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화 (1/217)

0001 / 0217 ----------------------------------------------

1. 한 소년의 죽음

따르르릉! 따르르릉!

“음, 아침인가.”

민은 요란한 알람소리에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잠시 하품을 하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은 벌써 여덟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각이다!”

분명히 일곱 시에 맞춰놨는데! 저 놈의 시계가 미쳤나보다.

이불을 대충 개어낸 민은 세수도 하지 않은 채, 교복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다듬으며 가방을 들고 방안을 뛰쳐나갔다. 막 거실을 지나치려고 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민아. 아침은 안 먹을 거니?”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소년은 동전 몇 푼을 보여주면서 웃어주었다.

“헤헤, 늦었잖아요. 학교에 가서 먹으면 되요.”

“그럼 아침 꼭 먹거라. 굶지 말고.”

바쁜 와중이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이, 어머니도. 제 나이가 몇인데.”

쑥스러워하면서도 민은 입맞춤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이라곤 어머니 하나뿐이었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변변치 않은 살림으로 키워 온 하나뿐인 외동아들이니 그녀가 자신에게 가지는 기대감은 무척이나 큰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가려무나.”

그렇게 모자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한참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어느새 학교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민. 그는 고등학생이다. 준수한 얼굴에 훤칠한 몸을 가진 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발군이었던 탓에 친구와 선생님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집은 가난했지만,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학생인 것이다.

“빨리 뛰어야겠군.”

한산한 거리를 둘러보던 민은 달리기 시작했다. 한때 육상부에서 뛰었던 그인지라 속도는 무척 빨랐다.

전속력으로 뛰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학교정문이 보였다. 아직 지각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 민은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아자자잣!”

간발의 차이로 교문을 통과했다. 커트라인에 걸려 교문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지각생들을 돌아보던 민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도 지각을 면했구나. 신기한 녀석.”

“헤헤. 수고하세요.”

얄밉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선도부 선배에게 손을 흔든 민이 곧장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민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안녕 민아.”

“응, 안녕!”

자리에 앉은 민은 곧 친구들의 벌이고 있는 잡담의 장에 합석했다.

내용은 항상 뻔했다. 어제 밤새도록 게임만 했다느니, 소개팅을 나갔다느니, TV에서 본 연예인이 예뻤다니. 일상생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 가 행복하다는 것이 민의 생각이었다.

“꼴을 보니 오늘도 간신히 지각을 피했구나? 어휴, 이 땀 냄새 좀 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민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때? 향긋하지 않니?”

“냄새 나. 저리 가! 어이구. 이 화상아.”

“내가 화상이면 넌 중상이냐?”

“내가 그런 재미없는 개그 하지 말랬지!”

“어쭈, 쳤어? 운동 좀 했나보네. 누구 힘이 더 센지 붙어볼래?”

말장난을 주고받던 둘은 어느새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너희 둘이 사귀냐?”

“웃기지 마!”

민과 여학생이 동시에 소리쳤다.

“너희들 죽을래?”

민이 대번에 주먹을 쥐고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친구들이 겁을 먹은 척하고 달아났다.

하지만 친구들의 말이 현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생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앙증맞은 보조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마치 천사가 강림한 것만 같았다.

백세현.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녀는 평범하지만 민에겐 평범하지 않은 여자아이였다. 이상형인 것이다.

민은 자신을 알지도 못했던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1학년 내내 짝사랑해 왔다. 그리고 2학년으로 올라온 뒤, 같은 반에 단짝까지 되었다. 급속도로 친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고백하지는 못했다. 낙천적이고 대범하기로 유명한 강민도 한 소녀 앞에선 소심투성이의 사내자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올해는 반드시 고백하고 말겠어.’

민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고백하려고 그녀 앞에 서면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으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드르륵.

그때였다. 교실 문을 열고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덥수룩한 머리에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거만한 것이 선량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가슴엔 3학년을 표시하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여, 강민. 오늘 얼굴색이 좋네.”

그들 중 한명이 민에게 손짓했다. 선배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민은 웃으며 말했다.

“세수를 깨끗하게 해서 그렇죠. 그러는 광호 형은 몇 달 동안 물이랑은 인연을 안 맺은 것 같은 얼굴이로군요.”

“푸히히!”

민의 그 말에 교실 안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광호라 불린 사내의 표정이 삽시간 붉어졌다. 그리곤 얼굴이 보기 좋게 찌푸려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싸움판을 벌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용건이 뭐죠?”

“오늘 저녁 7시 중앙공원에서 상완고 새끼들하고 패싸움이 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나와라. 배춧잎 서너 장 정도의 사례는 충분히 하지.”

“오호라. 구미가 당기는걸요? 일단은 생각해보죠.”

“그럼 나중에 연락해. 우린 간다.”

말을 마친 광호는 패거리들을 데리고 교실에서 나갔다. 그러면서 아까 전에 웃었던 아이들을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라지는 광호를 뒷모습을 보던 민이 작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 당시, 민은 광호와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이겼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의 주먹 앞에 광호는 제대로 된 주먹 한번 날리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대연고의 짱은 민이 되었다. 덕분에 지금의 3학년들은 민의 친구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의 도움으로 패싸움에서 이기기도 했으니 나쁘진 않을 것이다.

“민아. 너 정말 갈 거야?”

“응.”

민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평범한 여자애들은 싸움을 싫어한다. 그것은 세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집이 가난한 민은 돈이 궁핍했다. 사고 싶은 옷은 많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많았다. 그러나 혼자 일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긴 싫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단순한 패싸움을 대가로 하기엔 너무도 큰 사례금은 충분히 구미가 당겼다. 그러나 민은 몰랐다. 그것이 목숨을 담보로 한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월요일이라 그런지 수업은 생각보다 일찍 마쳤다. 학생들은 언제나 그러던 대로 선생님께 대충 인사를 끝낸 뒤, 쏜살같이 학교 밖을 뛰쳐나갔다. 민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야, 강민!”

교문 밖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민은 의아한 어조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세현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한 가득 머금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세현은 오히려 반문했다. 민은 궁금해졌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의 질문이었기에, 그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무슨 날인데?”

민은 오늘이 어떤 날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아니다. 오늘은 그저 평범한 날이었다.

“오늘 8시까지 요 앞 백화점까지 오면 가르쳐줄게. 꼭 와야 돼!”

세현은 끝내 문제의 답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사라져 갔다. 민은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나쁜 일이야 있겠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친구들끼리도 아니고, 직접 자신에게 불렀다. 어쩌면 오붓한 데이트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괜스레 붉어져 갔다.

“8시라. 패싸움이 7시에 있으니까 대충 30분만 있다가 백화점으로 가면 되겠구나.”

간단하게 시간 계산을 마친 민은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일을 하러 가서 집을 비운 상태였기에, 그는 열쇠를 꺼내 열쇠구멍에 집어넣었다.

곧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집안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네댓 명만 오면 꽉 찰 정도로 집은 비좁았다.

“그럼 어서 가볼까?”

옷을 갈아입은 민이 시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시계는 7시까지 앞으로 10분 남았다.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저벅 저벅.

집을 나선 민은 금방 공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두 가지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아직 저녁이었지만 이 낡은 공원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싸움을 벌이기에 이곳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앗, 강민이다.”

“저 자식, 대연고의 짱이라면서?”

천천히 걸어오는 민을 본 상완고의 양아치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만큼 민의 명성은 대단했다. 비록 참가한 적은 많지 않았지만 그가 뜨면 패싸움은 항상 대연고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병신 같은 놈들이 쫄기는, 처 맞을 준비나 해라!”

든든한 원군을 얻은 광호가 상완고 양아치 한명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주먹으로 때려눕혔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양측은 서로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민은 벤치에 앉아 싸움판을 구경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니 뭐니 해도 구경은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었다. 물론 그도 구경만 하러 온건 아니었지만 대연고 쪽이 위험해지면 그때 나서는 것도 늦지 않았다.

“다 죽어라!”

“개새끼들.”

퍽, 퍼퍽!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완고 양아치들이 대연고 양아치들보다 더 많았다. 조만간 싸움은 끝날 것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대연고 놈들 다 쓸어버려!”

난데없이 일단의 무리들이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바로 상완고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가세하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상완고 양아치들의 주먹질에 대연고 양아치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시발, 도와줘 강민!”

광호가 민에게 제일 먼저 도움을 청했다. 몇 대를 맞았는지 그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사실 벤치를 지켜도 돈은 받아낼 생각이었다. 일단 불러서 왔으니까. 물론 그도 혈기왕성한 나이였기에 싸우는 것 자체는 반가웠다.

퍼억!

빗살같은 주먹 한방에 순식간에 한명이 나가떨어졌다. 민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발차기가 불을 뿜었다.

“크악!”

뒤에서 뒤통수를 노리려던 상완고 양아치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민은 그에게 검지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끼며 민은 수많은 양아치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가져갔다. 상대의 주먹은 그저 바람소리만 냈고, 민의 주먹은 백발백중으로 꽂히고 있었다. 거의 1대10에 가까운 싸움이었지만 상완고의 양아치들은 이 타고난 싸움꾼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민의 활약으로 역반전된 공원은 잠시 후 조용해졌다. 바닥에는 상완고 양아치들이 신음을 흘리며 드러누워 있었다. 서 있는 쪽은 대연고 양아치들뿐이었다.

“대충 끝난 것 같은데요.”

말을 마친 민은 광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한시라도 빨리 돈을 받고 세현을 만나러 가야만 했다.

“또 네 덕에 신세를 지는 것 같구나. 역시 넌 우리 대연고의 자랑이야.”

“별 말씀을.”

민은 씩 웃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떡대가 오늘 웬일이지? 칭찬을 다해주고.

“후후. 녀석!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받을래?”

“뜬금없이 웬 선물이에요?”

“잠깐 눈 좀 감아봐라.”

뒤이어진 광호의 말에 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 게이인가? 내가 지 여자친군줄 알고 있네.’

하지만 광호는 자신의 선배였다. 아무리 그래도 선후배간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민의 지론이었다. 물론 이 제안이 예의와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런데 그 선물이란 게 뭐죠?”

눈을 감은 민이 궁금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별거 아냐.”

“뭔지는 몰라도 빨리 주세요. 저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된단 말이에요.”

“약속? 아무래도 지키진 못할 것 같군.”

“예? 무슨…….”

푹!

“윽!”

갑자기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민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다리에서 끈적끈적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민이 광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피 묻은 나이프를 쥔 채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