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32화 (3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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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륜드라에서의 하루

[K.C. 4318년 7월 19일]

마갑기들과의 치열한 격전이 있은 직후 스탐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무엇보다도 일행들이 마갑기와 파일럿의 시신을 모조리 매장시킨 덕분에 제피스트 왕국에서 추격대가 오는 등의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제피스트 왕국의 국경만 넘으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지만 말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일행들은 드디어 유에센 제국의 수도, 륜드라에 들어섰다.

"이야! 역시 듣던 대로 멋진 곳이야!"

"그러게 말이지."

“참 대단한 곳이야.”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일행들이 저마다 한마디 했다. 그만큼 륜드라의 번화한 시가지는 그들의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단시간 내에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한 유에센 제국은 외국인에게 무척 개방적이며 여러가지 볼거리도 많았다. 덕분에 모험가, 용병, 음유시인, 상인등 각기각층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귀족과 왕족들까지도 한번씩은 들렀다. 이를테면 문화의 중심지인 것이다. 라시아가 자신의 다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프리건. 일단 피곤하니까 어서 쉬도록 하지요.”

"그러도록 하세. 일단은 여관이나 찾아봐야겠군."

프리건의 말에 따라 일행들은 여관을 찾기 위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들의 발걸음은 대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역시 문화의 중심지라는 소리를 듣는 곳답게 가는 곳마다 감탄사가 나왔다. 바닥에는 질 좋은 돌로 포장되어 있었고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건 또 뭐죠?”

세리아가 커다란 동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환하게 번쩍이는 그것은 일견 보기에도 세밀하게 세공처리가 되어 있었다. 크래튼이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동상은 유에센 제국을 건국한 초대왕을 동상화시킨 거예요. 그는 유에센 인들에겐 영웅이나 다름없죠.”

크래튼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스탐이 상념에 잠겼다. 초대왕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캄에덴의 초대왕 캄 크리스토퍼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

캄 크리스토퍼. 뱀파이어라면 한번쯤은 경외심을 품을만한 대상이었다. 4000여 년 전, 헬 게이트를 열어 아벨리오스 대륙의 정세를 완전히 뒤바꾼 인물. 그는 뱀파이어들에게 있어 영웅임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왕의 자리라…….’

스탐은 예전에 보았던 뱀파이어 로드의 왕좌를 떠올렸다. 캄에덴에서 뱀파이어 로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 한 가지. 현 뱀파이어 로드와의 1:1대결인 찬탈전에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찬탈전을 치르려면 서열1위에서 5위까지에 자리매김한 오대패자의 일원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지만 난 반드시 뱀파이어 로드가 될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툭툭.

"스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냐."

스탐은 세리아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음으로서 상념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세리아가 나타나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을 본 세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웃지 마.”

“웃는 것도 죄야?”

“그래.”

스탐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3년 동안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표정관리는 물론이고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죽하면 타 용병들에게 냉혈한으로 통하겠는가. 그런 자신이 이 엘프만 보면 평정심을 잃었다.

‘엘프에 대한 콤플렉스라도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엘프라고는 세리아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니 더 있어봐야 할 문제였다.

“그나저나 이제 륜드라에 도착했으니 세리아양과는 헤어져야 겠군요.”

프리건이 세리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러자 크래튼이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군요.”

그간 세리아에게 정이 많이 든 것 같았다. 스탐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느 정도는 홀가분했다. 세리아는 애초부터 같은 일행이 아니었다. 우연히 만나 이곳, 륜드라까지만 동행하기로 했지 않은가. 엘프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같이 갈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어요.”

“언제 다시 만나요.”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간 세리아가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일행들도 그녀를 따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당연했지만, 평상시에도 잘 만나볼 수 없는 엘프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세리아와 헤어지고나서 얼마나 걸었을까. 일행들은 금세 여관을 찾는데 성공했다.

“간단하게 먹고 자는 곳이라…….”

“네이밍 센스가 장난이 아니군.”

간판을 본 일행들이 저마다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워낙에 굶주렸기 때문에 그들은 허기진 배를 붙잡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여관 종업원이 하는 전형적인 한 마디가 일행들을 맞이했다. 일단 프리건이 일행들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피곤해 보이는데 여기서 하루 묶는 게 어떤가?”

일행들은 망설임 없이 찬성했다.

“물론이죠!”

“당연히 여기서 자고 가야죠. 몸이 부서지겠어요.”

“하루도 부족해요. 그냥 일주일은 거뜬하게 있다가 가는 게 어때요?”

한참 희희낙락해 있는 크래튼의 말에 프리건이 물었다.

“자네 돈 있나?”

“아니오.”

“그럼 닥치고 하루만 묶게.”

“아, 예.”

그렇게 해서 일행은 륜드라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던전에 가기로 했다. 방은 3개를 대여했다. 남녀 각각 한 방씩, 그리고 스탐 혼자 독방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돈은 그가 따로 냈다.

터벅, 터벅.

1인용 독방에 도착한 스탐은 짐을 풀어 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실 뱀파이어의 육체이다 보니 거의 탈진하다시피한 일행과는 달리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단지 생각할 게 많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인간인가, 뱀파이어인가?”

물론 그는 뱀파이어였다. 비록 매직 파우더가 검은 피부를 감추고 있었지만 그는 흉측한 이빨에 인간을 초월하는 강력한 육체를 가진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캄에덴 최연소 배틀러로 손꼽히는 실력자가 되었지만 그는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삶의 목표 자체도 한 인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만약 세현을 찾겠다는 목표가 없었다면 지금쯤 정신적인 혼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났었더라면, 그도 아니면 기억을 잊고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스탐은 인간의 탈을 쓰고 보낸 지난 3년간을 생각해 보았다. 그 짧으면서도 긴 시간동안 그는 수많은 인간을 만나 왔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힘을 부러워했다.

‘내가 당신만큼 강했더라면…….’

동업을 하던 용병들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오히려 스탐은 그들이 더 부러웠다. 아무런 기억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껏 젊음을 누리다가 세월이 흐르면 늙어 죽으면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자신은 환생할 때부터 기억을 지니고 태어났다. 인간이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명의 반의반도 못 채웠다. 목표가 있기에,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휴우~, 바람이나 쐬러 나가봐야겠군.”

한숨을 쉰 스탐은 여관을 나가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직 시간은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낮이었다. 미스릴과 함께 아르티시앙의 또 다른 권능인 이 햇빛 앞에서는 어떤 뱀파이어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스탐은 배틀러였다. 배틀러가 품고 있는 강력한 다크 오러의 기운은 햇빛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스탐은 3년 내내 이 햇빛을 참으며 살아 왔다. 이제는 익숙했다.

저벅, 저벅.

“여긴가?”

얼마나 걸었을까. 발걸음을 멈춘 스탐이 중얼거렸다. 그곳은 바로 륜드라의 국립공원이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대 심리적인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수도의 주민들을 위해 유에센제국의 황제가 친히 명해 지은 곳이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이곳은 일정량의 금액을 지불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유료 공원이었던 것이다. 이 그럴듯한 상술에 수도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을 이용했다. 그렇다고 외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곳도 아닌지라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은 곳이었다.

공원의 입구의 문지기에게 입장료를 주고 공원 안으로 들어온 스탐은 천천히 공원을 거닐며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다. 과연 문화의 중심지라 그런지 최상의 환경이었다.

"정말 아름답군, 아름다워."

스탐이 벤치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꽃밭에는 꽃들이 활짝 펴져 있었고, 풀밭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참 평화로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득함에 잠이라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스탐! 여기서 뭐해?"

그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뜬 스탐은 상대가 누군지 확신하고선 적지 않게 놀랐다.

“세리아.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세리아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스탐의 바로 옆에 앉았다. 스탐은 왠지 세리아가 마음에 들면서도 두려웠다. 그녀만 만나면 기분이 편안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답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약간 스탐이

"후후훗, 그렇게 화내지마. 여기 공기가 너무 좋아서 온 것뿐이야. 널 따라온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던 스탐은, 갑자기 세리아의 얼굴이 너무도 낯익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훗, 낯익긴 뭐가 낯익어. 엘프는 처음 보는 거잖아. 안 그래, 스탐?’

스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눈도 삐었는가보다. 생판 모르는 남인데 낯익었다니? 루시리아도 그런 식으로 상처를 입히고 떠나보냈지 않은가.

"풋…."

"왜 웃니?"

"굳이 이유를 가르쳐줘야 될까?"

"흥. 엉큼하긴…. 그런데 너 참 재미없게 논다? 비싼 돈 주고 들어왔으면서 고작 하는 짓이 벤치에서 앉아서 궁상을 떠는 거니?"

"궁상이라니?"

스탐은 가득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수다스러운 엘프여성이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오자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스탐에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목마를텐데 이거 마실래?

세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스탐에게 내밀어 보았다. 세리아가 내민 것은 사과주스였다. 마침 출출했던 탓에 스탐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입 벌려."

말을 마친 세리아는 곧바로 주스를 스탐의 입구에 들이대 강제로 먹이기 시작했다.

“우으읍.”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스탐은 당장 주스를 빼내었다. 그리곤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윽박질렀다.

"무슨 짓이야?"

"화내지마. 한번 해보고 싶었으니까. 그나저나 너 얼굴이 빨개졌네.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시끄러."

스탐은 퉁명스럽게 한마디하고선 벤치에서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스탐은 어쩐 일에서인지 세리아만 보면 적개심이 들지 않았다. 뱀파이어라면 응당 엘프에게 적개심을 가져야 마땅한데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리아는 그의 뒤에 거머리처럼 따라붙어 그를 귀찮게 했다.

"왜 그래? 삐쳤니?"

"저리가."

"에이, 왜 그래?"

스탐이 뿌리칠수록 세리아는 그를 더욱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예 재미를 들린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호오~, 거기 그림 좋은데?"

스탐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일단의 사내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빛이 사납고 몸이 스탐보다 우람한 덩치들이었다.

"너흰 또 뭐하는 놈들이지?"

스탐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큭, 양아치들이로군.’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약자들의 돈을 삥 뜯으며 폭력을 일삼다가도, 자신보다 강자 앞에선 굽실거리는 전형적인 쓰레기들. 그것이 바로 양아치에 대한 정의였다. 놈들은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누군지를 안다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 이윽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거, 간만에 큰 손님이 오셨네? 보기 드문 엘프에다가 살벌하게 생긴 남자라, 멋진 커플이군. 돈도 많을 것 같아."

금세 놈들의 속내가 들어났다. 스탐은 스트레칭을 하며 그들을 때려눕힐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함부로 설쳐대는 놈들을 손봐줄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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