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재규어를 주차한 오스본은 어깨를 움츠린 채 한참 걷다가 서서히 어깨를 폈다. 위층에서 그의 차가 들어온 걸 본 비서가 서둘러 내려와 그를 마중하며 허탈하면서 투덜거렸다.
“아직 하늘이 캄캄해요. 이런 시간에 메일을 확인하고 오신 건 아니죠?”
“내가 5시에 메일을 확인하는 건, 내 의사들이 아침 먹을 때 내 메일을 읽길 바라서야. 그래야 출근할 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어? 능연은 아직 내 의사가 아니지만……. 참, 능연 왔나?”
오스본은 모자를 살짝 고쳐 쓰며 물었다. 두 번째 아내가 선물한 모자인데 지금 아내에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가장 비싼 이 소품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 오스본 역시 비교적 중시하는 자리에서나 썼고. 하나의 상징 같은 일이라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모자를 보면 오스본이 그 자리를 중시한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중2병 같은 말로 말하자면, ‘나, 지금 진지’랄까.
진지한 대머리…… 진지한 사내는 모자를 쓰면 조금 더 잘생겨졌다. 의사를 해고하거나, 의사를 채용할 때가 아니면 오스본이 보통 의사를 만날 때 이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걸 그의 비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 문턱이 아무리 상당히 낮아졌다고 해도 심장 센터 주임이 의사 채용에 일일이 관여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능 선생은 벌써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비서는 일단 오스본의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채용하시려고요? 팀원을 슬쩍 떠봤는데 능 선생은 태평양 건너서 일할 생각은 없는 듯하던데요.”
“사람 생각은 변하는 법이니까.”
오스본은 모자를 가리키며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앞으로 향했고 비서는 그 뒤를 따르며 크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가 잘 아는 오스본 주임은 원래 인사 채용에 자주 실수하는 리더라서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었다.
채용하고 싶다면 채용하라지.
비서는 좋게 생각하지 않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에 이 일에 관심 많은 21명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냈을 뿐이다.
“5시 11분에 수술실이라…….”
투명한 통유리 대기실 안에서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던 오스본이 갑자기 생각이 많은 듯 탄식했다. 같은 업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스본이 가장 힘들었던 때도 바로 서른 남짓, 주치의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때는 주치의가 병원에 오기 전에 회진하고 문제 해결하고 응급상황을 처리하곤 해야 했다.
그 단계가 지난 후에도 가끔 일찍 일어나 수술할 때도 있었지만, 모두 특수한 경우였다. 주임이 된 후론 몸도 안 따라줘서 이 시간에 수술실에 올 일은 더욱 줄었다.
오스본은 휴게실에 있는 에피프렘넘을 쓰윽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잎사귀의 촉촉한 느낌에 바로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숨결도 편해졌다.
“Sir.”
비서가 나직이 그를 부르자 오스본이 화들짝 눈을 떴다.
“잠든 거 아니야.”
“능 선생이 곧 나옵니다.”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만지는 오스본의 모습에 비서가 다급하게 알렸다. 오스본도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내며 자조하듯 웃었다. 약도 안 먹었는데 만질 게 뭐 있다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에피프렘넘을 만지며 상태를 조절하고 나니 빨강 불에서 초록 불로 변한 수술실에서 나오는 능연의 모습이 보였다.
“수술은 순조로웠습니다…….”
능연과 함께 나온 펠릭스는 피부도 푸석하고 지친 모습이었는데 정신만은 막 야동을 본 중학생처럼 기운차서 수술실 안의 광경을 다시 한번 회상해야만 엄숙하고 진지하게 보호자 면담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능연은 운화병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고요히 한쪽에 서 있었다. 능연이 수술할 때는 규칙대로 주치의 하나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턴들이 기회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주치의들은 시간 제약이 있었고, 인턴이 얼마나 수술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언제 시간이 맞을지, 수술 퀄리티는 어떨지, 모두 주치의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능연의 수술은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도 경쟁해야 했다. 펠릭스가 선착순이라고 조건을 내걸어도 새벽 타임을 쟁취할 뿐이었다.
곧 보호자가 자리를 뜨자, 오스본이 냉큼 다가갔다.
“능 선생, 오늘 수술 느낌은 어땠습니까?”
“주임님?”
놀라서 목소리 톤까지 높아진 펠릭스가 오스본을 바라봤다. 오스본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듯 손을 휘두르고는 능연을 향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클리블랜드의 진료 시스템이 중국보다 더 세분되어 있습니다. 우리 환자는 대부분 지방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어서 오는 환자예요. 더 재미있는 수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능연은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오늘 첫 수술 환자는 2차 우회술 수술이었고, 두 번째 수술은 전에 신장 이식을 했었던 환자, 세 번째 수술은 기초 질환이 가득한 고령 환자…….”
“벌써 세 건이나?”
“네.”
능연은 그의 쓸데없는 질문에 마지막 예의를 갖추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오스본은 하하하하 네 번 웃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기계는 손에 익던가요? 혹시 불편하면 다른 거로 교체해도 됩니다. 2만……. 5만 달러 정도는 경비 처리됩니다.”
“우리한테 그런 정책이 있나요?”
펠릭스가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묻는 말에 오스본은 냉담하게 그를 흘겨봤다.
“지금부터 생겼네.”
펠릭스는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나서 곁에 있는 비서에게 속삭였다.
“전엔 안 그랬는데…….”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능연은 여전히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오스본을 거절했다. 너무너무 많은 선물 제안을 받아온 그는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 더더욱 잘 알았다. 직접적인 거절이 가장 좋은 방식이었고, 능연은 매우 노련하게 그 방법을 썼다.
오스본은 낙담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술 기계나 수술실뿐만 아니라 의사들의 서포트도 훌륭하죠.”
능연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오스본은 미소를 유지했다.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실험실과 실험 환경도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것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필요하면 체계화된 교육 루트도 있습니다. 선생이 참여한다면 분명 지극히 뛰어난 체험을 하실 수…….”
“슬슬 돌아갈 생각입니다.”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하는 능연의 모습에 오스본은 큰 충격을 받아서 조금 멍해졌다.
“돌아가……. 하지만……. 내장 역위증 환자도 아직 남았는데…….”
“끝내고 돌아갈 겁니다.”
능연 역시 명확한 대답을 주었다. 공짜로 하는 수술이니 내장 역위증 환자 몇 더 수술하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능연의 단호함을 느낀 오스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조금만 더 배울 시간을 주시면…….”
“펠릭스와 켈런이 이미 여러 건 저와 수술했습니다. 심장 우회술 쪽으로는 조금만 연습하면 충분할 겁니다.”
능연의 대답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클리블랜드 심장 센터 주치의인 펠릭스에게 허투루 함께 수술할 시간을 준 건 아니었다.
능연의 코치를 받은 오스본은, 특히 능연의 귀국 의사를 깨달은 다음 다시 펠릭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녀석도 조금 잘생겨 보인다고 생각했다.
“펠릭스……. 자네 처음에 클리블랜드에 왔을 때 내 복강경 어시했었지?”
오스본은 평범한 노인네처럼 빙긋이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펠릭스는 이 자애로운 주임이 왜 늑대 할아버지처럼 느껴질까 생각하며 흠칫했다. 그러고는 연달아 서른 개가 넘는 수술 방식을 떠올렸다.
“예, 그런 기회를 주셨었죠.”
펠릭스는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역시 클리블랜드의 주치의고 밖에서는 능력자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내부에서는 그다지 총애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클리블랜드 심장 센터가 큰 후궁이라면 펠릭스는 오스본이 취했을 때나 운 좋게 다른 사람과 함께 알현하는 존재랄까…….
복강경 어시는 클리블랜드의 전통 중 하나였다. 상급 의사가 진료과 펠로우에게 복강경을 넘기고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건 일대일로 전수하는 과정 중에 비교적 친밀한 방법이었다. 펠릭스 역시 복강경을 든 적 있지만, 오스본의 수술실엔 그렇게 많이 들어간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빵은 이미 펠릭스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언젠간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클리블랜드의 대들보, 디딤돌이 될 거라고 그때부터 생각했었다네.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좋군.”
“이런 날이 왔다고요?”
펠릭스가 목을 쓰다듬었다.
“오늘 수술 더 할 텐가?”
오스본이 갑자기 물었다. 대빵이 그렇게까지 물으니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더 할 수 있습니다.”
“내 수술 어시 한 번 하게. 음, 혈관 준비해주겠네.”
오스본은 껄껄 웃으며 펠릭스의 어깨를 감싼 채 수술실로 가다가 능연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능 선생도 함께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수술엔 여전히 흥미 가득한 능연은 중간에 변화가 생겼으니 더 좋다고 여겼다. 오스본은 심장외과 분야에서 레전드였고, 어쩌면 정말로 레전드급 기술을 선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정리하고는 수술실로 돌아가서 한창 수술 준비 중이던 네 초짜 의사 중에서 한 의사의 수술을 가로챘다.
그들은 긴말 없이 각자 위치에 섰고 펠릭스가 단도직입적으로 환자의 심장을 찔렀다.
집도권을 막 빼앗긴 초짜 의사는 올해 서른아홉 살로 벌써 마지막 2년만 남은 흉부외과 레지던트였다. 미국인 특유의 오만과 편견이 있지만, 십여 년이란 잔혹한 학습과 시험에 다 갈려 나갔다. 지금 그는 근육 폭발하는 소방대원 출신 배관공을 바라보듯 위풍당당한 심장외과 주치의 펠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도권을 빼앗긴 서른아홉 백인 초짜 의사는 이제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도 모두 사라졌다.
귀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49세 환자, 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간, 신장 기능 부전…….”
집도권을 빼앗긴 초짜 의사가 작은 목소리로 상황 설명을 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성장해온 펠릭스 역시 그냥 힐끔 쳐다보고는 자기 리듬대로 손을 놀렸다.
능연과 오스본 역시 펠릭스의 스텝에 맞췄다. 펠릭스가 팔뚝에 힘을 주어 환자 신체에 선을 긋자 피가 옅게 스며 나왔다. 메스가 들어가는 순간, 펠릭스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더니 맞은편에 대빵 오스본, 왼쪽엔 겁나 잘생긴 능연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지금 모두 그의 어시인 것이다.
“사진 한 장 찍지.”
펠릭스는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끝까지 자애로운 스승 노릇을 하려던 오스본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무슨 수술 방식을 쓸 건가?”
“중국에서 배운 말이 하나 있습니다.”
집도의 자리에 선 펠리스는 점점 광기가 심하게 드러내며 중국어로 크게 외쳤다.
“납신승여성(納新勝予性)!”
“그게 무슨 뜻인가?”
“Nothing better thing입니다.”(*납신승여성의 발음과 비슷함. 납신승여성의 뜻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Sex)보다 낫다는 뜻도 됨)
펠릭스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 명언이라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영어랑 발음이 매우 비슷해서 우리가 배우기 좋고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실제 중국에 이런 명언은 없음)
“Nothing better thing이라…….”
오스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지금은 환자 심장만 생각하고…….”
그는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싱긋 웃고는 포셉과 거즈를 받아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 우회술만 따지면 그야말로 능수능란한 펠릭스는 능연의 방법대로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능연이 지금 바로 옆에 서서 언제든 보조하거나 지도할 수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기술 조공도 가능한 상태이니 말이다.
심장 수술을 전투에 비유한다면 매 수술은 같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같고, 많이 할수록 자연스럽게 전장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정한 천재적 전술이 꼭 전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후대, 특히 똑똑한 후대는 어찌 됐든 끊임없는 학습과 반복으로 발명자의 경로를 다시 재현, 개발한다. 바둑처럼. 당연히 변화하지만, 그 변화는 결국 일정 범위에서 움직인다.
능연의 수술은 원래 대단한 혁신은 아니라서 펠릭스도 쉽게 배웠는데 다른 상황이 벌어지면 어떤 처리 방안을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 난제였다. 능연의 수술 과정엔 너무나 많은 처리 방안이 있으니까.
이것도 전투에 비유해서 미션이라고 본다면, 한 미션마다 구석구석에서 발생하는 작은 전투가 각기 다른 것처럼 말이다. 능연의 처리 방안은 보통 기술적 수단이 매우 필요했다. 엘리트 부대가 모든 전투를 진행하는 것처럼.
펠릭스가 쉽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워냈다.
“오스본 선생님, 어떻습니까?”
심장 혈관을 봉합하기 시작한 펠릭스는 심장외과의 특유의 잘난 체, 호승심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음……. 재미있군.”
오스본은 펠릭스가 잘난 체하도록 내버려 두며 건성으로 웅얼거렸다. 펠릭스의 동작은 티 나게 조금 굳어 있었지만,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디테일을 제어할 수 있다는 건 심장 우회술의 경신, 교체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므로.
그 생각에 오스본은 이미 즐거워졌다. 지금 심장외과는 7, 80년대 심장외과와 비교할 수 없다. 기술 교체가 매우 느려서 클리블랜드 심장 센터 같은 곳에서도 조금이나마 혁신을 이뤄내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펠릭스가 이 정도 배워 온 것만 해도 대단했다. 물론 가장 완벽한 해결 방안은 능연이지만…….
힐끔 능연을 바라본 오스본은 마음이 동했다.
“능 선생, 논문 하나 쓰는 게 어때요? 내가 추천해 주지.”
“음……. 논문이요?”
“문제없습니다! 다 정리해 두었거든요!”
주저하는 능연의 모습에 여원이 바로 나섰다. 수술실이 아니었다면 이미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뛰지 않았을 뿐, 매우 흥분했고.
오스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어느 간행물을 추천해 주시나요? 제…… 저희가 거기에 맞춰 수정할 수 있습니다.”
여원은 그 자리에서 결정 내리려고 했다. 간행물마다 특색이나 요구 조건이 달랐다. 특히 정상급 간행물은 도표, 행간 모두 특정한 조건이 있다. 여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스본은 능연을 봐서 여원도 친절하게 대했다.
“란셋 어떤가요?”
“좋습니다!”
여원은 호두만 한 작은 두 주먹을 꾹 쥐고서야 ‘좋습니다’를 여덟 번 연발하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