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18화 (18/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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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한전선에 가다

스탐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가 쥔 종이에는 무한전선 지원 자 모집이라는 글귀가 제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한전선이라…….”

스탐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종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무한전선. 뱀파이어들과 언데드들이 쉴 새 없이 싸운다고 하여 무한전선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은 스탐도 가본 적이 있었다. 좋은 기억이 있는걸 아니지만 말이다.

‘확실히 그곳에서 쉴 새 없이 싸운다면 몇 배는 강해질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무한전선은 그야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 뱀파이어, 하프 뱀파이어를 막론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곳이었다. 그곳이라면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도 같은 미숙한 스탐이 강해지기에 충분할 것이다. 물론 목숨을 담보로 해야겠지만 강해져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스탐은 그것마저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지? 조만간 가봐야겠어.”

스탐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굳게 결심했다. 충분히 강해지기 전까지는 몇 십 년이고 그곳에서 살아나갈 것이다.

“정말 그곳에 갈 생각이야?”

스웬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스탐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태껏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는지 잘 알 테니깐.

“걱정 마세요. 무한전선에서 죽는 뱀파이어는 전부 약해서 죽는 거 아닌가요? 전 강합니다.”

스탐은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거기서 죽는다면 자신은 약하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를 찾기 위해선 지온보다 더욱 강해져야만 했다.

“응.”

“그래, 네 뜻대로 해라.”

그들은 결국 스탐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부모라곤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있어 강해지고 싶은 욕구는 본능 그 자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스탐도 만나자마자 헤어지게 되는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지 않았다. 그냥 무한전선으로 가지 말고 여기에 눌러 앉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굳은 결심은 그 자신도 번복하기 힘들었다.

“모집일은 지금으로부터 열흘 후니깐 그동안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갈 테니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여기는 네 집이란다. 신세질게 뭐가 있겠니? 아무튼 우리야 좋지.”

“그래, 아리아의 말이 맞아.”

“예. 그럼 피곤한데 한숨 자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스탐은 스웬과 아리아를 따라 침실로 갔다. 잠자리에 눕자마자 나른한 게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40년 만에 누려보는 집에서의 잠자리라 그런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스탐은 금세 잠이 들었다. 아리아와 스웬은 깊게 잠이 든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피곤하긴 많이 피곤했나봐. 벌써 잠이 들었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나저나 당신, 왜 그랬어? 괜히 그런걸 보여줘서…….”

스웬이 스탐에게 보여주었던 지원서를 언급하며 아리아를 질책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 아시잖아요. 우리가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는 걸요.”

“그건 그래…….”

스웬은 잠든 스탐을 바라보았다. 아리아의 말 대로였다. 그의 아들은 바람과도 같은 존재. 자신들이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 바에는 차라리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게 나았다. 아리아는 스탐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스탐, 꼭 강해져야 한다.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열흘 후, 스탐은 지원서에 적혀진 약도를 따라 지원자 모집소에 갔다. 그곳에는 수백여 명의 뱀파이어가 테스트를 치루기 위해 줄을 지어 서있었다.

“이곳인가…….”

스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스트를 치르는 것으로 보이는 장소에는 뱀파이어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스탐은 그들을 따라 맨 뒤로 줄을 섰다. 솔직히 한번 실력을 행사해서 이 빨리 테스트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차례를 지키기로 했다.

“그나저나 뱀파이어도 줄을 설줄 알았나? 하긴, 캄에덴은 힘과 군대를 가장 중요시하는 나라니까 질서도 잘 지키겠군.”

하지만 머지않아 스탐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뱀파이어가 다짜고짜 자신의 앞에 끼어든 것이다.

“뭐야, 넌?”

그것은 스탐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새치기를 한 뱀파이어는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탐에게 그렇게 나불거렸다.

‘방귀뀐 놈이 성내는군.’

하지만 그가 새치기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상당히 육중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키가 작은스탐의 겉모습만 보고 만만하게 본 것이다. 뱀파이어가 오만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보다 키가 한참 작은 스탐을 내려다보았다.

“흐흐흐, 꼬마야. 그냥 모른척해라.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피해도 안 입으니까. 설마 그 몸으로 무한전선으로 가는 테스트를 치르기 도전에 병신이 되고 싶진 않겠지?”

예상대로였다. 위협을 주기 위해선지 한쪽 팔에는 흑마기를 슬쩍 불어넣고 있었다. 스탐은 쓴웃음을 지었다. 놈은 자신을 소년단을 갓 나온 애송이로 여기고 있나보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단지 자신은 애송이가 아니었을 뿐이지.

“흥. 겨우 그따위 얄팍한 흑마기 따위로 날 겁주려는 거냐?”

“뭐, 뭐야!?”

예상과는 달리 스탐이 당당하게 맞서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앳된 티가 역력한 꼬맹이에게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그것도 다른 뱀파이어들이 보는 앞이었으니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는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스탐에게 무력행사를 감행했다.

“건방진 놈!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다짜고짜 스탐에게 주먹이 날아왔다. 어느덧 줄을 서고 있던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갔다. 아마 그들은 멋모르고 설치는 저 소년이 분명 피떡이 될 것이라고 예상 하고 있을 것이다.

퍽!

“크헉!”

둔탁한 소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솟구쳤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뒤이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구경꾼들은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얻어맞은 쪽이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스탐은 자신에게 덤비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크허억!”

그 다음엔 비명을 지르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복부를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일어설 수도 없을 것이다. 스탐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치기한 건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그런데 덤비기까지 해?”

스탐은 좌중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보지 못하는가보군.“

말을 마친 스탐은 다시 줄을 섰다. 그때 한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는 방금 전 스탐이 쓰러뜨린 뱀파이어와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스탐이 대번에 그를 쏘아보았다.

“넌 또 뭐야?”

스탐이 그렇게 윽박질렀다. 그 목소리에 그는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단지 그렇게 강하면서도 여전히 차례을 지키고 있는 당신이 행동이 안타까워 보여서 그렇습니다.”

“무슨 소리지?”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었다. 그는 대답없이 손을 권했다. 스탐은 순간 상대가 무슨 짓을 할까 의심이 섰지만 이내 손을 건넸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말을 마친 사내는 스탐을 줄의 어디 론가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심사관의 앞에 단 두 명만을 남겨두고 있는 자리였다.

터벅터벅

스탐은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새치기를 시켜주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잠자코 있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이 술렁거렸다. 그러자 사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앞에 들어오게 해줬는데 뭐 불만 있나? 있으면 당장 튀어나와라. 그건 바로 나, 바르델 크람프트에게 덤비겠다는 소리로 들을 테니까!”

사내의 이름이 거론되자 뱀파이어들의 일부가 혼비백산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 바르델이라는 사내는 상당한 명성이 있는 사내인가보다.

“다음.”

새치기를 한 덕분에 스탐의 차례는 빨리 왔다. 그가 심사석 앞으로 걸어갔다. 심사관은 펜을 든 채, 스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름은?”

“스탐 베르크.”

“호오, 나이는?”

“60.”

그렇게 지루한 문답이 끝난 뒤, 심사관은 옆에 설치되 있는 커다란 도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파워 테스터(Power Tester)를 한번 쳐보게.”

스탐은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심사관이 말한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드워프들의 손재주와 뱀파이어들의 흑마술이 만들어낸 일종의 펀치 머신이었다. 타격을 입힌 후 수치가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흐음, 정말 펀치머신처럼 생겼군.’

스탐은 오랜만에 펀치머신을 쳐본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주먹을 꽉 쥐고 흑마기를 잔뜩 두른 채 타격대를 힘껏 쳤다.

퍼어억!!

모집소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굉음이 요동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심사관은 물론이고 보고 있던 뱀파이어들의 얼굴에  깜짝 놀란 빛이 역력했다.

“저럴 수가!”

“으음?”

어느새 스탐의 시선은 수치 측정계로 가있었다. 측정계는 최대치가 1만이었는데, 1000이라는 수치가 빨간 줄로 그어져 있었다. 그게 합격 수치였다. 지금 스탐이 기록한 수치는 5000을 넘었다.

“으으흠, 합격!"

심사관이 손을 올렸다. 그것을 본 스탐은 씨익 웃으며 나머지 합격자들을 기다렸다. 어느새 다음 지원자가 심사관의 앞에 서있었다.

"이름은?"

"바르델 크람프트."

"나이는?"

이번엔 바르델의 차례였다. 스탐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잘 몰랐는데 무뚝뚝하고 거친 인상이 평범한 뱀파이어는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꾹 쥐고 있는 두 주먹은 굵은 강철도 간단히 부숴버릴 정도로 단단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이제 바르델이 파워 테스터로 힘을 측정할 차례가 되었다. 그는 군더더기가 없는 자세로 타격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평범한 자세와는 달리 그 위력은 엄청났다.

퍼어어억!!

흑마기를 한가득 머금은 바르델의 주먹이 그대로 타격대를 쳤다. 순식간에 수치가 4000을 넘어섰다. 모두들 놀라워했다. 하지만 스탐의 경우와는 달리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합격."

심사관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바르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스탐의 옆에 섰다.

“저기….”

스탐은 바르델이 자신의 옆에 서자마자 말을 걸어오자 의아함이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우리, 통성명이나 하겠습니까? 전 바르델 크람프트입니다. 주위에서 '강격의 바르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칭을 듣고 있죠.”

스탐은 미소를 지었다. 웃기지도 않은 별칭을 듣고 있다면 굳이 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아하핫, 그래요? 전 스탐 베르크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소년단을 나왔죠. 애송이랍니다.”

“애송이가 친 측정계가 오천을 넘다니요. 너무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당신은 강합니다."

"아, 예."

스탐은 바르델이 웃으며 말하자 덩달아 웃었다. 자고로 웃는 낯에 침 뱉을 일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아까 전 바르델이 새치기를 시켜준 덕분에 약간의 호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탐은 궁금증이 일어 바르델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절 이렇게 대우하시는 겁니까?”

스탐의 말에 바르델은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지리적으로 타지보다 몇 배는 어두운 캄에덴의 검은 하늘을. 어느새 스탐에게로 고개를 돌린 바르델은 입을 열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당신이 나. 바르델 크람프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다니요? 쉽게 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훗, 그러죠. 전 당신을 이곳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다른 뱀파이어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껍데기에 불과한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닌, 정신 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투지나 기백, 그리고 많은 뱀파이어들을 이끌 수 있는 통솔력을 느꼈습니다.”

“그런가요.”

스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염두를 짚었다. 투지, 기백, 통솔력이라니?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뭐, 투지와 기백은 어느 정도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 하지만 통솔력은 저 세상 얘기였다. 혼자 움직이길 좋아하는 자신에게 통솔력을 바란다니?

스윽.

그때, 바르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스탐에게 손가락으로 어느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테스트가 다 끝났군요. 그럼 어서 가도록 하죠."

"그러죠."

스탐은 바르델을 비롯한 합격자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한 뱀파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수십 마리의 크로펫들을 하프 뱀파이어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합격자들은 이 크로펫을 타고 저를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일차목적지는 '길가리아'입니다."

"길가리아?"

스탐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길가리아라면 무한전선의 전진기지라 불리우는 다크 포트리스였다.

"그럼, 타시죠."

크로펫 위로 올라탄 바르델이 스탐에게 그렇게 말했다. 스탐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크로펫의 위로 올랐다. 그가 고른 크로펫은 작지만 날쌘 플로센산의 크로펫이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럇!"

"크허엉!"

안내자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크로펫이 특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뛰기 시작했다. 나머지 합격자들도 고삐를 힘차게 잡아 당겼다. 그렇게 무한전선을 목적지로 둔 뱀파이어들을 태운 크로펫들은 길가리아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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