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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스탐, 모험을 떠나다
짹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행들은 잠에서 깼다. 모포를 비롯한 장비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행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끊임없이 지루한 걸음의 연속이었다. 가는 도중에도 허름한 마을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도보 끝에 드디어 제피스트 왕국의 수도 제피온에 들어섰다.
"허가증을 대십시오."
관문에 들어서자마자 튀어나온 경비병의 한마디였다. 프리건은 곧바로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었다.
"흐으음……."
"무슨 문제라도 있소?"
경비병이 허가증과 자신을 번갈아 보자 프리건이 물었다. 소드 마스터가 살기를 띄우고 한 말이다. 그런 탓에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을 띄고 있던 경비병은 대번에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통과."
그렇게 일행들은 관문을 통과해 제피온에 당당히 들어섰다. 그때 세리아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프리건에게 물었다.
"경비병들이 왜 우리들을 이상하게 쳐다본 거죠?"
“세리아는 엘프니 잘 모르겠군.”
프리건은 세리아에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가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푸른 매의 형상이 각인된 그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프리건이 말했다.
“이 허가증은 크로프란에서 발급된 거라네. 그것 자체가 저 경비병이 적개심을 품을만한 일이야. 우리 크로프란과 제피스트, 두 왕국은 오래전부터 앙숙관계였으니까.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
프리건의 말에 크로프란 출신의 네 남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관적으로 들릴 진 모르겠지만, 제피스트 왕국은 정말 더러운 나라라네. 300년 전만 해도 두 나라 사이가 좋았어. 우리 크로프란은 미개한 제피스트 인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 아마 우리가 없었다면 놈들의 생활수준은 오크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을 거야. 하지만 놈들은 200년 전 크로프란을 침공했지. 개구리 올챙잇적 시절 생각 못한다고, 국력이 왕성해지고 군사력도 강해지니까 바로 쳐들어온 거야. 아무튼 그 전쟁은 양측이 엄청난 사상사를 내면서 끝났지. 그때 이후로 크로프란인들은 제피스트인들만 보면 증오심을 불태웠지. 놈들도 마찬가지였고.”
“이해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사이가 안 좋다는 거군요.”
묵묵히 듣고 있던 세리아가 말했다. 프리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기를 함께 듣고 있던 스탐이 상념에 잠겼다.
‘크로프란과 제피스트라…, 뱀파이어와 엘프처럼 원수지간인가보군.’
확실히 어디를 가나 원수관계는 있는 것 같았다. 그게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스탐은 두 나라는 국가 대 국가간이 원수지간이니 뱀파이어와 엘프와는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를 하자면, 자신이 환생하기 전에 존재했던 두 나라와 매우 흡사했다. 물론 두 나라가 원수지간이고 자시고 간에 결론은 하나였다.
“그럼 여기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겠군.”
“그렇네. 제피스트 인들이 우리를 곱게 봐줄 리는 없을 거야. 그러니 필요한 식량과 장비만 챙기고 빠져나가자고.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리면 골치 아프다네.”
"어라? 그러면 여관은 구경도 못해보고 유에센 제국까지 걸어가야 된단 말이에요? 또 노숙을 해야 되다니……."
가만히 듣고 있던 라시아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에 울상을 지었다. 크래튼이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쩔 수 없잖아. 이해해.”
어쩌랴. 프리건이 일행의 리더인데 그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들의 발걸음은 어느덧 제피온의 대광장까지 다다랐다.
‘확실히 일국의 수도라고 할만하군.’
스탐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기사, 용병, 일반인, 상인등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꼬마 애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배낭을 뒤져보던 프리건이 말했다.
“식량이 바닥났군. 일단 식량부터 사러 가야겠어.”
“그래야겠군요. 가는 김에 식사도 해결하죠.”
“그러지.”
그렇게 일행은 제일 먼저 식당에 들렀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가자마자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일행들은 빈 테이블에 앉았다. 프리건은 펜으로 종이에다가 뭔가를 끄적이더니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에 적힌 대로 여행용 식량을 싸주시오.”
“예, 손님. 그럼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거랑 이거, 이걸로 해주세요.”
“저는 이걸로…….”
이윽고 일행들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골랐다. 이미 며칠간의 노숙 생활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그들이었다. 크래튼이 세리아에게 메뉴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세리아는 엘프니까 채식을 해야 되겠죠?”
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실은 제가 빛의숲을 나온 이유도 인간의 음식을 한번 먹어보기 위해서랍니다. 아무거나 시켜도 상관없어요.”
“그런가요? 그럼 제가 시켜 드릴게요.”
“그러세요.”
크래튼은 한껏 미소를 띄우며 세리아가 주문할 음식을 자기 취향으로 골랐다. 아마도 그녀가 시켜놓은 음식을 다 먹지는 못할 테니 남은 것을 자기가 다 먹을 심산이었나 보다. 인간들에겐 엘프는 채식 이외의 다른 건 잘 못 먹는다는 편견이 뿌리박혀 있을 테니깐 말이다. 잠시 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주문한 음식 나왔습니다.”
“와~, 이게 인간의 음식이라는 거구나.”
세리아가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요 며칠간 동행할 때도 함께 음식을 얻어먹긴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 지금이 처음일 것이다. 그녀는 칼과 포크를 이용해 한 조각을 잘라먹었다.
우물, 우물.
“어때요? 먹을 만해요?”
크래튼이 능글맞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세리아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스탐은 피식 웃었다. 아마 크래튼은 세리아가 먹기 싫다고 하면 곧바로 그녀의 것까지 싹쓸이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
세리아가 감탄사를 토해내며 빠른 속도로 스테이크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랐는지 나머지 일행들이 모두 수저를 놓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한참 보고 있던 스탐이 기가 차서 말했다.
“나 참, 엘프면서 인간의 음식을 그렇게 즐겨 먹다니, 너 정말 엘프 맞아?”
“훗, 내가 엘프지 뭘로 보이니? 엘프가 채식만 한다는 편견은 버려!”
“풋, 오늘 정말 대단한 걸 봤군.”
“확실히 깬다.”
일행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정말 편견 한 가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크래튼. 제 꺼 다 먹었는데 이거 먹어도 되요?”
“아, 얼마든지 드세요.”
크래튼은 자신의 음식을 가리키며 묻는 세리아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울상을 짓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리아 덕분에 식사시간이 조금 길어지게 되었다.
“여기, 말씀하신 여행용 식량입니다.”
“식사한 것 까지 합해서 얼마죠?”
“6실버입니다.”
식사가 끝나자 프리건 혼자 계산대로 갔다. 워낙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금액이 만만찮았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은화 여섯 닢을 냈다. 아마도 돈이 두둑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배도 채웠으니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군.”
프리건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도시에서 식사만 하고 떠난다는 게 약간은 꺼림칙했지만 크로프란 인이 제피스트에 계속 있어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키키키. 야 너 거기서!"
"메롱 나 잡아봐라!"
"야, 씨~, 거기 안서?"
스탐의 눈에 한 무리의 꼬마들이 보였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한 아이를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쫓아가고 있었다. 스탐은 희미하게 웃으며 어릴 적 전생의 향수에 젖어들었다.
‘훗,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군. 저 시절에는 아무런 근심도 없었는데 지금은, 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전생의 그 시절로 말이다. 뱀파이어로 환생한 뒤, 쌓여만 가는 것은 이별한 친인들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함뿐이었다.
스탐은 세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처럼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한숨만 나왔다.
‘휴우, 차라리 전생의 기억을 잊는 게 더 나았을지도…….’
그렇게 스탐이 고개를 돌려 갈 길을 가려던 순간이었다.
히히힝!
난데없이 들린 말소리에 스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방금 전 자신이 보고 있던 방향이었다.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은 주저앉아 있었고, 그들의 앞으로 호위병을 위시한 한대의 마차가 우뚝 서있었다.
“저건 뭐지?”
“뭐, 흔히 있는 사고라네.”
스탐의 물음에 프리건은 그렇게 대꾸하곤 다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스탐은 계속 그 장면을 주시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호위병들이 말에서 내리더니 그 꼬마들에게 다가왔다.
스르렁.
“스르렁?”
스탐은 쇳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 소리는 분명히 검을 뽑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에서 내린 병사들은 전부 무기를 뽑아들었다. 아이들을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주저앉아 공포에 울고 있을 뿐이었다.
"뭐냐?"
척 듣기에도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마차에서 내려 호위병들에게로 다가왔다. 20대 초반의 그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호화로운 옷에 보석이 군데군데 박힌 검을 차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제피스트 왕국의 귀족집 아들로 보였다.
"도련님. 이 천한 평민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길래……."
호위병이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사내가 아이들에게 사악한 눈빛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흐흐흐, 그랬단 말이지? 감히 이 고귀하신 루이츠 가의 장남인 나 제라딘 폰 루이츠가 가는 길을 가로막다니? 일단 더러운 평민들의 피가 묻을 것 같아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의 말에 스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대신에 이 추잡한 평민 놈들이 다시는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모두 잘라내야겠다.”
“미친 새끼.”
제일 먼저 스탐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불현듯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호위병들이 고개를 떨어뜨린걸 보아하니 진담인 듯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더러운 평민 놈들의 팔 다리를 베어라! 우리 아버지가 무섭지 않단 말이냐?"
"아, 알겠습니다."
호위병들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들도 내키지는 않는 듯 표정이 영 좋지 않았지만, 권력의 힘 앞에선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처억.
그때 호위병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그것을 본 스탐은 깜짝 놀랐다. 그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멈춰!”
“뭐, 뭐냐!?”
호위병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눈앞의 상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긴 귀에 금발의 늘어뜨린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 그들의 기억대로라면 상대는 바로 엘프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엘프가 자신들의 주인에게 다가갈 때까지 그녀의 미모에 혹해 계속 넋 놓고 있었다. 그것이 큰 실수였다.
짝!
의외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로 세리아가 제라딘의 뺨을 친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호위병들도 난데없이 일어난 돌발 상황에 할말을 잊었다. 잠시 후, 제정신을 차린 제라딘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세리아에게 소리쳤다.
"이, 이년이!! 내가 누군지 알고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100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인간, 알아서 뭐해? 도대체 네가 뭐 길래 이 아이들의 팔 다리를 자르겠다는 거야?"
세리아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제라딘을 쏘아보았다. 그것은 일행들이 처음 보는 세리아의 모습이었다. 제라딘은 그녀의 기세에 눌러 몇 발짝 뒷걸음질 했다. 하지만 금세 호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 뭣하느냐! 어서 이 엘프 년을 끌고 가라! 감히 내 뺨을 치다니…얼굴이 반반하니 그 대가는 충분히 갚아주겠다."
스탐은 보았다. 한 순간 제라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은 사라지고, 탐욕이 서린 것을.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앞으로 나섰다. 세리아가 여행도중에 우연히 만나 동행한다곤 하지만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으음? 넌 누구냐?"
퍼벅!
대답 대신 날린 건 주먹이었다. 스탐이 날린 단 한방의 주먹에 호위병은 금세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자식이!"
그 광경을 본 다른 호위병들이 일제히 스탐에게 달려들었다. 스탐은 피식 웃었다. 눈앞의 상대는 네명. 숫적인 우세를 믿는 건지 무기는 쓰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말을 마친 스탐은 그대로 발을 뻗어 호위병의 복부를 걷어찼다. 놈이 신음소리를 내며 곧장 바닥에 널브러졌다.
“커헉.”
“받아라!”
또 다른 호위병이 주먹을 날려 왔다. 스탐은 간단한 동작으로 그 공격을 피하고선 그대로 그 기사에게 다가가 무릎으로 얼굴을 찍었다.
"커허억!!"
"이, 이럴 수가!!"
나머지 두 호위병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스탐은 씨익 웃었다. 전투 중에 방심은 죽음과 직결된다는 걸 모르는군. 풋내기들이었다.
퍽! 퍽!
각각 두 방의 펀치를 맞은 호위병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제라딘이 깜짝 놀랐다.
"맙소사!"
스탐은 세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제라딘에게 말했다.
"어이, 고귀하신 귀족나리. 이 엘프 레이디의 말씀대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남의 목숨을 취할 수는 없는 법이야.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도 바쁜 몸이니 그냥 손만 봐주겠다."
"뭐라고?! 이 놈이……."
퍽! 퍼퍼퍼퍼퍽!
스탐은 제라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때려눕혔다. 그리곤 무진장 밟아대기 시작했다. 놈은 그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보호해줄 호위병들이 다 쓰러졌으니까 말이다.
"크헉, 크헉! 크아아……."
얼마나 밟았을까. 제라딘은 반실신한 상태였다. 옷은 지저분해졌고, 얼굴에는 보기 흉할 정도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감상하고 있던 스탐은 세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가자."
"응? 으응……."
멍하니 있던 세리아는 그제서야 움직였다. 프리건은 곤죽이 되어 쓰러진 제라딘과 스탐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자네……."
"어서 가도록 하지.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으니깐."
스탐은 원래의 냉철한 어조로 말했다. 그 방법이 먹혀서였을까. 프리건은 군말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그, 그러세.”
“어, 어서 가죠.”
일행들은 황급히 수도의 출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크로프란인들이 적국이나 다름없는 제피온에서 사람을, 그것도 귀족을 팼다. 계속 있다가 험한 꼴을 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스탐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제라딘은 마부의 신고로 달려온 병사들에 의해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제라딘의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 찼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치욕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을 그냥……."
“아마 놈들은 제피온을 떠나고 없을 겁니다.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까 말입니다.”
병사 한명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제라딘의 화를 더욱 돋꾸웠다. 제라딘은 그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시끄러! 나도 알고 있어, 이 새끼야! 엘프랑 그 검은 머리, 그 두 연놈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감히 이 고귀하신 이 몸을 이 꼴로 만들어놓다니?"
제라딘은 분통을 터뜨렸다. 놈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죽일 능력이 없었다. 호위병 다섯을 그냥 보내버릴 실력이라면 추격해봐야 못 잡을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호위병들에게서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듣고 있던 한 병사가 말했다.
“그 자들은 크로프란 놈들입니다. 제가 직접 허가증을 봤습니다. 틀림없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당장 아버지한테 가야겠군. 놈들에 대한 반감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리가 없어!"
제라딘이 화색을 띄우며 잔인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루이츠 공작은 왕국 제1의 권력자였다. 그것을 빼내서 놈들을 응징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제라딘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상대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이놈들, 반드시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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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까지가 1권분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