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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뱀파이어 로드의 특명
한참 시간이 지나 둘은 혈왕성내의 한 대장간에 도착했다. 워낙 혈왕성이 넓었던 탓에 둘은 이곳에 걸어오는데도 몇 십분은 걸렸다.
"여긴가?"
스탐이 입을 떼었다. 혈왕성처럼 웅장하고 클 줄 알았던 대장간은 의외로 규모가 엄청 작았다. 아마도 무기를 공급하는 쪽이 다크 나이트들에 한정돼 있어서 그런듯했다. 대장간의 입구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다이어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대장장이를 불렀다.
"저 왔습니다."
"클클클 어서오게나 다이어. 적적한데 잘 왔어."
허름한 대장간의 입구에서 한명의 드워프가 튀어나왔다. 그는 백발이 전신에 수북이 난 것이 인심 하나는 무척 좋을 것 같았다. 이윽고 스탐은 다이어에게 이 대장장이를 소개받았다.
“스탐, 이분은 벌써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다크나이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주고 있는 분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패기가 넘치는 사내로군."
둘은 각각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악수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다이어가 덧붙여 말했다.
“스탐, 이분은 철의왕국출신이셔.”
“철의왕국?”
“그래.”
다이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원래 철의왕국(Kingdom of iron)출신의 드워프였는데, 뛰어난 손재주 덕분에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것이 화근이 되어 그를 시기하던 타인들의 모함을 받아 철의왕국에서 쫓겨났다. 대륙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방황하던 그는 결국 이곳에 정착해 다크나이트들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키리엄은 스탐을 대충 훑어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뱀파이어로선 드물게 단구로군. 가끔씩 그런 체질이 있다고 하더군."
"네. 뱀파이어로는 드물게 발육부진이죠."
"어, 어이! 발육부진이라니?"
스탐은 다이어의 말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자신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행인들을 붙잡고 다 물어보아도 그런 소릴 들을 것이다. 분명히 스탐은 몸 하나는 일품이었다. 하지만 키가 작다는 사실은 뱀파이어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기에 충분했다.
“뭐, 바라크만 놈의 무식한 무기를 수리해온 나라네. 자네에게 맞는 검을 만드는 것쯤이야 식은죽먹기지.”
대장장이의 말에 스탐은 바라크만의 게일 그레네이더를 떠올려 보았다. 오죽하면 수리하는 게 만드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할 정도일까. 그래도 그 엄청난 길이의 거병을 어떻게 이 조그만 대장간에서 수리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어떻게 스탐이 검을 구하러 왔다는 걸 알아채셨습니까?”
언급도 안했는데 대장장이가 벌써 눈치 채고 있자 다이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훗, 대장간에 올 이유가 한 가지밖에 더 있겠나? 더군다나 검사인 자네가 처음 보는 인물을 데려왔으니 물론 다크나이트는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네.”
그가 스탐의 작은 키를 언급하며 말했다. 그의 말 대로였다. 다크 나이트는 갑옷과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덩치가 커야 한다는 조건이 가장 중요했다. 뱀파이어 로드를 호위하는 집단은 위압감을 가질 필요가 있으니깐 말이다. 다이어의 경우도 약물을 투여해서 40킷(2m)까지 신장을 늘린 상태였다.
“아무튼 내 무기를 만들어 주지. 그전에 한 가지 물어봄세. 자네는 어떤 유형의 검을 선호하는가?"
"저야 검을 처음 만지는 입장이니 어떤 거라도 상관없죠."
"그건 그렇겠군. 그럼 다이어가 가지고 있는 윈드커터(Wind Cuter)랑 같은 종류인 롱소드(long sword)로 만들겠네. 내게 가장 익숙한 무기니 적어도 실망스럽진 않을 거네."
"아, 예."
“그럼 저희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장장이는 그렇게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다이어는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더니, 이내 스탐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키리엄이 네 검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얘기나 하고 있자.”
“무슨 얘기?”
“나는 하프 뱀파이어가 된 후로 지금까지 이곳 혈왕성안에서만 계속 지내왔거든. 이야깃거리 없냐?"
“이야깃거리라…….”
"넌 100년도 넘게 산 뱀파이어잖냐. 살아오는 동안 겪은 추억이 얼마나 많겠어?"
"뭐, 그건 맞긴 한데……."
스탐이 말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100년을 넘게 뱀파이어로 살아왔지만 기억에 남는 좋은 추억은 없었다. 하지만 다이어의 끈질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스탐은 결국 말문을 꺼내었다.
“난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로 태어났지…….”
화르르르
무언가가 불에 달구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스탐은 다이어에게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계속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야기는 스탐이 가출한 부분까지 가게 되었다.
“셀리온 평원에서 애들이랑 같이 도망쳤는데 지온이 미친 듯이 쫓아오더군. 덕분에 나만 빼고 다 놈에게 잡혀버렸지.”
“지온? 버서커의 지온 스트라이드 말이야?”
“어라, 너 그 자식 알아?”
다이어가 지온에 대해 알고 있자 스탐이 놀란 표정으로 다이어를 바라보았다. 다이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요새 버서커에서 떠오르는 녀석이지. 마스터가 그놈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스탐이 붉그락 푸르락 해진 바라크만의 얼굴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같은 특수부대인 버서커와 다크나이트는 둘 다 캄에덴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면서 성격은 정반대였는데, 그런 탓인지 완벽한 앙숙관계였다. 그들은 단 한명이라도 뛰어난 구성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지온이 들어와 대활약을 펼쳤다. 바라크만으로선 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인간의 마을로 가는데 성공했어.”
스탐은 그곳에서 베아린의 음모를 알고 쥬드에게 간 것에서부터 지온에게 쥬드가 죽은 부분까지 다 설명해 주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다이어가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참 안됐구나. 모든 부와 명예를 얻었는데 그 꼴이 되다니…….”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스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도 다이어의 심정이 어떨지 대충 알고 있었다.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그도 하프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는 한명의 인간이었을 테니까. 스탐은 문득 다이어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다이어. 넌 어떻게 하프 뱀파이어가 됐어?”
“응? 그건 왜?”
다이어는 어째 숨기는 분위기였다. 아마도 남에게 밝히지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가보다. 스탐은 호기심이 더욱 증폭돼 그에게 재촉했다.
“왜긴 왜야. 궁금해서 그러는 거지. 어서 말해봐.”
“알았어. 내가 인간일 때는 말이야…….”
척.
그때였다. 드워프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검 한자루가 검집채로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스탐과 다이어가 환한 얼굴로 합창하듯 말했다.
"끝났어요?"
"끝났나요?"
"아니!"
"엥?"
대장장이의 말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흘러나온 그의 말에 웃음보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끝난 게 아니라, 완성된 것일 뿐이지."
"아하핫."
"푸하하. 농담도 참."
말을 마친 둘은 동시에 키리엄을 째려보았다. 나잇살 먹은 노인이 그따위 헛소리나 하다니.
"……."
키리엄은 둘의 눈 째림을 감당해낼 수 없었는지 먼 산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험험…. 아무튼 간에 검이 다 만들어졌네. 받게."
"예."
스탐은 받아들었다. 다크나이트는 아나만디움으로 코팅된 갑옷과 무기를 사용한다. 그가 받은 검도 그랬다. 금세 검집에서 검을 빼내자 아나만디움 특유의 어두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스탐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끌끌끌…, 마음에 드는가보군?"
"예. 무척 마음에 듭니다. 여태껏 무기를 써본 적은 없지만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것만 쥐고 있으면 뭐든지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허허허…. 검을 받고 처음부터 느낀 게 살육의 욕구라? 하긴, 넌 뱀파이어니 당연하겠지. 아무튼 그 검을 잘 쓰도록 하게."
"예….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목걸이라고?"
다이어와 키리엄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목걸이라니? 뱀파이어들은 반지라면 모를까, 그 외의 장신구는 선호하지 않는다. 갑자기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했으니 이해를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예. 목걸이 말입니다. 이런 모양을 가진 목걸이인데 아나만디움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흐음…, 나도 장신구를 만들어본 적은 많네만, 생전 처음 보는 형태로구먼.”
대장장이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모양을 그리고 있던 스탐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여기선 그런 모양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깐.’
스탐이 대장장이에게 만들어 달라고 말한 물건은 바로 세현이와의 사연이 얽힌 반태극 모양의 목걸이였다. 그는 아예 목걸이를 매고 인간 세계를 거닐 생각이었다.
‘그래,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거야.’
어떻게 보면 무모했고, 허무맹랑한 짓이었다. 과연 세현이 인간으로 환생해서 그와 만날 확률이 어느 정도일까?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그보다 일찍 늙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스탐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목표를 잃고 바스러질 테니깐.
"이보게, 아나만디움이 흔한 금속인줄 아는가? 사치스러운 장신구를 만드는데 그걸 써달라니?"
“하지만 뱀파이어 로드께 받은 아나만디움이 적지는 않을 텐데요. 제 검은 꽤나 작은 편이니 목걸이를 만들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대장장이가 흠칫거리는 것을 본 스탐이 미소를 지었다. 대충 넘겨짚은 건데 정말인가 보다. 사실 목걸이를 만드는 것보다 검신을 코팅시키는데 들어가는 아나만디움의 양이 더 많았다. 또 바라크만의 애병인 게일 그레네이더는 아나만디움으로만 만들어진 물건. 그런 것과 비교해볼 때 목걸이하나쯤이야 발톱 밑의 때 수준이었다. 결국 스탐은 그의 승낙을 얻었다.
"알겠네. 내 자네를 특별히 보아서 하나 만들어주는걸세."
대장간에 들어간 그는 순식간에 스탐이 주문한 목걸이를 뚝딱 만들어서 가져왔다. 아나만디움으로 장신구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참 대단한 손재주였다. 스탐은 다이어와 함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잘 가게.”
그렇게 대장장이와 헤어진 스탐은 다이어와 함께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이어가 웃으며 말했다.
"훈련장에 갈 필요 없이 여기서 바로 하는 게 어때?"
스탐은 대번에 그 제안에 응했다. 검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바라던 바다."
말을 마친 스탐이 다이어에게 검을 휘둘렀다.
챙깡!
스탐은 그날부터 다이어에게 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부터 시작해 흑마기를 검에 주입하는 법까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검술이란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스탐은 다크나이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들과 1:1로 치열한 대련을 펼쳤다. 수많은 실전경험이 실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어느 누구와의 대련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바라크만과의 대련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정도니 말이다.
그렇게 스탐이 다크나이트들 틈에서 시간을 보낸 지 5년이 지났다. 그 동안의 세월은 그의 검술실력이 엄청난 수준으로 향상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스탐이 인간세상으로 정탐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제 갈 거냐?"
다이어가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스탐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검술도 충분히 익혔으니 이제 인간 세계로 나가기엔 무리가 없으니까.”
"그래, 내가 널 말릴 수 있겠냐? 아무튼 조심해라."
다이어의 말에는 걱정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여 있었다. 그도 예전에 인간이었기 때문에 스탐이 봉변을 당하진 않을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이어에게 스탐은 자신의 검을 내보이며 말했다.
“걱정도 팔자야. 이 디스트로이어(Destroyer)가 있는데 뭐가 두려워?"
"뭐, 그도 그렇겠지만…아무튼 잘 가라. 그리고 갖다 오면 바로 나한테도 인간세상의 정세에 대해 얘기 좀 해줘. 알았지?"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한때 인간 아니었다고 할까봐."
그렇게 투덜거리며 다이어와의 작별인사를 마친 스탐은 곧장 말 위에 올랐다. 캄에덴의 말은 대부분이 식용이었는데 그 말은 드물게도 준마였다.
다그닥, 다그닥.
"후후훗. 드디어 인간 세계에 가는 구나. 괜지 모르게 두근거리는데?"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중얼거린 스탐은 달아오르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우렁찬 말의 울음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스탐은 머지 않아 인간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뭐, 어떤 직업을 갖든 간에 재미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스탐은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를 꾹 쥐었다. 그리곤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