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 / 0217 ----------------------------------------------
5. 트윈 헤드 오우거와의 혈전
퍼벅!
“으어억!”
“으아아~.”
몰려들었던 기사들 대여섯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놈은 포효하며 남은 한 손에 쥔 스파이크 클럽을 휘둘렀다.
콰앙!
“이때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스탐은 스파이크 클럽이 땅에 박히자 단숨에 그것을 타고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몸에게로 올라갔다. 놈은 스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손만으로 재빠른 스탐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악스러운 손아귀를 요리 조리 피해가던 스탐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잠시 놈의 손이 인간들을 상대한다고 떨어져 있었을 찰나였다. 흑마기가 충만한 손톱으로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목을 그었다. 한번으론 부족했는지 두세 차례 더 그어댔다.
퍽, 퍽, 추아아악!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목 하나가 떨어졌다.
“좋아!”
스탐은 쾌재를 불렀지만 금세 표정이 바뀌었다. 어느새 트윈 헤드 오우거의 손이 자신의 몸을 틀어 쥔 것이다.
“젠장.”
“스탐!”
깜짝 놀란 루시리아가 소리쳤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스탐이라도 트윈 헤드 오우거의 손에 잡힌이상 죽음을 면치 못한다. 샤방! 촤아아아아~
“쿠어어어억!!”
새파란 강기가 트윈 헤드 오우거의 가슴을 꿰뚫음과 동시에 놈이 괴성을 질렀다. 그 덕분에 손에 힘이 빠져 스탐이 간신히 빠져나오게 되었다.
“휘유~.”
바닥을 나뒹군 스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괴물은 이제 팔과 머리가 각각 하나씩 사라진데다 쥬드에게 입은 과다출혈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마무리만 하면 될 듯했다.
“훗, 이걸로 마지막이다!”
팍! 지이이익! 촤아아아아~!
스탐은 그대로 트윈 헤드 오우거의 오른쪽부분을 찔렀다. 그리고 그 상태로 힘을 꽉 주면서 왼쪽으로 돌렸다. 전신에 그러자 힘이 빠진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목이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털썩.
마지막 하나 남은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 트윈 헤드 오우거는 더 이상 트윈 헤드 오우거가 아니었다. 목 없는 시체. 제로 헤드 오우거(Zero Head Ogre)에 불과했다.
쿠우웅!
목을 잃자 몸뚱이가 곧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하악, 하악…….”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스탐은 환희에 젖은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드디어 긴 혈전이 끝을 맺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이, 이긴 건가?”
“아니. 지, 지금…,우리가 진짜 저 괴물을 해치운 거야?”
“믿을 수가 없어!”
한줌의 시체가 된 트윈 헤드 오우거.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한참을 술렁이던 인간들이 이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던 스탐은 웃으며 루시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것 봐. 내 판단이 옳았지?”
“그래…스탐, 너 정말 잘했어.”
쪽.
루시리아가 스탐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느닷없는 그녀 행동에 깜짝 놀란 스탐이 소리쳤다.
“루, 루시리아! 갑자기 왜 그래?”
“사랑하니까.”
“…그, 그래.”
그녀의 한마디에 스탐은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루시리아는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금세 그에게 달려와 포옹을 했다. 스탐은 자신에게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반드시 널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둘이 그러고 있는 한편, 쥬드와 케린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믿기지가 않아. 우리가 트윈 헤드 오우거를 물리치다니.”
“그러게요. 이제 남은 건 돌아가서 결혼 하는 것뿐이에요.”
“사랑해 케린.”
“쥬드…….”
둘은 그렇게 감정을 불태우며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행복할 수는 없었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의 시체를 둘러보던 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국왕 폐하께서는 어째서 이런 엉뚱한 임무를 내리셨단 말인가…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곤 하지만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할 만한 물건은 아닐 텐데…….”
그의 시선은 어느새 두 뱀파이어들에게로 갔다. 한참 잡담을 나누고 있는 둘을 바라보던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쥬드다. 크로프란 왕국의 기사지. 뭐, 이런 말을 해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아무튼 뱀파이어들이여, 정말 고맙다.”
스탐은 쥬드의 손을 맞잡고 흔들어 주었다. 그는 인간의 말을 알면서도 끝내 쥬드에게 자신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어떤 내용의 대화를 하는지 한번 엿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처억.
결국 까만 손과 하얀 손이 포개어졌다. 그것은 뱀파이어족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인간과 뱀파이어간의 악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만큼은 서로가 적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저 아리따운 어둠의 레이디께도.”
스탐과 악수한 쥬드는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옆에 있는 여성뱀파이어에게로 손을 건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쥬드를 쏘아붙였다.
“흥! 어리석고 간사한 인간주제에 어디 주제를 모르고 내게 손을 내밀어? 비록 어쩔 수 없이 도우긴 했지만 인간이라면 구역질만 나!”
물론 인간들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단지 그녀의 말투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챈 인간들의 표정이 점차 찌푸려져 가고 있었다.
“루, 루시리아….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스탐도 뱀파이어들은 대다수가 인간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인간들도 뱀파이어들을 좋아하는건 아니었지만
“어디서 큰 소리야, 저 뱀파이어 계집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흐음…….”
흥분하는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당사자인 쥬드는 태연했다. 왜냐면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루시리아를 잡아 먹기라도 할 듯 눈을 부라리는 인간들을 제지했다.
“그만. 쓸데없이 피를 볼 이유는 없잖나?”
“하, 하지만 쥬드…….”
한 성직자가 반박하려 했다. 그는 스탐과 루시리아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인물이었다.
“베아린, 너도 흥분하지 마. 저들과 우리는 개인적인 원한도 없잖아. 우리는 트윈 헤드 오우거의 브로큰 스톤, 저들은 피를 원할 테니깐 서로 원하는 것만 얻어내면 될 거 아냐?”
“그래, 네 말이 맞다.”
베아린이라 불린 성직자는 두 손을 부르르 떨었지만 쥬드의 말을 차마 거스를 수 없는지 수긍했다.
“너희들은 어서 트윈 헤드 오우거의 머리나 해체할 준비나 해.”
“아, 알겠습니다.”
쥬드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트윈 헤드 오우거의 머리를 단검으로 후벼 파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스탐이 루시리아에게 말했다.
“루시리아. 그럼 우리도 작업을 시작해볼까?”
“응. 기다리던 바야.”
둘은 배낭 안에 있는 모든 채혈기를 꺼냈다. 그중에서 채혈기 한 개에는 오크의 피가 꽉 차 있었는데 스탐은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나서 트윈 헤드 오우거의 거대한 몸뚱이에 바늘을 꽂아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루시리아, 빨리빨리 좀 채워 넣어봐.”
“시끄러워.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루시리아와 스탐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열심히 채혈기에다 피를 채워 넣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흥분하고 있었다. 이것만 채우고 돌아가면 이번 몬스터사냥에서 우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쳐다보는 인간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당연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피를 짜내면서 좋아하고 있는 뱀파이어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다 찾았나?”
“기다려보십시오. 조금만 더, 더…. 이 부분만 잘라내면…됐다!”
“다 끝났습니다.”
“휴우. 그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병사에게 건네받은 쥬드의 두 손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돌이 들려져있었다. 가장 흥분한 인물은 마법사인 케린이었다.
“이야! 이게 바로 브로큰 스톤이란 말이야?”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크게 출세할 거야.”
쥬드가 케린의 어깨를 잡으며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던 중, 베아린의 시선은 스탐과 루시리아를 응시했다. 그들은 아직도 채혈기로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쥬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쥬드는 자신의 오랜 친구가 뭔가를 요구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응? 무슨 일이야, 베아린?”
“쥬드. 잠시 귀 좀 빌려줘.”
“뭐 때문에 그러는데?”
속닥속닥.
잠시 후, 쥬드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조용해. 놈들이 눈치 채면 안 되니까…다시 한번 말할게. 조용히 검을 빼내서 놈들을 죽여.”
“이봐, 베아린. 아무리 상대가 뱀파이어라지만 난 기사야. 그런 짓은 내 명예에 먹칠을 할 뿐이라고.”
“나 참. 이 답답한 친구야. 명예가 밥 먹여주나? 어차피 놈들은 사악한 벨리우드의 후예들이다. 절대 대륙위에서 공존할 수 없는 종족이야. 잘 생각해 봐.”
“아무리 그래도 난 그럴 수 없어.”
“흥. 한심한 녀석.”
화가 난 베아린은 케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결국 남은 건 전투에서 살아남은 여섯 명의 병사들이었다. 베아린은 그들에게 두 뱀파이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저 가증스러운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해치워 버려라.”
“하, 하지만 베아린님!”
“너희들은 모두 아르티시앙님을 믿지 않는가? 당연히 믿을텐데? 믿는다면 어째서 벨리우드의 피조물들을 감싸려 드는 거지? 교단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가?”
“그건 아닙니다만…….”
교단의 심판이라는 말에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럼 어서 쏴라.”
“예.”
하는 수없이 병사들은 화살을 꺼내들었다.
“베아린 너 정말….”
쥬드가 베아린을 쏘아보았다. 베아린은 단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끼이이~
“나 참. 이놈에 채혈기 한번 더럽게 안 차네….”
“기다려 봐. 넌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하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나.”
“흥.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인간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스탐과 루시리아는 트윈 헤드 오우거의 피를 열심히 채혈하면서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조준…….”
활시위가 늘어나면서 화살이 후퇴했다. 베아린은 두 뱀파이어들을 노려보았다. 이 가증스러운 것들. 너희들의 목숨도 이제 몇 초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니, 인간들이 여기에 있다니?”
“교관!”
“바렛교관님…!”
스탐과 루시리아가 뜻밖의 인물을 향해 소리쳤다. 그 인물의 정체는 바로 그들의 교관 바렛이었다. 바렛의 곁에는 대여섯명의 뱀파이어들이 서 있었는데 아마 셀리온 평원의 뱀파이어 사냥꾼들로 보였다.
“후후! 네 녀석들, 역시 살아남아 있었구나! 한참 찾아다닌 보람이 있군. 이봐 스탐! 네가 너희를 못찾았으면 개죽음당할 뻔했어. 루시리아 너도 스탐과 같이 돌아다녔으니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구나.”
“제길, 반가우면서도 기분은 더럽군.”
스탐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반면 루시리아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바렛을 보며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잠깐이었다. 이내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던 바렛의 표정이 굳었다.
“알만하군. 알만해. 이 더러운 인간들…….”
“마, 맙소사.”
“배, 뱀파이어들이 언제…….”
난데없는 뱀파이어들의 등장에 가장 놀란 건 베아린이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본전이라도 갔을 텐데 이미 저 뱀파이어는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스탐과 루시리아도 채혈을 멈추었다.
“정말 더러운 놈들이군, 생명의 은인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루시리아의 앙칼진 말에 그들은 할말을 잃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어조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뭐,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귀해서 캄에덴의 고위층 어르신들만이 독식하는 인간의 피를 우리가 먹게 되다니 말이야!”
“긴 말할 것 없을 것 같소. 당장 처치합시다, 바렛.”
“그러도록 하지.”
뱀파이어 사냥꾼의 말에 바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한 뱀파이어가 케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크크큭. 인간여자라. 정말 맛있겠군. 순결을 잃지 않았다면 정말 일생일대의 쾌락일 텐데 말이지. 나는 저 여자부터 노리겠어.”
“헉…….”
이들의 시선을 받은 케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뒷걸음질쳤다. 그렇게 되자 쥬드가 반사적으로 검을 쥐었다.
스르렁!
“케린을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릴 테다!”
우우웅~
어느새 그의 검은 오러 블레이드를 띄고 있었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뱀파이어들이었다.
“이런!”
“소드 마스터?”
“야! 저 자식들 중에서 소드 마스터가 있다는 소리는 안했잖아!”
“어디 물어보셨나요?”
“젠장, 이거 큰일 났군.”
뱀파이어들이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인간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떡하지?’
이것이 뱀파이어들과 인간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뱀파이어들도, 인간들도 섣불리 싸움을 걸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면 서로 싸워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의 강력함 때문에 섣불러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또 인간들은 소드 마스터가 있긴 했지만 트윈 헤드 오우거와의 전투로 힘이 빠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쥬드는 일단 칼은 뽑았지만 그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형태였다.
그렇게 양측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참 재밌는 상황이로군.”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결사가 나타났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그는 뱀파이어였다. 스탐은 그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어 보였다.
잠시 후, 바렛이 그의 정체를 간파하고 소리쳤다.
“아이슬로너!? 당신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그 말에 뱀파이어들이 경악한 얼굴로 아이슬로너를 바라보았다. 아이슬로너는 위엄이 흐르는 한 마디로 자신이 동명이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내 용무를 일일이 캐 묻을 자격은 없는 걸로 아는데. 스트라이드 가의 자식이여.”
“죄송합니다!”
“아, 됐네. 이런 말을 하려고 이 자리에 온건 아니니까, 본론부터 말하지.”
아이슬로너는 인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모든 인간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싸워봐야 좋을 게 없다. 서로 화해하고 각자의 길을 가도록.”
“예엣?”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인간들을 포기하란……..”
그들의 항변은 아이슬로너의 냉랭한 목소리에 의해 꼬리를 말고 말았다.
“누가 감히 내말에 토를 다는 거지?”
“…….”
“어,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분노를 감추고 인간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수밖에….”
결국 바렛은 인간들을 포기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의 피를 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천하의 아이슬로너가 포기하라고 했다. 싫다고 덤비다가 작살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잘 선택했다. 그나저나 넌 스탐이로군.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스탐은 아이슬로너가 자신을 응시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13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몰라 그를 어렵지 않게 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처럼 강한 뱀파이어가 될 거라고 스탐은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이슬로너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슬로너가 말했다.
“그럼 어서 돌아가도록 해라.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대신 너희는 트윈 헤드 오우거의 피가 있잖나.”
“아! 그러고 보니…….”
바렛의 시선이 채혈기에게로 옮겨졌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스탐과 루시리아를 보고 안의 피가 어떤 건지 눈치챈 그가 감격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트, 트윈 헤드 오우거라…….”
이윽고 뱀파이어 사냥꾼들의 시선은 곧장 트윈 헤드 오우거의 시체로 고정되었다. 마침 채혈기를 가져온 덕에 그들은 급히 놈의 시체에서 피를 끌어 내기 시작했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피라면 인간의 피 이상으로 값진 것이다. 이득을 봤으면 봤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뱀파이어와 인간들 간에 벌어진 갈등은 해소된듯했다.
스탐은 조용히 쥬드를 바라보았다. 비록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실 뱀파이어들과 인간들이 대립하고 있었을 뿐, 서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들이다.
하지만 쥬드는 더 이상 웃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나? 겁먹을 것 없네.”
“아….”
“배, 뱀파이어가 우리 인간의 언어를…….”
인간들은 아이슬로너가 갑자기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을 걸어오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이슬로너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뱀파이어가 인간의 말을 하지 말란 법이 있나? 아무튼 자네들은 그 돌을 무사히 왕에게 전해주도록. 그게 너희들의 임무니깐 말이지.”
“다,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소? 당신의 목적은 뭐요?”
“그대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네.”
아이슬로너는 자신의 입에 검지를 붙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질 뿐이었다. 인간들은 한참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