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20화 (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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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또 한번의 패배

스탐이 바르델과 함께 무한전선에 참전해 언데드들과의 기나긴 사투를 시작한지도 한달이 지났다. 듣던 대로 일상생활은 끊임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식사를 할 때도 언데드들이 몰려왔고, 잠을 잘 때도 언데드들이 몰려왔다. 잠시도 안심할 수 없어 스탐은 항상 긴장했다. 그래도 그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패턴이 일정해 약간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비교적 특별한 날이었다.

“17백귀대의 뱀파이어들은 들어라!”

중년의 뱀파이어 한명이 그렇게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일단의 뱀파이어들이 차례로 서 있었는데, 그 수는 거의 1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오늘은 세달 전에 잃었던 서쪽 요새를 탈환하는 날이다!”

“잃었던 서쪽 고지?”

듣고 있던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같은 십귀대원이 가르쳐주었다.

“세달 전에 리치들에게 요새를 빼앗겼거든. 그래서 이렇게 백귀대 단위로 모여서 탈환하려고 하는 거지. 리치도 지능이 있는 놈들인 이상 요새에 상당수의 언데드들을 풀어놓거든.”

“아, 그렇구나.”

그제서야 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들에게도 요새는 중요한 장소였다. 비록 뱀파이어들이 만들었긴 하지만 언데드들은 그것을 빼앗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열 받을 만도 했다.

"그럼, 출발하라!"

소속된 십귀대가 모두 모이자 백귀대장은 주저 없이 그들을 이끌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장황한 일장연설정도는 늘어놔야 될 텐데 본론만 꺼내고 곧바로 출발하라는 한마디라니. 대쪽같은 양반이었다.

“가자!”

“언데드 놈들, 박살을 내 버리자고!”

아무튼 백귀대의 진군은 시작되었다. 스탐은 말을 주고받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평시에는 흩어져 있다가 지금처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한번씩 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제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백귀장이 십귀장들을, 십귀장이 대원들을 순차적으로 통솔하기 때문에 개개인이 강한데다 팀워크까지 맞는 그들은 실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스탐은 기대감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새점령전이라…, 도대체 어떻게 싸우게 될지 궁금한데?”

"훗, 궁금해 할 필요 없어. 이게 말이 요새점령전이지 실상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전투란 말씀. 잘 훈련된 뱀파이어가 이렇게 모이면 웬만한 언데드들은 상대가 안 될 거야.“

“한마디로 야무지게 쳐부수면 된다, 이 말이구나.”

스탐이 그제서야 감이 잡힌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전력적인 면에서 뱀파이어는 평균적으로 하프 뱀파이어 두 명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프 뱀파이어들이라면 모를까. 뱀파이어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그 힘은 어마어마해지는 것이다.

“스탐.”

“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스탐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엘리나가 배시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뭐하고 있었긴. 그냥 지금 가는 전투가 어떤지 궁금해서 말이야.”

스탐은 떨떠름하게 말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아를 응시했다. 자신이 무한전선에 온 뒤부터 그녀는 쭉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왔다. 틈만 나면 말을 걸어오기 일쑤였으며 언데드들과 싸울 때에도 곧잘 도와주곤 했다. 스탐은 그녀가 이러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강자에게 빌붙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거나.

“훗, 여기서 몇 년 만 있다보면 이런 전투는 많이 겪을 수 있을 거야. 처음이지? 이렇게 뱀파이어들이 단독으로 싸우는 건.”

“응.”

“나도 이곳에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거야. 특히나 우리 뱀파이어들이 이렇게 뭉쳤을 때는 말이야.”

“그렇구나.”

스탐이 엘리나와 그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17백귀대는 길을 가로막은 채 덤벼드는 소수의 언데드들을 간단히 처치하면서 요새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과연 숫자가 장난이 아니군? 하지만 못이길 숫자는 아니다.”

백귀대장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정찰병을 보내어 파악한 언데드들의 숫자는 대충 1000여명이었는데, 대부분 하급 언데드들이었다. 숫자가 많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아군을 이겨낼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더 두고 볼 필요도 없겠군. 그럼, 돌격!!"

백귀대장의 결단은 너무도 빨랐다. 그는 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백귀대의 뱀파이어들이 언데드들에게 질풍같이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앗!!”

"크으으아!"

뱀파이어들이 갖가지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흑마기가 가득 머금어진 살수로 언데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은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100여명의 뱀파이어들로 이루어진 백귀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너무도 강했다. 오죽하면 요새 앞에 배치된 언데드 300여 마리가 순식간에 바닥을 뒹굴 정도였을까.

"진격! 진격! 언데드 놈들을 다 박살내버려라!"

일단 요새 앞의 언데드들을 전멸시키자 속절없이 박살나고 있는 광경을 본 백귀대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에는 이 고지를 점령하는 게 시간문제로 보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본국에서 엄청난 포상이 돌아올 것이다. 생각만 하면 침이 넘어갔다.

“뭣들 하느냐! 어서 요새를 점령해라!”

“와아아아!”

뱀파이어들은 함성을 지르며 요새 안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요새라곤 해도 보수를 하지 않으니 문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벽위에서 해골궁수들이 화살을 쏘아댔지만 그들의 기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퍼퍼퍽! 촤작! 까앙

요새 안으로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성벽위의 해골궁수들은 금세 제압되었다. 요새안의 언데드들은 곧바로 침입자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몇 배나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요새는 점령될 것으로만 보였다. 그때였다.

“헉, 이놈들은?”

“크어억!”

“대, 대장님!”

“무슨 일이냐?!”

갑자기 백귀대의 후방이 시끄러워졌다. 예상치도 못했던 뱀파이어들의 비명소리가 백귀대장의 귓전을 울렸다. 백귀대장은 다급하게 시선을 뒤쪽으로 옮겼다.

“저, 저럴 수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에는 일단의 언데드들이 백귀대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백귀대장은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군의 후방을 유린할 정도라면 적어도 중급 언데드는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적의 정체는 그의 상상이상이었다.

"커어헉!"

"맙소사! 말도 안돼……."

백귀대장이 소리쳤다. 백귀대원 한명이 전사했다. 무려 4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경악한 이유는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백귀대원을 죽인 장본인은 망토, 갑옷, 투구가 모두 새까만 기사들이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그는 절규하며 소리쳤다. 무한전선에 뼈를 묻은 자신이 저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데스나이트!”

푹, 푸확!

“크아아!”

데스나이트들의 데스 블레이드에 의해 사상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백귀대장은 이제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방을 급습한 언데드들은 데스나이트뿐만이 아니었다. 듀라한을 주축으로 한 수많은 언데드들이 뱀파이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앞에도 언데드, 뒤에도 언데드.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던 중, 시선을 앞으로 옮긴 백귀대장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모두 강행돌파다! 앞의 하급 언데드들을 뚫고 요새를 탈출한다!”

말을 마친 백귀대장이 하급 언데드들을 미친 듯이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대장이 앞장서자 휘하의 뱀파이어들도 그를 따라 쐐기가 되어 하급 언데드들을 뚫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데스나이트가 포진한 뒤쪽에 비해 하급 언데드들만 배치된 앞쪽은 뚫기 쉬웠다. 백귀대는 결국 자신들이 왔던 곳의 반대쪽 문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갔다. 백귀대장은 뱀파이어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한 뒤였다.

“젠장.”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요새를 빠져나오고 나서도 사방에서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곳이 그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백귀대장은 또 다시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 상황에서 지휘관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모두 흩어져라! 반드시 퇴각지로 살아 돌아와야 한다!”

말을 마친 백귀대장은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어떻게 그냥 흩어지라는 한마디만 하고 저 혼자 몸을 뺀단 말인가. 하지만 데스 나이트가 둘이나 확인된 이 상황에선 사실 흩어지는 게 제일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길, 튀어!"

그렇게 소리친 뱀파이어들이 각자 몇 명 단위로 나뉘어져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벌써 그들의 앞에 다가온 데스나이트들의 검광이 흩뿌려졌다.

"크어억!"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한명이 무너졌다. 또 한명의 뱀파이어를 죽인 데스나이트는 흩어져 도망가는 뱀파이어들을 더 이상 쫓을 생각이 없는지 그저 쳐다만 볼 뿐이었다.

“오랜만에 뱀파이어 놈들을 많이도 죽여 보는군. 재미있는걸. 블로케르님께서 무척이나 흡족해 하시겠어.”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죽여야 할 뱀파이어는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듀리알님?"

"물론이다.“

듀리알은 자신의 옆에 무뚝뚝하게 서있던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을 옮기며 자신의 검을 꾸욱 쥐었다. 감정이 절제된 데스 나이트라 그런지 그들의 목소리는 모두 일정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듀리알. 뱀파이어들 사이에선 데스 킬러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그는 부정의 숲의 아크리치 블로케르의 손에 만들어진지 220년을 바라보는 베테랑의 데스나이트였다.

"그나저나 칼시온. 네가 말한 그 뱀파이어가 대체 누구냐? 그놈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네놈이 그토록 긴장하고 있는 거지?"

"놈은 어리지만 강합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아마 장래에 우리 언데드들의 큰 적수가 될 겁니다."

칼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정이 절제되었다곤 하나 생전의 승부욕은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이다. 칼시온. 그는 50년을 약간 넘은 정도였지만 그 어떤 데스나이트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블로케르조차도 그렇게 단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가?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강하긴 강한 놈인가보군. 세월이 흘러 너와 그 뱀파이어 놈이 싸우면 볼만하겠는데.”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들 언데드에겐 불행한 일이었지만 승부욕이 강한 듀리알은 은근히 그런 강자의 성장을 즐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순결한 영혼을 가진 기사였으나 이제는 죽어 언데드의 앞잡이가 된 자들. 원치 않는 살육만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소멸하는 그들은 살아가는 목적도 없었다. 오로지 아크 리치의 꼭두각시 노릇만 할 뿐이었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강자와의 대결뿐이었다.

“이제 놈을 찾아 나서야겠군요.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말을 마친 칼시온은 어디 론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던 듀리알도 어느새 그를 따랐다.

한편, 스탐은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뛰었는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한참을 뛰던 그는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는 주변에 있는 바위에 앉아 호흡을 안정시켰다.

“하악, 하악…, 젠장맞을.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데스나이트라니?”

“스탐, 같이 가!”

스탐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엘리나가 치렁치렁한 금발에 피를 묻힌 채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금세 스탐의 옆에 앉은 그녀가 면박을 주었다.

“야! 좀 천천히 갈 수 없어? 덕분에 숨차 혼났잖아.”

“흥. 남이야 빨리 뛰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문제는 없을 거라면서 실컷 안심시켜 줘놓고선…….”

스탐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듣고 전투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엘리나는 그제서야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데, 데스나이트가 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

"하긴, 데스나이트는 우리처럼 하찮은 놈들에겐 관심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언데드지."

스탐이 그렇게 빈정거렸다. 그녀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는 혼잣말일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정신없이 도망칠 생각만 했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았을까. 엘리나가 스탐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 넌 아직 어리잖아.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아무튼 배틀러가 적어도 한 명은 파견되어야 이런 일이 없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대체 어디로 흩어졌지? 우리처럼 정신없이 뛴 게 아니라면 지금쯤……."

"자, 잠깐. 우리라니!? 정신없이 뛴 건 너 혼자뿐이란 말이야!"

스탐은 엄숙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정정해주는 엘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금세 엘리나의 얼굴이 벌게졌다.

"하아, 그래. 그 정신없이 뛰어가는 뱀파이어를 뒤쫓아서 여기까지 온 넌 대체 뭐냐? 넌 나를 침착하게 걸어가면서 따라왔냐?."

"그, 그건……."

"훗, 역시 바보는 어쩔 수 없다니깐……."

"뭐야, 바보라고? 흥! 난 이래봬도 2서클을 마스터한 흑마술사란 말이야!"

엘리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자신을 무시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보다. 그녀는 스탐과 비슷한 연령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이에 흑마술 2서클 마스터면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탐은 이미 흑마술에 대해서라면 엘리나보다 더 뛰어난 여자 하나를 잘 알고 있었다.

“바보랑 흑마술이 무슨 상관이냐?”

“그래도 이게!”

“그리고 흑마술 흑마술하는데…, 너보다 뛰어난 흑마술사는 수두룩해. 내가 소년단시절 만났던 그녀도 그렇고 말이야. 지금쯤 3서클에 진입했을지도 모르겠다.”

말을 마친 스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리나의 반응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신의 말에 풀이 죽어야 정상인데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미친 건가?

“훗, 그래…, 루시리아라면 벌써 3서클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렇겠지? 참 대단한…….”

그렇게 맞장구를 치려던 스탐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나가 루시리아를 어떻게 알고 있지? 스탐은 순간 두 손으로 엘리나의 어깨를 잡았다.

덥썩!

"와악! 너 갑자기 왜 이래? 깜짝 놀랬잖……."

"너, 루시리아를 알아?"

스탐이 놀라는 엘리나의 말을 끊으며 정색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사라졌고, 대신 짙은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 그녀가 반문했다.

"루시리아 데플린 말이지?"

“그, 그래.”

“알고말고. 역시 네가 루시리아의 옛 애인이었구나.”

스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이를 악물었다. 루시리아라는 이름이 반복되니 괜히 그때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엘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걔라면 나도 한수 접어줘야겠지."

“어째 루시리아와 무척 친한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

“맞아. 루시리아랑 나는 같은 소년단 시절에 같은 조에 속해 있었어. 같이 흑마술을 배워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사이도 가장 좋았지.”

“아, 그럼 내게 잘 대해준 것도 그것 때문이었구나.”

스탐은 그제서야 엘리나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의문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 그런 셈이지.”

엘리나는 말을 더듬었다. 어쩐 일인지 얼굴은 유난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스탐은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루시리아에 대한 것을 캐묻기 시작했다.

“루시리아가 나한테 뭐라고 하던데?”

“네가 자기의 첫사랑이라고 했어. 루시리아도 네가 첫사랑이었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물론이지.”

“하긴, 어릴 때 만났는데 첫사랑일 수밖에 없었겠지…….”

스탐은 그렇게 단정 짓는 엘리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거짓말 같았지만 어떻게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루시리아를 그녀로 착각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엘리나의 말로 보아 루시리아는 첫사랑이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분명히 술주정을 부렸을 때 자신의 속내를 알았을 텐데 타인에게 알리진 않은 것이다.

“휴…….”

스탐은 한숨을 쉬었다. 환생한 것으로 착각했던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결국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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