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29화 (2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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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갑기들과의 대결

제피온을 유유히 빠져나온 일행은 유에센 제국을 향한 발걸음을 한걸음씩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아직까지 제피스트 왕국의 영토 안이었다.

“세리아님, 힘드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힘들면 말만 하세요.”

크래튼이 세리아의 옆에 바짝 붙은 채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미녀에게 약하다던데, 크래튼이 딱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세리아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극진히 대해주고 있었다. 한참 그들을 보고 있던 라시아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에휴! 또 유에센 제국의 수도까지 먼 발걸음이라니. 여기서 쉬지도 않았는데 너무 힘들어."

“지금까지 불평 없이 잘 걸어오다가 갑자기 웬 궁상이야?”

크래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리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 점이 라시아를 더욱 짜증나게 만든 것 같았다.

"넌 체력이 튼튼하니까 내 고통 모를 거야."

"그만 투덜 대. 어린애도 아니고……."

"뭐야? 어린애? 너 말 다했어?"

"흥. 그런 식으로 투정부리는 게 어린애가 아니면 뭐야?"

그렇게 크래튼과 라시아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스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싸울 건수도 아닌 것 같은 데 싸우는 게 참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건 바로 프리건이었다.

“크래튼과 라시아는 서로 연인사이지. 류인과 디아나도 그렇고. 자기 남자가 자기보다 더 예쁜 여자한테 붙어 있는데 심술이 안날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겠군.”

하지만 그들의 말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를 지나쳤다. 처음 다툰 이유가 사소한 말장난이었음에도 어느새 욕설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프리건이 중재하기 위해서 나섰다.

“그만 싸우게. 아직 마을도 한참 있어야 나온다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말게나.”

그러나 그의 말은 오히려 둘의 감정을 더욱 돋굴 뿐이었다. 라시아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시면 가만히 있으세요! 이건 프리건님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 그러지."

라시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기 때문에 프리건은 조용히 물러났다. 남녀간의 다툼은 천하의 소드 마스터도 못 말리나보다.

“둘 다 그만해요.”

조용히 그들을 보고 있던 세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왠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네."

세리아의 한마디는 크래튼에게 직방이었다. 크래튼은 금세 라시아와의 말다툼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라시아의 화를 부추겼다. 그녀는 세리아에게 가서 따졌다.

"세리아. 이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에요. 당신이 뭔데 나랑 크래튼이 싸우는 데 이래라 저래라에요?"

"전 단지 두 분이 싸우는 게 보기에 좋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

"시끄럽군요! 고작해야 그 반반한 얼굴로 남자나 홀리는 주제에……."

퍽!

짝도 아닌 퍽이었다. 일행들은 깜짝 놀라 세리아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적이며 연약함의 상징인 엘프가 성직자를 때리다니? 세리아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라시아의 허리를 발로 찼다. 비명소리가 났다.

"아악!"

“뭐, 남자를 홀려? 너 따위가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르티시앙님을 떠받드는 성직자주제에 말이야!”

퍼퍼퍽!

세리아는 계속 라시아를 밟아 대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한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리아의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시아는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채 세리아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그, 그만하세요, 제발…악!"

"웃기지마! 너같이 추악한 인간은 더 맞아야 되! 네가 제라딘이라는 그 귀족 놈이랑 뭐가 달라?"

"아악! 아아악!"

고통에 겨운듯한 라시아의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세리아의 구타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스탐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그녀의 두팔을 낚아챘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놔! 누구야!?"

"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스탐이었다. 그는 세리아가 하는 짓을 더는 못 참아서 나간 것이다. 세리아는 스탐의 손을 뿌리치려고 팔을 흔들었다.

"놔!"

"그만둬.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시끄러!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세리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스탐의 손을 뿌리쳤다. 화가 난 스탐은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손찌검을 날렸다.

짝!

"……."

“그래,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고 있어.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일행에게 좋지 않다는 것 을 말이야. 나도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잘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참아줘."

스탐은 방금 전 손찌검을 날린 게 미안해 세리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마도 그녀는 제라딘이라는 귀족의 눈빛에서 무언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듯했다. 백여 년 동안 빛의 숲에서 순수하게 살아오다 처음으로 인간의 잔인함을 깨달았을 테니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리아는 너무 특이했다.

"미안해, 스탐……."

세리아는 흐느끼는 어조로 말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느새 스탐의 눈은 라시아에게로 갔다. 라시아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탐은 라시아를 일으키려고 손을 건네려고 했으나 다시 거두었다. 대신 크래튼에게 살기를 머금고 말했다.

"이봐, 멍청한 검사 나리. 네 녀석은 네 여자가 남에게 얻어맞고 있는데도 가만히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냐? 이런 답답한 놈."

"미, 미안해."

"왜 네가 나한테 미안하냐? 얼른 라시아나 부축해줘라."

"아, 알았어."

그렇게 크래튼이 만신창이가 된 라시아를 부축해주는 가운데, 스탐의 고개는 다시 세리아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등만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뭘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투명한 물방울이 현재 그녀의 감정이 어떤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때려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이해해줘."

스탐이 세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세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니, 괜찮아. 사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지금은 정신을 차린 것 같구나. 그럼 어서 라시아에게 사과해.”

말을 마친 스탐이 라시아를 불러 세웠다. 아직 감정이 풀리지 않은 듯 라시아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라시아. 제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군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다 제 탓이죠.”

둘은 한마디씩 하며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둘이 화해하는 것을 본 스탐 환하게 웃었다. 그는 금세 프리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문제도 해결되었고 하니 어서 가보는 게 좋겠군."

“그러지.”

고개를 끄덕이는 프리건을 본 스탐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그를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쿵, 쿵.

"음!?"

뒤편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프리건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왠지 좋지 않아 보여 일행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소리는…제길. 모두 전투준비를 해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 길래 그렇게 긴장하는 겁니까?”

크래튼이 그렇게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소드 마스터가 리더인 이 파티면 오우거 서너 마리도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상대란 말인가. 하지만 잠시 후, 일행들은 왜 프리건의 표정이 그토록 심각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맙소사, 이 녀석들은!"

디아나가 깜짝 놀라 소리치며 어느새 일행들의 앞에 당도한 거인들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것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거대했다.

"마갑기잖아!"

류인이 경악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저 강철의 거인은 마법사의 작품. 적으로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 공포를 느끼는 존재니깐 말이다

모든 일행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마갑기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스탐과 프리건만이 조용히 마갑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갑기라……."

스탐은 흥미로운 얼굴로 무지막지하게 생긴 그 거대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용병으로 생활하고 있던 3년 동안 마갑기라는 존재에 대해선 귀가 따갑게 들었다.

수십 년 전, 골렘 제작 분야가 그 난해함 때문에 소실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을 애통하게 여기던 유에센의 한 마법사가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마갑기였다.

마갑기는 일반적으로 골렘이 스스로 움직이게끔 하는 기존의 방법과는 달랐다. 파일럿을 탑승시키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것은 골렘의 육중한 몸뚱이에 인간의 두뇌를 합치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마갑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는데 앞장선 유에센은 그 덕분에 차르니아 제국을 전쟁에서 이기고 확실한 신흥강국으로 자리잡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각국에서는 저마다 마갑기의 제작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어떤 나라는 유에센에게 마갑기의 직수입을 요구할 정도였다.

인간의 형상을 한 마갑기는 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포스 엔진(Force Engine)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완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뿜어내며 마나 스톤(Mana stone)을 주 동력원으로 이용한다.

마갑기 한기를 제작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은 물론이고 마법사, 연금술사와 같은 고급인력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도 마갑기만 잘 다루면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전력이 된다. 전쟁에서 더 없이 매력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에게 왜 나타난 거지?”

스탐이 의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갑기는 국가에서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비밀병기였다. 그런데 평범한 일행에 불과한 자신들을, 그것도 셋이나 막아서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갑기의 면면을 살펴보던 스탐은 머지않아 이 쇳덩어리가 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깨달았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확신에 불과했지만, 뒤이어 나온 목소리는 결정타로 다가왔다.

―크흐흐흐흐! 도망가 봤자 소용없다, 이 어리석은 놈들! 이 고귀하신 루이츠 공작가의 장남 제라딘 폰 루이츠님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편안히 갈 줄 알았느냐?

“알아서 정체를 밝혀주시는군.”

마갑기에서 들려온 소리에 스탐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갑기의 파일럿은 바로 자신이 제피온에서 떡을 만들어 놓은 귀족 놈이었다.

“그런데 저런 애송이가 어떻게 마갑기를 탈 수 있는 거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권력이 마갑기는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탐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것은 바로 프리건이었다.

“루이츠 가는 제피스트 제일의 권력가지. 그리고 자네가 때려눕혔던 제라딘은 파일럿 후보생이라네. 아마도 아버지에게 입김을 불어넣었겠지. 그는 크로프란 인이라면 치를 떠는 인간이니까.”

“그렇군.”

스탐이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나라 사이가 얼마나 원수지간이면 일개 일행에 불과한 자신들을 잡으려고 마갑기까지 동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상황은 여유롭지 못했다.

―이 놈들, 다 죽여 버릴 것이다! 특히 검은 머리, 네놈은 특별히 잔인하게 찢어서 걸레조각으로 만들어주마! 뭣들 하느냐? 어서 놈들을 없애라!

제라딘의 고함이 끝나자마자 마갑기들이 일행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쿵, 쿵.

스탐은 마갑기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일행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저들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스탐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스탐이 말했다.

"난 제라딘의 마갑기만 맡겠어. 나머지는 너희들이 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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