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4화 (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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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세계

어느덧 스탐이 태어난 지도 15년이 지났다.

그 동안 그가 습득한 지식대로라면, 자신의 종족은 뱀파이어였다. 그리고 이곳은 캄에덴이라는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들이 국민인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스탐이 태어난 이곳은 뱀파이어족의 5대 명가중 하나인 베르크 가중 하나란다.

뱀파이어들은 인간보다 성장기가 느렸는데 전생의 기억을 가진 덕에 스탐은 또래의 뱀파이어들보다 더 빨리 걷고, 말했다. 그러자 자연히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하지만 스탐은 그런 기대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세현이를 반드시 찾고 말테다.’

뱀파이어는 60세가 되어서야 성인이 된다.

그래서 15살이라곤 해도 그는 무척이나 어렸다.

하지만 세현을 찾고야 말겠다는 그의 결심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더 확고했다.

물론 일개 저승사자가 던진 한마디 때문에 이 세계에서 그녀를 찾을 것이라는 발상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만 그로선 이런 확고한 목표만이 이 이질적인 세계에서 미쳐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였다.

“어서 갈 준비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

“아, 미안해. 깜빡 잊고 있었네.”

스탐의 눈으로 아리아의 스웬이 바쁘게 움직이는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축제 날이었다.

플로센의 현 시장이자 젊을 때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알테임 스펙타르가 태어난지 600년이 된 오늘을 기념하고 그가 오래토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축제가 플로센에서 열리는 것이다.

“스탐. 빨리 가자꾸나.”

스웬은 어린 스탐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처억.

이윽고 스탐은 어느새 아리아와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아이와 여자에 한해서였다. 남자들은 크로펫을 직접 탈 수밖에 없었다.

“캬오오~”

“그래, 착하지.”

크로펫의 등위에 앉은 스웬이 날카롭게 울부짖는 크로펫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삐를 잡았다.

크로펫은 말과 늑대의 중간형에 속하는 모습을 가진 잡식성 동물로 몸집은 말보다 약간 작고 말과 같은 안정감은 기대할 수 없지만 전장에서 보여주는 사나움이 뱀파이어들과 찰떡궁합이었다. 오죽하면 우수한 품종의 크로펫 1만 마리를 정규군의 기병대로 쓰고 있을 정도겠는가.

“그럼, 출발하게나.”

“예. 이럇~!”

스웬의 아버지이자 베르크 가의 현 가주인 게리온 베르크 가 그렇게 말하자 뱀파이어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크로펫의 고삐를 당기며 서서히 플로센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낮에 출발한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플로센에 도착했다.

다닥, 다닥, 다닥…….

이윽고 플로센 시내로 들어온 그들은 마구간에 크로펫을 맡긴 뒤,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어느새 축제가 시작되었는지 그들의 귓가에 아련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듣기 좋군.”

“그러게요. 갑갑한 가문 안에서만 있다가 이곳으로 오니 전혀 색다른걸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탐은 뱀파이어들의 축제는 과연 인간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프 뱀파이어들은 인간처럼 뭐든 먹지만, 뱀파이어들은 오로지 피만을 주식으로 삼는다. 스탐도 뱀파이어로 15년 동안 살아가면서 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피를 마시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어떻게 축제를 벌일지 대충 그림은 그려진다. 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이.

하지만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아직까지 인간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광경을 보면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아리아 덕분에 그런 끔찍한 상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탐, 너 또 이상한 생각했구나?”

“예? 아, 예…….”

“생각하는 건 별로 문제될게 없는데 그러다가 네 아빠처럼 길 잃지는 말거라.”

“이, 이봐 아리아! 거기서 왜 또 내가 거론되는 거야?”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스웬이 열불을 냈다. 그러자 아리아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흥. 무슨 소리야? 난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당신마저 나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야?”

“글쎄. 다만 나는 하나뿐인 아들이 당신 꼴이 날까봐 그러는 건데.”

스탐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세현이 생각났다.

“하아…….”

스탐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보름달이 은은하게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웠다. 그녀가 너무 그리웠다.

터벅, 터벅.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은 오랜 행보 끝에 오늘 축제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한 쪽은 알테임이었다.

“아니 자네, 게리온 아닌가? 왜 이렇게 늙었나?”

“그러는 자네도 늙긴 늙었구먼. 역시 죽음을 오늘내일하고 있는 할아범이라 다르긴 달라.”

“뭐야? 이보게, 난 캄에덴의 전쟁영웅 알테임 스펙타르야! 지금도 웬만큼 젊은 놈은 한방에 눕힐 수 있다고!”

둘은 시비를 걸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젊은 시절 함께 전장을 누벼왔었다. 물론 그때의 경험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돼버렸지만 말이다.

“잔말 말고 어서 자리나 좀 내주게.”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알겠네. 내 일단 자리를 마련해봄세.”

그는 잠시 후, 하프 뱀파이어들을 동원해 60여명에 달하는 자리를 베르크 가에 제공해 주었다.

그러자 베르크 가 사람들은 오랜 시련 끝에 낙이 오는 것을 실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탐 옆의 한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한자리가 비는군.”

“그러게 말이야. 뭐, 누가 와서 알아서 앉겠지.”

“훗, 능력이 있다면 말이야…….”

한 뱀파이어의 말에 스탐은 자신이 15년 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를 떠올렸다.

캄에덴의 사회는 힘의 논리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축제에서의 사소한 자리도 쉽게 앉을 수가 없었다. 아마 상대가 베르크 가 뱀파이어들 이상으로 강하지 않은 이상은 엄두도 못낼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스웬이 말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았다.

“좀 실례하겠소.”

스탐은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급하게 온 모양인지 옷이 먼지투성이였다.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리는 뱀파이어들이 있을 정도였다.

얼핏 보면 평범한 뱀파이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본 스탐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내는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앉았네?”

“그러게 말이야.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원.”

“그래도 좀 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런 스탐과는 달리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은 그저 그 불청객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심하고 있었다.

“혹시 이 자리가 앉으면 안 되는 자리인 거요?”

살기가 풀풀 날리고 흑마기(Dark mana)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사내의 한마디에 뱀파이어들은 금세 경직되었다.

그들은 뒤늦게야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자신들이 어찌 해볼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하하하…, 서, 설마 그렇겠소? 누가 앉든 상관은 없소.”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말을 마친 사내의 시선은 스탐에게로 갔다. 스탐도 마찬가지로 그를 응시했다.

둘은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를 마주보았다.

스탐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참 똑똑하게 생긴 녀석이구나. 이름이 뭐니?”

이윽고 사내는 스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자 스탐도 이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스탐이라고 합니다.”

“스탐이라. 베르크 가에서 인물이 났다기에 누군가 했더니 바로 너였구나.”

“아저씨야말로 평범한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참, 영악한 녀석이군. 그나저나 이제 축제가 시작되려고 하는가본데…?”

말을 마친 사내가 고개를 돌려 단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서는 몇 명의 뱀파이어 한참 떠들썩했던 분위기도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갔다.

제일 먼저 한 뱀파이어가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설은 대충 알테임을 찬양하는 것이 주제인 듯, 하나같이 그의 영웅담 관련된 내용이 일색이었다. 다른 뱀파이어라면 모르겠지만, 스탐으로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아무튼 그가 물러나자 그 자리를 플로센의 시장, 알테임이 채우게 되었다. 그는 먼저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뱀파이어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조국 캄에덴의 위대한 일꾼들이시여. 이 몸은 당신들이 아시다시피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감히 영웅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알테임 스펙타르입니다.”

“와아아~”

“알테임 만세!”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그에게 열광했다. 전성기를 지난 지 한참이 지났건만 그의 명성은 여전했다.

“이 늙은 퇴물이 벌써 이 땅에 태어난 지 600년을 맞이했다니 참 유감입니다. 돌이켜보면 참 구차하게도 목숨을 연명해 왔군요. 이제 죽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알테임의 부정적인 발언은 듣는 이들을 침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뱀파이어의 수명은 600년이다. 그리고 알테임은 딱 수명을 채운 나이였다. 그렇다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이 축제에서 주인공이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없잖은가?

하지만 잠시 후, 그가 한말은 모두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야겠습니다.”

“와아아~!”

“그랜드 슬래머 알테임 만세!”

그리고 그는 이내 자신의 괴팍한 속내를 드러내었다.

“크큭, 궁상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마시고 놀고 즐겨라! 이게 내 명령이다!”

“뭐, 뭐야.”

그의 돌변한 태도에 스탐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옆의 사내는 알테임을 바라보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여전하시군 그래…….”

이윽고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의 테이블위로 잔과 무언가를 채운 병들이 올라왔다.

냄새를 맡고나서야 스탐은 그것이 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바로 블러디 와인(Bloody wine)이라 불리는 뱀파이어들만의 독특한 술로, 피와 알코올을 일정비율 섞어 그들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당연히 다른 종족은 마시자마자 구역질을 하기 일쑤였다.

“자, 어디서 온 분이신진 모르겠지만 당신도 받으십시오.”

“고맙소.”

잔을 채워지자 짤막하게 대답한 사내가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스탐은 역시 캄에덴에서 힘의 논리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무시하던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이 지금은 그를 고분고분하게 대하며 술까지 직접 따라 주고 있지 않은가.

“스탐, 넌 이걸 마셔.”

아리아가 스탐에게 자신이 쥐고 있던 컵을 주었다. 하지만 순순히 말을 들을 그가 아니었다.

“나도 그거랑 똑같은걸 먹고 싶단 말이야!”

“그건 너무 독해서 너한텐 안돼.”

“뭐가 독해? 나도 이제 다 컸어!”

스탐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을 탕탕 쳐보았다.

그러자 아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승낙했다.

그에게 술은 절대 먹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그녀는 너무 여렸다.

“알았어. 정말 그 고집은 누굴 닮아서 원…….”

“히히힛.”

그제야 스탐은 싱글벙글거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지게 된 붉은 술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새빨간 그것은 얼핏 보면 포도주처럼 보였지만 맛은 달랐다. 특히나 뱀파이어들에겐 천상의 맛이었다.

벌컥 벌컥.

“으음.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인 걸…….”

스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과거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추억을 주억거렸다. 뭐, 어린 나이에 마시면 얼마나 마셨겠냐만은.

“이보게들 술은 잘 마시고들 있는가? 모자라진 않는가? 남아도는 게 술이니 부족하면 얼마든지 말하게!”

어느새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에게 다가온 알테임이 그렇게 외쳤다. 한때의 영웅이어서 그런지 그는 무척이나 호탕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알테임의 발길은 스탐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그 정체불명의 사내에게서 멈추었다.

“가만 가만, 이게 누군가? 자네 혹시…….”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그제야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테임에게 인사를 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와서 그저 잘 계신가 보고 가려고 했는데, 결국 들켜버렸군요.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허허…! 폐라니. 난 자네가 꼭 올줄 알고 있었다네. 그나저나 정말 기쁘구먼.

알테임은 사내의 손을 맞잡으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보면서 둘간의 관계를 궁금해 한 스탐이 물었다.

“저기, 저분이 누구신데요?”

“아. 내가 소개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군. 자 모두들 주목하게나.

알테임의 말에 모든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알테임은 여전히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먼지를 뒤집어쓴 그 사내를 소개했다.

“아마 들으면 누군지 짐작은 할 것이네. 이 젊은이는 아이슬로너 바리스칸이라고 하네. 그리고 아이슬로너, 여기 이분들은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이라네.”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헉.”

“아이슬로너라니…….”

사내의 정체가 드러나자 아까 전 그에게 심한 면박을 주었던 뱀파이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슬로너라면 20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80여 년 전에 배틀러(Battler)의 경지에 접어든 사내다. 그는 신예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대패자―서열 1~5위까지의 뱀파이어들을 일컫는 말―를 노리고 있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도 그의 명성쯤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보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있었다.

배틀러. 흑마기가 한데 모여 더욱 강력한 힘을 이루는 흑마기의 결정체인 다크오러(Dark Aura)라고 한다. 배틀러들은 그것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캄에덴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아까 전엔 죄송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이 아이슬로너에게 사과를 구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들을 극구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원래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괜찮다는 아이슬로너 대신에 경고하는 쪽은 알테임이었다.

“끌끌끌. 자네들 다음부턴 조심하도록 하게. 이 녀석은 성격이 좋은 편이지만 한번 이성을 잃으면 목숨을 장담 못해.”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작은 소동은 끝을 맺고 있었고 언제부턴가 절정을 맞이하고 있는 밤의 축제는 끝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홀짝, 홀짝.

스탐은 잔안의 붉은 액체를 혀로 낼름 핧으며 뱀파이어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그저 화기애애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우려했던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진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맛있니?”

그때 술을 마시는 스탐을 보고 있던 아이슬로너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스탐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그 나이에 술이라. 진도도 참 빠르군.”

“제가 좀 유별나죠.”

“그래? 하지만 많이 마시지 않는 게 몸에 좋을 거다. 블러디 와인(Bloody wine)의 술기운은 어린애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볼이 벌겋게 익은 스탐에게 아이슬로너가 넌지시 충고했다.

그의 말대로 피와 알코올로 이루어진 블러디 와인은 뱀파이어라고 하더라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성질의 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탐에게도 오기라는 게 있었는가보다.

“흥, 절 무시하는 거예요? 이런 거 쯤이야 단숨에 비워버릴 수 있단 말이에요!”

말을 마친 그는 새빨간 물이 가득한 컵을 들이켰다. 마치 물을 들이키듯 벌컥 벌컥 넘기는 스탐의 행위를 본 아이슬로너가 깜짝 놀라 컵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미 컵은 비어 있었다.

이윽고 스탐에게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스탐은 이미 의자위에서 뻗어버렸다.

“딸꾹! 으아…속이 왜 이렇게 뜨겁지?”

“스탐!”

“이런…….”

아리아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슬로너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해뒀다간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주, 죽다니요?”

스웬이 깜짝 놀라 그렇게 외쳤지만 이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한때 저것 하나로 크게 고생했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에는 흑마기를 잘 다루는 젊은 배틀러가 한명 있지요.”

아이슬로너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스탐의 상체를 자신의 무릎에 눕혀놓고선 손바닥을 펴서 그의 배에 갖다대었다.

이윽고 아이슬로너의 검은 기운들이 피어올라 스탐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는 한참동안 경련을 일으키더니, 기침을 하면서 입에서 피를 쏟아내었다.

“이제 독 기운을 다 빼내었습니다. 지금 기절한 상태니 조금만 안정을 취해주시면 깰 겁니다.”

“고, 고맙습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인데요 뭘.”

아이슬로너는 아들의 목숨을 살려준 것을 감사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부부에게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한차례의 소동이 끝난 후, 어느덧 서서히 태양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축제는 막을 내렸다.

타지에서 온 뱀파이어들도 일부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상당수는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아이슬로너는 원래 전자를 택할 생각이었으나 스승의 설득에 의해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정말 묵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어서 들어오게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알테임의 집은 혼자 산다는 걸 감안하면 무척이나 컸다. 하기야 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누추했다.

알테임이 의자에 앉자 뒤이어 의자에 앉은 아이슬로너가 대뜸 스탐을 거론했다.

“그나저나 아까 스탐이라는 소년 말입니다.”

“말게 보게.”

그런데 알테임도 아이슬로너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말하자 아이슬로너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도 눈치 채셨습니까?”

“물론.”

“하기야 미천한 제가 아는데 스승님께서 모르신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아이슬로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들은 무척이나 흥분하고 있었다.

“캄에덴이 세워진지도 어느덧 400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껏 이 나라가 허송세월만 보냈다고 생각됩니다.”

말을 마친 아이슬로너는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윽고 눈을 뜬 그가 입을 열었다.

“변혁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뱀파이어 로드가 되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긴 하지만…….”

“너는 반드시 뱀파이어 로드가 될 거야.”

아이슬로너는 씁쓸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알테임을 마주보았다. 그도 영웅대접만 받았을 뿐, 뱀파이어 로드가 되어보진 못했다.

잠시 후, 알테임은 자신의 관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이슬로너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두 주먹을 말아 쥐며 중얼거렸다.

“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이렇게 플로센 시장의 집에서는 원대한 야망을 가진 젊은 뱀파이어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상상의 나래를 짜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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