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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또 한번의 패배
“안타깝네. 만약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면 무척 어울리는 한 쌍이었겠는데 말이야. 루시리아가 우리 조에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죽은 듯이 있었어.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엘리나는 루시리아와 있었던 얘기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스탐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달라지더라. 나부터 시작해서 다른 애들이랑 점점 친해졌는데 차츰 예전의 성격을 되찾아 갔어. 알고 봤더니 참 활발한 아가씨더라.”
“훗.”
엘리나의 말에 스탐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루시리아와의 추억을 주억거렸다. 이제는 과거가 돼 버린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걔가, 졸업 후에는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라. 앞으로 캄에덴 제일의 흑마술사가 될 거라고. 그때 걔의 눈빛을 너도 봤어야 해. 루시리아는 이제 다른 건 잊고 다크 매지션에 들어갈 거라는 목표에만 매달리고 있어. 나도 목표는 같지만 말이야."
"그렇구나."
스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루시리아는 첫사랑에 집착하는 만난 것 자체가 불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첫사랑의 환생에 허우적대는 나 같은 놈 따윈 잊어버려. 오로지 네 목표를 향해 걸어 가. 언젠가는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친구가 되겠지.'
어느새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야행성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한전선은 죽음의 기운이 강렬하게 서려 있다. 따라서 어두워지면 뱀파이어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스탐은 바위위에서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엘리나가 따라 일어서는 것을 확인한 스탐은 곧이어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였다.
“오래간만이다.”
마치 공포물에서나 들어볼 법한 섬뜩한 목소리가 스탐과 엘리나의 귓전을 울렸다.
"!"
"데, 데스나이트?!"
엘리나가 먼저 소리쳤다. 스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낭패로군.’
스탐은 이를 악물었다. 놀랍게도 문제의 데스나이트는 한명도 아니고 둘이었다. 단순한 숫자로 따지면 2:2의 대결. 하지만 놈들은 천하의 배틀러와 동급으로 매겨지는 놈들이라 2:1로 싸워도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스탐은 문득 눈앞의 데스나이트가 유난히 낯이 익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외형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탐은 방금 전 데스나이트가 한 말을 떠올림과 동시에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네놈은 칼시온!”
"잘 알아보는군. 상당히 오래전의 일인데 말이다."
"닥쳐, 이 빌어먹을 자식!"
칼시온을 본 순간, 스탐은 이성을 잃었다. 더 볼 것도 없이 흑마기를 가득 끌어올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스탐!”
엘리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무도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배틀러도 아닌 주제에 데스나이트 둘에게 주저 없이 덤벼드는 스탐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죽어랏!"
스탐의 매서운 일격이 칼시온에게 날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칼시온을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은 태연했다. 여유를 부리는 것일까? 그는 아직까지 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스탐의 공격에 칼시온의 머리통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채앵!
하지만 놀랍게도 칼시온은 섬광 같은 발검으로 스탐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다. 스탐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제기랄.”
“스탐, 나도 도와줄게!”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엘리나가 그렇게 소리쳤다. 스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넌 가만히 있어. 놈과 나만의 싸움이야.”
“무슨 소리야…….”
엘리나는 무척 당황스러운 어조였다. 그도 그럴것이 데스나이트가 둘이나 있는데 혼자 싸우겠다니? 물론 스탐이 그러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칼시온의 옆에 서있는 데스나이트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 놈은 팔짱만 낀 채 가만히 있는 거지?’
그가 나서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스탐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칼시온이 자신의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안심해라. 이 분은 단지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니까. 데스나이트는 약자를 죽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뭐라고?”
“네놈들 쯤이야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단 말이다.”
“닥쳐, 이 해골바가지야!"
휘이이익!!
말을 마친 스탐이 손을 뻗었다. 섬광 같은 공격이었기 때문에 칼시온은 그 일격을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아직이다!”
그렇게 소리친 스탐은 주먹을 속사포처럼 갈겨대었다. 놀랍게도 칼시온은 그저 그 강행한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스탐의 공격이 예전에 그와 싸울 때보다 더욱더 정교하고,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스탐이 칼시온을 조롱했다.
"흥, 왜 그렇게 밀리는 거냐? 데스나이트의 그 강한 힘은 어디로 간 거냐!?"
“한마디만 충고해두지. 힘은 지혜롭게 써야 더 강한 법이다. 네놈의 공격방식은 오크의 투박한 손놀림과 비교해볼때 그 어떤 차이점도 찾을 수 없다.”
"뭐라고?"
충고라곤 하지만 명백한 도발이었다. 화가 난 스탐은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더 강력한 일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분명 칼시온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스탐의 공격방식이 오크랑 같다니? 스탐의 투술은 소년단에서 캄에덴의 사천년 역사가 가미된 최강의 전투기술이었다. 또한 그는 거기에 가장 숙달된 최고의 다크 파이터가 아닌가.
"빌어먹을 자식, 헛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라!"
퍼버벅, 퍼버버벅!
스탐의 공격은 이제 절정에 치달았다. 칼시온은 계속해서 제대로 된 힘을 못쓰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그러나 칼시온이 열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먼발치에서나 볼 때였다. 가까이서 볼 때는 누가 봐도 스탐의 열세였다.
"하악, 하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탐의 숨이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호흡은 뒤죽박죽 제멋대로였고 두 팔은 금방이라도 힘이 빠질 것 같았다.
‘빌어먹을.’
스탐은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너무 무리하게 힘을 써 탈진한 상태. 반면에 데스나이트는 언데드. 체력이 무한이다. 따라서 치명타가 없는 전투는 자신의 힘만 뺄 뿐이었던 것이다.
"지친 것 같군. 넌 분명 강하지만, 역시 생명체의 한계란 어쩔 수 없다."
스탐은 입술을 깨물며 칼시온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박살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흑마기는 충분했지만 힘은 다 빠져 있었던 것이다.
"너희 뱀파이어들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결국은 생명체에 불과하지. 넌 이제 내게 흠집을 낼만큼의 힘도 없다."
스탐은 눈을 부릅뜨며 칼시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인정해야 되는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는 인간들과 달리 몸의 일부분에 흑마기를 집약시켜 싸운다. 이것은 강력한 파괴력을 뿜어내면서도 엄청난 체력의 소모를 강요한다. 스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뼈를 묻을지도 모르겠다.
"……."
"그럼 이제 내 차례군. 받은 대로 되갚아주지."
휘이익
말을 마친 칼시온은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그 일격에 스탐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풀어진 팔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촤아아아!
"크윽!"
칼시온의 데스 블레이드에 정통으로 베인 스탐이 뒷걸음질을 하면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가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흑마기를 끌어올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크으으윽!"
스탐은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신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칼시온의 검이 또 다시 날아들었다.
휘악! 휘아악!
스탐은 자신의 본능적인 반사 신경에 의존한 채 칼시온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검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갔고, 가슴을 스쳐갔다. 실로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 치명상을 입지는 않고 있었다.
"하악, 하악……."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가 왔다. 이미 그의 몸은 피투성이였으며 시야도 흐릿흐릿해져갔다. 출혈도 상당히 심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 스탐, 조금만 참아!"
보다 못한 엘리나가 칼시온에게 흑마술을 시전하려 했다. 그러자 스탐이 다급히 소리쳤다.
"넌 구경이나 하고 있어 엘리나!"
"뭐? 이유가 뭐야? 도대체 그딴 승부욕이 뭐길래!"
엘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절규했다. 그것을 본 스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되었다. 적에게 동료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선다고 달라질건 없었다. 적은 눈앞의 칼시온 뿐만이 아니니깐 말이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있다, 데스나이트.”
“그런가? 그럼 어서 덤벼봐라. 무척 기대되는군.”
"큭큭큭."
스탐은 말없이 웃음소리만 냈다. 생사의 갈림길이 펼쳐져 있는 이 상황에서 웃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탐의 정신은 또렷했다.
"간다!"
스탐은 그대로 칼시온에게 달려가 한 손을 날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었다. 하지만 그 일격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흑마기는 충분했지만 현저히 떨어진 그 속도는 칼시온에겐 우습게만 보일 것이다.
"허세였군."
짤막하게 한마디 한 칼시온이 데스 블레이드로 그의 공격을 차단하려했다. 그때였다.
"흐아앗!"
어느새 스탐이 다른 쪽 주먹을 칼시온에게 날렸다. 처음의 공격은 바로 페인트였던 것이다. 데스나이트인 칼시온마저 속여 버린 스탐의 주먹은 상대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흑마기가 집약된 채!
퍼어어억!
천지를 뒤흔들 듯한 파열음이 크게 울려 퍼졌다. 인근에 있던 새들이 놀라 날아오르고 있었다.
털썩.
“맛이 어떠냐, 자식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스탐이 웃으며 소리쳤다. 아마 놈은 크게 한방 먹었을 것이다. 한참 자신이 유리하다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당했군."
스탐의 예상대로 칼시온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투구의 모습을 띈 머리는 보기 좋게 찌그러져 있었다.
“훗, 멍청한 놈. 그런 뻔한 수법에 넘어가냐?”
스탐이 조소를 머금으며 칼시온을 도발했다. 하지만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뻔한 수법이 실패했다면 자신은 이미 저승행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네놈도 그렇게 여유부릴 처지는 아닐 텐데.”
"그래, 맞아. 크으으윽……."
말을 마친 스탐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내었더니 온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스탐!"
엘리나가 스탐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칼시온으로부터 멀어졌다. 그것을 보고 있던 칼시온이 말했다.
“나는 이미 스탐을 한명의 적수로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을 죽일 생각은 없다. 네가 덤비지 않는 한에야 말이지.”
"……."
엘리나가 조용히 칼시온을 노려보았다. 칼시온은 이미 스탐에게 맞은 일격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흑마술 2서클 마스터인 자신의 실력이라면 놈을 처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스나이트 하나를 처치할 때 돌아오는 포상은 엄청났다. 그녀도 금욕이 있었기에 곧바로 칼시온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칼시온이 한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경직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 킬러께서 너의 목을 베고 싶어 하신다. 조심해라, 뱀파이어 계집."
"!"
칼시온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금세 강렬한 살기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자 엘리나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스탐과 칼시온의 치열한 전투 탓에 그녀도 깜빡 잊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눈앞에 보이는 한명뿐만이 아니었다.
스윽.
엘리나는 주저 없이 두 손을 떨어뜨렸다. 일단은 포상보다 목숨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스탐, 네놈이 이 무한전선에 있는 한 난 언제나 네놈에게 검을 들이댈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스탐은 그저 조용히 칼시온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그에게 대꾸할 힘도 없었다.
“그럼 가지요, 듀리알님.”
“그러지.”
잠시 후, 두 데스나이트들은 어디 론가로 걸어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자 그제서야 둘은 한숨을 쉬었다.
"주, 죽을 뻔했어."
"나, 나도……."
스탐이 조그맣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아직도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거의 생사의 문턱을 드나들다시피 했으니까. 힘없이 누워 있는 스탐을 한참 쳐다보고 있던 엘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너, 걸을 수 있겠어?"
"보면 모르냐? 이 상태로 꼼짝도 할 수 없어.“
“그럼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네가 날 업어가야지.”
스탐이 간단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엘리나가 정색을 했다.
“싫어! 남자가 얼마나 무거운데?”
“무거운 거야 상대적인 거지. 난 키도 작잖아. 별로 안 무거울 거야.”
“쳇, 하는 수없지.”
엘리나는 계속 툴툴거렸지만 결국 스탐을 업게 되었다. 스탐은 신나서 소리쳤다.
“가자, 집으로!”
“명령하지 마. 힘들어 죽겠네.”
스탐은 엘리나의 단호한 말에 웃었다. 겉으로는 투덜거리고 있어도 말투를 보면 이 상황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왜 그런지는 잘 몰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스탐은 엘리나의 등에 업힌 채 백귀대장이 말한 퇴각지를 향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들은 살아야 했다.
"아, 정말 안정감이 없어 엘리나. 좀더 안정감 있게 걷지 않을래?"
"시끄러워! 업혀 있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둘은 거리를 긴 거리를 조용히 걸어가는 게 심심했는지 서로 티격태격 다투었다. 그러면서도 스탐은 방금 전 칼시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무한전선에 있는 한 언제나 검을 들이댈 거라고?’
데스나이트는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스탐은 어쩌면 무한전선에 있는 동안에 칼시온을 두고두고 만나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스탐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훗, 덤빌 테면 덤비라지.’
스탐은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천하의 데스나이트와 두고두고 싸우는 것은 자신도 바라는 바였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쯤은 충분히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보다 빨리 강해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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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인터넷 때문에 연재속도가 지연됬군요
수정해서 재미가 더 반감되다니...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