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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숙적과의 만남
"크큭, 여기다 천막을 쳐야겠군. 어서 서둘러라."
지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 뱀파이어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은 몬스터 사냥을 하는 날이었다. 지온은 77섹터의 뱀파이어들과 함께 셀리온 평원으로 오게 되었다.
지온도 이곳에서는 여느 교관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정렬해 있는 뱀파이어들에게 단 한 마디만 내뱉은 뒤 풀밭에 누웠다.
"난 잠이나 잘 테니 네놈들은 몬스터들이나 족치고 있어라. 그리고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여기에 집합하도록. 큭큭큭!"
"예!"
씩씩하게 외친 77섹터의 뱀파이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지온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곯아떨어졌군."
"좋아."
지온이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스탐은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저벅, 저벅, 저벅.
스탐은 H조의 뱀파이어들과 같이 어디 론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는 방향이 다른 조와 달라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스탐에게 우려를 표했다.
"지온이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린 끝장이야."
"맞아."
스탐은 씨익 웃으며 그들을 다그쳤다. 그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겁쟁이 자식들, 끝장은 무슨 끝장? 잡히지만 않으면 놈이 아무리 배틀러라도 우릴 찾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인간세계로 가기 위한 모든 도구를 입수한 마당에, 포기하자는 말을 하려고? 너희들 혹시 가는 게 겁나는 거냐?"
스탐은 은근슬쩍 그들의 자존심을 긁어보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 그건 아니야."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어서 빨리 가자고!“
"그래, 까짓것, 가보는 거야."
그렇게 사소한 갈등은 금세 끝을 맺었고, 스탐 일행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지온과의 거리를 벌려야 했기 때문이다.
“헉헉헉.”
얼마나 뛰었을까? 어느덧 스탐 일행은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턱을 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크로프란 왕국이라는 곳이었다. 아마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더라면 이 계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했다. 몰래 암흑 루트를 통해 인간 세계를 지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모조리 사들였다. 지온의 감시망까지 피하는데도 성공했고. 이제 지도를 따라서 셀리온 평원만 벗어나면 작전은 성공이었다.
‘정말 기대되는데…….’
스탐은 달리는 와중에서도 인간 세계에 대한 꿈에 가득 젖어 있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진지는 쥬드를 비롯한 인간들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막연히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인데 직접 만나보니 전생의 향수가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간 세계에 나갈 생각을 가진 이유는 우습게도 지온 때문이었다. 스탐은 그에게 진 이후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그에 대한 반발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실력으로 그를 누를 수 없어 한참 그 반발심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인간 세계로의 가출이었다. 스탐은 자신을 따라 나온 친구들을 독려했다.
“자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피를 가진 인간들의 세계에 도착하는 거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의 그런 바램은 큰 난관에 부딪혔다.
“헉!”
가장 먼저 뒤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스탐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 기운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놈이 왔다, 어서 흩어져!!"
"맙소사!"
스탐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나머지 뱀파이어들도 그의 말을 따라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큭큭큭,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잡히면 반병신을 만들어 놓겠다!"
광기를 머금은 지온의 괴성이 스탐 일행의 귓가에 생생히 뿌리박혔다. 스탐의 미간에 땀이 흘러내렸다.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도망친 지가 언젠데 벌써 따라오고 있다니! 일단 그들이 지온을 확인하자마자 흩어진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큭큭큭크!!"
"제, 제기랄! 왜 하필이면 나야?!"
스탐의 귀에 그 소리가 똑똑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금세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나 먹어라!"
파방!
소리로 보아 흑마탄이 날아간 듯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저항에 불과했다. 금세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빌어먹을.”
스탐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벌써 한명이 당했다. 이대로라면 흩어졌다고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기도전에 놈에게 다 잡힐 것이다.
"취에에엑!"
스탐의 눈앞에 일부 오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스탐을 먹이로 간주한 듯 주저없이 덤벼들었다.
"비켜! 네놈들과 노닥거릴 시간 없어!"
퍼퍽!
스탐은 흑마기를 휘감은 주먹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오크 한 마리를 단숨에 죽였다. 하지만 다른 오크들은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젠장,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됐을까?’
스탐은 지금쯤 뱀파이어를 거의 다 잡아가며 웃고 있을 지온을 욕했다. 솔직히 추격해 올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아아악!"
또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이 여덟번째다. 스탐은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사르의 목소리였다.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셀리온 평원에서 몬스터가 아닌 교관에게 쫓기는 꼬락서니라니.
하지만 스탐은 계속해서 뛰었다. 이제 남은 건 자신뿐이다. 자신이라도 인간 세계에 도착해야만 했다.
"하아, 하아…."
한참 헐떡대고 있는 스탐이 도착한 곳은 다리였다. 밑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스탐이 알기론 이 다리가 목적지로 향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좋아! 이 다리를 지나간 뒤 바로 끊어버리면 되겠군. 힘내자고 스탐! 아무리 지온놈이라도 다리 없이 지가 어떻게 오겠어?"
혼잣말을 마친 스탐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만든 지가 상당히 오래된 다리는 마음먹고 세게 밟기만 하면 쉽게 부러질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스탐은 다리위에 발을 디뎠다.
터벅, 터벅, 터벅.
"이 다리만 지나면 된다. 힘내자고!“
하지만 호랑이도 제만하면 온다고 했던가. 어느덧 스탐이 다리를 반 정도 지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깜짝 놀란 스탐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지, 지온!"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피를 뒤집어쓴 듯 붉은 머리칼을 한 거구의 뱀파이어. 지온이 서있었다.
"큭큭큭, 애송이놈! 어디까지 가는가 했더니만 고작 거기가 한계였나?"
"젠장."
스탐이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문제의 지온은 그가 올라가 있는 다리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탐은 혹시 지온이 다리를 끊어버리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설마…그래도 지가 교관인데 설마 날 죽이겠어? 그냥 소리만 지르다 치우겠지’
스탐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파방!
"헉!"
자신에게 날아오는 흑마탄을 본 스탐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으로 그 흑마탄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퍼엉!
흑마탄이 굉음을 내며 터졌다. 그것을 본 스탐이 곧바로 지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 날 죽이려고 할 작정이냐?"
"큭큭,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나한테 대드는 놈은 무조건 피떡으로 만들고 싶은 성미거든."
말을 마친 지온이 다시 한번 흑마탄을 날렸다. 스탐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흑마탄을 계속해서 피해낼 재주는 없었다. 스탐은 흑마탄을 정통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펑!
“크윽.”
쩌저적
밟고 있던 나무판자가 금이 가자 스탐은 깜짝 놀랐다. 급히 발을 빼내어 다른 곳에 짚었다. 그는 지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놈은 잔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걸로 보아 의도적으로 한 짓인 듯했다.
"더러운 놈!"
"아가야. 재롱은 그만 부리고 이제 엄마 품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이리로 오면 때리진 않으마. 큭캬캬하!"
지온은 그렇게 광소를 터뜨리며 스탐의 항복을 유도했다. 하지만 스탐은 잘 알고 있었다. 다리 위에 있는 이상 천하의 지온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놈도 이 낡아빠진 다리 위에 자신까지 올라온다면 끊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스탐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지온은 자신이 다리위에 있는 한 흑마탄 이외의 어떤 공격도 할 수 없었다. 이내 입 꼬리가 올라간 스탐이 중지를 치켜들었다.
"엿 먹어, 개새끼야."
"뭐라고?"
"내가 미쳤다고 너 같이 미친놈의 말을 믿을 줄 아냐?"
“크큭,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지온의 말을 무시하면서, 스탐은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 금세 그의 오른팔을 흑마기가 뒤덮었다.
“무슨 짓을 벌일 속셈이냐?”
보고 있던 지온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언제나 비릿한 웃음을 짓던 지온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 미친놈!"
지온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하는 놈이 놀라고 있었다. 물론 그만한 이유는 있었다. 스탐이 다리를 끊어버렸으니까!
"우아아앗~!"
두 동강이 난 다리가 절벽을 향해 짓쳐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지만 다리의 끈을 붙잡고 있는 스탐은 여유로웠다.
철퍽!
다리가 절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스탐은 무사했다. 흑마기를 불어넣은 발바닥으로 충격을 완화시킨 것이다.
"좋았어!"
환호성을 지른 스탐은 밧줄을 잡고 절벽 위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지온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리의 길이가 상당히 짧았기 때문에 다 도착하고 나서 다리를 끊으려 했다면 지온이 박차고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
스탐의 예상이 적중해서였을까? 멀리서 보고 있어도 지온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니……."
"약 올라 죽겠지 이 자식아? 쌤통이다!"
스탐은 그런 지온의 표정을 감상하며 또 다시 중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해방이다! 으히히히!"
스탐은 그렇게 소리치며 뛰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으면 금세 헥헥거리고 있는 걸까. 여태껏 스탐이 지온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맞다, 그전에 준비할게 있지?"
한참 기뻐하던 스탐은 배낭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뱀파이어가 인간의 행세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들이었다. 숏소드(Short Sword)에 인간의 옷과 건틀렛, 그리고 기본적인 방어구. 그렇게 다 장비하고 나니 그는 영락없는 풋내기 용병이었다. 정말 누가 봐도 인간으로 보였다. 검은 피부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제 이것만 바르면 끝이겠지?"
스탐은 또 다시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바로 분이었다. 하지만 보통 분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매직 파우더(Magic Powder)라 불리는 분으로 피부를 바르는 즉시 새하얗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뱀파이어 스탐은 인간의 탈을 쓰는데 성공했다.
"그럼 준비 끝. 가자!"
희열에 잠긴 스탐은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뱀파이어였다면 이런 계획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어릴 때부터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소리를 듣고 자라기 때문이다. 스탐도 그랬고, H조원들도 그가 어렵게 설득해서 탈주할 생각을 가진 것이었다. 뭐, 어쨌든 결과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말이다.
"이야, 여기가 바로 인간의 마을인가?"
얼마나 뛰었을까. 스탐이 환하게 웃으며 인간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모양이 다양한 건축물과 활기가 넘치는 얼굴로 돌아다니는 인간들이었다.
"정확히 38년만이군."
그렇게 말을 마친 스탐은 문득 자신의 빛의 언어, 즉 인간어 실력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문의 하프 뱀파이어들에게 몰래 배워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선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여, 여기가 어디지요?"
"가리오츠 마을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여기 못 보던 사람인 것 같네? 외지에서 왔나?"
"아, 예…. 깊숙한 산골짜기에서 혼자 살고 있어서요."
스탐은 능숙하지 못한 인간어로 능청을 떨었다. 행인은 스탐의 말투에 피식 웃었다.
“말투가 상당히 어눌하군그래."
"네? 아, 그게……."
그의 예리한 지적에 스탐은 당황했다. 예전에 인간들과 같이 트윈 헤드 오우거를 처치할 때 베아린이라는 성직자는 자신들을 대번에 뱀파이어라고 확인했다. 혹시 이 인간도 성직자라서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챈 게 아닐까?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행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산골짜기에 살아서 그런지 말투가 약간 촌스럽구먼. 뭐, 이 마을도 촌구석 중에 촌구석이긴 하지만……."
"그, 그렇군요."
"꼴을 보아하니 용병이 되고 싶어서 이리로 왔는가본데, 그 튼튼한 몸이면 사는데 지장은 없을걸세."
"아 네…, 감사합니다."
대화가 끝나자 행인은 다시 제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스탐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무튼 간에 의사소통문제는 해결한 셈이다.
"그나저나 배가 고프군."
스탐이 배를 부여잡았다. 그는 한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셀리온 평원이었지만 지온에게서 도망치는 탓에 오크 한 마리도 잡아먹지 못한 것이다.
"제기랄, 그럼 여기서 숙식을 해결해야겠군."
투덜거린 스탐이 식당을 향해 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인간들의 음식점. 인간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피를 주식으로 삼는 뱀파이어다. 과연 음식을 몸이 받아들일까?
하지만 환생해서 처음으로 맛보는 인간의 음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였다. 일단 부딪혀봐야 뭐든 해결된다는 생각에 결국 발걸음을 식당으로 옮겼다.
"어서오세요!"
여종업원의 목소리가 스탐의 귓전을 울렸다. 스탐은 빙그레 웃었다. 칙칙한 분위기만 풍기는 뱀파이어 여성만 보다가 색다른 그녀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간단하게 스프나 빵으로 올려줘."
말을 마친 스탐은 품에서 돈을 꺼내어 미리 값을 치렀다. 캄에덴의 화폐와 인간들의 화폐는 모양이 달랐지만 그는 사전에 돈을 확보한 상태였다. 하프 뱀파이어들에게서 말이다.
스탐은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조심스럽게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솔직히 피로 길들여진 미각 때문에 맛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의외로 맛있네?"
스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 보면 뱀파이어가 인간의 음식을 먹어봤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두 종족이 오랫동안 단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스탐은 인간의 음식을 먹은 최초의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
뱀파이어로 환생한 뒤 최초로 먹어보는 인간의 음식에 스탐은 왠지 모를 감동에 젖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생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괜스레 슬프기도 했다.
"어서오세요, 손님들!"
여종업원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스탐이 고개를 돌려 그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식당안에 들어온 그들은 대부분이 육중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스탐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이런 촌구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다. 평범한 인물들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비록 촌구석이라곤 하지만 괜찮지 않습니까?"
한 기사가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사제복을 입은 40대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흐음, 수도의 여관에 비해선 볼품이 없군. 그래도 나름 대
로는 괜찮은 곳이야."
그는 하얀 사제복에 장신구가 여럿 달린 것이 크로프란의 권위 있는 사제로 보였다. 하기야 스탐이 들은 바대로라면, 크로프란은 유난히 아르티시앙교의 힘이 강한 나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셔서 내심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말입니다."
기사는 계속 정중한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말이 좋아 정중한 거지 스탐은 눈엔 아부 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평화로운 시대라고는 들었지만 기사라는 놈이 무(武)를 연마할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빌붙는 꼬락서니라니…이 크로프란이라는 나라도 이름만 그럴듯할 뿐이지 속은 썩어빠진 나라인가 보군.'
스탐은 기사를 속으로 조롱하며 빵을 뜯었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그 기사가 호명한 인물을 보고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베아린 사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