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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별
시간이 흘러 하루의 모든 훈련이 끝났다. 연병장에서 훈련을 마친 77섹터의 뱀파이어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들의 숙소로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H조의 뱀파이어들만은 연병장의 구석진 곳으로 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과연 올까?”
“그럼. 우리 교관님이 어떤 뱀파이어인데? 자기가 한 약속은 꼭 지키는 분이야.”
“말하기가 무섭게 저기 오고 계시는군.”
스탐이 바렛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그의 품안에 가득한 술병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어! 많이 기다렸냐?”
“저희도 금방 왔는데요, 뭐.”
루시리아가 웃으면서 존경스러운 교관님을 모셨다. 바렛이 가져온 술은 일견 보아도 그들이 먹고 남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교관이 오늘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자, 모두 진탕 마실 준비나 해라. 수십 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여기서 다 날려버리자고!”
콸콸콸
바렛이 그렇게 외치곤 커다란 술잔에 맥주를 붓기 시작했다. 캄에덴에선 뱀파이어든 하프뱀파이어든간에 첫잔은 맥주가 먼저라는게 정설이라고 한다. 취향상 블러디와인만 들이키는 뱀파이어들도 적지 않지만 혹자는 맥주를 몇 번 마시고 난뒤에야 블러디와인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잠깐.”
그때 맥주를 막 목구멍에 넣으려던 바렛이 검지를 치켜들며 한마디했다.
“안주가 없다.”
스탐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들도 안주가 필요했다. 바로 피말이다. 블러디 와인은 그 자체로도 안주와 술을 겸하고 있지만 맥주는 아니었다.
“후후훗. 안주야 저희가 미리 준비해뒀죠~!”
“저희도 준비성은 철저하답니다.”
루시리아와 스탐이 그렇게 말하고선 다른 뱀파이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서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호오~! 이거 멧돼지잖아.”
바렛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맷돼지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너희들은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구나! 내가 이 교관일을 하길 잘한 것 같아.”
“그러세요? 호호홋.”
“술 다 식겠어요. 빨리 넘기시죠 후후.”
스탐이 루시리아와 함께 담소를 하고 있는 바렛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을 자신의 목구멍에 들이켰다.
“벌컥 벌컥…. 캬아! 맛 한번 예술이로구만.”
“블러디와인이나 마시고 그런 소릴 하시죠.”
“아아, 그렇지.”
바렛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맷돼지의 목덜미를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할짝 할짝…. 음! 이 맛이야.”
그렇게 바렛은 안주거리를 음미한뒤 다시 블러디 와인에 손을 가져갔다.
“자, 이제 마음껏 먹자. 어이 스탐. 너 잔이 왜 비어 있냐? 받아라, 부어줄 테니깐.”
“무슨 소립니까. 방금 전에 다 마셨는데…….”
스탐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바렛이 건네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그도 술의 오묘함에 점차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벌컥 벌컥!
“캬아~! 바로 이 맛이야, 루시리아.”
블러디 와인 한잔을 단숨에 들이켜 취기가 오른 스탐은 대뜸 루시리아를 불렀다.
“왜?”
“러브 샷 하자.”
“러브 샷?”
“그래, 러브 샷! 저번에 가르쳐 줬잖아.”
루시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이리 와.”
“으응…….”
둘은 천천히 잔을 든 손을 서로의 목에 감았다. 그리고 나서 시원하게 블러디 와인을 들이켰다.
“딸꾹! 음…. 밤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워. 그렇지 않아 루시리아…?”
스탐은 머리가 어질어질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누운 친구들처럼 잠에 빠지지 않았다. 단지 아름다운 밤하늘을 감상하며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했다.
스탐의 기억이 끊긴 것은 거기 서부터였다.
“하아, 다들 괜찮아?”
“응.”
“이거 참 긴장되는걸.”
스탐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긴장감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무한전선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뱀파이어들과 언데드들과 오랫동안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위험지대였다.
스탐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혈왕성에서 공포된 무한전선 지원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정량의 포상금을 담보로 보충 병력이 추가될 때까지 공백이 생긴 지역을 방어하도록 하는 이 제도였다. 그리고 거기에 응해 알테이 가드의 관리를 맡게 된 소년단중 하나가 바로 바렛의 77섹터였다.
지금, 스탐의 H조는 알테이 가드 근방을 순찰하고 있었다.
‘뭐, 아직까지 별 문제는 없군. 단 한가지만 제외한다면…….’
스탐은 루시리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다른 동료들처럼 그녀는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자 스탐으로선 애가 탔다.
물론 이곳이 전장이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10일전부터 그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러는 거야? 도무지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는 걸…….’
생각해 보면 그때는 H조의 뱀파이어들이 다 뻗은 데다 바렛도 블러디 와인을 과다하게 마셔 어떻게 알 길이 없었다.
‘휴우~ 정신차려, 스탐! 일단 여기서의 일을 끝내서 소년단으로 돌아가서 물어보자고.’
“왜 그래, 스탐?”
“아, 아무것도 아냐.”
루시리아가 자신을 쏘아 붙이자 당황한 스탐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언데드들이군…….”
루시리아의 말대로 그들의 눈앞에는 언데드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는 대충 열댓명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선발대일 것이다. 선발대가 있다는 소리는 엄청난 수의 본대가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지금 놈들을 치자.”
언데드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스탐이 대뜸 한마디했다. 일단 선발대 정도는 상대하기 쉬우니 해치우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루시리아는 그의 제안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안돼. 일단은 요새로 돌아가야 돼.”
“겁먹었냐? 뻔히 보이는 먹이 감을 놔둔다니?”
스탐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자존심 강한 루시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기에 대번에 언성이 높아졌다.
“언데드들을 발견하는 즉시 돌아오라는 교관님의 당부를 잊었어? 적만 보면 무조건 덤벼들 생각을 하다니, 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
“흥, 어서 돌아가자.”
말을 마친 루시리아가 알테이 가드를 향해 일행들보다 먼저 움직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스탐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충고했다.
“네 말대로 돌아가긴 돌아가겠는데, H조의 리더는 나야. 함부로 움직이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잘난 리더 나리.”
말을 마친 루시리아는 스탐에게 어서 앞장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스탐은 한숨을 푹 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스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러게. 요새 들어서 너희 둘이 너무 신경질적인 것 같아.”
“…….”
스탐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료들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휴우…….’
잠시 후, 스탐 일행은 목적지인 알테이 가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바렛이 환한 얼굴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됬냐?”
“예, 언데드들의 선발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교관님의 말씀대로 곧장 빠졌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휴우~! 다행이구나. 방금 전 돌아온 J조 녀석들은 다섯명이나 죽었는데 너희들은 한명도 죽지 않았으니 말이다.”
“!”
바렛이 전한 비보에 모두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스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어리다곤 해도 평범한 저급 언데드들에게 다섯 명이나 죽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리치들에게 당했나보군요.”
루시리아가 나직이 말했다. 바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리치들뿐만이 아냐. 녀석들의 말을 들어보니 데스나이트도 있다더군.
“데, 데스나이트?”
스탐이 제일 먼저 소리쳤다. 데스나이트라면 언데드측 최강의 전사라 일컬어지는 존재들이다. 잘 길러진 데스나이트 하나가 배틀러에 비견된다는 소리도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탐은 데스나이트를 두려워하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달랐다.
‘데스나이트? 그 말로만 듣던 데스나이트가 온다는 말인가?’
호승심이 유난히 높은 스탐에게 있어 데스나이트라는 존재는 무척이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스탐의 의중을 짐작한 루시리아는 가시가 돋친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기 데스나이트에게 욕심을 부리는 정신 나간 뱀파이어가 있군요.”
“뭐라고? 너 죽을래?”
“흥, 죽일 테면 죽여 봐.”
“야. 그만해!”
바렛이 즉각 그들을 말렸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쓰며 둘에게 엄포를 놓았다.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나본데 지금은 무척 심각한 상황이야. 병력차이만 20배가 난다. 그런데 지금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냐?”
“죄, 죄송합니다. 교관님.”
“죄송합니다.”
“됐어. 가봐.”
“예…….
스탐은 자신의 사과를 무시하는 바렛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도 신경질적일 수밖에 없는 바렛을 이해했다.
“루시리아. 너 잠깐 나 좀 보자.”
스탐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루시리아의 손을 잡고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스탐이 대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만간 전투가 벌어질텐데 무슨 용건이야?”
“휴우. 너 요새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러다니?”
루시리아는 오히려 스탐의 말의 저의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스탐은 더욱 화가 나서 그녀를 윽박질렀다.
“몰라서 물어? 우리가 어떤 사인데? 그런데 술을 마셨던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넌 내게 냉담하게 대하고 있어. 마치 원수진 상대를 보는 것처럼 말이야. 이유라도 좀 알자.”
“아하하하하!”
루시리아는 다짜고짜 웃어대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스탐이 루시리아를 웃긴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절대 웃겨서 웃은건 아니었다.
“내가 할 소리를 왜 네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뭐라고?”
“너야말로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물어?”
“그래! 도대체 무슨 소리야?”
오히려 스탐 대신에 루시리아가 화를 내면서 몰아붙이고 있었다. 루시리아는 홧김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란스러워지는 주변환경에 입을 다물었다.
“전투가 끝나고 말해줄게.”
터벅
“….”
스탐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그럼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떠오르지도 않는 자신의 기억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서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던 말을 지껄인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중얼거렸다.
“스탐, 이 멍청한 놈! 그것 하나 기억 못하냐? 휴우…, 아무튼 전투가 끝나고 나서 들어야겠군.”
말을 마친 스탐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만간 벌어진 전투를 위해서.
한편 알테이 가드에서 멀지 않은 수풀지대. 이곳에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려울정도로 많은 인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죽지 않은 자. 언데드(Undead)들이었다.
“클클클! 건방진 뱀파이어 놈들. 한때 우리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놈들이 감히 덤벼들다니…‥.”
허스키한 목소리가 언데드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언데드들 중에서 자아를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죽은 자들의 마법사. 리치(Lich)뿐이었다.
“패밀리어로 알아본 대로라면 저곳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조그만 뱀파이어들이 지키고 있다더군요.”
“클클, 당장 저곳을 집어삼켜서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야겠군.”
“미련한 소리는 집어치우시지 허약한 뼈다귀들. 뱀파이어들이 그렇게 호락한줄 아나?”
리치들의 뒤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죽음의 기운을 띄우고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가 있었다.
검은 갑옷 때문에 그 모습이 뱀파이어 로드의 친위부대인 다크나이트와 무척이나 흡사했지만 그는 죽음의 기운만 풍길 뿐이었다. 아마 그를 뱀파이어들이 봤다면 치를 떨었을 것이다.
“큭크. 네 말대로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칼시온 네 녀석은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데스나이트 주제에 말이야.”
듀엘라드가 말했다. 그러자 칼시온이라 불린 데스나이트는 듀엘라드의 반론에 반박했다.
“도대체 뭐가 과대평가라는 건가? 비록 어리지만 저 안에는 뱀파이어들이 있다. 나약한 하프뱀파이어가 아닌 뱀파이어가 있다는 소리다.”
“…‥.”
그 말에 일순간 모든 리치들이 할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 대로였다. 하프 뱀파이어라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지만, 뱀파이어는 어린놈이라도 처치하는 게 어려웠다.
스르렁~!
“자 이제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가지.”
칼시온이 조용히 운을 떼며 붉은 검을 꺼내었다. 검과 검집이 마찰할 때의 불규칙적이고 청명한 검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리치는 이내 일단의 언데드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수천의 언데드들 중에는 목 없는 전사, 듀라한이 30명이나 있었다. 죽은 전사의 원혼으로 만든 중급의 언데드인 그들은, 목이 잘려 있는 그들은 한손에는 검을, 한손에는 철퇴와도 같은 머리를 들고 있었다. 데스나이트 다음으로 강력한 언데드였다.
이렇게 소수의 리치, 데스나이트와 듀라한들을 주축으로 한 언데드들은 알테이 요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