너무 잘하면 주임님이 뭐라고 생각할까? 다른 주임은 또 뭐라고 생각할까? 다른 병원 간담췌에서 스카웃하려고 오지 않을까?

왕병복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면서, 능숙하다고 자부하는 작업을 퍼스트 어시 신분으로 임했다. 그러나 점점 어려워졌다.

“왕 주임님, 제가 여기 도와드릴게요.”

“왕 주임님, 실 정리 제가 할게요.”

“왕 주임님, 여기 석션 한 번 더 할게요.”

왕병복이 손발을 허둥거리고 있을 때마다 장안민의 친절한 목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장안민이 도와주는 게 기뻤다. 어시로 들어와서 수술 진도에 영향을 주면 큰일인데 익숙하지 않은 부분, 미처 따라잡지 못한 부분이 있을 때 누가 도와주면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장안민이 너무 빈번하게 돕는다는 것이었다. 혹은 왕병복 부주임이 너무 많은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었고.

솔직히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실력이 딱히 강해져서가 아니라, 이 정도 급이 되면 보통은 익숙한 수술만 하고 가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도 자기가 조금씩 더듬으며 하지, 학생 때나 연차 낮을 때처럼 다른 사람 밑에서 밀리듯 배우지 않는 데다가 따라잡지 못해서 난감한 일은 더욱더 없어서였다.

그런 면에서 왕병복은 한동안 배움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성인이 자기 일터에서 계속 배우고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때는 꽤 껄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더 그렇고.

자기가 집도할 때처럼 가끔 이런저런 작은 문제를 만나면 좀 배우면서 기억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허심탄회하게 배움을 받아들이는 좋은 예가 될 수도 있고. 그러나 문제투성이인 수술을 만난 데다가 허둥지둥 대며 따라잡지 못해서 집도의까지 발목 잡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왕병복 부주임 의사도 체면은 필요했다.

수술이 초기 단계에 진입해서 간 원 인대를 박리했을 때, 왕병복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리 바꿉시다.”

퍼스트를 내놓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왕병복을 너무 이해하는 장안민은 바로 이어받으며 웃어 보였다.

“오늘 수술을 능 선생이 특히 꼼꼼하게 해서 그래요.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닙니다.”

“아, 그래요.”

외과 의사와 배우는 일할 때 비슷한 점이 있다.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일하고, 주변엔 기본적으로 업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수술을 잘하는지 아닌지는 연기를 잘하는지 아닌지처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다. 설사 한눈에 꿰뚫어 보지 못해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학생을 불러 칠판 문제를 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잘 푸는 학생은 풀면 풀수록 신나 하고, 못 푸는 학생은 풀면 풀수록 기운이 다운되듯이.

부주임 의사까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왕병복은 예전에 바로 그 잘 푸는 유형이었다. 비록 평범한 삼갑병원 부주임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중학생 중에선 탑급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꼴찌 학생의 늪에 빠지니 기분이 순간 다운되었다.

부주임 자리에 오른 장안민도 지금은 밑에 부하가 여러 명 있어서, 왕병복의 표정을 보고는 손을 놀리면서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오늘은 정말로 특수 상황이라 그래요. 능 선생이 쓰는 동작 중에 저도 처음 보는 게 있으니 왕 주임님은 더 그러시겠죠.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능 선생이 전체 컨트롤 할 겁니다.”

두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은 왕병복은 드디어 얼굴이 좀 풀어졌다.

“능 선생도 주임 소리 못 듣는데 주임 소리 듣기도 창피하네요.”

“우리 능 선생이야 아직 젊잖습니까. 왕 주임님 경험만 하겠어요?”

좌자전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오늘은 수술에 낄 자격도 없어서 옆에서 입으로 시중들고 있었다. 좌자전의 말에 왕병복은 더 홀가분해져서 고개를 들어 능연을 바라보며 부럽기도 감탄스럽기도 한 듯 대답했다.

“능 선생 실력 참 대단합니다. 솔직히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 간 절제 수술도 적은 편이 아닌데, 능 선생 오늘 수술 참 다르네요.”

“오늘 수술은 예후 중심으로 고려했으니까요.”

이번엔 장안민이 대답했다.

능연은 수술 모드에 집중한 상태였다. 완벽한 수술이라는 부담은 능연에게도 컸다. 이쯤 하면 시스템이 인정하는 완벽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더 잘하려고 애썼다.

그로서는 별 다섯 개짜리 환자를 만나기 쉽지 않았다. 대부분 간 절제가 필요한 환자는 나이가 너무 많거나 아니면 기초 질환이 많거나 그것도 아니면 각종 합병증이 있었다. 그러니 환자를 위해서는 세심한 수술을 오래 하는 것보다 차라리 빠른 수술이 훨씬 나았다.

맹비강도 몸 상태가 괜찮고, 생활 습관도 괜찮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장기를 회복할 수 있어서 별 다섯 개 기준에 오른 것이다.

모처럼 이런 환자를 만났는데 수다 떠는 데 시간을 허비할 리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매우 진지하게 수술에 임했다. 그러니 어시들도 한계치까지 해주길 요구했다. 능연의 스킬 중 하나였는데, 그래도 보통은 어시들에겐 어느 정도 여지를 주지만 오늘은 최대한 디테일을 챙기기 위해서 왕병복이 더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 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환자의 리스크도 조금 올라갔다.

수술을 더 완벽하게, 예후를 더 좋게 하려고 리스크를 조금 더 감당하느냐, 아니면 수술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 수술 속도를 올려 수술을 최대한 빨리 끝내느냐는 원래 의사들이 균형 잡고 판단할 문제였다.

신체 조건이 괜찮거나 뛰어난 별 다섯 개 환자니까, 예후를 올리는 게 최고로 좋은 선택이라고 능연은 생각했다. 왕병복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수술을 따라잡기도 힘드니까. 하지만 현실은 왕병복은 선택도 판단도 할 권리가 없었다.

수술은 능연의 계획대로 진행됐고 느릿느릿, 단호하게 집행되었다. 수술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가장 쪼랩 참관 촌닭도 수술이 순조롭게 끝나겠다는 걸 깨달았다.

왕병복은 저도 모르게 구석 위치 모니터를 바라봤다. 운리 로고 아래 쉴 새 없이 코멘트가 올라왔다.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다 자기 병원 의사들의 평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생각에 왕병복은 저도 모르게 목을 비틀면서 여기서 좋은 기술을 선보이면 평가가 더 좋아질지 모른다고 여겼다.

그와 동시에 능연 앞에도 글자가 나타났다.

- 퀘스트 1: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내용: 완벽한 수술은 평생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외과 의사의 바람. 완벽한 수술 세 번 완성할 것.

- 퀘스트 진도:(3/3)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 퀘스트 1-1: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내용: 완벽한 수술은 평생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외과 의사의 바람. 완벽한 수술 네 번 완성할 것.

- 퀘스트 진도:(0/4)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멈칫하던 능연은 곧 이번 퀘스트가 누적된다는 걸 깨달았다.

수술 한 번 끝날 때마다 수술 횟수가 하나씩 느는 것도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제 여러분한테 맡길게요.”

능연은 수술을 끝까지 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후속 부분은 어시들에게 맡겼다. 완벽한 수술이라고 해도 사실 능연이 수술 전 과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시들이 집중력이 조금 부족해서 그렇지 실력이 다 괜찮은 건 접어 두더라도, 몇 시간 동안 고강도 수술했던 집도의가 간단한 부분을 한다고 해서 더 잘하리란 법은 없다.

사실 병원에서 자주 발생하는 외과 합병증은 대부분 집도의의 아차 하는 실수로 일어난다. 봉합만 해도 초짜 의사가 하면 더 진지하게 할 건 하고 조심할 건 조심하면서 봉합한다. 하지만 집도의가 할 땐 대충대충 얼렁뚱땅할 가능성이 있다. 최악의 상황으로, 집도의가 너무 오래 허드렛일을 하지 않아서 오히려 실수할 가능성도 있고.

그에 비해, 능연의 부하들은 허드렛일을 자주 했다. 수술을 이어받은 장안민은 남의 집 부주임과 함께 협조하여 후딱후딱 마무리 작업을 끝냈다.

능연은 일회용 수술복을 벗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오늘 별 네 개도 하나 있죠?”

“넵. 님이 오후로 배정하라고 그러셨지요.”

좌자전이 알코올겔을 건네며 대답했다.

“조금 당기죠. 다섯 개 기준으로 하고.”

별 다섯 개 기준에 맞는 환자는 아무래도 적었다. 몸 상태도 괜찮은 데다가 목숨 걸고 간 내 담관 결석 수술에 성공하려고 애쓰는 환자는 많지 않으니까.

좌자전은 능연의 의중을 추측하며 조금 우물쭈물 대답했다.

“다섯 개 기준으로 하는 건 괜찮은데, 문제는 환자가 잘 협조하지 않는다는 거지.”

완벽을 추구하는 능연의 성격을 잘 아는 좌자전은 특별히 설명을 덧붙였다. 꼼꼼하게 하는 수술에서 환자가 의사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그렇게 수술한 것이 아까우니까.

일상생활에서 자주 보듯이, 대부분 환자의 협조성은 매우 떨어졌다. 의사가 열흘 약 처방 내렸을 때 50%가 사흘 만에 복용을 멈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장기 복용 환자의 협조성은 더 떨어지고.

수술 후 환자의 재활 협조성은 더 떨어졌다. 의사들이 지시한 대로 생활하고 음식 섭취하는 환자는 더 드물고.

별 네 개 환자의 상태를 잠시 떠올려 본 능연이 물었다.

“젊은 환자였죠? 그런데 담 결석, 신장 결석, 거기에 C형 간염력도 있고.”

“응. 가벼운 빈혈, 중도 고혈압, 관상동맥성 심질환도 있고. 충수염, 결장 수술도 했고, 급성 췌장염도 있었어. 총체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지. 그래서 별 네 개 아니야?”

간 내 담관 결석으로 수술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보통 나이가 많고, 간 내 담관 결석으로 십 년, 이십 년 고생한 환자는 합병증도 다양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환자 자체도 많지 않았다.

능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마침 시간 남았으니 그럼 환자 보러 가요.”

“그래, 내가 준비할게.”

좌자전은 바로 시계를 꺼냈다.

“그럼 전 보호자 만나러 갈게요.”

능연이 그렇게 말하자 누군가 자연스럽게 수술실 문을 밟아 열어 주었다.

“능 선생, 수고했어.”

“능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왕병복이 기억에 남으려고 뒤에서 목소리를 높이자, 수술실에서 참관하던 어린 의사들도 따라 고함쳤다.

“부대항 의사들은 참 따지는 게 많군.”

좌자전은 힐끔 바라보고는 능연을 따라가며 혀를 내둘렀다. 능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좌자전을 바라보고는 조금 전 수술 상황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능 선생아. 수술 이야기가 아니야.”

좌자전은 능연이 사람 무안하게 하는 말을 하기 전에 냉큼 덧붙였다. 그러자 능연은 ‘아’ 하더니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술실 밖 대기실에 맹비강의 보호자가 주르륵 앉아 있었다. 병원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먼저 양해를 구한 것이라 간호사들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다른 보호자들처럼 조용히 있었다. 군복 차림의 보호자는 심지어 단추까지 꽉 채운 채 포즈를 일부러 잡은 것처럼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간 좌자전은 줄지어 앉은 보호자들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집스러운 것만 보면 가족이 다 그러네.”

“능 선생님?”

눈썰미 좋은 군인 하나가 이미 능연을 알아보고 일어났다. 능연의 얼굴을 아는 게 아니라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능연은 그런 일로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법이 없었다.

“맹비강 씨 가족이십니까?”

능연은 좌자전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 앞에 섰다.

“예. 맞아요.”

“연대장님 어떠십니까?”

“수술 성공했습니까?”

저마다 한마디씩 하자 대기실이 바로 혼란스러워졌다. 능연은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환자분은 곧 ICU에 들어가서 상태를 관찰할 겁니다. 그땐 한 분 정해서 들어가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잘 됐군.”

“능 선생님, 감사해요.”

“능 선생님, 위챗 친추합시다.”

맹씨 가족이 다들 흥분하는데 슈트 차림 남자가 다소 격앙된 얼굴로 식사 초대를 했다.

“능 선생, 점심때 식사나 같이합시다. 아버지 전우들이 여러 명 밖에서 쉬고 계시는데 이야기 들으면 기뻐할 거요.”

“됐습니다. 다음 환자 만나러 가야 해서요.”

“그거랑 밥 먹는 거랑 무슨 상관있다고.”

“협조성이 떨어지는 가족이라고 들어서요. 밥맛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능연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슈트남이 멍해졌다.

“그럼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 줘요.”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자전에게 후속 설명을 맡기고 자리를 떴다. 그때 줄곧 구석에서 마대를 들고 있던 한미가 똑같이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던 동료에게 빠른 속도로 마대를 넘겼다.

“일단 이것 좀 대신 돌려놓아 줘.”

“뭐하게?”

동료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따라가 보려고요.”

“그래, 그럼 이번엔 네가 먼저 해. 다음엔 내가 먼저다. 영상 많이 찍어 와라. 사진은 인터넷에 천지라 돈도 안 돼. 돈 받고 공유하는 것도 있더라. 엄청 많아.”

한미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영상은 왜 찍어?”

“바보냐! 우리는 이 병원이랑 일 년 계약이잖아. 내년에 연장할지 못할지 모른다고. 앞으로 길어야 반년 남았어. 지금 많이 찍어 놔야지, 나중에 우리 능연 군을 찍을 기회가 또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능연 군 같은 소리 하네. 참 못 말린다. 난 가서 좀 배우고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뭘 배우고, 뭘 알아봐?”

“저기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좀 봐봐, 특히 맨 앞줄에 슈트 입은 사람. 되게 거만하고 사람 무시할 거 같지 않아?”

“딱 봐도 마대 들이밀어도 다리도 안 올려줄 스타일이네.”

“내 말이. 그런데 의사는 어떻게 대하는지 봐봐.”

한미는 눈에서 빛이 다 반짝였다.

“의사들이 오는데 다리 안 드는 사람은 없어.”

“그건 저 사람들이 덜 거만하다는 뜻이지.”

동료는 한마디 하고는 한미의 표정을 보더니 한마디 더 덧붙였다.

“물론 의사가 마대보단 낫겠지.”

“낫기만 해? 훨씬 낫지.”

의사의 명예를 열심히 올려놓은 한미는 능연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모습에 더는 지체하지 않고 쪼르륵 소방통로로 달려갔다.

부대항 제일 병원 구건물은 유난히 음산해서, 정오의 햇살이 비쳐도 온몸이 서늘하고 스산했다.

한미는 단숨에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재빨리 엘리베이터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능연 일행도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나오고 있었다.

한미는 뿌듯하게 웃음 지었다. 체력 하나는 끝내줘서, 마을에서 집을 지을 때나 청소 업체에 들어와 쓰레기를 운반할 때도 다른 사람에게 진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처럼 계단 잠시 뛰었다고 헐떡거리지도 않고, 호흡 변화 하나 없이 서둘러 능연 일행을 따라 아둔한 실습생 같은 모습으로 얼렁뚱땅 병실로 들어갔다.

“이분이 환자 두성공 씨입니다. 올해 58세.”

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늙고 깡마른 의사가 능연에게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환자는 간 내 담관 결석을 12년 동안 앓고 있었고, 최근에 담 결석, 신장 결석이 연달아 발견되었습니다. 고혈압, 협심증도 있고. 보호자가 세심히 케어하고 있는데 통증이 너무 극심해서 빨리 수술받길 원합니다.”

능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환자를 바라봤다.

“검사 좀 하겠습니다.”

능연은 알코올겔을 바르고 잠시 말린 후에 환자복을 들어 올렸다. 까치발을 든 한미의 눈에 마침 능연의 손등이 들어왔다. 사람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보들보들한 손등의 피부가 보였다. 보고만 있어도 편안했다. 긴 손가락도 매우 예쁘고.

한미는 앞에 있는 젊은 의사를 쿡쿡 찌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능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신체검사요.”

상대의 복장을 본 젊은 의사는 조금 짜증스러운 듯 대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고는 상대가 얼굴이 동그랗긴 해도 눈도 동그랗고 큰 것이 순간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환자 병소랑 몸 상태 체크하는 거예요.”

“사진 찍었잖아요.”

“무슨 수단이든 정보엔 한계가 있거든요.”

한미가 입을 삐죽였다.

“그렇구나. 별 재미도 없네. 우리가 테이블 닦는 거랑 비슷한데.”

아가씨가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더 귀여워 보이자, 젊은 의사는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아까 저 좌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거 모르죠?”

“아까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고요?”

“물론이죠. 맞춰 볼래요?”

젊은 의사는 못 맞추면 밥 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남은 차트가 산더미라는 생각에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한미는 머릿속으로 좌자전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고는 살며시 고개 저었다.

“모르겠어요.”

“아까 좌 선생님이, 보호자가 환자를 매우 세심하게 케어한다고 했죠?”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한미는 마음속에 의사에 대한 신념이 조금 흔들렸다.

얘 공부만 많이 해서 머리가 좀 멍청해진 거 아니야? 그럼 차라리 그냥 청소나 계속 하는 게 나은데. 가끔 영안실이나 장례식장 가서 도와주면 한 달에 돈도 쏠쏠하게 벌고.

젊은 의사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숨은 뜻이 있어요.”

“네?”

“환자가 트집 잡길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까다롭다는 거죠.”

“아, 그러니까 의사들의 은어네요?”

젊은 의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요.”

“능 선생님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네.”

“능 선생 걱정을 왜 해요. 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을.”

“쉿!”

한미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아, 검사 끝났나 보네.”

젊은 의사는 억울하고 화도 나고, 속으로 어차피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다 이런 식 아니냐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도 귀엽기는 해서 다행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12시간은 더 근무해도 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도 진정됐다.

“상태는 안정적이고 병세도 큰 변화 없네요.”

능연은 손을 거두고 다시 알코올겔을 발랐다.

“두 가지 수술 방안이 있습니다. 고르시면 됩니다.”

“우린 잘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가 골랐다가 잘못 고르면 어떡해요.”

두성공 곁에 있던 마흔 남짓한 여자가 매우 복잡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평온하게 물었다.

좌자전은 한눈에 전형적인 ‘까다로운 지식인’임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능연이 이미 말을 꺼냈다.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바라는 쪽으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여자가 끼어들려고 하자, 능연은 손을 휘저으며 먼저 말했다.

“질문은 일단 제 설명이 끝나면 그때 하세요.”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를 대할 때 아무래도 권위적이기 마련이니, 복잡한 머리 스타일 여자는 참으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능연은 말투를 바꿔서 말을 이었다.

“지금 두 방안 중 하나는 쾌속 수술 방안입니다. 병변 위치를 절개하는 게 주요 목적이고, 수술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 예상합니다. 흔한 수술 방법을 채택할 겁니다. 또 하나는 장시간 수술 방안입니다. 환자의 예후를 생각해서 최대한 수술 하는 동안 출혈 등 다른 부분을 신경 쓸 겁니다. 네 시간 예상하고요. 수술 방법도 조금 다릅니다.”

“당연히 빨리 끝나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 묻긴 뭘 물어요?”

여자가 의아한 듯 능연을 바라봤다.

좌자전은 그녀의 톡 쏘는 말투에 웃으며 끼어들었다.

“두 선생님 따님이십니까?”

“맞아요.”

“혹시 무슨 일 하십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의료계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좌자전은 계속 양보하지만은 않고 조금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엔 아마도 선생님?”

“어떻게 아셨어요?”

“의사 생활 오래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상황을 겪죠. 선생님들이 보통 의학은 모르면서 사람을 가르치려고 들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아닐까, 추측했죠.”

마흔 넘은 두 여사도 완전히 막무가내는 아니라서, 좌자전이 빙 둘러 비꼬는 말에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럼 제 말이 틀렸다는 거네요?”

“그렇죠.”

좌자전은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 능 선생은 간 절제 영역에서 국내 손꼽히는 전문가입니다. 사실 그건 아시겠죠. 그러니까 일부러 찾아오셨을 거고. 보통 능 선생은 환자나 보호자에게 수술 방안을 선택하게 하는 일이 드뭅니다. 두 선생님 상태가 괜찮은 편이라 고급 수술을 할 만해서 묻는 겁니다. 귀한 기회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르시길 바랍니다. 어찌 됐든 수술은 두 선생님이 받는 거고, 앞으로 라이프 퀄리티를 생각하셔야 하니까요.”

“고급 수술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거죠?”

두 여사는 말투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물었다.

“능 선생.”

좌자전은 다시 자리를 내주었고 능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장시간 수술 방안은 상대적으로 난도가 높고 예후는 더 좋은 고급 수술입니다.”

“시간이 더 긴 게 더 좋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하러 고르라는 거예요? 더 비싼가요?”

“수술 비용은 비슷합니다. 중점은 수술 후 여러분의 협조도입니다.”

“말씀만 하세요, 다 지킬게요.”

두 여사는 지금은 또 매우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처럼 나왔다. 그러나 능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 믿습니다.”

의사 입에서 그런 대답을 들은 두 여사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환자와 보호자가 그 차이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능연은 두성공을 바라보며 화이트보드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간과 주변 장기만 그렸지만, 그림으로 그린 거라 다들 쉽게 알아들었다.

“두 가지 수술 방식은 듣기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그린 건 일반적인 간 절제 수술 방식, 지금은 개량된 수술 방식입니다. 이런 수술 방식을 채택하면 이론적으로 환자 예후가 더 좋습니다. 그런데 닥터스 오더를 엄격하게 지키지 못하면 효과가 전자보다 못합니다. 수술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자면, 간 절제 범위부터 다르죠, 이렇게······.”

단순히 말로 설명했다면, 두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도 할 말이 매우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슥슥 그림을 그려 수술 과정을 표현해내니, 두씨네들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미는 더욱 집중했다. 그녀는 능연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두씨들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했다. 의심에서 의문, 의문에서 믿음으로 변하는 그런 모습은 한미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멋지다, 능연.”

한미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바닥을 닦은 척 대기실을 들락거리던 한미는 네 번째로 지나갈 때는 앞으로 가지 않고 소방통로 한쪽에서 새로 산 영어 단어장을 때때로 내려다보면서 소방 도어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그녀와 한 조로 움직이는 여자는 숙소 룸메이트인데, 나이가 비슷해서 사이가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분이 좀 이상해서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한미, 또 땡땡이야?”

“언니, 우리는 아르바이트 하잖아. 아르바이트의 직업 스킬이 바로 땡땡이라고.”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한테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땐 그때고.”

한미는 히죽 웃고는 말을 이었다.

“신입이 열심히 안 하면 우리가 일을 더 해야 하잖아. 우리가 첨 왔을 때 나도 이모한테 그렇게 배웠어.”

“그런 건 참 빨리도 배운다.”

“먼저 언니가 바닥 닦고 위층은 내가 할게. 나중에 나 혼자 할게, 오케이?”

한미가 덧붙이는 말에 언니는 조금 미안해진 듯 냉큼 대답했다.

“네가 일 안 한다고 타박하는 게 아니야.”

“알아.”

“그런데 말이야, 너 고졸 아니야? 영어는 왜? 다시 대학 가려고?”

언니가 웃으며 하는 말에 한미는 웃지도 않고 손에 든 미니북을 힐끔 보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졸업하고 5년 동안 일했고, 집에 빚도 거의 갚았으니까 이제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언니는 한미의 대답이 의외도 아니었다. 스물 남짓한 아가씨가 청소 일을 하고 시체까지 닦고 영안실 청소도 하는데, 당연히 돈이 필요해서였겠지. 특히 한미처럼 생긴 아가씨는 학력이 없어도 길가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만 해도 병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한미보다 6, 7년 일찍 일을 시작했지만, 집 안 상태는 아직도 엉망이고, 공부할 마음이 생긴다면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다시 영어 공부한다니, 기억은 나고?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인데?”

언니는 농담 반, 또 나머지 반은 정말로 궁금한 듯 물었다.

“대학 가려고요. 기억 안 나면 다시 외우면 되지. 청소하는 거보다 힘들지 않잖아.”

“머리 쓰는 게 몸 쓰는 거 보다 힘들다, 야. 영어 시험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응, 하나하나 공략하는 거지. 어차피 돈도 조금 더 벌 생각이라서.”

“맞아, 학원 다닐 돈도 벌어야 할 거 아니야. 다들 종일 공부할 텐데, 우린 일도 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혼자 공부해서 비교가 되겠어?”

“되게 좋은 학교 갈 생각도 없고, 그냥 의대만 붙으면 돼.”

한미는 이미 생각을 다 끝낸 듯이, 의대 이야기 나오자 눈빛이 더 환하게 빛났다. 룸메이트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저도 모르게 꿍얼거렸다.

“젊음이 좋구나.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처럼 젊으면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 든다, 얘. 넌 그래도 고등학교 때 배운 거 아직 기억나지? 난 다 잊었거든. 뭐 그때 열심히 하지도 않았어. 집에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공부 못 하니까 그냥 바로 일 시키더라고.”

한미는 여전히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같이 공부하자는 말 같은 건 더욱 하지 않았다. 상대는 더 일찍 사회생활 시작한 사람이고,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 그녀의 말 몇 마디로 바뀌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한미 역시 지금 열정이 들끓어서 그렇지, 그냥 자기가 열심히 할 정도지 남까지 설득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사실 자기도 고등학교 때 배운 걸 거의 잊었으며, 공부도 그저 그랬다는 말을 언니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해 봤자 자신감만 줄어들 뿐,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까.

“능 선생님 곧 나오시겠다.”

한미는 단 한마디로 동료의 주의력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디?”

언니는 과연 바로 홀린 듯이 하려던 말도 다 잊어버렸다.

“이제 한 20분?”

“네가 어떻게 알아?”

“고급 수술은 4시간 한다더라고. 이제 3시간 넘었고, 의사들은 보통 시간을 넉넉히 잡으니까 곧 나오거나 늦어도 20분 안엔 나오겠지.”

30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수술에 문제가 생긴 거라는 말 같은 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 말에 언니는 핸드폰을 꺼내 힐끔 봤다.

“4시간 넘었는데?”

“병원에서 말하는 수술 시간은 집도의가 수술을 시작한 순간부터 계산하는 거야. 수술 전에 준비하는 건 다 포함 안 돼.”

“그런 것도 다 알아?”

“응, 요 며칠 좀 알아봤지.”

한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단어 하나 외우고는 멍한 두 눈으로 밖을 바라봤다. 동료는 순간 재미없다고 생각하며 마대를 세우고 이제 그만 갈까 생각하는데 복도 쪽 문이 열렸다.

능연과 의사들이 연달아 나오더니, 곧 보호자에게 둘러싸였다. 한미와 동료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한미는 곧 단어장을 들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의사와 보호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고, 동료는 핸드폰을 높이 들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미는 이럴 때 능연의 목소리가 제일 좋았다. 평소에 부드러운 목소리도 물론 좋지만, 지금처럼 단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만큼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미는 힐끔 동료를 바라보며 영상을 찍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환자가 ICU에 들어가면 한 분 대표로 들어가 보실 수 있습니다.”

좌자전은 능연의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앞으로 나서서 특히 환자 딸을 주시하며 일반적인 주의 사항을 읊었다.

겉모습부터 엘리트로 보이는 두 여사는 수술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정신, 기력, 신경이 다 달라져서 좌자전의 그런 표정을 보고도 그냥 웃어넘겼다.

능연이 수술 복도로 되돌아 들어가자, 한미는 이를 악물고 뒤따라갔다.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됩니다.”

좌자전이 눈살을 찌푸렸다. 까다로운 보호자를 많이 봤지만 바로 수술 구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역시 드물었다. 어찌 됐든 보호자들도 사실 자기 가족이 배를 열고 장기를 드러낸 것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까.

“병원에서 일해요.”

한미는 제복을 가리키며 플라스틱 명찰도 꺼내 보였다.

“이쪽에 들어갈 일 없잖아요.”

좌자전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였지만, 막지는 않았다. 출장 수술하러 온 거지, 병원 관리하러 온 건 아니니까. 어쩌면 이 병원에선 이렇게 규칙을 안 지키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고.

한미가 어느새 능연의 꽁무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좌자전에겐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서둘러 한미 곁으로 가서 조용히 경고했다. 일반적으로 어린 팬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한미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 능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좌자전이 헛기침하는 소리를 들은 능연이 고개를 돌렸다.

“좌 선생님, 골센에 연락 좀 해서 수술 필요한 환자 없는지 알아봐 주세요.”

“다음 주에 상해 가게?”

“화요일에요.”

능연은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전에 퀘스트를 받고 규칙대로 착실히 평소 수술을 하면서 순조롭게 퀘스트를 완성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완벽을 추구한다는 건 시리즈 수술일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할 듯했다.

간 절제보다 반월판 성형술이나 슬관절 인대 보건술이 능연으로서 완벽한 수술을 해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이런 수술이 수술 시간도 더 짧아서 퀘스트 갱신하기 좋으리라 생각했다.

좌자전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병원에서 자주 출장 수술을 나가는 의사는 사실 화요일에 출장 수술 가는 걸 좋아한다. 보통 주에 5, 6일은 밖에서 출장 수술하고 주말이나 월요일에만 돌아와서 월요 회의에 참여하거나 하니까.

그래서 월요일 아침 진료도 보통 대빵 주임들이 먼저 시간을 가져간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큰 병원 월요일 외과 전문의 진료를 예약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특히 매우 유명한 주임들은 본원에서 진행하는 수술은 대부분 수하 의사들이 대신한다.

물론 능연은 매우 빠른 수술 속도와 초장시간 수술 시간 때문에, 능연의 환자는 모두 능연 본인이 수술한다.

어찌 됐든, 좌자전은 능연에게 무슨 새로운 생각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떠보듯이 물었다.

“화요일에 아마 수술 다 잡혀 있을 텐데. 그때 상해 간다면 수술을 미루는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건가?”

“사전에 할 수 있는 건 해버리고, 나머지는 뒤로 미루죠. 이렇게 배정하면 침대는 여유 있나요?”

능연은 조금 걱정되었다. 능 팀에게 배정된 침대는 이미 다 써버렸는데, 수술 일정을 대규모로 조정하면 침상 부족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좌자전은 오히려 한숨을 돌렸다. 능연 식의 걱정은 자신에게는 보통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방법 생각해 볼게. 정 안 되면 간담췌에 침대 추가하지, 뭐. 하 주임님이 이해해주실 거야.”

지금 간 절제 수술은 기본적으로 능연이 다 하고 있고, 장안민이 하원정보다 더 많이 했다. 하원정 주임은 담 쪽 수술만 하면서 담이 점점 줄고 있었다.

능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간담췌 평소 수술 일정에 영향 주지 않도록 하 주임님한테도 침대 남겨 주세요.”

“예!”

좌자전은 대답하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능 선생 역시, 사리에 밝아!”

“능, 능 선생님.”

능연이 다시 수술실에 들어가려는 걸 본 한미는 좌자전의 시선을 무시하고 용기를 내어 고함쳤다.

“능 선생님, 제가 의사가 되고 싶거든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능연은 멈칫하고는 바로 대답했다. 능연은 누구나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사고 구조를 가졌다.

“능 선생님, 감사해요! 노력할게요!”

큰 격려라도 받은 듯 눈빛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한미의 모습에 좌자전은 헛기침하며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의사가 되겠다니, 무슨 상황입니까. 노력만으로 의사 되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옛말에 의사가 되려면······.”

“저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한미는 좌자전의 말을 끊고 다시 반복했다.

“노력할게요!”

“의사가 되려면 의대부터 나와야 하고요. 면허 따고 실습 기간도 있어요. 이걸 다 해도 가장 밑바닥 레지인데, 그 나이에 그럴 가치 있겠어요?”

좌자전의 말투는 몹시 심각했다. 중대한 인생 결정이라서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아가씨를 상대로도 매우 진지했다.

“인생에 영향을 주는 일이에요.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좌자전이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자, 한미는 겨우 고개를 돌리고는, 졸임 계란 같은 노쇠한 그의 겉가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좌 선생님이시죠?”

“아, 응. 나 알아요?”

“인터넷에 있더라고요. 좌 선생님도 지금 레지 아니에요? 마흔 넘어서 레지인데, 그럼 선생님은 그 나이에 그럴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좌자전은 순간 멈칫했다. 그럴 가치가 있나? 경제면만 생각한다면 그의 선택은 처음엔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리라. 그러나 인생이 경제적 가치만 따질 수 있나.

“노력만으로 하려면······.”

좌자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힘들 거예요. 위생 병원에서 밑바닥 의사나 할 수 있을 거고. 돈도 아마 청소하는 것보다 못 벌지 몰라요. 게다가 윗분들 성질은 다 맞춰줘야 하고. 마누라도 무시하고, 아들은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고······. 운이 좋아서 견뎌냈다고 해도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 황금기는 끝났고, 옆에 동기는 하나도 없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요?”

좌자전의 설명을 듣는 한미의 눈빛은 단호함에서 동정으로 바뀌어 갔다.

좌자전이 말을 마치자 한미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말을 툭 내뱉었다.

“여자는 보통 엄마 되는 거 싫어해요.”

좌자전은 멍해져서 한미를 바라봤다.

“자기 장점을 참 잘 아네요.”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한미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능 선생님! 노력할게요!”

말을 마친 한미는 그대로 밖으로 달려갔다. 좌자전은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서 뒤에서 고함쳤다.

“수술 복도에서 뛰지 말아요! 부딪치지 말고 걸어서 가라고요!”

“아, 알았어요! 미안해요!”

한미는 서둘러 말하고는 주변을 살피면서 잰걸음으로 걸었다.

“의사는 처음엔 만날 욕 먹어요!”

“안 무서워요!”

좌자전이 뒤에서 다시 고함치는 말에 한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고집불통이네.”

좌자전은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서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의사가 되겠다고. 능 선생, 좀 말리지 그랬어.”

“어떻게 말려요?”

능연은 정말로 어리둥절했다.

“됐다. 어쩌면 잠깐이겠지.”

좌자전은 다시 고개를 젓고는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저 나이에 청소일 하는 거 보면 대학은 아예 안 들어간 거 같은데, 그럼 대학 준비를 아예 다시 해야 하는 거고, 다른 건 몰라도 수학만으로도 죽을걸? 요즘 대학은 쉬운 덴 쉬워도 어려운 데는 엄청 힘들 텐데.”

“목표가 그냥 의사라면 의대만 나와도 되잖아요.”

어둠속에서 나온 여원이 좌자전에게 한마디 했다. 좌자전은 우선 흠칫하고는 여원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님 그 말씀은 대입 시험이 안 어렵다는 건가?”

“본과는 어렵겠지만, 의대도 전문대 있잖아요. 그러니까 기준을 낮추면 노력으로 될지도 모르죠.”

여원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전문대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4, 6급 통과한 다음에 3학년 때 편입 신청하면, 전문대생을 받아주는 학교가 많진 않아도 없진 않아요. 그렇게 6년 뒤엔 졸업장 나올 거고, 박사 시험 보면 일단 첫 번째 학력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죠.”

“그래도 보통 첫 번째 학력을 보잖아.”

“보라면 보라죠. 난 저 아가씨 응원해요. 능 선생, 너는?”

여원은 입을 삐죽이며 물었고, 좌자전도 능연을 바라봤다. 생활이 무미건조한 외과 의사에게 한미는 매우 재미있는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래도 운화병원에 들어갈 거 같아요. 운화 날씨나 음식이 다 잘 맞으니까. 운화 대학 의대 조건도 좋고.”

“능 선생, 우리는 난도 문제를 고민하고 있거든.”

좌자전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난도요?”

“대입 고시 난도겠죠?”

“아.”

능연에게 익숙한 사람은 지금 능연의 표현 방식이 매우 익숙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사회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간단한 대답을 해드릴게요, 그래야 분위기가 썰렁해지지 않으니까요, 이런 느낌?

좌자전과 여원은 몸이 다 떨리는 기분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잘생긴 것뿐만 아니라, 대입 시험도 고생 없이 친 사람도 있는 거였어?

그런 생각을 하자, 좌자전은 못난 머리카락이 못난 머리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여원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홍랑은 아쉬워하며 능연 일행을 공항으로 배웅하고는 게이트 앞에서 그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는 바로 수하 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다들 능 선생 좀 배워. 능 팀 의사들이랑 간호사들도. 장점은 흡수하고 단점을 버리면서 잘 배워 보라고.”

“예, 주임님.”

수하 의사들은 별 심리부담 없이 무 주임이 하는 말에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하는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능 선생이 밤낮없이 수술하면서도 하나도 차질 없이 모든 스텝을 끝내는 것 봐.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정말 쉽지 않아. 저러니까 어린 나이에 간 절제 대가가 됐지.”

무홍랑은 연신 감탄했다.

“24시간, 또 24시간 이어서 수술하라는 게 아니야. 능 선생 절반만 진지해도 나는 만족한다.”

“예.”

수하들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혹시 무홍랑이 찍어서 불러낼까 봐 반항하는 말은 끽소리도 못했다.

잠시 기다려도 수하들이 대답만 할 뿐, 행동하지 않자 무홍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질투도 나고 밉기도 하고 또 외과 의사의 자존심, 큰 주임의 자부심 등등 때문에 능연이 조금 껄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자잘한 감정은 모두 사라졌다.

능연과 그의 팀은 수술광이라 며칠 동안 한 간 절제 수술이 부대항 제일 병원 한 분기 수술량보다 많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부대항 제일 병원 간담췌 외과 이번 달 보너스가 지난 분기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주임인 무홍랑은 더욱 수입이 크게 늘었고. 그에 비교하면 능연과 능연 팀에게 돌아간 출장 수술비는 많은 편도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도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감정을 다스리는 게 문제가 아닐뿐더러, 진심에서 우러나 능연을 칭찬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가자.”

무홍랑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정신 좀 차려. 돌아가서 환자 예후 잘 챙기고, 차트도 똑바로 잘 정리해서 능 선생한테도 보내. 시간 나면 계속 환자 좀 구해보고. 능 선생이 우리 병원에서만 출장 수술하는 거 아닌 거 다들 잘 알지? 요즘은 경쟁 시대야.”

“예!”

드디어 잔소리가 끝나자, 다들 그제야 정신을 조금 차리고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능연은 막 이륙한 비행기에서 수십 시간 만에 벌어온 중급 보물 상자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완벽한 수술 퀘스트 1에서, 또 하나는 지금 막 마무리한 1-1에서 얻은 것이다. 즉, 능연은 부대항에 두 번 온 동안 완벽한 수술을 모두 7번 완성했다는 뜻이었다.

능연은 바로 상자 여는 데 급급해하지 않고, 비슷한 듯 다른 7번의 수술 과정을 비교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능 선생님, 식사는 뭐로 드릴까요?”

스튜어디스가 달콤하게 웃으며 능연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열심히 그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능연의 비즈니스 좌석은 지상 근무 직원이 업그레이드해 준 것으로 원래는 무릎 꿇고 서비스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스튜어디스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이니 아무도 어쩔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좌석이 업그레이드되어도 원래 제공되는 이코노미 식사가 아니라 비즈니스 식사로 제공되는 것도 상대 마음이었다.

“물이랑 간식 좀 주시면 됩니다.”

능연은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거두느라 허공에서 손을 휘둘렀다. 스튜어디스는 전혀 이상해하지 않고 능연의 손가락이 아름답고 동작이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물이랑 간식이요, 네, 알겠습니다. 얼음 넣어드릴까요? 오늘 간식은 견과, 빵과 잼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능연은 미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들고 온 플레이트엔 견과, 빵과 잼 외에 요거트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능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요거트는 제가 가지고 온 거예요. 맛있더라고요.”

요거트를 보통 답례로 쓰는 능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도평 여사의 지도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 네, 감사해요. 그럼, 이거 받으세요.”

“아……. 네, 감사해요.”

능연이 건네주는 견과를 놀라며 기쁘게 받은 스튜어디스는 견과를 가슴에 넣고는 비틀비틀 커튼 안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쫑알대기 시작했다.

“지금 너 꼬시는 거야?”

“아, 몰라, 꼬심 당해서 매우 기쁨!”

“야, 질투 그만해!”

마찬가지로 비즈니스석에 앉은 좌저전이야말로 질투가 나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가 지금 앉은 자리는 혹시 만석이라 능연이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받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사두는 능연의 보유석이었다. 아무래도 집도의의 휴식 시간은 보장되어야 해서, 상대 병원에서 이 정도 비용은 부담하곤 했다.

그러나 운화를 오가는 비행편은 대부분 만석인 때가 없고, 그 자리는 거의 좌자전이 즐기게 된다. 다만 가끔은 그런 즐거움 차라리 마다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특히 할인 없는 비즈니스석을 사고 항공사 골드 카드를 들고 있어도 업그레이드 받고 올라온 능연보다 못한 서비스를 받을 때면, 좌자전의 마음은 늘 그렇게 침체하곤 했다.

“패드 주세요. 별 다섯 개 환자 영상 틀어서요.”

요거트를 홀짝인 능연은 수술 과정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옙, 바로 드리죠.”

좌자전은 머릿속 가득하던 잡생각을 날려버리고는, 몇 시간이나 들여 힘들게 배운 스킬로 패드를 열어 수술 동영상 폴더를 찾아냈다.

“노트북도 꺼내주세요. 두 개 같이 틀고 비교해야겠어요.”

패드를 받은 능연은 곧 매우 진지하게 영상을 봤다. 경험을 취합하는 건 어느 업계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지만, 외과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임상 의학은 매우 장기적으로 학습하는 영역이다. 생각만 하고 연습은 안 하는 사람, 연습만 하고 정교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적절히 섞어야만 뛰어난 외과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외과 영역에서 가장 흔한 의사는 사실 한 가지 수술 방식을 사용하는 의사다. 젊었을 때 어떻게 살아남았든지, 이런 의사가 노년기에 접어들면 기술도 종종 정체한다.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수술 실력이 점점 더 노련해지고,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아도 사실은 수술 중 조작도 점점 간단해지고 형식화된다.

진상을 잘 모르는 환자와 보호자, 심지어 초짜 의사와 간호사 모두 이런 의사를 꽤 좋아한다. 수술이 빠르고, 중간에 문제가 생길 일도 드물고, 모두의 기본적인 요구에 맞기 때문이다. 퇴근만 기다리는 간호사는 어쩌면 남들 앞에서 그 의사를 칭찬할지도 모른다.

이런 의사들은 기술이 정체한 상태에서 수술을 빨리 끝내려고 종종 스텝을 간단히 하거나, 단순히 수술을 편하게 하려고 큰 절개구를 내거나 하는 규칙에 위반되는 일도 적지 않게 한다.

물론, 이런 의사들도 고충은 있다. 열정 이런 건 일단 접어두고, 사람이 중년이 되면 누구나 선생을 둘 수 있는 행운이 따르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 스승의 수준이 어떠냐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이다.

능연도 사실 유사한 상황에 부딪쳤다. 그는 지도 선생을 배정받기도 전에 알아서 실습생 신분에서 벗어났다. 시스템이 쉴 새 없이 스킬을 주고 있지만, 이런 방식은 직접 경험하며 배우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능연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시스템에서 더 새롭고 더 높은 스킬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연습하고 기술을 연구하는 열정은 전혀 줄지 않았다.

“모든 환자 예후 다 살피세요. 특히 이 환자들, 수시로 상황 보고하시고요.”

능연은 영상 속의 조작을 곱씹으며 생각하면서 또 좌자전에게 명령도 내렸다. 좌자전은 일단 대답부터 하고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능 선생, 출장 수술한 환자는 사실 우리가 간섭하기 좀 그래.”

“왜요?”

“다른 사람 환자잖아.”

“수술은 해도 되고, 예후는 관여하면 안 돼요?”

좌자전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생각해 봐, 옆집 이씨 마누라가 바람을 피워서 한 번은 참았어, 그런데 그 옆집 왕씨가 하고한 날 와서 자식 교육을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면 이씨가 당연히 터지겠지?”

능연은 좌자전식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 듯 좌자전을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찌 됐든……. 어떻게든 환자 상황 알아는 볼게.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해. 오케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좌자전은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심 안도했다.

능연은 내내 동영상을 보다가 비행기가 착륙할 때가 되어서야 패드와 노트북을 덮고 좌자전에게 건네고는 본인은 보물 상자 두 개를 열었다.

하나는 예상한 대로 4시간 가상 인간이었고 또 하나는 예상도 못 한 ‘부분 해부 경험- 심장 해부 1,000번’이 나왔다.

마침 심장 쪽 경험이 필요하던 능연은 살짝 기뻐했다.

“심장 해부 좀 해야겠어요.”

능연이 혼잣말 가깝게 좌자전에게 하는 말에, 착륙 준비하려고 막 커튼 뒤에서 나오던 스튜어디스가 물었다.

“어떤 심장 해부요?”

아까부터 끼어들고 싶던 승객도 드디어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어떤 심장을 해부하고 싶은데요?”

스튜어디스는 희롱이라도 당한 듯 놀라서 승객을 흘겨보고는 다시 커튼 뒤로 돌아갔다. 잠시 후, 안에서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는데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았다.

상해.

공항 밖, BMW 530 한 대와 파사트 몇 대가 능연 일행을 태우러 나와 있었다.

연문빈이 두 번째 차량인 파사트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자, 좌자전은 남은 자리를 싫다는 듯 힐끔 보고는 과감하게 앞으로 걸어가 BMW 차 문을 열었다.

“능 선생, 나도 여기 탈게. 마침 능 선생이 좀 봐야 할 전자 문건도 있어.”

능연이 지금 장악한 능 치료팀은 수술량만 따지면 운화병원에선 대형 진료과이고, 관여된 인력, 재정 문제도 상당히 방대해져서 좌자전은 능연에게 내밀 문건 정도는 잔뜩 가지고 있었다.

능연이 문서를 다 확인했을 때, 좌자전은 이미 다리를 길게 뻗고 온도도 적당하게 조절하고는 기사 노릇 중인 의사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다 개인차로 마중 온 거죠? 개인차였으면 마중 안 와도 되는데, 그냥 택시 타고 가면 될걸.”

“아우, 아닙니다. 멀리서 오는데 택시 타고 오시다니. 축 원사님이 그런 말씀 들으시면 몇 시간 동안 욕먹을 겁니다.”

기사 노릇 중인 의사는 웃으며 덧붙였다.

“고물차라서 죄송할 뿐이죠.”

좌자전은 정말로 죄송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에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차도 없는데요, 고물차라뇨. 그나저나, 당당한 상해 정상급 삼갑 병원 의사치고 차가 그렇긴 하네요.”

“우리가 무슨 정상급 삼갑 병원이에요. 우린 분원이잖아요. 윗분들이야 편하겠지만, 아래 의사들은 다 고생스럽죠. 상해는 물가가 비싸서 차 사려면 대출 내야 해요.”

“이 BMW만 해도 좋은 데요 뭘.”

좌자전은 엉덩이 아래 깔린 가죽을 문질러 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기 주임님 차입니다. 능 선생님 오신다니까 특별히 내주신 거예요. 제 차는 정말로 고물이거든요.”

“기 주임님이요?”

좌자전은 그 말에 이곳저곳 살폈다. 4, 50만짜리 BMW는 일반인에게는 좋은 차일지 몰라도, 기천록의 차라니, 정말로 소박해 보기긴 했다. 이미 유명한 골과 의사고, 평소에 출장 수술로 버는 돈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히 골센에서 버는 월급, 보너스만 해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기사 노릇 중인 의사는 좌자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히죽 웃었다.

“주임님이 모시기엔 정말 별로죠?”

“우리 운화에서는 좋은 차죠. 그런데 상해 의사는 아무래도 돈을 더 벌 테니까.”

좌자전은 그렇게 말해놓고 냉큼 덧붙였다.

“그렇다고 돈 있다고 바로 고급 차를 살 순 없겠죠. 530만 해도 이미 좋은 차고.”

“돈 많은 대빵도 있죠. 상해에서 수영장 달린 빌라라니. 저도 처음에 가보고 입이 떡 벌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의사가 되겠다고 더 단호하게 결심했고.”

겸직 의사는 룸미러로 좌자전과 능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출장 수술 어시 자리 하나 얻어내는 것만 해도 평생 노력해야 한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죠.”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좌자전은 웃으며 자기를 가리켰다.

“운 좋으면 2, 3년 만에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한창 운전 중이던 의사는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고 추돌 사고를 일으킬 뻔하고는 재빨리 핸들을 꼭 잡고 룸미러를 힐끔 봤다.

“아이고, 대빵의 농담은 참 재미있네요.”

“어느 부분이 농담이라는 건지.”

좌자전은 조금 언짢아졌다.

“설사 해외 유학파라고 해도 쉰…… 마흔예닐곱에 겨우 병원에 들어왔을 리가 없잖아요.”

잠시 멍해졌던 좌자전은 한참 만에 겨우 무슨 뜻인지 깨닫고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니까 내가 쉰 넘어 보인다는 거네요.”

“아니에요. 마흔예닐곱으로 보여요. 아까 제가 실수했네요. 네네, 마흔예닐곱으로 보여요.”

겸직 의사는 또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 의사들은 원래 좀 노안이잖아요. 게다가 능 선생님은 응급이잖아요. 아니아니, 이건 더 힘들지. 아니면 능 선생은 지금 열 몇 살로 보일 텐데.”

“그러니까, 내 얼굴이 사실은 쉰예닐곱으로 보인다는 말씀?”

좌자전은 조금 연연하는 듯 물었다.

“그냥 대충 얘기한 거예요.”

아무리 겸직이라고 해도, 사람 마중 온 기사 양반은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좌자전은 한참 후에야 미묘했던 표정이 다시 돌아와서 자조하듯 웃었다.

“따지는 게 아니에요. 요즘 선 몇 번 봤는데 계속 실패했어요. 몇 번은 욕도 먹었거든요. 그래서 생긴 게 문제가 있나, 너무 나이 들어 보이나, 생각하던 참이라.”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속으로 그 나이 먹고 얼굴에 문제 있는 걸 아직 모른다는 게 진짜 문제라고 생각했다.

작은 차량 행렬은 쭉 골센 안으로 들어간 다음, 바로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코너를 꺾더니 우선 맞은편 체육관으로 향했다.

좌자전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고 기사를 신중하게 바라봤다. 상해 치안은 그래도 믿을 만하지만, 차에 능연이 타고 있으니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이 녀석을 팔아 버리면 큰돈을 벌게 되리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좌자전은 문득 자기가 요즘 생각을 너무 하지 않고 고민이 없어서, 세상의 어두운 면과 위험성을 너무 무시했다고…….

“설 선생님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시네요. 역시 능 선생님입니다.”

겸직 기사가 앞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설호초는 축동익의 직계 제자로 나이는 어리지만, 축동익 비서 생활을 하며 지위도 업무량도 만만치 않았다. 기사는 차를 문 앞에 세우고는 본인도 내린 다음 함께 대기했다.

“능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설호초는 전보다 열정적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나이가 들어서 부끄러움이 좀 줄어서인지도 모른다.

“간 절제가 시간이 좀 걸려서요.”

능연은 이야기하며 체육관을 올려다봤다. 전에 유위신 검사할 때 자주 왔던 곳이고 꽤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좌자전 역시 규모가 거대한 체육관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설 선생, 바로 이쪽으로 온 걸 보면 환자가 여기 있나 봐요? 엄청 유명한 VVVVIP라던가?”

나이 많은 좌자전이 V를 여러 번 반복하니 꼭 말을 더듬는 것 같았지만, 눈빛만은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설호초는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능 선생님이 관심 있으면 유명 운동선수도 준비할 수 있죠. 다만 오늘은 트레이닝 중인 선수들 협진해야 해서 여기로 온 겁니다. 이 체육관에 설비가 잘 되어 있어서 병원에서 하는 것보다 편할 거예요. 능 선생님만 괜찮으시면 검사부터 한 번 하고 오늘 할 만한 수술은 바로 병원으로 보내서 하고 안 되는 건 나중에 하려고요.”

“당일 수술 범위가 더 넓어졌습니까?”

당일 수술이란 그날 수술을 마치고 바로 퇴원하는 수술이다. 당연히 이런 수술은 어떤 환자냐보다 어떤 의사인지가 더 중요했다.

국내에서는 당일 수술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에서 비준한 수술 종류는 다해서 56가지로, 허용된 수술도 많지 않았다. 골과에서는 기껏해야 금속 재료 꺼내거나, 건초낭 같은 소수 몇 개뿐이었다.

관절경 진료도 당일 수술 범위 안이었고, 반월판 손상이 바로 표준적인 관절경 진료였다. 그러나 능연이 하는 아건 보건술은 개방성 수술이라 그렇게 물은 것이다.

설호초는 잠시 뿌듯해하다가 대답했다.

“당일 수술 범위라는 게 원래 권장하는 거고, 범위에 없는 수술을 해도 완전히 불법은 아니에요. 능 선생님이 하기만 한다면 축 원사님이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축 원사님은 능 선생님이 이런저런 시도해 보길 바라고 계셔서…….”

이게 바로 초대형 능력자의 대단한 점이었다. 당일 수술 범위라는 것도 사실 초대형 능력자가 하나 혹은 둘이 만들어 낸 것이고. 정식으로 허가받기 전에 축동익이 여러 가지 수술 유형을 시도해 보겠다면, 국가에서는 허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한다. 축동익 같은 의사가 적극적으로 수술 종류를 개척하지 않으면 해당 수술은 발전할 수 없기도 한다.

“그건 좋네요. 언제부터 당일 수술 범위를 확장하신 거예요?”

능연이 매우 흡족해하며 묻는 말에 설호초가 멈칫했다.

“어제요.”

“우연이네요.”

능연은 저도 모르게 웃어 보였다. 물론, 인생에서 각종 우연을 자주 접하는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설호초는 따라 웃으며 속으로 침대는 아마 모자라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진료실’ 팻말이 붙은 쌍여닫이 문을 열자, 시큼한 땀 냄새가 훅 느껴졌다. 그리고 족히 열 명은 되는 운동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맨 앞에 있던 좌자전은 그 냄새에 들어오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막 운동을 끝낸 젊은이, 아마 샤워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발도 제대로 닦지 않고 불려 왔을 텐데, 이 통풍도 안 되는 비좁은 방에 한데 몰려서…….

“구역 구분이 안 되어 있나요?”

좌자전이 불만스러운 듯 설호초에게 물었다.

“아, 여기는 대기실이고 안쪽이 검사실입니다.”

“그래도 너무 간소하네요. 센터 명성과 달리요.”

“그게 환자들이 다 여기에 있어서…….”

설호초는 준비된 진료실이 능연의 명성에 맞지 않는다고 돌려 말하는 좌자전의 말을 알아듣고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말씀하셨죠. 잘못된 건 아니고요.”

좌자전은 웃으며 설호초의 말을 잘랐다.

“그래도 정리는 좀 할 수 있고, 환자도 이렇게 한 번에 모아두지 말고 시간을 나눠서 데리고 올 순 있죠. 그렇지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좌자전의 요구가 조금 까다롭긴 했다. 지금은 체육 시설은 둘째치고 삼갑병원 진료실도 환자들이 꽉꽉 차 있으니 말이다.

시간을 나누는 병원이 있으면 환자와 의사 모두 편하기야 하겠지만, 출장 수술하는 의사가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사실 별로 할 말이 없게 된다.

하지만 좌자전은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좌자전이 보기엔, 설호초의 태도가 좋고, 예의를 갖춰 말하긴 해도 전체적인 대접은 작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정상적 상황이라면, 축 원사의 마지막 제자인 설호초가 이 정도로 준비해주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건 정상적인 상황이고, 능연은 지난 일 년 넘게 정상을 훨씬 넘어선 일을 많이 했었다.

지금은 각 병원이 능연 팀에 대한 대우 수준을 올리고 있어서, 여기 센터의 대우가 더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능연이 조금 더 빈번하게 온다면 설호초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만, 좌자전은 설호초를 깨우치게 해줄 생각까지는 없었다. 상대가 축 원사라면 좌자전이 입을 뗄 자격이 없을지 모르지만, 설호초 같은 애송이 상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할 시간, 느끼고 또 느낄 시간을 많이 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좌자전은 생각했다.

“설 선생, 우리 쪽 사람도 많아서 다 들어가지도 못해요. 다시 시간을 좀 짜볼까요?”

좌자전은 그렇게 말하면서 뒤에 들어온 연문빈을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 선생, 연 선생이 일단 초진하고 분류 좀 해줘.”

“다 같이 하죠.”

한 소리 들은 설호초는 무슨 뜻인지 바로 깨닫고 서둘러 자기네 의사를 불렀다. 어리둥절하게 불려온 연문빈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여원을 끌어당겼다.

“좌 선생님 왜 저러는 거? 우리 병원 진료도 이렇잖아.”

“우리 병원 진료가 떠들썩할 땐 있지만, 적어도 시큼큼하진 않잖냐.”

여원은 연문빈을 뿌리치며 말을 이었다.

“좀 살살 잡아. 이러다 들어 올리겠다.”

연문빈은 머쓱한 듯 손을 풀며 사과했다.

“아, 미안. 너무 급해서. 그나저나 시큼큼까지는 아니지 않냐. 그냥 땀 냄새 좀 나는 거지.”

“땀 냄새 좀?”

“인정할 건 해야지. 운동해서 흘린 건강한 땀 냄새는 맡기 좋지 않냐?”

연문빈은 자신의 인생관이 달린 문제라서 따질 수밖에 없었고, 여원은 저절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운동해서 흘린 건강한 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칠 때까지 운동하다 들어온 냄새가 숙뇨보다 구린 건 알겠다.”

“숙뇨……?”

“발효된 오줌. 뭔 줄 알았는데?”

여원이 싸늘하게 연문빈을 바라봤다.

“아니, 상상도 하지 않았어.”

능연은 진료실 입구에만 서 있다가 바로 좌자전 손에 이끌려 옆으로 가서 앉았다.

능연 본인도 냄새나는 환경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응급 진료실이라면 근육, 근건이라도 해부하는 거로 기분을 풀 수 있지만, 이런 유사 진료 같은 활동에선 굳이 그런 곳에 머리를 들이밀 필요가 없었다.

얼마 후, 좌자전이 진료실을 새로 단장한 후 능연이 다시 들어갔을 땐 진료소를 하나 다시 연 것 같아졌다.

“첫 번째 환자 들어오라고 해요.”

좌자전 말대로 초진 후 분류한 환자였다.

“설 선생이 준비해준 환자. 슬관절 손상이랑 아킬레스건 손상 위주더라고. 첫 번째 환자는 29살, 무릎 인대를 한 번 손댄 적 있고.”

“사진은 찍었어요?”

능연이 말을 자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찍었지. 벽 가득이야.”

좌자전은 진료실에 뷰라이트까지 들였고, 지금 한쪽 벽면 전체에 준비된 뷰라이트 4개에 모두 한 환자의 X-ray, MRI가 걸려 있었다.

“수술해야겠네요.”

능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운동선수가 29살이면 나이가 많은 편으로, 눈은 전쟁 경험이 많은 노장처럼 노련했고, 몸도 노장처럼 허약했다.

능연은 환자를 손으로 짚으며 신체검사를 하고, 혈액 검사 결과 등도 살펴본 후에 좌자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액 며칠 투여하고, 바이탈 안정되면 수술해요.”

환자가 약을 먹는 사람이라는 말임을 좌자전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차트에 자신만의 표식을 과감하게 기록하고는 환자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에 대략적인 수술 시간을 전했다.

그리고 환자가 나간 후에 좌자전은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설 선생, 약 먹는 운동선수까지 불러오면 안 되죠. 우린 며칠 후엔 돌아간다고요.”

“당일 수술만 고려하시는 거군요. 미안합니다.”

설호초는 사과만 할 뿐, 해결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이것도 센터와 무신 시 1병원 혹은 부대항 1병원 등 병원과 다른 점이었다. 능연의 출장 수술을 허락한 것은 이미 축 원사가 그만큼 능연을 존중한다는 뜻이긴 하나, 다른 작은 병원처럼 전문화된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능연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원래 수술하러 온 거라서, 설호초의 태도가 어떤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음 환자 들어오시라고 해요.”

능연이 자기 노트에 ‘5’라고 적는 모습에 좌자전은 깜짝 놀랐다.

“이런 환자도 별 다섯이야? 약통인데?”

능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약물을 좀 쓰긴 했어도, 며칠 전에 한 환자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아요.”

“잉? 그래?”

“수술 기존 조건은 비슷해요. 게다가 관절경 수술은 원래 조건이 낮으니까.”

능연은 더욱 만족스러워졌다. 똑같은 ‘완벽에 가까운 수술’이라고 해도 슬관절경 같은 작은 수술이 달성하기 쉬우니까. 그런 면으로 보면 시스템에서 배포하는 퀘스트도 상당히 쉬운 편이었다.

그 생각에 능연은 시스템 인터페이스를 불러내 쿡쿡 찍었다. 어항 안의 물고기와 장난치면서 보상해주는 것처럼.

시스템 화면이 호수에 이는 잔물결처럼 살며시 흔들렸다.

“능 선생님, 선생님이 직접 수술하시는 거죠?”

이번에 들어온 건 스물 남짓한 여자 운동선수로, 허리가 가늘고 다리가 길쭉했다. 여자 선수를 힐끔 본 연문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스타일은 마침 그가 좋아하는 열여덟 유형 중 하나인지라, 자꾸 눈길이 가서 재빨리 차트를 훑어보고는 없는 말도 만들어 내서 말을 걸었다.

“하가 씨? 우리 능 선생 알아요?”

“당연하죠. 나도 인터넷 하거든요!”

운동선수 하가가 시원스럽게 웃어 보였다.

“유위신, 지난달에 또 일등 했잖아요. 능 선생님이 한 아킬레스건 수술은 매우 튼튼하다는 거, 선수라면 다 알아요.”

“환자분도 아킬레스건 문제?”

연문빈은 마음 아파서 입을 삐죽이면서, 상처를 살펴보는 척 몸을 일으켜서 오른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왼팔은 테이블에 턱 올려서 38cm 팔뚝과 근육을 과시했다.

“난 인대예요.”

하가는 연문빈의 팔뚝을 힐끔 보고는 바로 자신의 소매를 걷더니, 살짝 팔뚝을 말아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연문빈은 유치원 리그전 2등 한 학생이 처음으로 초등학생 운동회에 참가한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고분고분해졌다.

하가는 이미 능연에게 집중하며 다시 물었다.

“능 선생님, 제 무릎 인대, 고질병이에요. 그동안 보존치료 했는데, 능 선생님이 해주신다면 수술하려고요.”

“네, 수술해도 돼요.”

능연은 하가라고 적힌 차트를 뒤적이고는 상대가 준비해온 MRI도 보고 바로 판단을 내렸다. 설호초가 접대 면에서 초짜 같긴 해도,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의 전문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전문가가 선별한 환자이니 수술 징후 쪽으로는 기껏해야 상의해야 할 점이 있을 뿐, 두드러지는 착오는 없다.

그리고 능연의 평가 기준으로 봐도, 눈앞에 이 환자 하가 역시 전형적인 별 다섯 개 환자였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병력이 클리어하고, 병세도 간단하고. 심지어 수술 후 재활 문제도 운동선수라서 훨씬 간단해진다. 고강도 운동을 버티는 선수들이라서 재활에 적응하는 건 문제도 아니니까.

능연이 이렇게 시원스럽게 대답할 줄 몰랐던 하가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이게 다예요?”

“네. 답니다.”

“다른 검사 안 해요?”

하가는 핸드폰이라도 꺼내서 보여주고 싶은 표정으로 집요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자세하게 검사하잖아요.”

“환자분 증상은 명확해서요. 무슨 검사하고 싶으신데요?”

능연이 반문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가는 능연이 쳐다보는 눈빛에 온몸이 붉어져서, 한순간 전문 용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CT 말씀인가요? MRI로 더 클리어하게 볼 수 있어서 CT를 꼭 하는 건 아니에요.”

연문빈이 다시 끼어들었다. 능연이 보통 환자 MRI를 요구하는 걸 센터 의사들도 잘 알고 있어서 미리 MRI를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중하거나 혹은 돈이 궁하지 않은 환자는 MRI를 찍은 후에 CT를 다시 찍어도 반대하진 않는다.

검사마다 특징이 다르니 제공하는 정보가 당연히 달라서, 간 절제 같은 수술을 할 때는 능연도 CT까지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가는 고개를 젓고는,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요. 의사 선생님이 직접…….”

“직접?”

“만지는…… 그러니까 손으로 직접 하는 검사요!”

하가는 지금 자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어휘로 원하는 바를 묘사했다.

“아아, 신체검진이요.”

연문빈이 깨달은 듯 대답하고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맞아요, 신체검진.”

하가는 벌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들 그러더라고요. 능 선생님은 환자한테 신체검진 해준다고. 그리고 가끔은 매우 자세히 해준다고. 맞죠?”

“환자분은 무릎 쪽만 하면 돼요. 그럼 검사 베드로 가세요.”

능연은 당연히 검사하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수술까지 해야 하는 환자니까 말이다.

하가는 조금 실망하다가 곧 신이 나서 바로 침대로 튀어 올라가서 살짝 다리를 열고 앉아 능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어떤 상황에선 전신 검사하는데요?”

능연은 순간 멈칫했지만, 다행히 희한한 질문에 익숙해서 그저 우아하고 고상하게 웃어 보였다.

“왜 전신 검사하고 싶은데요?”

하가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고, 인터넷에서 본 공략에 나와 있는데 자기도 느껴보고 싶어서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니 능연도 당연히 다시 물을 리 없고, 묵묵히 무릎 검사를 진행했다.

“네, 짐작한 대로네요. 오후에 수술하기로 해요. 나중에 좌 선생님이 잘 설명해 드릴 거예요.”

“오늘 오후요?”

하가는 드디어 긴장하기 시작해서 온몸이 다른 농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일 없으면 수술은 빠를수록 좋아요. 굳이 끌 필요 없죠.”

“하지만 조금 빠른 거 같아요…….”

하가는 이런 말을 수술할 때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좌자전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환자분이 줄을 앞에 서서 그래요.”

“예?”

“환자분 뒤에 줄 선 선수들도 다 능 선생한테 수술받으려고 온 거잖아요. 환자분이 조금 늦게 왔으면 내일로 수술 잡혔을 거라고요. 열 몇 개 더 밀렸으면 모레쯤? 아시겠어요? 일찍 오셔서 일찍 수술하는 게 환자분한텐 좋은 거예요.”

좌자전이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하는 말에 하가는 그제야 그렇구나 했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좌자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같이 나가시죠.”

하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자전을 따라 나갔다.

연문빈은 좌자전이 유들유들하게 환자를 데리고 나가는 걸 보고 절로 고개를 저었다.

“좌 선생님은 저렇게 말발이 좋은데 아직 솔로라니.”

“입만 산 사람도 솔로, 근육만 산 사람도 솔로. 그게 뭐 이상할 일이냐.”

여원이 비아냥대는 말에 연문빈은 흘깃 그녀를 노려보고는 말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료실엔 진료받으러 온 선수들이 줄을 이었다. 수술할 필요 없는 선수는 팀 닥터에게 보내고, 필요한 선수는 시간 배정하고, 진행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설호초는 협진이라고 했지만, 그쪽 의사는 주치의 둘이 함께 있을 뿐이어서 협진이라고 하기엔 배우러 온 거에 가까웠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 같은 병원엔 환자가 끝도 없었다. 지금 이런 젊은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연줄이 없는 편이라, 능연이 와서 수술해주는 것으로 그들도 부담이 훨씬 줄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능연은 사람들을 데리고 센터 수술실로 들어가 당일 분 수술을 시작했다. 줄곧 곁을 따르던 설호초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능 선생 모시고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너무 촉박하네요.

“능 선생은 바빠도 우린 한가한데요.”

팀 인원에 훈련의 둘까지 데리고 와서 한 테이블 채우기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연문빈이 한마디 했다. (*역자 주: 중국은 단품으로 먹는 작은 식당도 많지만, 보통 식사하러 가면 메인 요리, 곁들임 채소, 탕 등 여러 가지 시켜서 다 함께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우 어려운 자리가 아니면, 때론 일부러 사람을 채우려고 아는 사람을 불러서 함께 먹기도 합니다.)

“능 선생 식사 대접하면 서로 밥 사겠다고 난리잖아요. 선생님들 대접하면 내 손해예요.”

설호초가 손을 휘휘 저으며 하는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설호초는 바로 조금 정색하면서 나지막이 물었다.

“농담 아니고요, 능 선생 저녁 대접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생각 있으세요?”

연문빈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봤다.

“나도 부탁받아서 그래요. 새로 들어온 동료들이 있는데, 다들 능 선생이 궁금하대서.”

“여자죠?”

“네.”

설호초가 솔직하게 인증했다.

“그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렇죠.”

떠보듯 묻는 말에도 솔직하게 대답하는 설호초의 모습에 연문빈은 조금 놀라서 물었다.

“뺏기면 어쩌려고. 아…… 능 선생이 그러진 않겠지.”

“그런 접근 자체가 잘못됐죠.”

“잘못? 그럼 선생님은 무슨 생각인데요.”

“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설사 능 선생이 가로챈다고 해도 다 가로채겠어요?”

설호초가 뿌듯한 듯 웃어 보였다.

“난 하나만 남으면 되잖아요.”

무시하는 눈빛으로 설호초를 보던 연문빈의 눈빛이 점점 감탄으로 변했다.

이 자식은 정말로 솔로 탈출할지도 몰라.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 당일 수술 센터.

새 건물에는 수술실 총 5개가 일자로 나열되어 있었다. 수많은 스테인리스와 과한 양의 불빛과 20명 넘는 의료진이 오가는 것만 봐도 축동익이 이곳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학 센터 규모에서 수술 센터에 의료진 20명은 과한 숫자였다.

거기에 쉴 새 없이 실려 들어왔다가 실려 나가는 환자까지.

능연 일행이 수술 센터에 들어온 순간 첫 느낌이 ‘매우 시끌벅적하다’였다.

은백색 위주의 수술실도 과하긴 했다. 특히 가장 큰 수술실은 벽에 ‘졸부’라고 적어 놓지 않았을 뿐, 옆에 달린 작은 방에 CT와 아름다운 각도의 C-ram X-ray 기기, 그리고 Smith& Amp; Nephew라고 적힌 관절경까지 있었다.

일반적인 관절경이 손에 익은 능연은 쾌적한 고가 제품을 손에 들고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칭찬했다.

“역시 축 원사님, 기계를 참 잘 고르시네요.”

“부자잖아.”

연문빈도 곁에서 정리도 하고 수술실에 적응도 하면서 대답했다.

“그립감이 좋네요.”

“우리도 이 제품 있잖아.”

“그래도 수술실에 설치된 게 더 좋죠. 전문적인 정형외과 수술실은 다르네요.”

“원사님이 돈이 넘치는 거지.”

연문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돈 많을 텐데.”

능연이 갑자기 하는 말에 연문빈은 잠시 멈칫하고는 대답했다.

“우리가 많은 거랑, 축 원사님이 많은 거랑, 돈 개념이 다르다고.”

“왜죠?”

능연은 좋아서 손에서 놓지도 못하겠다는 듯 계속 얇은 관절경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이제야 부자가 된 거거든. 아직은 진료과 이윤으로 기기, 설비 사고, 보너스 주고, 게다가 병원에도 떼어줘야지. 나가는 돈은 많고 모이는 돈은 적어. 축 원사님은 보너스도 따로 받을 거고, 나라에서 병원에서, 여기저기 일 년에 들어오는 돈이 많다고. 게다가 축 원사님은 우리랑 급이 다르잖아.”

연문빈은 할 수 있는 한 설명했다.

나중에 새 기기와 설비를 사라고 능연을 종용한 걸 곽 주임이 알게 되면 아마 죽겠지 싶은 생각이 들자,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능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네요.”

그 말에 연문빈은 흥분해서 짐짓 겸손한 척 대답했다.

“그냥 별거 아닌 잡지식을 설명해드린 것뿐인데요, 뭘.”

“지식은 지식이죠.”

능연이 다시 하는 말에 연문빈은 점점 흥분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시더라고. 뭐든 많이 알아 두면 나쁠 건 없다고.”

“그만큼 일을 덜 한다는 거겠지.”

여원의 목소리가 수술실 유령이 하는 말처럼 으스스하게 아래쪽에서 들렸다. 연문빈의 뿌듯해 해던 근육이 ICU에 들어갈 사람처럼 그대로 굳었다.

“내가 언제.”

“연 선생, 평소에 족발 삶지, 헬스 하지, 그러고도 책까지 읽는다? 시간 관리 능력이 거의 신급이네.”

여원이 쿡 찌르는 소리에 연문빈은 입술까지 파르르 떨면서 능연을 힐끔 살폈다.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서 족발 삶는 거거든!”

능연은 속 모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여원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발 받침대.”

“아, 아. 깜빡했다!”

연문빈은 냉큼 알랑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한 번에 발 받침대를 4개 가지고 와서 가지런히 깔아 주었다.

“환자 들어오라고 하세요.”

모든 준비를 마쳤고, 또 자기 쪽 의사와 간호사가 기기, 설비에 익숙해진 걸 확인한 능연은 시작하자고 명령을 내렸다. 연문빈은 한시름 놓고는 능연이 어서 분주한 작업모드로 들어가서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길 바라면서 재빨리 환자를 부르러 갔다.

잠시 후, 하가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규정에 따라, 그녀는 휠체어를 들고 들어왔고 뒤이어 직접 차가운 수술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새하얗고 새하얀 천장, 그리고 이름 모를 금속들을 바라보며 점점 패닉에 빠졌다.

“능 선생님, 직접 수술해주셔야 해요.”

하가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 그 문제였다. 수술을 미루면서 보존치료를 유지한 것도 다 수술 후유증 걱정 때문이었고, 이번 수술로 앞으로 그녀의 생애가 크게 영향받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수술 성공하면 계속 운동선수 생활을 할 수 있고, 수술에 실패하면 선수 생명이 끝난다. 능연을 믿어서 바로 수술을 선택한 거지, 아니면 다른 유명한 의사한테 수술받았을 것이다.

능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직접 합니다.”

“꼭이에요!”

하가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한마디 하자, 능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마취의 소가복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심하세요, 약 투여할 거고, 잠깐 자고 일어나면 신세계가 열릴 거예요.”

힐끔 고개를 틀어, 조금 퉁퉁한 소가복을 본 하가는 싫은 듯 입을 내밀면서, 어디서 끼어드냐고, 같은 말이라도 능 선생님이 이야기했으면 재미있었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참, 어느 종목인가요?”

말문이 트인 소가복은 컴퓨터를 조작하며 물었다.

“축구요.”

“여자 축구요?”

소가복이 놀라서 묻는 말에 하가가 못 말린다는 듯 대답했다.

“난 시 축구팀 선수예요. 보통 보시는 여자 축구랑 달라요.”

“남자 축구도 안 보는데요.”

소가복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학교 때는 축구 좀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대입 준비하고 어쩌고, 학교에서 아예 체육을 없앴죠. 사실 체육 없앨 거까지 있나. 그런다고 공부를 뭐 얼마나 더한다고.”

그는 대입 성적 이야기를 꺼내려고 밑밥을 깔았다. 어찌 됐든 여자와 대화할 때 학창 생활 이야기하다 보면 공통점도 나올 것이고. 그러나 하가는 소가복의 볼록 나온 배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의사 되는 게 더 좋죠.”

“그건 환자분이 제 축구 실력을 못 봐서 그래요. 국내 일류였거든요.”

“국내 일류 축구 실력인 게 뭐 대단하다고.”

소가복의 허풍에 연문빈이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허리도 있고 다리도 있는 여자를 소가복이 독점하게 둘 순 없었다.

역시나 하가가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소가복은 더는 대화가 안 되자 할 수 없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고는 마스크를 들고 그대로 하가를 보내버렸다.

허리가 가늘고 다리가 긴 여자 운동선수는 그대로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세심하게 할 거예요.”

능연이 메스를 들고 연문빈에게 한마디 명령했다. 연문빈도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고 집도 횟수도 점점 늘었지만, 오히려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의 리듬을 따라오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연문빈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한마디 물었다.

“오늘 수술도 세밀화?”

“네.”

연문빈과 여원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능연이 요즘 기술 개선하고 있는 걸 능 팀 의사들도 알고 있었다. 수술 방식에 대한 이해는 부족해도, 세밀화한 수술이 더 복잡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머리가 있었다.

“축 원사님은 수술 수량을 올리려고 당일 수술 센터를 만드셨을 텐데, 세밀화 수술하면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을까?”

연문빈은 그렇게 한 번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능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여기 평균 수술 시간 물어보고 그것보단 빨리하는 쪽으로 하죠.”

“여기는 소형 절개구 수술은 다 형식화되어 있어.”

“정 안 되면 느린 만큼 부지런히 해야죠.”

결정을 내린 능연은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고 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그 말에 줄곧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았던 100.5 킬로그램 의사는 땀을 비 오듯이 흘리다가 곧 100 킬로그램이 되었다.

그는 구석으로 가서 몰래 핸드폰을 꺼내 의학 센터 단톡방을 열어 글자를 입력했다.

-능 선생 왈, 수술 진도를 보장하기 위해서 ‘느린 만큼 부지런히’ 하겠답니다.

단톡방 인원 1: 뫄?

단톡방 인원 2: 뫄?

단톡방 인원 3: 뫄?

-능 선생이 느린 만큼 부지런히 하겠다고 했다고? 뭐가 느리다는 건지 둘째치고, 지금보다 더 부지런할 수 있대? 하늘한테 한 500년 대출이라도 했나?

-느리다는 걸 왜 둘째치냐? 능 선생 반월판이랑 인대 수술 못 봤냐? 우리랑 비교하면 우린 레고 조립하는 원숭이 수준인데.

-말조심해라, 누가 원숭이야.

-수술은 하기만 하면 다가 아니잖아. 결과를 봐야지.

-누구 결과가 안 좋은데.

-정형외과에서 방사선 너무 많이 먹었냐? 그렇게 물으면 누군지 다 알게 되잖냐.

단톡방에 톡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다들 국내 정상급 삼갑병원 의사라서, 서로 잘 지내면서 돈이나 잘 벌고 싶어 하는 약한 삼갑병원 의사들과 달리 서로 무시하는 건 일상이었다.

100킬로그램 레지던트는 보면 볼수록 신이 나서 생각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 혼나느라 억눌린 심정도 다 날아가고, 오겹 뱃살까지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단 하나의 불만은 바로 단톡방에서 능연을 향한 불만이 터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긴, 대놓고 능연에게 태클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험하니까. 설사 100킬로그램이나 나가고 능연을 숙적으로 생각하는 그도 공공연하게 태클 걸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 더 단톡방을 지켜보던 100킬로그램 의사는 곧 단톡방 대화가 줄어든 것을 깨달았다. 의사들이 갑자기 대화를 멈춘다는 건, 환자가 생겼거나, 수술실에 들어갔거나, 겠지만, 모든 이가 동시에 대화를 멈춘다는 건…….

회의하러 갔나?

100킬로그램은 재빨리 커뮤니티를 살폈지만, 역시나 새로운 공지는 없었다. 다시 톡방으로 들어갔더니, 다들 캡처를 올리고 있었다. 새하얀 뼈, 붉은 살점. 레지던트들이 질리도록 본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본 100킬로그램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젠장. 저건 분명 새로운 수술 방식이야.”

“능 혼자 개발한 건가.”

“그럼? 축 원사님이 하나 더 준 거라면 그게 더 배 아플걸?”

“나도 축 원사님 없이도 수술 방식 개발하거든.”

“능연이 오늘 하는 것처럼 대단하냐? 아니거든 환자 괴롭히지 말고 그냥 닥쳐라.”

부주임급 의사들이 단톡방에서 서로 싸우면서도 계속해서 캡처를 올렸다. 캡처는 바로 운리 생방송, 그러니까 능연 수술 장면이었다. 일부 캡처엔 방송 채팅 내용도 있었고, 잠시 들여다보던 100킬로그램은 자세히 보기도 싫어졌다. 어차피 봐서 기분 좋을 내용도 없을 것이고.

“숙적이 이렇게 막강한 상대라니, 대체 어쩌란 말이냐.”

100킬로그램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서도 유심히 해부해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자, 순회 간호사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왔다. 100킬로그램은 부르르 떨면서 허둥지둥 손을 들어 항복 포즈를 취했다.

“깜빡했어요. 바로 무음으로 돌릴게요.”

순회 간호사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상대가 주임이거나 실력 있는 부주임이었다면 달콤하게 웃어 보였을 것이고, 특별히 사회생활 잘하는 간호사라면 거기에 애교까지 부리면서 무음으로 돌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주치의면 예의 바르게 한마디 했을 것이고. 그리고 100킬로그램과 같은 급인 레지던트는 보통 각자 다른 방법으로 끝장나는데,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더 처참하게 죽는다.

쉿!

순회 간호사는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능연에게 자신의 포악한 편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인지 100킬로그램 레지던트를 방생해주었다. 100킬로그램은 고분고분하게 웃으면서 다시 진지하게 수술을 참관하는 척했다.

천장에서 내려온 모니터 안에 파손된 연골과 연골에 연결된 뼈가 보였고, 다른 모니터 안에는 담황색 지방도 보였다. 다시 고개를 숙여 살며시 핸드폰을 켜봤더니, 단톡방에서 그를 태그한 사람이 있었다.

-뚱보, 현장에 있냐? 현장 사진 좀 찍어 보내.

100킬로그램은 그 말을 보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임 의사 기천록이었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축 원사와 비교하면 적계 중 레전설인 기천록 주임은 의학 센터의 여의봉이자 저 아래 의사들이 존경하는 대상이었다.

100킬로그램이 기억하기로는 이번이 기 주임이 그를 뚱보라고 여섯 번째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첫 번째 부름은 매우 기념비적이었다. 그때 그는 아직 훈련의였고, 수술복이 너무 작아서 환자 다리를 들어 올리다가 실수로 자기 새하얀 궁둥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현장은 당연히 웃음바다가 되었고, 기천록 주임 단 한 사람만 따듯한 말을 해주었다.

-뚱보 바지 좀 올려 줘. 대답은 하지 말고.

100 킬로그램은 그 당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대답’이 아니라 다른 ‘응답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역자 주: ‘대답’과 ‘딱딱해짐’ 발음이 같음)

그때 알아들었다면 좋았을 걸 하고 지금까지 아까워하고 있었다.

-네, 현장에 있습니다. 기 주임님.

100킬로그램은 과거 회상하느라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태그는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태그 없이 그냥 대답했다.

-현장 사진 몇 장 찍어 봐. 능연이 선 자리 등등.

-예.

기천록의 간단한 지시에 100킬로그램은 바로 핸드폰을 치켜들었고, 순회 간호사는 목에 눈이라도 달린 듯이 바로 노려봤다.

“기 주임님이 사진 찍어서 보내래요.”

100이 입모양으로 하는 말에 간호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푸른 꽃무늬 모자를 쓴 간호사를 가까이에서 보니, 동그랗게 뜬 부릅뜬 눈에서 사나운 매력이 느껴졌다. 100은 감히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기 주임님이 포즈 같은 거 보고 싶으신가 봐요.”

“능 선생님 수술이 얼마나 중요한데. 보고 싶으면 직접 오실 것이지.”

어린 간호사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당하게 대답했고, 100은 그녀의 눈빛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 말을 기 주임이 들었다가는 그가 주치의가 될 때까지 앙심을 품을 것이고, 기 주임이 은퇴하기 전까지 평생 주치의가 될 생각도 말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99.4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기 주임님은 회의 중이라서 시간이 없으세요.”

“회의가 뭐가 중요하다고.”

“하하하.”

99.4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무음으로 찍어요.”

매눈 간호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 무음이에요.”

“변태.”

매눈 간호사가 빤히 99.4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가, 수술 성공했니?”

가는 허리 긴 다리 선수가 아직 깨어나기도 전에 호르몬이 왕성한 가는 허리 긴 다리 남자 선수가 달려왔다.

“환자한테 수술 성공했는지 묻는 겁니까? 환자가 어떻게 알아요.”

맨 앞에 있던 연문빈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수술 성공했습니까?”

남자 선수는 연문빈이 의사 가운을 입은 걸 봐서 물어준다는 듯 물었다.

“가족입니까?”

“아, 아직은 아닙니다.”

남자 선수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연문빈은 콧등에 주름을 만들며 냄새 때문에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아닌 게 뭡니까. 가서 가족 불러와요.”

“우리 다 타지 사람이에요. 상해에 와서 훈련 중이라 지금은 가족이 없습니다.”

“보호자 없이 수술을 어떻게 한 거죠? 수술동의서엔 누가 사인했어요?”

연문빈은 바로 고개를 돌려 좌자전을 찾았지만, 좌자전은 보이지 않았다. 운화병원에서든 출장 수술 나와서든 이런 문제는 보통 좌자전 책임이었다. 그냥 환자를 데리고 나왔을 뿐인 연문빈은 살짝 당황했다.

“본인이 사인했어요. 팀 코치도 했고요.”

센터 의사가 대답하는 말에 연문빈은 한시름 놓으며, 당일 수술 빈도가 너무 높아서 사고 날 확률도 높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택일 수술이라면 적어도 전날 수술동의서에 사인할 것이고, 지금 능 팀 상황으로는 좌자전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어서 연문빈 등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출장 수술도 마찬가지로 현지 병원에서 하루 전날 모든 준비를 마치지, 현장에서 진료하고 그날 수술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투덜거리는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연문빈도 젊은 데다가 능연과 함께 수술하면서 성장해 온지라 이런 빈도 높은 수술에 이미 적응한 후였다.

“그럼 코치는요? 보호자는 언제 온답니까?”

“작은 수술인데 가족한테 알릴 것까지 없지 않나요. 걱정하실 텐데.”

가는 허리 긴 다리 남자 선수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알릴 필요 있는지 없는지, 그쪽이 결정할 일이 아니죠.”

연문빈은 뚱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문제 생긴 거면 그냥 말씀하세요. 우린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선수들이 몰려와서 하는 말에 연문빈은 한숨을 내쉬며 상대를 바라봤다.

“진짜 가족과 당신들 차이가 뭔 줄 알아요?”

“무슨 차이인데요?”

“진짜 가족은 절대로 이런 말 안 해요.”

연문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에 젊은 선수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진짜 가족은 최악의 경우에도 희망을 가지고 있거든요. 입 열자마자 문제 있니 마니, 안 한다고요.”

연문빈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코치가 금세 달려왔다. 머리숱이 매우 많은 살짝 퉁퉁한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고, 팔뚝도 연문빈과 비슷한 38이었다.

코치의 모습에 연문빈은 순간 흥분해서 일단 상황을 설명했다.

“수술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이제 문제는 재활이에요. 마음 잡게 도와주셔야 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코치는 의사 앞이라 매우 공손한 태도로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연문빈은 그제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축구팀 코치세요? 축구 선수는 보통 이렇게 건장하지 않던데.”

“그럼요. 축구로는 근육 이렇게 못 키우죠. 지금 축구팀은 스킬을 중시하거든요.”

코치도 연문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답했다.

“그럼 코치님 근육 키우느라 더 고생하셨겠어요. 은퇴하고 만드신 거예요?”

연문빈도 가운을 들어 올리고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힐끔 코치의 뱃살을 살펴보고는 상대가 나이가 많아서 현역 때처럼 상태를 유지하기는 힘들겠거니 했다. 그런데 코치는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었다.

“원래 보디빌더였는데 은퇴하고는 쇠질을 덜 해서요.”

“예? 보디빌더요? 그런데 왜 축구팀 코치를.”

“뭐, 인연이 맞아서요.”

“아이고, 그럼 오랫동안 키운 근육이겠네요. 대단하세요.”

연문빈은 저도 모르게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어찌 됐든 보디빌더로 성적을 낸 다음에 코치도 하게 됐네요.”

코치는 분위기 좋은 걸 보고 날름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마침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요즘 소변이 노랗더라고요. 허리도 좀 아프고, 어깨도 시리고. 무릎도 좀. 그리고 목, 꼬리뼈도 다 뻣뻣해요. 왜 이러는 걸까요?”

연문빈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수술실 안.

능연은 차츰 당일 수술 모드에 적응해갔다. 물론 특별히 적응할 것도 없고, 단 한 가지, 슬관절 수술 환자는 전신 마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주의하면 됐다.

환자가 수술 중에 가끔 말을 걸거나 심지어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있어서 문제였다. 대부분은 환자가 귀를 쫑긋하고 의사와 간호사의 대화를 듣지만.

그러나 보통 이런 때 젊은 의사들은 오히려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경험이 없는 만큼 환자 앞에서 아무 이야기나 떠들기엔 조심스러워서였다.

그렇게 침묵으로 시작하여 침묵으로 끝나는 수술은 능연의 리듬에 매우 부합했고, 수술이 더욱더 순조로워져서 시스템 제시어가 튀어나온 것도 한참 뒤에 겨우 알아차렸다.

- 퀘스트 1-2 완성: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내용: 완벽한 수술은 평생 죽어서도 변하지 않을 외과 의사의 바람. 완벽한 수술 네 - 번 완성할 것.

- 퀘스트 진도:(4/4)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제시 기준 좀 줄여도 되겠어. 글짜가 너무 많아서 잘 안 보여.”

능연은 ‘중급 보물 상자’만 힐끔 보고는 시스템에게 코치했다. 시스템 제시어는 사실상 그렇게 시선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도 착한 시스템은 몇 번 깜빡이더니 창을 더 작게 조절하고는 새 내용을 띄웠다.

- 퀘스트 2: 티끌 모아 태산

- 퀘스트 내용: 스킬을 획득할 확률이 있음. 보물 상자를 여러 개 모아라.

- 퀘스트 진도: (3/3) 중급 보물 상자; (300/300) 초급 보물 상자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능연은 그제야 잠시 수술을 멈추고 간호사에게 땀을 닦아달라고 하는 동시에 속으로 초급 보물 상자가 300개나 되는지 물었고, 시스템은 다시 깜빡이더니 작은 창으로 새 퀘스트를 띄웠다.

- 퀘스트 1-3 완성: 완벽을 추구하라

- 퀘스트 진도:(0/5)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 퀘스트 2: 티끌 모아 태산

- 퀘스트 진도: (0/4) 중급 보물 상자; (0/400) 초급 보물 상자

- 퀘스트 보상: 중급 보물 상자

능연은 이 시리즈 퀘스트를 계속해 나가면 중급 보물 상자를 꽤 얻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축 원사님이 이 당일 수술 센터 만드시는 데 얼마나 걸리고 경비는 얼마나 드셨대요?”

능연이 아무렇지 않게 묻는 말에 다른 사람은 모두 큰 적을 만난 표정을 지었다.

상해, 새벽 4시.

다들 제일 달게 자고 있을 시각, 의학 센터 당일 수술실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지칠 대로 지친 간호사와 초짜 의사들은 휴게실에서 쓰러졌고, IQ가 조금 남았거나 생김새가 괜찮은 사람들은 그나마 이불이라도 걸치고 23도 항온 수술실에서 멱 따지 않은 돼지처럼 쿨쿨 잠들어 있었다.

수술실 밖 대기 구역엔 환자와 보호자가 시커먼 창밖과 ‘당일 수술실’ 팻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엄숙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 좌자전의 모습에 다시 안정을 찾았다.

“의사도 참 힘드네요. 이 시간까지 수술도 해야 하고. 좌 선생님, 물 좀 드세요.”

노인 한 분이 좌자전에게 생수를 건네며 빙긋이 말을 걸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마실게요.”

“왜 사양해요. 기다리는 것도 힘든 수술, 하시는 분들이.”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

상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잘 아는 좌자전은 말을 이었다.

“능 선생은 원래 밤을 새우고 수술하기로 유명한 의사예요. 한 번 수술 시작하면 연달아 하고 나서 쉬러 갑니다. 저번에 운화 팔채향 물난리 때는 사흘 내내 눈 한 번 안 붙이고 수술하고도 아무런 실수 하나 없었어요.”

평소라면 안 믿을 말도, 보호자 입장에서는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너무 대단하셔요.”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 이렇게 유명하겠죠.”

“24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좌자전은 웃는 얼굴로 몇 마디 대답하고는 계속 말했다.

“우리 능 선생 수술 기록은요, 여러분이 알아보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세계 일류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기다리세요.”

당일 수술의 단점을 꼽자면 바로 진료와 비슷하다는 점일 것이다. 환자가 병원에 온 날 수술하고, 끝나면 돌아가고 그러니까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 의문이 참 많았다.

당일 수술은 환자가 빈번하게 들어오고 나가면서 의사들이 연달아 일하는 걸 지켜보니까, 의사가 8시간 이상 연속으로 일하고 있는 걸 보면 다들 감탄하게 되고, 10시간 넘어 버리면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좌자전은 그래서 수술을 배정할 때 일부러 새벽 시간을 비워 놓은 다음에, 뒤에 줄 선 환자에게 새벽에 수술할 의향이 있는지 묻곤 했다.

보통 당일 수술은 편한 걸 최고로 생각하지만, 능연의 명성을 생각한 환자와 보호자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보통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다.

능연의 수술을 먼저 받는 건 아무래도 모두에게 유혹적인 일이니까.

좌자전은 그렇다고 마음을 쉽게 놓지는 않았다. 그는 밤부터 새벽까지 버티다가, 계속 준비하면서 아침까지 버틴다. 그후 센터 의사들이 속속 출근할 때가 되면 능연이 수술하고 있는 것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게 된다.

다행히 좌자전의 얼굴엔 원래 주름이 가득하고 시커메서, 하룻밤 밤을 새워도 다크서클이 더 도드라지거나 하진 않는다.

그렇게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오고, 곧 고뇌의 바다에서 헤어날 타이밍이 가까워질 때쯤, 좌자전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좌자전은 흥냐흥냐 대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좌 선생님, 미안해요.”

상대도 똑같이 피곤한 목소리였다.

“아, 박 원장님. 무슨 일이세요.”

좌자전은 액정을 힐끔 보고는 하룻밤 못 잔 사람 목소리로 대답했다.

박 원장은 군안 진료소 원장이면서 유명 의료 중개인으로, 능연과 좌자전도 몇 번 교류한 적 있었다.

“능 선생이랑 팀이 같이 상해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골관절 & 스포츠 의학 센터라고요?”

“예, 맞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박 원장의 말에 좌자전도 바로 대답했다.

“VIP 환자가 있어요. 방콕에서 사고 나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대량 출혈, 간손상 의심 환자예요. 능 선생이랑 능 팀, 지금 바로 방콕으로 갈 수 있겠어요?”

박 원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가능하다면 바로 비행기랑 출국 문제 준비할게요.”

“능 선생 지금 수술 중입니다.”

“택일 수술이면 우리부터 생각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로서 첫 번째 선택이 능 선생이라서 그래요.”

매우 빠르지만, 간절한 말투였다.

“첫 번째요? 그럼 두 번째, 세 번째도 있어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연락하는 간 절제 전문가는 모두 여섯 명인데 그중에 능 선생이 탑입니다.”

“순위도 있어요?”

“그냥 우리 내부 순위입니다.”

박 원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비용 걱정은 하실 거 없습니다. 능 선생이 마지막 집도의가 되기만 하면 무조건 만족할 비용을 지불할 겁니다.”

좌자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먹다 남은 생수를 머리에 바로 부어서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능 선생이 마지막 집도의가 된다면, 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서 우리가 집도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지요. 첫째, 환자 상태가 너무 복잡해서 능 선생의 수술 구역을 벗어난 경우. 둘째, 아시잖아요, VIP에게 사고가 생기면 종종 여러 채널로 연락이 간다는 거. 거, 왜 영화에서도 자주 보잖아요.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리는 거죠. 다른 의사가 먼저 도착하거나 아니면 보호자가 다른 의사를 선택하면 우리도 경비 정도 지불하는 걸로 성의 표시할 수밖에 없어요.”

박 원장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좌 선생, 그냥 대놓고 이야기할게요, 화내지 말고 들어요. 어찌 됐든 이거 천재일우의 기회랍니다. VIP 수술 한 번 하면 백익무해해요.”

“왕복 준비해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갈 때는 최대한 개인 비행기 준비할게요. 돌아올 때는 아무래도 비즈니스나 퍼스트 타고 와야겠지만.”

“개인 비행기요? 대단하네요.”

좌자전도 드디어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 의학 센터 환자도 꽤 많이 처리한 상태라서 얼른 가서 수술하고 돌아온다면……. 물론 능연 본인의 의지에 달렸지만.

좌자전은 음음 대며 대답하고는 다시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능 선생한테 물어보고요.”

“예, 그럼 부탁합니다.”

박 원장은 좌자전이 전화 끊기 전에 다급하게 덧붙였다.

“방콕 상황이 어떻든지, 여러분이 도착하면 의사마다 롤렉스는 드릴 거예요. 이건 보호자가 드리는 선물이라 경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좌자전은 멍해졌다.

“도착하면 능 선생이 롤렉스를 받는다고요?”

“아니요. 의사들 모두요. 좌 선생, 연 선생, 다요. 방콕 도착하면 롤렉스 하나.”

박 원장은 정중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롤렉스는 사실 상관없지. 이 나이쯤 되면 뭘 차든 다 같으니까. 그보다 좋은 기회 같아 보여서. 다른 나라 대단한 의사도 만날 수 있고.”

좌자전은 얼굴 근육이 다 긴장한 채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쓰다듬었다. 롤렉스도 저렴한 건 몇만 위안 정도로, 그 정도는 좌자전도 감당할 수 있었다. 심지어 최근 한 달 능연과 함께 운화에서 부대항을 왕복하고 상해를 한 바퀴 돌면서 벌어들인 출장 수술비만 해도 평범한 롤렉스 하나는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롤렉스는 상관없다는 말도 그렇게 켕기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진짜 사정을 따지면 시원스럽게 살 정도는 아니었다. 다 주고 이혼한 바람에 재산을 다시 모아야 하는 건 둘째치고 의사라는 직업은 남이 선물한 롤렉스가 아니라면 굳이 내 돈 주고 롤렉스를 사 봤자 찰 시간도 없었다.

수술하고 응급 진료 보는 의사는 누구라도 손목과 목에 아무런 장식도 할 수 없으니까. 즉, 능 팀 의사는 하루 온종일 아무것도 걸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모든 전제는, 돈 내는 사람이 누구냐는 거지만. 누가 롤렉스를 선물한다면 거절하기 쉽지 않으니까.

연문빈 역시 마찬가지로 근질근질해서 말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롤렉스 하나라니, 이건 뭐 롤렉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 번 가볼 만하다.”

마취의 소가복은 더욱 열정적으로 물었다.

“서전만 주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무래도 그런 것까지 자세히 묻지는 못했는데.”

좌자전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외국 사람들은 아무래도 외과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대가 시계 하나 아끼겠다고 작정한다면…….

“환자는 몇이나 남았어요?”

“없어.”

능연은 여전히 느긋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술을 진행했고, 그래도 가고 싶은 좌자전은 재빨리 덧붙였다.

“님이 예상보다 빨리 수술해서 원래 내일 하려던 환자도 다 끝났거든.”

당일 수술은 입원을 하지 않아서 택일 수술처럼 시간이 빈다고 다음 환자를 바로 끌어다 수술할 수는 없었다.

능연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슬관절 수술은 매우 빨라서 평범한 의사도 30분이면 한 건 끝내는 수술이었다. 능연이 속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수술을 매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3/5)로 변한 퀘스트 1-3을 확인한 능연은 계속 오더를 내렸다.

“좌 선생님, 그럼 비행기 시간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출입국 문제도. 그래야 다음 환자 배정하죠. 또 가장 중요한 거, 방콕 환자 상태 체크하세요. 출혈은 막았는지, 간 손상 상태는 어떤지, 절제해야 하는지, 다른 증상은 없는지. 차트도 받으시고요.”

얼핏 들으면 할 일이 많은 것 같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상대에게 연락해서 처리하면 될 문제였다. 진작 준비했었던 좌자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하러 갔다.

능연은 여전히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수술을 진행했다. 상해에서 방콕까지, 비행기로 4시간, 개인 비행기면 조금 더 빠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이래저래 대여섯 시간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 출혈을 제어하지 못하면 가서 살릴 환자도 없는 거고.

그리고 대량 출혈 외에도 교통사고로 다른 심각한 손상은 없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두개골 손상 혹은 심장 쪽 합병증도 환자가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혹은 심장이나 신경외과 의사가 선행 수술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환자는 기다릴 수 있어야 수술이 가능하고, 못 기다리면 사망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응급 환자 처치란 원래 이런 것이다. 도시에서 발생한 응급 환자라고 해도, 사고 발생에서 병원에 들어오기까지 한두 시간 걸리는 건 다반사고, 응급실에서 우선 구명부터 하고 목숨을 붙여 놓은 다음에 해당 진료과 의사에게 통지하는 등 작업을 거치다 보면 세 시간만에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도 늦는 게 아니다.

그런 점으로 보면 능 팀이 상해에서 방콕으로 날아가는 것도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니었다. 돈이 들어서 그렇지. 게다가 의료보험도 안 되는 돈.

좌자전이 매우 빠르게 모든 일을 마쳤을 때, 연문빈 등도 환자를 멀쩡하게 수술대에서 내렸다. 모든 것이 롤렉스의 매끄러운 표면처럼 순조롭게 진행됐다.

좌자전은 능연이 수술복 벗기를 기다렸다가 다가갔다.

“능 선생, 상대가 보낸 헬기가 이미 옥상에 도착했어.”

“가요.”

능연도 긴말하지 않았다. 팀 리더는 팀 리더다운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이치는 예전에 깨달았다. 자기만 주목받으려고 팀의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 안 된다. 또 능연이 다른 사람보다 명예와 보상을 쉽게 얻는 만큼, 오히려 더 팀원들이 소외당할 때의 보상을 챙겨줘야 했다.

줄다리기할 때, 다들 ‘능연, 파이팅’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혼자 힘쓴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되듯이 말이다.

좌자전 등 다른 팀원들은 매일 능연과 수술을 하지만, 그들에게 스태미너 포션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금까지 버틴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능연이 계속해서 그들의 수입을 늘려주고 있어서였다.

명예와 금전적 이득 모두 갖췄으니, 팀도 당연히 단결될 수밖에 없고.

의사들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새벽의 찬 바람을 맞으며 옥상 헬리콥터 승강장으로 향했다. 좌자전, 연문빈, 여원과 마연린 모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헬리콥터는 거대한 소음을 내며 아침햇살 아래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차로 가면 평소에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십여 분 만에 도착했고, 곧 12인승 개인 비행기에 탑승했다.

푹 꺼진 폭신폭신한 큰 등받이에 기댄 연문빈은 완전히 릴렉스한 상태로 핸드폰을 꺼냈다.

“능 선생, 우리 해외 출장 가는 거 SNS에 올려도 되지? 롤렉스도 써도 돼?”

“돼요.”

능연은 별로 거리끼는 게 없었고, 좌자전도 별말 없었다. 요청받고 해외로 수술 가는 일 같은 건 설사 연문빈이 SNS에서 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곧 의사들에게 소문이 쫙 날 것이다.

“뭐라고 쓸 건데?”

좌자전은 혹시라도 제어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확인하려고 물었다.

“장 선생님한테만 보낼 거예요. 우리는 롤렉스 받는다고요. 하하하하.”

연문빈이 히죽대며 하는 말에, 좌자전은 장 · 초가난 · 1,000위안 때문에 왕복 8시간 팔채향 출장 수술 · 안민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가는 사람 모두, 도착하기만 하면 받는다고, 아깝다고 꼭 전해 줘.”

“오키요!”

연문빈은 양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미친 듯이 글을 입력했다.

조금 낡은 비행기가 방콕 공항에 떨어졌을 때, 좌자전이 전화를 받고 나서 겨우 5시간이 지난 후였다.

연문빈은 자는 시간도 아깝다고 오는 내내 바삐 움직이고, 비행기 안에 있는 작은 바에서 샌드위치까지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피부가 보드라운 스튜어디스를 바라보며 감탄해댔다.

“남자라면 이래야지, 남자라면 이래야지.”

“남자면 매일 개인 비행기 타고 외국 가서 수술하다가 나중에 시차 증후군 걸리란 말이야?”

나이 많은 좌자전은 개인 비행기를 타고도 매일 헬스로 몸 단련하는 연문빈처럼 기운이 넘치지 못해서 젊은이의 야망이 웃기기만 했다.

“흥. 일반석 증후군보단 낫겠죠.”

“내가 부자면 이런 생활 안 해. 차라리 조용한 작은 도시로 내려가서 큰 집 사서 매일 뒹굴뒹굴할 거야. 그거야말로 인생이지.”

좌자전은 깊이 한숨을 내쉬면서 목을 주물렀다.

“봐봐, 스튜어디스가 예쁘면 뭐 해, 목 좀 주물러줄 줄도 모르는데.”

“어디 아파요?”

능연의 서늘한 손이 좌자전의 목덜미에 닿나 싶더니, 뚝뚝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갔다. 그 모습에 마중 나온 태국인이 완전히 넋이 나가서 한참 머뭇거리다가 ‘king of soldier’ 하고 물었다.

갑자기 능연이 목을 만져주자, 좌자전은 아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멍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해에서 오신 능연 선생님입니까?”

태국인 뒤에 서서 멍하니 능연을 바라보던 통역사가 재빨리 달려 나왔다.

“능연은 맞습니다. 운화 병원이고요.”

“어쨌든 중국에서 오신 건 맞네요.”

능연이 살짝 고쳐주는 말에 통역사는 친절하게 웃어 보이면서 태국인을 향해 통역하고는 차 타러 가자고 했다.

“중국 쿵푸?”

“네, 중국 쿵푸.”

능연이 좌자전 목을 비틀던 모습을 따라 하며 태국인이 묻자, 통역사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알아서 대답했다.

태국인은 눈썹을 살짝 까닥이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다시 통역을 향해 말했다.

“다른 기술도 다른 의사보다 뛰어나길 바랍니다.”

“다른 의사도 있는 거, 들으셨어요?”

중국인 통역사는 태국인의 말을 통역하지 않고 소식을 흘려주었다. 좌자전이 서둘러 대답했다.

“다른 의사도 온다는 건 아는데 몇이나 왔는지는 모릅니다.”

“당신들까지 외부에서 온 의사 팀은 총 세 팀입니다. 한 팀은 싱가포르, 한 팀은 인도. 그리고 방콕 현지 의사도 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통역사는 능연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중국에서 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태국 현지 의료 수준은 높은 편입니다. 세계 3위 국제 의료의 목적지로…….”

중국인 통역사는 의료 통역은 아닌지 얼버무리며 설명했지만, 어찌 됐든 설명은 되었다. 좌자전 역시 능연을 힐끔 보고는 통역사에게 다시 감사했다.

“이왕 온 거, 비교 한번 해보죠, 뭐.”

“그건 그래요. 어차피 오면 돈 받는 거잖아요.”

통역사는 웃다가 또 혀를 끌끌 차며 감탄했다.

“돈 있는 사람은 다르네요. 특히 유럽, 미국 이쪽은. 사고 나신 분, 사고 나자마자 특별 의료진 연락하고 난리였대요. 아, 태국 국경 수비 쪽 사람 나왔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차량이 2분 정도 멈춘 동안, 태국인이 교섭한 후 다시 출발해서 한참 가다가 차에서 내렸더니 앞에 헬리콥터 두 대가 보였다. 다들 익숙하게 나눠서 올라탄 후 리시버를 썼더니 헬리콥터가 웅웅 대며 출발했다.

좌자전은 시간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낸 다음 다시 통역사에게 물었다.

“우릴 소개해 주신 박 원장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병원에요. 군안 진료소 박 원장님 말씀이시죠?”

통역사는 그렇게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저한테도 전화하셨어요. 참, 선물은 병원에 도착하시면 직접 드린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좌자전은 박 원장이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하며 입을 삐죽였다.

“단체 여행 팀이 호텔에 도착하면 화환이니 뭐니 증정하잖아요. 의료팀은 병원에 가서 받는 것도 맞는 거 같고요.”

통역사는 몇 마디 더 하다가 또 능연을 힐끔댔다.

“능 선생님은 이야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능 선생은 성격이 그래요.”

좌자전은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지 않도록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외국까지 와서 수술하는 걸 보면 실력이 뛰어나신가 봐요. 그죠?”

“그야 그렇죠.”

좌자전이 껄껄 웃으며 길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 의사들, 참 힘들죠.”

통역사는 다른 각도로 공감을 일으켜 보려고 시도했다.

“보세요, 여기 외국은 수준이 높거든요. 태국 의사들은 연봉도 높아요.”

좌자전이 ‘네네’ 하며 대꾸하는 사이, 곧 아래쪽에 불빛이 밝아졌다.

헬리콥터는 하강 준비를 시작했고, 승객들도 다들 입을 다물었다. 통역사는 통역할 준비를 했고, 좌자전, 연문빈 등은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바닥이 가까워지고, 또 가까워지고. 문이 열리는 순간, 연문빈이 못 참겠다는 듯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미친 듯이 몇십 미터 달려가서 병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둥글고 노랗고 붉은 화환이 날아왔다.

“태국 전통 프로그램이에요.”

통역사는 익숙하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뒤에 서 있었다.

뒤이어 박 원장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는 뒤에서 초록색 케이스를 하나씩 꺼내서 열더니 가장 먼저 다가간 연문빈에게 건넸다.

“환영합니다.”

케이스 안 시계도 마찬가지로 초록이었다. 케이스 위에 크게 찍힌 왕관 표시까지 본 통역사는 저도 모르게 고함쳤다.

“서브마리너 그린?!”

“보증서랑 다 안에 들어 있으니 잊지 말고 챙기세요.”

박 원장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케이스를 하나하나 건넸다. 클라이언트 돈으로 자기 연줄을 만드는 기분은 매우 통쾌했다.

“서브마리너 그린은 돈이 있어도 못 사는 건데, 진품인가.”

롤렉스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통역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통역사의 반응에 박 원장은 싱긋 웃으며 명확하게 설명했다.

“환자 보호자가 메이요에 자문을 구했는데 닥터 포크너가 특별히 능연 선생을 추천했어요. 그래서 보호자도 능연 선생과 팀이 와주길 매우 바라고 있었지요. 현지에서 구하느라 쉽진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성의는 표시한 거죠.”

박 원장은 능연 앞으로 다가가 마찬가지로 초록 케이스를 열어 보이며 웃었다.

“능 선생 건 데이데이트 올리브그린이에요. 이것도 유명하죠.”

“감사합니다.”

능연은 힐끔 보고는 받아두라고 좌자전에게 눈짓하고는 바로 환자 상태를 물었다.

“안정됐습니다. 일단 가서 다른 수술팀하고 합류한 다음에 구체 방안이랑 집도의를 결정할 겁니다.”

박 원장은 환자 상태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능연을 소개한 사람으로서 박 원장도 능연이 집도할 수 있을지 아닐지 본인보다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좌자전은 조심스럽게 BMW 한 대 값을 받아서 자기 서브마리너 그린과 함께 연문빈에게 건넸다.

“잘 챙겨 놔. 잃어버리면 네 BMW 내 거 되니까.”

“그냥 사가세요.”

연문빈은 자기 롤렉스 케이스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5 시리즈는 나한테 안 어울려.”

통역사는 사방 가득한 녹색 케이스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직업을 잘못 고른 건가’ 하고 중얼거렸다.

“방콕 병원은 더스트 메디컬 그룹의 플래그십 병원이고, 태국에서는 여길 메디컬 타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심장 병원, 암 센터, 재활 병원도 따로 있거든요.”

박 원장은 길 안내하며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대형 진료과인 셈인가요?”

능연이 흥미 있는 듯 물었다.

“분원이라고 해야 맞겠죠. 방콕 병원엔 모든 진료과를 갖춘 진료 병원도 있거든요. 어찌 됐든 등급 있는 병원입니다. 더스트 그룹 이름도 있고요. 이번 수술 잘하고 성공하면 앞으로 국제 학회나 글로벌 의료 이벤트, 이런 거 더스트 그룹 통해서 할 수도 있어요.”

박 원장은 몇 마디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개인 진료소 책임자인 박 원장이 하는 일이 바로 이렇게 연결하는 일이었다. 더 전문적이고 자신의 전문성도 더 드러내야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과 성질이 비슷했다.

능연은 별 느낌이 없었다. 주변에 원래 온갖 사람들이 나타나서, 대화를 프로페셔널하게 하는 사람도 흔했다. 물론 박 원장처럼 나이 많은 프로는 졸업하고 나서 많이 만나기 시작했지만.

“수술실 환경은 괜찮죠?”

능연은 노련하게 요점을 찍어냈다.

“국내 기기랑 같은 걸 사용하나요? 태국어? 영어?”

“영어도 다 있습니다. 방콕 병원 엔지니어도 동석할 거고요. 방콕 병원은 세계 10대 메디컬 투어 병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라 기본이 잘되어 있습니다. 능 선생 필요에 따라 보조할 서전도 구할 수 있어요. 이름 올리고 돈을 나눠줘야 하지만.”

뒷짐 지고 박 원장의 말을 듣던 소가복이 으스스하게 입을 열었다.

“서전이 그렇다면 마취의는요?”

“보조 마취의 필요해요? 소 선생?”

박 원장은 그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었고, 소가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낯선 곳에서 낯선 의료 설비를 사용해야 하고 심지어 약제 상태도 익숙하지 않아서 현지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박 원장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박 원장은 그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능연, 좌자전과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소가복이 말을 꺼내든 아니든, 방콕 병원에서도 수술에 참여할 마취의를 준비할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걱정을 하니까.

외과 의사는 특별히 초청한 유명 인사고, 다들 보는 앞에서 작업하니 안전하게 느껴진다. 그와 비교하면 마취의는 아무래도 갖가지 실수할 가능성이 쉽게 연상된다. 지역마다 계량 단위 표기도 다르고, 인명 사고가 나기 쉬운 문제라 방콕 병원에서 손 놓고 외국 사람에게 맡기기만 할 수 없었다.

물론 마취의 중엔 유명인이 거의 없어서 고르기 더 힘든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소가복 본인도 자신 있다고 나설 용기가 없었고.

자신 없냐고 물으면,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마취의는 다른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고, 이번이 처음 외국에 나온 것이라 어떤 상황이 생길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이 필요 없다는 말은 정말로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 롤렉스를 만지고 있으면 마음도 편안한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소가복은 열흘 정도 후엔 서브마리너 그린을 차고 운화 시 거리를 누빌 완전한 하루 휴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능 선생, 여기가 협진실입니다.”

박 원장이 쌍여닫이 문 앞에 서서 능연 일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문을 열었다. 약 30평 정도인 협진실 안은 소파, 티테이블이 몇 개 놓인 신선한 분위기였다.

협진실 앞, 옆 모두에 환자 영상 자료가 투영되어 있었고, 중간의 공동 원탁에 프린트된 자료가 잔뜩 쌓여 있었다.

표정이 온화한 태국인 몇 명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벽 쪽엔 태국인 서버들이 음료와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국적인 협진실 모습이지만, 능 팀은 방 안 디자인을 감상할 심정이 아니었다. 능연 밑에 있는 젊은 의사들도 이젠 사오 년 경력이 쌓인 선임 응급 의사라서 6시간 전에 사고를 당한 환자 일로 엄숙하고 긴장하는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이분은 중국 운화 병원 능연 선생입니다. 수술 시작했습니까?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박 원장이 대변인처럼 묻는 동시에 능연 곁에 서서 팀원도 다 들릴 목소리로 나지막이 설명했다.

“저 앞에 보이는 두 사람이 현지 태국 의사일 겁니다. 왼쪽이 아마도 싱가포르 팀. 중국, 유럽 혼혈인 스티븐, 친분 있는 의산데, 꽤 실력 있습니다. 오른쪽이 인도 팀. 저긴 잘 몰라요. 그래도 인도도 메디컬 서비스 대국이니까 실력이 없진 않을 겁니다.”

능연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질 건을 제외하면 능연도 외국에서 수술하는 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계속 이어가기 전에, 태국 의사 쪽에 있던 의사 하나가 벌써 걸어 나와서 아는 척했다.

“능 선생, 안녕하십니까. 나는 환자 주치의 차룬왕입니다. 지금 환자는 수술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출혈량 약 2,600cc, 비장은 이미 절제했고요, 간, 장도 손상됐습니다.”

“복강 안은 이미 오염됐습니까?”

능연은 상대의 간단한 영어를 바로 알아들었다.

“예. 감염 컨트롤은 계속해서 논의할 겁니다. 지금은 우선 집도의를 정해야 해요.”

차룬왕이 머뭇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포기하실 분 있습니까?”

나오는 사람도 없었고, 의외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정도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룬왕 뒤에 서 있던 유럽 미녀가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포기하는 의사에겐 처음에 약속한 보수 외에 30% 보너스가 제공됩니다.”

두 태국 의사가 웃는 얼굴로 서로 마주 보더니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외부에서 서전을 모셔오셨다니, 난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태국 외과의 하나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몇 시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유럽 미녀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제 세 팀 남았군요. 각자 수술 방안을 말해 봅시다. 어느 분부터 하시겠습니까?”

차룬왕이 말 속도를 조금 빨리 올리면서 각 통역사도 불렀다.

인도인은 그제야 능연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능 선생을 강력하게 바라시는 것 같은데, 그럼 저분 수술 방안부터 듣죠.”

“능 선생이 오는 걸 기다린 건 능 선생이 간 절제 쪽 순위가 가장 높아서입니다. 게다가 방콕과 먼 편도 아니라서요. 그래서 우린 능 선생님 이야기를 매우 들어보고 싶군요.”

유럽 미녀가 다시 나와서 한마디 하더니 이번엔 들어가지 않고 능연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능 선생, 먼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능 선생, 먼저 하시지요.”

인도인 나라파트가 능연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하 웃으며 말했다.

중국, 싱가포르 의사와 비교하면 인도 병원과 의사 쪽이 유럽과 미국 의료 혜택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보험회사에서 개발한 보험 상품으로, 더 싼 보험을 유럽과 미국에 판매하고, 피보험자가 사고를 당하면 인도로 보내서 수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수술하는 것과 비교하면, 환자를 장시간 비행기에 태워 인도로 보내 수술하고 다시 돌아오는 건 완벽한 의료 시스템이라고 볼 수 없지만, 저렴한 의료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이미 30~40년 이어지면서, 인도 병원 기술은 자연스럽게 갈수록 유럽, 미국과 유사해졌다. 사실 정상급 인도 의사는 미국에서 꽤 먹히는 편이었고, 미국인이 불평을 늘어놓는 건 늘어놓는 거고, 꽤 신임하는 편이었다.

다른 한편, 유럽, 미국 보험회사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인도인의 자신감도 늘었다. 해외 수술은 명성을 알리기에 매우 귀한 기회임을 잘 아는 나라파트이기 때문에 매우 빠르게 벵갈루루에서 방콕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 환자 보호자와 방콕 현지 병원이 방콕 공항에 도착한 순서는 전혀 상관없을 정도로, 소위 수술 순위를 이토록 중시할 줄은 몰랐다.

나라파트는 해외 수술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슷한 응급 수술은 거의 없었기에, 속으로 자신의 순위가 능연에게 크게 밀리는 이유가 이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차이가 단지 몇, 혹은 십몇이었다면 십중팔구 이미 수술을 시작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개인 회사에서 개인적으로 정한 순위는 그냥 참고치지 명확한 등급 차이는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순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환자 보호자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라파트는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게다가 능연 본인을 본 후로 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첫 번째, 능연이 너무 젊었다. 임상 의학은 경험 의학이고, 나이만 많다고 실력 있는 의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젊은 의사는 실력 있는 의사가 될 가능성이 더 낮다.

또 하나, 나라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능연이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라파트는 속으로 자기가 저렇게 잘생겼으면 무엇을 했을지 자문했다.

발꿈치로 생각해도, 저 정도 생겼으면 만날 음주가무를 즐기며 해가 밝을 때까지 방탕하게 즐겼을 것이다. 특히 의사 면허를 딴 후엔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라파트도 눈앞에 이 중국인이 얼마나 잘났길래 자신보다 순위를 크게 앞지를 수 있는지 매우 궁금했다.

옆에 있는 싱가포르, 태국 의사들은 저렇게 티 나게 행동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표정과 태도 모두 비슷했다.

외과 의사 생활을 오래 하면 아무래도 거만함이 물들기 마련이고, 수술실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하늘이 첫째, 땅이 둘째, 주임이 셋째, 내가 넷째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마침 진료과 주임이라면 그 거만한 기질이 갈수록 더 쌓여가고.

특히 요청받아서 이 자리에 온 외과 의사들은 자신의 반경 몇 미터 안 범위에서 간 절제를 가장 잘하는 무리에 들 것이다. 설사 가장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한 수술을 받은 환자는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니 능연이 자기보다 순위가 더 높다는 사실을 말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간 절제 수술은 수술 방식이 매우 많으니까, 능 선생, 일단 환자 상태부터 확인하고 결정 내리시죠?”

싱가포르 의사는 겉으로는 능연을 생각해서 하는 것처럼 말해도 사실은 다소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능연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사방에 걸린 MRI를 둘러보고는 뒤에 서 있는 팀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215, 609, 1015, 1438, 1980, 2253, 2701번 꺼내세요.”

좌자전은 멈칫하다가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미친 듯이 찾기 시작했다.

방 안 가득한 의사들 모두 이상한 얼굴로 바라봤고, 통역사도 어리둥절해서 통역하기 시작했다. 인도인은 잠시 기다리다가 이 세상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껄껄 웃기 시작했다.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는 겁니까?”

여원이 좌자전의 팔꿈치 사이를 파고들어갔다.

“제가 찾아볼게요.”

파일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일부러 배운 좌자전보다야 여원이 컴퓨터에 익숙했고, 금세 필름을 찾아내 슬라이드에 띄웠다.

“이게 이번 환자 현재 상태와 일치하는 간 절제 환자 필름입니다. 개복 후 상황을 보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해서 착착해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능연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사실 원래 이게 다였다. 대형 수술의 수술 방식은 다 몇 번이고 반복하며 정형된 것이지 몇 시간 만에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도인이 능연에게 설명해 보라고 한 것도 그냥 한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 뿐이다.

나라파트는 설사 수술을 얻지 못해도 말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기서 얻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능연이 예상 밖의 말을 하자, 나라파트가 다시 껄껄 웃었다.

“증상이 일치한다고 해도 얼마나 일치하겠습니까. 방안이 아예 없다는 말 같은데요.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 쿨쿨 잠만 잤습니까?”

“영상으로 살펴본 바로는 전에 채용했었던 수술 방안을 채택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사람마다 간의 변이성이 다르다는 걸 아셔야죠. 게다가 증상이 달라서 예전 케이스로 수술 케이스를 삼기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동의합니다. 그래서 환자의 간 변이와 증상이 같은 케이스로만 골랐습니다.”

능연이 담담하게 대답하는 말에 나라파트는 매우 재미있는 말을 들은 듯 피식 웃었다.

“변이와 증상이 같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태국 의사와 싱가포르 의사는 저도 모르게 스크린을 바라봤다.

“일단 필름 좀 보세요.”

차룬왕이 한숨을 쉬며 나라파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환자의 주치의였고, 핵심 의무는 환자에게 가장 적당한 의사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지금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차룬왕은 입 닥치고 필름을 보라는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혹은 필름을 보게 해서 자연스럽게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스크린을 바라본 나라파트는 역시나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케이스들을 능 선생이 다 한 거라고요?”

차룬왕은 환자 보호자에게 힌트를 주기 위해서 질문했고, 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같은 간 변이 구조네요. 증상도 같고요. 이런 확률은 매우 낮은데······.”

차룬왕은 속으로 짐작하는 바를 입에 올리진 않았다.

“수술을 오래 하면 같은 간 변이 케이스를 만나기 마련이죠. 증상도 그렇고요.”

외과 의사들은 필름과 능연을 번갈아 봤다. 뒤이어 싱가포르에서 온 스티븐이 입을 열었다.

“숫자, 그러니까 아까 능 선생이 부른 숫자, 저 구석에 숫자, 215, 609, 2701······. 이게 다 뭡니까?”

“제가 넘버링한 케이스 번호입니다. 간단해요, 215는 215번째 간 절제 수술, 609는 609번째.”

능연의 말투는 역시나 태연했다.

“그럼 2701은 2천 7백 하나란 말씀입니까?”

스티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당연하죠.”

“간 절제를 2701번 했다고요?”

“지금까지 하면 2900번 정도입니다.”

능연의 대답에 그 자리에 있는 외과의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간 절제 2900번이 가능합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인도인이 못 참겠다고 고함치는 소리에 능연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자자, 내용을 보면 알겠죠.”

더 많은 자료를 들고 있던 차룬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여원더러 동영상을 틀게 했다.

동영상 몇 개가 동시에 재생됐고, 다른 시간, 다른 수술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능연이 집도의라는 것, 그리고 수법은 비슷한 듯 달랐다.

“재생 속도를 높일게요.”

여원은 컴퓨터를 조작했고, 사람들은 이 수술들이 정말로 비슷한 수술을 반복적으로 한 수술임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뒷번호 영상일수록 보는 동안 편안했다.

“간 절제 수술을 3천 번 가까이······?”

싱가포르 의사 스티븐이 다시 묻는 말에 능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반복되는 질문은 원래 대답할 가치도 못 느꼈다.

“그래서, 약 4, 5백 건 수술할 때마다 비슷한 걸 한 번 만난 거네요?”

스티븐이 결론을 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차룬왕은 웃고 싶은데 웃지는 못하고 흠흠 댔다.

스티븐의 자료 역시 봤었고, 스티븐의 간 절제 수술 횟수가 대략 1,000건인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나라 기준으로도 많은 편이었다. 어떤 수술이든 1,000건 넘으면 전문가가 되지만, 그것도 비교 상대가 누구냐에 달렸다.

“능 선생이 이런 경험이 있으니 능 선생이 집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룬왕은 계속 토론할 생각이 없다는 듯 보호자를 바라봤다.

“좋아요. 능 선생, 부탁드려요.”

금발, 하얀 피부 유럽 미녀가 능연과 악수했다. 의학은 모르지만, 능연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제압한 건 알 수 있었다.

원래 능연이 일순위기도 했고, 롤렉스와 30분이라는 시간을 버리려고 쓴 건 아니었다. 인도인과 싱가포르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반대 의견은 내지 않았다.

“약속대로 비용은 낼 겁니다. 별도로 각 팀에 10만 달러 기본 보너스를 지급하죠. 다들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가 주세요.”

유럽 미녀는 엄숙하고 돈냄새 풍기는 태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박 원장은 능 팀이 수술 통로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기본 보너스만 10만 달러라면, 자신의 보너스도 올라갈 가능성이 커졌다.

“연 선생님이 퍼스트. 현지 병원 선생님 계신가요?”

“기기 테스트 다 해주세요.”

“수술대 좀 높이고, 여 선생님 쓸 발 받침대 준비하고요.”

능연의 명령이 하나씩 떨어졌다. 주로 수술실에 관한 내용이었다. 출장 수술은 원래 쉬운 일이 아니다. 작은 어려움부터 따지면, 집도의가 실수 용납률을 스스로 낮추는 것, 혹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올리는 것부터였다.

자기 병원에서 정상 수술할 때 정상적인 실수 했을 때는, 이것도 까다롭긴 해도 수습할 방법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출장 수술은 다르고, 보통 출장 수술 의사가 최후 책임자가 된다.

출장 수술의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병원의 환경, 특히 다른 병원의 의사들에게 적응하는 점이었다. 대부분 마지막에 이게 걸려서 출장 수술을 하지 못한다.

자기 진료과 초짜 의사는 욕하고 싶은 대로 욕해도 되고, 그 의사는 설사 개처럼 욕먹어도 왈왈 짖으면서 수술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는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의사들은 출장 수술을 가도 잘 아는 병원을 간다. 한편으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병원으로 가고.

북경 의사가 가장 출장 수술을 많이 하고, 상해 의사는 동남 연해 지역에 국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 구조 역시 꽤 중요한 문제고.

그런데 외국에서 출장 수술하는 건 국내 권력은 보통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사의 기술과 적응력이 더 필요해진다.

다른 글로벌 의사들이 그러듯이, 능연이 자기 팀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바로 소통 문제로 일어나는 트러블을 줄이기 위해서다. 국내 출장 의사가 능연처럼 하는 일은 사실 매우 드물었다. 팀을 꾸리는 게 힘든 것도 있고, 출장 의사들이 대부분 자기 돈을 아래 의사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

능연도 출장 수술 가격이 충분히 높고, 수술 나올 때마다 수량도 보장되는 데다가 출장 수술비를 높일 수 있는 동력도 충분해서 팀을 꾸리는 데 필요한 자본에 무감각한 것이다. 평범한 출장 수술 의사라면 출장 비용이 평균 몇천 위안 혹은 만 위안 조금 넘고, 거기에 왕복 고속철도 비용 혹은 비행기 삯이 포함된다. 설사 한 번에 수술 두세 건 한다고 해도 주에 한 번 출장 수술하는 연차 높은 의사로서는 남 주기엔 아까운 돈이었다.

팀 하나 이끄는 건 비싸지 않다고 하면 비싼 건 아니지만, 왕복 교통비, 숙박비, 거기에 보너스 등 비용까지 하면 차라리 현지 의사를 찾아서 협력하는 게 낫다. 어쨌든 돈은 안 드니까.

그러나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팀을 꾸려서 출장 수술 나올 정도면 실력이 약한 의사는 없다.

방콕 병원도 어린 의사부터 선배 의사들까지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능연을 힐끔대고 있었다.

“간 절제 3천 건?”

“가짜는 아니야.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중국 의사 능을 알더라고.”

“변이 수술 방안도 개발했대. 고령 조기 암 대상으로.”

“아직 젊은 거 아닌가? 어려 보이는 건가?”

“아직 서른 안 됐대!”

의사들은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쑥덕댔다. 남아 있는 의사들도 어차피 서로 자주 볼 사이도 아니고, 특히 집도의 경쟁에 실패한 후로는 능연의 기술이 어떤지 궁금해서 남아 있는 것이라 틈나는 대로 태클을 걸었다. 물론 아직 보호자에게 돈을 받지 못해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크지만.

환자 보호자도 그저 서서 듣기만 했다. 이왕 불러온 의사를 스페어로 쓸 생각인 한편, 정보를 모을 필요도 있어서 지급을 미루는 것이었다.

오늘 수술은 보호자에게도 개방되었지만, 아무리 카메라 각도가 좋아도 보호자가 모르는 부분은 아무리 봐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는 의사들이 서로 의견을 내며 떠드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 의견이 정확하고 아니고는 둘째치고, 많은 정보를 모을 필요는 분명히 있으니까. 그러나 수술이 진행될수록 외부인이 기대하던 의견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역시 비슷한 수술을 많이 했군.”

나라파트는 사실 능연의 실수를 태클 걸 생각으로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술을 진지하게 감상하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했고.

하지만 사실 나라파트도 매우 뛰어난 의사였다. 실력이 어느 정도에 이른 상태에서 능연이 완벽한 수준으로 진행하는 수술을 보게 되면 홀딱 빠진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눈을 깜빡이거나 헛소리할 여유는 없어진다.

수술을 천 건 가까이한 스티븐도 마찬가지로 ‘음’ 하고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평균 5백 건에 한 번 거의 비슷한 수술을 만난 건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대단하네요.”

“나도 내가 했던 모든 수술을 기억합니다. 일류 서전의 기본 소양 아닙니까.”

나라파트가 코웃음 쳤다.

“이 디테일 아십니까?”

스티븐이 능연이 큰 혈관을 박리하는 걸 콕 찍으며 물었다. 혈관이 하나하나, 유기된 파이프처럼 대충 허공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술을 해본 의사들은 큰 혈관을 완전히 박리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든지 다 안다. 거기에 수술에 영향을 주지 않은 곳에 방치하는 건 얼마나 많이 단련해야 가능한 일인지 더 잘 알고.

이건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고 경험밖에 답이 없었다.

사람마다 수술 포즈, 습관이 다 달라서 유사한 수술을 시작했을 때는 혈관의 위치를 반복해서 조절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실력이 약한 의사는 이런 스텝을 아예 생략한다. 혈관 박리하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차라리 자르고 굳히고 봉합하는 게 더 안전했다.

“중국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외과 의사들도 기회가 많아. 10년 동안 해도 3천 건 못하는 나라도 있는데.”

나라파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싱가포르에서 온 스티븐이 고개를 돌려 나라파트를 바라봤다.

“인도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거, 좀 찔리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돈 없는 사람 수술 안 하거든요.”

나라파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스티븐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아가선 돈 없는 사람 수술도 해야겠군.”

“응? 왜요?”

“부자만 수술해서 언제 3천 건 채웁니까.”

모니터의 수술 상황을 지켜보는 나라파트는 목소리도 심각해졌다.

“부자 수술 한 번 하려면 진료 시간도 10배는 들고, 검사 시간도 10배, 그리고 컨설팅 시간도 10배. 그 시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면 5년이면 나도 3천 건 누적하겠죠.”

“매년 400건이네요.”

스티분은 계산해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간 절제는 매일 쉽게 대여섯 건 할 수 있는 충수염 같은 작은 수술이 아닌 큰 수술이다. 정상적인 의사는 사흘에 한 건, 일 년에 백 건 정도가 정상 수준이다. 일 년에 4백 건, 아니 6백 건이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중학생 수준을 갑자기 고3으로 끌어 올리는 강도라고 할까. 체력과 정신력은 둘째치고, 가정, 아내, 자식 다 팽개쳐야 한다. 스물, 서른 먹은 의사라면 아직 젊은 때를 노려 몇 년 고생해서 2, 3백 건, 심지어 조금 더 해도 괜찮겠지만, 나이 많은 의사는 그렇게 버티기가 힘들다.

“예,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스티븐은 싱긋 웃기만 하고 별말 하지 않았다. 간 절제를 배우기 시작한 1, 2년이 간 절제를 가장 많이 한 해였고, 그때 5백 건 정도를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5, 6년 동안 5백 건을 넘기지 못했고.

선택할 수 있다면, 스티븐은 차라리 이렇게 왕복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간 절제 수술 한 번 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 요트를 타고 주말을 잘 보내는 걸 선택할 것이다. 하루에 수술 세 건하면서 10년 수명 갉아 먹다가 마지막에 요트, 저금과 아내를 부두 인부에게 넘겨주는 게 아니라 말이다.

“5년은 짧습니다. 그러고 나면 부자들은 나한테 수술받으려고 난리일 거고요.”

나라파트 역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저 선생한테 수술받으려고 난리 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요?”

스티븐이 웃으며 말하는 저 선생이란 물론 능연이었다.

“홍보할 줄 몰라서 그렇죠. 그래서 이름을 알리지 못했고요. 나중에 내가 저런 기술을 갖추게 되면…….”

“저런 기술이요?”

인도인이 웃으며 하는 말에 스티븐도 피식 웃었다. 그 말에 인도인이 그제야 다시 집중했더니, 능연이 환자의 나머지 좌측 간문 정맥을 재건 중이었다. 초고난도 기술인데 보는 사람은 매우 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말도 안 돼!”

“FxxK!”

간은 간동맥, 문정맥, 하대정맥과 담도 계통을 포함한 매우 복잡한 관도 계통을 지니고 있다. 어느 의사라도 그중 한 계통만 통달해도 한 지역 병원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

물론 세계 일류, 이류가 될 수준이 되려면 한 계통만으로는 부족하고 한 계통에서 세계 수준으로 통달해야 하고 다른 계통도 이류 수준은 되어야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다른 병원에 가서도 현지 병원 의사들도 체면을 세워줄 것이고 해외에서도 대접받을 수 있다.

그중 간문 정맥 재건은 복잡하고 또 복잡했다. 스티븐 혹은 나라파트도 당연히 할 수 있지만, 그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한 상황에서 진지하게 해야 한다.

수술은 운전이나 마찬가지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난도를 따지면 사실 그렇게 어렵진 않다. 굳이 운전으로 비유하자면, 고수들이 추월하거나 추월당할 때라고 할까. 조금 집중하면 사실 별일이 생기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능연은 지금 F1 레이서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고수라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레이싱 팀과 협의해서 회전 속도를 올리고 플로대로 엔진을 가동하고 기름 양도 확인하고 나서야 액셀을 밟아도 밟아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전혀!

그냥 급발진하듯이 풀 액셀을 밟아 버렸다.

현장의 의사들은 능연의 열 손가락이 열 개의 손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환자의 간을 만지는 걸 보고 다들 넋이 나갔다. 문외한이 F1 트랙에서 풀 액셀을 밟게 됐다고 상상해 보라, 무서운지 아닌지.

“힘, 민감도, 속도, 터치. 농구랑 비슷하네.”

싱가포르 의사 스티븐이 갑자기 영어로 그렇게 말하고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인도인은 싸늘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재능이 필요하죠. 농구 선수한테 키가 필수인 것처럼. 다만 외과 의사한테 재능은 그것처럼 두드러지게 필요한 건 아니라서 그렇지.”

스티븐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제 스승인 디너스 교수가 자주 하던 말입니다. 교수님 시절엔 그렇게 훌륭한 외과의가 많았나 보죠.”

인도인은 드디어 1% 정도 시선을 스티븐에게 할애하며 조금 놀란 듯 물었다.

“디너스 교수가 지도 교수였어요?”

“예.”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그제야 마음이 좀 진정된 스티븐은 다시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디너스 교수님 시절이라는 건 바로 개복 수술이 유행하던 시설 말이에요. 가장 왕성하던 시절이고. 그렇게 따지면 능 선생 재능은 시기를 잘못 만난 것 같긴 하네요. 안 그래요?”

나라파트는 스티븐의 표정이 미묘하질 때까지 빤히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인도 사람이 허풍쟁이라고들 하지만, 역시 거만한 건 백인 못 따라가겠네요.”

“난 농구도 잘하거든요.”

“기회 되면 한 번 붙어요.”

스티븐이 툴툴거리며 하는 말에 인도인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방 안 공기가 싸늘해졌고, 드디어 조용해졌다. 보호자인 유럽 미녀 역시 살짝 안도했다. 세 외과 의사의 경력을 모두 살폈었고, 세 사람 모두 지극히 우수한 의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란 가장 훌륭한 사람이 자기 가족을 수술하길 바라기 마련이고, 돈이 있을수록 특히 더 그랬다.

이런 긴박한 분위기일수록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마음도 조금 놓였다.

“수술 아직 더 걸릴까요?”

이제야 수술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또 수술 시간이 긴 걸 걱정할 때가 되긴 했다.

나라파트와 스티븐이 시선을 주고받았고, 역시 나라파트가 대답했다.

“곧 끝날 겁니다. 하지만 환자가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얼마나요?”

“환자 상태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취의 실력도요.”

나라파트는 마취의에게 덮어씌우지는 않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을 했다.

“그럼 이제 난 뭘 해야 하죠?”

보호자는 나이 많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자기 쪽 브로커를 바라봤다.

“방콕 병원은 수술 후 관리 쪽이 잘 되어있습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알리는 문제를 고려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브로커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다시 이었다.

“한두 시간 더 있다가 연락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술 끝나고 마지막 결과 들은 다음에요.”

“위험한 상황이 지난 건 아니라는 거네요.”

“수술은 원래 위험한 거니까요.”

브로커는 엄숙한 모습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보호자는 다시 집중력을 발휘해서, 어떤 수술인지 알아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계속해서 수술을 지켜봤다.

모니터 안, 모든 수술 중 바이털은 내내 평온했다. 지극히 위험한 대형 수술을 평범한 반복 노동으로 만드는 건 외과의들이 부지런하게 추구하는 목표였고, 그런 점이 임상 의학과 다른 업계의 다른 점이기도 했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기술 작업이 반복된 육체노동이 되고 있었다. 보통 종사자들이 반복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고무되는 건 유독 의학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연문빈 같은 젊은 의사는 수술하면서 미소를 짓기까지 했고.

“이제 롤렉스는 안전해졌네. 아, 장 선생님하고 영상 통화하고 싶다.”

“걸면 되지.”

좌자전도 조금 흥분한 상태로 불구경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히히, 지금 수술하느라 바쁘겠죠. 방해하지 말자고요.”

“그건 그러네. 돌아가면 다 같이 시계 차고 장 선생이랑 밥이나 먹자고. 아, 태국 특산물 좀 사서 선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방콕 병원은 글로벌 투어로도 순위가 높은 병원 아닌가요? 기술이나 좀 배우는 게 낫지 않아요?”

“태국 기술?”

좌자전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여원이 냉랭한 말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선생님이 쓸 기술도 아닌데 뭘 두려워해요. 게다가 나이 많아서 무슨 기술을 써도 상대 못 만나요.”

좌자전의 얼굴이 미묘해지자 여원이 입을 삐죽였다. 연문빈이 음흉하게 히죽댔다.

“그럼 마연린…….”

“마연린한테 쓰긴 아깝지. 야, 너 덩치에 안 맞게 되게 질투 많구나?”

여원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제! 헛소리하지 마라.”

연문빈이 서둘러 부인했다.

수술실이 소란스러워져도 수술 진도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복된 육체노동은 어시들도 점점 익숙해져서 수월해지기 마련이었다.

능연이 혈액 공급을 회복하자, 퀘스트 1-3 완성도가 (4/5)로 올라갔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좌자전을 바라봤다.

“전칠 씨가 동남아 출장 중이라는 거 같던데, 어디에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주세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보호자들도 점점 병원에 나타났다.

이상해할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의료팀을 모을 수 있는 환자와 보호자가 바다를 건너 방콕 병원까지 오는 덴 시간과 체력이 문제일 뿐이었다.

비교적 가까운 친척들은 방 안을 오래 지키고 있었던 유럽 미녀를 안아주며 한참 동안 위로했다. 내내 굳은 얼굴로 있던 미녀도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미소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드러내면서, 가까운 지인, 친척에게 사고 난 상황 그리고 구조, 처치 등 과정을 찬찬히 설명했다.

의사들 역시 별일 아니라는 듯 방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런 우연하고 특수한 경험은 의사 생활 오래 한 의사들에겐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신선하진 않았다.

“마리아,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중년 유럽 여성 하나가 또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차 사고였어. 운이 매우 안 좋았어. 다행히 제때 병원에 왔어. 수술도 순조롭고.”

친척들에게 둘러싸인 마리아는 반복해서 상황을 묘사하고는 미소 지어 보였다.

“줄리, 뭐 하러 왔어. 괜찮아졌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연히 와야지 무슨 소리니. 난 네 베스트 프렌드야.”

줄리가 눈을 깜빡이며 찬란하게 웃는 모습에 마리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감사한 표정을 지었다.

“아, 고마워.”

“휴가를 좀 일찍 끝내고 온 것뿐인데 고맙기는. 이번에 새로 바꾼 제트기가 쓸 만해서 다행이지, 일반 비행기 타고 올 뻔했어. 내가 허리가 안 좋잖니. 비행기 탔으면 지금 쓰러졌을 거야.”

“그럼 어서 가서 좀 쉬어.”

“아니야. 우린 절친이잖니.”

줄리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수술 화면을 바로 보여주는 거니? 정말 태국스럽구나!”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여기 의사들이 수술 상황을 봐줬으면 해서.”

“아, 의사들.”

줄리는 한눈에 스티븐을 콕 찍어 보면서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전남친 중에 의사가 있었는데, 뭐랄까 손이 아주 날렵했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줄리의 모습에 매너 좋게 싱긋 웃어 보인 스티븐은 모니터를 가리켰다.

“진짜 꽃미남은 여기 있습니다.”

“당신보다 더 잘생겼나요?”

줄리는 노련한 모습으로 추파를 보냈고, 스티븐은 싱긋 웃으며 집도의 전용 앵글 모니터를 가리켰다. 유심히 바라보던 줄리는 역시나 넋을 잃었다.

“이게 지금 헨리 수술하는 의사란 말이야?”

줄리는 의심하는 눈으로 절친 마리아를 바라봤고 마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실력이 제일 좋은 의사야. 경험이 제일 풍부하고 수술도 제일 많이 했어.”

“그리고 제일 젊겠지. 게다가 의사들, 지금 수다 떨고 있어.”

보호자는 수술실 의사들이 입술을 움직이는 것만 보이지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리아는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줄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고, 날카로워졌다.

“지금 수술 중이잖니! 의사가 수다 떨어도 수술이 괜찮아?”

순간 그 자리에 있는 의사 모두 멍해졌다. 수술실 상황은 어느 나라든 기본적으로 블랙박스 상태였다. 환자 보호자가 참여할 수 없는 건 둘째치고 환자 본인도 대부분 상황에선 마취되어 정신없는 상태이고.

그런데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어서, 방콕 병원은 휴머니즘을 발휘하여 수술실 모든 장면을, 능연 팀이 수다 떠는 것을 포함해서, 보호자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수술에 필요한 대화를 하는 거겠죠. 사실 수술 시간이 길어서 의사들도 릴렉스할 필요도 있고요. 그리고 의사들의 대화는 수술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박 원장이 가장 먼저 나서서 웃으며 설명했다.

“집중해야 업무 효율이 올라간다는 건 기본이에요. 지금 집중해야 할 때 아닌가요?”

줄리가 정색하고 하는 말에 박 원장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본인도 의사 출신이라 최대한 분위기를 풀려고 애썼다.

“계속 침울하게 일만 하면 오히려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의사들이 수술하면서 알아서 스트레스 푸는 건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수다는 아니죠.”

줄리의 말투가 점점 더 딱딱해지자 박 원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환자를 너무 특별 취급하지 않는 게 역시 좋습니다.”

“뭐라고요?”

“능 선생은 간 절제 수술을 3천 건 이상한 의사입니다. 오늘과 비슷한 수술도 4, 5백 건 했고요. 바로 그런 경험으로 능 선생을 집도의로 결정한 거겠죠.”

박 원장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능 선생과 그의 팀이 익숙한 작업 모드를 버리고 보호자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보호자가 바라는 의사 이미지 메이킹 하라고 하는 건 환자한테 도움 되지 않을 겁니다.”

줄리는 멍해져서 다시 입을 떼려고 하는데 마리아가 말리고 나섰다.

“수술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바꾸지 않는 게 좋아.”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마리아. 의사가 대화하지 않는다고 환자한테 더 해로운 건 아닐 거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마리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웃으며 잠시 기다리던 줄리는 마리아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마리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죠, 그렇죠?”

마리아가 곁에 있는 태국 의사에게 물었다. 차룬왕은 능연과 아무런 개인감정이 없고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수술은 매우 순조롭습니다. 방해하지 않는 게 좋아요. 게다가 곧 끝납니다.”

“그렇대.”

마리아가 절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입술을 할짝였다.

“됐어. 그럼 수술 끝나면 내가 고소해줄게.”

박 원장은 입을 삐죽일 뿐, 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수술 자체만 중요한 마리아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 안은 곧 다시 조용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원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 끝났습니다.”

모니터 안에 보이는 능연이 과연 수술복과 장갑을 벗은 다음 마스크도 벗어서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정말 끝났네.”

줄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모니터 가까이 다가가서 능연이 수술실을 나갈 때까지 유심히 지켜봤다.

“수술은 순조로웠습니다. 간 기능이 회복할 가능성도 매우 높고요.”

능연은 평소처럼 보호자에게 설명했고, 마리아를 비롯한 친척들은 당연히 크게 안도했다. 줄리는 능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바로 입을 열었다.

“능 선생, 수술 순조롭게 끝난 거 축하해요. 저녁에 크루즈 파티해요. 자, 어서 통역해요.”

그녀는 티슈 뽑아 쓰듯이 자연스럽게 박 원장을 끌어당겼고, 박 원장도 개인 제트기를 소유한 중년 여인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고 통역을 맡았다. 능연의 대답을 들은 그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돌아봤다.

“능 선생이 거절했습니다.”

“왜요? 제대로 통역한 거 맞아요?”

“약속 있답니다.”

줄리가 얼굴을 찌푸리고 하는 말에 박 원장은 묘하게 통쾌해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줄리가 코웃음 쳤다.

“내가 준비한 크루즈, 적어도 120피트짜리 대형 크루즈라고 전해요. 술과 음료 무한 제공에 유명 DJ, 그리고 미녀와 미남들! 어서 전해…….”

“크루즈, 술과 음료 무한 제공, DJ, 다 노 프로블럼입니다. 우리 파티에 오세요.”

막 당도한 전칠의 청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그녀는 뒤에 몇십 명 거느리고 나타났다. 단순한 원피스 차림인데도 매서운 기세를 내뿜는 사람들 앞에 있으니 유난히 더 우아해 보였다.

줄리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전칠을 심사했다.

얼굴이 이쁜 건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얼굴로 남자 꼬시지 않으니까. 몸매도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몸매로 남자 꼬시지 않으니까.

예쁜 옷도 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쁜 손톱이 ‘클래식 블루’인 걸 본 줄리는 입을 삐죽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올해 트랜드 컬러가 바로 클래식 블루였다. 작년 코랄과 재작년 바이올렛과 비교하면 클래식 블루는 너무 안정적이어서 패션감을 뽐내기 어려울뿐더러 잘못하면 촌스러워 보였다.

패션계는 평범한 클래식 블루를 좀 더 예쁘고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서 남색 셰도를 바르고 머리카락을 남색으로 염색했지만, 솔직히 정말로 특별하고 아름다운 패션 리더가 아니면 그런 방법으로는 피에로 같아 보일 뿐이었다.

그 색을 손톱에 쓰는 건, 매우 평범한 패션일 뿐, ZARA가 차라리 더 패셔너블 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 나름인 모양이었다.

눈앞에 예쁘장한 여자는 클래식 블루로 꾸며서는 눈에 띄기 어려운 아시아인이었다.

그냥 거기서 끝이었다면 줄리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전칠의 손톱 위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에 시선이 끌렸다.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의 왼손 검지와 중지, 오른손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남색이 작은 남색 돌로 빛나는 걸 똑똑히 봤다.

진정한 클래식 블루 돌멩이. 특별히 의심할 것도 없고, 줄리의 감별 능력으로도 그 작은 돌멩이가 모두 사파이어임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사파이어도 특별할 건 없고, 손톱에 올려놓은 것도 딱히 기발한 발상은 아니었다. 매니큐어에 박으면 조금 손상이 갈 순 있어도, 네일 관리사의 실력이 뛰어나면 그 정도 손상은 무시할 수 있었다. 부잣집 아가씨가 보석을 조금만 사도 어릴 때부터 클 때까지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고, 옷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다.

그러나 올해 유행 컬러와 딱 맞는 색이 나는 사파이어를 찾아내는 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패션에도 매우 민감한 데다가 그만큼 재력이 뒷받침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녀 손톱에 사파이어 품질, 수량, 크기만 해도 예전에 쟁여놓은 것이라면 몰라도 올해 사기는 보통 비싼 게 아니었을 것이다.

보석상이 조금만 똑똑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석이 올해 트랜드 컬러와 똑같다는 걸 알면 부르고 싶은 대로 가격을 불렀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올해가 지나면, 심지어 앞으로 6개월 안에 내년 컬러가 발표되면 이 클래식 블루 사파이어는 이 가격이 아니게 된다.

혹시 마침 집에 이 클래식 블루 사파이어가 있었고, 그래서 마침 주얼리 장식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집안인지 더욱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줄리는 강렬한 경쟁의식이 발동해서 콧소리를 내며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파티 열고 싶으면 초대할 사람이나 알아서 초대하세요.”

전칠은 상대가 자기를 주시하는 것만큼 상대를 주시하지 않았다. 능연을 신경 쓰기도 바쁘니 말이다.

“그럼 알아서 초대할 사람만 초대할게요.”

전칠은 아름답게 웃어준 다음 능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대충 수술 끝났을 시간이더라고요. 어땠어요? 잘했어요?”

“응, 순조로웠어요. 어디에서 온 거예요?”

능연은 바로 대답하고 또 자연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라오스에 있었어요. 목재랑 약초 좀 살 생각이었죠.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현지 책임자에게 맡겼죠.”

“고생했어요.”

능연은 자기도 방콕으로 날아온 참이라 장거리 여행이 어떤 건지 잘 공감됐다.

전칠은 더욱 달콤하게 웃으면서 입을 오물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능연을 바라봤다.

“그럼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응. 지시만 좀 내리고요.”

능연은 바로 좌자전, 연문빈, 여원을 불러서 작은 소리로 잠시 이야기하고는 박 원장을 바라봤다.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은 방콕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어찌 됐든 국경을 넘어 온 거라서, 환자 상태가 안정된 걸 보고 가셔야 합니다. 그게…… 출장 수술 조건에 그것도 포함된 거라서요.”

“물론입니다. 환자 상태에 변화가 생기면 바로 콜 주세요.”

능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병원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원래도 삼선 의사들은 수술이 끝난 후 회복실에서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일이 지극히 드물었다.

박 원장은 영어로 방콕 병원 차룬왕과 나지막이 대화를 나눴다. 방콕 병원도 그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요구하지 않고 우호적인 얼굴로 능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럼 가요.”

모든 게 순조롭게 정리되자 능연도 안심했다. 그때 줄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툭 내뱉었다.

“오늘 오후엔 라오스에서 방콕으로 오는 비행기는 없었어요.”

줄리의 적의를 너무 잘 이해하는 전칠은 살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네, 일반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았죠.”

“흥, 여기 개인 비행기 없는 사람 있어요? 친구를 통해 알아봤어요. 라오스에서 방콕으로 오는 비행기는 개인 비행기를 포함해서 비엔티안, 루앙프라방 어디에서도 없었어요. 왜 거짓말하는 거죠!”

전칠은 조금 놀란 얼굴로 줄리를 바라봤다.

“우리도 동남아에서 비즈니스를 하거든요. 전칠 씨,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요?”

줄리가 가슴을 내밀며 하는 말에 전칠은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비밀까지는 아니고, 시간이 없길래 군용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편하진 않더라고요.”

전칠은 능연을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흔들렸어요. 자리도 불편하고. 내부 공간은 크던데 아무런 장식도 없어서 음침하고.”

“태국에서 만나면 더 편할 줄 알았죠.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오는 건 고려하지 못했네요.”

능연이 고개를 젓는 모습에 전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줄리의 얼굴이 흐려졌지만,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의사는 다 이래?”

인도인 나라파트는 참다 참다 온몸을 떨며 불만을 터트렸다.

“저런 사람이 왜 의사를 하는 거지? 의사 하면서 왜 기술까지 키우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답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다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마리아가 박 원장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능 선생을 장기 고용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남편이 회복할 때까지요.”

“물어볼 수는 있는데, 아마 어려울 겁니다.”

박 원장이 비굴하면서도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난 파티는 됐어요.”

능연은 항온 수술 구역을 벗어나자마자 냉큼 한마디 했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건 능연의 타고난 속성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능연이 오랜 시간 고뇌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고.

어릴 때는 선택지가 적어서 자주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곤경에 부닥쳤지만, 나이를 먹고 단련해갈수록 그런 상황이 점점 줄어들었다.

파티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초대받아서 몇 번 가본 후론 더욱 흥미를 잃었다. 이런 서양식 사교 방식은 태생적인 폐단이 있었다. 동양식 사교 방식은 적어도 지인의 지인의 지인 등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규모와 형식이 제한된다.

하지만 파티 같은 형식은 전혀 다르다. 이벤트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사람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벤트 특성에 따라 참여하는 인원이 끝도 없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게 가장 끔찍한 점이었다.

몇 번 파티에 참석해본 경험으로, 어떤 파티는 심지어 계획한 인원보다 열 배가 늘기도 했다. 제때 도망 나오긴 했어도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심지어 파티 같은 활동은 끝나지 않은 사교 활동으로 여겨졌다. 처음에 있던 사람이 돌아갔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 끝도 없이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는 상황은 가히 공포였다. 특히 뒤에 나타난 사람이 ‘능연 어디 있어?’라고 중얼거릴 때, 다년간 단련한 근육을 쓰고 싶지 않아도 쓸 수밖에 없었다.

능연의 그런 반응을 예상한 전칠은 생긋 웃었다.

“언제 그 소리 하나 기다리고 있었네요. 이렇게 오래 버틸 줄 몰랐는데요? 고마워요.”

“왜 고마워요?”

능연은 조금 의아해했다.

“내 생각해 준 거잖아요. 안에서 바로 거절했으면, 다른 방법으로 그 여자를 상대했어야겠죠.”

전칠이 입을 삐죽이며 하는 말에 능연은 헛웃음 지었다.

“내가 만나자고 했으니, 당신이 장소랑 방식을 정하는 게 합리적이잖아요. 다만 내가 파티라는 형식을 싫어할 뿐이에요. 음, 싫기도 하고 위험해요. 다른 건 전혀 상관없어요.”

“크루즈, DJ, 술과 음료, 그리고 미녀와 미남은 괜찮다는 거예요?”

전칠이 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에 능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춤은 괜찮아요. 대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그건 더 쉽죠.”

전칠은 뒤를 따르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럼요.”

“문제없습니다.”

부하들은 내용을 이해했는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고, 이럴 땐 호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칠이 능연의 팔짱을 끼고 좀 더 멀어지자 부하들은 긴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120피트 이상의 특급 크루즈,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청 비쌌다. 전씨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비용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적당한 걸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특급 크루즈는 개인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보통 특별 주문이었다. 가끔 렌트도 있지만 선택지가 줄어들고, 게다가 120피트 기준에 맞는 건 더욱더 드물었다.

이런 건 순수한 사치품이라, 억 단위 특급 크루즈는 기능과 실효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 모든 부품이 얼마나 비싼 범위에서 선택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같은 크기 선박보다 더 비싼 엔진 등 기계 부품을 채택하는 것 외에도 더 비싼 목재 혹은 가죽으로 바닥을 깔고, 더 비싼 예술품 혹은 골동품으로 장식하고, 더 비싼 순동이나 황금 등 귀금속으로 장식한다.

화장실 여덟 개에 들어가는 변기에 백만 위안, 혹은 욕조 하나하나에 백만 위안을 쓰는 것도 특급 크루즈에서는 평범한 일이었다.

바에서 쓰는 컵 하나도 백에서 천 위안짜리 잘 안 깨지는 제품에서, 더 비싸고 잘 깨지는 제품으로 바꿀 수 있다.

게다가 크루즈는 개인 비행기처럼 멀리서 바로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크루즈는 원래 서두르는 법 없고, 특히 바다를 넘어서 온 크루즈는 바로 사용하기 전에 우선 유지보수부터 해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전씨 가문은 인맥이 넓고 전칠 명의하에 여러 회사 CEO들도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인사라 전화를 부지런히 걸고 이메일을 부지런히 보내면 기회는 있을 것이다.

열 몇 명의 직원은 멀어져 가는 능연과 전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열심히 움직이면서 자신의 인생 가치를 충분히 만끽했다.

연문빈과 좌자전 등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불빛이 환한 차오프라야강(태국 방콕을 가로질러 흐르는, 태국에서 가장 큰 강)은 온순하고 아름다운,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태국 여자처럼 고요히 흔들렸다.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들이 즐거운 환호성과 함께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능연과 전칠은 남색과 흰색이 섞인 큰 배의 갑판에서 상쾌한 바람을 즐기며 서 있었다. 바람에 땀이 마르니 당연히 상쾌했다.

“이러니까 방콕이 의료 투어 목적지라고 하는군요.”

능연은 강가와 배 위의 관광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구경하는 게 방콕 구경거리 중 하나긴 해요.”

전칠은 능연과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방콕은 불교문화가 있어서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고 하더라고요. 동남아 다른 나라보다 교육 수준도 높고요. 태국 의사들도 각 리스트에 자주 나타나잖아요. 물론, 능 선생님이 더 대단하지만.”

“수술은 전공이 다 달라요. 난 간 절제에서만 좀 앞서는 거고.”

능연은 자신의 기술 평가에 확고한 기준과 조건이 있는 사람이고, 시스템이 생긴 후로 그 기준과 조건이 더 높아졌다.

전칠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사실 능연의 평가 방식이 꽤 익숙했다.

피아노 소리가 살며시 울리고, 배 안의 무드등도 숨 쉬는 것처럼 밝아졌다.

“능연 씨, 우리 춤춰요.”

전칠이 갑자기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진작 계획한 장면이지만, 막상 말을 꺼내자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대도 되고 불안도 하고. 전에 없던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칠이 익숙한 세계와 달리, 능연과 함께 있을 때면 의외의 대답, 의외의 행동을 보게 된다. 보통 능연의 예상하지 못한 행동과 말은 전칠을 더욱 흥분하게 하거나 기쁘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매우 불안정했다.

“좋아요.”

능연은 흔쾌하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역시나 예상 밖의 대답,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전칠! 기분 좋아졌어!

펑! 크게 터진 불꽃에 선체 주변이 다 환해졌고, 하얀 안개에 크루즈 갑판이 몽롱하고 흐릿해졌다.

전칠은 가늘고 긴 손을 능연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하나둘셋, 셋둘하나.

두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왈츠를 추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교댄스의 기초 스텝, 속칭 노인네 스텝이라고 불리는 간단한 스텝이었다. 조금만 배워도 강약약 걸음으로 리듬감 있게 춤출 수 있고, 처음 배우는 사람도 셋까지만 셀 수 있으면 상대에게 지지 않고 맞출 수 있는 스텝.

50미터 넘는 갑판, 5층짜리 특급 크루즈 위에서 왈츠를 춘 사람은 배가 만들어진 날로부터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전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지금 발가락까지 다 핑크빛이고 무슨 춤을 춘대도 전혀 상관없었다.

능연은 더 상관없었다. 어차피 춤은 학교에서 각종 활동을 하며 배운 것이다. 다만 노래와 달리 학교에서 배우는 댄스는 그가 배우기 시작하면 자꾸 변형되고 변형되다가 능연이 가장 익숙한 왈츠가 될 뿐이었다.

갑판 양측 무대 위에서 함께 춤추는 다른 사람들은 매우 상관있었다. 진가 사용인이 불러온 댄서들은 모두 고급 파티에 참석하는 선남선녀로, 춤 솜씨가 좋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 메이커로도 일류였다. 그런 댄서들이 분위기를 맞춰주면 다른 크루즈 파티의 경우에는 환락의 바다가 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 파티는 전혀 재미가 없었다.

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척하는 사람도 없고, 그들이 아무리 춤추고 노래해도 스테이지 위 두 사람은 전혀 감흥이 없는 듯했다.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듯 영어로 큰소리 친 댄서는 바로 무대 아래 작업 요원 아저씨가 쏜 레이저를 맞았다. 댄서는 머쓱하게 웃고는 고분고분 댄서 무리로 돌아갔다.

피아노, 기타, 드럼, 그리고 선남선녀들은 각 엔터테인먼트 컴퍼니에서 파견된 직원의 지도하에 착실하게 ‘현장을 생기발랄하게 분위기 내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펑펑! 폭죽이 다시 터지면서 공중에 화려한 불꽃을 아름답게 피우자, 차오프라야 강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현장 감독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팔을 크게 뻗어 리듬감 있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부하 직원들도 망설이지 않고 양팔을 들어서 마찬가지로 리듬감 있게 흔들었다.

선남선녀 댄서들은 분위기를 띄우라는 뜻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전형적인 분위기 메이커가 할 일이었다.

보통 파티가 너무 침울해서 분위기를 방방 띄워야 할 때 알아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이런 단독 무대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효과가 더 좋지만, 오늘 갑판 스테이지 위엔 왈츠를 추는 두 사람밖에 없었고, 섞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섞여 들어간들 즐겁지 않을 것이고.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니, 선남선녀 댄서들은 반사적으로 즐거운 척 현장 음악에 맞춰 훌륭한 파티 분위기를 냈다.

“오늘 파티는 느낌이 괜찮네요.”

능연은 왼쪽 10미터, 오른쪽 10미터, 전후 20미터 모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조용한 환경을 위해 차라리 해부용 시신과 복습을 선택하는 남자라, 춤추는 분위기에도 당연히 본인의 이상과 편애가 있었다.

전칠은 그저 살며시 웃으며 얼굴을 능연의 어깨에 기댄 채, 123, 321 스텝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동안 배워온 어떤 왈츠, 차차, 민속 무용, 캉캉, 재즈도 이 단순한 123 왈츠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내일 계획은요? 귀국? 아니면 태국에서 며칠 놀아요? 바다로 나가도 되는데.”

전칠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능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나 이틀 정도? 상해에 슬관절 수술 예약환자가 있어서.”

“이틀이나요? 우와, 출장 수술 혜택이에요?”

전칠은 매우 놀랐다.

“출장 수술 비용이 조금 비싸긴 해도, 그것 때문은 아니고요.”

“말해줄 수 있어요?”

“그럼요. 좌 선생이나 연문빈 선생들도 태국은 처음이잖아요. 며칠 놀고 싶을 거예요.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동의해주는 게 좋을 거 같았어요.”

능연이 곰곰이 생각하며 하는 말에 전칠은 입을 삐죽였다.

“그럴 줄 알았어. 부하들한테 이용당한 거야.”

전칠은 그렇게 말해놓고 바로 덧붙였다.

“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나. 저 ‘이용’이라는 단어는 순수한 의미의 이용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나도 알아요. 어쨌든 부하들 기분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부하들한테 너무 잘해줘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돈도 벌게 해주고, 출장 와서 여행도 하고. 게다가 플렉스할 방법도 생각해 주고. 이런 상사가 어디 있어요.”

전칠은 혀를 끌끌 찼다.

“처음에 경영 수업받을 때……. 흠흠, 아니다. 됐어요. 어쨌든 이틀 쉴 수 있다니 좋네요. 나도 마침 이틀 비울 수 있어요.”

능연과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면 당연히 어떻게든 시간을 더 냈겠지만, 능연과 외국에서 이틀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더 기쁜 일은 바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크루즈는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안정적으로 운행했다. 두 곡 춤을 춘 전칠은 온몸이 뜨거워져서 멈췄고, 양쪽 무대의 분위기 메이커들도 슬슬 멈추었다. 활발한 젊은이들이 바로 가서 물 마시는 척하고 술 마시는 것도 현장 스텝들이 모른 척해 주어서 분위기는 리얼로 떠들썩해졌다.

다만 출입 제한 구간은 여전히 엄격했다. 출입 제한 구역 구분은 전칠과 능연의 표정을 보고 현장 요원의 판단하에 정해졌다.

“잘하고 있어. 다들 열심히 하자고. 전칠 아가씨의 신남 지수가 역대치를 찍고 있어. 보너스 두둑하게 나올 거야.”

부하들을 격려하는 현장 지휘자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서 똑똑하고 나지막하게 들렸다.

“능연의 신남 지수도 중요한 기준 아닌가요? 이것도 보너스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규칙은 없지만, 신청하면 나올 것 같아.”

누군가 묻는 말에 현장 지휘자가 바로 승낙했다. 현장 분위기를 띄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능 선생 신남 지수가 벌써 떨어지는 거 같은데요.”

누군가가 갑자기 하는 말에 현장 지휘자가 순간 긴장했다.

“자리 정리하고, 스테이지 공간 거리 유지. 조타실, 향해 방향 다시 확인하고, 풍속 체크 해.”

2분 후.

“환경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능 선생 신남 지수가 확실히 떨어지고 있어요. 아직 높은 건 맞지만······.”

“무슨 이유일 거 같아?”

현장 지휘자가 말을 자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10초 기다리던 현장 지휘자가 서서히 말을 이었다.

“정 안 되면 계획을 짜야지. 환자가 나타나는 게 최고의 방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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