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화 의대.
연문빈의 BMW를 몰고 온 좌자전은 행정동 아래 바로 주차하고는 느긋하게 올라갔다. 수술을 마친 선대 무 원장은 재활과 건강 검진을 하느라 긴 시간 운화병원에 머물렀고, 자주 두 사람을 접대하던 좌자전도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셈이었다.
큰 부탁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운화대 규모라면 함께 발전할 해부용 시체 하나 구해주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좌자전의 부탁을 들은 무 원장은 싱긋 웃었다.
“좌 선생, 마흔 넘었지? 부랴부랴 이러는 거, 부주임 준비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좌자전은 머쓱해졌다.
“부주임은 한참 걸립니다. 능 선생이 기회를 주려고 하니 최대한 해보려고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못 했거든요.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수술하기도 편하고 기술 늘리는 것도…….”
무 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아직 학구열이 남은 사람이라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좌자전의 말에 순간 인정하는 마음이 커졌다.
“정말로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무 원장이 말을 자르며 하는 말에 좌자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마침 해부 수업을 열 생각이야. 소규모로. 이미 일을 시작한 임상의 대상이지. 우리 해부학 교수가 수업할 거야.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네.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수업 시간도 탄력 있게 할 거고.”
“그럼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좌자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부용 시체는 매우 드물어서 혼자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해부용 시체가 있어도 어깨만 좀 만져볼 뿐이었을 텐데, 전면적으로 배울 수 있다면 이득이 더 컸다.
물론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려해 볼 문제였다. 다행히 응급센터 듀티는 좌자전이 배정했고 조금만 조절하면 수업 시간 정도는 문제없다. 몇 날 며칠 해부실에서 보낼 시간도 없고, 능연이 마음을 바꿔서 다른 요물을 가르치려고 들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좌자전이 승낙하자 무 원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업 시작할 테니, 비서를 통해 알려주겠네. 마침 알맞게 찾아왔구먼. 잘됐어.”
“감사합니다, 원장님.”
좌자전은 대답부터 하고 의문이라는 듯 다시 말했다.
“운화대에 이런 해부 수업이 있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
“소규모거든. 사적으로 연락한 의사만으로 꽉 차.”
무 원장은 뿌듯하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원래 능 선생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바빠서 시간이 없지 싶더라고.”
“저도 특별 케이스라서요.”
좌자전은 웃으며 단 한마디로 화제를 빙 돌리며 물었다.
“저 같은 나이에 다시 해부 배우는 사람은 없겠죠?”
“딱 반대지. 다 좌 선생이랑 비슷한 서른 후반, 마흔 초반 의사야.”
“에? 그런가요?”
“음. 젊은 애들은 순서가 안 가지.”
좌자전은 멈칫하다가 무 원장과 눈을 마주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희귀한 자원은 당연히 경쟁해야 하고, 학교를 떠난 후엔 꼭 젊음이 가산점이 되는 건 아니다. 운화대에서 여는 이런 소규모 수업은 젊은 사람이 더 몰라서 아예 놓쳐버릴 가능성이 더 컸다.
좌자전처럼 본인 기술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의사도 사실 병원에서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서른 넘어 마흔 줄에 들어서도 기술이 떨어지는 의사는 널리고 널렸다.
다른 업계와 마찬가지로, 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실력이 떨어지고 학습 의지와 투지도 없는 사람은 마흔 넘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실력이 있어야 돈도 벌고 생활도 변한다는 걸 느꼈을 때 그들은 보통 주식 투자……를 시도한다. 그쪽으로도 재능이 없음을 깨달은 후엔 평생 의학에 몸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물론 실력 있는 의사도 실력 나름이다. 실력이 뛰어난 의사도 해부 공부는 여전히 필요하고, 계속 배우고 계속 연구하려는 동력은 필수다.
정상급 수준에 이른 임상의 역시 해부학은 매우 필요하다. 독일이 어떻게 지금 같은 현대 의학 체계를 갖췄는지, 정상급 의사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두 제3 제국 시대의 전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르신 몸은 괜찮으시죠?”
좌자전이 일어나기 전에 안부를 묻자, 무 원장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최근엔 테니스도 다시 시작하셨다네.”
“다행입니다. 정기 검진 잊지 마시고요.”
좌자전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변에 환자 생기면 보내주셔도 됩니다. 능 선생이 하는 수술도 점점 많아지고, 적응증도 광범위해졌습니다. 하하하.”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잘못하면 모욕과 도발이라고 느낄 말이었지만, 좌자전의 말은 무 원장의 미소를 끌어냈다. 그는 발목을 살짝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말일세. 무릎이 시원찮아. 물이 찬 것 같던데.”
좌자전은 허벅지를 철썩 내리치고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 원장의 눈빛 아래 침착하게 웃어 보였다.
“제 말은, 무릎 문제는 좌시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사진은 찍으셨나요?”
“그랬지.”
“그래도 병원에 가서 MRI 한번 찍으시죠. 능 선생에게 보이고 필요하면 슬관절경으로 처리하고요.”
좌자전은 영업사원처럼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끼리 얘지만, 국내에서 슬관절경을 잘하는 의사 중에 능 선생과 견줄 만한 사람은 손에 꼽힙니다. 정말로 손에 꼽히죠.”
의학원 원장인 무 원장은 좌자전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심장외과 디테일로 하는 정형외과 수술 말인가?”
“원하신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죠.”
좌자전은 매우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무릎도 고를 수만 있다면 심장 대우를 받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무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네.”
“어쩌다 무릎에 문제가 생기셨나요?”
“배드민턴이겠지. 후우. 아버지랑 같이 치다가 몇 번 다이브 동작했더니 무릎이 아프더라고.”
“다이브요?”
좌자전은 배드민턴 다이브 동작을 떠올려 보다가 큰 보폭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죠…….”
“늙었어, 늙었어. 무릎도 망가졌고. 요즘은 아프기까지 하더라고. 나중에 내가 찾아가겠네.”
“나중에 말고 말 나온 김에 오늘 가시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문제 있으면 슬관절경은 당일 수술도 합니다. 내일이면 바로 집에서는 일하셔도 됩니다.”
좌자전은 능숙하게 설득하면서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무 원장은 나이 든 고양이가 앞발을 허우적대듯 무기력하게 거절했다.
“아직 할 일이…….”
“끝내시면 되죠. 어차피 예약해도 시간은 걸립니다. 저도 할 일이 없으니 응접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좌자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 원장 같은 환자는 어느 병원에서도 여러모로 쓸모있는 환자였다. 특히 의학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플러스 된다.
자기 몸 아플 땐 자주 미루던 무 원장도 좌자전이 등을 떠밀자 그러려니 받아들이고는 재빨리 하던 일을 마치고 옷을 걸치고 좌자전을 따라 내려갔다.
좌자전은 명문가 출신 간부라도 된 듯, 채소 사러 나왔다가 돼지머리 주워서 가는 기분으로 싱글벙글 앞에서 길 안내하며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