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천향의 의료 봉사는 그리 바쁘진 않고, 심지어 다소 한가하다고 할 수도 있다.
운화 시 그리고 창서성 안 수천만 인구를 상대하는 운화병원은 어떤 심각한 질병, 이상한 질병이라도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대다수 진료과는 의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환자 숫자가 절대로 줄지 않는다.
그러나 십이천향 같은 곳에서는 근처 마을 사람들까지 달려와서 진료받는다고 해도 방사 범위가 너무 좁다. 의료 봉사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적당한 병이 이런 때에 딱 맞춰 생길 수 없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며칠 바쁜 나날이 지난 후, 능연은 곧바로 한가해졌다. 이곳의 환자와 보호자는 대부분 능연의 유명세를 모른다. 대부분 중국인이 과학원 원사까지 지낸 인민 의학가 구법조(裘法祖)를 모르는 것처럼. 몰라도 병엔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능연의 진료 시간이 짧은 데다가 임시 병원의 편이성 제고와 함께 사전 선별 기제가 작용해서였다. 약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증상들이 있는 것도 그렇고, 설사 조금 더 복잡한 증상, 수술해야 하는 증상이라고 해도 운화병원 일반 의사만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능연의 명성으로 모은 연수의와 레지던트들 정도면 이런 일반적인 환자는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한다. 특히 현 병원 혹은 지방 병원에서 온 연수의들이 평소에 만나는 환자들과 여기 십이천향 환자들의 특성이 매우 비슷했다. 게다가 원래 각자 병원에서 핵심 인원인 사람들이었으니 뭐.
그렇게 되니, 텐트 안에 앉은 능연은 특별히 더 한가한 시간이 더 많아졌다. 물론 의사들에게 있어 한가한 시간이란, 주정뱅이가 깨어 있는 시간이나 마찬가지라서 그야말로 짧은 시간이었다. 아무 책이나 대충 넘기거나, 환자의 차트를 읽거나, 뉴스를 읽거나 할 시간일 뿐, 영상 몇 개 볼 시간도 없이 의사 혹은 환자가 찾아온다.
그래도 다행히 추가 근무는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심지어 오후 네다섯 시가 되면 줄 선 사람들이 알아서 줄어들었다.
대부분 치료해야 할 큰 병이 있는 게 아니라 공짜 진료를 노리고 온 것이었다. 심지어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온 사람도 있으니 퇴근 시간, 밥시간이 되면 당연히 각자 엄마 노릇을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전칠은 퇴근하기도 전에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왔다. 그러고서는 마침 지나가던 것처럼 능연의 텐트 앞을 지나갔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능연은 의외로 여기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며칠 전에도 전칠은 이렇게 우연히 지나갔었다.
“요즘 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사들도 말을 잘 들어서 퇴근이 빨라졌어요.”
전칠이 달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운리를 인수한 후, 시가 총액이 몇 배로 뛰었다. 본인도 쉴 새 없이 투자액을 늘렸고, 다른 주주의 지분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러니 운리 그룹의 절대적 대지주가 되었고, 돈은 더 많이 투자하고 권력은 더 적은 주주들은 당연히 말을 더 잘 들을 수밖에.
능연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같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 사람들이 갈수록 이치에 밝아지는 법이죠.”
그의 인생 경험이었다. 운화병원에 있는 몇 년 동안, 단순히 예의 바르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대하던 사람들은 이제 존경과 고분고분함으로 그를 대한다. 학교에서의 경험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새 학교에 갈 때마다, 호기심을 보이지만 예의 바른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엔 친구들은 대부분 철이 들었다. 수치화해서 이야기하자면, 러브레터 전달 같은 일의 발생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전칠은 기분 좋게 텐트 안으로 들어와 능연 곁에 앉았다.
“당신은 이해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요즘 회사를 계속해서 인수해야 할지 내내 고민 중이에요. 회사가 커지면 이사들이 또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요.”
능연은 웃기만 하고 별말을 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그가 하는 말을 언제나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바로 그런 이유로 능연은 결정적 문제에서 자기 의견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가 잘 모르는 화제에 굳이 시끄럽게 의견을 드러낼 필요도 없고.
전칠 곁엔 당연히 참모, 막료 혹은 자기가 참모, 막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각종 이해득실이 얽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의견은 질리도록 들었을 테고 지금도 자문한다기보단 그저 수다거리로 이야기를 꺼낸 것일 뿐일 터다. 능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전칠은 오히려 더 진지해져서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사 두어 군데 더 인수하면, 다음 달엔 더 바빠질 거예요. 두 달 정도 바쁠 수도 있고요. 그럼 만날 시간이 더 줄어들어요.”
“그럼 난 다음 달에 해부용 시신 10구 배정할게요.”
능연이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다가 하는 말에 전칠은 몹시 기뻐했다.
“그럼 좋죠.”
그래놓고 조금 머쓱해져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두 회사를 인수하면,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업이익도 꽤 생길 거예요. 그동안 수익도 있고, 아마 우리 집안 우리 대에서 일등이 될 거예요. 환자를 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돈은 큰 의미가 없긴 하지만…….”
“돈은 그냥 표상이죠. 좋아하고 또 잘하는 일을 하면 돼요. 두 개가 하나로 된 일이라면 더 완벽하고요.”
능연이 불쑥 그녀의 말을 자르고 하는 말에 전칠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능 선생이 날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니까!
전칠은 속으로 미친 듯이 기뻐하며 저도 모르게 능연의 팔짱을 꼈다.
능연과 전칠의 저녁 식사는 기본적으로 닭 잡고 양 잡고, 또 소도 잡는 그런 레벨의 지극히 풍성한 타입이었다.
물론 군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요리사들은 의사들 앞에서 일하지 않고, 산에 올라오기 전에 식자재를 깔끔히 손질하고 트럭으로 운반해서 현장에서 조리했다.
능연과 전칠은 매우 즐겁게 식사했다. 다른 의료진에게도 음식을 나눠주면서 대량으로 준비한 음식을 다들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먼 곳에서 온 동한생은 마지막 국을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의사들은 참 잘 먹네요.”
자주 능연과 함께 다녀서 동한생과 친밀한 연문빈이 이를 쑤시며 대답했다.
“너도 잘 먹는걸? 잘 먹기만 할 뿐만 아니라, 너 좀 전에 육식했다.”
“아니에요.”
“조금 전에 그 배추탕, 고기 육수야.”
“말도 안 돼요. 누가 배추탕을 고기 육수로 끓여요.”
동한생이 놀라 부인하며 고개를 젓자 연문빈이 목을 까딱이며 전칠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동한생은 잠시 침묵하다가 연문빈을 바라보며 화제를 리셋했다.
“사부도 모시고 와서 진찰하고 싶은데, 지금 괜찮나요?”
연문빈은 잠시 이해득실을 계산하다가 결국 새로운 화제를 이어가기로 했다.
“왜 이제야 오셨냐? 오전에 왔으면 검사하기 더 편했을 텐데.”
“아침 수업, 점심 수업, 밤 수업이 있어서요. 지금이라야 시간이 비어요.”
“그렇게까지? 수업당 몇 시간인데?”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요. 수업할 때만 엉덩이 타는 듯한 통증이 안 느껴진대요.”
동한생의 말에 연문빈은 우습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앉아 있으니까 아프지. 심각한 거라고. 됐다, 일단 모셔와라.”
“능 선생님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능 선생한테 수술받으려면 네가 직접 이야기해. 오늘은 일단 검사부터 하고. 아니면 내일 좀 일찍 와라. 아침 수업 일단 취소하면 되지. 수술하면 조금 아프긴 할 텐데, 지나면 괜찮아. 지금은 전칠 아가씨 방해하지 말고.”
연문빈은 주절주절 말이 길지만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능연을 방해하는 것과 전칠을 방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사부님 모시고 올게요. 능 선생님한텐 톡 보내 놓을게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동한생도 경중을 아는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돌아가고 싶은 의사와 간호사는 헬리콥터를 타러 갔고, 돌아가기 싫은 일부는 빈 병실에 자러 갔다.
임시 병원의 일부분인 병상 부분도 깜짝 놀랄 수준으로 세팅되었고, 운리 엔지니어들은 심지어 모듈화 병실을 준비해서 공장화를 목표로 설계하고 있었다. 다만 자본 문제가 있어서 실현 가능성 있는 건 능연의 병원뿐이었다.
동한생은 적극적으로 도우며 절에 쌓여 있는 갖가지 버섯, 채소도 가지고 와서 탕을 끓이거나 요리를 해서 의사, 간호사의 야식으로 내놓았다. 간식으로 먹을 산에서 따온 과일, 잣 같은 것도 있었다.
요즘 이곳에선 안 그래도 동한생이 마중, 배웅 일을 하고 있었고, 채식 준비 같은 건 더더욱 노련하게 해냈다. 그리고 산에 머무는 의료진으로서는 맑은 별빛 아래, 공기도 맑고 시야도 딱 트인 이런 곳에 말 잘 듣고 착한 동자승이 절에서 가지고 온 맛있는 먹거리까지 있으니 다들 저도 모르게 SNS에 사진을 올려댔다.
다음 날, 동한생이 사부를 데리고 왔을 때, 의료진들은 몇 배나 더 인내심 있고 정성스럽게 그를 모셨다.
“동한생의 사부시군요.”
“치질이 매우 심하시다고.”
“제가 좀 봐 드릴까요?”
“치질이면 되게 아프시겠네. 사부님께 방석 좀 가져다드려. 그래야 좀 편하지.”
의료 봉사 임시 병동은 원래 그리 크지 않아서, 치질 환자인 사부가 왔다는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에게 퍼졌다.
지난밤에 버섯을 너무 많이 얻어먹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일부러 달려와서 치질이 심한지, 아닌지, 말랑한지 딱딱한지 살피며 버섯의 온정을 갚았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 사부는 힘겹게 자리에 앉아 아파서 입을 벌리며 동한생을 바라보며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한생, 그러니까, 어제 네가 탕을 들고 모든 사람에게 네 사부가 치질 환자라고 다 말했다는 거냐?”
동한생은 진지하게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묻길래 대답만 했습니다.”
“뭐라고 물었는데?”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무슨 병 때문에 왔냐고…….”
“하하하. 산에서 그런 거 말고 뭘 묻겠냐.”
“근처에 놀 만한 곳이 뭐가 있느냐, 비구니 암자는 없는지,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묻는 사람도 있었는걸요.”
그 말에 사부의 볼이 실룩였다.
“치질이 아니었다면, 지금 네 머리통을 때려줬을 거다.”
“참, 사부, 치질이 생긴 후로 많이 온화해지셨습니다.”
생긋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던 동한생이 고민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치질 수술하실 건가요?”
“해야지.”
사부는 잇새에 치질을 물고 있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후, 능연이 의사 몇을 거느리고 임시 병실 앞에 나타났다. 이곳엔 환자가 적고,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더더욱 적었다. 능연도 좌자전, 연문빈, 마연린, 여원, 임기 그리고 세 인턴만 데리고 단출하게 나타났다.
“수술은 어디에서 하고 싶으세요?”
병실로 들어온 능연은 가장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십이천향은 조건이 아무래도 한정적이고 신뢰할 수도 없어서, 환자들은 대부분 진료는 하되 치료받는 건 원하지 않았다. 능연은 당연히 환자의 뜻을 존중하고 강요하지 않았다.
치질 걸린 사부는 처연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꼴로 산에서 내려가면 더 아프겠죠. 여기서 할 수 있으면 여기서 합시다.”
방 안에 있는 모두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사부는 아침 수업하듯이 무표정한 얼굴, 모든 통증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듯이 해탈한 눈빛이었다.
“그럼 수술 준비해요.”
능연은 여원을 힐끔 바라보고는 환자를 맡으라고 했고, 여원은 땡잡았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흠흠, 따라오세요.”
“그러지…….”
엉덩이를 슬쩍 움직인 사부의 입에서 ‘쓰읍’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여원의 눈빛은 더욱더 빛났다.
“오래되셨나 봐요.”
“몇 년은 됐지요.”
“정확한 기간은 기억나지 않고요?”
“그건 아닙니다.”
사부는 고개를 돌려 동한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일단 위치부터 찾아요. 초조해하지 말고.”
능연은 수술대 한쪽에 서서 동한생 사부 수술하는 여원을 지도했다.
치질 수술의 기술 능력만 따지면 능연의 순위가 여원보다 훨씬 높다.(이미 시스템에게 확인했음) 그러나 그의 능력은 여러 가지 방면이 계산된 포괄 수치고, 치질 수술의 수술 전후 주기만 따지면 오히려 여원이 유리한 부분이 있다. 뛰어난 수술팀에서 종종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수술팀의 리더가 분명 기술이 가장 뛰어난 존재지만, 어떤 수술 혹은 어떤 증상으로 세분화했을 때, 팀 안에 분명 보다 더 심화하고 세분화하여 그 분야에 대한 이해가 더 높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더 선진 기술을 터득했을 수도 있고.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발전이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의 범위에는 어찌 됐든 제한이 있는 법이었다. 특히 현대 과학은 무한한 세분화 특징이 있어서 이론적으로 학생들은 각자의 다른 능력, 배경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세분화 혹은 다른 분야와 연결하여 새로운 복합형 기술로 발전시키곤 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이고, 멍청이가 아닌 이상 뒤처진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장점을 위주로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여원만 봐도, 치질과 항문 수술 쪽에서 쉴 새 없이 심화했다. 손이 작고 팔이 얇은 특성도 있어서 본인의 관심 포인트와 기술 지표가 매우 잘 들어맞았다. 덕분에 여원은 능팀에서 특정 수술 분야에서는 능연에 상당하는 수술 효과를 얻어내는 의사였다.
능연의 끊임없는 지도, 여원의 끊임없는 배움하에, 여원은 장래 이 단일 분야에서는 능연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가장 큰 의사임을 예견할 수 있다.
이것이 임상 의학의 필연적 발전 추세이긴 하지만, 전망이 가장 밝은 의사가 여원이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상 여원 본인은 현재로서는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저 새로운 환자가 생겼고, 그 환자를 위해서 통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쁠 뿐이었다.
능연이야 기술을 나누는 것에 인색할 리가 없고.
의학은 대다수 인류의 기술과 다르다. 의사들은 대부분 본질에서는 기술 전수에 인색하지 않다. 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구한다는 도덕성은 대다수 인류가 인정하는 부분이고, 또 한편으로, 아무리 이기적인 의사라고 해도 자기 혹은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도움받을 수 있는 의사가 있길 바라서였다. 설사 발생할 가능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해도, 단순히 경제 이익 혹은 이익 농단으로 커버할 수 없는 일이니까.
능연이 기술을 전수할지 말지, 전수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전수할지 고려하는 포인트는 다른 의사와 완전히 다르다. 그는 효율과 능력을 중시했다.
고효율 혹은 고 능력자만 빨리 배우고 잘 배울 수 있다. 당연히 각종 리소스를 얻기에도 더 적합하고. 수술대 주변에 설 수 있는 자리는 한정적이고, 아무리 수술에 참여할 기회를 많이 얻는다고 해도 여전히 희소품이다. 여원이 작은 손을 가지지 못했다면, 가장 먼저 배제될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반대였지만.
여원의 손놀림을 보던 능연은 한순간 조금 흡족해져서 드물게 평가도 해주었다.
“그 각도, 좋아요.”
“해부 잘 배웠네요.”
“음, 생각이 있어.”
곁에 서 있는 연문빈과 마연린은 부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연문빈이 마연린을 향해 나직이 꿍얼거렸다.
“여원이 가장 높이 설 줄 누가 알았겠냐.”
“받침대를 세 개나 밟았으니, 높은 게 당연하죠.”
“무슨 이런 짜증 나는 개그를…….”
마연린이 아래로 시선을 옮기며 하는 말에 연문빈이 입을 삐죽이고는 참지 못하고 계속 투덜댔다.
“학교 다닐 때는 누구 팔이 더 긴가, 누구 손이 더 큰가 대결했었는데, 가장 작은 녀석이 먼저 일어서다니.”
마연린은 문득 훗 하고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큰 건 큰 장점, 작은 건 작은 장점이 있어요.”
“네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연문빈이 안색이 변해서 하는 말에 마연린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익숙해요.”
수술대 위에 엎드린 채 있는 사부는 마취약을 맞은 후 조금 어질어질,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나 기대한 것과 달리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유감이었다. 그러나 수술이 진행됨에 따라, 사부의 주의력은 여원의 목소리와 동작에 완전히 영향받았다.
여원이 받침대를 가지고 오라고 했을 때 사부는 걱정했다. 여원이 움직일 때도 걱정했다. 여원이 능연의 명령대로 움직일 때는 더더욱 걱정했다.
“능 선생, 나 괜찮겠지요?”
동한생의 사부는 간절한 얼굴로 능연을 바라봤다. 사실 능연이 직접 수술해 주기를 바랐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칼을 들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의사에게 밉보일까 봐 걱정이었다.
사실 능연은 환자의 동의를 얻어서 집도의를 여원으로 바꿨다. 여원이 수술하고, 능연이 지켜보고, 능연이 생각하는 가장 우수한 방안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그의 지혈 능력, 판단 능력, 수술 진행상 제어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데다가 여원의 치질 수술에 대한 이해, 깊이, 그리고 직접 수술하는 것이 수술 후 용약과 지도에도 더 유리하다.
그리고 치질을 절제할 때 미세한 동작은 여원의 실력이 약하다고 해도 이 정도 급의 수술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미약하다. 치질 절제술의 포인트는 사실 ‘절제’ 스텝에 있는 게 아니다.
물론 환자의 정서를 안정시킬 필요도 물론 있었다.
“항문 확장은 이미 끝났습니다. 특별한 문제도 없고요.”
“항문 확장?”
능연이 옆에 서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사부는 무심결에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하반신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안 움직였습니다.”
여원이 한마디 하자 사부가 서둘러 대답하고는 묵묵히 경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의력은 여전히 뒤쪽에 있었다. 여원의 일거수일투족에 사부의 마음이 흔들렸다.
여원이 손가락을 내밀고 치질 상부 1/3 위치에서 찔러넣었다. 사부는 긴가민가하고 눈살을 찌푸리다가 서서히 상황을 파악했다. 경 외우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여원은 거침없이 손가락을 획 돌리고는 동맥 위치를 손쉽게 찾아내고는 능연을 바라봤다. 능연이 별말 없자, 결찰을 시작했다.
“포셉.”
여원은 도구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가 계속해서 머리를 묻고 작업해 나갔다. 지금 여원은 진지하고 고집스러웠다. 그의 표정은 수술대 위에 엎드린 동한생의 사부와 비슷하기까지 했다. 모종의 후광 효과에 빠진 상태랄까.
“병소가 다 섬유화했네.”
여원이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사부가 다급하게 물었다.
“좋은 건가요, 안 좋은 건가요.”
“너무 좋……. 흠흠, 치질 자체를 너무 키웠고, 시간도 너무 오래됐어요. 하지만 처리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럼 부탁드립니다.”
동한생의 사부가 마음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원이 ‘응?’하고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왜요?”
동한생의 사부는 당황했다. 무협 소설에서 주인공이 필살기를 쓸 때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여원은 흡족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안 치질을 발견했어요. 같이 처리할게요. 원플원.”
사부는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지 살짝 망설여졌다.
그때 여원이 또 ‘응?’ 소리를 내더니 먼저 설명해 주었다.
“안 치질 또 하나 있네요. 원플투. 응……? 응응……?”
“하아……. 하악하악…….”
날이 막 밝은 임시 병원에 괴상한 소리가 울렸다. 할 일 없는 마을 주민 몇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수다 떨며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싸늘한 얼굴로 지나가던 촌장이 퉁명하게 말을 꺼냈다.
“대사님이 치질 수술하고 아파서 소리 지르는 거다.”
“알아요.”
“누가 뭐래요.”
“사람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소리만 듣는 것도 안 됩니까?”
한량들은 촌장의 말이 매우 불만인 듯 격렬하게 반항했다.
“평소라면 상관하지도 않아. 외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체면 생각 좀 할 수 없냐? 마을 체면 좀 생각하라고.”
촌장이 언짢은 듯이 하는 말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마구 쏘아붙였다.
“그냥 여기서 수다나 떠는 건데, 창피할 게 뭐유.”
“속이 시커머니까, 이상한 생각하는 거죠.”
“평소엔 대사님 독경 소리만 들었는데, 괴상하게 고함치니까 그렇죠. 꼭 그 소리 같잖수.”
촌장은 못 들어 주겠다 싶어서 일단 대사를 만나보자고 생각하고 고개를 저으며 임시 병원 구역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별로 없는 임시 병원 안엔 새벽부터 집에서 나온 사람뿐이었다. 간호사들이 설득하고 욕해도 소용없었다. 특히 작은 병에 걸린 환자들은 매우 고집스러웠다.
“대…….”
촌장은 동한생의 사부를 보고는 이름을 부르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동한생 사부의 자세가 너무 괴상해서였다. 뭐랄까, 오리가 공작 흉내 내는 거 같달까. 그 와중에 또 변비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속옷에 털이 낀 듯하달까. 다른 곳에서 자다가 암컷 공작에게 걸려서 다리가 부러져서 펭귄처럼 걷는 수컷 공작 같기도 했다.
단순히 자세가 이상하거나 괴성을 지르는 거면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세가 이상한 동시에 괴성도 지르니…….
촌장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얼굴로 동한생의 사부를 바라보며 그가 단정하게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일단 지금은 그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잠시만요.”
그림자가 아래쪽에서 보이더니, 여원과 그녀의 인턴들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능연의 지도하에 수술한 건 여원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로 획득한 소장품을 정리한 후에 바로 병실로 달려왔다.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고 상응하는 처리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상응하는 정보를 완전하게 기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치질 수술은 대다수 수술과 달리, 수술 전후 기간의 관리가 어려웠다. 간단히 말하면, 치질 자체는 서전에게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환자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더 나아가서 설명하자면, 어차피 치질은 죽는 병이 아니라서 환자 몸에 나타나는 현상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모처럼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를 만난 여원이 정성을 들이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사는 통증을 이기려고 미친 듯이 경을 외워댔고, 수시로 주먹을 휘두르며 수술하지 말 걸 그랬다고 고함쳤다.
“열흘 뒤엔 조금 괜찮아질 거예요.”
검사를 마친 여원이 위로하자, 대사는 통증으로 몽롱해진 두 눈을 부릅떴다.
“아직 열흘 더 걸린다고요? 열흘을 어찌 버티란 말입니까. 진통제는요?”
여원은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려 수액을 바라봤다.
“저거예요.”
“저거라고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걸! 차라리 경을 외는 게 더 효과 있겠군!”
대사는 아프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 말에 간호사가 코웃음 쳤다.
“그럼 수액 맞지 말고 경만 외워 보실래요?”
대사는 눈을 부릅뜨고 간호사를 바라보다가 동한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동한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 보살님들이 나쁜 게 아닙니다.”
십이천향의 임시 병원 규모는 나날이 커지는데 의료 봉사 인원은 갈수록 줄었다. 퇴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병실도 썰렁해졌다.
“동한생, 우리도 퇴원하자꾸나.”
자고 일어났더니 마지막 병실 동료도 짐 싸서 돌아간 걸 발견한 대사는 순간 외롭고 적막해졌다.
“그럼 가서 여 선생님께 여쭤볼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폴짝폴짝 뛰어나간 동한생은 잠시 후 그림자 속의 여원을 데리고 돌아왔다.
“퇴원하셔도 돼요. 하지만 약은 신경 써서 바르셔야 해요. 문제 생기면 운화병원으로 오시고요.”
여원은 엎드리라고 지시했고, 대사도 아무 불평 없이 엎드렸다. 사람들은 매우 그곳을 중시하지만, 치질 수술을 하고 나면 그런 건 상관없어진다.
동한생은 눈을 가리고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침 수업을 잘 하지 않아서 아직은 이런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까지 퇴원하면 입원 환자가 몇 없겠습니다.”
바지를 입은 대사는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나쁜 남자처럼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입원부에서 병실을 하나로 줄일 거예요. 진료실, 검사실도 그렇고요. 마지막엔 임시 진료소 규모로 축소할 거예요. 이쪽 마을에서 허가해 줄지 아닐지에 달렸어요.”
여원의 대답에 대사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일부를 여기에 남겨 둔단 말입니까? 마을에선 그 돈을 내지 않을 텐데.”
대사는 엉덩이를 붙잡고 살을 자르는 아픔을 느끼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전에 새 방석을 사려고 신청했는데 허가해 주지 않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임시라도 건물 사는 걸 허가할 정도면 내가 먹고 쓰는 걸 아껴서 돈을 모으지도…….”
“우리에서 낼 거예요. 이곳이 운리의 시범 기지가 될 거고요.”
여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슨 시범?”
“임시 병원 건설이요. 내일 정, 재계 인사가 참관하러 올 거예요.”
여원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운리에서 임시 병원을 모듈화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아, 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고 하는 거면 됐습니다.”
대사는 긴말 없이 엉덩이를 부여잡고 낑낑대며 휠체어로 옮겨타고 동한생에게 밀어달라고 했다.
“사부, 가는 길이 울퉁불퉁할 텐데요.”
동한생이 얼떨떨한 듯이 하는 말에 대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는 여원 일행을 향해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며칠 나온 사이에 길이 험해졌을 줄은 몰랐군.”
“사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길은 안 좋았어요.”
“네 기억이 잘못된 거다.”
“그럴 리 없습니다. 예전에 절 때렸을 때 바로 그 길에서 때리셨습니다. 그래서 무늬를 자주 봐서…….”
“그때 왜 맞았는지 기억나느냐?”
대사가 빤히 보며 묻는 말에 동한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긴가민가하며 대답했다.
“헛소리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