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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갑기들과의 대결
―뭐, 뭐냐!? 네놈 마법사였냐!
"상상력이 좋아서 나쁠 건 없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짤막하게 대답한 스탐은 다시 한번 흑마탄을 날렸다. 아까와 똑같은 부위였다.
파팡!
어깨관절이 끊어져 팔이 떨어졌다. 원래 마갑기의 관절부위는 적의 최우선 공격목표였기 때문에 방비를 단단히 해 놓는다. 하지만 배틀러인 스탐의 흑마탄은 파괴력이 너무도 뛰어났다. 똑같은 부위를 단 두 방 맞고 팔이 끊어질 정도니 말이다. 그 두 가지가 제라딘의 마갑기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남은 건 두 다리 뿐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이 자식!
"아직 다리가 남아있었군 그래.“
말을 마친 스탐은 몸을 움직였다. 놈에게 남은 유일한 공격수단은 발로 밟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스탐은 자신을 밟으려고 날뛰는 마갑기의 거대한 발을 피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쥐새끼가 누군데 그래?”
제라딘의 외침에 가볍게 대꾸한 스탐은 마갑기가 발을 든 틈을 타 재빨리 놈의 뒤로 빠져 나갔다.
―이 놈! 어디 있냐?
등잔밑이 어둡다고 자신의 바로 밑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제라딘이 소리쳤다. 그런 그를 비웃은 스탐은 발뒤꿈치에 다크 오러를 집약시킨 채 찍어 넣었다. 패도적인 기운이 가득 담긴 스탐의 공격에 금세 한쪽다리가 허물어졌다.
"아직 멀었어!"
퍼어엉!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남은 다리한쪽도 허물어졌다. 결국 제라딘의 마갑기는 팔다리가 다 끊어진 한 개의 쇳덩어리로 전락되었다.
“훗, 천하의 마갑기가 무용지물이 돼 버리셨군 그래.”
비릿하게 웃은 스탐은 천천히 마갑기의 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마갑기의 몸통 앞면을 강제로 들어올렸다. 덕분에 조종석이 대번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겁에 질려 있는 제라딘의 모습도 한 눈에 보였다.
"허억!"
"상당히 재미있었다. 간 부은 인간."
말을 마친 스탐은 조종석에서 제라딘을 끌어냈다. 물건을 꺼내듯 집어던졌기 때문에 제라딘의 육신은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크어억!”
제라딘이 온몸을 꿈틀거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뒤이어진 공포에 육체적인 고통스러움조차 수그러들었다. 스탐이 제라딘의 멱살을 잡으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무슨…….”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던 제라딘이 말끝을 흐렸다.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 사내가 드러내고 있는 이빨이 유난히 특이해 보였다.
“서, 설마?!”
제라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에 본 영웅소설이 기억났다. 아르티시앙의 가호를 받은 정의의 기사가 악신 벨리우드의 후예,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내용이었다. 거기서 나온 뱀파이어에 대한 묘사는 눈앞의 사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전에 싸울 때에도 믿기지 않는 몸놀림을 보여주었지 않은가. 제라딘의 안색이 금세 새파래졌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스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절 살려주신다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십만 골드라도 만들어 바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후우~ 이봐. 난 그깟 십만 골드보다도 네 목숨이 더욱 더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난 뱀파이어란다. 그깟 화폐 따위에는 관심 없어. 인간의 피라면 모를까."
입술을 핥으며 말하는 스탐을 보며 제라딘은 절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뇌리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천천히 다가오던 스탐이 이빨을 자신에게 들이대기 직전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자, 잠깐!”
“뭐야?”
"저희 왕국에는 수많은 노예상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애부터 시작해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까지 다양한 종류의 노예를 취급하죠. 제가 알기론 뱀파이어는 인간처녀의 피를 가장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호오~, 그래?”
제라딘이 내놓은 뜻밖의 제안에 스탐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뻔히 알면서 제라딘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요점이 뭐냐?"
"저를 살려주신다면 충분히 만족하실 정도의 피를 바치겠습니다. 특히 인간 처녀의 피는 100명분 정도는 드리겠습니다. "
“인간 처녀의 피라.”
스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을 흘렸다. 그 모습이 제라딘에겐 그렇게 섬뜩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방법이 왠지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면 이 제안이 아주 뻔한 거짓말임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만 가봐라. 나중에 네놈을 찾아가지."
‘좋았어!’
하지만 뜻밖에도 이 멍청한 뱀파이어는 제라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라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때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나…….”
스탐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반대편으로 틀었다. 덕분에 제라딘의 시야에는 그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완벽한 무방비상태였다. 제라딘은 한순간 충동에 휩싸였다.
‘놈을 여기서 죽여 버릴까?’
품에는 단검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와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대의 행동이 너무 수상쩍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몸을 틀어버리다니 말이다. 하지만 제라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본능에 맡겨 버렸다.
"멍청한 놈, 죽어라!!"
제라딘이 그렇게 소리치며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스탐을 찔러 들어갔다.
푸욱!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제라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저 빌어먹을 놈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환희에 휩싸여 있던 그의 얼굴이 금세 절망으로 가득 차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웃기지 마!"
휘이익~
덥썩!
어느새 스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제라딘의 목을 물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으으윽!"
제라딘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둥거렸다. 하지만 스탐에게 물린 뒤로는 몸에서 아무런 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제라딘은 자신의 힘이 점점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어느새 몸을 축 늘어뜨렸다. 사인은 출혈과다였다.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한 스탐은 그제서야 그를 내팽개쳤다.
털썩.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어차피 넌 내 눈밖에 났을 때부터 죽은 목숨이었으니깐."
스탐은 시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라딘에게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그는 애초에 제라딘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방금 전처럼 기습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죽일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보여줬는데 미쳤다고 살려 보내겠는가?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지. 네 죄는 나를 만났다는 것. 그것뿐이다."
스탐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놈은 이것을 믿고 뒤돌아서는 자신을 찔렀지만 우습게도 놈의 단검은 자신의 팔과 옆구리사이를 찔렀다.
“지지리 운도 없는 놈이군.”
스탐이 제라딘의 시신을 보며 혀를 찼다. 한번쯤은 맞아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제라딘의 시체는 증거인멸을 위해 화장했다. 그리고 마갑기는 잘게 부수어서 땅에다 묻었다. 이렇게 조치를 취해놓으면 제피스트 왕국에서는 아무리 빨라도 한달이 걸려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일행들에게로 돌아가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스탐은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아직도 입에서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뭐, 전투를 치른 일행들에게도 피 냄새가 날 테니 별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터벅, 터벅, 터벅.
스탐은 한참을 걸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거의 죽을 줄로만 알았던 스탐이 무사히 돌아오자 일행은 기뻐하며 그를 맞이하였다.
"스탐!"
"살아 돌아왔구나."
“이야…, 대단한데?”
그렇게 일행들이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프리건이 스탐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라딘은 어떻게 되었나?"
"죽였다."
무덤덤했지만 확실한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들은 프리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럴 만도 했다. 제라딘을 죽였다는 말은 그의 마갑기도 처치했다는 소리였다. 홀몸으로 최신식 마갑기 한대를 부술 수 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다.
“그렇군. 마갑기와 시체는?”
“파묻었다.”
스탐은 이렇게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혼자서 쓰러뜨리는 것도 말이 안 되는 데 그 커다란 마갑기를 파묻었다니? 프리건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잘 했네. 그렇다면 이것들도 어서 파묻어야겠군."
다행히도 프리건은 스탐의 비상식적인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탐은 잠시 후 곤혹스러워졌다. 의도한건지 안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프리건의 말은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그때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파묻는 일은 제가 할게요.”
“세리아? 당신이?”
“네. 저는 흙의 정령을 다룰 줄 알아요. 비록 하급이지만 이것들을 파묻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말을 마친 세리아가 흙의 정령 노움을 소환했다. 그녀의 말 대로 노움은 나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마갑기와 파일럿의 시체를 파묻었다. 마침내 일을 마치자 세리아가 웃으며 브이 자를 그렸다.
“어때요? 제 솜씨가?”
“잘했어.”
프리건이 손뼉을 치면서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스탐은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까? 방금 전에 인간을 죽이는 전투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느새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 특이한 엘프였다.
‘뭐, 엘프를 만나보는 건 세리아가 처음이긴 하지만…아무튼 세리아 덕분에 살았어.’
“자, 그럼 어서 이 자리를 뜨는 게 좋겠네. 언제 제피스트 왕국 놈들이 우리를 쫓아올지 모르니깐 말이네.‘
“네, 그러죠.”
프리건의 말에 일행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피스트 왕국의 국경선만 넘으면 놈들이 자신들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행은 오늘 마갑기와 싸워 이기는 기적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