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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세계
데라임의 손에 이끌려 천계로 온 민은 그녀와 함께 천신이 있다는 천신궁을 향했다.
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꿈일까 생시일까?”
“정말 지겹겠지만…꿈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버리는 게 좋을걸.”
“알았어. 그나저나 네가 말한 천신은 어떤 분이야?”
민은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이 천신이 있는 곳임을 깨닫고는 데라임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민에게 짤막한 한마디만을 던져줄 뿐이었다.
“글쎄. 단지 네 운명을 결정지을만한 권한이 있는 분이라고만 말해두지. 더 이상 영혼에게 가르쳐줄 이유는 없어.”
“그렇구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둘의 걸음은 한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가 천신궁이야. 천신께서 머무시는 곳이지.”
말을 마친 데라임은 민을 이끌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서 머지않아 둘은 한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왔는가, 데라임.”
“예. 천신님.”
데라임과 천신이라 불린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민은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풍성한 백발을 가졌지만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비감을 지닌 그는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백과 위압감이 자신은 천신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씀하신 그 영혼입니다.”
데라임은 민을 가리키며 천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민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흐음…,”
“확실히 평범한 운명을 지닌 녀석은 아닌 것 같지요?”
데라임의 질문에 천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평범한 운명뿐이겠나? 그 일을 맡기엔 이만한 적임자도 없다.”
“확실히 그렇지요.”
조용히 대화를 듣던 민은 궁금증에 휩싸였다. 분명히 그들은 자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게 어떤 건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체할 틈이 없으니 어서 의식을 시행하겠네.”
말을 마친 천신은 민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런데 데라임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그전에 한마디를 꺼내었다.
“잠깐, 천신님. 이 영혼에게 할말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하게.”
천신은 그 수염만큼이나 인자함이 넘치는 듯, 그녀의 부탁을 어렵지 않게 들어 주었다.
이윽고 데라임은 민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넌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지금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은, 그곳에서 살면서도 세현이를 꼭 잊지 말라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뚱딴지같은 말에 민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데라임은 그에게 살짝 미소만을 지어주고선 천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시작하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신은 이윽고 민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서 머지않아 민은 점차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졸음이 오는 것처럼.
잠시 후, 그는 밀려오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K.C 4203년 10월 27일]
커다랗게 배가 부른 한 여성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근처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피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으흑, 아아악. 흐으윽…….”
“여보, 조금만 참아 조금만…….”
임신한 여성의 배우자로 보이는 사내는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2세를 낳게 되는 것에 대한 행복감과 동시에. 부인이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앙!”
몇 번의 진통을 했을까.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가 우렁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는 너무나 커서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나왔어, 드디어 나왔다고! 우리의 아이가…….”
“아아.”
자신의 2세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들뜬 남편과 함께 여자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기게 된 핏덩이를 사랑스럽게 안아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태어나면 뭐해요? 20년만 키우면 그곳으로 보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당신은 너무 마음이 약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내도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곳에 보내는 것은 절대 거스를 수 없는 그들 종족의 숙명이었다.
“여보, 그럼 이 애의 이름은?”
“미리 지어뒀어. 스탐 베르크. 이름을 짓는 것과 20년 동안 키우는 것만이 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니…….”
“불쌍한 우리 스탐…….”
사내는 자신의 혈육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막 태어난 아기는 언제부턴가 울음을 그친 채 웃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큰 위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훗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름대로의 상황을 유추하고 있는 아기가 있었으니 그 정체는 바로 강민이었다.
깊은 잠을 자던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잠에서 깨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닥친 상황을 주시했다.
‘데라임의 말대로라면 나는 환생했을 텐데,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갓 태어난 아기의 몸을 가지고 있다니? 그리고 나를 낳은 사람들이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종족의 모습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새까만 피부와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걸 보면 인간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후, 도대체 뭘 해야 될지 모르겠군. 정말 어지럽다…….’
강민, 아니 이제는 스탐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불현듯 뇌리에 각인된 한 마디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데라임이 한 말의 일부였다.
‘세현이를 잊지 말라고 했었지…. 하지만 녀석이 그런 말을 한 이유가 뭘까? 설마 이곳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긴가?’
말도 안돼는 소리였다. 어쩌면 데라임이 동정심에 한 말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 귀퉁이에선 이런 생각도 싹트고 있었다.
‘아니야. 그 상황에서 사신이라는 녀석이 괜한 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그녀는 분명히 이곳에 살아있을 거야.’
이대로 잊혀 버리기엔 너무도 보고 싶은 세현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로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스탐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도 분명히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 있을 거라고.
그러나 자신의 결연한 맹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머니의 품에 안긴 스탐은 콧노래를 부르며 웃고 있었다.
“흐응애 흐응애…….”
“하핫, 아무리 봐도 잘 생겼단 말이야…….”
“그러게요. 호호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환생한 스탐. 그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 불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매우 늙어 보였다.
“수고했다 아리아, 드디어 태어났구나. 태어났어. 우리 가문의 미래를 거머쥘 아이가…스웬,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우리 베르크 가문을 빛낼 수 있을 것이야.”
“아버지…….”
거의 발작적으로 외치는 그 말에 스웬이라 불린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늙었지만 명예욕은 여전했다.
“저기 두 분…? 피곤해서 그러는데 스탐이랑 혼자 있으면 안 될까요?”
“아…그러도록 하마.”
“알았어.”
둘이 나가자 아리아는 멀뚱거리며 서있던 산모들에게도 나가라고 손짓했다
“휴우~이제 단 둘이서 남게 되었구나.”
아리아가 미소를 띄었다.
그 어떤 종족이든지 아기는 귀엽다지만 그녀는 부드러운 천 조각에 싸여있는 자신의 2세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우리 아가…….
하지만 막 태어나 의사소통조차 못하는 스탐은 그저 이곳 저곳을 둘러볼 뿐이었다.
“하아. 우리 사랑스러운 스탐, 배고프지? 엄마가 맛있는 거 먹여줄게.”
스탐의 입으로 아리아의 젖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당황스러웠다. 비록 막 태어난 아기라곤 하나 전생의 자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나쁘진 않군. 헤헤헤.’
하지만 스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에 적응한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어린 게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휴. 일단 이 곳에서 생활에 적응부터 해야겠군. 그나저나 이 스트레스를 어디다가 푼다? 옳지. 바로 여기 있네.’
“어머나? 얘가 배가 많이 고팠나보네?”
스탐 유두를 문 입에 힘을 주자 아리아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탐의 음흉한 내심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쌓인 욕구나 풀어야겠군.‘
그의 자아는 한참 청소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