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22화 (2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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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또 한번의 패배

무한전선. 그곳은 뱀파이어와 언데드들간의 끊임없는 사투가 펼쳐지고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그들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둘도 마찬가지였다.

"받아라!"

"얼마든지."

"흐아압!"

한 뱀파이어가 고함성과 함께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그 일격을 받을 검은 갑옷의 기사, 데스나이트는 죽음의 기운이 넘실넘실 피어오르는 데스 블레이드를 치켜들어 그것을 막아 내었다.

콰지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철옹성과도 같아 보이던 데스나이트가 그 일격에 한없이 뒤로 밀려난 것이다. 어느새 그의 몸에는 깊은 상흔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순한 흑마기만으로는 천하의 데스나이트를 그렇게 만들 수 없었다. 아마 해답은 뱀파이어의 손에 맺혀 있는 짙은 흑색의 기운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흑마기가 한데 모여 만들어진 힘의 결집체, 다크 오러(Dark Aura)였다.

쾅, 카강, 카강!

둘의 대결은 긴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데스나이트는 데스 블레이드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고, 뱀파이어는 그에 맞서 다크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처억!

그리고 두 전사들의 결투에 종지부가 찍혀졌다. 어느새 그들의 목에는 서로의 흉기가 들이대져 있었다. 예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는 데스 블레이드와 다크 오러는 당장이라도 대상의 목을 베어버릴것만 같았다. 데스나이트가 먼저 뱀파이어에게 자신의 검을 거두며 말했다.

"긴 세월동안 많이 강해졌군, 스탐 베르크."

"칼시온, 네놈도 만만치 않아."

말을 마친 스탐이 뒤로 물러섰다. 칼시온도 자신의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최강의 언데드 전사라고 일컬어지는 데스나이트인 만큼 그 동작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칼시온을 바라보던 스탐은 자신의 두 손에 맺혀 있는 다크 오러를 바라보며 환희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한전선에서 스탐은 벌써 50년을 보냈다. 그 시간은 그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아니, 단순히 강하게 만들어 준 것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배틀러가 되었다니?’

스탐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칼시온을 만난 이후로 50년 동안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대결은 여지껏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스탐이 번번히 위험할 때도 있었다. 특히 8년 전의 전투에서 그는 칼시온에 의해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문턱을 가까스로 빠져나오고 나니 어느새 모든 뱀파이어들이 꿈꾸는 절정의 경지, 배틀러가 된 것이다.

“네놈과 싸워서는 도저히 단 한판도 못 이기겠군.”

스탐이 여전히 검을 자신에게 치켜들고 있는 칼시온을 보며 투덜거렸다. 웃기게도, 그들은 50년 동안 싸우면서 단 한번도 이기거나 패하지 않았다. 싸울 때마다 항상 완전히 결판을 짓지 않고 물러서는 것이다.

“승패가 가려졌다면 지금쯤 둘 중 하나는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 그나저나 칼시온. 할말이 있다.”

“말해라.”

스탐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캄에덴으로 돌아간다. 무한전선을 뜰 거라는 말이지.”

"끈기가 없는 놈이로군. 아직 우리의 싸움은 결판을 짓지 못했다."

"훗! 마음대로 지껄여봐라.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돌아가는 건 돌아가는 거야."

스탐은 웃으며 칼시온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쉽긴 아쉬울 것이다. 자신도 50년 동안 미운 정이 박힌 라이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탐에겐 칼시온만 라이벌인건 아니었다.

“나는 쓰러뜨려야 할 사내가 있다. 반드시 놈을 쓰러뜨려야 돼.”

"……."

칼시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마 스탐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억.

칼시온의 검이 갑자기 뻗어 나왔다.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그가 한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냥 보내주겠다. 하지만 네놈은 언젠가는 나와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후훗, 명심하지. 해골바가지 양반."

스탐은 그렇게 칼시온과 헤어졌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자신이 묶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5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스탐이 입단할 당시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은 바르델을 제외하면 모두 바뀐 상태였다. 스탐이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바르델이 그에게 뛰어왔다. 이미 스탐은 바르델에게 떠나겠다고 말한 상태였다.

"정말 떠나실 작정이십니까?"

“그래. 배틀러의 경지까지 올랐으니깐 캄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어.”

스탐은 언제부턴가 바르델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스탐이 배틀러가 된 이후, 바르델이 자청해서 하대하기를 원한 것이었다.

"하긴, 무한전선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캄에덴의 적은 언데드뿐만이 아니라 셀리온 평원의 몬스터, 엘프, 그리고 인간들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잘 가십시오. 원하시던 대로 지온을 반드시 쓰러뜨리십시오."

"고맙다, 바르델.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언젠간 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잘 있어라."

"예. 그럼 잘 가십시오."

그렇게 바르델과의 작별인사를 마친 스탐은 크로펫을 타고 다크 포트리스, 길가리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스탐은 무한전선 퇴역신고를 낸 뒤, 50년 동안 무한전선에서 일 해온 것에 대한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 보상금은 턱없이 적었다.

"쳇. 50년 동안 의용병으로 자원해 싸운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금이 이 정도밖에 안 돼?"

스탐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금세 레버쿠젠을 향했다. 애초에 그는 돈 때문에 무한전선에 자원한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다다다다~

스탐은 긴 여정 끝에 수도 레버쿠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빛이 일렁이는 레버쿠젠의 거리를 활보하던 그는 환하게 웃었다. 삭막한 무한전선에서 50년 동안 있다가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곳에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곳도 정말 오랜만이군.”

스탐은 소년단 시절, 혈왕성에 초청되었을 때를 떠올리며 레버쿠젠의 시내를 둘러보았다. 대광장의 중앙에는 서열1000위권 안에 드는 뱀파이어들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첨탑 랭크 타워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혈액시장(Blood Market)에서 장사꾼들이 손님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뱀파이어들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싸우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나저나 놈은 대체 어디 있을까?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스탐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느새 지온을 쓰러뜨리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무려 50년 만에 재회하게 될 자신의 숙적이었다. 솔직히 지온을 이길 수 있을지는 그로서도 의문이었다. 지금쯤 놈은 버서커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을 테니깐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배틀러였다. 같은 배틀러끼리의 싸움이라면 적어도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일단은 집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탐은 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지온과 싸우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베르크 가에 가보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소년단을 나온 뒤에도 단 며칠만 머물고 있다가 무한전선으로 갔지 않은가.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쯤이면 자신의 동생들도 다 소년단을 나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음?”

그때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스탐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캄에덴에서 가장 흔한 볼거리가 싸움판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시정잡배들의 힘자랑이었기 때문에 배틀러인 그에겐 귀엽게만 보였다. 하지만 스탐은 그 싸움을 주도하고 있는 한 뱀파이어가 누군지 알아챘다. 금세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헤에, 나도 참 행운아로군.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놈을 만나다니?”

스탐은 곧장 그쪽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한 거구의 뱀파이어가 대여섯 명의 뱀파이어들과 싸우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강하던지 쪽수가 많은 그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스탐은 주저 없이 그에게 흑마탄을 쏘았다.

파방!

“크큭?”

별안간 날아든 흑마탄을 단숨에 막아낸 거구가 스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구경꾼들의 시선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흑마탄을 쏘는 건 일종의 결투신청이었다. 스탐은 당당한 얼굴로 거구에게 소리쳤다.

"참 오랜만이다, 자식아."

"큭큭큭, 어떤 떨거지 놈이 나한테 피떡이 되려고 환장했나 싶더니 바로 네놈이었군 그래. 어쩐지 흑마탄의 위력이 꽤나 따끔하다고 했지."

스탐은 괴기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따라 웃었다. 46킷(=230cm)이라는 거구의 신장을 가진, 광기의 화신이라 불리는 붉은 머리칼의 뱀파이어. 그는 바로 스탐이 그렇게도 찾던 존재였다.

"어디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자, 지온 스트라이드!"

"큭큭큭, 바라던 바다!!"

고함성을 지른 스탐이 곧바로 지온에게 뛰어들었다. 보통 배틀러들끼리의 대결에선 흑마기부터 시작해 천천히 끌어올리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다크 오러가 맺혀 있었다.

쿠앙!

한 차례 요란한 격돌음이 울려 퍼졌다. 행인들 중 일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귀를 막았다.

“훗.”

스탐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온의 가슴에는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방심과 스탐의 노림수가 낳은 결과였다.

“이놈, 배틀러가 되었군!”

지온이 욱신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입가에는 웃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놈은 강자에 굶주린 한 마리의 늑대였다.

“배틀러가 아니면 네놈한테 어떻게 덤벼들겠냐!”

그렇게 소리친 스탐이 지온에게 달려들었다. 또다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우와아아!”

구경꾼들의 탄성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에 따라 삽시간에 구경꾼이 불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웬 꼬맹이가 저 괴물에게 주저 없이 덤벼들고 있다니. 하루에도 수십 차례의 싸움이 일어나지만 탑 클래스인 배틀러들이 길거리에서 싸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큭캬캬캭!"

강렬한 스탐의 일격을 간단히 막은 지온이 다크 오러가 집약된 두 손을 스탐에게 휘둘렀다.

파악!

둔탁한 소음과 함께 스탐이 형편없이 뒤로 물러났다.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스탐은 배틀러가 된지 8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온은 벌써 70년이 지난 몸이다. 그래서 같은 배틀러였지만 실력차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크윽…!"

스탐이 이를 악물었다. 팔이 얼얼했다. 하지만 이 한방을 막은 것에 안주해 있을 틈이 없었다. 금세 다크 오러를 머금은 수많은 손톱들이 날아들었다.

파팍! 파바바박!

스탐의 전신에 지온의 강력한 공격이 쏟아졌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릴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이걸 어떡하지?’

스탐은 지온의 공격을 최대한 막아내면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파괴력임에도 불구하고 속사포같은 공격속도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과연 괴물은 괴물이었다.

"크캬캬캬, 스탐! 네놈은 배틀러가 되었어도 여전히 약해빠졌군! 무한전선에서 오줌만 질질 할 거냐!"

지온의 도발적인 발언이 쏟아졌다. 하지만 스탐은 거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겨를도 없긴 했지만, 이미 반격을 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었다.

슈악!

수십 차례로 쏟아 붓는 지온의 공격이 최초로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다크 오러를 피한 스탐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지온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퍼어억!

“큭!”

둔탁한 소음과 함께 지온이 몸을 비틀거렸다. 그것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기가 살아난 스탐은 지온에게 당한 걸 그대로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크하핫, 너 이 자식! 오줌 마렵냐? 낑낑거리게 말이야! 덩치값좀 하지 그래?"

퍼벅 퍼버벅!

스탐은 기세 좋게 지온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지온은 거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양날의 검이라고나 할까. 뱀파이어는 힘이 한없이 강하면서도 그 힘 때문에 자만하다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지온이 방심만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미 뻗어있었을 것이다.

‘좋아, 드디어 놈을 이기게 되는구나!’

스탐이 금세 지온을 쓰러뜨리게 된다는 희열에 휩싸였다. 드디어 저 원수 같은 놈을 이기는 것이다.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겨줬고, 쥬드를 죽인 철천지원수가! 하지만 그는 그 자신도 똑같은 우를 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아, 이제 마지막이다. 이거나 먹고 뻗어!”

끊임없는 공격 끝에 지온을 구석까지 몰아붙인 스탐이 양손에 다크 오러를 한가득 모았다. 체내의 다크 오러를 거의 다 밀어 넣었기 때문에 이 일격은 한마디로 올인(All in)이었다.

채캉!

“아니!?”

그때 스탐이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힘없이 끌려 다니기만 하던 지온이 자신의 일격을 튕겨낸 것이다. 스탐은 지온의 표정을 보고선 금세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지금 순식간에 무방비가 된 상태였다. 지온이 잔인한 미소를 띠며 소리쳤다.

"크크큭, 블러드 크로스 업!"

촥, 촤아아악!

스탐의 가슴에 각각 다섯 개의 직선을 가진 두개의 대각선이 수놓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스탐이 그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크어어헉!”

그의 신형이 급격히 허물어졌다. 스탐은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분통함을 참지 못했다. 비명소리는 바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상황종료. 모든 것이 끝났다. 싸움은 지온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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